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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새는 어디로 날아가나

작성자어떤사랑|작성시간10.04.06|조회수68 목록 댓글 0

「老子詩話」3

붕새는 어디로 날아가나




1. 몇천 리나 되는 날개를 가진 새


“북해에 한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한번 노하여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았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명으로 이사를 간다. 남명이란 천지다. 제해는 뜻이 괴이한 사람이다. 제해의 말에 의하면, ‘대붕이 남명으로 날아갈 때는 물결이 삼천리이며 폭풍을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 여섯 달이 되어야 쉰다.’ 안개와 먼지는 생물이 생기를 서로 불어주는 것이다. 천지가 푸른 것은 바로 생기의 색이며, 그것은 원대하고 끝이 없는 지극한 것이다. 대붕이 내려다보는 것은 역시 아마 안개, 먼지 등 생기였던 것이다. 또한 물이 두껍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마당 웅덩이에 술잔의 물을 부으면 겨자씨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 술잔을 띄우면 붙어버릴 것이니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기가 쌓여 두껍지 않으면 대붕도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다. 그러므로 구만리의 바람이 발아래에 있어야만 장차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다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裏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裏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裏, 搏扶搖而上者九萬裏. 去以六月息者也.」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 亦若是則已矣. 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方.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故九萬裏, 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培風, 背負靑天而莫之夭閼者, 而後乃今將圖南.”(『장자』, 「소요유逍遙遊」)


『장자』의 첫머리를 읽을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전율과 함께 아득한 현기증을 느낀다. 이 우화는 한마디로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읽어내는 우주 아날로지를 보여준다. 차라리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크기를 우주에서 구한 시다. 본디 우주라는 술어는 『시자尸子』에 처음 나온다. “사방과 상하를 우宇라 칭하고, 고금왕래를 주宙라고 한다.” 우의 끝은 무극無極하고, 주의 끝은 무궁無窮하다. 장자도 “밖으로는 우주를 볼 수 없고, 안으로는 태초를 알지 못p한다.”고 말한 바 있다. 우주는 너무 광대하기 때문에 사람의 천문관측 능력으로 그 전체를 다 관측할 수 없고, 관측할 수 없는 부분은 추측과 가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관측할 수 있는 우주는 은하·별·성단·성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보다 더 작은 요소로 태양계가 있고 수백만 개의 별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위성·혜성·유성체들로 이루어진 계가 있다. 이 우주는 태고의 어둠에 감싸여 있는 가늠할 길 없는 넓이를 가진 공허의 바다다. 그 바다에 작은 은하계가 자잘한 섬들처럼 흩어져 있다. 천문학자들은 은하의 지름이 대략 10만 광년 정도라고 말한다. 은하수 너머로는 수십억 개에 이르는 또 다른 은하들의 거대 집합체가 있는데, 그 은하와 은하 사이의 거리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멀다.

장자는 이 광대한 우주의 바다 위로 붕이라는 상상의 새를 날게 한다. 이 붕새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우주의 바다에는 해일이 인다. “북해에 한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다. 한번 노하여 날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았다. 이 새는 바다 움직이면 남명으로 이사를 간다. 남명이란 천지다.” 이 광대한 상상의 크기는 곧 내적 초월성에의 의지와 상관이 있다. 장자가「소요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도 세속을 넘어선 내적 자유의 절대성, 그 자유분방한 경지를 사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품은 뜻이 숭고하고 큰 사람이 구할 것은 바로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사는 자의 자유로움이다. 붕새는 몇천 리나 되는 날개를 펼쳐 그 시공의 포박을 넘어선 절대 경지의 우주로 날아간다.


천년千年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鶴이 날은다.


천년千年을 보던 눈이

천년千年을 파다거리던 날개가

또 한번 천애天涯에 맞부딪노나.


산山덩어리 같어야 할 분노忿怒

초목草木도 울려야 할 서름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서니,

보라, 옥빛, 꼭두서니,

누이의 수繡틀을 보듯

세상은 보자.


누이의 어깨 너머

누이의 수繡틀 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은 보자.


울음은 해일海溢

아니면 크나큰 제사祭祀와 같이


춤이야 어느 땐들 골라 못 추랴.

멍멍히 잦은 목을 제 쭉지에 묻을 바에야

춤이야 어는 술참 땐들 골라 못 추랴.


긴 머리 잦은 머리 일렁이는 구름 속을

저, 울음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도 다하지 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 곁을 날은다.

