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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바둑 계 디자이너 + 험난함이 내삶의 거름이되어

작성자고추잠자리|작성시간09.12.14|조회수429 목록 댓글 3

 

기획기사
세계에서 유일한 바둑 디자이너 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CLUB A7 홍시범 씨의 첫 번째 이야기
2009-12-13 오후 2:02:51 입력


S#1. 나는 올해 세 살입니다.


소년은 3교시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 가에 빽빽이 서있는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 한 시간 동안 숨어 있었고, 점심시간이 되면 외도동 바닷가로 나가 수평선을 바라보곤 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소년에게 점심 도시락은 쉽게 풀 수 없는 숙제와도 같았다.
보육원에서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이라면 그런 고아의 사정을 학교에서 충분히 배려해주었겠지. 허나 그때는 왜 그리 강퍅했을까?
선생님이 도시락 검사를 한 뒤 싸오지 않은 학생은 친구들이 도시락을 다 먹을 동안 교단 앞에 세워놓는 벌을 주었다.

소년은 그때 인생을 포기했다.
열세 살에 책을 덮었고 희망과 사랑을 덮었다.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되는대로 운명에 주어진 시간만 아무렇게나 채우고 말 생각이었다.

소년은 그때부터 서울로 올라와 이 사회 밑바닥에 깔린 모든 일들을 두루 섭렵했다.
때밀이, 석유배달, 얼음배달, 가게 점원 등을 거치고 성북구 미아리 달동네에 위치한 스웨터 편직공장에 들어간다.
말이 공장이지 다세대 주택 지하에 기계 몇 대 들여놓고 하청 물량을 짜는 곳이었다.

소년은 그 편물기계(요코) 밑에서 새우잠을 자며 청년이 되었고, 건너편 편물기 그늘에서 자던 처녀와 마음이 통해 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런 환경에서 두 아이를 낳고 중년에 접어드는데 그의 삶을 지탱해준 지하공장과 편물기계로부터 벗어나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언 마흔 아홉 살이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세 살입니다."


▲ 일산의 한 식당에서…

바둑행사만 전문으로 기획 연출하는 CLUB A7의 홍시범 씨.
그는 정말 어린애처럼 순진무구하게 필자를 쳐다봤다.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바둑대회에 한 번이라도 참석해 본 기우들이라면 홍시범 씨와 마주쳤을 것이다.

그는 올해 전국대회 70여개의 진행을 맡아 치러낸 바둑대회 디스플레이어다.
홍보 현수막과 자리 배치, 바둑용품 준비와 대진표 작성, 행사진행에 이르기까지 바둑대회의 시작과 끝까지 책임지는 회사는 아마 홍시범 씨의 CLUB A7이 세계에서 유일할 것이다.


▲ 홍맑은샘이 일본에서 따낸 아마명인 트로피.

그가 바둑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들 홍맑은샘 때문이었다.
홍맑은샘(27)은 지난 12월 1일 자로 아마7단의 허물을 벗고 일본 관서기원 프로 초단이 되어 화제가 된 인물.
아버지 홍시범 씨가 겪었던 것처럼 홍맑은샘의 행로도 파란만장했다.

뛰어난 기재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프로 입단을 하지 못하고 마음고생을 하다 2004년 일본에 건너가 2007년 아마명인, 2008년 아마본인방에 오르며 일본 아마바둑계의 강자로 떠올랐다.
당초 일본기원의 프로를 지망했지만 일본 체류기간 연수(年數) 부족 등의 제한으로 입단대회 출전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바둑교실을 운영하며 기회를 모색했던 것.

바둑대회에 감초처럼 등장하면서도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하던 홍시범 씨가 개운한 얼굴로 타이젬 포커스 렌즈 앞에 선 이유가 어쩌면 홍맑은샘의 프로 입단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추리해본다.


▲ 응암동에서…


S#2.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응암동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찾아갔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 막다른 곳 2층이었다.
조금도 꾸며지지 않은 생활공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비좁지만 일본에 있는 아들의 바둑 공부방, 딸 홍맑은비의 만화 공부방이 독특했다.

"우리 네 가족의 학력은 전부 국졸입니다. 저도 아내도 맑은샘과 맑은비 모두."

