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델프트(Delft)도 운하도시라 암스텔담의 축소판이다
1. 네덜란드 한국대사배
2007년 9월 7일. 델프트에서 열린 한국대사배에 나는 프로사범 안영길, 이강욱, 아마 사범 홍슬기, 강경낭을 대동하고 갔다. 전 날 파리를 떠나 프랑스 북부 고도(古都) 아라스(Arras)에서 자고 네덜란드로 갔다. 도중에 배가 지나가서 다리를 분리시키는데 우리차가 교각 가운데에 달랑 올려져 있었던 희안한 경험을 한다. 그날 델프트에 도착하여 밤에 영길, 슬기, 강욱이는 레이든 하리 집으로 가서 자고 나와 경낭이는 바스네 집으로 갔다.
바스(Bas)는 20대 후반으로 델프트 공과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는데 이번 한국대사배 대회장을 맡았다. 자기 여자친구 채서린과 함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서양에선 학생집이 제일 가난하다고 보면 된다.
바스네 집엔 이미 네덜란드와 벨기에 각지에서 온 젊은 바둑인들이 몇 명이 묵고 있다. 밤 늦게까지 바둑을 두는데 예쁜 경낭이가 바둑까지 잘 두니까 인기가 좋다. 이날 밤도 나만 침대에서 자고 다른 사람들은 다 응접실에서 슬리핑백에서 잤다.
경낭이는 다른 방에서 고무매트에서 잤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경낭이가 '교수님, 저 한잠도 못 잤어요. 고무 바닥이 뒤척일때마다 반대쪽이 튀어나와 밤새 뒹굴었어요" 한다. 나는 "그것도 자는 요령이 있어야지 너 같은 촌놈은 원래 그렇게 고생하는 거다"라고 했지만 나도 거기에선 잘 자신이 없다. 경낭이는 캐서린과 친해져서 서로 편지를 주고 받다가 그 인연으로 나중에 캐서린이 한국에 오고 경랑이가 네덜란드에 가게 된다.
다음날 아침 델프트 대회장에 도착하니까 익숙한 얼굴의 네덜란드 바둑인들이 우리를 반긴다. 아는 사람이 많으면 새로운 곳에 가도 어색하지가 않다. 대회장에 바(Bar)가 하나 있는데 우리 일행 5명만 공짜로 아무거나 마실 수 있다.
내가 우리 일행에게 "공짜라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더니 제일 어린 경랑이가 "교수님, 저도 그쯤은 알고 있어요" 한다. 개회식에 최종무대사가 엄주천영사와 같이 왔다. 최대사의 개회사 다음에 내 인사말이 있었고 뒤이어 내가 사범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나는 최대사가 아마 3단인걸 알고 즉석에서 네덜란드 바둑협회장과 대국을 제안했다. 그도 역시 아마 3단. 대국과 동시에 유럽전역에 인터넷 중계가 준비되었다. 해설은 나에게 해달라고 한다.
돌을 가린 결과 최대사의 흑번이다. 유럽에선 'Korean style'하면 '싸움바둑'을 의미한다. 내가 "누가 한국 사람이 아니랠까봐 대사가 계속 싸움을 건다" "이 수는 전형적인 한국스타일 이다" 식의 해설을 할 때마다 사방에서 웃음 소리가 들린다. 최대사 바둑은 행마엔 문제가 있으나 힘이 좋아 결국 백대마를 때려잡고 승리했다. 최대사가 진짜 한국스타일을 보여 주었다.
▲ 최종무대사의 개회사
▲ 내가 무대에서 우리 일행을 한명씩 소개하고 있다
▲ 최대사와 바둑회장의 대국 중계 필자의 해설
81명이 참가한 한국대사배가 시작되자 우리는 델프트 관광을 나갔다. 먼저 풍차에 갔더니 아직 문을 안 열었다. 시내를 걷는데 무슨 축제가 있는지 사람들이 가득하다. 궁전과 관광지가 다 공짜다.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라 시내를 걸어서도 충분히 돌아 볼 수 있다. 델프트에는 세계적인 공과대학이 있고 ‘델프트 웨어’라고 불리는 푸른 도자기가 유명하다. '델프트 칼러'하면 서양인이면 누구나 아는 푸른색 중 동양청자 같은 색이다.
▲ 델프트웨어(Delft ware)
델프트는 덴하그와 로테르담 사이에 있다. 운하며 도시 생김새 때문에 델프트를 전형적인 네덜란드 마을이라고 한다. 이 곳은 ‘진주 귀고리 소녀’를 그린 화가 베르미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고향이기도 하다. 베르미어의 그림에는 델프트 거리가 자주 배경으로 나온다. 또 델프트는 네덜란드를 세운 윌리엄 오렌지공(William I, Prince of Orange 1533 – 1584)이 암살당한 곳이기도 하다. 윌리엄이 스페인 왕에게 봉사하다가 개신교 반군의 지도자가 되자 스페인왕 필리페 2세는 그를 역적으로 지명하고 그의 목에 25,000 크라운의 상금을 걸었다.
프랑스 군인 제라드(Balthasar Gérard)는 윌리엄이 옛 군주와 캐토릭을 배반한 것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윌리엄의 델프트 관저에 찾아가 그를 권총으로 암살한다. 범인은 스페인으로 도망가다가 중간에 붙잡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사형에 처해진다. 오렌지공 윌리엄이 이곳 신교회(New church)에 묻혔다고 해서 찾아갔다. 교회는 시내 중심지에 있다. 들어가니까 윌리엄공의 일생이 소개 되어 있고 교회제단 앞에 있는 무덤에는 방문객들이 줄지어 있다. 그 교회 구내매점에서 나는 유명한 델프트웨어 타일 등 두어 가지를 샀다.
▲ 윌리엄 오렌지 공 암살 장면
우리가 교회에 있는데 유럽의 유명한 바둑필자 페터(Peter Dijkema 2단)가 찾아 왔다. 대회장으로 우리를 취재하러 갔다가 우리가 관광 나간 걸 알고 이 교회엔 꼭 오리라고 생각하고 왔다고 한다. 그는 미국 이저널 (American Go E-Journal)의 유럽특파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의 설명으로 우리는 델프트 관광을 더 충실하게 할 수 있었다. 페터는 바둑얘기면 무엇이던 즐긴다. 점심을 우리가 중국집에 초대했는데 식사 중 메모도 자주 하고 얘기가 안 끝나니까 저녁에 자기 집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대회기간 중 미국인터넷 바둑저널에 페터가 보낸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렸다.
Peter Dijkema, Dutch baduk writer (American Go E-Journal Volume 8, #66: September 17, 2007)
Professor Hahn Sang-Dae 6d led a strong Korean delegation to the event; Hahn developed the idea with the Korean Amateur Baduk Association (KABA) to use some existing Ambassador's Cup tournaments in Europe as qualification venues for the Korean Prime Minister Cup. Hahn teaches at the Faculty of Culture and Arts of Myongji University, is on the faculty of Baduk Science and has visited Europe many times. He and his group toured the historic city of Delft – which includes important monuments, museums and the nearby Hague – while the Dutch battled on the boards. Among the group was An Young-gil 8P and Hong Seul-ki 7d, both of whom gave public commentaries on top-board games, which were broadcast on KGS and recorded for EuroGoTV. The only upset in the first round was previous KAC winner Geert Groenen 6d's loss on time.
우리는 오후에 페터 집으로 향했다. 운전은 영길이가 하고 지도는 내가 읽었다. 운전이 아직 초보였던 영길이가 "다음에 오른쪽으로 꺾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지키지 못해 길을 지나치면서 한 시간쯤 헤맸다.
이에 뒷자리에서 불평이 나오자 영길이가 "너희들 나 때문에 네덜란드를 더 많이 구경하니까 감사해라" 라며 뻔뻔한 모습을 보인다. 강욱이와 슬기는 영길이보다 두살씩 아래다. 서로 말로 치고 받고 하는 와중에서도 차 안에는 웃음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그만큼 서로 친해서 그렇다. 차창 밖으로는 아름다운 네덜란드 마을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시간을 한참 지나 페터 집에 도착했다. 나이가 60대 같은데 식구가 없이 혼자 산다. 살림을 보니까 이혼한 사람 같아 물어보지는 안했다. 저녁식사 후 우리 숙소가 예약이 안 된 것을 알자 페터가 다 자기집에서 자자고 한다.
내가 "방 둘, 1인용 침대 둘뿐인데 6명이 어떻게?" 하니까 해결책이 있다고 한다. 나만 침대에서 자게 하고 나머지 젊은 사람들은 창고에서 메트리스를 가져나와 응접실에 한명, 부억에 한명, 복도에 한명, 창고에 한명식으로 잠자리를 마련해 준다. 너무 고맙다. 그날밤 우리는 그집의 빵, 포도주, 치즈, 과일 등 있는 음식은 다 거덜을 내고 나왔다. 페터는 언젠가 한국에 오면 우리가 잘 대접해 주어야 할 사람이다.
대회 둘쨋날 우리는 덴하그에 갔다. 차로 20분만에 도착했다. 사범들에게 덴하그를 구경시켜 주는게 주목적이고 내 목적은 따로 있다. 그동안 벼르기만 하고 못 가본 마우리츠하우스(mauritshuis)에 가는 거다. 베르미어(Johannes Vermeer 1632 - 1675)가 그린 '진주 귀고리 소녀'를 보려고 하니까 델프트미술관에 있는 것은 복사판이고 마우리츠하우스 미술관에 진품이 있다고 한다. 이 미술관에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이 있다. 그는 자화상을 일생 51점을 그렸다. ‘진주 귀고리 소녀’ 앞에 역시 사람들이 많이 있다.
▲ 진주 귀고리 소녀(1665) 베르미어 그림엔 진정한 중세 냄새가 난다.
그 그림 앞에 40세쯤 보이는 일본 여자가 그림을 보고 또 보고 있었는데 우리가 한 시간쯤 미술관을 돌고 그 자리에 오니까 아직도 그녀가 그 곳에 있다. 상당히 세련돼 보이는데 이 그림과 무슨 사연이 있을까?
'진주 귀고리 소녀’는 영화와 책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유명하다. 베르미어가 자기집에 일하던 17세의 소녀를 그린 거다. 터키식 터번을 쓰고 약간 입을 벌리고 뒤돌아 보는 모습이 긴장감이 없어 그런지 남성의 본능을 건드리는 요소가 숨어 있다.
거기에 커다란 진주 귀고리가 그림에 액센트를 절묘하게 주고 있다. 이 그림을 다시 손질을 하여 고쳤는데 인터넷으로 내가 여러번 비교해 봤는데 고치기 전 보다 좀 못해진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럴까? 미술관을 나와 점심은 터키집에서 케밥(Kebab)을 먹었다.
