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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보급 전도사

작성자고추잠자리|작성시간12.12.10|조회수2,992 목록 댓글 0

천풍조의 가을 편지
우크라이나-러시아-터키-불가리아 잇는 흑해바둑대회가 꿈
[인터뷰] 최병준  2012-09-30 오전 12:01   [프린트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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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예프에서 300km 떨어진 우크라이나 로브노(Rovno)라는 작은 도시, 학교에서 교양과목으로 바둑을 가르치며 6월9일-10일에 걸쳐 바둑대회가 열렸다.


"바둑에 꼭 승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나자마자 바둑에는 승부말고도 훨씬 더 큰 영역이 있다는 말부터 꺼낸다. 영어 하나만 가지고선 안되겠다 싶어 러시아 말을 독학으로 배운 프로기사가 있다. 올해 나이 65세, 27년 전부터 해외 보급에 관심을 가지고 뛰어들다 보니 많은 나라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익혔다. 천풍조 9단이다.

6월 7일부터 9월 6일까지 우크라이나에서 3개월간 중기 바둑 보급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천풍조 9단을 9월 13일 서울 홍익동의 한국기원서 만났다. 우크라이나의 바둑을 본 천 9단은 큰 기대에 차 있었다.

"우크라이나에 가기 전 모든 일정을 잡아놨어요. 바둑대회가 있는 곳은 모두 갔고, 없는 곳에서는 마스터 클래스 란 이름으로 지도기 혹은 강좌를 했어요. 웬만한 도시는 모두 갔어요. 요즘 경제사정이 많이 좋지는 못해도 우크라이나 같은 과거 소련연방국가들은 체스를 마인드스포츠로 국가에서 장려한 기반이 있어서 바둑을 잘 받아들입니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게 바둑인구는 작아도 어린이들이 많이 바둑을 배웁니다. 저는 그런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칠 현지 교사들을 가르쳐 주는 거죠"

우크라이나는 바둑에 있어선 기회의 땅이다

원래 천 9단은 러시아 바둑 보급으로 유명하다. 러시아는 20년전엔 다른 유럽지역에 비해 바둑이 약했다. 그때 러시아를 가보고 영어만 가지고는 안되겠다 싶어 러시아어를 독학했다. 천 9단이 자비를 들여가면서 대회도 열던 시절이었지만 지금도 자부심이 있다. 현재 러시아는 극동 블라디보스톡부터 서방세계와 맞닿은 전지역까지 많은 도시에 바둑클럽이 생겼다.

천 9단은 "제가 돈은 못벌었어도 이런 부분 상당한 자긍심이 있어요. 제가 본 우크라이나도 현재 그럴 조짐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 항구도시 세바스토폴(Sevastopol)에 가선 지도기를 뒀다. 해안 절벽에 세워진 제비성(Swallow Castle)을 지나면서

놀랍게도 이미 우크라니아 키에프와 또 한개 소도시인 로브노(Rovno)에는 바둑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인텔리젠탈 부문 교양 과목에 체스와 함께 '바둑'이 교과 과목으로 들어가 있다. 기본적으로 바둑을 체스처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는 것이다. 천 9단이 추정하기에 우크라이나 바둑인구는 정확한 숫자를 말하긴 어렵지만 "활동가들은 300명이라 할 수 있고, 1만명은 즐기는 수준"이라 본다. 역시나 이 인구의 장점은 아이들이 바둑을 배운다는 데에 있다.

천 9단과 우크라이나와의 큰 인연은 4년전부터였다. 4년 전 열린 우크라이나 대사관배 바둑대회를 참관했다가 현지의 바둑영재인 마리아 자카르첸코를 한국으로 데려와 한국기원 연구생에 등록한 것. 당시 14살이었고 현재 여자연구생 2조인데 곧 1조 될 것 같다. 현재 만 17살으로 한국기원과 가까운 골든벨 바둑도장에서 공부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한다.

2012년 올해는 한국-우크라이나 수교 20주년이 됐고, 8월 25일과 26일 키에프에서 20주년 바둑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20년 이상의 바둑보급활동에 아쉽게 느꼈던 것은 없었을까? 그럴리는 없을 것이다.

"나이들어 승부에서 멀어지면 보급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50대 기사들이 이를 많이 하면 좋은데 영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쉬워요. 프로기사들은 외국어중에서 최소 영어 하나정도라도 잘 배우고 해야합니다. 외국어는 프로기사에게 필수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에선 A기전 끝나면 바로 B 기전, 그다음 C기전 이런 식으로 일년 열 두달 흘러가죠. 실은 그것은 한중일 정상급 2백명의 잔치에요. 그것 잘 하면 좋아하고 아니면 난리나고, 쳇바퀴마냥 매해 그러는데 바둑이 그게 전부는 아니죠."

천 9단이 이야기하고자하는 바는 바둑의 승부 밖에 존재하는 문화다.

"서양은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아요. 일본은 바둑을 문화적으로 풀어낸 게 많고 중국도 은근히 그런 게 많아요. 가령 러시아에 일본식 스시바가 많은데 거기 젊은이들은 그것을 그냥 '패션'이라고 불러요. 우리는 바둑에서 '승부에서 이겼다는 것'만 있지 다른 것이 없어서 안타까워요. 여기서 빠져있는 건 '품격'이에요. 바둑과 관련해서 꼭 승부만이 아니라 품격으로 나오는 그런 게 있어야 존경을 받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바둑두는 기계 취급을 받게 되어 있기 마련이에요. 누가 승부가 세냐 하는 것으로 허구한 날을 지내는데, 그러다보니 젊은 나이인 30대초반에 프로기사들이 인생의 많은 걸 포기하는 것을 봤어요.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승부도 물론 있고 보급도 있습니다."

바둑 보급지역 선정과 파견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처음에는 그냥 맨몸으로 가서 부딪치는 거였다면, 이제 보급에서도 세련되게 합리적인 방법을 더 찾아보고 준비하자는 것이다.

"가령 러시아는 이제 자생적인 바둑대회도 많아졌어요. 그런데를 제대로 지원하면 무척 커지죠. 좀 세밀하고 합리적으로 하는 게 좋겠지요. 러시아 같은 곳은 어마어마한 곳이에요. 이런 곳은 지역을 나눠서 더 보내야 하고, 사람들의 취향이 몰리는 조그만 지역, 혹은 같은 지역에 너무 많이 보급하러 몰려가고 하는 것은 좋지 않겠죠. "

장년을 뛰어넘은 기사로서 프로단위제에 대한 다소 파격적인 이야기도 펼쳤다. 이미 예전부터 주장하는 것이라 소개했다.

"단 시스템이 있잖아요, 제가 우크라이나 있을 때 9단이 됐는데, 입신의 경지, 그런 말 쓰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인들이 프로 단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양나라 위기구품을 도입한 것이에요. 아직도 이게 지금 현실에 맞다면 그러면, 어떻게 초단인 수졸이 9단 입신을 이기죠? 프로단의 다른 말로도 쓰이는 이런 말들이 이미 현실과 뻔히 다른 것 알면서도 바둑계에선 그냥 씁니다. 단위를 없애야 해요. 이미 프로바둑세계는 모든 것을 랭킹으로 하고 있어요. 프로 랭킹에 모든 메리트도 있어요. 그러면 단의 의미가 없어요. 게다가 프로는 모두 호선인데 단이 왜 필요하죠? 프로골퍼에게 핸디있는 거 봤어요? 말하자면 단은 아마추어 선수에게 오히려 필요해요."

이런 연장선상에서 보급 프로의 필요성도 이야기했다.

"프로는 승부만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프로가 된 이상 힘이 있을 때는 승부를 해야 하고 그 기록인 기보를 남기죠. 그런 다음 언어문제나 보급에 대한 사명감, 제반 준비를 한 다음 보급활동을 해야지, 토너먼트 기사가 경험이나 좀 쌓으려고, 어학연수나 좀 해보려고, 여행삼아 이곳 저곳으로 기웃거리는 거는 좀 보기 좋지 않아요. 프로기사 해외 보급을 단기, 중기, 장기 파견으로 보내는데, 27년 보급 해 온 저를, 이제 나이 많다고 빼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프로는 단위보다는 '토너먼트와 보급'을 좀 더 확실히 나누는 게 좋아보입니다. 프로들은 나이들어 감에 따라 경력에 맞춰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 보급분야를 찾아봐야 하겠죠. 보급할 사람들을 양성하자면 가령 아마추어인 바둑학과 학생들도 필요한 것을 제대로 배워서 '보급프로'자격증을 가지고 해외로 보급을 나갈 수도 있을 것이잖아요."


▲ 터키, 이스탄불에서, 이스탄불은 1600만명이 사는 대도시다. 한인회도 잘 조직되어 있다.


▲ 우크라이나 남부 크리미아 반도의 흑해 해변도시인 페오도시아(Feodosia)에서 6월16일~24일 까지 열린 크리미아컵 국제바둑 페스티발에 초청받았다. 이곳에선 지도대국 과 마스터 강의를 맡아 일정을 소화했다.

흑해 바둑대회의 꿈

우크라이나 사람들, 특히 휴양지에서 바둑을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승부에 매일 필요가 없음을 이들 흑해주변국가 바둑 애호가들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 우크라이나는 땅이 흑토라 해서 과일도 잘 자라고 곡창지대죠. 경제가 어렵지만 물가도 싸고 좋고, 여름엔 몇달 가까이 휴양을 즐겨요.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와 비슷한 고유 말이 있지만 러시아어도 같이 씁니다. 웃긴 것은 크리미아 반도쪽은 모두 러시아 말을 쓰는데, 정작 우크라이나 말을 잘 모르는 거에요. 세바스토폴 해군기지 이쪽은 친 러시아고,크리미아 리퍼블릭(크림 공화국) 운동이라해서 분리주의적 경향이 약간 있죠. 그럼에도 이곳 흑해연안 도시들은 정말 아름다워요. 사람들은 해변가에서 아침, 오후, 저녁, 밤까지도 수영하고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은 수영을 하다가 자석 바둑판에 바둑을 두곤 해요."

"거꾸로 바둑 모르는 한국인들에게도 말할 수 있죠. 이렇게 서양사람들도 이렇게 막 바둑을 즐겁게 두는 데, 봐라! 너희도 이렇게 좋은 것을 배워라 하고 이야기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우크라이나 같은 곳에선 우리의 조그만 도움도 바둑보급에선 큰 도움이 되는 겁니다. "

우크라이나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 탓인지 빈부격차도 심하다고 한다. 원래 10% 부자이고 나머지는 90% 중산층이었는데, 지금은 90%가 모두 하류가 됐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그럼에도 삼성,LG,현대 등 한국제품은 여기서도 유명하고 잘 팔리는 편이고 실업자 문제가 심각하지만 삶에는 아직 여유는 있는 편.

천 9단의 큰 그림은 이곳 흑해 연안 도시들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가 구상하는 것은 흑해 바둑대회에요. 지금도 발칸 바둑대회는 있지만요. 흑해를 중심으로 북으론 우크라이나, 남으론 터키, 서쪽으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동으론 그루지아, 러시아가 있어요. 이들 나라의 흑해 연안도시를 배경으로 흑해 바둑대회가 열리면 굉장할 겁니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들이 많은 곳이에요. 우리 현대사에 잘 알려진 얄타도 원래 흑해주변의 관광도시로 유명한 곳이죠."

"터키만 해도 대단한 게 10년전은 바둑을 두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인터넷의 영향때문인지 대회도 많이 생기고, 참가자도 보통 100명씩 넘어가는 거에요. 터키 이스탄불 현지의 매호멧트란 30 안팎인 친구가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서 더 활발해 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의 기력은 프로와 6점 정도인데 바둑을 정말 좋아하죠."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이 바둑을 친밀하게 느끼고 좋아하는 까닭이 있을까?

"러시아 쪽은 바둑을 좋아하는 풍토죠. 러시아는 겨울이 길어요. 실내 오락이 발달한 거에요. 우크라이나는 위도상으로 보면 한국보다 훨씬 위쪽이에요. 지난 겨울에는 영하 40도였는데, 이번 여름은 38도가 될 만큼 더웠어요. "

아주 추운 극지는 바둑이 성장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러시아 야크츠쿠는 가장 추운도시로 유명합니다. 겨울에 영하 50도~60도를 가요. 거기에 대학교가 있어 저를 초청한 적도 있어요. 하바로프스크에서 몇 번 갈아타고 간다는데 11월에 이미 영하 20도 가량 된다는 겁니다. 특이한 곳이라 꼭 가고자 하긴 했는데 못 갔어요. 그런 곳은 바둑을 심어놓고 오는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인데요. 바둑 견문으로 한국에 아이들을 보내고 싶다는 의지도 있었어요."

천 9단의 끝맺는 말이 이어진다.

"두서없이 그냥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네요. 바둑엔 승부 이외에 사람이 있는 거에요. 또 품격도 있죠. 우리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해외 보급에 나선지 27년 됐지만 보급이 좋았어요. 특히 해외에 치중을 해왔죠. 제가 지금 9단이 되고나서 손자뻘과 무슨 승부를 하겠어요. 제가 가진 노하우로 계속 해외 보급활동을 할 각오입니다"

PS : 야쿠츠쿠엔 오는 11월 갈 수 있는지 생각중입니다. 단위 폐지와 이칭사용(위기구품) 폐지의 대안으로 프로기사의 경력에 맞는 호칭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고맙습니다. - 천풍조 9단



▲ 6월30일 부터 크리미아 남부 얄타(Yalta) 인근에 산악 바둑캠프가 열렸다. 7월4일 까지 바둑지도와 등산도 했고 인근 동굴 사원도 구경했다.


▲ 오뎃사 바둑대회에서 참가자들과 기념사진


▲ 흑해 연안은 대부분 해수욕을 하기에 알맞다. 사람들은 하루종일 수영을 하고 또 바둑을 둔다. 경제위기가 닥쳤다고는 해도 물가기 높지 않아 우리보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 바둑대회가 열리지 않는 곳에선 '마스터 클래스'을 열어 바둑강좌를 했다. 바둑을 왜 배워야 하는지, 배우면 무엇이 좋은지도 중요한 주제였다.


▲ 오뎃사-키예프 지역을 돌며, 바둑팬들과 수시로 지도다면기 시간을 가졌다


▲ 리보브(Livov)에서


▲ 크리미아 바둑대회 모습


▲ 6월25일에 페오도시아에서 크리미아 주정부 수도인 심페로폴(simferopol)로 이동해 이곳 바둑계를 주도하는 콘스탄틴 보즈니코프 씨가 운영하는 바둑도장, 체스회관에서 지도다면기를 뒀다. 아이들이 많고 무릎을 꿇고 두는 것도 신기하다


▲ 한-우크라이나 수교 20주년 기념 대회에서, 이곳은 확실히 어린이와 여성들의 바둑이 눈에 많이 띄인다. 그래서 바둑의 장래가 밝다


▲ 수교 20주년 바둑대회 전경


▲ 수교 20주년 대회 참가자들과 기념사진


▲ 이곳이 바로 이스탄불입니다. 천풍조 9단은 8개국(중국,일본,러시아,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미국)의 노래 하나쯤은 준비하고 다닌다. 원래 노래를 좋아해 전문가라는 소리도 듣는다. 팝송, 오페라 등 장르도 다양하고, 외국인들 앞에서 불러줄 한국 노래도 여러 장르로 준비하고 다닌다. 바둑 보급에 있어 여러가지 다양한 재능은 모두 도움이 되기 마련.


▲ 흑해 연안에서의 지도기


▲ 7월 26일부터 8월 7일까지 항구도시인 오뎃사(odessa)에 체류했다. 황금배 바둑대회가 8월 3일~5일에 열려 현지 바둑팬들과 많은 시간을 가졌다


▲ 우크라이나의 젊은 여성들은 대부분 무척 아름다웠다. 신기한 건 이들이 나이를 들어가면 100kg이 넘는 거구로 변할 때가 많다는 것, 불가사의다.


▲ 칼러 바둑알로 바둑을 두고 있다. 이 여성은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다.

영하40도 북동러시아 바둑보급
사하(Sakha)공화국 수도 야쿠츠크(Yakutsk)로 가다
2012-12-09 오전 11:41:25 입력 / 2012-12-09 오후 3:51:28 수정

본글은 프로기사 천풍조 9단이 북동러시아 바둑보급 리포트를 보내왔습니다.
이번 북동러시아 바둑보급은 11월 20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됐으며. 본 글을 작성한 천풍조 9단은 1990년대부터 해외 각국에 왕성한 바둑보급을 펼쳐 샤샤, 스베타 등 러시아 바둑고수를 한국에서 입단시킨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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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제일 추운 도시로 알려진 야쿠츠크(Yakutsk)에도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곳에서 여름부터 자꾸 와달라는 연락이 왔지만 시기와 조건이 여의치 않아 망설였다. 그러다가 구체적인 일정과 숙식, 왕복항공권을 보장받게 되어 가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지난 11월20일 러시아연방, 사하(Sakha)공화국 수도인 야쿠츠크에 있는 북동연방대학교(north eastern federal university)초청을 받아 출국해 북경을 경유하고 21일 오전 8시30분에 야쿠츠크 공항에 도착했다. 북위 62도에 있는 야쿠츠크는 서울에서 직선 거리로는 북쪽으로 약3800 km인데 북경공항에서 시베리아 항공으로 갈아타는 대기시간이 길어 12시간이 걸렸다. 만약 직항로가 있다면 약4시간 30분 만에 올수 있을 것이다.

1991년부터 러시아 바둑보급을 위해 모스코바를 시작으로 수많은 도시들을 다녀 보았지만 야쿠츠크는 워낙 외진 곳이고 바둑인들이 없어 이곳에 올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나를 초청한 북동연방대학교는 지적(intellectual) 게임 학과가 있으며 체스, 체크를 가르치고 있고 특히 체크(check)또는 일명 드래프츠(Draughts)는 야쿠츠크가 러시아뿐 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최강의 수준이라 한다.

예를 들면 지난 8월9일~23일 프랑스 릴레에서 열린 세계 두뇌스포츠 게임(World mind sports games)드래프츠 시합에서 사하선수들이 1위, 2위, 4위를 휩쓸었다한다. 러시아에서 체크는 샤스키라고 하며 국내용은 8간x8간, 국제용은 10간x10간을 사용하고 기물은 흑,백 각각 20개(국내용 19개)를 서로 포진해서 상대 기물을 먼저 다 잡는 쪽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이제는 시하공화국도 바둑에 관심을 가져 선수들을 양성하고 대중화하려는 적극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야쿠츠크 공항에서

그나저나 야쿠츠크 공항에 도착해보니 추위가 엄습했다. 비행기 안에서는 탑승객들이 만원이어서 내의를 입어 땀이 날 지경이었는데 두꺼운 외투를 입고도 출국장을 나서니 마치 냉동실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나를 마중 나온 사람들은 지적 게임 학과장 유리 니키폴로프, 체크 담당교수인 블라디미르 바라카사노프씨 이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승용차를 타고 호텔로 직행했다. 길거리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덥혀있어 겨울이 실감났다. 지금 바깥은 몇도 쯤 되느냐고 묻자 영하 35도 정도인데 별로 춥지 않다(?)고 했다.

▲첫날 호텔 앞에서

시내 중심지에 있는 띄긴 다르한(Tuigin Darkhan) 이라는 고급 호텔에 도착해 스위트 룸에 여장을 풀었다. 실내는 영상 20도를 넘어 안심하고 샤워를 하며 약 3시간 휴식을 취했다.


▲yaku2 나를 초대한 블라디미르 교수(왼쪽)와 부인 그리고 유리 학과장


블라디미르 교수가 오후 1시40분경에 부인(교육대학 교수)과 함께 호텔로 와서 인사를 나누고 또 이곳에 오래 동안 거주하고 있는 김행근 씨를 소개해주었다. 김씨는 46세로 한국외국어대학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사하공화국에 와서 야쿠트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으며 통역과 사업을 병행해서 유명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우리는 오후 2시에 야쿠츠크 교육청을 방문해 이리나 파블로브나 부교육감을 면담하고 바둑에 관한 중요성과 학교에서 바둑수업을 장려하고 예산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해 긍정적 답변을 받았다.

 

▲교육청사 앞에서.


나는 한국을 예를 들어 시장배, 교육감배 바둑대회 등이 있다고도 설명하자 이리나 부교육감이 빙그레 웃었다. 블라디미르 교수와 유리 학과장은 나를 최대한 활용하며 매일 학교 교장이나 대학교 심지어 유치원 원장도 만나게 했다. 오후 4시경에 호텔로 돌아와서 한국에서 선물로 가져온 바둑용품과 한국기원에서 기증한 러시아어 번역 입문 바둑책, 초보용 시리즈를 전달했다.


▲ 체스,체커 센터(15년전 오픈)



▲체스를 즐기는 선생과 학생들

22일 오전 10시에 블라디미르 교수의 안내로 시내에 있는 체스, 체커 스포츠 문화 센터를 방문해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나 혹은 노인들이 체커를 두는 곳을 구경했다. 마치 한국의 기원 같은 분위기였고 대회를 치룰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어느 곳을 가나 사람들은 70%가 야쿠트인 들이며 동양인들의 얼굴들 이었다.

사하공화국도 러시아와 마찬가지 로 초, 중, 고등학교가 합쳐 있고 학교 교명은 지역번호로 표시되어 있었다. 오전 11시에는 인근의 31번 학교를 방문해서 여자 교장을 만났고 교실에서 수업중인 어린학생들은 일주일에 두번 컴퓨터로 바둑 기초를 배우고 있었다. 프로그램은 러시아 프로기사인 스베틀라나 쉭시나의 부친인 발레리 쉭신 씨가 만든 것이었다.

9줄 바둑에서 5점을 놓고도 흑돌이 전부 잡히는 정도로 학생들은 기초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를 가르쳐줄 바둑선생이 없고 이제 바둑을 보급하려는 블라디미스 교수도 15급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바둑이 체크나 체스보다 더 재미있고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고등학생 대상 대강당에서 바둑소개

오후 1시에는 교육대학교를 방문해 안토니나 그리고리예바 학장을 면담했고 강당에는 1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대기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나는 사회자의 소개를 받고 연단에 나가 바둑의 역사, 세계 바둑계와 한국 바둑의 현황 그리고 러시아 바둑계 발전사 등을 설명했다. 장래 교사가 될 학생들은 컴퓨터 바둑 프로그램(9줄바둑)으로 직접 두었으며 대부분이 컴퓨터에 패했다. 이곳에 내가 3개월만 가르쳐도 1천명 이상 10급 수준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눈 덮힌 맘모스 동상

23일 오전 10시에 블라디미르 교수의 안내로 흔히 맘모스(Mammoth)라고 불리우는 매머드박물관을 구경했다. 1만년 전까지 살아 있었다는 맘모스는 사하공화국에 무덤이 가장 많이 있다. 작년에는 줄기세포 연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황우석 박사 일행이 사하공화국에 와서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툰드라 맘모스 유전자를 채집하려고 왔다 한다.맘모스 복제 실현 가능성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두고 볼일이지만 여하튼 연방대학교에서 황박사 일행이 동토의 동굴에 있는 맘모스 무덤에 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한다.

오후 2시 북동연방대학을 방문해 총장을 면담하게 되어 있었는데 모스코바로 출장중이어서 부총장인 미하일 표도로프 씨를 대신 만났다. 앞으로 바둑을 지적게임으로 채택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바둑용품 구매와 바둑서적 구입, 바둑지도교사 채용 또는 양성 등 예산 확보가 주된 회의 였다. 부총장은 결정권이 없고 후에 총장에게 보고해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 모양이었다. 나의 초청비용도 총장의 결재로 지출이 가능했다 한다.

러시아에는 사립대학이 없다. 모두 국립, 주립(연방),시립대학이며 교수는 공무원과 같다. 이곳 북동연방대학교 총장은 사하공화국의 부통령을 역임한 이사에프나(Isaevna)라는 여성이며 권력서열 5위로 권한이 막강하다고 한다. 근래 사하공화국은 한국에 관심이 많다. 전 대통령인 쉬띠로프(Shitirov)를 비롯한 각료들 12명이 5년 전 한국을 방문했고 특히 포항시에서 경제, 관광등 상호 교류협력 방안을 논의한바 있다. 지금은 예고르 보리소프 (Borisov)씨가 대통령이며 임기는 5년에 연임이 가능하고 러시아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도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사하공화국은 면적이 한반도의 15배나 되는 310만 평방 km 이고 석유,석탄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특히 전 세계 25%에 해당하는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다. 그래서 사업차 찾아오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한다. 면적은 광활하지만 인구는 110만명, 야쿠트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이밖에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섞여 살고 있다. 야쿠트인들의 조상은 유목민족인 투르크인, 몽골인이며 언어도 터키어와 몽골어의 혼합어이다. 소수민족들 중에 에벤키인은 고구려, 발해에서 넘어왔다 한다.약 3백80년 전에 러시아군이 동진하면서 야쿠츠크에 요쇄를 건설하였고 사하(야쿠트의 이칭)는 전쟁 끝에 띄긴다르한 왕이 전사해 속국으로 되었다. 지금은 아쿠츠크에 약 35만명이 살고 있다.