미처 몰랐던 이야기라 말문이 턱 막힌다.

"생활도 어려웠지만 아이들이 바둑과 만화를 공부하는데 올인하고 싶어 하길래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참 나쁜 아빠가 돼버렸습니다."

"아들에게 어떤 동기로 바둑을 가르쳤나요?"

"79년 무렵 우연히 월간 바둑 책을 보는데 프로기사들이 괜찮아 보이더라구요. 바둑을 시키면 돈이 들지 않을 것 같아서 결심했습니다."

망설임 없이 '저비용'을 이유로 대면서 혀를 찬다.

"세살 때부터 오청원 기보를 무조건 외우도록 했지요. 다섯 살 때 서울 어린이 바둑대회에 나가 2조에서 준우승했는데 상금 5만원을 받아왔습니다."

당시 집 월세가 12만원이었으므로 적은 돈이 아니었다.

"사실 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때부터 저는 맑은샘을 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아이지만 바둑을 통해 상금을 획득하잖아요. 아빠처럼 도시락을 못 싸 교실을 빠져나와야 했던 가난을 물려주고 싶진 않았습니다."


맑은샘이 3학년 때 부산에서 이붕 배 바둑대회가 열렸다.
상금이 무려 50만원인 최대의 바둑대회였다. 그러나 부산까지 갈 차비가 걱정이었다.
이웃으로부터 간신히 차비를 빌렸지만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 용산에서 부산까지 11시간 걸리는 야간열차를 타고 1박을 해결했다.

어린 아들의 머리를 무릎에 괴여주며 밤새 그는 속으로 울었다고 했다.
그런 아빠의 절실함을 알았던지 아들은 연전연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라 안달훈을 꺾고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아빠, 상금 세어 보세요."

맑은샘은 우승상금을 받자마자 봉투 입구에 입술을 대고 훅 불면서 상금의 부피를 확인했다.
아빠는 밖으로 나가 공중전화를 이용해 아내에게 소식을 전했다.

"우승했어."

동전이 아까워 그 한 마디만 전하고 끊었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너무 불편해서 지겨운 시절이었다.


▲ 홍시범 씨의 딸(맑은비) 작업실.

"맑은비도 재능이 많은 아인데 제대로 뒤를 받쳐주지 못해 늘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림을 그리겠다는데 아빠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연필을 깎아주는 일밖에 없더라구요."

그는 딸의 그림 수업을 위해 밤마다 연필을 정성스럽게 깎아주었다.
그렇게 깎은 연필이 600자루 쯤 된다고 했다.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 아들을 무릎에 재우고 딸의 연필을 깎으면서 흘렸을 가난한 아빠의 눈물을 과연 그 누가 헤아려줄까?


▲ 홍시범 씨가 딸을 위해 직접 손수 깎은 연필들.


S#3. 꿈의 공장 CLUB A7

응암동 충암고 건너편 도로 변 빌딩의 지하에 CLUB A7 사무실이 있다.
바둑대회에 필요한 모든 용품과 홍맑은샘의 트로피와 바둑 책이 가득 꽂혀있었다.

"단순한 사무실이 아니군요?"

"네, 맑은샘의 서재이자 언제든지 바둑행사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어찌 보면 기원이고 어찌 보면 창고 같기도 한 곳. 한 쪽에 특별대국 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자리는 임동균 사범의 자리입니다. CLUB A7은 아마추어 7단들의 모임에서부터 비롯된 이름이죠. 맑은샘이 아마 7단을 달고 고생할 때 임동균 사범을 비롯한 수많은 아마 사범님들이 참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제가 거리 바둑축제를 비롯해 행사를 기획하면 언제든지 그냥 달려와 기꺼이 다면지도기를 맡아주신 분이죠. 그래서 존경의 표현으로 마련했습니다."

바둑계 전면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바둑을 우러러보고 몸을 던져 바둑문화를 보급하는 홍시범 씨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을 듯싶다.
창고에는 바둑판과 테이블보가 가득 쌓여 있었다.


"3년 전 스웨터 공장을 접으면서 미친 듯이 테이블보를 짰습니다. 언젠가는 커다란 바둑대회를 위해 쓰일 것을 굳게 믿었지요."