우리 암산으로도 30유로가 넘는데 터키 청년이 "18유로 80센트"라고 한다. 내가 "계산이 맞느냐?"고 하니까 웃으면서 "맞다”고 한다. 우리는 그 돈만 내서 수지 맞았지만 식당을 나와서도 무언지 기분이 찜찜하다. 그 친구가 그렇게 장사해서 생존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 네덜란드 화가 작품만 모은 마우리츠하우스 미술관
▲ 네덜란드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 건물
▲ 강변 구도시에 위치한 옛 국회의사당 덴하그 신도시
우리가 대회장으로 돌아오니까 얀센(Frank Janssen)이 우승했다. 그는 바둑강자이면서 직업이 유럽바둑문화센터의 매니저다.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네는 나에게 얀센은 한국에서 만나자”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결승국을 안영길 사범 해설과 홍슬기 사범의 도움으로 진행했다.
참가자들이 진지하게 듣고 질문도 간혹 한다. 질문에 대한 답으로 참고도가 대형바둑판에 전개될 적마다 고개를 끄덕인다. 특히 아마사범인 슬기가 변화도를 척척 늘어놓자 감탄을 한다.
2003년 유럽챔피언에 오른 홍슬기는 연구생 출신이다. 당시는 베를린에서 사범으로 있다가 현재는 필리핀에 있다. 슬기 역시 내 제자이며 여자 연구생 출신 TV 진행자 이승현과 결혼했다. 안영길은 호주에서 영주권도 받고 국가코치로 자리를 잡았고 이강욱은 2004년 세계대회 우승을 한 후 프로가 되었다. 지금은 월남 호치민에서 사범으로 있다. 강경낭은 여자 연구생 1조 출신이다. 경랑이는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 런던의 사범으로 있다.
이 중에는 호주의 영길이를 빼곤 영주권을 가진자가 없어 불원간 그 나라를 떠나야 한다. 앞으로 바둑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최근 스페인의 오은근 사범이 5년 거주권을 얻었다. 영주권의 전초과정이라 너무 잘 되었다. 호주의 임미진도 호주시민권자 한국계 청년과 결혼했다. 신랑이 회계사로 아주 좋은 청년이라 미진이가 잘 되었다. 미진이 시아버지는 교회 목사인데 며느리가 바둑 고수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영주권을 얻는 방법 중 가장 빠르고 쉬운길이 현지 시민권자와 결혼이다.
몇 달 후 바스와 캐서린이 한국에 왔다. 경랑이가 명지대 바둑학과 학생이라 학교를 다니고 있고 영어도 아직 부족해서 내가 이 커플을 내내 데리고 다녔다. 한국을 몹시 좋아하면서 이들이 떠날 때 아쉬워 한다. 이후부터 캐서린은 친한파가 되어 네덜란드 흐로닝엔(Groningen) 유럽바둑대회에선 한국선수단을 보살피고 특히 전상윤의 영어를 많이 도와 주었다. 그래서 상윤이가 2010년에 유럽대회엘 또 가게 만들었다. 상윤이는 그 대회에서 준우승을 한다.
<하멜과 히딩크> '하멜표류기'는 우리나라를 유럽에 최초로 알린 책이다. 1688년 홀란드어로 출판되었고 이어서 영어, 독어, 불어판이 출판되었다. 당시 조선이란 나라의 존재도 모르던 유럽에 우리나라의 풍속, 생활, 사회를 처음 알린 책이다. 우리에게도 당시 사회 실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한국에서는 1971년에 처음 번역, 소개되었다. 당시 유럽인은 미개한 곳에 기독교를 전파하여 동물 같은 비유럽인을 구원하겠다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멜(Hendrick Hamel)이 탄 스페르베르(Sperwer)호가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항해하던 중 폭풍에 밀려 1653(효종 4)년 8월 제주도 남단 산방산에 표착(漂着)한다. 64명 중 36명만 살아 남았다. 그들은 서울로 호송되었다가 2년후에 전라도 지방으로 분산 이송된다. 1666년 9월 하멜일행 중 8명은 야음을 틈타 읍성(邑城)을 탈출, 해변에 있는 어선을 훔쳐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간다. 그들은 1668년 7월에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17세기는 네덜란드가 세계해양권을 쥐고 있었다. 유럽인은 동양인을 착취대상으로 보는데 조선은 하멜을 천한 위치에 놓고 인간취급도 안 했다. 또 조선을 밖으로 알리기 싫어서 그들을 감시했다. 그래서 하멜 일행은 우리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고통을 겪는다. 그가 귀국하여 조선에 대해 증언한 내용은 조선을 멸시하고 세월에 대한 복수심에서 모든 것을 과장해서 기술한다. 그에게 한국 이름과 가족이 있었지만 수치심 때문에 숨겨서 아직도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하멜의 네덜란드 고향에는 그의 기념비가 서 있다.
하멜이 우리나라에 온 첫 서양인이 아니었다. 그보다 27년 앞서 같은 홀란드인 3명이 왔다. 벨테브레(Jan Weltevree 박연)도 1627년 일본으로 가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그는 동료 히아베르츠, 피에테르츠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서을로 호송되었다. 그들은 훈련도감에서 일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 사람 모두 출전한다. 두 명은 전사하고 박연만 살아 남았다. 그는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독하고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 조작법을 지도하였다.
박연은 조선여자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하멜 일행이 도감군오에 소속되자 그들을 감독하고 조선풍속을 가르쳤다. 가끔 우리나라 사람 중 난데없이 머리가 노랗거나 눈이 파랗고 피부가 백인 같은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조상 중에 네덜란드 사람 39명 중 누구와 피가 섞였을 가능성이 크다.
21세기로 들어서는 초입에 우리나라에서 영웅이 된 네덜란드인이 있다. 바로 히딩크 축구대표팀 감독이다. 그는 서구식 합리주의를 앞세우고 혈연, 지연, 학연을 무시했다. 선수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경력을 무시했다. 능력만 중시했다. 개인기 보다 팀플레이를 강조했다. 여기에 유럽과 다른 한국선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감독에게 가부장적 질서개념으로 무조건 복종했다.
감독과 선수들이 계약관계가 아닌 정(情)과 충성심으로 전인간적 몰입이 되었다. 박지성은 골을 넣고 먼저 감독에게 뛰어가서 안겼다. 유럽선수와 감독은 이렇게 안 된다. 이 두 문화의 이질적 성향이 이상적으로 결합되어 우리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오른다. 우리의 목표는 16강이었다. 히딩크는 축구라는 비정치적 종목의 전문인으로 고용되어 국제무대에서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준 사람이다. 한국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대접하여 명예시민권을 주었다.
▲ 박지성이 골을 넣었다!
경제도 그렇다. 한중일 세나라는 그들의 동양문화와 서구의 합리주의가 합하여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 서양이 쫓아올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문화에서 나온 게임이 바둑이다. 바둑도 비정치적 종목이고 우리는 이미 세계최강의 위치를 확보했으나 지금은 중국의 추격에 휘청이고 있다. 중국이 우리보다 인구도 많지만 영재발굴, 교육방법이 더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앞날이 걱정이다. 바둑계에 히딩크는 언제 나오려나?
<네덜란드 국민성>
네덜란드 국민성은 절약, 검소, 정직에 근거를 둔다. 칼뱅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네덜란드인은 절제를 잘한다. 쾌락보다 성취지향적이고 노동은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들과 대화를 해보면 환상이나 감상은 이성에 의해 지배받는 걸 느낀다. 규칙, 신용, 의무를 중시하는 점은 독일과 비슷하다. 그러나 네덜란드인은 이윤추구에는 적극적이며 영웅주의를 기피하고 개인주의가 앞선다. 내것, 네것이 분명하다. 이런 배경이 네덜란드 상인전통에 영향을 준다.
내가 한번 잘 아는 네덜란드 사람과 동업을 했다. 내가 그렇게 수고했는데 연말에 나에게 돌아온 돈은 고작 78유로였다. 그 얘길 들은 독일인이 나에게 "손해 안봤으면 그게 남은 것"이라며 웃는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다른 특징 중 하나는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뭉치길 잘한다는 점이다. 취미클럽, 운동클럽, 학술클럽 등 네덜란드는 클럽천국이다. 바둑클럽 멤버들도 서로 인간적으로 결합이 잘 되어 있다. 같은 클럽에서 몇십년씩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같은 클럽에 꾸준히 나온다. 이렇게 작은 나라가 최선진인데에는 무슨 비결이 있음이 분명하다.
<레이든 바둑 친구들의 방한> 레이든에서 바둑인 6명이 나를 찾아 한국에 왔다. 내가 작년에 갔을 때 바둑인이면 한국에 다녀가야 한다고 권했더니 그 초대에 응한 것이다. 원래는 얀 롱엔회장 부부도 같이 오려고 했는데 얀의 건강이 안 좋아 마지막에 포기했다고 한다. 얀이 친한파며 조치훈 9단 중심 인터넷 사이트 ‘my friday night files’를 운영한다는 얘기는 전편에서 한 적이 있다.
내가 그 얘기를 조치훈 9단의 형 조상연 사범에게 했더니 조사범이 나에게 조치훈 9단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준다는 부채를 두 개 준다. 하나는 내가 갖고 하나는 얀에게 갖다 주었다. 그는 자기집 진열장 유리케이스에 그 부채를 넣어놓고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있다.
지난번 얀이 지난번 나에게 "건강상 이유로 바둑계 현역에서 물러나겠다"라며 쓸쓸한 표정으로 말하던 얼굴이 떠오른다.
▲ 雲林之情(높은 곳에 오른자의 외로움을 뜻함) 얀의 사이트(http://rongen17.home.xs4all.nl/)
한국에 온 사람은 하리, 빔, 필립, 테오, 안드레아스, 아놀드 등이다. 공항에는 9명이 도착했으나 3명은 그 길로 전주에서 열리는 국무총리배 세계바둑대회로 갔다. 그들의 숙소는 을지로 6가에 있는 외국인을 위한 아파트호텔 같은 곳이었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하고 싶은게 뭐냐?"라고 하니까 "조훈현 9단을 존경하는데 한번 만나보는게 소원"이라고 한다.
조 9단에게 전화했더니 "다 데리고 우리집으로 오세요" 하며 흔쾌히 자기 집으로 초청한다. 세검동 집에 찾아가니까 조 9단이 한복까지 차려 입고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우리 통역으로 그들은 조 9단과 대화도 많이 나누고 대접도 받고 떠날 땐 선물까지 받았다. 그들은 "이거 하나만으로도 한국에 온 보람이 있다"며 감동했다.
▲ 조훈현 9단 자택
조9단이 제1회 응씨배 결승에 올랐을 때다. 나와 중국강자 왕우비는 자기나라선수에게 100불씩 걸었다. 그 당시 우리 두명은 서로 자신이 있다기 보다 자기나라 바둑을 응원하는 심정이었다.
조9단이 그 얘길 듣더니 "백불이면 큰데요"라고 한다. 조9단이 우승하자 호주인들이 한국바둑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한국바둑은 이를 계기로 비약적 발전을 하고 세계대회를 독식하는 나라가 되었다. 여기에는 이창호의 출현이 결정적 공헌을 한다.