▲야쿠츠크 숲 거리

사하는 동시베리아 해에서 흐르는 장대한 레나(lena)강이 남쪽으로 4400km 나 뻗어 있고 겨울에는 차량이 다닐 정도로 꽁꽁 얼어 있다. 낮이 짧아 오후 5시가 지나면 어두워 진다. 저녁에 길거리에는 인적이 드물고 일찍 귀가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이날은 영하 40도를 믿돌아 나도 저녁에는 호텔에서 식권으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일찍 쉬어야 했다. 이곳은 인터넷이 잘 안되는데 다행스럽게도 호텔에는 나의 노트북으로 무선연결이 가능해 국내소식을 알 수 있었다.

24일(토요일)에는 유리 학과장의 고향인 한드라스(Khandlas)를 방문했다.오전 10시에 블라디미르 교수와 함께 이곳을 가기 위해 자동차로 시외곽으로 빠져나오자 광활한 평지가 눈으로 덮혀 있었다. 들판에는 야생마들이 보였는데 유리 학과장 이야기를 들어보니 영하 50도가 넘어도 먹이를 찾고 들판에서 잠을 잔다고 했다. 남쪽으로 60km 를 가서 시골 마을의 학교에 도착했다.

이곳에도 교장과 교사,학생들이 환영하며 행사장에서 민속의상을 입은 여학생들이 피리같은 호무스(Khomus)를 불었다. 이어서 블라디미르 교수가 가져 온 바둑 영상물을 보여주었고 나도 바둑 강의를 했다.


▲얼어있는 레나강에서

학생들은 체커 대국을 했는데 앞으로 바둑용품을 구입하면 배울 계획이 있다 한다. 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인근의 레나 강변으로 갔는데 얼음에 구멍을 뚷고 낚시하는 사람들과 차량이 다니는 것이 보였다.

사하는 5월에 얼음이 녹고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6월1일 부터 8월31일 까지 3개월간 휴가를 가진다.7월에는 영상 30도 까지 올라 더워서 강변에서 수영도 한다고 했다.

y▲문을 닫은 동물원

오후 3시경에 야쿠츠크로 돌아오는 길에 동물원을 구경 하러 했으나 날씨가 추워 개장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새로 지은 체육관과 경기장을 돌아보았는데 지난 여름 이곳에서 제5회 아사아 청소년 스포츠 대회가 열려 10개국이 참가해 열전을 치뤘다고 한다.

▲야쿠츠 가수들

시내 중심지에서 광장에 있는 레닌 동상과 시청의 도시창건 3백80주년 현수막, 그리고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유리 학과장의 안내로 세종문화회관같은 사하극장 공연장에도 들어갔다.

이날은 마침 유명한 원로 여가수가 85세 생일을 맞이해 출연하게 되어있어 관중들이 북적거렸다. 여가수 이름은 마리야 이며 키가 작고 늙었지만 아직도 목소리는 힘이 있고 감미로웠다. 제자들과 야쿠트 노래를 부르는 것을 처음으로 듣고 흥미를 느끼며 2시간 동안 관람했다.



25일(일요일)은 대학생들이 컴퓨터 9줄 바둑 프로그램으로 시합하는 날이다. 오후 2시부터 시작했는데 그전에 오전 10시경 블라디미르 교수가 학교선생들을 대상으로 바둑을 소개하는 장소로 나를 데려갔다. 이곳에서도 바둑의 역사와 현시대의 세계 바둑계 현황 그리고 바둑두는 방법 등을 2시간 동안 강의했는데 약 20명 정도가 와서 경청했다.

▲예선 바둑대회 모습. 참가 선수들이 집중 중이다.

지적게임 학과는 임시로 바둑대회장을 복도에 마련했으며 약 1백명이 모여 있었다.첫날 예선바둑대회 개막식에 미하일 표도로프 부총장이 참석했고 나는 바둑의 기본기술을 알려주었다. 참가한 학생들은 86명이며 모두 개인소유 컴퓨터에 입력된 9줄 바둑프로그램으로 컴퓨터와 5점 접바둑부터 시작해 계속 이기면 4점,3점으로 내려가는 방식이다. 각자 10국을 두어 승수와 치수 변동 순위에 따라 16명이 본선에 선발되었다.

9줄 바둑에서 5점을 접히는 것은 19줄바둑에서 9점 접히는 것보다 훨씬 하수가 유리하다. 그럼에도 여러 판들을 돌아보니 단수도 몰라 어이없게 몰살을 당하는 등 컴퓨터가 이겨가기가 막혔다. 나는 안타까워서 종국 후 여러명에게 가장 쉽게 이길 수 있는 응수법을 가르쳐 주었다.

▲바둑에 흥미를 보였던 미모의 여대생 알렉시예바(왼쪽사진)와 마리야

여학생중에 예쁜 알렉시예바(20세)와 마리야(22세)가 바둑에 흥미를 느끼고 내년에 가능하면 한국에 가서 배우고 싶다고 했다. 2시간이 경과한 오후4시에 예선전을 마치고 본선에 오른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유리 학과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명지대학의 바둑학과와 교류하고 싶다고 해서 정수현 교수(9단)의 메일을 알려주고 연락을 해보면 호의적인 답변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부인인 스베틀라나 교수도 학과장이라고 소개했다.나를 수퍼마켓으로 데려가 맥주, 보드카와 원하는 음식을 사서 호텔에서 먹어으고 선물했다.

 


▲저학년부 교실에서 바둑수업을 시작.

26일(월요일)오전10시에 블라디미르 교수가 호텔에 와서 나를 이곳에서 제일 크다는 유치원으로 데려갔다. 유치원생이 4백명이 넘는다고 한다. 뚱뚱한 할머니 원장이 반겨주며 환영 행사장에 모인 학부모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어서 어린 유치원생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공연을 했다. 한 소녀는 한국의 장구 춤을 선보였다.이곳에도 한국 무용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고 작년에 한국에 와서 비디오 영상물과 전통 악기를 구입했다 한다.

블라디미르 교수가 여기서도 바둑 영상물을 보여주었고 몇몇 유치원생들이 체커를 두었다. 조기 교육은 추운 야쿠츠크도 실행되고 있었다. 점심식사는 학교에서 특별히 마련한 음식으로 원장과 선생들과 같이 했는데 말고기도 있었다. 야쿠츠크는 영하 45도 이하로 내려가면 추위도 추위지만 눈보라와 안개가 자욱해 5m 앞이 보이지 않아 휴교한다고 말했다.


▲본선 진출자들 기념사진

오후 2시에 다시 대학교 바둑시합장에 갔다. 본선에 오른 16명이 마주앉아 각각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대국을 시작했다. 오후 3시에 8강전이 치루어졌고 준결승전,결승전을 오후 4시30분에 모두 마쳤다. 나는 선수들의 요청에 따라 9줄 컴퓨터 프로그램의 5점 접바둑부터 호선바둑까지 어떻게 타파하는지 시범을 보여주었다.


▲여성부 입상자들


▲부총장의 체스판 기증

이어서 표도로프 부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시상식이 진행되었고(남녀 각 1,2,3등) 총장에게 제출할 바둑보급 증명서에 서명했다. 내년에 바둑용품을 대량으로 구입해서 19줄 바둑대회를 해볼 계획인데 다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yaku4  야쿠츠크 시내거리에서 천풍조 9단

27일(화요일)은 귀국하는 날이다. 그러나 밤 11시에 출발하는 비행기여서 오전 11시부터 블라디미르 교수가 승용차로 여러 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마침 청명한 날씨여서 춥지만 사진찍기 좋았다. 사하공화국은 상징동물이 독수리이지만 맘모스도 포함된다. 야쿠츠크 시가 잘 보이는 언덕에 오르고 맘모스 동상, 러시아 정교사원, 기념탑 등을 돌아보고 얼어있는 레나강으로 가서 텐트를 치고 겨울낚시 하는 모습 그리고 겨울 조형물을 설치할 얼음을 채집하는 모습도 사진에 담았다.

7박8일간 체류하며 혹독한 추위에 고생은 했지만 야쿠츠크에 바둑을 심고 왔다는 자부심으로 보람을 느끼고 돌아왔다.
TYGEM / 천풍조 9단

 

일본, 윤춘호 氣죽이기?
윤춘호 “일본 산케이 신문, 왜곡된 기사 보도해”
2012-11-12 오후 10:38:28 입력 / 2012-11-13 오후 1:36:16 수정
"당황스럽다. 내가 언급한 내용이 이렇게 부풀려질 수 있나. 그것도 왜곡되어서…"
수화기 너머 들리는 윤춘호 초단의 목소리에는 침착하면서도 미묘한 흥분이 섞여있었다. 바로 지난 10일 타이젬 i진선 명예기자 뉴스에 업로드 된 [日, 불쾌한 韓中 프로기사들!] 이라는 기사 내용 때문.

[日, 불쾌한 韓中 프로기사들!]은 10월 9일자 산케이신문에 '일본 바둑 압도한 한중 기사, 공포의 스파르타 교육, 심지어 머리에 바늘 꽂아.'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내용을 번역한 기사다. 

원본을 작성한 산케이 신문기자는 '승부'에 치중하는 한국과 중국의 스포츠 문화의 사례로 한중기사들의 대국예절(대국 중 노골적인 쳐다보기, 아시안게임-머리에 침 꽃기), 한중 프로의 두터운 층 형성에 일조를 한 영재교육의 뒷면(체벌, 아동학대)을 묘한 비판의 뉘앙스로 사례를 들며 일본 바둑의 퇴보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문제는 사례로 든 한국, 중국 기사들의 대국예절과, 한국·중국 영재교육의 뒷면에 대한 주 내용을 현 관서기원 프로기사로 활동 중인 한국 출신 윤춘호 초단의 인터뷰로 구성했는데, 이 내용의 대부분이 왜곡됐다는 점이다.

윤 초단이 왜곡된 보도로 언급한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첫 번째는 한·중 기사들의 대국 예절. 윤 초단은 "나는 인터뷰에서 '중국의 어린 기사 중 매너가 좋지 않은 몇몇 기사들 때문에 그렇게 인식된 것이지 실제로 매너가 좋은 중국기사들이 많다. 일본 기사 중에서도 대국 중 중얼거리는 기사들이 있는 등 (중국-일본 기사들의 매너는)별반 다를 바 없다.'라고 말했는데 기사에는 '한국 기사들도 예의범절은 별로 나을 것이 없습니다만, 중국기사들의 경우에는 너무 무개념 입니다.'라고 표현이 됐더라."라고 밝혔다.

또 윤 초단은 "일본에서는 스파르타 교육이 힘든데 한국 사회는 어떤가라는 질문에 대한 내가 답변한 부분의 언급내용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라면서 "내가 '과거 한국의 도장에서는 스파르타 식(사활문제 체벌, 긴 공부시간 등)이어서 터치나 통제가 가능했는데 일본 현실에서는 (이런 부분이) 힘들기 때문에 아이들 통제가 안 되는 경향이 있다. 또 도장 문화 외에도 학교 수업에서도 정규 수업을 병행하는 일본과 한국은 공부에 몰두하는 시간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한국을 따라잡기에는)어렵지 않냐'라고 답했는데 마치 한국의 과거 도장의 교육방식이 지금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처럼 나왔더라. 요즘 세상에 체벌문화가 있는 도장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윤 초단은 "그 기사를 오늘(12일)타이젬에서 확인했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부풀려져서 왜곡보도가 될 수 있는지 당황스럽다."라며 "인터뷰를 안 했었어야 했나. 내 잘못인가."라며 자책하기도 했다.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인 윤춘호 초단은 2004년 일본으로 건너 가 활동을 시작했고, 2010년 일본 관서기원 시험바둑을 통해 입단했다. 윤 초단은 입단 후 일본 보급활동 외에도 한국기사-관서기원기사 야구교류전 추진 등 한국-일본 외교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TYGEM / 김지은 기자

이강욱, 최초 '베트남 정석책' 만들었다
이강욱, 급한대로 최초(?!)의 정석책 수제작, 아쉽지만 뿌듯한 작업
[wBaduk] 데일리오로  2010-12-20 오후 1:15   [프린트스크랩]
▲ 이강욱이 베트남어로 직접 만든 바둑 정석책


이강욱, 급한대로 최초(?!)의 베트남 정석책 만들어
베트남의 매력, 한분야의 능력이 입증되면 나라가 지원한다


-나의 일과와 베트남의 바둑 현황-이곳에서 공식적인 내 바둑 강의는 하루에 3시간씩 일주일에 3번이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강의 장소는 호치민시에서 유지 관리하는 체육클럽이다. 체스, 장기, 바둑을 한 곳에서 공부할 수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시립체육관 같은 곳이 아닐까 싶은데 고작해야 15평 정도나 될까?

아무튼 세 가지를 한곳에서 다 하기엔 무척이나 좁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곳으로 특히나 바둑을 하기엔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다. 장소도 그렇고 아직은 부족한 언어 때문에 한정된 실력들(최고수 계층)을 가르칠 수밖에 없어서 우선 15명 정도의 학생들만 소집하여 강의를 시작했다.

호치민의 대표선수들과 타 지역 대표지만 호치민의 대학으로 유학 온 대학생들로 베트남을 대표하는18~24세의 대학생 선수들이다.체계적인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이들의 가장 큰 약점이다. 모양이나 최신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많이 접해서인지 그럴 듯 했지만 조금 오래된 정석이나 돌과 돌이 부딪히기 시작하면 정신을 못 차린다고나 할까??

“바둑의 꽃” 이라는 수읽기도 많이 부족해서 옆에서 바둑을 보고 있자면 늘 조마조마 하다.그래서 계획한 것이 집중적인 수읽기 훈련. 공부시간 중 절반 이상을 수읽기 훈련에 매진했더니 약 4개월이 지난 지금 그래도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꾸준히 훈련한 탓 인지 수읽기가 조금씩 향상 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 바둑 클럽 간판. (co vay=바둑 co vua=체스 co tuong=중국장기)

요즘은 어려운 문제도 간단히 해결 하여 나를 깜짝 놀래 키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얼마 전의 일이다 .호아(hoa)군과 대국 중 어려운 승부처였는데 예전 같으면 그대로 무너져 버릴 상황에서 최선의 수순을 밟아와 나를 당황시킨 일이 있었다. 결과는 역시 나의 패배. 물론 지도 대국이었고 제자의 성장을 기뻐해야 하겠지만 나는 아직 젊고 또 패배를 좋아할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ㅋㅋㅋ

떨떠름한 기분으로 복기를 해 주는데 문제의 승부처 장면이 되자 호아 녀석 내게 한마디 한다.

“예전 같았다면 어디부터 둬야 할지 몰라 이런저런 악수교환으로 아주 좋지 않은 상황이 되었을 거에요. 그런데 이 선생님과 같이 수읽기 훈련을 한 덕분인지 이곳의 처리는 제가 생각해도 잘 한 거 같습니다. 이 선생님 덕분입니다. cam on thay lee~ (감사합니다. 이 선생님)”

제자에게 졌다고 침울해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며...힘이 불끈 솟는다!!! 반복되는 수읽기 훈련이 지루했을 법도 한데 묵묵히 잘 따라 와준 학생들이 고맙다. ^^

이렇듯 가르치면서 늘 고마워할 일만 생긴다면야 참 좋겠지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체계화된 바둑책 한권 없는 이곳에서는 가르치는 일이 더 많이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도장에서야 책도 많고 학생들 수준도 높아서 함께 바둑을 두어주거나 대국 후 복기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곳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에서의 도장 사범생활은 참 편했었구나 하는 생각도 자주하게 된다.)

▲ 호치민 시내 중심가, 점점 무르익고 있는 성탄절 분위기

물론 사범과의 지도 대국도 좋지만 지금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건 기본기를 다지는 일이어서 교재만 충분하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이곳에는 꼭 필요한 교재가 없으니... 쩝. 급한 대로 한국에서부터 들고 왔던 책에서 발췌, 복사하여 공부를 시키고는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내손으로 직접 바둑책 만들기 ! ! !

이들에게 우선 필요한 책이 정석 책이다 싶어 바로 시작은 했는데 많이 알지도 못하는 정석들을 머리 밖으로 꺼내어 책으로 엮으려니 그것 또한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었다. 몇날 며칠을 밤낮으로 매달린 끝에 드디어 완성된 이 강욱 저(?) 정석 책. ^^

겉장은 우리 한국의 유명한 프로기사들 사진을 넣어 디자인 했다. 말이 정석 책이지 적절한 해설 한줄, 변화도조차 없는 수순 뿐 인 너무나 부족한 정석 책이지만 완성된 책을 보니 얼마나 뿌듯하던지... 또 내 자신이 얼마나 대견하던지...^^;;

학생들은 또 얼마나 좋아할까 싶어 빨리 보여주고픈 마음에 서둘렀는데 책 배포 당시엔 기대만큼 큰 감흥이 없어 보여 아주 조금 실망은 했다. 그래도 모두들 보물처럼 애지중지 아끼는 모습이 참 고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쇄비가 비싸서 인쇄는 못하고 내가 만든 원본을 복사기로 일일이 한 장 한 장 복사해서 만든 책인데 베트남의 복사 용지와 잉크의 질이 좋지 않아 물만 스쳐도 잉크가 번져 버리니 애지중지할 수밖에.

베트남에 온지 얼마 안 돼 상당히 큰 규모의 서점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다른 책보다도 바둑책을 찾아보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체스 책을 발견하고 근처에 바둑책도 있겠다 싶어 열심히 찾아봤다. 여러 종류의 체스, 중국 장기 책들의 진열에서 벗어나 한참 구석진 곳에서 어렵게 찾아낸 바둑 입문 책 한권. 정말 딱 한권이었다.

한국에서는 흔하디흔한 바둑책 한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책은 고사하고 한국에선 문구사나 슈퍼마켓 등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바둑알이 이곳에는 없어서 플라스틱으로 되어있는 바둑알을 사용할 정도다. ( 이곳 사람들이 손재주가 좋고 나무는 많아서 바둑판은 얼마든지 제작 가능하다.)

▲ 베트남 체육 채널에서 중국장기를 방송하고 있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조가 있는 언어도 비슷한 면이 있다. 그러나 베트남은 한자를 완전히 버렸다. 미국과 전쟁이 끝난 후에는 캄보디아 분쟁을 놓고 중국과 제법 규모가 큰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베트남의 바둑현황은 많이 부족하고 열악한 초보(?)단계이다. 체스, 중국장기 등은 인기가 많고 대중화 되어 있어 배우는 학생도 많다. 거리에서도 대국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거리에서 바둑 두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정부에서도 체스나 장기에는 많은 투자를 하고 있어서 베트남 체스는 세계적 수준이지만 바둑은 아예 관심 밖이다.

오죽하면 유이 선생님께서는
“체스, 장기는 친자식. 바둑은 다리 밑에서 데려온 양자.” 라고 말씀하실까...?

하지만 희망을 갖게 하는 부분도 있다. 각 도시에서 선정된 대표 선수들에게는 매달 월급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 이 부분은 한국, 중국, 일본 아마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제도가 아닐까 한다. - 그 조차도 이 나라에서는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상당한 금액이다.

매주말마다 호치민에서 약4시간 정도 떨어진 동탑 시에서 내게 배우러 오는 남매가 있다. 왔다갔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교통비에 하루 숙박비까지 계산하면 이곳 생활수준으로 볼 때 결코 만만한 금액이 아니다.

 


실력도 많이 부족하여 굳이 이 먼 곳까지 바둑을 배우러 올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부담스러운 마음에 부모님께 멀리까지 바둑을 배우러 오는 목적을 여쭤본 적이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동탑시의 대표선수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시의 대표선수가 되면 생활이 보장되기 때문인 것이다. 현재 두 남매 중 한 학생은 벌써 적지만 시로부터 정기적인 금액을 받고 있다고 한다. 호치민에서만 16명이 이 제도의 수혜를 입고 있다 이렇듯 한 분야의 우수함이 증명되면 나라에서 인정하고 보장해주는 제도가 베트남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 될지는 모르지만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은 글쎄... 결코 낙담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일희일비하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상황,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내 소임이다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내 생애 최고로 바쁘게 충실히 살고 있는 여기는 베트남 호치민 이다. ^^

[글 | 베트남 호치민에서 이강욱 8단]

▲ 호치민 시내 , 베트남 사람들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좋아한다.

▲ 바둑교실 내 칠판. 간단한 바둑용어가 한국어 발음과 함께 씌여져 있다.

▲ 바둑클럽 건물 모습

▲ 클럽내 바둑교실 (co vay=바둑 co vua=체스 co tuong=중국장기)

▲ 손수 만든 책의 사활부분, 변변한 해설이 한줄도 없어 미안하고 아쉬웠다.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
이강욱의 좌충우돌 베트남 일기
[wBaduk] 데일리오로  2010-11-30 오전 10:16   [프린트스크랩]
▲ 호치민시 시청, 베트남 국부 호치민은 사후 우상화를 몹시 우려해 자신을 화장하라고 했었다

이 곳 베트남에 온지도 어언 4개월. 글 제목 그대로 좌충우돌. 별의별 일들이 참 많았다.

처음 베트남 행을 결정하게 된 큰 이유 중에 하나. 같은 유교사상, 잦은 외침, 오랜 남, 북 전쟁, 등등 우리나라와 살아온 환경이 비슷한 점. 그렇기에 비슷한 문화 속에서 바둑을 보급하기 수월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문화라는 것을 깨닫기 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지금이야 웃으며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일들이지만 당시에는 참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했던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
이번에는 바둑을 가르치며 있었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이야기 해본다.

에피소드 1.

처음 베트남 친구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실력 테스트를 해보던 중 꼭 고쳐야 할 습관을 발견했으니...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수읽기 공부를(사활풀이) 하는 중에 바둑알로 놓아보기, 옆 사람과 의논하며 문제 풀기 등 실력향상에 있어서 꼭 하지 말아야할 행동들이 눈에 띄었다.
꼭 고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에, 절대 놓아보기 하지 말 것과, 옆 사람과 의논하지 말 것 등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그리고 시작된 내 바둑강의 시간 중 몇 주 동안은 너무도 진지하게 공부에 임하는 학생들을 보고 뿌듯함 까지 느꼈었다.

▲ 바둑클럽, 수업을 듣는 연령과 층이 다양하다. 사활시험을 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사활시험지를 나눠주고 숙제 검사를 하는 중이였는데...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고개를 드니 속삭임이 사라진다.

“뭐지? 누군가의 혼잣말인가?”

다시 숙제검사에 집중하는데 또 다시 들려오는 속삭임. 눈치 채지 못하게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몇 사람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며 의논 중이였다.

“쉿!!”

눈치를 주자 다시 집중. 살짝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 중에 다시 소곤소곤... 눈치주고 몰래 의논하고 그렇게 옥신각신 하기를 몇 차례. 도저히 난 참을 수 없었다. 선생인 내가 앞에 있음에도 눈치 보며 의논 한다는 게 꼭 내가 무시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사람들이 말 안 통한다고 나를 무시하나?”

난 문을 박차고 교실 밖으로 나감으로써 말을 대신했다. 10여분 흘렀을까. 나와 나이가 같은 제일 연장자가 내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선생님 제가 말이 많아서 화나셨죠? 미안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굉장히 강해 잘못한 일이 있어도 정중한 사과보다는 웃으며 넘어간다는 얘기를 책과 주변 사람들을 통해 많이 접했던 나로선 정말 깜짝 놀랄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문을 박차고 나왔던 내 행동이 미안하고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 할걸 하는 생각도 든다. 사과 까지 받은 이상 더 이상 밖에서 서성이기도 뭐하고 해서 다시 교실로 들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수업을 마무리 했다.

▲ 공원에서 운동하고 있는 호치민시 시민들.

에피소드2

일찌감치 교실에 도착하여 수업준비를 하며 학생들을 기다리던 어느 날, 학생 중 한명이 처음 보는 학생을 대동하고 교실에 들어온다.

“뭐지? 새로운 학생인가? 아님 친구 잠깐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가는 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난 그날의 과제를 나누어주고 여느 때와 같이 숙제검사를 하는데, 이 친구가 갈 생각을 안 한다. 심지어는 옆에 바싹 붙어 앉아서는 소곤소곤 이야기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연인관계의 모습 이였다. ‘설마 공부 하는 곳에 이성 친구를 데리고 왔으랴?’ 하는 생각에 다른 학생에게 살짝 물어봤다.

“00 옆에 앉아 있는 사람 누구야??”
“남자친구요”

헉! 설마 했던 연인관계였다. 한국에서는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나로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머릿속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문화가 다르니 이해해야지 하면서도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았다.