CLUB A7을 만든 지 첫 해에 3개 대회를 맡았고 이듬해에 30개, 다음 해에 50개, 그리고 올해 70개 대회를 진행했다.
내년에는 100개 대회 진행이 목표라고 한다.


▲ 사무실 전경.

"바둑대회를 디스플레이하는 회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한 해에 70개 대회를 맡는다니 돈 좀 벌겠구나 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아직까진 바둑대회로 돈을 벌긴 힘든 구조입니다. 대부분 주최 측에서 예산의 빠듯함을 호소하며 부탁해오는 편이죠. 저는 예산을 따지지 않고 의뢰가 오면 무조건 출동합니다. 그냥 예산에 맞춰서 진행하는 거죠. 당장 적자를 보더라도 완벽하게 대회를 준비하다 보면 언젠가 그 분들이 정말 좋은 환경에서 다시 불러 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노고를 아껴 '바둑 디자이너'라고 칭한다.
그러나 디자인으로 불러주기에 아직까지 각종 바둑대회의 환경은 열악하다.
그러므로 대회 현장에서 그와 CLUB A7 멤버들은 몸으로 때우는 일꾼으로 보인다.
언젠가는 그들이 존중받고 바둑 인으로 대접받는 날이 올 것을 믿는다.

(P.S) 바둑 디자이너 홍시범 스토리는 내일 2화까지 이어집니다.

TYGEM / 김종서 작가

 

 

 

 

 

 

세계에서 유일한 바둑 디자이너 ②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CLUB A7 홍시범 씨의 두 번째 이야기
2009-12-14 오후 1:54:19 입력 / 2009-12-14 오후 4:11:15 수정

S#1. 술잔에 흘린 눈물

KTX 시발점이자 종착역인 행신 역 앞 갈매기살 구이 집.
맛깔스럽게 익어가는 고기와 따끈한 밥을 앞에 두고 그는 좀처럼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그냥 술잔을 채우고 비우고만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독한 놈인데 이상하게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니 감정이 자꾸 북받치네요."

무려 네 시간째 우리는 연탄 화덕 석쇠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우리의 대화가 너무 진지했던 까닭에 식당 주인이 계속 음료수와 안주거리를 서비스하면서 장시간 인터뷰를 권장해주었다.
홍시범 씨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듣고 싶었다.

"가난한 것은 비극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난을 견디지 못하는 게 비극인 거죠. 홍 감독님은 충분히 고난을 견뎌냈고 아들을 바둑의 장인으로 키워냈으며 그에 만족하지 않고 바둑대회 디스플레이어로 자신의 꿈을 이뤄가고 있지 않습니까? 바둑계에서 자신의 고난은 악착같이 참아내고 타인의 불편을 돌보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고맙습니다. 그리 표현해주시니 한결 마음이 가볍네요."


그가 드라마틱한 성장기의 비밀에 관해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제주도 함덕. 소년 홍시범의 부친은 함덕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였다.
할아버지가 그 동네에서 가장 부자였다고 했다.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원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홍시범을 낳았으니 출생 환경은 남부럽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산후통을 앓으면서 아편을 복용했고 아버지도 함께 중독이 돼 조금씩 인간의 생기를 잃어갔다.
뭐가 잘못됐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부모들이 집을 나갔고 그 후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홍시범의 나이 일곱 살 때였다.

소년은 여동생의 손을 잡고 백리를 걸어 부모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제주시 여순경의 눈에 뜨여 세화리 홍익보육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보육원에서 자라며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로는 최고 인텔리 계층이었던 의사 아버지의 유전자를 제대로 물려받아 그런지 공부를 아주 잘했다.

1등을 하고 백 점을 맞은 정도가 아니라 초등학교 6년 전 과목을 통틀어 한 두 문제를 틀렸을 정도였다. 보육원에서 특별히 읽을 책이 없어 교과서를 달달 외웠으니 시험지에 답을 쓰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워낙 우등생인지라 보육원 선배들도 홍시범을 괴롭히지 않았다. 다만 지나치게 영리한 소년에게 외로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큰 고민이었다.

"그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요. 꿈이고 뭐고 하루하루 견디는 게 힘들었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지옥 같은 소년기를 풀어놓으면서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들을 이야기할 때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 했다.
잡초처럼 자란 그는 역시 자신에게는 한없이 모질면서 가족에게는 약한 사나이였다.