-서정주, 「학鶴1)


장자의 붕새에 비견될 수 있는 새가 우리 시공간에도 난다. 서정주의 천년을 보던 눈과 천년을 파닥거리는 날개로 나는 ‘학’이다. ‘학’은 태초에 하늘과 땅이 처음 나타났을 때의 그 시공을 흐르듯 난다. 그 학을 날게 하는 동력은 “천년 맺힌 시름”이다. 여기서 “천년”이란 단순히 긴 세월이 아니라 영원함을 가리킨다. 그 동력이 천년 동안이나 맺힌 깊은 시름이니 학은 “긴 머리 잦은 머리 일렁이는 구름 속을” 천년 동안이나 지치지 않고 난다. ‘학’은 그 내면에 산덩어리 같은 분노와 초목을 울릴 서름을 가졌지만 물살도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고요하게 난다. ‘학’은 깊은 시름과 큰 슬픔을 지니고 “저승 곁을” 난다. 시인은 그 ‘학’이 어느 땐가 내면의 깊은 시름과 큰 슬픔을 딛고 춤출 때가 올 것이란 기대를 새겨넣는다. ‘학’의 “울음은 해일”이라고 했으니, 그 ‘학’이 아우르는 세계는 광대무변한 세계다. 이 광대무변한 세계를 시인은 돌연 보라, 옥빛, 꼭두서니의 색색으로 수놓인 “누이의 수틀” 속으로 축소한다. 아니 “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이 세상을 바라보자고 청유한다. 미당 초기 시에 나타났던 뱀, 웅계, 부엉이와 같이 몸에 갇혀 그 몸-됨을 괴로워하던 원초적 생명력의 존재들과 비교할 때 이 ‘학’은 초월성과 고고함이 두드러진다. ‘학’은 몸-욕망을 버림으로써 이전투구의 현실을 “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으로] 보”는 화해와 달관의 정신에 도달한다. 장자의 붕새나 미당의 ‘학’은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 현실 저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해탈의 존재들이다.


고향집 장독대에

이제는 다 채울 일 사라져버린 서 말가웃 장독 하나가 있다


흘러내린 바지춤을 스윽 끌어올리듯 무심코 난초 잎을 그려넣은

장독 앞에서 팔만개의 족적을 본다

반죽을 다지고 또 다졌을 팔만개의

발자국소리를 듣는다


누가 한 덩어리 흙 위에

저만한 발자국을 남겨

제 발자국을 똘똘 뭉쳐 독을 짓는단 말인가


천도가 넘은 가마 속에서

발갛게 달아올랐을

발자국이여

뒤꿈치여


단 한번이라도

저 독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면 나는

대시인이 됐을지도 몰라


간장이 익어 나오는 걸 봐

부정不正이라고 못 익히겠어 천벌이라고 못 익히겠어


콧물 훔치듯 난초 잎을 올려 친

팔만대장,족경이여 

-유홍준, 「팔만대장족경」2)


왜 해탈이 필요하겠는가. 몸-됨으로 산다는 것은 고해 속에 떠도는 것이다. 고향집 장독대의 “말가웃 장독”에서 “팔만대장,족경”을 보는 시인의 눈은 범속한 것 속에 무심코 깃든 것에서 해탈의 흔적을 찾아낸다. 흙 반죽덩어리가 장독으로, 장독이 다시 족경으로 변신하는 이 연금술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다. 시인은 장독에서 한 덩이의 흙 반죽이 장독으로 거듭나기까지 “팔만개의 족적”을 보고, “반죽을 다지고 또 다졌을 팔만개의 / 발자국소리를 듣는다”. 어디 그뿐이랴. 그 발자국과 뒤꿈치들은 “천도가 넘는 가마” 속에서 고열을 너끈히 견뎌낸다. 그 장독에서 새까만 간장도 익혀 나오니, 부정도, 천벌도 그 안에서는 못 익힐 게 없다. 장독은 그냥 장독이 아니라 그 몸에 새긴 팔만개의 발자국 경서經書를 두르고 있는 족경이다. 그 족경에 무심하게 그려넣은 난초는 천년이 흘러도 시들지 않을 난초다. 천년이 흘러도 시들지 않는다는 것은 그 난초가 내면에 영원성을 갖고 우주적 호흡을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난초는 한 번 날갯짓 할 때마다 우주의 바다에 해일이 이는 붕새나, 천년 맺힌 시름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저승 곁 하늘을 유유히 나는 학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는 기표다.

붕새와 ‘학’이 날고, 천년이 지나도록 청초할 난초들이 있는 이 우주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 우주의 궁극적인 운명은 무엇인가? 장자는 「천지편天地篇」에서 “태초에 무無만이 있고 유有도 없었으며 명名도 없었다太初有無, 無有無名.”고 말한다. 태초의 시공을 가득 채운 것은 그 무의 고요와 공허다. 시작[始]은 시작 없음[無始]에서, 그 무시는 다시 무무시無無始에서 나온다. 있음[有]은 없음[無]에서, 그 무는 다시 무무無無에서, 무무는 무무무無無無에서 나온다. 그 태초의 없음에서 나온 것이 도道다. 태초의 없음에 선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있음이 시작되는 그 시원이 바로 도다. “천하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노자, 『도덕경』 제40장) 도는 하나, 즉 일자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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