▲ 응씨배 우승후 카퍼레이드(왼쪽), 용산전자시장(오른쪽)
네덜란드인들이 용산전자시장에 가서 감탄을 연발하더니 가격을 유심히 살펴본 후 아무 것도 안 산다. 호주와 용산시장을 비교하면 호주가 훨씬 싸다. 한국이 생산지인데 왜 그런지 지금도 궁금하다. 이 사람들도 그런 이유로 안 산 것 같다. 네덜란드인들은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문화체험을 최대한 즐기고 뭐든지 해보려고 한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 머뭇거리는 태도가 하나도 없다. 고추장, 된장, 못 먹는 음식이 없다.
내가 우리집 사람에게 "이 친구들이 워낙 짠돌이들이라 본전을 뽑으려고 이러는 거 같다"라며 웃은 일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그런 자세가 옳다. 강남 메리오트 호텔 옆 놀부집에 갔을 때다.
국악순서가 있었는데 콘서트홀에서 클래식을 감상하듯 진지하게 듣고 난후 공연자들을 찾아가 허리를 굽혀 절하며 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감명을 받는다. 이 사람들은 이 날밤 얘기를 내가 네덜란드에 갈 때마다 자주한다.
▲ 웬 반찬이 …. 필립(왼쪽사진) 공연자 중 한명과 하리와 안드레아스(오른쪽사진)
네덜란드인들이 있는 동안 마침 한국에 온 미국, 독일 바둑인들을 내가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 후 아리랑 TV에 출연교섭을 하여 네덜란드는 바둑협회 재무 하리 크록트, 독일은 베를린 바둑회장 버나드 룽거, 미국은 시애틀 바둑센터 매니저 얀 볼리가 나와 같이 출연했다. 아리랑엔 2년 전 롱엔회장과 내가 출연한 적이 있다. 이렇게 바둑이 영어로 소개되자 몇 달 후엔 영어교통방송 라디오에서 초청이와 나 혼자 30분간 영어로 바둑을 소개하기도 했다. 한국내에서 바둑세계화였다.
▲ 자기네가 받을 질문을 열심히 읽고 있다(왼쪽사진) TV에 나온 하리(오른쪽사진)
안드레아스는 고등학교 교사이고 아놀드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다. 다른 사람들은 전편에서 이미 소개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데리고 동대문시장, 경복궁, 인사동, 이태원, 국립박물관, 명지대 바둑학과 등을 방문하고 지방은 대전과 부산을 방문했다. 내차 ‘카렌스 2’는 4명 밖에 못 타니까 보통은 3명만 테우고 내가 운전하고 나머지 3명은 우리집 사람이 데리고 지하철, 버스, 기차로 따라왔다. 대전에 갈 땐 다 KTX를 타고 싶다고 하여 하리만 나와 차로 가고 5명은 기차로 갔다.
▲ KTX를 기다리고 있다(왼쪽사진) 대전에서 다시 만났다(오른쪽사진)
네덜란드인 6명이 대전 내 바둑영어교실을 방문해서 교류전을 가졌다. 이상하게 대전 여성팀에게는 전패를 하고 막강 남자팀에게는 거의 전승을 했다. 이 일로 아직까지 그들은 나에게 놀림 대상이다. 자기네가 "진정한 신사"라 그렇다는게 그들의 변명이다. 이 결과로 대전에서 저녁 회식시간에 웃음이 만발했다. 이 행사를 위해 안정웅사범이 수고했다. 이들이 김향희씨와 친분으로 부산에 꼭 가보고 싶어하길래 내가 김향희씨를 대전으로 와서 같이 내려가자고 불렀다.
▲ 대국자 소개(왼쪽사진) 네덜란드 VS 대전 여성팀(오른쪽사진)
▲ 여성팀에게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부산에서 그들은 많은 바둑인들을 만났다. 남포동 좁은 골목을 걸으면서 놀라고 자갈치 시장의 분위기에도 놀란다. 해운대, 광안리의 먹자골목과 술집 행열을 보고 "네덜란드와 너무 다르다"라며 흥분한다.
그들은 김철중 바둑도장에서 부산여성팀과 교류전을 갖고 유엔묘지방문, 당시 부산 여성바둑연맹 총무이었던 김향희씨 집에도 갔다. 외국 바둑인들이 한국방문을 하면 대개 친한파가 되고 여유가 생기면 또 찾아 오게 된다.
▲ 부산 여성팀과 교류전. 김철중도장 김향희씨와 부산 거리
▲ 유엔묘지 김향희씨 집
<우리 가족 레이든 방문>
나는 2008년 우리가족만 유럽을 한바퀴 도는 여행을 했다. 내 아들 오람이가 너무 어릴 때 유럽에 와서 25년 만에 다시 데리고 왔다. 유럽에서 6천여 km를 차로 달렸는데 운전은 오람이 혼자 다 했다. 레이든에 다가 오면서 우리는 시간에 늦을까봐 서둘렀다. 하리와 다른 친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레이든의 중앙역 뒤편은 내가 여기에 올 때마다 하리와 만나는 장소다. 하리가 바로 이 근처에 산다. 오늘은 역 앞까지 왔는데 차를 세우려다가 일방통행에 걸려 멀리 다시 돌았다. 30분 늦게 역에 가니까 하리가 역사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하리는 언제나 팔을 양 옆으로 벌리고 웃으며 나를 맞는다. 그의 안내로 우리 차를 풍차 옆 주차장에 세우고 성 옆에 있는 바둑클럽으로 갔다. 이 클럽 옆에 있는 성은 4세기에 로마인들이 쌓았다는데 돌로 튼튼하게 지었다. 클럽에는 테오, 안드레아스가 앉아 있다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조금 후에 얀, 빔, 필립도 나타난다. 우리 7명은 식사하러 10분 거리의 식당을 향해 걸었다.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한다.
▲ 필립과 얀 하리 안드레아스
▲ 아놀드 빔 테오
182cm의 오람이가 2m의 안드레아스와 얘길 하며 걷는데 오람이가 꽤 작아 보인다. 가는 도중 비가 점점 심하게 와서 우리가 식당에 도착할 무렵에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홀딱 다 젖었다. 모두 상의를 벗으니까 그런대로 식탁에 앉을 만 했다. 우리부부는 6~7 차례 이 곳을 찾아 오며 이 사람들과 친해 졌다. 허물이 없어지고 심한 농담도 주고 받는다. 특히 우리집 사람이 이들과 아주 친하다.
집사람은 빔(Wim)과 하리에 대해서는 수필도 썼다. 빔과는 인생에 대해 이메일을 자주 주고 받는다. 하리는 자기 부인이 레이든의 부시장이라 그런지 식사하면서 정치에 대해 자주 말한다. 레이든은 16~7세기에는 무역으로 번창해서 홀란드의 제 2의 도시였다. 그 후 무역이 침체하자 인구도 격감했고 지금은 대학촌으로 인구 12만 정도의 소도시가 되었다. 다른 홀란드 도시처럼 운하가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어 아름답다.
식사를 하면서 오람이는 빔과 안드레아스와 음악 얘기로 꽃을 피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나는 하리와 바둑에 대한 얘기를 주로 했다. 집사람은 특별한 주제 없이 여기저기 동참한다. 얘기 도중 하리가 2백 년 전에 화약을 적재한 어느 배가 라이든에서 폭발해 수 백 명이 죽고 수 천명이 다쳤다고 한다. 나는 30년 전쯤 전라북도 이리에서 있었던 화약열차 폭파사건 얘기를 해 주었다.
저녁식사 후에 10시가 되자 우리는 암스텔담으로 가기 위해 일어났다. 여기서 40분 거리다. 이 곳에 묵으면 이 사람들이 숙소를 잡아주고 신세를 지게 된다. 또 내일 아침에 암스텔담을 구경하려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버는게 좋다. 밤 11시쯤암스텔담에 도착하여 시내에서 20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가 해주는 설명만 듣고 그 집을 찾아가는데 고생을 한다.
유럽 민박집의 대부분은 기차역만 데리러 나가는 식이다. 우리처럼 차로 여행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들도 그런 설명에는 서툴다. 운전을 못하는 아주머니가 길을 잘 가르쳐 줄리 만무했다. 유럽지도만 있지 각 도시의 지도가 없이 다니는 우리에게는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거리에는 사람이 안 다니니까 물어 볼 수도 없다.
이런 경우에는 멀리 있는 주유소에 찾아가서 물어보는 도리 밖에 없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그 집에 들어섰다. 한 시간 이상은 헤맨 것 같다. 이 곳에서도 우리식구 3명이 4인실을 쓰고 돈은 4인분을 냈다.

<홀란드는 홀란드인이 만들었다> 홀란드는 바다 보다 낮은 땅이 3분의 1이라 "신이 세계를 만들었으나 홀란드는 홀란드 인이 만들었다"고 한다.
아침 식사 시간에 보니까 이 집에 묵는 사람이 10명 이상이다. 거의가 배낭여행을 하는 학생들이다. 우리가 유럽여행에 대해 화제를 꺼냈는데 모두 반응이 소극적이다. 유럽에 대한 기본상식이 짧아서 그러나? 유럽 같은 곳을 여행하려면 사전에 공부를 해야 한다. 집 주인은 이 곳에 산지 30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조선족을 안 쓰고 60대 두 부부가 직접 모든 일을 한다. 민박 업은 세계 각지에 교민들에게 새로운 사업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그 만큼 많이 한다는 얘기도 된다. 시설은 호텔처럼 안 좋지만 값이 저렴하고 한국음식을 먹고 정보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 경제발전이 지속 하는 한 해외의 민박집 수도 늘어 날 전망이다. 암스텔담 시내를 운전하던 오람이가 "여기는 레이든을 그대로 늘려 놓은 곳 같아요" 한다. 홀란드는 건축양식이 자기네 만의 고유양식이 있어 레이든과 암스텔담이 닮은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시내에 있는 반 고호 미술관으로 갔다. 오람이가 유럽에 오면서부터 노리던 곳 중 하나다. 오람이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이 미술관에 대해 많이 들어서 영향을 받은 거 아닐까? 고호 미술관에서는 오람이와 집사람만 들어가게 했다. 나는 유럽에 올 때 마다 학생들과 7~8번은 들어 갔다. 진짜 이유는 주차할 곳이 없어서었다. 나는 그 근처 주택가로 차를 몰고 들어 갔는데 마침 주차할 곳 한 군데를 찾았다. 얼른 차를 세우고 나도 미술관으로 와서 식구들과 합류했다. 고호 포스터도 몇 장 샀다. "고호가 죽기 전 1~2년 사이 작품이 제일 좋아요" "동생 테오와의 관계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오람이와 집사람이 계속 떠든다.