이곳은 놀러 다니는 게 아닌 공부 하는 곳인데... 어떻게 남자친구를...ㅠ.ㅠ

더 이해 안 되는 건 다른 학생들의 반응. 마치 본인들의 친구를 만난 듯 즐겁게 이야기 하며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글쎄...한국이라면 어땠을까?? 본인은 공부하고 있는데 주변사람이 이성 친구를 대동해 공부 분위기를 흐린다면 가만히 참고 넘길 사람이 몇 이나 될까. 이번에도 역시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지난번과 다른 점이라면 별 내색 없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그날 강의를 마무리 했다는 거. ^^

그래도 내 기분은 유쾌 할리 없었다. 속상한 마음에 다음날 있었던 베트남어 공부 시간에 성생님께 질문을 했다. (참고로 베트남어 선생님은 내 바둑학생들과 비슷한 연령대)

“선생님. 공부하는 곳에 이성 친구 대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그럴 수도 있지. 왜?”
“헉. 학교 강의 시간 에도 가능해요?
“응. 많진 않지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데.”

난 또다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베트남에 대해 알아가기는커녕 점점 미궁 속에 빠지는 느낌 이였다.

▲ 주말의 어린이 바둑교실, 수업중인 어린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에피소드3

한국에서도 많은 아이들을 가르쳤고 베트남에 와서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내가 선생으로써의 자격은 갖추고 있지 않은가 보다’ 는 생각이 든다. 훌륭한 선생은 모든 학생들을 똑같은 마음으로 상대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가르치다보면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행동을 해도 괜히 정이안가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들이 편애 일까?

옳지 않지만 이곳 베트남 에도 정말 맘에 안 드는 학생이 한명 있다. 공부시간에 항상 말 많고 대국 자세가 좋지 않아 나의 눈총을 사던 A. 나이도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항상 속으로만 전전 긍긍 하던, 그런 친구다. 솔직히 내 교실에 안 왔으면 하는 생각 까지 들었지만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그날도 역시 내 기대(?)와는 달리 일찍이 모습을 드러낸 A.

최대한 신경을 안 쓰려고 반갑게 인사만 나누고는 과제를 내주고 곧 있을 시합준비에 한창인 호치민 선수들 지도 대국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도대국에 여념 없던 나를 자극하는 녁밍, 주이밍의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려온다.

“이거 뭐야”

뒤를 돌아보니, 헉! 선생님이 계신 중에 학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사태 발생했다. 과제에 한창 열 올리고 있어야 할 녁밍, 주이밍을 상대로 문제의 A군이 지도 다면기를 하고 있다.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아이들보다는 잘 두는 실력이기에 진지하게만 두어준다면 큰 문제도 없었지만 이건 완전히 엉망진창 이였다. 다른 것보다 녁밍, 주이밍이 나쁜 대국습관을 갖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한마디 할까 했지만 괜한 오해가 생길까 싶어 아이들의 나쁜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정도로 마무리 했다.

한국이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여기는 베트남이기에...

이 밖에도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앞으로 소개할 기회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때때로 무시(?)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와 이들은 바둑을 대하는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나 역시도 인정해야만했다.

나에게 있어 바둑이란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전부이지만 이들에게 있어 바둑이란 그냥 단순한 하나의 취미 생활이 아닌가. 바둑보급이란 목표를 짊어지고 이곳에 온 나는 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줘야하고 실력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이들은 배워도 그만 안 배워도 그만이고, 실력향상이 되면 좋지만 그렇다고 실력향상에 매달려야할 절박한 상황이 아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입장이 부딪히다 보니 사소한 오해(?)들이 생기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을 인정하고 내가 한발 물러서 있는 요즘 이들 역시 무엇인가 느낀 걸까? 요즘은 전보다 훨씬 진지한 태도로 공부하고 있다.

▲ 주말의 어린이 바둑교실, 모여서 수업중인 어린이들

▲ 바둑클럽에서, 바둑 사활 시험을 보고 있다. 진지하다.

▲ 베트남 노틀담 성당,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호치민시 중앙 우체국

▲ 베트남은 아열대다. 어마어마한 공원내 나무가 그것을 웅변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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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욱의 베트남 보고서
호치민과 하노이의 양대 바둑으로 커가고 있어
[wBaduk 해외통신] 사이버오로  2010-09-30 오전 9:59   [프린트스크랩]


베트남에서 보급 활동을 하고 있는 이강욱 8단의 ‘바둑 보고서’입니다. 2010년 6월 30일 베트남에 첫 발을 디딘 후, 호치민 시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사이버오로 오로광장 게시판에 베트남 활동에 관해 글을 올려 바둑팬 들에게도 많이 알려졌습니다. 여기 뉴스에 소개하는 내용은 9월 6일부터 10일까지 열린 베트남 전국바둑대회에 관한 것입니다. 이강욱 8단은 호치민 팀을 끌고 참관했습니다.

 베트남 전국 바둑 대회 9.6~9.10

베트남은 바둑을 체육으로 인식하고 있다. 바둑도 매년 한번 씩 각 지방을 순회하며 전국대회를 열고, 4년을 주기로 더 큰 비중으로 치른다. 올해는 비중이 큰 해다. 대회 분위기는 한국의 전국체전과 비슷하다는 느낌.
각 도시에서-하노이, 호치민, 다낭, 벤쩨, 낀양, 탄호아, 람동 등 총7개 도시- 선발된 대표들이 모여 남녀 따로 일반부, 16세 이하, 11세 이하 총 6개 부분으로 5일간 하루 2판씩 총9판을 스위스 리그 방식으로 치러지며 각 부 마다 도시별 단체전도 겸해진다.
 
꽤나 많은 수의 메달이 걸린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각 도시별로 특별훈련을 준비했다는 후문, -하노이 팀=중국전지훈련, 낀양=여자선수싱가포르유학- 이 대회의 비중이 느껴진다.
호치민 팀도 역시 대회 2주전부터 특별훈련으로 집중적인 수읽기 훈련과 인터넷을 통한 한국학생과의 대국 등으로 대회를 준비해왔다. -이렇게 중요한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시작하였을 것을... 하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 이곳에 온지 두 달 남짓 만에 난 꽤나 중요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 것만 같았다.
 
호치민 바둑협회로부터 대회기간동안 호치민 팀과 함께 숙식하며 코치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둘러서 짐을 챙겨 호텔에 도착한 개막식 첫날...
너무나 감사하게도 개막식에서 VIP 석에 앉혀놓고는 한국에서 온 바둑 프로기사로 모든 참가자들에게 소개해주신다. 베트남 까지 와서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이 강욱! 출세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나의 제자들은-가르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남자일반부 Lam(‘람’ 작년 이대회 챔피언 26세),
Dao (‘다우’ 올해 호치민 챔피언 24세)
Duong(‘즈엉’ 22세),
Hoa(‘호아’ 작년 호치민 챔피언 24세)
 
여자일반부 Tam Anh(‘땀안’ 올해 호치민 여자챔피언 18세)
Nguyet(‘응윗’ 여자일반부 22세)
 
남자 16세 이하 Nhat minh(‘녁밍’ 9세 올해 한국에서 열린 대한생명배 저학년부 5위,)
남자 11세 이하 Duy minh (‘주이밍’ 녁밍의 동생, 7세)
 
이외에도 다낭 대표로 출전한 Binh(‘번’ 21세 다낭) 이렇게 약 10여명 정도의 정예(?)부대와 내 교실에 한번이상 다녀간 학생까지 약15~20여명 정도이다.
그밖에도 Tuan(‘또안’ 2008년 우승)선생님, Duy(‘유이’2000,2002,2004,2006 대회우승자)선생님 등 이곳에서 오랜 기간 바둑 보급에 힘 써오신 총 네 분의 선생님들이 호치민 팀의 주요 선수들이다.
 
한 가지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이곳 역시 세대교체가 진행 중 이라는 점이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는 매년 이곳의 젊은 원로(?) 선생님들이 번갈아 가며 우승을 차지했다는데, 작년에 Lam 이 우승하며 그 기록이 깨졌다고 하니 올해 대회 역시 귀추가 주목된다.

▲ 오토바이가 많다. 베트남의 거리의 한 모습


대회 첫날...
큰 어려움 없이 무사히(?) 첫날 대국을 끝마쳤다.
대회 시작 전 ‘아직은 다른 도시 팀들이 호치민 팀을 상대하기엔 버거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다른 팀 선수들의 의외의 강한 실력이 나를 긴장시킨다.

특히 이번 대회를 앞두고 중국 전지훈련을 다녀왔다는 하노이 선수들은 중국 스타일을 배워 왔는지 대국 자세며 표정, 포석구성 등이 호치민 선수들과는 많이 다르다.
내일 부터는 상대다운 상대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선수들을 내방에 불러 모아 복기검토, 상대선수들의 포석 연구 등으로 첫날밤을 보냈다.
 
대회 이틀째...
람(호치민)vs번(다낭)
내가 아끼는 제자 두 명이 너무 이른 시기에 부딪치고 말았다.
실질적인 호치민 팀의 에이스 아니 내가 베트남에서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는 람과 호치민 팀이 아닌 다낭 대표로 출전한 내심 내가 가장 아끼지만 호치민팀으로선 가장 두려운 번...
호치민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며 우승을 차지한 다우 역시 하노이 팀의 Quang (‘꾸왕’) 선수를 만나며 슬슬 대회의 열기가 더해간다.

초반 시작은 람의 우세였는데 중반 난조를 보이더니 종반에 들어서자 미세하게 역전을 당하고 만다. 끝까지 역전을 노려보지만 아쉽게 패퇴.
다우역시 중반 갑작스런 난조로 패퇴하자 일순간 호치민 팀의 분위기가 어두워진다.
승리한 번(Binh,다낭팀) 역시 평소 호치민 선수들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같이 공부한 탓인지 마냥 좋아하는 얼굴은 아니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갑작스레 이뤄진 호치민 팀의 미팅시간은 무슨 이야기 인지 알아들을 순 없지만 분위기는 짐작이 간다.
나 역시 무거워진 마음에 입맛을 잃어 그들의 점심식사에 함께하지 못하고 그냥 건너뛰어 버렸다. 오후대국 시작!눈길이 가는 대국으로는
번vs꾸왕(하노이) 또안 선생님(호치민)vs팜안(하노이 22세)

호치민 선수들의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진 탓일까? 또안 선생님의 초반 운석이 무거워 보인다. 그에 반해 팜안은 굉장히 침착한 대국태도와 안정적인 대국내용으로 국면을 압도해 가고 있었다.
위안거리가 있다면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제일 기대가 되면서도 호치민 팀이 아니라는 점에서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번(Binh,다낭팀)의 출발이 굉장히 좋다는 점.

또안 선생님의 국면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초조한 마음에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온 사이 그토록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실수할거 같지 않던 팜안의 대형실수가 등장 했다.
가벼운 응수타진에 잘못 응수하며 대마가 죽어 버린 것이다.

구경하던 하노이 선수들은 내 옷깃을 잡아끌며 상황설명을 부탁하고 호치민 관계자들은 표정관리에 여념이 없다.
또안 선생님은 극적인 역전승이었지만 내심 기대했던 번은 역전패... 좋았던 상황에서 욕심내다 역전을 당하고 말았다.
아쉽고 속상한 마음이었지만 본인은 더하겠지 싶어 끝나고 나오는 번에게 간단한 복기와 함께 내일 잘하라고 격려해주는데

번:“사범님 죄송해요.”
나:“응? 뭐가? 나한테 뭐가 미안해~ 괜찮아~^^
번:“아니에요. 너무 죄송해요. 제가 오전에 호치민 팀을 이겼기에 꼭 이겼어야 했는데...”

번이 갑작스레 눈물을 보인다.
평소 활발한 성격으로-때론 너무 지나쳐 내 눈총을 사기도하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던 번의 모습만 봐왔던 나로서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 녀석이 오전 대국을 이기곤 적잖은 심적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평소 친형제처럼 지내던 형에게도 미안하고 호치민 팀을 코치하며 신경 쓰고 있던 내게도 미안했던 모양이다. 승리로써 그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고 싶었을 텐데 유리했던 바둑을 역전패 했으니 그 속은 어련하랴... 마음이 짠해지며 나까지도 눈시울이 젖어온다.
 
나: “괜찮아. 난 오히려 기뻐. 네가 평소에 버거워 하던 상대를 이겨내는 모습을 보니 자랑스럽던데~^^ 아직 대회 끝난 거 아니니까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번을 위로하고 나 역시 마음을 가라앉힌 후 들어선 대국장의 분위기가 아까보다 훨씬 밝다. 호치민 팀의 오후대국 성적이 괜찮은 모양이다.

특히 여자부의 땀안이 강력한 우승후보 Mai(하노이 22세 프랑스 유학중 이 대회를 위해 잠시귀국) 를 이겨낸 것이다.
여자부는 낀양 대표 Hong Anh(헝안 21세 작년 여자부 우승)-내 교실에서 제일 성실히 공부하던 얼굴이 안보여서 소식이 궁금했는데 이번 대회 직전 이 대회 우승을 위해 낀양시에서 싱가포르로 유학시킴- 벤쩨 대표 Kim Long(낌렁)과 마이, 땀안 이렇게 4명이 가장 강해 보였다.
 
그런데 그중 가장 까다로운 마이를 넘어섰으니 우승에 한 발짝 더 다가선 듯 보였다. 내가 보기엔 땀안의 실력이 가장 강해 보이기도 했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 했던가?^^)
그렇게 대회 이틀째를 마무리 했다.

▲ 베트남 어느 시장의 모습

대회3일째
 
나의 제자인 다우, 즈엉, 호아는 부담감에 실력 발휘를 못한 탓일까?
2패씩을 기록하며 사실상 우승권에서 멀어지고 호치민의 또안 선생님과 람, 하노이의 꾸왕과 팜안, 다낭의 번 이렇게 5명으로 조금씩 좁혀 지고 있었다.

오전대국은 4승씩을 기록 중인 또안 선생님vs꾸왕
3승1패의 람vs팜안 의 대결!
호치민vs하노이의 대결이라는 특수성 까지 더해져 중요도는 더해진다.

여자부의 땀안(Tam anh) 역시 낌렁(Kim long)과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있으니 내속은 그야말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내 정성을 불어 넣어 보고자 대국장 주변을 서성이며 열심히 응원해본다.
내 정성이 부족한 것일까?? 상황은 조금씩 나빠져만 간다.

또안 선생님은 초반부터 무거운 행마로 고전 중이고 람 또한 우세한 초반 진행 속에 조금씩 양보하더니 순식간에 역전당해 작은 차이지만 절망적인 국면, 그리고 땀안 역시 초반의 우세를 조금씩 잃어 어느덧 극미한 형세라 그야말로 역전의 분위기였다.
호치민 관계자들은 쉴 새 없이 내게 형세를 물어오고 그럴 때마다 난 좋지 않은 소식을 들려 줘야 했다. 내 바둑에선 항상 부정확한 형세판단으로 고생했던 내가 이번엔 100프로 정확성을 보이며 다시 한 번 호치민 팀을 절망에 빠트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준비된 미팅자리는 어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어젠 좋지 않은 성적에도 뭔가 해보자 하는 분위기였지만 오늘은 약간 포기한 듯한 인상...?
 
분위기를 바꿔보려 베트남어로 “저는 어제 점심을 먹지 않았습니다. 호치민 팀 많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오늘 점심도 먹지 않습니다. 아마 호치민 팀 이깁니다. 화이팅!!” (직역임을 이해해주시길 ^^)
내 베트남어가 웃겼을까?? 분위기가 조금 좋아진다.
식사하러 가자는 그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호치민 팀의 승리를 기원하며 오늘 점심 또한 걸러본다. 실은 정말로 입맛도 없었고...
 
오후 대국 시작.

대국장 주변을 서성이며 바둑을 관전 중인데 갑작스런 방송국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다.
이번 대회가 중요하기에 취재차 들른 자리에서 호치민 바둑협회 관계자분이 방송국에 내 소개를 해주신 모양이다. 점심도 안 먹고 이래저래 몰골이 말이 아닌 상황에도 이런 인터뷰 자리를 마련해주신 관계자 분께 감사드리며 성실히 인터뷰에 임해본다.

부랴부랴 인터뷰를 마친 후 다시 들어선 대국장.

나의 금식이 효과를 발휘하는 걸까??
호치민 선수들의 성적이 아주 좋았다. 다만 전체적인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하노이의 꾸왕이 승리하며 6전 전승. 우승에 한걸음 더 가까이 가있었다. 꾸왕의 바둑은 그리 센 느낌은 없었지만 뭔가 승운이 따르는 거 같았다. 게다가 한판 두판 승리하다보니 점점 자신감도 배가되고...
그래도 아직 번(Binh) 녀석이 1패로 꿋꿋하게 추격중임을 위안 삼으며 번의 선전을 기원해본다.

여자부는 땀안, 마이, 낌렁 세명의 1패와 그 뒤를 2패의 헝안이 바짝 뒤쫓고 있었다. 내일 첫판에 벌어질 땀안과 헝안의 대결이 최대 고비가 아닌가 싶었다. 승리한다면 거의 우승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기에 저녁식사 후 다소 긴장하고 있는 듯한 땀안을 방으로 불러 내일 있을 대국을 준비하며 한마디 건네 본다.

“ Tam anh oi(이름 뒤에 붙는 호칭)~ 사범님이 내일 아침을 또 안 먹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이길 거야~ ^^”
“네. 사범님. 제가 내일 꼭 이길게요. 저녁에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대회 4일째
이제 슬슬 대회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다. 선수들도 조금씩 지쳐 가는지 성적이 좋지 않은 그룹들은 빠른 진행 후 대국 관전에 더 많은 흥미를 보인다.
대회장에 들어서자 호치민 팀 관계자들이 내게 몰려와 한마디씩 건넨다.

“이 선생 아침식사 했어요?”
“아니요~^^”

나를 걱정하면서도 약간은 안도하는 표정들이다.
이제는 징크스 아닌 징크스가 되 버려 내 식사 여부에 관심들을 갖는다.^^
남자부 선수들을 뒤로 한 채 우선은 제일 중요한 땀안의 대국을 관전한다.

대회 직전 연구하고 가르쳐 줬던 포석이 등장했는데...
아뿔싸...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배웠던 걸 잊은 모양이다.
내 굳어버린 표정을 의식한 호치민 관계자는 아마추어의 대국은 끝까지 알 수 없다며
걱정 말라고 위로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미 상황이 많이 늦어버린 듯 했다.

내가 대신 앉아서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럴 수 도 없고...
결국 초반의 손실을 만회 하지 못한 땀안의 패배...
너무 아쉬운 패배에 땀안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가서 어깨라도 다독여 주고 싶었지만 졌을 때는 혼자 있고 싶은 법...(많이 져봐서 그 마음 잘 안다. ^^)
자리에서 일어난 땀안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평소 같으면 먼저 다가와 이런저런 얘기를 건네던 아이인데 아마 내게 미안한 모양이다. 하긴... 배웠던 걸 잊었으니 선생님 얼굴을 어찌 볼 수 있으랴? 그 마음을 잘 알기에 마음 한구석이 더 아려온다.
 
작은 수확이 있었다면 응윗(호치민)이 1위를 달리던 낌렁 (벤쩨) 에게 승리한 것이다.
전날 마이에게 패점을 기록한 낌렁은 2패째... 이제 마이(하노이)가 단독선두로 올라선다.
남은 상대 또한 강한 선수가 없어 사실상 우승이라고 봐야한다.

다만 여자부는 아직 단체전에 가능성이 남아 있기에 끝까지 포기 할 수 없는 상황.
남자부에선 큰 이변 없이 꾸왕(하노이)의 전승이 이어지고 번(다낭) 역시 1패로 순항중이다.
단체전 역시 크게 관계가 없는 조금은 기운 빠지는 상황.
그래도 내방에 다시금 불러 모아 복기 검토를 하며 끝까지 선전을 당부 해 본다.
그렇게 오후 대국은 별다른 사건(?)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마지막 한판씩을 남겨둔 상황에서 결과는
남자부: 꾸앙(하노이)8승
번 (다낭) 7승1패
여자부: 마이(하노이)7승1패
땀안(호치민)6승2패
낌렁(벤쩨) 6승2패
헝안(낀양) 6승2패

작은 사건(?)이 있었다면 16세 이하 남자부에서 내게 배우고 있는 9세의 녁밍(Nhat minh. 호치민)군이 우승을 결정짓는 사건(?)이 벌어졌다. 규정상 11세 이하 부에 참가하는 것이 옳았지만 너무 뻔한 결과를 걱정한 관계자들이 한 단계 위 클래스로 올려놓았는데 그곳에서도 보란 듯이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어쩐지 내 주위를 서성이는 폼이 뭔가 칭찬 받을 일을 했을 때 나타나는 녁밍이의 행동이었는데 다른데 신경 쓰느라 그걸 몰라 줬으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마음은 너무 뿌듯하고 대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마냥 칭찬만 해줄 수도 없었다.
부족했던 점과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라는 충고로 칭찬을 대신하니 녁밍이의 표정이 서운해 하는 눈치다. 다시 만나면 녁밍이에게 ‘정말 잘했고 자랑스럽다’고 말해줘야겠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남, 여 개인전은 하노이 팀의 우승이 결정적이었다.

처음 하노이 관계자들을 만났을 당시 느꼈던 그분들의 열의를 생각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 대회를 위해 중국에까지 전지훈련을 다녀오는 고생을 승리로 대신한다 생각하니 상대편이지만 진심으로 박수치며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에 반해 호치민 선수들의 안일함이 아쉬웠지만 이번 대회를 계기로 뭔가 달라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랄까?

이날 저녁 하노이에서 먼 길 오느라 고생한 향미-하노이 파견 명지대생- 씨에게 저녁도 대접할 겸 하노이 팀의 저녁 식사 자리에 함께 참석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약간은 침울한 호치민 팀을 뒤로 하고 하노이 팀의 식사자리에 참여하게 되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호치민 바둑 뿐 만이 아닌 베트남 전체의 바둑 발전을 계획하고 있는 나로선 하노이 팀과의 유대 관계도 중요하기에...

약 세달 전 만남을 가졌던 하노이 관계자들과 앞으로의 여러 가지 발전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나중에는 호치민 관계자들도 동석한 가운데 모두가 하노이 팀의 승리를 축하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렇게 대회가 마무리 되어지는 줄 알았는데...
 
▲ 바둑클럽에서 공부하는 모습

마지막 날

오늘은 부담없이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날이다.^^
별로 먹고 싶진 않았지만 나를 걱정하는 분들을 위해 과감히(?) 아침식사를 하고 대회장으로 내려갔다.

꾸왕VS람, 번VS 탄 선생님(호치민)

대결이 벌어졌고 여자부에선 땀안(Tam anh)이 벤쩨 선수와 중요한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개인전은 별의미가 없었지만 호치민 팀의 여자 단체전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대국이다. 하지만 18세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짐이었을까?

평소 실력이라면 두 점 가까이 차이나는 상대에게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패배가 결정되자 바둑판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땀안을 보니 나 역시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행여 내 사소한 행동, 말 한마디가 부담을 주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서도 나를 피해 황급히 숙소로 들어가 버린다.
이로써 여자부는 개인전 May(하노이)의 우승! 단체전은 벤쩨 팀이 가져가게 되었다.
여자부는 큰 무리 없이 끝났지만 남자부가 심상치 않았다.

물론 꾸왕 선수가 전승으로 끝낸다면 깨끗한 상황 이었지만 람(Lam 호치민)에게 수세에 몰리고 있었고 1패로 바짝 추격 중이던 번은 우세한 가운데 하노이 관계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뭔가 대진표를 보며 점수 계산을 하는듯했다.
사실 난 이때까지도 꾸왕 선수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 했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았나보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어제 밤 규정이 바뀌었다는 얘기도 들린다.(한국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번 대회 내내 이상하리만치 평소 실력 발휘를 못했던 람이 꾸왕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고 곧이어 번 역시 넉넉하게 승리를 거둔다. 이제 꾸앙과 번의 8승1패 동률로 점수계산만이 남았다. 큰 기대는 안했지만 나 역시도 설마 하며 긴장하게 되고... 곧이어 결과가 나왔는데 이럴수가... 번의 3점차 역전 우승 인 것이다. 하노이 선수들은 분개하며 시상식을 보이콧 하곤 대회장을 박차고 나간다.

중국까지 가며 이번 대회를 준비한 그들의 열의를 생각하면 그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대회 이틀째 내게 와서 져서 미안하다며 날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던 번 녀석이 본연의 모습을 되찾음과 동시에 해맑은 미소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나 역시도 기분 좋아진다. 우승했다는 것 보다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가르쳐서 한 단계 발전된 번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 편이 뜨거워진다.

번 녀석 내게 다가오더니
“선생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시상식 준비를 하는데 퉁퉁 부운 눈을 한 땀안의 모습이 보인다. 다가가 괜찮다는 말 한마디 건네려는데 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어느새 벌써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어린나이에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존재도 큰 부담이었으리라) 호치민 여자 에이스로써 마음고생 심했을 걸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아려온다.

해주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았지만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긴 힘들어 사전을 들고 다가간다.

“나에게 미안해하지 마. 난 괜찮아.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한 네가 진짜 넘버원이야!!”

다행이 내 뜻이 전해 졌는지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훌쩍거린다.
어깨를 토닥여 주곤 시상식 준비에 들어간다.
 