S#2. 내 청춘과 바꾼 아들, 홍맑은샘

아들은 맑은 샘이요, 딸은 맑은 비로 이름 지었다. 성이 넓을 홍(洪)이므로 넓고 맑은 샘에서 물이 솟아 시내로 흐르고 강이 되어 바다에 닿은 뒤 다시 하늘로 증발해 비로 내리는 대자연의 순환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름처럼 아이들은 맑고 밝게 잘 자라주었다.
경제적인 형편만 괜찮았더라면 맑은샘과 맑은비 모두 마음 고생시키지 않고 원하는 공부를 여유롭게 시켰을 텐데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야하는 가난한 아빠는 비장의 가정교육을 창안해냈다.

맑은샘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되 딱 10 곡만 연주할 수 있도록 과외를 끊었으며, 맑은비에게는 보고 싶은 만화를 사주고 연필을 깎아준 거였다.




바둑 수업도 독특했다. 또래의 경쟁자들처럼 학원이나 도장을 보낼 수 없었기에 3연성과 화점-외목-날일 자 걸침으로 이어지는 홍맑은샘 전용 포석을 집중적으로 갈고 닦았다.

"맑은샘이 바둑 두기 싫어하면 무작정 손목을 잡고 정릉에서 구리까지 걷고 또 걸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어요. 우리에게는 그저 악착같은 승부 혼과 강인한 체력이 밑천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PC통신 시절 플레이361에서 프로.아마 연승대항전이 벌어졌을 때 맑은샘은 특유의 포석으로 가공할 기록을 남겼다.
당시 프로 1장으로 출전한 안관욱 사범이 아마 대표들을 1장부터 5장까지 내리 꺾고 기염을 토했다.
맑은샘은 아마 6장으로 나서 안 사범의 연승행진을 막았고 이후 7연승으로 프로들을 연파해버렸다.

2002년 프로 아마 대항전에서 맑은샘은 당시 세계최강인 이창호를 상대로 19수 째 암수를 구사해 완벽하게 판을 밀어버렸다.
복기를 하면서 이창호 국수는 19수를 지목하며 물었다.

"여기서는 어떻게 받아야 하니?"

당대 최고수가 새까만 후배에게 암수의 대응 법을 진지하게 물었다.
역시 이창호는 그릇이 크고 진솔한 위인임을 알 수 있는 대목.


그렇게 아마바둑계의 대표적인 승부사로 우뚝 선 맑은샘은 자그마치 27회 우승 기록을 세웠다.
2002년 맑은샘은 공식상금으로 3,750만원을 획득했다.
당시 프로기사 상금순위 랭킹 10위보다 더 많은 상금을 벌어들인 것이다.

그때부터 맑은샘의 입지가 애매해졌다.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다보니 빈번하게 대회에 출전하기가 민망해졌다.
프로도 아니고 아마추어라 하기에도 좀 애매한 존재. 이른바 박쥐가 되어버린 것이다.


▲ 홍시범 씨의 응암동 사무실에 전시된 홍맑은샘의 트로피.

이런 저런 이유로 맑은샘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장의 사범으로 진로를 개척했다.
홍맑은샘 도장은 문을 연지 몇 년이 되지 않아 일본에서 가장 바둑을 잘 가르치는 곳으로 정평이 났고 마침내 올해 일본기원 입단시험을 치르는 참가자들 중 거의 절반을 배출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 올 3월 유창혁 도장과 교류전을 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홍맑은샘. 제자들의 바둑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실전적 교육과 가족애가 홍 도장의 노하우였다.
공부를 하다가 피자를 시켜 같이 먹기도 하고 버스를 타고 몇 정류장 나갔다가 내려서 도장까지 다섯 시간 넘게 걸어오는 극기 훈련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런 방식은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어 학부형들의 반응이 아주 좋다고 했다.

"아버지 몇 년 기다려 보세요. 일본에서 최고수가 나올 겁니다."

승부사 홍맑은샘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과 승부를 하고 있다. 일본이면 어떠랴?
기타니와 세고에 선생의 지도를 받은 한국의 프로기사들이 결국 세계를 제패했듯이 한국인 사부를 둔 일본의 걸출한 기사가 바둑 사를 다시 써도 나쁘지 않으리라.