<잔트펠트의 방문> 유럽 최고의 바둑 서적, 용품 판매상 페터(Peter Zandveld)가 한국에 온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1955년생인데 아직도 독신이다. 어려서 바둑을 배워서 21살부터 지금까지 바둑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소원이 유럽대회와 미국대회가 같은 기간에 열리는 거다. 그러면 자기가 양쪽을 다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페터는 처음에는 바둑선수로 나가볼까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빨리 늘자 선수보다 용품보급쪽으로 돌아섰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오로미디어 조창삼 사장과 자주 같이 붙어 다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유럽바둑연맹의 이사로 있다. 나에게 명지대 바둑학과를 방문한다고 하길래 내 교실에 들어오면 내가 반쯤은 영어로 강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늦게 와서 강의 후반부에 교실에 도착했다. 그가 청강소감을 유럽연맹 뉴스레터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Professor Hahn of the Myong-ji University invited me to attend one of his classes. Professor Hahn had lived in Australia for a long time. He is known both in Europe and Korea as the one who build the first Go, excuse me, Baduk, contacts between Korea and Europe.
Most of the students are strong go players, but not professionals. The university prepares them for a future as teacher or some other function in the go world. Professor Hahn teaches about ‘Go culture in Western countries’. We were late because of traffic jams, so I missed the first part but I could guess what it was about as words like “xenophobia” and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were written on the blackboard.

<네덜란드 바둑역사 2>
아동서적 출판사장 비에(Leon Vie)가 필명을 사용해 1954년 기초 바둑책 두권을 출판하여 아동 팬을 확보하고 자기가 바둑세트들을 팔았다. 첫번째는 예명으로 두번째는 본명으로 출판한다. 그는 자기 친척이 신문사에 있는 걸 이용하여 광고나 기사를 많이 낼 수 있었다. 동양문화, 일본역사를 곁들여 쓴 기사들은 손님을 끌기위해 신비한 동양 얘기들로 과장되어 썼다. 그 결과 갑자기 바둑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다.
수학교수인 스킬프(Albert Schil)는 네덜란드와 유럽바둑연맹 회장을 겸임하면서 바둑 발전에 힘쓴다. 그는 부부동반으로 국제바둑행사엔 거의 다 참여하고 네덜란드 내에서는 클럽을 늘려나갔다. 1957년 독일에서 열린 바둑캠프가 첫 유럽대회 성격을 띤다.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바둑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바둑대회 운영방법, 룰, 랭킹, 연맹조직, 교류전등 많은 아이디어를 같이 의논했다. 그의 노력으로 네덜란드에는 27개의 클럽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바둑을 즐겼다. 그러나 그들의 수준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비해 낮았다.
초기 바둑클럽 회장 리스트를 보면 누가 바둑클럽을 언제 이끌었는지 알 수 있다.
스킬프(1928-1999)교수가 6명의 동료와 같이 일하면서 퇴근 후 백주를 같이 마시고 공통관심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바둑을 같이 두기 시작한다. 이들이 주동이 되어 1960년 유럽대회를 레이든 부근에서 개최한다. 이 행사는 스킬프교수가 총사령관이 되어 지휘를 맡는다. 스킬프(1928-1999)가 네덜란드 바둑소식을 적어 독일로 보내면 'DGoZ' 저널을 통해 유럽인들이 네덜란드에 대해 알게 된다.
1961년 영국의 전설적 바둑인 바즈(John Barrs)가 크리스마스 휴가에 스킬프에게 와서 며칠 묵는다. 그는 네덜란드 바둑인과 어울리며 많은 대국을 했다. 이 무렵 독일 바둑지 DGoZ의 소식과 네덜란드 현지 소식을 담은 바둑뉴스레터가 더치(네덜란드어)로 처음 나오기 시작했다. 간편한 바둑세트와 바둑책도 현지에서 만들어 나왔다.
그러나 해외 명국기보 게재등은 아직 엄두도 못낼 시절이었다. 암스텔담에 첫 클럽이 생기고 급수도 정해졌다. 이와모토 9단이 자기 딸과 방문도 이즈음인 1962년이었다. 네덜란드 바둑대회는 1960년 스킬프가 우승하고 레바투(Rebattu)가 1963, 1965, 1968에 우승하여 강자로 군림한다. 레바투 외에 브리스(de Vries), 괴만스(Goemans)가 강자였다.
▲ 네덜란드 20세기화가 몬드리안(Mondrian) ‘붉은 포도밭(1888)’ 19세기 반 고흐(Van Gogh)
초기 네덜란드 바둑계에 대한 기록은 필자와 서봉수9단을 자기 집에 묵게했던 유럽바둑연맹회장 얀 프랑켄하우센(Jan Frankenhuysen)의 기억에 의존하는 적이 많았다. 나는 얀과 슐렘퍼를 1979년 2월 제 1회 세계바둑대회에서부터 알게 된다. 암스텔담 오픈에는 자기 나라의 단골 우승자면서 유럽 강자였던 독일의 마테른, 영국의 맥페이든, 프랑스의 무싸 등의 이름도 눈에 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슐렘퍼의 독주가 시작된다. 1편에서 슐렘퍼와 유창혁 대국에 대해 소개한 그 슐렘퍼다. 그는 일본 안도 9단 내제자로 들어가 1년간 영구생 생활을 하고 돌아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유럽의 1인자로 군림하다가 홀연히 바둑계를 떠나 지금은 의사 직업에만 몰두하며 살고 있다.
1980년대 유럽은 한국 유학생 유종수 사범의 독무대였다. 유럽의 1인자 슐렘퍼와 10번기에서 일방적으로 누르고 유럽 1인자로 군림하다가 귀국했다. 유사범은 본인이 자랑을 안하는 성격 때문에 국내엔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내가 1980~90년대 유럽에 가면 "용을 아느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Jong? 잘 모르겠는데" 하면 그에 대한 애기를 해준다. Yoo Jong-Su 중 'Jong'을 유럽발음으로 "용"이라고 읽어서 내가 몰랐던 것이다. 바둑계가 공을 인정해 주어야 할 사람을 잊어서는 안된다. 유사범은 누구보다 한국바둑을 유럽에 인각시킨 인물이다. 지금도 유럽의 나이든 바둑인들은 유사범 얘길한다. 귀국해서도 사범으로 바둑보급을 계속해 오는 사람이다. 또 한 사람 생각난다. 한 때 담수회회장으로 바둑계를 위해 일을 많이 한 정운희씨가 지금은 안 보인다. 내가 서양 바둑인들과 가면 언제나 그의 신세를 졌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여 영어도 잘한다. 한국에 9단이 새로 생길 때면 파티를 해 주던 인물이다. 내가 그의 소식을 물어보면 아무도 모른다. 바둑인들이 자기 생활이 바빠서 그렇겠지만 안보이면 찾아가 보는게 도리다. 정운희씨와 유종수 사범은 경기고등학교 선후배로 해외유학파 엘리트 출신들이다. ▲ 네덜란드 지도(왼쪽사진) 유럽 속의 네덜란드(진초록 부분)
▲ 국기(왼쪽사진) 국장(오른쪽사진) 17세기에 중국에 갔던 무역상인 중 뉴호프(Nieuhof) 란 사람이 중국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았다. 그 중 바둑 두는 그림이 있다. 그는 그냥 “중국 보드게임’이라고만 썼다. 네덜란드가 유럽에 그림으로라도 바둑을 제일 먼저 알린 나라다. 반덴버그(Van den Berg)란 신학자도 이 무렵 일본에 다녀와서 바둑(Go)에 대해 그의 책에서 언급했다.
작지만 바둑강국이고 고난의 역사를 극복하고 세계를 주름 잡았던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는 여러면에서 우리나라와 공통점이 많다. 특히 친한파가 많은 나라다. 여기서 네덜란드 편을 마친다.
한상대(전 시드니대 교수 hahns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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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블랑 정상은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 |
| - 이탈리아 3편 | | |
| 2012-07-22 오후 5:25:18 입력 / 2012-07-24 오후 1:00:5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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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도밭. 이탈리아는 양질의 포도주 생산국가 중 하나다.
1. 이탈리아 바둑계와 인연
이탈리아 바둑계와 나는 인연이 없나 보다. 1983년부터 4번의 방문을 통해 바둑을 한판도 못 두어본 유일한 나라다. 매번 노력을 했는데도 그렇다. 2008년, 내 후배가 이탈리아 대사로 있을 때 로마에 가서 한국대사배를 만들어 놓았더니 이탈리아 바둑계가 분열되어 싸움판이라 그냥 돌아왔다. 이탈리아 바둑협회가 하나가 되고 내가 잘아는 레오나르도가 회장이 된 후 나는 신이나서 그와 '2012 한국대사배' 준비를 진행했는데 이번에는 한국측에서 대사배 지원을 끊어 버렸다.
나는 이탈리아 한국대사배에 맞추어 타이젬에 이탈리아 편을 쓰기 시작했는데 한국바둑팀 파견을 펑크낸데 대해 화가난 레오나르도가 연락을 끊고 자료도 안 보내 준다. 독촉편지를 세번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 다만 나와 양재호사무총장이 한국바둑팀을 보내려고 노력한데 대해 감사하다는 짧은 이멜만 받았다. 이탈리아 바둑에 대해서는 내가 수집한 정보를 쓰고 나머지는 나의 이탈리아 여행 얘기로 채우려 한다.
▲ 이탈리아 국기(Flag) 국장(Emblem)
우리 가족은 아침에 대사관으로 가서 김대사와 작별하고 대사관 차고에 있던 우리 차를 꺼내 왔다. 스리랑카 출신 대사관운전수 실바가 차로 피렌체 가는 고속도로 입구까지 안내해 주고 돌아간다. 우리는 로마를 떠나 스페인을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이틀 후 바르셀로나에 약속을 잡아 놓았기에, 마음이 조금은 급했다.
▲ 유럽에서 위치 이탈리아 지도
2. 피렌체
우리는 한 번도 안 쉬고 단숨에 피렌체(Firenze)로 달려갔다. 먼저 차를 베끼오 다리(Ponte di Vecchio) 옆 주차장에 넣었다. 내가 '단테의 신곡'을 강의 할 때 자주 인용하는 다리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5년간 교각 뒤에 숨어서 봤다는 이 돌다리는 그 전설 덕분에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 남아 지금도 천년 전 중세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리 위에는 예나 지금이나 금은 보석상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 베끼오 다리
우리는 베끼오 궁전 앞 광장에 나갔다. 궁전 앞 광장은 많은 조각품이 있는데 'The room with a view'란 영화에 이곳이 인상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날은 궁전 안에는 수리 중이라 별로 볼 게 없었다. 우리는 배가 출출해, 광장 앞 음식점에 들어 갔다. 음식은 형편 없었고, 음식에 나온 가지는 상하기까지 했다. 값은 선불인데 39유로(거의 6만원)나 된다. 로마에서는 피자를 2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세 식구가 그렇게 즐겼는데.
음식을 들고 나가서 항의를 했더니 자기넨 종업원이라 잘 모르겠다고 한다. 미안해 하는 태도가 하나도 없다. 이러니까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것이다. 호주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식당에서 저녁식사후, 내가 계산을 하자, 매니저가 "음식이 어땠냐?"고 묻는다. 내가 "스테이크를 다른 날 만큼 못 즐겼다"고 하자 매니저가 끝까지 돈을 안 받았다. 이탈리아와 비교된다. 하긴 관광지에서 음식을 먹은 내 탓이다.