호치민 관계자 분들께서는 폐막식에서도 나를 vip석에 앉혀 주시고는 시상까지 맡겨 주시니 도대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다만 하노이 팀의 부재가 아쉬웠다. 물론 그 심정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상식에서 ‘박수치며 서로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진짜 승자는 하노이 팀 이였으리라’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자부의 마이는‘May’우승을 하고도 메달을 받지 못했다.)
행사가 모두 끝나고 집으로 가려는데 먼발치에서 조심스레 땀안이 다가온다.

“사범님! -호칭을 한국어로 가르쳤더니 사범님 소리는 기가 찬다. -우리 언제부터 다시 공부시작해요?”

이 녀석 사람 감동시키는 재주가 있다.
그 말 한마디에 그간 쌓였던 피로가 모두 풀리고 나 역시도 다시 열심히 해봐야겠단 다짐을 하게 되니 말이다. 고마운 땀안. ^^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5일간 울고 웃게(?) 해준 호치민 팀에 고맙단 말을 전한다.
좋지 않은 성적에 침울해 하는 내게 “결과는 중요한 것이 아니니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한다.”는 호치민시 관계자 분의 말씀도 큰 힘이 되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한 참가자 전원에게 수고 했단 말을 전하며...
땀비엣~ (작별인사) 핸갑라이~ (다음에 만나요)

베트남 전국 바둑 대회를 마치고...
 
이번 대회를 통해 베트남 사람들의 많은걸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우선 하노이(북)와 호치민(남) 두 도시 간의 경쟁의식이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점.(서로에게 절대로 질수 없다는 의식이 내게는 38도선으로 갈라진 우리의 남북관계보다도 더 멀게 느껴진다고 할까?)
그리고 생김새, 기질 등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남과 북의 생활환경이나 역사가 많이 달랐던 것일까?(베트남어 보다 역사부터 공부해야 할 것 같다)
남쪽 사람들이 상당히 사교적이고 활발하다면 북쪽 사람들은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하다.
하노이 팀에 복기 해줄 기회가 있어 양 도시 사람들의 차이를-약간이긴 하지만- 직접 느낄 수 있었다.

하노이 선수들은 조용히 선생님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면 호치민 선수들은 이런저런 이야기가 굉장히 많다. 질문도 많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자기들끼리 의견을 주고 받으며 의견이 엇갈리면 언성 높이는 일도 허다하다.
심지어는 내가 강의하는 시간에 학생으로 들어와서는 내 학생들을 자기가 다면기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다.^^ (처음엔 선생인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음)

그리고 하노이에서 활동하고 있는 향미 씨에게서도 “그들은 공부시간에 진지하게 열심히 공부한다.”고 들었다.
‘어떤 것이 더 좋다.’ 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 할 수 없는 어려운 부분이지만 적어도 바둑을 대하고 공부하는데 있어선 하노이 선수들의 진지함과 차분함이 더 어울린다는 게 내 생각이다.(반씩 섞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 시상식

 
아직까지 남쪽 학생들의 산만한 공부 분위기-바둑 두며 이야기, 사활 시험 의논, 수업시간에 이성 친구 동행하기 등-에 적응 못하고 있는 나로선 하노이 선수들의 진지함이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그렇다고 강압적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업을 이끌자니 “우리와는 비슷한 듯 많이 다른 문화라서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는 이곳 우리 교민들의 조언을 듣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이번 호치민 팀의 패배가 오히려 잘된 일이다 싶기도 하다.
하노이 팀의 실력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긴장하며 진지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호치민 팀을 조심스레 기대해볼 수 있는 희망이 생겼으니 말이다.
아마 그들도 나만큼이나 여러 가지 많은걸 느끼지 않았을까...?
 
베트남 바둑발전을 위해서는 어느 한 도시의 독주보다 호치민(남)과 하노이(북) 양 도시가 서로 사이좋게 경쟁하며 발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니 만큼 앞으로 내가 해야 할일은 하노이에도 자주 들러서 양 도시의 바둑 발전과 조금은 소원한 양도시의 바둑 가교 역할까지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번 대회를 정리해본다.

[글 : 이강욱 8단 / 베트남 호치민]

말레이 대표, 이창호, 이세돌과의 시합, 너무 기뻐요!
싱가포르,말레이시아,베트남까지 잠들지 못한 사연들
[棋행] 데일리오로  2010-11-18 오전 12:05   [프린트스크랩]
▲ 베트남, 이강욱(앞줄 맨 오른쪽)의 제자들과 함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그리고 베트남까지, 목숨을 걸고 바둑 두는 김성룡
퉁퉁 부르튼 발, 그리고 잠들지 못한 밤의 사연


11월 13일 싱가포르 3일째

전날 바둑 행사와 아주 늦은 저녁식사, 그리고 원고를 쓰느라 늦어서인지 완전히 뻗어 버린 것 같습니다. 아침에 10시 가 넘어서야 일어났습니다. 싱가포르는 그야말로 쇼핑 천국이죠. 어딜 가나 대형 쇼핑몰이 있고 그곳은 항상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어 편리함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법은 엄격하고, 나라는 좁고 국민들의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어 주려고 하나, 저 혼자만의 생각을 해봤습니다. 설마 그렇진 않겠죠.^^

인구 500만의 도시국가 싱가포르. 그 중 100만 명이 외국인이라고 하죠. 능력 있는 외국인의 기술은 돈을 주고 사는 나라, 우리의 조 미경 8단은 능력 있는 외국인으로 그만한 대우를 받으며 자신의 기술을 그들에게 전수하는 아주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그 곳에 있습니다.

이 날도 저녁7시 부터 다면기가 시작 되었습니다. 전날과 다른 장소인 비션(bishun)이라는 곳에 있는 바둑센터입니다. 이곳엔 바둑 말고도 장기, 체스도 같이 있습니다. 다면기 상대가 중국 본토 유학생이 절반입니다. 중국 본토 유학생들은 모두 선으로 두겠다고 하네요. 이성재 9단은 7판을 다면기로 두었는데 모두 선으로 두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전례가 없는 경우입니다.

전 10판을 다면기로 두었습니다. 2점에서 5점정도로요. 그 중 일본 아줌마도 있습니다. 현지인과 결혼 하신 분인데 알고 보니 저 보다 한 살 어리네요. 3단이라고 해서 5점 접었더니 눈이 동그래집니다. 일본에서 프로와 3점 이상은 둔 적이 없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5점에도 2집을 지는데……

하여간 시계를 놓고도 3시간 40분의 대접전을 해야 했습니다. 끝나고 근처에 가까운 로컬 식당에 술 한 잔 하자고 해 8명 정도 간 것 같네요. 술 시키면 당연히 안주 그리고 건배 이런 것 아닌가요.

▶ 국제버스

8명이 갔는데 맥주 3병, 국수3개, 만두6개짜리 1개 땡입니다. 술은 잔만 부딪치고 거의 먹질 않습니다. 왜 그런가했더니 술과 담배가 엄청 비싸다네요. 완전 싸구려 식당 같은데 술은 큰 거 한 병이 1만 원 정도 하고 담배는 12달러. 그러니 애초에 술 담배를 아예 안 배운 것 같습니다

거기에 택시비가 비싸니 한국 같이 밤에 모였다고 흥청망청 분위기는 아예 없습니다. 일본 아줌마한테 물어봤습니다.“싱가포르 사시기 어떻습니까?”

“일본보다는 좋은데요. 아마 여자라면, 특히 한국, 일본 여자들은 여기가 좋을걸요. 근데 심심해요”

그 질문을 싱가포르 대표선수인 탄지아청에게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엔 답답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순응하며 사는 거죠.”

그냥 맹숭맹숭 2시간 보내다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처음으로 택시를 탔는데 지하철 5정거장 거리가 8000원정도 하네요. 싱가포르의 마지막 밤 정말 허무했습니다.

▲ 낮시간, 차안에서 바라본 트윈타워

11월14일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로

아침 8시 버스를 타기 위해 새벽5시30분부터 분주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가야 하는 곳은 하버프론트입니다. 하버프론트 지하철역을 내리면 굉장히 복잡하다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센토사 섬으로 가는 길이 있고 대형 쇼핑몰, 거기에 다른 나라로 가는 페리 선착장, 그리고 말레이시아로 가는 국제버스 타는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곳에서 바다를 볼 수 있어서인지 집값은 싱가포르에서도 가장 비싼 곳 중에 하나라고 하는 군요.

7시50분 에 미리 예약 해 둔 말레이시아 국제버스에 탔습니다. 그런데 대형사고가 터졌습니다. 조미경 에게 제가 “말레이시아로 넘어갈 때 버스로 가면 검색 안하나” 라고 했더니

“당연히 하죠. 여권 있으셔야 해에에에~요. 으, 그런데 제가 여권을 안 가져 왔는데요.”

다행히 버스가 국경으로 가서 알게 된 것이 아니고, 미리 질문 한 것이 오히려 천만다행인 것 같습니다. 바로 뒤차로 오기로 하고 이성재와 제가 먼저 떠났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국경 통과할 때 입국할 때 썼던 출국카드 반쪽을 잊어버린 겁니다. 보통 입국할 때만 신경 쓰고 출국 할 땐 별게 아닌 줄 알고 무심코 지난 것이 화근입니다. 보안 경찰 두 명한테 끌려가 지문 찍고 사진 찍고 하길래, ‘야!, 이거 이러다 채찍 때리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 까지 들더군요. 다행이 10분 만에 풀려났는데 저 때문에 다른 승객들에게까지 미안 하게 되었습니다.

버스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조미경만 믿고 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달리 영어를 안 쓰는 말레이시아에서 영어도 안 되고 말레이어는 ‘땡큐’도 못하는 남자 두 명이 과연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요? 밤에 계속해서 글 올리겠습니다.

▲ 말레이시아 협회원들과 단체 기념사진. 촥! 인증!

11월 14일 말레이시아 1일째

24시간 밖에 시간이 없는 말레이시아입니다. 다행인 점은 버스에서 내린 곳이 그 유명하다는 KLCC타워입니다. 일명 트윈타워라고도 불리는 88층짜리 빌딩 쿠알라룸프르의 상징입니다. 밤의 야경은 더 멋있어 밤에 오히려 사람이 더 많다고 하죠. 문제는 저희에겐 그곳에 가서 사진 찍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2시에 도착하기로 했는데 3시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법은 싱가포르보다도 더 엄격한 것 같습니다. 싱가포르 지하철은 MRT라고 하는데 이곳은 LRT라고 합니다. 노선이 많지 않고 열차가 2-3량 정도만 다닙니다. 참고로 한번 탔는데 5정거장에 1.6링깃(약550원) 정도 합니다. 이곳에도 싱가포르에서 본 벌금 세트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류가 무려 8가지였습니다.

숨이 막히긴 싱가포르와 똑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고 보니 여긴 싱가포르와는 다르네요. 일단 길거리가 아주 '더럽다'까지는 아니어도 길거리에 휴지나 과자 봉지 이런 것들은 널브러져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중국인이 75%이지만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인이 75%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는 이슬람교입니다. 이곳에서 다른 종교는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은 이슬람을 믿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종교를 믿지요. 하지만 이슬람교를 비난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가장 큰 죄 중에 하나가 그것이니까요.

말레이시아 협회 회장님께서 그럽니다. “미스터 김, 여기 와서 살아요.”, 그래서 제가” WHY”했더니, “여긴 아내를 4명까지 둘 수 있어요. 남자 능력만 되면 최고죠”

▲두바이에서 여행 온 정통파 이슬람, 여성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4인까지 가능하다는 제안에 김성룡 '개종과 이민'을 심각히 고려해보다

법으로 문제가 없다네요. 대신 이슬람교도가 되어야 합니다. 압둘라 김이나 모하메드 김이 되면 저도 부인 4명까지 가능한 거죠. 중국인은 자녀를 2명이상 둘 수 없습니다. 법적으로 그렇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아들문제가 은근하다고 합니다. 중국인도 남아 선호가 강하다 보니 첫째가 딸이면 고민 된다고 하네요.

언어는 말레이어와 영어가 공식 언어입니다. 중국인들은 중국어까지 3개 국어가 완벽합니다. 싱가포르보다 언어 하나를 더 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바둑을 두는 인구는 한국, 일본인을 제외하면 200명 정도에 불과 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말레이시아는 아시안게임에 선수를 파견도 할 수 있는 나라인데 뭐가 문제일까 했더니 역시 재정 문제입니다. 태국이나 싱가포르는 한 사람의 리더가 거의 바둑을 이끌고 있습니다. 반면 이곳은 십시일반 하는 정도이고 바둑클럽을 낼 정도의 여유가 안 돼 일본문화원에 있는 바둑클럽을 1주일에 한번 빌려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소원은 바둑 선생님입니다. 저한테도 계속 “선생님 한분 모시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하면서 물어봤습니다. 도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와 비교해 3배정도의 임금과 물가 차이가 납니다. 반대로 태국보다는 2배정도 비쌉니다. 태국의 시진보 프로나 싱가포르의 조미경 프로 정도를 부를 만큼의 비용을 대기가 어려운 것이 이들의 고민입니다. 너무 아쉬웠습니다. 어린 유망주도 있고 대학생들의 바둑 붐도 일어나고 있는 이곳에 아무도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정말이지 아쉬웠습니다.

▶ 김성룡, 말레이시아 바둑선생을 맡다

엄청난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 30여명이 모인 일본 문화원에서 이들과 5시간 동안 다면기와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역시 싱가포르와는 달리 바둑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이들은 기본기가 약했습니다. 가장 잘 두는 선수가 이번에 아시안게임에 가는 선수들이었는데 프로에게 4점이나5점정도 치수입니다. “아시안게임 나가는 것 어떠세요?” 했더니 이들은 가는 걸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이창호, 이세돌 9단과 시합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요” 라고요

바둑을 좋아하는 것이나 열정만큼은 그들도 다른 나라 못지 않았습니다. 저녁식사는 “스팀보트” 우리로 치면 샤브샤브였습니다. 싱가포르에선 그래도 맥주 한잔 정도는 하자고 하시는데(거의 딱 한잔입니다) 이곳은 전혀 술 얘긴 꺼내지도 않습니다. 스팀보트와 중국차, 우리로 치면 샤브샤브와 보리차 이런 조합도 가능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아쉬웠는지 또 바둑을 두자고 하네요. 그러다보니 11시, 숙소에 12시전에 들어가기가 참 힘드네요. 물만 마시고 그렇다면 또 모르겠는데, 술도 안마시고 이건 참 쉽지 않습니다.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로 쿠알라룸푸르의 마지막 밤 역시 허무했습니다.

11월15일 말레이시아 2일째, 베트남 호치민 1일째 -띠옹 회장님

오후 2시 45분 비행기로 베트남 호치민으로 가서 이강욱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표는 프로모션 하는 가장 저렴한 표를 구했더니 왕복 1인당 25만 원 정도 하네요.

말레이시아 협회장님의 이름은 한국식으로 하면 장기순 입니다. 그런데 명함에 영어로 표기된 이름은 Tiong kee soon입니다. 제가 중국어는 잘 못해도 이렇게 표기는 안하거든요.

◀ 다면기하는 이성재 9단, 말레이시아

그래서 물어 봤습니다. 왜 이렇게 표기하냐구요. 그랬더니 폭겐식 발음이랍니다. 폭스바겐도 아니구 폭겐은 뭔가 했더니 복건, 즉 푸젠식 발음이라고 하네요. 푸젠은 타이완 즉 대만과 마주보고 있는 곳입니다.

영국이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할 때 인도인들과 복건 쪽과 타이완 쪽 중국인 노동자를 강제 이주 시켜 이들을 이곳에서 일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역사가 오래 되다보니 이들의 이민 역사는 오래 되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의 중국과 같은 통일된 만다린어가 아닌 각 지방의 사투리를 쓰던 때라서 이들도 현재 중국에서 쓰는 표기가 아닌 자기 고장의 언어를 표기한 것입니다.

아무튼 '띠옹' 회장님이 저희를 공항까지 태워다 주셨습니다. 차비 대신 공항에서 대기하는 동안 데리고 온 말레이시아 대표선수와 회장님을 상대로 2면기를 공항 벤치에서 쭈그리고 지도를 했습니다. 이성재 9단은 전날부터 상태가 안 좋았습니다. 무리한 거죠. 그래도 계속 저를 따라 다니다 보니 거의 얼굴이 반쪽이 되었네요.

호치민으로 가는 말레이시아 에어라인 참 좋네요. 스튜어디스도 우리나라만큼 미인입니다. 같이 탄 말레이 아가씨들도 미인들이고요. 히잡이라고 하나요. 머리에 다 두르고 있는데 오히려 노출해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안 보여줘서 더 궁금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이세돌, 이창호와 맞짱을 뜰 수 있으니 기뻐요. 아시안게임 쵝오! 말레이 바둑 대표들과 함께! 가운데가 '띠옹' 회장님

1시간 40분 걸려 도착한 베트남 호치민. 멀리서 손을 흔드는데 이강욱 이네요. 알아보긴 하겠는데 영락없는 베트남 사람입니다. 옷차림도 그렇게 생김새도 그렇습니다. 남들이 본다면 외국인 상대 현지 가이드인 줄 알겠어요.

공항에 도착했더니 시간이 없답니다. 빨리 가자고 하네요. 어딜 가는데 했더니 5시 부터 다면기가 준비 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희가 공항에 4시 에 도착했거든요. 말레이시아에서도 총 23시간 있었는데 아무것도 못보고 바둑만 8시간은 했는데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주 불길하네요.

역시 예측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 말레이 에어라인의 말레이 미인들, 김성룡, 또 다시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갖다.

4시50분분부터 시작된 다면기는 처음엔 6명씩 했는데 계속 인원이 늘어나더니 급기야는 끝난 자리에 또 누가 앉고 끝나면 또 누가 앉아 버리니 끝날 조짐이 없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들의 실력이 여간 아니라는 겁니다. 이강욱에게 제대로 4개월 이상 배운 실력들이라 기본기가 좋습니다. 접바둑도 이강욱과 많이 둬봐서 그런지 수준이 상당히 있습니다. 4년 전에 갔을 때엔 제일 잘 두는 사람이 저한테 4점에 잘 못 이겼는데 지금은 그 정도 수준이 호치민에만 10명이나 있다고 하니까 대단한 발전이죠.

에에컨이 안 나와 선풍기를 틀고 바둑을 두는데 원래 기온이 36도인데다가 좁은 곳에 사람들이 엄청 모이다 보니 죽을 것 같습니다. “아, 드디어 나도 조치훈9단과 같이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두는 구나”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도대체 몇 판을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도 않습니다. 무아지경에서 둔 것 같습니다. 저녁식사는 이강욱 프로의 부모님이 와 계셔 한식집에서 호치민 바둑계의 대부로 불리는 유이 선생과 함께 6명이 식사를 했습니다.

이강욱 사범은 얼굴이 밝아 보였습니다. 사실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습니다. 원래는 말레이시아에서 브루나이로 가야 했는데 한국기원 기사회장인 최규병 9단이 상하이에서 강욱이 좀 보고 오라는 얘기에 방향을 바꿔 들른 곳입니다.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목숨을 걸고 두다. 찜통을 견디고 다면기를 하다. 두는 사람 모두 목숨을 걸다.

집세 300달러 생활비 200달러 그가 베트남에서 쓰는 돈입니다. 어떻게 그 돈으로 버틸 수 있을까 했는데 그의 생활 모습을 보니 충분히 가능하겠더군요. (참고로 올해 한국에서 프로기사 8명이 정부지원금으로 외국에 보급을 나가고 있습니다.) 베트남 호치민은 한국교민만 10만 명에 육박 할 정도로 세계에서 열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한국 교민이 많은 곳입니다. 비즈니스가 성업이다 보니 술집이나 다른 유혹이 강한 곳입니다.

이성재 9단이 하도 저 따라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니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힘들었나 봅니다. 발 마사지 받고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는데 이강욱이 걸작입니다. 발 마사지 받는 곳을 모릅니다. 술 안마시니까 술집 모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발 마사지 받는 곳을 모르는 건 뭔가요. 1시간에 6달러 정도하는 발 마사지는 교민들은 수시로 이용하는 곳이고 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베트남의 즐거움이거든요. 음식점도 한식집 겨우 하나 압니다. 나머지는 1000원에서 3000원 사이하는 곳만 알고요. 이 친구가 조미경이라면 나이도 어리고 여자니까 그렇다고 하겠는데 나이 30된 총각이 뭐 하나 아는 게 없다니요.

▲ 베트남 바둑 대표 선수들과 함께, 곧 아시안게임서 한국선수들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피곤해 죽겠는데 1시간 정도 걷다가 제가 안 되겠어서 제가 오히려 방향을 잡아 아무 곳이나 들어갔습니다. 역시 발 마사지를 하더군요. 옛날과는 많이 변했네요. 미용실인데 발 마사지를 하네요. 이성재 이제 살만 한가 봅니다. 이성재가 발 마사지 받는 1시간 동안 유명하다는 오페라 하우스, 시티 홀의 야경을 카메라로 열심히 찍었습니다. 현대에서 짓고 있다는 호치민 최고의 빌딩도 찍었습니다.

사이공 맥주 한 병을 편의점에서 사 먹으며 마지막 밤을 지냈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허무했습니다. 베트남은 “이슬람 국가”가 아니잖아요.

11월17일 베트남 2일째

이강욱 프로는 한국에 있을 때 저와 전화 통화 한 번 한 적이 없는 기사입니다. 권갑용 도장 연수에 갈 때나 한번 보는 정도의 사이입니다. 공식대국도 한 적이 없구요. 그는 아마추어 지도에 재주가 있는 기사로 알고 있습니다. 사범 하기 어렵다는 그 권도장에서 오랫동안 사범을 했다는 것은 그가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하루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강욱 프로에게서는 사명감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여태껏 외국에 보급 나간 프로에게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것이죠.

◀ 7살의 베트남 유망주, 이강욱 8단의 제자다.

처음 한국기원에서 외국 보급지원을 하려 할 때 우리보다 가난한 곳을 대상지로 삼으려고 했지만, 지원자가 없어 대부분이 서양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그런 맘들이 누구나 들겠지요. 한국으로 돌아오더라도 그 곳에서의 경험이 자신에게 플러스가 될 수 있는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유일하게 그 반대로 간 사람이 이강욱 프로입니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본 것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냥 단순히 한번 가 보려고 베트남에 간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의 지원금이 만약 끊긴 다음 누가 가장 괴로울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강욱 프로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이 잘못 된 것 같습니다. 그는 견딜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한국으로 언제든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다른 기사들이 가장 괴로울 것 같습니다. 윤영선, 안영길, 이강욱, 조미경 이 네 명은 견딘다. 그게 제 생각입니다. 그들은 지원금이 끊겨도 한국기원 우리 정부를 원망하지 않을 그런 기사들입니다.

이강욱 프로는 1주일에 3일을 베트남 강자 16명에게 바둑을 가르칩니다. 모두 프로에게 5점정도 수준이 되는 베트남 최강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전에 유이 선생에게 배워 이강욱 프로에게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겁니다. 유이 선생은 이강욱 프로가 이곳으로 오자 입문반만 가르칩니다.

일주일에 두 번은 한국 교민을 가르칩니다. 일주일의 3일은 베트남어를 개인 교습 받습니다. 나머지는 학생들 가르칠 교재를 만듭니다.

▶ 베트남에서 생애 첫(?!) 발 맛사지를 경험하고 있는 이강욱 8단

이강욱, 유이 두 사람간의 분업화가 확실하게 되고 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곳엔 없는 베트남의 강점 중 하나입니다. 젊은 대학생들이 경쟁을 하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월급입니다. 이들이 회사에 취직할 경우 우리 돈으로 20만원보다 약간 적게 받습니다. 유이 선생의 경우, 호치민 시에서 25만 원 이상을 받습니다. 25만 원 이상을 받는 사람이 5명, 15만 원 이상을 받는 사람이 2명 정도 있다고 합니다. 25만원을 받는 여자 대학생도 있습니다. 호치민에서 계속 우승을 한 여자 대학생입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로 바둑만 잘 둬도 먹고 살 수 있는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정부에서 바둑을 잘 두는 사람에겐 월급을 준다는 점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이건 한중일 에도 없는 제도입니다. 젊은 대학생들이 바둑을 열심히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9살, 7살 형제들이 있습니다. 형은 저한테 7점, 동생은 9점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들도 나라에서 월급을 받습니다. 5만 원정도(100만동)라고 하네요. 두 명이니까 10만원입니다. 물론 우리 돈으로 하면 얼마 안 되지만 이 나라에서는 적지 않은 돈입니다.

에필로그

17일 오후 6시50분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한 번에 서울로 가면 5시간30분이 걸립니다. 그런데 싼 표로 끊다 보니 이런 일정이 되었습니다.

호치민에서 쿠알라룸프르로 가서 다시 밖에 나갔다가 체크인 해서 다시 들어와서 공항에서 4시간 대기 하고 새벽 2시 에 상하이로 가서 2시간 대기 했다가 서울로 18일 12시 에 도착하는 일정입니다. 8일간의 상하이, 싱가포르, 쿠알라룸프르, 호치민의 바둑 캠프는 정말이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바둑 둔 판수만 1인당 50판, 그것도 선 치수부터 5점까지 다양합니다.