▲ 홍맑은샘의 결혼식장은 아마와 프로의 구분 없이 바둑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인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조한승, 강동윤을 비롯해 타이젬 인물포커스에 소개된 박성균, 박창규 씨 등도 모두 참석했다. 청아모도 당연히 자리를 함께했다.

S#3. 다시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

"어떻게 보면 맑은샘이는 아들이지만 저에게 스승이고 선배입니다. 내 청춘을 아들과 바꿨다고 표현했지만 지금 제가 바둑대회 진행을 업으로 삼으면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고 있잖습니까? 30여 년 동안 지하공장에서 단순반복 작업으로 세월을 보냈던 홍시범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게 아들 덕분이거든요. 그리고 새롭게 출발한 지 3년 됐기에 제 나이를 세 살이라 말씀드린 겁니다. 아직 어리니까 부단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바둑대회를 열심히 디자인할 생각입니다."

홍시범 씨가 강조하는 CLUB A7 정신은 간단명료하다.

'전쟁이 터져도 우리가 준비하는 바둑대회는 흔들림 없이 진행될 것이다.'

바둑대회 현장에서 홍시범 씨를 관찰해 본 분들은 아시리라.
그는 바둑대회 자체를 한 판의 승부로 생각하는 또 다른 형태의 프로라는 것을.


▲ 2007년 홍시범 씨가 맡아서 진행했던 '하이서울페스티벌' 전경. 당시에는 서울시청앞 축제를 기대하며 청계천 세운교에서 행사를 열었다.


▲ 올 여름 청풍명월배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홍시범 씨.

"앞으로 어떤 대회를 연출해보고 싶으세요?"

"청계천 전체를 따라 바둑판을 도열시켜놓고 세계바둑대회를 진행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제 고향인 제주도 보육원을 찾아가 정기적으로 바둑을 가르쳐주고 싶구요. 비록 저를 세상에 버린 고향이지만 함덕해수욕장에 여름바둑캠프를 열어보고 싶습니다. 고향과 부모님들께 홍시범이 바둑과 함께 다시 돌아왔노라 보여드리고 싶은 치기에서 비롯된 소망입니다만......그렇게라도 해야 가슴이 좀 후련해질 것 같습니다."

그는 아이디어가 전류처럼 흐르고 추진력이 강한 사람.
아마 멀지 않아 그런 꿈들은 틀림없이 현실로 상영될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바둑디자이너 ① 바로가기


- 타이젬 인물포커스 보너스
홍시범 씨가 타이젬 회원님들의 성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일본 유명기사 8인의 휘호가 새겨진 부채입니다.


어제 1편 기사를 읽고 격려 메시지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 중에 필자가 한 분을 선정했습니다.

dreamto 3급 : 무지개는 스스로의 영롱함보다 배면의 어둠으로 인해 더욱 돋보인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있기엔 그늘진 데서 묵묵히 제몫을 하는 희생과 헌신이 있다. 능력을 펼치게 해준 바탕을 기억하길.

이분께 8인 부채와 정회원 권을 보내드리겠습니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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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바둑소년 | 작성시간 09.12.14 안그래도 올려놓을려고 했는데... 저의 먹통컴퓨터로는 무리네요^^ 유사범님 감사합니다^^ㅋ 2편도 부탁드려요!!!ㅋ 타이젬 댓글보니, 많은 응원의 글을 남겨주시고 특히 임동균 사범님께서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댓글 달아 주셨습니다! 컴퓨터를 고치던지 버리던지 해야할까봐요.ㅠㅠㅠ 마음놓고 소식도 못올려드리니...
  • 작성자바사랑 | 작성시간 09.12.14 오랫만에 들어왔는데 감동의 글 보았습니다.대회장에서 뵈면 늘 주어진일에 최선을 다하시는모습 참 좋아보였는데 정말 멋지십니다. 존경합니다.바둑계 디자이너 Mr Hong 화이팅입니다!^.^ 이글 가져가도 되겠지요? 울 바둑협회에 올려놀을까 합니다.
  • 작성자아름다운오후 | 작성시간 09.12.15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 항상 감동입니다..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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