▲ 베끼오 궁전. 멀리 데이빗 상이 보인다 우피치 미술관
▲ 피렌체 두오모 -
▲ 밖에서 보는 돔
우리는 걸어서 시내를 거쳐 두오모로 향했다. 바가지를 썼어도 피렌체는 아름다웠다. 피렌체 모든 집의 지붕이 빨간 것도 멋지게 보인다. 특히 이 곳 두오모의 돔은 남성적이고 크다. 모든 주위를 압도한다. 두오모 안으로 들어가서 벽화가 가득한 돔 내부를 보았다. 저 그림들을 그리느라고 화가가 천장에 매달려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우리는 두오모에서 나와서 단테의 생가로 갔다. 단테는 서기 1300년경 '신곡'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이 대 서사시는 이태리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을 뿐만 아니라 피렌체가 속한 토스카나 말이 이탈리아의 표준어가 되게 한다. 르네상스가 일어난 도시 피렌체, 그 시작은 단테부터다.
▲ 단테 집 앞
단테의 집 앞 좁은 골목 안에는 기도실 같은 게 있는데 단테와 베아트리체에 대한 기록이 벽에 붙어 있다. 바로 베아트리체 무덤이다.
우리는 걸어서 주차장으로 가는데 서양 도시치고 걷는 사람이 꽤 많다. 우린 차를 꺼내어 피사를 향해 달렸다. 오늘 밤은 제노바에서 잔다고 목표를 정했기 때문에 계속 달려야 한다. 그래야 이틀 만에 바르셀로나에 도착 할 수 있다.
▲ 피사의 두오모와 사탑
3. 피사(Pisa)
피사는 사탑(斜塔)으로 유명하다. 두오모 뒤의 탑이 8백 년 전에 기울어진 체 아직 그 모양으로 서 있다. 4백 년 전쯤 어느 날 피사탑 아래에는 당시 지식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이 곳 출신인 젊은 대학교수 갈릴레오가 신호를 하자 탑 꼭대기에 대기하고 있던 제자들이 물건을 동시에 떨어트린다. 같은 질량의 물건은 부피에 상관 없이 낙하속도가 같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천여 년 동안 믿어 온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전에 갈릴레오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천재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한번은 갈릴레오가 궁중 악사였던 자기 아버지 심부름으로 예술인 모임에 간 일이 있다. 각 부문의 예술인들이 모여 서로 힘을 합해 할 수 있는 예술활동이 무엇이 있는지 연구하는 자리였다. 젊은 과학도 갈릴레오가 예술인 전체가 할 수 있는 일을 제안했다. "문학은 성악가가 노래로 하고 기악은 오케스트라로 반주를 하고 미술은 무대장치에 쓰고 무용은 중간에 집어넣고 하면 모든 예술이 다 한꺼번에 활용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오페라(Opera)란 종합예술은 이렇게 탄생했다.
또 한번은 그의 제자가 "네덜란드에서 어느 안경집 아들이 장난으로 렌즈를 겹쳐 놓고 물건을 보니까 크게 보인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크게 깨달은 갈리레오는 곧 직접 렌즈를 갈아서 망원경을 발명한다. 그리고 그는 곧 목성과 토성의 위성들을 발견한다. 그는 계속 많은 별을 발견하며 천체를 연구하여 지동설 이론을 확고히 한다. 그러나 이 일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그는 말년을 감시 속에서 불우하게 보낸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저서는 금서가 되고 묘비를 세우는 것도 허용이 안 되었다. 그는 19세기에 와서야 명예회복이 된다.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사탑에서 불과 50미터 떨어진 약국 앞에 차를 세우고 약을 7유로어치쯤 샀다. 주인에게 곧 돌아 온다고 부탁하고 그 옆에 있는 탑으로 갔다. 너무 잘 지은 탑인데 기울어져서 더욱 유명해 졌다. 30년 전에는 내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복도가 기울어져서 걸을 때 한쪽으로 막 쏠린다. 놀이공원에 들어와서 게임하는 것 같았다. 오람이가 나에게 피사탑 배경으로 자기를 찍어달라고 한다. 나는"벌써 어두어져서 사진이 안 나온다"고 거절했다.
▲ 피사의 사탑
오람이가 "저도 여기 다녀갔다는 증명사진이 필요하잖아요? 제 카메라는 좋아서 나올 껄요" 하며 땅 바닥에 누워서 카메라를 조절하더니 혼자 자동셔터로 플래시도 안 터트리고 자기를 찍는다. "왜 플래시를 안 터트리니?" 하니까 "그러면 저만 잘나오고 뒤의 탑은 안 나와요" 한다. 찍은 사진을 보니까 멀쩡하게 쓸만하다. 요즘 좋은 카메라는 인간 눈보다 밝은 거 같다. 오람이가 대학원 다닐 때 'Canon Sydney'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직원에게만 주는 60% 할인으로 제일 좋은 걸 월급에서 제하고 샀다고 한다. "아버지 가지세요" 하길래 이놈이 빈말로 하는 걸 내가 알고 "그건 너무 커서 싫다. 또 네가 더 필요할 거구" 하면서 사양한 카메라다.
제노바(Geova)로 가는 길에 이 지역의 유명한 터널들이 계속된다. 김대사도 우리가 이 길로 지나 간다고 하니까 터널이야기부터 했다. 이 지 역은 계곡이라 터널 하나를 지나면 새로운 계곡과 아름다운 마을이 나오고 또 그 다음 터널로 들어가고 이를 수십 번 반복한다. 제노바는 콜럼버스의 고향이다. 당시는 제노바가 유럽의 최대 항구로 전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사람이 많을 때였다. 콜럼버스가 스페인에 가서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 시켜 지원을 받는다.
▲ 제노바로 가는 길
▲ 터널을 지나면 다른 마을이 나온다
그러나 현재의 제노바는 관광지에서 제외되어 있고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곳이다. 인구는 백만 명쯤 되고 중심가는 건물이나 상가가 어느 대도시에 못지 않다. 부산 남포동처럼 좁고 높은 골목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전에도 와서 보고 기대 보다 대단한 도시라고 느꼈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고대 로마지배부터 주변국가에게 지배도 받아봤고 자기네도 주변을 정복한 일도 많다. 흥망성쇠를 거듭한 곳이다.
우리는 언덕 위에 어느 모텔에 숙소를 정했다. 종업원은 퇴근했는지 혹은 없는지 꼬부라진 영감 혼자서 일을 한다. 분위기로 봐서 주인인 것 같다. 아침식사도 가게에서 사온 토스트 두쪽에 카푸치노 한잔이다. 그러고 보면 아침식사는 영국이 최고다. 내가 30년전 서봉수사범과 유럽을 돈 후 차를 페리에 싣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런던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늦어 도버 근처에 'B&B(bed & Breakfast)'라고 쓴 곳을 찾아가 묵었다.
모텔 주인이 나에게 "어떻게 유럽 아침으로 두 달을 견뎠느냐?"고 한다. 내가 "영국 아침은 어떤데 그러느냐?"고 하니까 웃으며 "내일 아침에 보라"고 한다. 아침은 부페식이었다. 모텔 주인이 먹는 순서를 가르쳐 준다. 오렌지 쥬스(Orange juice), 죽(Porridge), 콘 플레크스(Corn Flakes), 토스트(Toast), 베이컨(Bacon), 소세지(Sausege), 스크램블드 계란(Scrambled Eggs), 과일(Fruits), 마지막으로 커피(Coffee)를 마신다. 아침부터 배가 불러 버렸다. 이런 식사는 영국여행 내내 계속된다.
유럽인에게 지옥은 '영국 요리사에 독일 경찰에 프랑스 관리인에 이태리 기술자에 스위스 애인'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스위스 여자는 애교가 없고 영국음식은 먹을 게 없다는 것이 정평이다. 천당은 '영국 경찰에 프랑스 요리사에 독일 기술자에 스위스 관리인에 이태리 애인'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책은 영국요리책"이다. 영국요리가 형편 없는 걸 놀리느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국은 아침 못 먹고 죽은 조상이 있는지 아침식사 하나는 끝내준다. '달과 6펜스' 작가 영국문호 서머세트 모옴은 "누가 영국요리를 형편 없다고 했는가? 영국 아침식사로 세끼를 먹어 보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우리는 차로 제노바를 돌면서 항구를 거쳐 모나코 쪽으로 향했다. 제노바 항구에는 대규모의 화물선, 여객선이 보인다. 오람이가 운전은 혼자 다 하니까 우리 부부가 번갈아 운전하던 과거 여행보다 편하다.
▲ 중세 제노바 성문 콜럼버스 동상
<이탈리아 바둑>
이탈리아에는 30여개의 바둑클럽이 있다. 로마와 밀라노가 클럽 수나 바둑인구로 제일 크다. 남쪽에는 나폴리, 바리, 팔레르모 등이 활발하다. 큰 도시는 클럽이 몇 군데씩 있고 마피아 고장이라는 시칠리아 섬까지 바둑클럽이 있다. 바둑토너먼트도 클럽이 주관하는 것까지 합하면 1년에 20개쯤 된다. 게다가 유럽바둑대회가 1년에 10군데쯤 열리기 때문에 바둑을 두려면 기회는 많다. 이탈리아 바둑인구는 2천명 정도로 추산되고 배부분이 북쪽 대도시에 몰려 있다.
이탈리아 바둑클럽은 같은 도시에 있는 클럽끼리 대항전도 하고 같은 지역의 도시들이 연합팀으로 다른 지방과 교류전도 한다. 유명한 곳은 투스카니(Tuscany) 지방의 피렌체(Firenze), 피사(Pisa), 그로세토(Grosseto), 레그호른(Leghorn) 등 연합팀과 베네토(Veneto) 지방의 베네치아(Venecia), 파두아(Padua), 트레비소(Treviso), 비첸사(Vicenza), 베로나(Verona), 벨루노(Belluno) 연합팀이 있다. 피에몬테(Piemonte)지역에도 투린(Turin), 볼로냐(Bologna), 라벤나(Ravenna), 페루기아(Perugia), 모데나레지오 에밀리아Modena-Reggio Emilia), 우디네-트리에스테(Udine Trieste)연합팀도 있다. 타지방의 작은 클럽회원들은 이런 대회에 참여한다.
토너먼트는 매년 12~15개가 열리고 주관은 이탈리아 바둑협회(FIGG)가 그 지방 클럽과 협조하여 개최한다. 이탈리아 챔피언전은 보통 8월에 열리는데 참가자는 60~70명이다. 바둑협회(FIGG)는 이탈리아 챔피언전을 주관한다. 각 클럽별로 열리는 대회들은 평균 30명 많으면 50명 정도가 참가한다. 가장 중요한 '이탈리아 챔피언전'은 매년 다른 도시를 돌며 개최된다. 각 지방끼리 대항전은 자기네끼리 알아서 조직한다. 시간제한은 큰 대회는 1시간 작은 대회는 30분이다.