9월에 갔던 태국까지 한다면 동남아 주요4개국을 다녀 온 셈입니다. 바둑 실력부터 얘기하자면 싱가포르가 단연 세고 다음이 태국과 베트남이 좋은 승부입니다. 가장 약한 곳이 말레이시아입니다.

◀ 베트남 주재 한국문화원.

1년에 한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의 3개국 교류전이 있습니다. 매년 돌아가면서 대회를 하는데 유치하는 쪽은 비행기표를 제외한 나머지 비용을 지불한다고 합니다. 올해는 12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립니다. 아직 비용부담을 할 수 없는 베트남까지 매년 4개국이 진행된다면 동남아세안 리그로 발전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세계 바둑인구의 증가 속도는 이곳에서 가장 빠르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인터넷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듯이 그 인터넷을 통해 바둑도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4개국 어디든 바둑을 두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 인터넷 속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의 바둑 사이트를 알고 있었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마지막 글을 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힘들어 했지만 끝까지 서울 보내달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던 이성재에게도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 못 참겠다. 피곤에 지쳐 드디어 무너져버린 이성재 9단, 체력좋은 김성룡 9단이 사진에 담았다/

▲ 체력의 차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성재 9단(좌)과 김성룡 9단.

▲ 숙소에서 바라본 말레이시아 시내

▲ 이강욱 8단, 부모님, 유이 선생님과 함께

▲ 호치민 시티홀

▲ 호치민에서 이발을, 한화로 따지면 이발비 750원, 면도250원이다. 김성룡 남은 여생을 베트남에서 보내볼까 고려중....


바둑의 희망은 아시아가 아닌가? 싱가포르 기행 1편(클릭)
채찍 후려갈기는 선진국? 싱가포르 棋행 2편 (클릭)

[글 | 김성룡 9단]

 

 

LS그룹, 베트남 바둑 응원나서다
바둑대회 후원으로 베트남바둑 부흥 꾀해
2012-09-18 오후 5:11:13 입력 / 2012-09-18 오후 5:44:18 수정
▲ LS그룹 구자홍 회장(맨 오른쪽)이 직접 베트남을 방문해 입상자들에게 시상했다.

LS그룹이 베트남 바둑대회 후원으로 바둑보급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18일 LS그룹(회장 구자홍)은 15일부터 18일까지 베트남 다낭시 호앙안 지아라이(Hoang Anh Gia Lai) 호텔서 열린 <제2회 LS-베트남 바둑 챔피언십>을 후원했다고 밝혔다.

이번 후원은 작년에 이은 두 번째로 바둑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 베트남에 평소 바둑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구자홍 LS그룹 회장과 주한베트남 명예영사인 구자열 LS전선 회장이 양국간 문화 교류와 바둑 보급을 위해 시작했다.

▲ LS-베트남 바둑대회에 참가한 구자홍 LS회장이 선수들의 대국을 관전하고 있다.

특히 구자홍 회장은 하이퐁과 호치민 등에 위치한 각 계열사 사업장을 점검하는 바쁜 일정 중에도 시상식에 직접 참가해 선수들을 격려했다. 구 회장은 "바둑은 상호 존중과 배려,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LS파트너쉽이 가장 잘 구현된 스포츠"라며 "LS가 앞으로도 베트남 국민들과 함께하는 파트너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는 하노이, 호치민 등 8개 도시 대표 선수 60여명이 리그 방식으로 4일간 대국을 치뤘으며, 작년과 달리 올해는 직장인과 개인 사업가 등 성인의 참가 비율이 늘어나 선수층이 두터워졌다. 남녀별 성인부·16세 이하·11세 이하로 진행됐으며, 우승자들에게 총 1천여만원의 상금과 상패가 주어졌다. 현지에서 바둑을 보급 중인 프로기사 이강욱 8단은 "작년 우승 선수는 전업 기사로 활동 중이며, 한국으로 바둑 유학을 가는 학생도 있다"며 현지의 뜨거운 반응을 전했다.

한편, LS전선은 1996년 베트남에 진출, 2개 현지법인에 600여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매년 3억 5천만불(한화 약 3천 9백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경제발전 및 고용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매년 한국 대학생 해외자원봉사단을 파견하여 민간교류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 구자열 LS전선 회장은 주한 베트남 명예영사로 2010년 취임, 베트남 65주년 독립기념일, 베트남 문화관광 페스티벌, 한국-베트남 친선의 밤, 한국 오피니언 리더 대상 현지 문화 체험 등 중요 행사를 지원해 왔다.
TYGEM / 한국기원

 

다시 바둑에 집중하는 탄자니아 아이들
방학 마치고 재게된 바둑수업
2012-02-05 오후 2:06:59 입력 / 2012-02-05 오후 2:48:14 수정
▲방학을 마친 탄자니아 아이들.

방학을 마치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오랜만에 학교에 들어서니 아이들이 환한 모습으로 저를 맞이하네요.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 기대에 찬 표정을 보니 저 역시 반갑기만 합니다.

열의에 찬 아이들과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간의 방학을 마치고 다시 바둑판 앞에 모인 아이들은 그 동안의 바둑기술을 많이 잊은 듯 했습니다. 생각보다 쉬는 기간이 길었던 것 같네요.

▲아이들에게 지도하고 있는 필자인 오종성 아마 6단.

기초 행마 설명을 비롯해 복습을 시작하니 시간이 짧게만 느껴집니다.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 학생도 있지만 산만한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곳 탄자니아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수업을 시작하면 눈동자도 밝고 집중력도 좋은 아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 모습이 흐려집니다.

이 것은 단시간에 고쳐질 문제는 아니어서, 더욱 바둑교육을 통해 고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몇몇 학생은 질문도 하고, 물음에 바로 대답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합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바둑알을 잡아 익숙하지 않아했던 아이들도 금새 다시 집중하는 군요.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아이들.

이제는 한글학교에서 현지 고아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들은 시내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던 학생들이라 조금 더 기대됩니다. 지능이 또래들보다 덜 성숙한 아이들을 '바둑'을 통해 달라지게 하는 것도, 재능 있는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쳐 그 아이들이 더 성장하게 만드는 것도 바둑교육의 한 면이겠지요.

요즘은 비도 오지 않고, 날씨가 무덥습니다. 한국에서는 눈이 내렸다는데 부럽습니다. 계속 되는 더위에 머리와 몸이 둔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전 더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들었는데 몸으로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무더위 속에서도 이 곳 사람들은 농사 등 감당하지 못할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탄자니아 소식에 아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전했는데 어른들 역시 바둑을 배우고 싶어합니다. 바둑에 대한 관심은 아이들보다 훨씬 많을 정도니까요. 다음 원고에는 바둑에 관심이 많은 어른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까합니다.

타이젬 회원여러분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TYGEM / 오종성 아마 6단

 

탄자니아
미국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는 한국?
한국에 대해 호기심 가득한 탄자니아 아이들
2011-10-27 오후 2:37:18 입력 / 2011-10-27 오후 4:15:51 수정
▲ 수업을 듣는 아이들.

탄자니아 아이들은 한국을 미국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국가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이곳에 봉사하러 온 우리들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아이들이 그러하듯, 이 아이들도 선생님을 많이 따르고 또 동경합니다. 그래서 한국도 좋아하게 된 것이지요.

아이들은 한국에 대해서 무척 궁금해하고 혹시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을 알아가려는 매개체로 바둑을 배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한국을 좋아합니다. 한국 타이젬 회원들이 응원하고 있다는 이야길 전하니 내게 한국어 인사법 등을 묻곤합니다.


▲ 빵을 먹고 있는 아이들.

어찌되었든 나는 아이들이 바둑에 흥미를 가지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바둑을 만나 집중력이 향상되고 또 인격 형성, 즐거움 등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들을 통해 생활도 더 나아지겠지요.
▲ 물통을 나르는 일은 학교 과목 중에 하나이다. 탄자니아는 유치원부터 일하는 날과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탄자니아에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폭우였지요. 하지만 그동안 60년 만에 몹시 가뭄이 심해서 많은 어려움이 있던 터라 모두 폭우를 반가워했습니다. 며칠동안이나 내렸지요. 그래서 인프라가 발달하지 않은 이곳의 길은 움푹 패이고 산길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요즈음에는 폭우가 멈추고 다시 길도 다닐만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가 그리워집니다. 비는 생명 이라는 것을 이곳 탄자니아 에서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폭우가 그치자마자 나는 아이들에게 달려갑니다. 오랜만에 본 아이들은 내가 반가웠는지 다른날 보다 밝고 명랑하게 나를 맞이합니다. 수업을 들을 준비도 훌륭합니다. 비로 인해 2주 만에 만나서 더 반가웠나 봅니다.

▲ 잔지바 유치원 아이들의 공부하는 모습. 유치원 아이들 치고 너무 정숙하다.

사실 저는 한국에서도 바둑을 가르친 경험이 여럿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아이들을 한국 아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오해해 탄자니아 아이들의 더딘 바둑진도에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탄자니아의 열악한 환경과 역사를 되돌아보며 아이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더딘 진도에도 너그러워지고 아이들에게 더욱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나와 아이들은 깊은 이해와 관심 속에서 서로의 마음이 일치해 점점 가까워져 갑니다.

사활과 패싸움에 관한 강의를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아이들이 따라와 줍니다. 오늘은 바둑을 두고 승리한 아이와 패배한 아이를 구분해 주었더니 아이들이 흥미로워 합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승패나 기량을 떠나 바둑을 꿈과 행복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가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한글 학교 아이들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 아이가 바둑 진 것이 너무 억울해 울음보가 터졌습니다. 이런 일들은 한국에서 많이 있던 일이라 오히려 웃음이 납니다. 그런데 아이 부모님은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조금 못된 것 같기도 합니다.

▲ 송편 만드는 실습시간. 바둑을 져서 울었던 아이도 어느새 까맣게 다 잊고 즐거워한다.

이번 폭우로 우리 집사람은 허리를 다쳤습니다. 잔지바에 침을 잘 놓는 이북 사람이 있다고 소문을 들어 잔지바에 갔지요. 잔지바로 향하는 도중 커다란 사고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배가 침몰한 사건 입니다. 한국 뉴스에는 600명 중에 260명이 사망했다고 보도되었지만,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배는 평상시 정원 600명인데 사고 당일에는 1500명 정도가 배에 탔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떠나기 전 몇몇의 사람들은 이미 물이 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리려고 해도 사람이 붐벼 내리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벌써 2번째 입니다. 하지만 이곳 탄자니아에서는 큰 뉴스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일로도 엄청난 인명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차사고로도 죽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고 또 끔찍합니다.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늘 건강하고 행복한 일만 겪었으면 좋겠습니다.



▲ 더운날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은 온몸을 다 가리고 있다.

잔지바에 도착을 하고 침을 잘 놓는 북한 동포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줍니다. 그래도 긴 대화는 꺼리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경계하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가서 침을 맞고 돈을 내려고 하니 "같은 동포끼리 무슨 돈을 받습네까?"라며 완강히 사양합니다. 고맙게 생각하지만, 다음에 또 오게되면 진료비가 아닌 선물을 줄 계획입니다.

 

 

 

탄자니아
바둑반 희망자, 정원초과!
모로고로의 학생들, 바둑에 대한 호기심 지대해
2011-11-15 오전 10:54:27 입력 / 2011-11-15 오전 11:46:38 수정
▲ 모로고로에서 바둑 수업 장면. 생각보다 이날 수업의 참여한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바둑이 두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는 '모로고로'라는 도시로 바둑보급을 하러 나섰습니다. 이곳에서는 바둑돌과 바둑판을 구하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로고로 진출은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꽤 지체되었지요.

모시에서 모로고로 까지의 거리는 대략 500km 정도 입니다. 가까운 편이지요. 하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자동차로 8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 힘든 여정이었지만 모로고로에 도착하니 이곳 주민들이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이해줍니다.

▲ 학교 종. 수업 시간이 되면 이 종으로 알린다.

▲ 바둑 두는 아이들. 바둑보급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왔지만, 그래도 역시 부족해보입니다. 

▲ 나도 모로고로의 주민들이 건축물을 짓는 것을 도왔다.

물론 전부터 이곳 주민들과 교류가 있었습니다. 모로고로는 물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모로고로의 주민들을 위해서 산 위로부터 파이프를 심어 물을 공급하도록 하는 일을 완성했습니다. 그 일을 도우면서 주민들과 교류를 했던 것이지요. 

▲ 모로고로의 생선가게. 생선가게는 냉동고가 없기 때문에 말려서 팔고 있다.

▲ 모로고로의 의류 가게의 모습.

물이 터져 나오던 날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도 그리고 이곳 주민들도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지요.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습니다. 물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자 이제 모로고로 주민들의 삶도 한층 좋아졌습니다. 요즈음 모로고로에서는 소와 돼지, 염소 등 가축도 기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바둑을 두는 학생들의 모습. 바둑 내용은 엉망이지만, 꽤 진지하다.

▲ 바둑을 두게 하고 일일이 돌아다니며 지도하는 모습.

이곳 탄자니아에도 우리 나라처럼 방언이 많습니다. 그 중 표준어는 '스와힐리어'라는 것인데, 스와힐리어는 탄자니아와 케 냐를 중심으로한 지역에서 공통어로 쓰이는 언어입니다. 모로고로의 주민들은 스와힐리어를 아주 잘 합니다. 그래서 바둑을 가르치기도 한결 편했습니다.

▲ 바둑을 배우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학생 수를 제한했다. 수업에 들어오지 못한 아이들은 이렇게 창문으로 우리 수업을 구경했다.

이곳 모로고로의 아이들과는 예전부터 교류가 있어서 그런지 바둑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바둑을 배우는 학생들을 제한하는 불상사(?)도 일어났지요. 그래도 바둑판은 모자랐습니다. 학생들이 교실에 가득했고 첫 강의인데도 다들 잘 따라와주어 나도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강의시간에도 손을 번쩍 들어 서로 대답하려고 달려들고 강의가 끝난 후에도 질문이 쇄도합니다. 학생들이 내게 계속 바둑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호응이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모시의 학생들과 다른 반응에 나도 의욕이 생깁니다.
 
▲ 학생들은 바둑을 두다가도 내게 질문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바둑을 배웠다.  

학생들은 기본 적인 수법도 제대로 배우지 않았는데, 벌써 바둑도 두려고 덤벼듭니다. 아마도 상당히 빠른 진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아이들도 타이젬에서 바둑을 두게 된다면 참 좋을텐데요. 바둑 보급이 성공하게 되면 바둑대회도 열고 유명 프로기사도 섭외해 다면기 행사도 벌이는 꿈을 꿔 봅니다.

바둑의 수는 무궁무진해서 세계인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바둑판에 모두 펼쳐보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어떤 바둑을 만들어 가게 될까요? 나는 오늘도 꿈을 꾸며 아이들을 만나러 갑니다.
TYGEM / 오종성 아마6단

 

세계바둑사
한국에 온 첫 서양인, 하멜 아니다?
한상대의 세계바둑사, 네덜란드 편
2012-01-09 오전 9:44:58 입력 / 2012-01-09 오후 1:40:22 수정

▲ 델프트(Delft)도 운하도시라 암스텔담의 축소판이다

1. 네덜란드 한국대사배

2007년 9월 7일. 델프트에서 열린 한국대사배에 나는 프로사범 안영길, 이강욱, 아마 사범 홍슬기, 강경낭을 대동하고 갔다. 전 날 파리를 떠나 프랑스 북부 고도(古都) 아라스(Arras)에서 자고 네덜란드로 갔다. 도중에 배가 지나가서 다리를 분리시키는데 우리차가 교각 가운데에 달랑 올려져 있었던 희안한 경험을 한다. 그날 델프트에 도착하여 밤에 영길, 슬기, 강욱이는 레이든 하리 집으로 가서 자고 나와 경낭이는 바스네 집으로 갔다.

바스(Bas)는 20대 후반으로 델프트 공과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는데 이번 한국대사배 대회장을 맡았다. 자기 여자친구 채서린과 함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서양에선 학생집이 제일 가난하다고 보면 된다.

바스네 집엔 이미 네덜란드와 벨기에 각지에서 온 젊은 바둑인들이 몇 명이 묵고 있다. 밤 늦게까지 바둑을 두는데 예쁜 경낭이가  바둑까지 잘 두니까 인기가 좋다. 이날 밤도 나만 침대에서 자고 다른 사람들은 다 응접실에서 슬리핑백에서 잤다.

경낭이는 다른 방에서 고무매트에서 잤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경낭이가 '교수님, 저 한잠도 못 잤어요. 고무 바닥이 뒤척일때마다 반대쪽이 튀어나와 밤새 뒹굴었어요" 한다. 나는 "그것도 자는 요령이 있어야지 너 같은 촌놈은 원래 그렇게 고생하는 거다"라고 했지만 나도 거기에선 잘 자신이 없다. 경낭이는 캐서린과 친해져서 서로 편지를 주고 받다가 그 인연으로 나중에 캐서린이 한국에 오고 경랑이가 네덜란드에 가게 된다.

다음날 아침 델프트 대회장에 도착하니까 익숙한 얼굴의 네덜란드 바둑인들이 우리를 반긴다. 아는 사람이 많으면 새로운 곳에 가도 어색하지가 않다. 대회장에 바(Bar)가 하나 있는데 우리 일행 5명만 공짜로 아무거나 마실 수 있다.

내가 우리 일행에게 "공짜라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더니 제일 어린 경랑이가 "교수님, 저도 그쯤은 알고 있어요" 한다. 개회식에 최종무대사가 엄주천영사와 같이 왔다. 최대사의 개회사 다음에 내 인사말이 있었고 뒤이어 내가 사범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나는 최대사가 아마 3단인걸 알고 즉석에서 네덜란드 바둑협회장과 대국을 제안했다. 그도 역시 아마 3단. 대국과 동시에 유럽전역에 인터넷 중계가 준비되었다. 해설은 나에게 해달라고 한다.

돌을 가린 결과 최대사의 흑번이다. 유럽에선 'Korean style'하면 '싸움바둑'을 의미한다. 내가 "누가 한국 사람이 아니랠까봐 대사가 계속 싸움을 건다" "이 수는 전형적인 한국스타일 이다" 식의 해설을 할 때마다 사방에서 웃음 소리가 들린다. 최대사 바둑은 행마엔 문제가 있으나 힘이 좋아 결국 백대마를 때려잡고 승리했다. 최대사가 진짜 한국스타일을 보여 주었다.

▲ 최종무대사의 개회사

▲ 내가 무대에서 우리 일행을 한명씩 소개하고 있다

▲ 최대사와 바둑회장의 대국 중계 필자의 해설

81명이 참가한 한국대사배가 시작되자 우리는 델프트 관광을 나갔다. 먼저 풍차에 갔더니 아직 문을 안 열었다. 시내를 걷는데 무슨 축제가 있는지 사람들이 가득하다. 궁전과 관광지가 다 공짜다.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라 시내를 걸어서도 충분히 돌아 볼 수 있다. 델프트에는 세계적인 공과대학이 있고 ‘델프트 웨어’라고 불리는 푸른 도자기가 유명하다. '델프트 칼러'하면 서양인이면 누구나 아는 푸른색 중 동양청자 같은 색이다.

▲ 델프트웨어(Delft ware)

델프트는 덴하그와 로테르담 사이에 있다. 운하며 도시 생김새 때문에 델프트를 전형적인 네덜란드 마을이라고 한다. 이 곳은 ‘진주 귀고리 소녀’를 그린 화가 베르미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고향이기도 하다. 베르미어의 그림에는 델프트 거리가 자주 배경으로 나온다. 또 델프트는 네덜란드를 세운 윌리엄 오렌지공(William I, Prince of Orange 1533 – 1584)이 암살당한 곳이기도 하다. 윌리엄이 스페인 왕에게 봉사하다가 개신교 반군의 지도자가 되자 스페인왕 필리페 2세는 그를 역적으로 지명하고 그의 목에 25,000 크라운의 상금을 걸었다.

프랑스 군인 제라드(Balthasar Gérard)는 윌리엄이 옛 군주와 캐토릭을 배반한 것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윌리엄의 델프트 관저에 찾아가 그를 권총으로 암살한다. 범인은 스페인으로 도망가다가 중간에 붙잡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사형에 처해진다. 오렌지공 윌리엄이 이곳 신교회(New church)에 묻혔다고 해서 찾아갔다. 교회는 시내 중심지에 있다. 들어가니까 윌리엄공의 일생이 소개 되어 있고 교회제단 앞에 있는 무덤에는 방문객들이 줄지어 있다. 그 교회 구내매점에서 나는 유명한 델프트웨어 타일 등 두어 가지를 샀다.

▲ 윌리엄 오렌지 공 암살 장면

우리가 교회에 있는데 유럽의 유명한 바둑필자 페터(Peter Dijkema 2단)가 찾아 왔다. 대회장으로 우리를 취재하러 갔다가 우리가 관광 나간 걸 알고 이 교회엔 꼭 오리라고 생각하고 왔다고 한다. 그는 미국 이저널 (American Go E-Journal)의 유럽특파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의 설명으로 우리는 델프트 관광을 더 충실하게 할 수 있었다. 페터는 바둑얘기면 무엇이던 즐긴다. 점심을 우리가 중국집에 초대했는데 식사 중 메모도 자주 하고 얘기가 안 끝나니까 저녁에 자기 집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대회기간 중 미국인터넷 바둑저널에 페터가 보낸 기사가 다음과 같이 실렸다.

Peter Dijkema, Dutch baduk writer
(American Go E-Journal Volume 8, #66: September 17, 2007)

Professor Hahn Sang-Dae 6d led a strong Korean delegation to the event; Hahn developed the idea with the Korean Amateur Baduk Association (KABA) to use some existing Ambassador's Cup tournaments in Europe as qualification venues for the Korean Prime Minister Cup. Hahn teaches at the Faculty of Culture and Arts of Myongji University, is on the faculty of Baduk Science and has visited Europe many times. He and his group toured the historic city of Delft – which includes important monuments, museums and the nearby Hague – while the Dutch battled on the boards. Among the group was An Young-gil 8P and Hong Seul-ki 7d, both of whom gave public commentaries on top-board games, which were broadcast on KGS and recorded for EuroGoTV. The only upset in the first round was previous KAC winner Geert Groenen 6d's loss on time.

우리는 오후에 페터 집으로 향했다. 운전은 영길이가 하고 지도는 내가 읽었다. 운전이 아직 초보였던 영길이가 "다음에 오른쪽으로 꺾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지키지 못해 길을 지나치면서 한 시간쯤 헤맸다.

이에 뒷자리에서 불평이 나오자 영길이가 "너희들 나 때문에 네덜란드를 더 많이 구경하니까 감사해라" 라며 뻔뻔한 모습을 보인다. 강욱이와 슬기는 영길이보다 두살씩 아래다. 서로 말로 치고 받고 하는 와중에서도 차 안에는 웃음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그만큼 서로 친해서 그렇다. 차창 밖으로는 아름다운 네덜란드 마을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시간을 한참 지나 페터 집에 도착했다. 나이가 60대 같은데 식구가 없이 혼자 산다. 살림을 보니까 이혼한 사람 같아 물어보지는 안했다. 저녁식사 후 우리 숙소가 예약이 안 된 것을 알자 페터가 다 자기집에서 자자고 한다.

내가 "방 둘, 1인용 침대 둘뿐인데 6명이 어떻게?" 하니까 해결책이 있다고 한다. 나만 침대에서 자게 하고 나머지 젊은 사람들은 창고에서 메트리스를 가져나와 응접실에 한명, 부억에 한명, 복도에 한명, 창고에 한명식으로 잠자리를 마련해 준다. 너무 고맙다. 그날밤 우리는 그집의 빵, 포도주, 치즈, 과일 등 있는 음식은 다 거덜을 내고 나왔다. 페터는 언젠가 한국에 오면 우리가 잘 대접해 주어야 할 사람이다.

대회 둘쨋날 우리는 덴하그에 갔다. 차로 20분만에 도착했다. 사범들에게 덴하그를 구경시켜 주는게 주목적이고 내 목적은 따로 있다. 그동안 벼르기만 하고 못 가본 마우리츠하우스(mauritshuis)에 가는 거다. 베르미어(Johannes Vermeer 1632 - 1675)가 그린 '진주 귀고리 소녀'를 보려고 하니까 델프트미술관에 있는 것은 복사판이고 마우리츠하우스 미술관에 진품이 있다고 한다. 이 미술관에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이 있다. 그는 자화상을 일생 51점을 그렸다. ‘진주 귀고리 소녀’ 앞에 역시 사람들이 많이 있다.

▲ 진주 귀고리 소녀(1665) 베르미어 그림엔 진정한 중세 냄새가 난다.

그 그림 앞에 40세쯤 보이는 일본 여자가 그림을 보고 또 보고 있었는데 우리가 한 시간쯤 미술관을 돌고 그 자리에 오니까 아직도 그녀가 그 곳에 있다. 상당히 세련돼 보이는데 이 그림과 무슨 사연이 있을까?