▲ 이탈리아 챔피언전 2011년 10월 8일 밀라노
<바둑 강자들>
이탈리아에는 약 10명정도가 유단자다. 연령은 18세에서 30세까지다. 아홉 번이나 이탈리아 챔피언을 지낸 밀라노의 마리고(Francesco Marigo) 아마 4단은 1998년에 바둑을 배웠다. 한 때 성적이 좋아 아마 5단까지 오르기도.
피사출신 메타(Carlo Metta)는 피사대학 수학과 학생이다. 그는 2007년에 바둑을 배워 다음 해에 2급, 2년 후 아마 3단이 되었다. '떠오르는 해' 메타는 지난 3년간 이탈리아 챔피언전 결정국을 마리고와 두었다.
미니에리(Davide Minieri)는 2002년에 바둑을 배워 2008년에 아마 3단이 되었다. 그도 피사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살고 있다.
로마 출신 파체(Alessandro Pace)는 19세로 거의 아마 3단인 최강 아마 2단이다. 2008년에 바둑을 배워 18개월 후에 아마 1단이 되었다. 작년에 이탈리아 대표로 한국국무총리배에 참가하고 2011년 이탈리아 챔피언전에서 3위에 올랐다.
자카세프스키(Andriy Zakharzhevskyy)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2단이다. 우크라이나에서 1999년 바둑을 시작하고 2004년부터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 로마에 살고 있는데 2012년부터 공식 이탈리아 선수로 등록된다. 그는 2011년 이탈리아 대회에서 5위를 했다.
<바둑보급>
거의 모든 클럽이 초보자 지도를 하고 있다. 대회나 게임전시회 같은 행사도 한다. 이탈리아 바둑협회(FIGG)는 2012년부터 학교에서 바둑지도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바둑캠프는 1년에 8월 주말에 한번, 알프스 산맥 스키휴양지에서 1주일간 한번이 있다. 바둑강사는 한국, 중국, 일본, 유럽에서 오는 데 2010년에는 황인성사범, 2012년에는 여자프로 고주연사범이 왔다. 이탈리아 바둑협회(FIGG)는 '석기시대(Stone Age)'라는 바둑잡지를 발간하고 있다. 잡지말고 웹사이트(website http://www.figg.org)도 있다. 이 외에도 'Easy to Go' 'Il ritorno delle gru'와 20011년에 시작한 'Shudan'등이 있다. 주요 바둑서적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제자와 여행>
2004년 우리 부부가 독일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를 자동차로 여행하기로 했다. 바둑학과 학생 4명과 대학원 제자 김성학 사장이 사흘 후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여 우리와 같이 여행할 계획이었다. 바둑학과 4명은 다 사정이 생겼다고 못 오고 나타난 사람은 김사장 한 명 뿐이었다. 김사장은 50세로 광화문에 있는 여행사 사장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나처럼 장난 좋아하는 스승을 만나 놀림의 대상이 되었고 물심양면으로 고생을 좀했다. 김사장이 여행을 끝나며 중얼거린다. "다음 여행에 나보다 끝 수 낮은 놈이 오기만 해 봐라" 고생해 본 며느리가 더 독한 시어미가 되는법.
김사장이 도착하는 날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집사람이 나에게 "김사장이 Fax를 보내왔는데 프랑크푸르트가 아니고 내일 파리로 도착 한데요" "뭐? 우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이틀 씩이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파리로 온다고?" 나는 황당했으나 김사장에게 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고 새벽부터 서둘러 파리로 향했다. 거리가 천 km는 족히 될 것 같다. 서울-부산 왕복 거리보다 더 멀다.
아침부터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내가 어느 구멍가게에 뛰어 들어가서 파리로 가는 루트를 물어 봤다. 가게 주인 아줌마와 마침 물건을 사러 온 노인 남자까지 합세하여 열심히 가르쳐 준다. 우리는 지도를 보며 룩셈부르크를 가로 질러 가는 코스가 최단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프랑크푸르트 아침 출근시간과 교통사고에 막혀 고속도로 입구 근처에서 우리가 두 시간이나 갇히고 말았다.
▲ 프랑크푸르트 야경
그 때 마침 자동차 앞 자리에 김사장이 보내 왔다는 팩스가 눈에 띄길래 내가 집어서 읽었다. 도착시간, 항공편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 내가 읽은 Fax는 도착지가 프랑크푸르트다. "이거 도착지가 파리가 아니고 여기 프랑크푸르트인데!" 하니까 이 마누라 왈 "'FRA'가 프랑스의 준말이 아닌가요?"한다. 내가 "누가 도착지를 국명을 쓴데? Frankfurt 의 준 말이지". 하니까 이 사람 그 때서야 깜짝 놀란다. "저는 'Fra'를 프랑스의 준말이라고 읽었는데 정말 큰 일날 뻔했네요"
두 가지 일이 운좋은 집사람을 살려줬다. 하나는 출근 길 교통체증이었고, 또 하나는 내가 팩스를 우연히 읽은 것이다. 만약 우리는 파리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김사장은 프랑크푸르트로 왔다면 여행은 다 잡쳤을 것이다. 저녁 6시에 공항에서 김사장이 무엇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나온다. 독일에서 만나니까 되게 반갑다. 바둑학과 학생들이 오면 미니버스를 빌리려고 했는데 지금은 3명이니까 프랑스제 푸저(Peudgot) 한대를 빌렸다. 파리에서 반환(Drop Off)이 가능한 차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드디어 대장정에 돌입했다.
비엔나에서 베네치아까지 6백 KM가 넘는다. 거기에다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한다. 집사람과 김사장이 운전을 번갈아 하며 달렸다. 차 안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넘친다. 휴게소도 3군데쯤 들러 쉬면서 갔다. 그런데 사고가 하나 생겼다. 오스트리아쪽 휴게소 어디에선가 내가 윗도리를 벗어 의자 뒤에 걸쳐 놓은 채 그냥 온 것이다. 약간의 돈과 중요한 서류가 몇 장 있는데. 차는 알프스를 넘어 거의 베네치아에 와 있고….
내가 한참 노력한 후 그 휴게소 이름을 기억해 냈다. 나에겐 우리가 들린 장소는 물론 모든 식당, 휴게소 이름까지 외우고 다니는 영양가 없는 습관이 있다. 이것이 나를 살렸다. 김사장이 영수증 속에서 그 휴게소 전화번호까지 찾아 냈다. 전화를 했더니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독일어를 할 줄 아는 벨기에에 사는 집사람 친구 김수영씨에게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 윗도리를 포기했다. 그게 맞는 휴게소 인지도 확실치 않고 또 거기에 사람들도 그렇게 많았는데…. 그러나 결과부터 먼저 말하겠다. 그 옷은 명지대 내 연구실에 소포로 왔고 돈도 서류도 그대로 들어 있었다. 지금 그 옷을 입고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다.
▲ 옷을 두고 나온 휴게소(김사장과 필자)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윗 옷을 두고 온 집사람은 국제전화를 4 번쯤 하고도 옷을 못 찾았다. 내가 5년 전 미국에서 470불 주고 산 이탈리아제 옷이다. 집 사람이 제일 좋아하던 건데…. 내가 농담으로 "옷이 자기 고향 찾아 간 건데 뭘" 하면 이 사람은 웃지도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8년간 성악을 공부한 음대 하교수가 전화통역을 해주었다. 하교수가 "이탈리아는 직접 찾아가 싸워서 찾지 않으면 옷을 포기 해야 합니다" 하는 소리를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무슨 놈의 나라가…
베네치아(Venetia)
터널을 약 20개쯤 지나며 알프스 산맥을 통과한 후에야 우리는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새로운 밀레니엄(Millennium) 기획으로 워싱턴 포스트지가 선정 한 '지난 천년 동안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16 세기의 베니스'가 뽑혔다. 문호 괴테도 이 도시를 그렇게 사랑했다고 한다.
인구 30만명. 베네치아의 영어 이름은 베니스(Venice). 118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물의 도시'다. 섬들은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水路)로 곤돌라(Gondola)를 타고 왕래 한다. 이런 여건이 베네치아의 독특한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 '물의 도시'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567년 게르만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족이 베네치아 만(灣)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현재 베네치아는 로마, 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지이다. 육지와는 철교, 다리로 연결 되어 있다. 이 다리 위를 차로 달리는데 1열로 높이 늘어서 있는 가로등의 독특한 디자인이 내 눈길을 끈다. 우리는 차를 주차시키고 배(Ferry)를 타고 베네치아의 중심부 산 마르코 광장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다 말고 훼리(Ferry Boat)가 엉뚱한 곳에 서더니 승객에게 다 내리라고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곤돌라 경기대회다. 산 마르코 광장은 거기서부터 걸어 가라고 한다. 강변 양 쪽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응원을 하고 있다. 대부분이 강변에 걸터 앉아 있다. 인산인해다. 서양에서는 드문 사람 구경이다. 더운 날 사람 속을 헤집고 간다는 것이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우리는 틈틈이 곤돌라 경기를 구경하면서도 산 마르코 광장만 향해서 걸었다. 너무 더워 중간에 아이스 바와 찬 음료를 사 먹었다.
▲ 베니스의 수로
3~40 분쯤 걸으면서 김사장은 아수라장인 분위기를 보고 나에게 "독일보다 훨씬 후진데요"한다. 이상한 골목 길들을 지나 우리는 드디어 산 마르코 광장에 도달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환상적으로 변한다. 비둘기 떼 속에 양 옆에 늘어선 비잔틴 풍의 건물 사이에 넓은 광장이 나타난다. 광장 내 여러 노상카페 마다 밴드가 라이브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오렌지쥬스 한 잔에 10 유로나 하는 바가지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청한 곡의 멜로디를 들으며 방문자들은 자리 값을 기꺼이 낸다. 이 광장에 앉아 있노라면 세상 일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오늘의 산 마르코 광장은 사람도 비둘기도 더 많아진 것 같다.
▲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
▲ 산 마르코 광장
우리는 광장 한복판 길바닥에 앉았다. 사방에서 비둘기 떼가 날고 감미로운 이탈리아 음악이 선율을 타고 날라온다. 광장을 에워싼 비잔틴 풍의 건축물들은 흰-회색으로 일정하게 늘어서 있는데 바다에서 불어 오는 미풍, 냄새와 함께 너무 환상적이다. 집사람은 분위기에 취해서 눈을 감고 나에게 나른하게 기대어 온다.