'진주 귀고리 소녀’는 영화와 책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유명하다. 베르미어가 자기집에 일하던 17세의 소녀를 그린 거다. 터키식 터번을 쓰고 약간 입을 벌리고 뒤돌아 보는 모습이 긴장감이 없어 그런지 남성의 본능을 건드리는 요소가 숨어 있다.

거기에 커다란 진주 귀고리가 그림에 액센트를 절묘하게 주고 있다. 이 그림을 다시 손질을 하여 고쳤는데 인터넷으로 내가 여러번 비교해 봤는데 고치기 전 보다 좀 못해진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럴까? 미술관을 나와 점심은 터키집에서 케밥(Kebab)을 먹었다.

우리 암산으로도 30유로가 넘는데 터키 청년이 "18유로 80센트"라고 한다. 내가 "계산이 맞느냐?"고 하니까 웃으면서 "맞다”고 한다. 우리는 그 돈만 내서 수지 맞았지만 식당을 나와서도 무언지 기분이 찜찜하다. 그 친구가 그렇게 장사해서 생존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 네덜란드 화가 작품만 모은 마우리츠하우스 미술관

▲ 네덜란드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 건물

▲ 강변 구도시에 위치한 옛 국회의사당 덴하그 신도시

우리가 대회장으로 돌아오니까 얀센(Frank Janssen)이 우승했다. 그는 바둑강자이면서 직업이 유럽바둑문화센터의 매니저다.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네는 나에게 얀센은 한국에서 만나자”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결승국을 안영길 사범 해설과 홍슬기 사범의 도움으로 진행했다.

참가자들이 진지하게 듣고 질문도 간혹 한다. 질문에 대한 답으로 참고도가 대형바둑판에 전개될 적마다 고개를 끄덕인다. 특히 아마사범인 슬기가 변화도를 척척 늘어놓자 감탄을 한다.

2003년 유럽챔피언에 오른 홍슬기는 연구생 출신이다. 당시는 베를린에서 사범으로 있다가 현재는 필리핀에 있다. 슬기 역시 내 제자이며 여자 연구생 출신 TV 진행자 이승현과 결혼했다. 안영길은 호주에서 영주권도 받고 국가코치로 자리를 잡았고 이강욱은 2004년 세계대회 우승을 한 후 프로가 되었다. 지금은 월남 호치민에서 사범으로 있다. 강경낭은 여자 연구생 1조 출신이다. 경랑이는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 런던의 사범으로 있다.

이 중에는 호주의 영길이를 빼곤 영주권을 가진자가 없어 불원간 그 나라를 떠나야 한다. 앞으로 바둑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최근 스페인의 오은근 사범이 5년 거주권을 얻었다. 영주권의 전초과정이라 너무 잘 되었다. 호주의 임미진도 호주시민권자 한국계 청년과 결혼했다. 신랑이 회계사로 아주 좋은 청년이라 미진이가 잘 되었다. 미진이 시아버지는 교회 목사인데 며느리가 바둑 고수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영주권을 얻는 방법 중 가장 빠르고 쉬운길이 현지 시민권자와 결혼이다.

몇 달 후 바스와 캐서린이 한국에 왔다. 경랑이가 명지대 바둑학과 학생이라 학교를 다니고 있고 영어도 아직 부족해서 내가 이 커플을 내내 데리고 다녔다. 한국을 몹시 좋아하면서 이들이 떠날 때 아쉬워 한다. 이후부터 캐서린은 친한파가 되어 네덜란드 흐로닝엔(Groningen) 유럽바둑대회에선 한국선수단을 보살피고 특히 전상윤의 영어를 많이 도와 주었다. 그래서 상윤이가 2010년에 유럽대회엘 또 가게 만들었다. 상윤이는 그 대회에서 준우승을 한다.


<하멜과 히딩크>
'하멜표류기'는 우리나라를 유럽에 최초로 알린 책이다. 1688년 홀란드어로 출판되었고 이어서 영어, 독어, 불어판이 출판되었다. 당시 조선이란 나라의 존재도 모르던 유럽에 우리나라의 풍속, 생활, 사회를 처음 알린 책이다. 우리에게도 당시 사회 실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한국에서는 1971년에 처음 번역, 소개되었다. 당시 유럽인은 미개한 곳에 기독교를 전파하여 동물 같은 비유럽인을 구원하겠다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멜(Hendrick Hamel)이 탄 스페르베르(Sperwer)호가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항해하던 중 폭풍에 밀려 1653(효종 4)년 8월 제주도 남단 산방산에 표착(漂着)한다. 64명 중 36명만 살아 남았다. 그들은 서울로 호송되었다가 2년후에 전라도 지방으로 분산 이송된다. 1666년 9월 하멜일행 중 8명은 야음을 틈타 읍성(邑城)을 탈출, 해변에 있는 어선을 훔쳐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도망간다. 그들은 1668년 7월에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17세기는 네덜란드가 세계해양권을 쥐고 있었다. 유럽인은 동양인을 착취대상으로 보는데 조선은 하멜을 천한 위치에 놓고 인간취급도 안 했다. 또 조선을 밖으로 알리기 싫어서 그들을 감시했다. 그래서 하멜 일행은 우리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고통을 겪는다. 그가 귀국하여 조선에 대해 증언한 내용은 조선을 멸시하고 세월에 대한 복수심에서 모든 것을 과장해서 기술한다. 그에게 한국 이름과 가족이 있었지만 수치심 때문에 숨겨서 아직도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하멜의 네덜란드 고향에는 그의 기념비가 서 있다.

하멜이 우리나라에 온 첫 서양인이 아니었다. 그보다 27년 앞서 같은 홀란드인 3명이 왔다. 벨테브레(Jan Weltevree 박연)도 1627년 일본으로 가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그는 동료 히아베르츠, 피에테르츠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서을로 호송되었다. 그들은 훈련도감에서 일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 사람 모두 출전한다. 두 명은 전사하고 박연만 살아 남았다. 그는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독하고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 조작법을 지도하였다.

박연은 조선여자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하멜 일행이 도감군오에 소속되자 그들을 감독하고 조선풍속을 가르쳤다. 가끔 우리나라 사람 중 난데없이 머리가 노랗거나 눈이 파랗고 피부가 백인 같은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조상 중에 네덜란드 사람 39명 중 누구와 피가 섞였을 가능성이 크다.

21세기로 들어서는 초입에 우리나라에서 영웅이 된 네덜란드인이 있다. 바로 히딩크 축구대표팀 감독이다. 그는 서구식 합리주의를 앞세우고 혈연, 지연, 학연을 무시했다. 선수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경력을 무시했다. 능력만 중시했다. 개인기 보다 팀플레이를 강조했다. 여기에 유럽과 다른 한국선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감독에게 가부장적 질서개념으로 무조건 복종했다.

감독과 선수들이 계약관계가 아닌 정(情)과 충성심으로 전인간적 몰입이 되었다. 박지성은 골을 넣고 먼저 감독에게 뛰어가서 안겼다. 유럽선수와 감독은 이렇게 안 된다. 이 두 문화의 이질적 성향이 이상적으로 결합되어 우리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오른다. 우리의 목표는 16강이었다. 히딩크는 축구라는 비정치적 종목의 전문인으로 고용되어 국제무대에서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준 사람이다. 한국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대접하여 명예시민권을 주었다.

▲ 박지성이 골을 넣었다!

경제도 그렇다. 한중일 세나라는 그들의 동양문화와 서구의 합리주의가 합하여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 서양이 쫓아올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문화에서 나온 게임이 바둑이다. 바둑도 비정치적 종목이고 우리는 이미 세계최강의 위치를 확보했으나 지금은 중국의 추격에 휘청이고 있다. 중국이 우리보다 인구도 많지만 영재발굴, 교육방법이 더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앞날이 걱정이다. 바둑계에 히딩크는 언제 나오려나?

<네덜란드 국민성>

네덜란드 국민성은 절약, 검소, 정직에 근거를 둔다. 칼뱅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네덜란드인은 절제를 잘한다. 쾌락보다 성취지향적이고 노동은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들과 대화를 해보면 환상이나 감상은 이성에 의해 지배받는 걸 느낀다. 규칙, 신용, 의무를 중시하는 점은 독일과 비슷하다. 그러나 네덜란드인은 이윤추구에는 적극적이며 영웅주의를 기피하고 개인주의가 앞선다. 내것, 네것이 분명하다. 이런 배경이 네덜란드 상인전통에 영향을 준다.

내가 한번 잘 아는 네덜란드 사람과 동업을 했다. 내가 그렇게 수고했는데 연말에 나에게 돌아온 돈은 고작 78유로였다. 그 얘길 들은 독일인이 나에게 "손해 안봤으면 그게 남은 것"이라며 웃는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다른 특징 중 하나는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뭉치길 잘한다는 점이다. 취미클럽, 운동클럽, 학술클럽 등 네덜란드는 클럽천국이다. 바둑클럽 멤버들도 서로 인간적으로 결합이 잘 되어 있다. 같은 클럽에서 몇십년씩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같은 클럽에 꾸준히 나온다. 이렇게 작은 나라가 최선진인데에는 무슨 비결이 있음이 분명하다.

<레이든 바둑 친구들의 방한>
레이든에서 바둑인 6명이 나를 찾아 한국에 왔다. 내가 작년에 갔을 때 바둑인이면 한국에 다녀가야 한다고 권했더니 그 초대에 응한 것이다. 원래는 얀 롱엔회장 부부도 같이 오려고 했는데 얀의 건강이 안 좋아 마지막에 포기했다고 한다. 얀이 친한파며 조치훈 9단 중심 인터넷 사이트 ‘my friday night files’를 운영한다는 얘기는 전편에서 한 적이 있다.

내가 그 얘기를 조치훈 9단의 형 조상연 사범에게 했더니 조사범이 나에게 조치훈 9단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준다는 부채를 두 개 준다. 하나는 내가 갖고 하나는 얀에게 갖다 주었다. 그는 자기집 진열장 유리케이스에 그 부채를 넣어놓고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있다.

지난번 얀이 지난번 나에게 "건강상 이유로 바둑계 현역에서 물러나겠다"라며 쓸쓸한 표정으로 말하던 얼굴이 떠오른다.

▲ 雲林之情(높은 곳에 오른자의 외로움을 뜻함) 얀의 사이트(http://rongen17.home.xs4all.nl/)

한국에 온 사람은 하리, 빔, 필립, 테오, 안드레아스, 아놀드 등이다. 공항에는 9명이 도착했으나 3명은 그 길로 전주에서 열리는 국무총리배 세계바둑대회로 갔다. 그들의 숙소는 을지로 6가에 있는 외국인을 위한 아파트호텔 같은 곳이었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하고 싶은게 뭐냐?"라고 하니까 "조훈현 9단을 존경하는데 한번 만나보는게 소원"이라고 한다.

조 9단에게 전화했더니 "다 데리고 우리집으로 오세요" 하며 흔쾌히 자기 집으로 초청한다. 세검동 집에 찾아가니까 조 9단이 한복까지 차려 입고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우리 통역으로 그들은 조 9단과 대화도 많이 나누고 대접도 받고 떠날 땐 선물까지 받았다. 그들은 "이거 하나만으로도 한국에 온 보람이 있다"며 감동했다.

▲ 조훈현 9단 자택

조9단이 제1회 응씨배 결승에 올랐을 때다. 나와 중국강자 왕우비는 자기나라선수에게 100불씩 걸었다. 그 당시 우리 두명은 서로 자신이 있다기 보다 자기나라 바둑을 응원하는 심정이었다.

조9단이 그 얘길 듣더니 "백불이면 큰데요"라고 한다. 조9단이 우승하자 호주인들이 한국바둑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한국바둑은 이를 계기로 비약적 발전을 하고 세계대회를 독식하는 나라가 되었다. 여기에는 이창호의 출현이 결정적 공헌을 한다.

▲ 응씨배 우승후 카퍼레이드(왼쪽), 용산전자시장(오른쪽)

네덜란드인들이 용산전자시장에 가서 감탄을 연발하더니 가격을 유심히 살펴본 후 아무 것도 안 산다. 호주와 용산시장을 비교하면 호주가 훨씬 싸다. 한국이 생산지인데 왜 그런지 지금도 궁금하다. 이 사람들도 그런 이유로 안 산 것 같다. 네덜란드인들은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문화체험을 최대한 즐기고 뭐든지 해보려고 한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 머뭇거리는 태도가 하나도 없다. 고추장, 된장, 못 먹는 음식이 없다.

내가 우리집 사람에게 "이 친구들이 워낙 짠돌이들이라 본전을 뽑으려고 이러는 거 같다"라며 웃은 일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그런 자세가 옳다. 강남 메리오트 호텔 옆 놀부집에 갔을 때다.

국악순서가 있었는데 콘서트홀에서 클래식을 감상하듯 진지하게 듣고 난후 공연자들을 찾아가 허리를 굽혀 절하며 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감명을 받는다. 이 사람들은 이 날밤 얘기를 내가 네덜란드에 갈 때마다 자주한다.

▲ 웬 반찬이 …. 필립(왼쪽사진) 공연자 중 한명과 하리와 안드레아스(오른쪽사진)

네덜란드인들이 있는 동안 마침 한국에 온 미국, 독일 바둑인들을 내가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 후 아리랑 TV에 출연교섭을 하여 네덜란드는 바둑협회 재무 하리 크록트, 독일은 베를린 바둑회장 버나드 룽거, 미국은 시애틀 바둑센터 매니저 얀 볼리가 나와 같이 출연했다. 아리랑엔 2년 전 롱엔회장과 내가 출연한 적이 있다. 이렇게 바둑이 영어로 소개되자 몇 달 후엔 영어교통방송 라디오에서 초청이와 나 혼자 30분간 영어로 바둑을 소개하기도 했다. 한국내에서 바둑세계화였다.

▲ 자기네가 받을 질문을 열심히 읽고 있다(왼쪽사진) TV에 나온 하리(오른쪽사진)

안드레아스는 고등학교 교사이고 아놀드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다. 다른 사람들은 전편에서 이미 소개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데리고 동대문시장, 경복궁, 인사동, 이태원, 국립박물관, 명지대 바둑학과 등을 방문하고 지방은 대전과 부산을 방문했다. 내차 ‘카렌스 2’는 4명 밖에 못 타니까 보통은 3명만 테우고 내가 운전하고 나머지 3명은 우리집 사람이 데리고 지하철, 버스, 기차로 따라왔다. 대전에 갈 땐 다 KTX를 타고 싶다고 하여 하리만 나와 차로 가고 5명은 기차로 갔다.

▲ KTX를 기다리고 있다(왼쪽사진) 대전에서 다시 만났다(오른쪽사진)

네덜란드인 6명이 대전 내 바둑영어교실을 방문해서 교류전을 가졌다. 이상하게 대전 여성팀에게는 전패를 하고 막강 남자팀에게는 거의 전승을 했다. 이 일로 아직까지 그들은 나에게 놀림 대상이다. 자기네가 "진정한 신사"라 그렇다는게 그들의 변명이다. 이 결과로 대전에서 저녁 회식시간에 웃음이 만발했다. 이 행사를 위해 안정웅사범이 수고했다. 이들이 김향희씨와 친분으로 부산에 꼭 가보고 싶어하길래 내가 김향희씨를 대전으로 와서 같이 내려가자고 불렀다.

▲ 대국자 소개(왼쪽사진) 네덜란드 VS 대전 여성팀(오른쪽사진)

▲ 여성팀에게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부산에서 그들은 많은 바둑인들을 만났다. 남포동 좁은 골목을 걸으면서 놀라고 자갈치 시장의 분위기에도 놀란다. 해운대, 광안리의 먹자골목과 술집 행열을 보고 "네덜란드와 너무 다르다"라며 흥분한다.

그들은 김철중 바둑도장에서 부산여성팀과 교류전을 갖고 유엔묘지방문, 당시 부산 여성바둑연맹 총무이었던 김향희씨 집에도 갔다. 외국 바둑인들이 한국방문을 하면 대개 친한파가 되고 여유가 생기면 또 찾아 오게 된다.

▲ 부산 여성팀과 교류전. 김철중도장 김향희씨와 부산 거리

▲ 유엔묘지 김향희씨 집

<우리 가족 레이든 방문>

나는 2008년 우리가족만 유럽을 한바퀴 도는 여행을 했다. 내 아들 오람이가 너무 어릴 때 유럽에 와서 25년 만에 다시 데리고 왔다. 유럽에서 6천여 km를 차로 달렸는데 운전은 오람이 혼자 다 했다. 레이든에 다가 오면서 우리는 시간에 늦을까봐 서둘렀다. 하리와 다른 친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레이든의 중앙역 뒤편은 내가 여기에 올 때마다 하리와 만나는 장소다. 하리가 바로 이 근처에 산다. 오늘은 역 앞까지 왔는데 차를 세우려다가 일방통행에 걸려 멀리 다시 돌았다. 30분 늦게 역에 가니까 하리가 역사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하리는 언제나 팔을 양 옆으로 벌리고 웃으며 나를 맞는다. 그의 안내로 우리 차를 풍차 옆 주차장에 세우고 성 옆에 있는 바둑클럽으로 갔다. 이 클럽 옆에 있는 성은 4세기에 로마인들이 쌓았다는데 돌로 튼튼하게 지었다. 클럽에는 테오, 안드레아스가 앉아 있다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조금 후에 얀, 빔, 필립도 나타난다. 우리 7명은 식사하러 10분 거리의 식당을 향해 걸었다.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한다.

▲ 필립과 얀 하리 안드레아스

▲ 아놀드 빔 테오


182cm의 오람이가 2m의 안드레아스와 얘길 하며 걷는데 오람이가 꽤 작아 보인다. 가는 도중 비가 점점 심하게 와서 우리가 식당에 도착할 무렵에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홀딱 다 젖었다. 모두 상의를 벗으니까 그런대로 식탁에 앉을 만 했다. 우리부부는 6~7 차례 이 곳을 찾아 오며 이 사람들과 친해 졌다. 허물이 없어지고 심한 농담도 주고 받는다. 특히 우리집 사람이 이들과 아주 친하다.

집사람은 빔(Wim)과 하리에 대해서는 수필도 썼다. 빔과는 인생에 대해 이메일을 자주 주고 받는다. 하리는 자기 부인이 레이든의 부시장이라 그런지 식사하면서 정치에 대해 자주 말한다. 레이든은 16~7세기에는 무역으로 번창해서 홀란드의 제 2의 도시였다. 그 후 무역이 침체하자 인구도 격감했고 지금은 대학촌으로 인구 12만 정도의 소도시가 되었다. 다른 홀란드 도시처럼 운하가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어 아름답다.

식사를 하면서 오람이는 빔과 안드레아스와 음악 얘기로 꽃을 피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나는 하리와 바둑에 대한 얘기를 주로 했다. 집사람은 특별한 주제 없이 여기저기 동참한다. 얘기 도중 하리가 2백 년 전에 화약을 적재한 어느 배가 라이든에서 폭발해 수 백 명이 죽고 수 천명이 다쳤다고 한다. 나는 30년 전쯤 전라북도 이리에서 있었던 화약열차 폭파사건 얘기를 해 주었다.

저녁식사 후에 10시가 되자 우리는 암스텔담으로 가기 위해 일어났다. 여기서 40분 거리다. 이 곳에 묵으면 이 사람들이 숙소를 잡아주고 신세를 지게 된다. 또 내일 아침에 암스텔담을 구경하려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버는게 좋다. 밤 11시쯤암스텔담에 도착하여 시내에서 20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가 해주는 설명만 듣고 그 집을 찾아가는데 고생을 한다.

유럽 민박집의 대부분은 기차역만 데리러 나가는 식이다. 우리처럼 차로 여행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들도 그런 설명에는 서툴다. 운전을 못하는 아주머니가 길을 잘 가르쳐 줄리 만무했다. 유럽지도만 있지 각 도시의 지도가 없이 다니는 우리에게는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거리에는 사람이 안 다니니까 물어 볼 수도 없다.

이런 경우에는 멀리 있는 주유소에 찾아가서 물어보는 도리 밖에 없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그 집에 들어섰다. 한 시간 이상은 헤맨 것 같다. 이 곳에서도 우리식구 3명이 4인실을 쓰고 돈은 4인분을 냈다.



<홀란드는 홀란드인이 만들었다>
홀란드는 바다 보다 낮은 땅이 3분의 1이라 "신이 세계를 만들었으나 홀란드는 홀란드 인이 만들었다"고 한다.

아침 식사 시간에 보니까 이 집에 묵는 사람이 10명 이상이다. 거의가 배낭여행을 하는 학생들이다. 우리가 유럽여행에 대해 화제를 꺼냈는데 모두 반응이 소극적이다. 유럽에 대한 기본상식이 짧아서 그러나? 유럽 같은 곳을 여행하려면 사전에 공부를 해야 한다. 집 주인은 이 곳에 산지 30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조선족을 안 쓰고 60대 두 부부가 직접 모든 일을 한다. 민박 업은 세계 각지에 교민들에게 새로운 사업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그 만큼 많이 한다는 얘기도 된다. 시설은 호텔처럼 안 좋지만 값이 저렴하고 한국음식을 먹고 정보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 경제발전이 지속 하는 한 해외의 민박집 수도 늘어 날 전망이다. 암스텔담 시내를 운전하던 오람이가 "여기는 레이든을 그대로 늘려 놓은 곳 같아요" 한다. 홀란드는 건축양식이 자기네 만의 고유양식이 있어 레이든과 암스텔담이 닮은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시내에 있는 반 고호 미술관으로 갔다. 오람이가 유럽에 오면서부터 노리던 곳 중 하나다. 오람이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이 미술관에 대해 많이 들어서 영향을 받은 거 아닐까? 고호 미술관에서는 오람이와 집사람만 들어가게 했다. 나는 유럽에 올 때 마다 학생들과 7~8번은 들어 갔다. 진짜 이유는 주차할 곳이 없어서었다. 나는 그 근처 주택가로 차를 몰고 들어 갔는데 마침 주차할 곳 한 군데를 찾았다. 얼른 차를 세우고 나도 미술관으로 와서 식구들과 합류했다. 고호 포스터도 몇 장 샀다.
"고호가 죽기 전 1~2년 사이 작품이 제일 좋아요"
"동생 테오와의 관계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오람이와 집사람이 계속 떠든다.

<잔트펠트의 방문>
유럽 최고의 바둑 서적, 용품 판매상 페터(Peter Zandveld)가 한국에 온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1955년생인데 아직도 독신이다. 어려서 바둑을 배워서 21살부터 지금까지 바둑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소원이 유럽대회와 미국대회가 같은 기간에 열리는 거다. 그러면 자기가 양쪽을 다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페터는 처음에는 바둑선수로 나가볼까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빨리 늘자 선수보다 용품보급쪽으로 돌아섰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오로미디어 조창삼 사장과 자주 같이 붙어 다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유럽바둑연맹의 이사로 있다. 나에게 명지대 바둑학과를 방문한다고 하길래 내 교실에 들어오면 내가 반쯤은 영어로 강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늦게 와서 강의 후반부에 교실에 도착했다. 그가 청강소감을 유럽연맹 뉴스레터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Professor Hahn of the Myong-ji University invited me to attend one of his classes. Professor Hahn had lived in Australia for a long time. He is known both in Europe and Korea as the one who build the first Go, excuse me, Baduk, contacts between Korea and Europe.

Most of the students are strong go players, but not professionals. The university prepares them for a future as teacher or some other function in the go world. Professor Hahn teaches about ‘Go culture in Western countries’. We were late because of traffic jams, so I missed the first part but I could guess what it was about as words like “xenophobia” and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were written on the blackboard.



<네덜란드 바둑역사 2>

아동서적 출판사장 비에(Leon Vie)가 필명을 사용해 1954년 기초 바둑책 두권을 출판하여 아동 팬을 확보하고 자기가 바둑세트들을 팔았다. 첫번째는 예명으로 두번째는 본명으로 출판한다. 그는 자기 친척이 신문사에 있는 걸 이용하여 광고나 기사를 많이 낼 수 있었다. 동양문화, 일본역사를 곁들여 쓴 기사들은 손님을 끌기위해 신비한 동양 얘기들로 과장되어 썼다. 그 결과 갑자기 바둑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다.

수학교수인 스킬프(Albert Schil)는 네덜란드와 유럽바둑연맹 회장을 겸임하면서 바둑 발전에 힘쓴다. 그는 부부동반으로 국제바둑행사엔 거의 다 참여하고 네덜란드 내에서는 클럽을 늘려나갔다. 1957년 독일에서 열린 바둑캠프가 첫 유럽대회 성격을 띤다.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바둑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바둑대회 운영방법, 룰, 랭킹, 연맹조직, 교류전등 많은 아이디어를 같이 의논했다. 그의 노력으로 네덜란드에는 27개의 클럽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바둑을 즐겼다. 그러나 그들의 수준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비해 낮았다.


초기 바둑클럽 회장 리스트를 보면 누가 바둑클럽을 언제 이끌었는지 알 수 있다.