▲ 분위기에 취한 집사람, 궁전입구(Porta della carta 1438)
30년 전에 유럽을 돌아 본 우리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베네치아를 꼽았다. 이번에 다시 와보니 역시 우리의 눈은 정확했다. 이 물의 도시는 S자형의 대운하(Grand Cannel)가 시가지 중앙을 관통하고, 운하 출구 쪽에 '산 마르코 광장(廣場)'이 자리 하고 있다. 이 광장은 산 마르코 대성당을 비롯한 교회, 궁전과 더불어 13세기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의 몇몇 건축물에서는 동방의 영향을 반영하는 비잔틴 풍(風)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산마르코 광장을 떠나, 뒷골목에 자리한 인터넷 카페에서 우리는 1시간을 보냈다. 집사람은 명지대 대학원과 연락하기 바쁘고 김사장은 엘레나 일로 바쁘다. 김사장이 "두분이 같이 다니시니까 부러워 죽겠어요. 저도 5년전 여기와서 만난 엘레나를 불러 낼래요" 한다. 내가 "정말 불러낼 능력은 있느냐?"고 놀리니까, 증명하려고 컴퓨터만 보면 계속 이메일을 보낸다. 흥분할 일이 없는 나만 30분만에 인터넷을 끝내고 무료하게 앉아 있었다. "1시간에 1만원이 넘는 이 곳에 왜 내가 쓸데없이 돈을 허비해?"
인터넷 카페 근처의 뒷 골목들은 아기자기한 작은 상점들과 식당으로 꽉 찼다. 특히 유리제품 가게 앞에만 가면 김사장이 상점 안을 기웃거린다. "무언지 마음이 끌리는 데가 있나?" 불빛을 받은 유리제품들이 동화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인 것 같다. 유리 세공업(細工業)으로 유명한 무라노섬에선 유리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화려한 유리제품에 군침흘리는 집사람을 "여기는 바가지야" 하며 내가 데리고 나왔다. 집사람이 요즘도 "베네치아만큼 좋은 디자인의 유리제품이 다른 곳엔 없어요. 값도 알아보니까 거기가 더 쌌고요"하며 나를 원망한다. 무라노 섬과 카지노로 유명한 리도까지 베네치아시에 포함된다.
중세 베네치아는 무역으로 번영하여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 중에서 가장 부강한 곳으로 성장하였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에 점령되기까지 반세기 이상은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 우리는 유명한 베네치아 대운하를 배로 돌았다. 물의 도시의 아름다움에 드디어 김사장도 감명을 받는다. 배에서 몇줄 뒤에 있는 나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교수님, 너무 아름다워요"한다. 물가 건물 앞에는 작대기가 물 속으로 많이 꽂혀있다. 건물이 가라 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과학적 머리가 둔한 나는 이해가 안 가지만 그 작대기가 건물이 가라 앉는 것을 방지 할 수 있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 집집마다 막대기가 꽂혀 있다
베네치아를 떠나기 위해 우리 차를 세워 놓은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장 화장실에 들어간 김사장이 사진을 찍고 난리다. 화장실 좌변기가 이상하다고 한다. 변기가 밑에 기본 골격만 있고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다. 김사장은 구두를 신고 올라 앉아 일을 본 모양인데 그러다 행여 미끄러지면? (그래야 놀릴 일이 생겨 신나는 건데^^) 김사장은 여행 내내 이 일로 의구심을 떨치질 못하고 그 얘기를 자주 하길래 내가 관심을 더 고상한 곳에 두라고 구박했다. "그런데 정말 왜 없을까."
▲ 베네치아의 밤
우리는 다음 목적지 베로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고속도로(Autostrada)에서 운전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 미친 X들이다.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다. 160km 이상 달리고 있는 차 앞으로 1m도 안되게 45도 각도로 끊고 들어온다. 깜박이도 안 킨다. 한 두번이 아니고 여러번을 당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집사람이 겁을 먹었다. "제가 서울에서 다른 운전자들을 욕했었는데 그 사람들은 양반이었네요."
▲ 베로나(Verona)
이탈리아 북부 교통, 상업의 중심지이다. 로마 시대의 건조물로는 원형극장과 아디제강(江)의 다리가 있다. 12~13세기에는 롬바르디아의 지배하에 번영하였다. 베로나는《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로 유명하다. 지금은 곡물, 기계, 제지, 인쇄의 중심지이다. 인구 약 26만 5천명.
▲ 베로나 거리 줄리엣 집 발코니
▲ 베로나
베로나는 야외 오페라 극장(Arena)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호텔을 아레나 근처에 잡았다. 지금이 시즌이라 전 유럽에서 오페라 팬들이 와 있다. 호텔에 Check-In을 한 후 거리로 나온 우리는 길바닥이 다 대리석인 것을 보고 놀랐다. "아니 이 비싼 대리석을 전 도시 바닥에 깔다니!" 하여튼 길을 밟는 질감은 아주 좋다. 이 지방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리석 산지이긴 하지만 설마 이럴줄이야!
우리는 혹시 지금이라도 오페라를 볼 수 있을까 하여 아레나 쪽으로 갔다. 유명한 베로나의 원형극장이 눈 앞에 나타난다. 내가 수십번을 TV 중계로만 보던 곳이다. 볼 때 마다 녹화한 테이프를 지금도 여러 개 갖고 있다. 아레나는 TV로 볼 때 보다 더 아늑했다. 약 2천년 전 로마 시절에 지은 돌벽에 조명을 받고 있는 원형극장은 멋과 무게를 함께 지녔다.
아레나 앞에는 대리석이 아닌 작은 돌들을 박아 놓은 넓은 광장이 나온다. 광장에는 여러 개의 노상 레스트랑과 카페가 있고 선남선녀들이 앉아 있다. 광장의 불빛, 멋쟁이 유럽인들, 전체 분위기에 낭만과 여유가 넘친다. 아레나에 갔더니 오페라가 끝날 무렵이라고 한다. 입구가 50여 개인데 전부 안내원들이 지키고 있다. 나는 노천극장이라 어딘지 공짜로 그냥 들어 가는 길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이 어리석었다.
▲ 노천 극장 외부/내부
오페라가 끝 날 무렵이니까 그냥 들여 보내 달라고 부탁해 봤더니 절대 안 된단다. 돈을 내겠다고 했더니 매표소도 문을 닫아서 안 된다고 한다. 이 때 집사람이 일찍 나오는 어느 이탈리아 부부에게 가서 "우리 남편이 성악을 했는데 오페라를 조금이라도 보고 싶으니까 사용한 표를 줄 수 있겠냐" 고 부탁해서 표 두장을 얻어 들고 온다. 그 표로는 58번 입구로만 입장이 가능하다고 하여 부지런히 뛰어 갔다. 집사람이 눈치 것 "저는 광장에서 구경도 하고 쉬고 싶어요" 하며 김사장에게 표를 양보한다. 이 사람은 이럴 때 자기가 보겠다고 나서는 염치는 거의 없는 인간이다. 속으로는 몹시 보고 싶었을텐데.
아레나 안 쪽으로 들어가니까 주연 남녀가 아이다(Aida – Verdi 작곡) 마지막 '죽음의 2중창' 장면을 노래하고 있다. 이집트 사령관 라다메스가 아이다 때문에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지하감옥에 들어 갔는데 인기척이 있어 보니까 사랑하는 아이다가 같이 죽으러 숨어 들어와 있다. 두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서로 위로하며 사랑을 노래한다. 노천극장은 음향이 아주 좋았다. 성악가 두 명이 피아니시모로 노래할 때도 뒤까지 깨끗하게 잘 들린다. 우리 자리는 3층 근처다. 2만 여명의 청중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경청하고 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나고 무대에서는 화려한 아리아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더 듣고 싶은데 불과 10분만에 끝났다. "부라보" 환호 속에서 출연자들의 무대인사가 계속되는 동안에 우리는 아레나를 나왔다.
"그 많은 사람이 그렇게 조용하게 노래를 듣는 것이 감명이네요." "분위기가 엄숙하고 여기에 온 보람이 있는데요." 오페라를 잘 모르는 김 사장이 한 말들이다. 밖에 기다리고 있던 집 사람이 우리를 만나더니 "오페라를 보고 나오는 저 많은 사람들이 한결 같이 멋쟁이에요" "옷을 너무 잘 입었어요" 하며 감탄한다. 우리는 광장 끝편에 있는 맥도날드로 가서 저녁을 때우고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에서 투숙객에게 여권을 맡길 것을 요구했다. 유럽에서는 자주 있는 일.
다음날 아침 우리는 내부를 못 본 집사람을 구경시켜줄 겸 다시 아레나로 갔다. 입장료가 1인당 3유로다. 텅 빈 아레나 중앙에 스핑크스로 장식된 큰 무대가 압도한다. 옛날에는 검투사가 있었을 만한 방들이 이제는 화장실, 출연자 대기실, 사무실 등으로 쓰이고 있다. 두꺼운 돌벽을 보노라면 "이탈리아는 유적을 팔아먹고 산다"는 말이 실감난다. 로마의 콜로세움에 갔을 때는 벽이 여러군데 허물어진 유적지였으나, 이곳 아레나는 현재 오페라 극장으로 사용하고 있고 보존 또한 완벽하다.
▲ 아레나
2천 년이 넘는 그 옛날에 수 만명의 사람들을 한 군데 모아 놓고 보통 목 소리로 말해도 다 들리게 만든 로마인의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주위가 산만하지 않게 집중시켜 놓으면 지배자나 국가에 대한 의식, 심리, 자세까지 우리와는 다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레나를 나와 시내를 한바퀴 돈후 우리는 다음 목적지 밀라노를 향해 고속도로로 나갔다. 내가 지난 2주 동안 다닌 영국, 아일랜드, 네델란드, 독일 모두 고속도로비를 안 받았는데, 이곳 이탈리아에서는 받는다. 그래도 30 년 전 이탈리아에 왔을 때는 노면이 나쁜데다 돈까지 받길래 불평을 했는데 지금의 도로상태는 많이 좋아진 것 같다.
밀라노(Milano)
롬바르디아(Lombardia)주의 수도다. 11세기경 롬바르디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163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6번이나 시가지가 파괴되었으나, 밀라노는 롬바르디아 동맹에 가담하여, 레냐노 싸움에서 황제의 군대를 무찔렀다. 1880년대에는 알프스 산록의 수력발전을 기초로 하여, 금속, 화학, 기계 등 중화학공업이 발달하여 이탈리아 최대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공업지대는 시의 북부, 그리고 다시 서부·동부로 발전해 이탈리아 최대의 도시권(인구 440만)을 형성하고 있다.
▲ 두오모 광장
이탈리아의 북쪽은 잘 살고 남쪽은 가난하다. 북쪽은 키가 크고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사람이 많다. 남쪽에는 키가 땅딸하고 눈과 눈썹이 시커멓게 짙은 사람이 많다. 북에는 게르만, 켈트, 롬바르디아의 피가 많이 섞였고 남에는 그리스 라틴계 인종이 대부분이다. 그런 이탈리아의 북쪽을 대표하는 도시가 밀라노다. 밀라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시가지의 많은 부분이 폭격의 피해를 입었다. 지금은 중앙역(驛) 중심지대는 고층건물이 줄을 이은 오피스가(街)로 변모되고, 지하철도 정비되어, 로마와는 다른 근대적 상공업도시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 두오모 앞 아케이드
밀라노의 많은 역사적인 건조물 가운데 4세기 말에 창설된 성(聖) 암브로시우스 성당, 백 대리석 고딕양식의 대성당, 브라만테의 손이 가해진 성(聖) 마리아 성당과 그 성당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벽화 <최후의 만찬> 등이 유명하다. 문화의 중심지로 오페라 극장인 라스칼라 극장, 4개의 대학, 많은 미술관이 있다. 밀라노에 도착한 우리는 차를 중심가에서 떨어진 로마 시대의 아치가 있는 곳에 세워 두고 중심가 두오모(Duomo)에 15분쯤 지하철로 갔다. 어디나 중심가는 주차비가 비싸서 오래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차 방법을 가르쳐준 그 곳 대학생에게 김사장이 가져온 한국 민속 그림이 있는 볼펜 하나를 주었다.