스킬프(1928-1999)교수가 6명의 동료와 같이 일하면서 퇴근 후 백주를 같이 마시고 공통관심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바둑을 같이 두기 시작한다. 이들이 주동이 되어 1960년 유럽대회를 레이든 부근에서 개최한다. 이 행사는 스킬프교수가 총사령관이 되어 지휘를 맡는다. 스킬프(1928-1999)가 네덜란드 바둑소식을 적어 독일로 보내면 'DGoZ' 저널을 통해 유럽인들이 네덜란드에 대해 알게 된다.

1961년 영국의 전설적 바둑인 바즈(John Barrs)가 크리스마스 휴가에 스킬프에게 와서 며칠 묵는다. 그는 네덜란드 바둑인과 어울리며 많은 대국을 했다. 이 무렵 독일 바둑지 DGoZ의 소식과 네덜란드 현지 소식을 담은 바둑뉴스레터가 더치(네덜란드어)로 처음 나오기 시작했다. 간편한 바둑세트와 바둑책도 현지에서 만들어 나왔다.

그러나 해외 명국기보 게재등은 아직 엄두도 못낼 시절이었다. 암스텔담에 첫 클럽이 생기고 급수도 정해졌다. 이와모토 9단이 자기 딸과 방문도 이즈음인 1962년이었다. 네덜란드 바둑대회는 1960년 스킬프가 우승하고 레바투(Rebattu)가 1963, 1965, 1968에 우승하여 강자로 군림한다. 레바투 외에 브리스(de Vries), 괴만스(Goemans)가 강자였다.

▲ 네덜란드 20세기화가 몬드리안(Mondrian) ‘붉은 포도밭(1888)’ 19세기 반 고흐(Van Gogh)

초기 네덜란드 바둑계에 대한 기록은 필자와 서봉수9단을 자기 집에 묵게했던 유럽바둑연맹회장 얀 프랑켄하우센(Jan Frankenhuysen)의 기억에 의존하는 적이 많았다. 나는 얀과 슐렘퍼를 1979년 2월 제 1회 세계바둑대회에서부터 알게 된다. 암스텔담 오픈에는 자기 나라의 단골 우승자면서 유럽 강자였던 독일의 마테른, 영국의 맥페이든, 프랑스의 무싸 등의 이름도 눈에 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슐렘퍼의 독주가 시작된다. 1편에서 슐렘퍼와 유창혁 대국에 대해 소개한 그 슐렘퍼다. 그는 일본 안도 9단 내제자로 들어가 1년간 영구생 생활을 하고 돌아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유럽의 1인자로 군림하다가 홀연히 바둑계를 떠나 지금은 의사 직업에만 몰두하며 살고 있다.


1980년대 유럽은 한국 유학생 유종수 사범의 독무대였다. 유럽의 1인자 슐렘퍼와 10번기에서 일방적으로 누르고 유럽 1인자로 군림하다가 귀국했다. 유사범은 본인이 자랑을 안하는 성격 때문에 국내엔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내가 1980~90년대 유럽에 가면 "용을 아느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Jong? 잘 모르겠는데" 하면 그에 대한 애기를 해준다. Yoo Jong-Su 중 'Jong'을 유럽발음으로 "용"이라고 읽어서 내가 몰랐던 것이다.

바둑계가 공을 인정해 주어야 할 사람을 잊어서는 안된다. 유사범은 누구보다 한국바둑을 유럽에 인각시킨 인물이다. 지금도 유럽의 나이든 바둑인들은 유사범 얘길한다. 귀국해서도 사범으로 바둑보급을 계속해 오는 사람이다.

또 한 사람 생각난다. 한 때 담수회회장으로 바둑계를 위해 일을 많이 한 정운희씨가 지금은 안 보인다. 내가 서양 바둑인들과 가면 언제나 그의 신세를 졌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여 영어도 잘한다. 한국에 9단이 새로 생길 때면 파티를 해 주던 인물이다. 내가 그의 소식을 물어보면 아무도 모른다. 바둑인들이 자기 생활이 바빠서 그렇겠지만 안보이면 찾아가 보는게 도리다. 정운희씨와 유종수 사범은 경기고등학교 선후배로 해외유학파 엘리트 출신들이다.

▲ 네덜란드 지도(왼쪽사진) 유럽 속의 네덜란드(진초록 부분)


▲ 국기(왼쪽사진) 국장(오른쪽사진)

17세기에 중국에 갔던 무역상인 중 뉴호프(Nieuhof) 란 사람이 중국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았다. 그 중 바둑 두는 그림이 있다. 그는 그냥 “중국 보드게임’이라고만 썼다. 네덜란드가 유럽에 그림으로라도 바둑을 제일 먼저 알린 나라다. 반덴버그(Van den Berg)란 신학자도 이 무렵 일본에 다녀와서 바둑(Go)에 대해 그의 책에서 언급했다.

작지만 바둑강국이고 고난의 역사를 극복하고 세계를 주름 잡았던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는 여러면에서 우리나라와 공통점이 많다. 특히 친한파가 많은 나라다. 여기서 네덜란드 편을 마친다.

한상대(전 시드니대 교수 hahnsd@gmail.com)


몽블랑 정상은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
- 이탈리아 3편
2012-07-22 오후 5:25:18 입력 / 2012-07-24 오후 1:00:50 수정

▲ 포도밭. 이탈리아는 양질의 포도주 생산국가 중 하나다.

1. 이탈리아 바둑계와 인연

이탈리아 바둑계와 나는 인연이 없나 보다. 1983년부터 4번의 방문을 통해 바둑을 한판도 못 두어본 유일한 나라다. 매번 노력을 했는데도 그렇다. 2008년, 내 후배가 이탈리아 대사로 있을 때 로마에 가서 한국대사배를 만들어 놓았더니 이탈리아 바둑계가 분열되어 싸움판이라 그냥 돌아왔다. 이탈리아 바둑협회가 하나가 되고 내가 잘아는 레오나르도가 회장이 된 후 나는 신이나서 그와 '2012 한국대사배' 준비를 진행했는데 이번에는 한국측에서 대사배 지원을 끊어 버렸다.

나는 이탈리아 한국대사배에 맞추어 타이젬에 이탈리아 편을 쓰기 시작했는데 한국바둑팀 파견을 펑크낸데 대해 화가난 레오나르도가 연락을 끊고 자료도 안 보내 준다. 독촉편지를 세번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 다만 나와 양재호사무총장이 한국바둑팀을 보내려고 노력한데 대해 감사하다는 짧은 이멜만 받았다. 이탈리아 바둑에 대해서는 내가 수집한 정보를 쓰고 나머지는 나의 이탈리아 여행 얘기로 채우려 한다.

▲ 이탈리아 국기(Flag) 국장(Emblem)

우리 가족은 아침에 대사관으로 가서 김대사와 작별하고 대사관 차고에 있던 우리 차를 꺼내 왔다. 스리랑카 출신 대사관운전수 실바가 차로 피렌체 가는 고속도로 입구까지 안내해 주고 돌아간다. 우리는 로마를 떠나 스페인을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이틀 후 바르셀로나에 약속을 잡아 놓았기에, 마음이 조금은 급했다.

▲ 유럽에서 위치 이탈리아 지도

2. 피렌체

우리는 한 번도 안 쉬고 단숨에 피렌체(Firenze)로 달려갔다. 먼저 차를 베끼오 다리(Ponte di Vecchio) 옆 주차장에 넣었다. 내가 '단테의 신곡'을 강의 할 때 자주 인용하는 다리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5년간 교각 뒤에 숨어서 봤다는 이 돌다리는 그 전설 덕분에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 남아 지금도 천년 전 중세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리 위에는 예나 지금이나 금은 보석상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 베끼오 다리

우리는 베끼오 궁전 앞 광장에 나갔다. 궁전 앞 광장은 많은 조각품이 있는데 'The room with a view'란 영화에 이곳이 인상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날은 궁전 안에는 수리 중이라 별로 볼 게 없었다. 우리는 배가 출출해, 광장 앞 음식점에 들어 갔다. 음식은 형편 없었고, 음식에 나온 가지는 상하기까지 했다. 값은 선불인데 39유로(거의 6만원)나 된다. 로마에서는 피자를 2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세 식구가 그렇게 즐겼는데.

음식을 들고 나가서 항의를 했더니 자기넨 종업원이라 잘 모르겠다고 한다. 미안해 하는 태도가 하나도 없다. 이러니까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것이다. 호주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식당에서 저녁식사후, 내가 계산을 하자, 매니저가 "음식이 어땠냐?"고 묻는다. 내가 "스테이크를 다른 날 만큼 못 즐겼다"고 하자 매니저가 끝까지 돈을 안 받았다. 이탈리아와 비교된다. 하긴 관광지에서 음식을 먹은 내 탓이다.

▲ 베끼오 궁전. 멀리 데이빗 상이 보인다 우피치 미술관

▲ 피렌체 두오모 -

▲ 밖에서 보는 돔

우리는 걸어서 시내를 거쳐 두오모로 향했다. 바가지를 썼어도 피렌체는 아름다웠다. 피렌체 모든 집의 지붕이 빨간 것도 멋지게 보인다. 특히 이 곳 두오모의 돔은 남성적이고 크다. 모든 주위를 압도한다. 두오모 안으로 들어가서 벽화가 가득한 돔 내부를 보았다. 저 그림들을 그리느라고 화가가 천장에 매달려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우리는 두오모에서 나와서 단테의 생가로 갔다. 단테는 서기 1300년경 '신곡'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이 대 서사시는 이태리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을 뿐만 아니라 피렌체가 속한 토스카나 말이 이탈리아의 표준어가 되게 한다. 르네상스가 일어난 도시 피렌체, 그 시작은 단테부터다.

▲ 단테 집 앞

단테의 집 앞 좁은 골목 안에는 기도실 같은 게 있는데 단테와 베아트리체에 대한 기록이 벽에 붙어 있다. 바로 베아트리체 무덤이다.

우리는 걸어서 주차장으로 가는데 서양 도시치고 걷는 사람이 꽤 많다. 우린 차를 꺼내어 피사를 향해 달렸다. 오늘 밤은 제노바에서 잔다고 목표를 정했기 때문에 계속 달려야 한다. 그래야 이틀 만에 바르셀로나에 도착 할 수 있다.

▲ 피사의 두오모와 사탑

3. 피사(Pisa)

피사는 사탑(斜塔)으로 유명하다. 두오모 뒤의 탑이 8백 년 전에 기울어진 체 아직 그 모양으로 서 있다. 4백 년 전쯤 어느 날 피사탑 아래에는 당시 지식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이 곳 출신인 젊은 대학교수 갈릴레오가 신호를 하자 탑 꼭대기에 대기하고 있던 제자들이 물건을 동시에 떨어트린다. 같은 질량의 물건은 부피에 상관 없이 낙하속도가 같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천여 년 동안 믿어 온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전에 갈릴레오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천재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한번은 갈릴레오가 궁중 악사였던 자기 아버지 심부름으로 예술인 모임에 간 일이 있다. 각 부문의 예술인들이 모여 서로 힘을 합해 할 수 있는 예술활동이 무엇이 있는지 연구하는 자리였다. 젊은 과학도 갈릴레오가 예술인 전체가 할 수 있는 일을 제안했다. "문학은 성악가가 노래로 하고 기악은 오케스트라로 반주를 하고 미술은 무대장치에 쓰고 무용은 중간에 집어넣고 하면 모든 예술이 다 한꺼번에 활용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오페라(Opera)란 종합예술은 이렇게 탄생했다.

또 한번은 그의 제자가 "네덜란드에서 어느 안경집 아들이 장난으로 렌즈를 겹쳐 놓고 물건을 보니까 크게 보인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크게 깨달은 갈리레오는 곧 직접 렌즈를 갈아서 망원경을 발명한다. 그리고 그는 곧 목성과 토성의 위성들을 발견한다. 그는 계속 많은 별을 발견하며 천체를 연구하여 지동설 이론을 확고히 한다. 그러나 이 일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그는 말년을 감시 속에서 불우하게 보낸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저서는 금서가 되고 묘비를 세우는 것도 허용이 안 되었다. 그는 19세기에 와서야 명예회복이 된다.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사탑에서 불과 50미터 떨어진 약국 앞에 차를 세우고 약을 7유로어치쯤 샀다. 주인에게 곧 돌아 온다고 부탁하고 그 옆에 있는 탑으로 갔다. 너무 잘 지은 탑인데 기울어져서 더욱 유명해 졌다. 30년 전에는 내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복도가 기울어져서 걸을 때 한쪽으로 막 쏠린다. 놀이공원에 들어와서 게임하는 것 같았다. 오람이가 나에게 피사탑 배경으로 자기를 찍어달라고 한다.  나는"벌써 어두어져서 사진이 안 나온다"고 거절했다.

▲ 피사의 사탑

오람이가 "저도 여기 다녀갔다는 증명사진이 필요하잖아요? 제 카메라는 좋아서 나올 껄요" 하며 땅 바닥에 누워서 카메라를 조절하더니 혼자 자동셔터로 플래시도 안 터트리고 자기를 찍는다. "왜 플래시를 안 터트리니?" 하니까 "그러면 저만 잘나오고 뒤의 탑은 안 나와요" 한다. 찍은 사진을 보니까 멀쩡하게 쓸만하다. 요즘 좋은 카메라는 인간 눈보다 밝은 거 같다. 오람이가 대학원 다닐 때 'Canon Sydney'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직원에게만 주는 60% 할인으로 제일 좋은 걸 월급에서 제하고 샀다고 한다. "아버지 가지세요" 하길래 이놈이 빈말로 하는 걸 내가 알고 "그건 너무 커서 싫다. 또 네가 더 필요할 거구" 하면서 사양한 카메라다.

제노바(Geova)로 가는 길에 이 지역의 유명한 터널들이 계속된다. 김대사도 우리가 이 길로 지나 간다고 하니까 터널이야기부터 했다. 이 지 역은 계곡이라 터널 하나를 지나면 새로운 계곡과 아름다운 마을이 나오고 또 그 다음 터널로 들어가고 이를 수십 번 반복한다. 제노바는 콜럼버스의 고향이다. 당시는 제노바가 유럽의 최대 항구로 전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사람이 많을 때였다. 콜럼버스가 스페인에 가서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 시켜 지원을 받는다.

▲ 제노바로 가는 길

▲ 터널을 지나면 다른 마을이 나온다

그러나 현재의 제노바는 관광지에서 제외되어 있고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곳이다. 인구는 백만 명쯤 되고 중심가는 건물이나 상가가 어느 대도시에 못지 않다. 부산 남포동처럼 좁고 높은 골목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전에도 와서 보고 기대 보다 대단한 도시라고 느꼈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고대 로마지배부터 주변국가에게 지배도 받아봤고 자기네도 주변을 정복한 일도 많다. 흥망성쇠를 거듭한 곳이다.

우리는 언덕 위에 어느 모텔에 숙소를 정했다. 종업원은 퇴근했는지 혹은 없는지 꼬부라진 영감 혼자서 일을 한다. 분위기로 봐서 주인인 것 같다. 아침식사도 가게에서 사온 토스트 두쪽에 카푸치노 한잔이다. 그러고 보면 아침식사는 영국이 최고다. 내가 30년전 서봉수사범과 유럽을 돈 후 차를 페리에 싣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런던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늦어 도버 근처에 'B&B(bed & Breakfast)'라고 쓴 곳을 찾아가 묵었다.

모텔 주인이 나에게 "어떻게 유럽 아침으로 두 달을 견뎠느냐?"고 한다. 내가 "영국 아침은 어떤데 그러느냐?"고 하니까 웃으며 "내일 아침에 보라"고 한다. 아침은 부페식이었다. 모텔 주인이 먹는 순서를 가르쳐 준다. 오렌지 쥬스(Orange juice), 죽(Porridge), 콘 플레크스(Corn Flakes), 토스트(Toast), 베이컨(Bacon), 소세지(Sausege), 스크램블드 계란(Scrambled Eggs), 과일(Fruits), 마지막으로 커피(Coffee)를 마신다. 아침부터 배가 불러 버렸다. 이런 식사는 영국여행 내내 계속된다.

유럽인에게 지옥은 '영국 요리사에 독일 경찰에 프랑스 관리인에 이태리 기술자에 스위스 애인'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스위스 여자는 애교가 없고 영국음식은 먹을 게 없다는 것이 정평이다. 천당은 '영국 경찰에 프랑스 요리사에 독일 기술자에 스위스 관리인에 이태리 애인'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책은 영국요리책"이다. 영국요리가 형편 없는 걸 놀리느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국은 아침 못 먹고 죽은 조상이 있는지 아침식사 하나는 끝내준다. '달과 6펜스' 작가 영국문호 서머세트 모옴은 "누가 영국요리를 형편 없다고 했는가? 영국 아침식사로 세끼를 먹어 보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우리는 차로 제노바를 돌면서 항구를 거쳐 모나코 쪽으로 향했다. 제노바 항구에는 대규모의 화물선, 여객선이 보인다. 오람이가 운전은 혼자 다 하니까 우리 부부가 번갈아 운전하던 과거 여행보다 편하다.

▲ 중세 제노바 성문 콜럼버스 동상

<이탈리아 바둑>

이탈리아에는 30여개의 바둑클럽이 있다. 로마와 밀라노가 클럽 수나 바둑인구로 제일 크다. 남쪽에는 나폴리, 바리, 팔레르모 등이 활발하다. 큰 도시는 클럽이 몇 군데씩 있고 마피아 고장이라는 시칠리아 섬까지 바둑클럽이 있다. 바둑토너먼트도 클럽이 주관하는 것까지 합하면 1년에 20개쯤 된다. 게다가 유럽바둑대회가 1년에 10군데쯤 열리기 때문에 바둑을 두려면 기회는 많다. 이탈리아 바둑인구는 2천명 정도로 추산되고 배부분이 북쪽 대도시에 몰려 있다.

이탈리아 바둑클럽은 같은 도시에 있는 클럽끼리 대항전도 하고 같은 지역의 도시들이 연합팀으로 다른 지방과 교류전도 한다. 유명한 곳은 투스카니(Tuscany) 지방의 피렌체(Firenze), 피사(Pisa), 그로세토(Grosseto), 레그호른(Leghorn) 등 연합팀과 베네토(Veneto) 지방의 베네치아(Venecia), 파두아(Padua), 트레비소(Treviso), 비첸사(Vicenza), 베로나(Verona), 벨루노(Belluno) 연합팀이 있다. 피에몬테(Piemonte)지역에도 투린(Turin), 볼로냐(Bologna), 라벤나(Ravenna), 페루기아(Perugia), 모데나레지오 에밀리아Modena-Reggio Emilia), 우디네-트리에스테(Udine Trieste)연합팀도 있다. 타지방의 작은 클럽회원들은 이런 대회에 참여한다.

토너먼트는 매년 12~15개가 열리고 주관은 이탈리아 바둑협회(FIGG)가 그 지방 클럽과 협조하여 개최한다. 이탈리아 챔피언전은 보통 8월에 열리는데 참가자는 60~70명이다. 바둑협회(FIGG)는 이탈리아 챔피언전을 주관한다. 각 클럽별로 열리는 대회들은 평균 30명 많으면 50명 정도가 참가한다. 가장 중요한 '이탈리아 챔피언전'은 매년 다른 도시를 돌며 개최된다. 각 지방끼리 대항전은 자기네끼리 알아서 조직한다. 시간제한은 큰 대회는 1시간 작은 대회는 30분이다.

▲ 이탈리아 챔피언전 2011년 10월 8일 밀라노

<바둑 강자들>

이탈리아에는 약 10명정도가 유단자다. 연령은 18세에서 30세까지다. 아홉 번이나 이탈리아 챔피언을 지낸 밀라노의 마리고(Francesco Marigo) 아마 4단은 1998년에 바둑을 배웠다. 한 때 성적이 좋아 아마 5단까지 오르기도.

피사출신 메타(Carlo Metta)는 피사대학 수학과 학생이다. 그는 2007년에 바둑을 배워 다음 해에 2급, 2년 후 아마 3단이 되었다. '떠오르는 해' 메타는 지난 3년간 이탈리아 챔피언전 결정국을 마리고와 두었다.

미니에리(Davide Minieri)는 2002년에 바둑을 배워 2008년에 아마 3단이 되었다. 그도 피사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살고 있다.

로마 출신 파체(Alessandro Pace)는 19세로 거의 아마 3단인 최강 아마 2단이다. 2008년에 바둑을 배워 18개월 후에 아마 1단이 되었다. 작년에 이탈리아 대표로 한국국무총리배에 참가하고 2011년 이탈리아 챔피언전에서 3위에 올랐다.

자카세프스키(Andriy Zakharzhevskyy)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2단이다. 우크라이나에서 1999년 바둑을 시작하고 2004년부터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 로마에 살고 있는데 2012년부터 공식 이탈리아 선수로 등록된다. 그는 2011년 이탈리아 대회에서 5위를 했다.

<바둑보급>

거의 모든 클럽이 초보자 지도를 하고 있다. 대회나 게임전시회 같은 행사도 한다. 이탈리아 바둑협회(FIGG)는 2012년부터 학교에서 바둑지도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바둑캠프는 1년에 8월 주말에 한번, 알프스 산맥 스키휴양지에서 1주일간 한번이 있다. 바둑강사는 한국, 중국, 일본, 유럽에서 오는 데 2010년에는 황인성사범, 2012년에는 여자프로 고주연사범이 왔다. 이탈리아 바둑협회(FIGG)는 '석기시대(Stone Age)'라는 바둑잡지를 발간하고 있다. 잡지말고 웹사이트(website http://www.figg.org)도 있다. 이 외에도 'Easy to Go' 'Il ritorno delle gru'와 20011년에 시작한 'Shudan'등이 있다. 주요 바둑서적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제자와 여행>

2004년 우리 부부가 독일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를 자동차로 여행하기로 했다. 바둑학과 학생 4명과 대학원 제자 김성학 사장이 사흘 후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여 우리와 같이 여행할 계획이었다. 바둑학과 4명은 다 사정이 생겼다고 못 오고 나타난 사람은 김사장 한 명 뿐이었다. 김사장은 50세로 광화문에 있는 여행사 사장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나처럼 장난 좋아하는 스승을 만나 놀림의 대상이 되었고 물심양면으로 고생을 좀했다. 김사장이 여행을 끝나며 중얼거린다. "다음 여행에 나보다 끝 수 낮은 놈이 오기만 해 봐라" 고생해 본 며느리가 더 독한 시어미가 되는법.

김사장이 도착하는 날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집사람이 나에게 "김사장이 Fax를 보내왔는데 프랑크푸르트가 아니고 내일 파리로 도착 한데요" "뭐? 우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이틀 씩이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파리로 온다고?" 나는 황당했으나 김사장에게 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고 새벽부터 서둘러 파리로 향했다. 거리가 천 km는 족히 될 것 같다. 서울-부산 왕복 거리보다 더 멀다.

아침부터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내가 어느 구멍가게에 뛰어 들어가서 파리로 가는 루트를 물어 봤다. 가게 주인 아줌마와 마침 물건을 사러 온 노인 남자까지 합세하여 열심히 가르쳐 준다. 우리는 지도를 보며 룩셈부르크를 가로 질러 가는 코스가 최단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프랑크푸르트 아침 출근시간과 교통사고에 막혀 고속도로 입구 근처에서 우리가 두 시간이나 갇히고 말았다.

▲ 프랑크푸르트 야경

그 때 마침 자동차 앞 자리에 김사장이 보내 왔다는 팩스가 눈에 띄길래 내가 집어서 읽었다. 도착시간, 항공편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 내가 읽은 Fax는 도착지가 프랑크푸르트다. "이거 도착지가 파리가 아니고 여기 프랑크푸르트인데!" 하니까 이 마누라 왈 "'FRA'가 프랑스의 준말이 아닌가요?"한다. 내가 "누가 도착지를 국명을 쓴데? Frankfurt 의 준 말이지". 하니까 이 사람 그 때서야 깜짝 놀란다. "저는 'Fra'를 프랑스의 준말이라고 읽었는데 정말 큰 일날 뻔했네요"

두 가지 일이 운좋은 집사람을 살려줬다. 하나는 출근 길 교통체증이었고, 또 하나는 내가 팩스를 우연히 읽은 것이다. 만약 우리는 파리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김사장은 프랑크푸르트로 왔다면 여행은 다 잡쳤을 것이다. 저녁 6시에 공항에서 김사장이 무엇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나온다. 독일에서 만나니까 되게 반갑다. 바둑학과 학생들이 오면 미니버스를 빌리려고 했는데 지금은 3명이니까 프랑스제 푸저(Peudgot) 한대를 빌렸다. 파리에서 반환(Drop Off)이 가능한 차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드디어 대장정에 돌입했다.

비엔나에서 베네치아까지 6백 KM가 넘는다. 거기에다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한다. 집사람과 김사장이 운전을 번갈아 하며 달렸다. 차 안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넘친다. 휴게소도 3군데쯤 들러 쉬면서 갔다. 그런데 사고가 하나 생겼다. 오스트리아쪽 휴게소 어디에선가 내가 윗도리를 벗어 의자 뒤에 걸쳐 놓은 채 그냥 온 것이다. 약간의 돈과 중요한 서류가 몇 장 있는데. 차는 알프스를 넘어 거의 베네치아에 와 있고….