무슨 주차 딱지가 오후 5시까지 5개씩이나 있다. 내가 밀라노에 오면서 제일 보고 싶었던 곳이 라스칼라 오페라극장이다.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런던의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과 밀라노의 라스칼라(La Scala)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밀라노를 재건할 적에 오페라하우스를 제일 먼저 복구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만큼 오페라를 사랑한다. 두오모 광장 뒷편에 있는 라스칼라에 갔더니 보수 중이라 실망했다. 광장 정면 앞쪽에 자리 잡고있는 밀라노 대성당도 보수 중이었다.
▲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내부
오페라 극장 앞 광장에서 어느 노인 한 명이 소리를 마구 지르며 떠드는데 목소리가 꽤 좋다. 내가 경찰관에게 "저 노인이 왜 떠드느냐?" 고 묻자 "He’s crazy!" 라고 대답한다. 언어 때문에 자동 발성이 돼 있나? 이탈리아 어는 모음으로 끝나는 말이 95%인데 우리 한국말은 97%쯤 된다. 이론 상으로는 우리가 더 좋은 성악가를 배출 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영어는 협상용이라 상인들에게 좋은 언어이고, 이탈리아어는 시끄러워서 싸울 때 좋고, 독일어는 인간이 쓰기에는 조금 그렇고 개하고나 말할 때 알맞고, 프랑스어가 인간이 사용할 언어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어느 이탈리아 사람이 나에게 불어는 호모들이 사용하는 말이고, 독일어는 전쟁용이고 이탈리아어가 인간이 사용할 언어라고 하며 웃는다.
유럽에서는 안 좋은 물건에는 다른 나라 이름을 붙여 사용한다. 예를 들어 콘돔(condom)을 영국에서는 'French Letter' 프랑스에서는 'English Hat' 홀란드에서는 'German Boot' 등으로 부른다. 우리는 점심 때가 되어서 한국식당에 택시로 갔다. 유럽 교민신문에는 유럽전역 내에 한국식당, 민박집, 사업체 정보를 많이 싣고 있다. 우리는 지도를 보고 가까우면 택시로 다니는데 지금 탄 택시가 10분 후에 '진림' 식당에 도착했다.
우리 옆 자리에는 예쁘게 생긴 일본 여대생 4명이 식사를 하고 있다. 우리가 말을 거니까 곧 한국말로 "저희는 일본교포 3세입니다"한다. 조련계 학교를 다녀서 한국말을 잘 한다. 일본 교포들이 민단계면 한국말을 못하고 조련계면 잘한다. 한국정부가 교포들의 민족성 보존정책을 소홀히 한 결과다. 교포 3세들에게 내가 며칠 후 명지대생들 인솔교수로 일본에 간다고 했더니 자기네에게 연락주면 만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 있는 동안 너무 바빠서 연락을 못했다. 10월 초에 세미나에 참가하러 일본에 다시 가니까 그 때 기회를 봐야지.
유럽으로 떠나기 직전, 명지대 산업디자인학과 과장인 민경우교수가 자기가 졸업한 밀라노 디자인 학교와 명지대 디자인 학과와 자매결연을 학교차원에서 해달라고 부탁했다. 민교수가 관련서류를 나에게 주었는데 유럽대학들과 연락하는 서류 속에 휩쓸렸는지 안 보인다. 유럽에 떠나기 전에 그것을 처리 못하고 와, 마음 한 구석이 계속 찝찝했다. 나는 그래서 그 학교를 직접 방문하여 그 일을 처리하려고 마음 먹었다. 식당 주인에게 부탁하여 밀라노 디자인 학교 주소와 지도를 얻었다. 이 식당 고 1짜리 아들이 이탈리아어와 한국어를 다 잘 한다. 그 학생이 디자인 학교에 전화를 해서 담당자를 바꿔 주었다.
▲ 밀라노 패션쇼
전화를 해놓고 택시로 디자인 학교에 왔다. 집사람은 밖에서 돌아 다니고 김사장만 따라 들어 왔다. 한국 남자와 3개월 전에 결혼했다는 뚱뚱한 파올라(Paola)와 국제부에 원래 일하고 있던 미인 야나(Yana)가 우리를 맞아 준다. 담당교수가 해외출장 중이라 이 두 명과 대충 얘기를 한 후 Campus Tour를 했다. 야나가 학교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 한다. 아까 대화할 때는 형편 없었는데……. 필요한 영어만 외우고 여러번 해 본 티가 난다. 세계 제일의 디자인 학교라고 하는데 캠퍼스는 별로 였고 학생들 작품 중에는 상상력(Imagination)이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몇 개 눈에 띈다. 파올라가 다음달 한국에 와서 나를 만나겠다고 한다. 김사장이 "이왕이면 예쁜 야나가 왔으면 좋겠어요"한다(속 없기는?)
우리는 차를 주차한 곳이 학교에서 멀지 않은 걸 알고 택시로 돌아왔다. 우리는 서둘러 몽불랑으로 향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다. 유럽은 위도가 높아 해가 밤 10시까지도 훤하다. 해가 있을 때 여행해야 제대로 본다. 몽블랑이 가까워 오면서 양 옆 산맥이 장관을 연출하며 계속된다. 산 속 마을들은 아름다우나 관리를 잘 못해 궁색한 것이 보인다. 유럽 여행 중 체코 국경지방과 함께 가장 못 사는 곳이었다.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사르데냐 왕국의 중심지가 이 근처였는데 그렇다. 우리는 아오스타(Aosta)라는 산 속마을에서 자기로 했다.
▲ 산 속 마을 아오스타
이 곳 호텔 방이 담배 냄새가 지독해서 잘 수가 없다. 내가 프론트에 있는 주인 영감에게 그 얘길하고 방을 바꿔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 영감이 영어를 못해서 그런지 아주 비협조적이다. 참다 못한 내가 소리를 막 질렀다. 겁먹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영감이 그제야 갑자기 무슨 말인지 깨달은 것처럼 다른 방 열쇠를 준다. 소리 지르길 잘했나? 9호에서 12호로 옮기니까 냄새가 안 난다. 아오스타엔 아우구스투스때 아치, 수력발전소, 맥주공장 등이 있다고 호텔 안내문에 씌여있다.
몬테 비안코(Monte Bianco)
몬테 비안코(Monte Bianco)는 불어로 몽블랑(Mon Blanc)이다. '흰산'이란 뜻이다. 알프스 산맥 중 최고봉으로 높이가 4,810m이다. 이탈리아쪽 기지는 안트라베(Antrabe). 해발 1,306미터다. 안트라베는 서양 스키휴양지가 가진 분위기를 다 소유하고 있는 곳이다. 건물들 윗 부분은 경사가 가파른 지붕, 나무 벽, 밑 부분은 돌로 되어 있다. 그 내부에는 카페, 기념품 가게, 식당, 바 등이 있다. 산 속의 특유한 냄새, 사람들의 들뜬 분위기, 냉랭한 공기는 나까지 설래게 만든다.
▲ 몬테 비안코(몽블랑) 정상(4,810m)
우리는 20 분쯤 줄에 서 있다가 표를 샀다. 산 정상에는 케이블카로 올라간다. 처음엔 32 인승인 케이블카가 중간에 8 인용으로 갈아 탄다. 8 명씩 자르는데 우리 부부 다음 김사장이 탈 차례에 자른다. 김사장은 우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다음 차를 기다리게 되었다. 잠깐 떨어지는데도 걱정 된다. “하필이면 거기서 잘려?”
산정에 올라오니 바닥이 나무로 마루처럼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있다. 나무는 언제나 인간들에게 따뜻한 친화감을 준다. 5 백 명 이상은 수용할 정도로 크다. 사방이 눈으로 덮인 산 정상들로 둘러 쌓여 있다. 장관이다. 그러나 스위스 저 쪽 편에 있는 유명한 융프라우 보다는 전망이 덜 압도 한다. 집사람이 나에게 오더니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요”. 한다. 이 사람은 해발 3 천 미터 이상만 오면 꼭 이런다. “무슨 놈의 몸둥아리가 그 모양이야?” 내가 구박했다.
▲ 고도를 못 이기는 집사람
조금 있다가 김사장이 나타났다. 첫 마디가 “어지럽고 머리가 아픈데요”. 한다. 쯧쯧…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곳에서 다시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프랑스 쪽으로 가면 몽블랑의 정상(4,807m)이 나온다. 그 쪽이 융프라우에 맞먹는 경관이 있다고 들었다. 케이블카 타는 곳에 가서 보니 줄이 너무 길어 1 시간 30분 이상 기다리란다. 나는 미련 없이 그 쪽 코스를 포기했다. 시간과 싸우는 이런 형태의 여행에서는 결단력이 빨라야 한다. 우리는 안트라베(엉트레브)로 내려와서 스위스의 제네바를 향해 떠났다. 유명한 몽블랑 터널을 25유로나 지불하고 나야 통과할 수 있다.
이 터널의 길이는 11.6 km. 1958년 착공되어 65년 7월에 개통되었다. 이 터널의 개통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자동차 거리가 약 200 km가 단축되었다. ‘유럽의 새 동맥’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집 사람이 나에게 “무슨 굴이 아무리 달려도 끝이 없어요?” 한다. 1999년 이 터널에서 불이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일이 있다. 지금은 굴 안에 소화기가 자주 설치되어 있다. 차를 천천히 달려서 그런지 체감으로 30 분은 달린 것 같다. 터널을 지나니까 스위스 국경이 나온다.
이탈리아는 면적이 301,338 평방 미터로 한반도보다 약 반배쯤 크다. 2011년 인구조사에는 6천 백만명으로 나왔다. 국민 일인당 평균소득은 GDP로 36,267불이고 PPP로는 30,464불이다. ‘G 8’과 ‘G 20’에 속하고 있으며 경제규모 세계 8위다. IMF 수치에 의하면 2010년도 GDP는 한국 1조 70억불, 이탈리아 2조 551억불이며, GDP 순위는 한국 15위, 이탈리아는 8위다. 그러나 최근 남유럽 전체와 같이 경제난을 겪고 있다. 화폐는 유로(Euro)를 쓰고 북으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접경하고 있다.
여기서 이탈리아 편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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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YGEM / 한상대(전 시드니대 교수 sdhahn@gmail.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