내가 한참 노력한 후 그 휴게소 이름을 기억해 냈다. 나에겐 우리가 들린 장소는 물론 모든 식당, 휴게소 이름까지 외우고 다니는 영양가 없는 습관이 있다. 이것이 나를 살렸다. 김사장이 영수증 속에서 그 휴게소 전화번호까지 찾아 냈다. 전화를 했더니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독일어를 할 줄 아는 벨기에에 사는 집사람 친구 김수영씨에게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 윗도리를 포기했다. 그게 맞는 휴게소 인지도 확실치 않고 또 거기에 사람들도 그렇게 많았는데…. 그러나 결과부터 먼저 말하겠다. 그 옷은 명지대 내 연구실에 소포로 왔고 돈도 서류도 그대로 들어 있었다. 지금 그 옷을 입고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다.

▲ 옷을 두고 나온 휴게소(김사장과 필자)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윗 옷을 두고 온 집사람은 국제전화를 4 번쯤 하고도 옷을 못 찾았다. 내가 5년 전 미국에서 470불 주고 산 이탈리아제 옷이다. 집 사람이 제일 좋아하던 건데…. 내가 농담으로 "옷이 자기 고향 찾아 간 건데 뭘" 하면 이 사람은 웃지도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8년간 성악을 공부한 음대 하교수가 전화통역을 해주었다. 하교수가 "이탈리아는 직접 찾아가 싸워서 찾지 않으면 옷을 포기 해야 합니다" 하는 소리를 들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무슨 놈의 나라가…

베네치아(Venetia)

터널을 약 20개쯤 지나며 알프스 산맥을 통과한 후에야 우리는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새로운 밀레니엄(Millennium) 기획으로 워싱턴 포스트지가 선정 한 '지난 천년 동안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16 세기의 베니스'가 뽑혔다. 문호 괴테도 이 도시를 그렇게 사랑했다고 한다.

인구 30만명. 베네치아의 영어 이름은 베니스(Venice). 118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물의 도시'다. 섬들은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水路)로 곤돌라(Gondola)를 타고 왕래 한다. 이런 여건이 베네치아의 독특한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 '물의 도시'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567년 게르만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족이 베네치아 만(灣)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현재 베네치아는 로마, 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지이다. 육지와는 철교, 다리로 연결 되어 있다. 이 다리 위를 차로 달리는데 1열로 높이 늘어서 있는 가로등의 독특한 디자인이 내 눈길을 끈다. 우리는 차를 주차시키고 배(Ferry)를 타고 베네치아의 중심부 산 마르코 광장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다 말고 훼리(Ferry Boat)가 엉뚱한 곳에 서더니 승객에게 다 내리라고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곤돌라 경기대회다. 산 마르코 광장은 거기서부터 걸어 가라고 한다. 강변 양 쪽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응원을 하고 있다. 대부분이 강변에 걸터 앉아 있다. 인산인해다. 서양에서는 드문 사람 구경이다. 더운 날 사람 속을 헤집고 간다는 것이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우리는 틈틈이 곤돌라 경기를 구경하면서도 산 마르코 광장만 향해서 걸었다. 너무 더워 중간에 아이스 바와 찬 음료를 사 먹었다.

▲ 베니스의 수로

3~40 분쯤 걸으면서 김사장은 아수라장인 분위기를 보고 나에게 "독일보다 훨씬 후진데요"한다. 이상한 골목 길들을 지나 우리는 드디어 산 마르코 광장에 도달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환상적으로 변한다. 비둘기 떼 속에 양 옆에 늘어선 비잔틴 풍의 건물 사이에 넓은 광장이 나타난다. 광장 내 여러 노상카페 마다 밴드가 라이브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오렌지쥬스 한 잔에 10 유로나 하는 바가지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청한 곡의 멜로디를 들으며 방문자들은 자리 값을 기꺼이 낸다. 이 광장에 앉아 있노라면 세상 일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오늘의 산 마르코 광장은 사람도 비둘기도 더 많아진 것 같다.

▲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

▲ 산 마르코 광장

우리는 광장 한복판 길바닥에 앉았다. 사방에서 비둘기 떼가 날고 감미로운 이탈리아 음악이 선율을 타고 날라온다. 광장을 에워싼 비잔틴 풍의 건축물들은 흰-회색으로 일정하게 늘어서 있는데 바다에서 불어 오는 미풍, 냄새와 함께 너무 환상적이다. 집사람은 분위기에 취해서 눈을 감고 나에게 나른하게 기대어 온다.

▲ 분위기에 취한 집사람, 궁전입구(Porta della carta 1438)

30년 전에 유럽을 돌아 본 우리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베네치아를 꼽았다. 이번에 다시 와보니 역시 우리의 눈은 정확했다. 이 물의 도시는 S자형의 대운하(Grand Cannel)가 시가지 중앙을 관통하고, 운하 출구 쪽에 '산 마르코 광장(廣場)'이 자리 하고 있다. 이 광장은 산 마르코 대성당을 비롯한 교회, 궁전과 더불어 13세기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의 몇몇 건축물에서는 동방의 영향을 반영하는 비잔틴 풍(風)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산마르코 광장을 떠나, 뒷골목에 자리한 인터넷 카페에서 우리는 1시간을 보냈다. 집사람은 명지대 대학원과 연락하기 바쁘고 김사장은 엘레나 일로 바쁘다. 김사장이 "두분이 같이 다니시니까 부러워 죽겠어요. 저도 5년전 여기와서 만난 엘레나를 불러 낼래요" 한다. 내가 "정말 불러낼 능력은 있느냐?"고 놀리니까, 증명하려고 컴퓨터만 보면 계속 이메일을 보낸다. 흥분할 일이 없는 나만 30분만에 인터넷을 끝내고 무료하게 앉아 있었다. "1시간에 1만원이 넘는 이 곳에 왜 내가 쓸데없이 돈을 허비해?"

인터넷 카페 근처의 뒷 골목들은 아기자기한 작은 상점들과 식당으로 꽉 찼다. 특히 유리제품 가게 앞에만 가면 김사장이 상점 안을 기웃거린다. "무언지 마음이 끌리는 데가 있나?" 불빛을 받은 유리제품들이 동화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인 것 같다. 유리 세공업(細工業)으로 유명한 무라노섬에선 유리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화려한 유리제품에 군침흘리는 집사람을 "여기는 바가지야" 하며 내가 데리고 나왔다. 집사람이 요즘도 "베네치아만큼 좋은 디자인의 유리제품이 다른 곳엔 없어요. 값도 알아보니까 거기가 더 쌌고요"하며 나를 원망한다. 무라노 섬과 카지노로 유명한 리도까지 베네치아시에 포함된다.

중세 베네치아는 무역으로 번영하여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 중에서 가장 부강한 곳으로 성장하였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에 점령되기까지 반세기 이상은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 우리는 유명한 베네치아 대운하를 배로 돌았다. 물의 도시의 아름다움에 드디어 김사장도 감명을 받는다. 배에서 몇줄 뒤에 있는 나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교수님, 너무 아름다워요"한다. 물가 건물 앞에는 작대기가 물 속으로 많이 꽂혀있다. 건물이 가라 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과학적 머리가 둔한 나는 이해가 안 가지만 그 작대기가 건물이 가라 앉는 것을 방지 할 수 있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 집집마다 막대기가 꽂혀 있다

베네치아를 떠나기 위해 우리 차를 세워 놓은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장 화장실에 들어간 김사장이 사진을 찍고 난리다. 화장실 좌변기가 이상하다고 한다. 변기가 밑에 기본 골격만 있고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다. 김사장은 구두를 신고 올라 앉아 일을 본 모양인데 그러다 행여 미끄러지면? (그래야 놀릴 일이 생겨 신나는 건데^^) 김사장은 여행 내내 이 일로 의구심을 떨치질 못하고 그 얘기를 자주 하길래 내가 관심을 더 고상한 곳에 두라고 구박했다. "그런데 정말 왜 없을까."

▲ 베네치아의 밤

우리는 다음 목적지 베로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고속도로(Autostrada)에서 운전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 미친 X들이다.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다. 160km 이상 달리고 있는 차 앞으로 1m도 안되게 45도 각도로 끊고 들어온다. 깜박이도 안 킨다. 한 두번이 아니고 여러번을 당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집사람이 겁을 먹었다. "제가 서울에서 다른 운전자들을 욕했었는데 그 사람들은 양반이었네요."

▲ 베로나(Verona)

이탈리아 북부 교통, 상업의 중심지이다. 로마 시대의 건조물로는 원형극장과 아디제강(江)의 다리가 있다. 12~13세기에는 롬바르디아의 지배하에 번영하였다. 베로나는《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로 유명하다. 지금은 곡물, 기계, 제지, 인쇄의 중심지이다. 인구 약 26만 5천명.

▲ 베로나 거리 줄리엣 집 발코니

▲ 베로나

베로나는 야외 오페라 극장(Arena)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호텔을 아레나 근처에 잡았다. 지금이 시즌이라 전 유럽에서 오페라 팬들이 와 있다. 호텔에 Check-In을 한 후 거리로 나온 우리는 길바닥이 다 대리석인 것을 보고 놀랐다. "아니 이 비싼 대리석을 전 도시 바닥에 깔다니!" 하여튼 길을 밟는 질감은 아주 좋다. 이 지방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리석 산지이긴 하지만 설마 이럴줄이야!

우리는 혹시 지금이라도 오페라를 볼 수 있을까 하여 아레나 쪽으로 갔다. 유명한 베로나의 원형극장이 눈 앞에 나타난다. 내가 수십번을 TV 중계로만 보던 곳이다. 볼 때 마다 녹화한 테이프를 지금도 여러 개 갖고 있다. 아레나는 TV로 볼 때 보다 더 아늑했다. 약 2천년 전 로마 시절에 지은 돌벽에 조명을 받고 있는 원형극장은 멋과 무게를 함께 지녔다.

아레나 앞에는 대리석이 아닌 작은 돌들을 박아 놓은 넓은 광장이 나온다. 광장에는 여러 개의 노상 레스트랑과 카페가 있고 선남선녀들이 앉아 있다. 광장의 불빛, 멋쟁이 유럽인들, 전체 분위기에 낭만과 여유가 넘친다. 아레나에 갔더니 오페라가 끝날 무렵이라고 한다. 입구가 50여 개인데 전부 안내원들이 지키고 있다. 나는 노천극장이라 어딘지 공짜로 그냥 들어 가는 길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이 어리석었다.

▲ 노천 극장 외부/내부

오페라가 끝 날 무렵이니까 그냥 들여 보내 달라고 부탁해 봤더니 절대 안 된단다. 돈을 내겠다고 했더니 매표소도 문을 닫아서 안 된다고 한다. 이 때 집사람이 일찍 나오는 어느 이탈리아 부부에게 가서 "우리 남편이 성악을 했는데 오페라를 조금이라도 보고 싶으니까 사용한 표를 줄 수 있겠냐" 고 부탁해서 표 두장을 얻어 들고 온다. 그 표로는 58번 입구로만 입장이 가능하다고 하여 부지런히 뛰어 갔다. 집사람이 눈치 것 "저는 광장에서 구경도 하고 쉬고 싶어요" 하며 김사장에게 표를 양보한다. 이 사람은 이럴 때 자기가 보겠다고 나서는 염치는 거의 없는 인간이다. 속으로는 몹시 보고 싶었을텐데.

아레나 안 쪽으로 들어가니까 주연 남녀가 아이다(Aida – Verdi 작곡) 마지막 '죽음의 2중창' 장면을 노래하고 있다. 이집트 사령관 라다메스가 아이다 때문에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지하감옥에 들어 갔는데 인기척이 있어 보니까 사랑하는 아이다가 같이 죽으러 숨어 들어와 있다. 두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서로 위로하며 사랑을 노래한다. 노천극장은 음향이 아주 좋았다. 성악가 두 명이 피아니시모로 노래할 때도 뒤까지 깨끗하게 잘 들린다. 우리 자리는 3층 근처다. 2만 여명의 청중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경청하고 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나고 무대에서는 화려한 아리아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더 듣고 싶은데 불과 10분만에 끝났다. "부라보" 환호 속에서 출연자들의 무대인사가 계속되는 동안에 우리는 아레나를 나왔다.

"그 많은 사람이 그렇게 조용하게 노래를 듣는 것이 감명이네요." "분위기가 엄숙하고 여기에 온 보람이 있는데요." 오페라를 잘 모르는 김 사장이 한 말들이다. 밖에 기다리고 있던 집 사람이 우리를 만나더니 "오페라를 보고 나오는 저 많은 사람들이 한결 같이 멋쟁이에요" "옷을 너무 잘 입었어요" 하며 감탄한다. 우리는 광장 끝편에 있는 맥도날드로 가서 저녁을 때우고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에서 투숙객에게 여권을 맡길 것을 요구했다. 유럽에서는 자주 있는 일.

다음날 아침 우리는 내부를 못 본 집사람을 구경시켜줄 겸 다시 아레나로 갔다. 입장료가 1인당 3유로다. 텅 빈 아레나 중앙에 스핑크스로 장식된 큰 무대가 압도한다. 옛날에는 검투사가 있었을 만한 방들이 이제는 화장실, 출연자 대기실, 사무실 등으로 쓰이고 있다. 두꺼운 돌벽을 보노라면 "이탈리아는 유적을 팔아먹고 산다"는 말이 실감난다. 로마의 콜로세움에 갔을 때는 벽이 여러군데 허물어진 유적지였으나, 이곳 아레나는 현재 오페라 극장으로 사용하고 있고 보존 또한 완벽하다.

▲ 아레나

2천 년이 넘는 그 옛날에 수 만명의 사람들을 한 군데 모아 놓고 보통 목 소리로 말해도 다 들리게 만든 로마인의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주위가 산만하지 않게 집중시켜 놓으면 지배자나 국가에 대한 의식, 심리, 자세까지 우리와는 다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레나를 나와 시내를 한바퀴 돈후 우리는 다음 목적지 밀라노를 향해 고속도로로 나갔다. 내가 지난 2주 동안 다닌 영국, 아일랜드, 네델란드, 독일 모두 고속도로비를 안 받았는데, 이곳 이탈리아에서는 받는다. 그래도 30 년 전 이탈리아에 왔을 때는 노면이 나쁜데다 돈까지 받길래 불평을 했는데 지금의 도로상태는 많이 좋아진 것 같다.

밀라노(Milano)

롬바르디아(Lombardia)주의 수도다. 11세기경 롬바르디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163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6번이나 시가지가 파괴되었으나, 밀라노는 롬바르디아 동맹에 가담하여, 레냐노 싸움에서 황제의 군대를 무찔렀다. 1880년대에는 알프스 산록의 수력발전을 기초로 하여, 금속, 화학, 기계 등 중화학공업이 발달하여 이탈리아 최대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공업지대는 시의 북부, 그리고 다시 서부·동부로 발전해 이탈리아 최대의 도시권(인구 440만)을 형성하고 있다.

▲ 두오모 광장

이탈리아의 북쪽은 잘 살고 남쪽은 가난하다. 북쪽은 키가 크고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사람이 많다. 남쪽에는 키가 땅딸하고 눈과 눈썹이 시커멓게 짙은 사람이 많다. 북에는 게르만, 켈트, 롬바르디아의 피가 많이 섞였고 남에는 그리스 라틴계 인종이 대부분이다. 그런 이탈리아의 북쪽을 대표하는 도시가 밀라노다. 밀라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시가지의 많은 부분이 폭격의 피해를 입었다. 지금은 중앙역(驛) 중심지대는 고층건물이 줄을 이은 오피스가(街)로 변모되고, 지하철도 정비되어, 로마와는 다른 근대적 상공업도시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 두오모 앞 아케이드

밀라노의 많은 역사적인 건조물 가운데 4세기 말에 창설된 성(聖) 암브로시우스 성당, 백 대리석 고딕양식의 대성당, 브라만테의 손이 가해진 성(聖) 마리아 성당과 그 성당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벽화 <최후의 만찬> 등이 유명하다. 문화의 중심지로 오페라 극장인 라스칼라 극장, 4개의 대학, 많은 미술관이 있다. 밀라노에 도착한 우리는 차를 중심가에서 떨어진 로마 시대의 아치가 있는 곳에 세워 두고 중심가 두오모(Duomo)에 15분쯤 지하철로 갔다. 어디나 중심가는 주차비가 비싸서 오래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차 방법을 가르쳐준 그 곳 대학생에게 김사장이 가져온 한국 민속 그림이 있는 볼펜 하나를 주었다.

무슨 주차 딱지가 오후 5시까지 5개씩이나 있다. 내가 밀라노에 오면서 제일 보고 싶었던 곳이 라스칼라 오페라극장이다.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런던의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과 밀라노의 라스칼라(La Scala)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밀라노를 재건할 적에 오페라하우스를 제일 먼저 복구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만큼 오페라를 사랑한다. 두오모 광장 뒷편에 있는 라스칼라에 갔더니 보수 중이라 실망했다. 광장 정면 앞쪽에 자리 잡고있는 밀라노 대성당도 보수 중이었다.

▲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내부

오페라 극장 앞 광장에서 어느 노인 한 명이 소리를 마구 지르며 떠드는데 목소리가 꽤 좋다. 내가 경찰관에게 "저 노인이 왜 떠드느냐?" 고 묻자 "He’s crazy!" 라고 대답한다. 언어 때문에 자동 발성이 돼 있나? 이탈리아 어는 모음으로 끝나는 말이 95%인데 우리 한국말은 97%쯤 된다. 이론 상으로는 우리가 더 좋은 성악가를 배출 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영어는 협상용이라 상인들에게 좋은 언어이고, 이탈리아어는 시끄러워서 싸울 때 좋고, 독일어는 인간이 쓰기에는 조금 그렇고 개하고나 말할 때 알맞고, 프랑스어가 인간이 사용할 언어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어느 이탈리아 사람이 나에게 불어는 호모들이 사용하는 말이고, 독일어는 전쟁용이고 이탈리아어가 인간이 사용할 언어라고 하며 웃는다.

유럽에서는 안 좋은 물건에는 다른 나라 이름을 붙여 사용한다. 예를 들어 콘돔(condom)을 영국에서는 'French Letter' 프랑스에서는 'English Hat' 홀란드에서는 'German Boot' 등으로 부른다. 우리는 점심 때가 되어서 한국식당에 택시로 갔다. 유럽 교민신문에는 유럽전역 내에 한국식당, 민박집, 사업체 정보를 많이 싣고 있다. 우리는 지도를 보고 가까우면 택시로 다니는데 지금 탄 택시가 10분 후에 '진림' 식당에 도착했다.

우리 옆 자리에는 예쁘게 생긴 일본 여대생 4명이 식사를 하고 있다. 우리가 말을 거니까 곧 한국말로 "저희는 일본교포 3세입니다"한다. 조련계 학교를 다녀서 한국말을 잘 한다. 일본 교포들이 민단계면 한국말을 못하고 조련계면 잘한다. 한국정부가 교포들의 민족성 보존정책을 소홀히 한 결과다. 교포 3세들에게 내가 며칠 후 명지대생들 인솔교수로 일본에 간다고 했더니 자기네에게 연락주면 만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 있는 동안 너무 바빠서 연락을 못했다. 10월 초에 세미나에 참가하러 일본에 다시 가니까 그 때 기회를 봐야지.

유럽으로 떠나기 직전, 명지대 산업디자인학과 과장인 민경우교수가 자기가 졸업한 밀라노 디자인 학교와 명지대 디자인 학과와 자매결연을 학교차원에서 해달라고 부탁했다. 민교수가 관련서류를 나에게 주었는데 유럽대학들과 연락하는 서류 속에 휩쓸렸는지 안 보인다. 유럽에 떠나기 전에 그것을 처리 못하고 와, 마음 한 구석이 계속 찝찝했다. 나는 그래서 그 학교를 직접 방문하여 그 일을 처리하려고 마음 먹었다. 식당 주인에게 부탁하여 밀라노 디자인 학교 주소와 지도를 얻었다. 이 식당 고 1짜리 아들이 이탈리아어와 한국어를 다 잘 한다. 그 학생이 디자인 학교에 전화를 해서 담당자를 바꿔 주었다.

▲ 밀라노 패션쇼

전화를 해놓고 택시로 디자인 학교에 왔다. 집사람은 밖에서 돌아 다니고 김사장만 따라 들어 왔다. 한국 남자와 3개월 전에 결혼했다는 뚱뚱한 파올라(Paola)와 국제부에 원래 일하고 있던 미인 야나(Yana)가 우리를 맞아 준다. 담당교수가 해외출장 중이라 이 두 명과 대충 얘기를 한 후 Campus Tour를 했다. 야나가 학교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 한다. 아까 대화할 때는 형편 없었는데……. 필요한 영어만 외우고 여러번 해 본 티가 난다. 세계 제일의 디자인 학교라고 하는데 캠퍼스는 별로 였고 학생들 작품 중에는 상상력(Imagination)이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몇 개 눈에 띈다. 파올라가 다음달 한국에 와서 나를 만나겠다고 한다. 김사장이 "이왕이면 예쁜 야나가 왔으면 좋겠어요"한다(속 없기는?)

우리는 차를 주차한 곳이 학교에서 멀지 않은 걸 알고 택시로 돌아왔다. 우리는 서둘러 몽불랑으로 향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다. 유럽은 위도가 높아 해가 밤 10시까지도 훤하다. 해가 있을 때 여행해야 제대로 본다. 몽블랑이 가까워 오면서 양 옆 산맥이 장관을 연출하며 계속된다. 산 속 마을들은 아름다우나 관리를 잘 못해 궁색한 것이 보인다. 유럽 여행 중 체코 국경지방과 함께 가장 못 사는 곳이었다.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사르데냐 왕국의 중심지가 이 근처였는데 그렇다. 우리는 아오스타(Aosta)라는 산 속마을에서 자기로 했다.

▲ 산 속 마을 아오스타

이 곳 호텔 방이 담배 냄새가 지독해서 잘 수가 없다. 내가 프론트에 있는 주인 영감에게 그 얘길하고 방을 바꿔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 영감이 영어를 못해서 그런지 아주 비협조적이다. 참다 못한 내가 소리를 막 질렀다. 겁먹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영감이 그제야 갑자기 무슨 말인지 깨달은 것처럼 다른 방 열쇠를 준다. 소리 지르길 잘했나? 9호에서 12호로 옮기니까 냄새가 안 난다. 아오스타엔 아우구스투스때 아치, 수력발전소, 맥주공장 등이 있다고 호텔 안내문에 씌여있다.

몬테 비안코(Monte Bianco)

몬테 비안코(Monte Bianco)는 불어로 몽블랑(Mon Blanc)이다. '흰산'이란 뜻이다. 알프스 산맥 중 최고봉으로 높이가 4,810m이다. 이탈리아쪽 기지는 안트라베(Antrabe). 해발 1,306미터다. 안트라베는 서양 스키휴양지가 가진 분위기를 다 소유하고 있는 곳이다. 건물들 윗 부분은 경사가 가파른 지붕, 나무 벽, 밑 부분은 돌로 되어 있다. 그 내부에는 카페, 기념품 가게, 식당, 바 등이 있다. 산 속의 특유한 냄새, 사람들의 들뜬 분위기, 냉랭한 공기는 나까지 설래게 만든다.

▲ 몬테 비안코(몽블랑) 정상(4,810m)

우리는 20 분쯤 줄에 서 있다가 표를 샀다. 산 정상에는 케이블카로 올라간다. 처음엔 32 인승인 케이블카가 중간에 8 인용으로 갈아 탄다. 8 명씩 자르는데 우리 부부 다음 김사장이 탈 차례에 자른다. 김사장은 우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다음 차를 기다리게 되었다. 잠깐 떨어지는데도 걱정 된다. “하필이면 거기서 잘려?”

산정에 올라오니 바닥이 나무로 마루처럼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있다. 나무는 언제나 인간들에게 따뜻한 친화감을 준다. 5 백 명 이상은 수용할 정도로 크다. 사방이 눈으로 덮인 산 정상들로 둘러 쌓여 있다. 장관이다. 그러나 스위스 저 쪽 편에 있는 유명한 융프라우 보다는 전망이 덜 압도 한다. 집사람이 나에게 오더니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요”. 한다. 이 사람은 해발 3 천 미터 이상만 오면 꼭 이런다. “무슨 놈의 몸둥아리가 그 모양이야?” 내가 구박했다.

▲ 고도를 못 이기는 집사람

조금 있다가 김사장이 나타났다. 첫 마디가 “어지럽고 머리가 아픈데요”. 한다. 쯧쯧…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곳에서 다시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프랑스 쪽으로 가면 몽블랑의 정상(4,807m)이 나온다. 그 쪽이 융프라우에 맞먹는 경관이 있다고 들었다. 케이블카 타는 곳에 가서 보니 줄이 너무 길어 1 시간 30분 이상 기다리란다. 나는 미련 없이 그 쪽 코스를 포기했다. 시간과 싸우는 이런 형태의 여행에서는 결단력이 빨라야 한다. 우리는 안트라베(엉트레브)로 내려와서 스위스의 제네바를 향해 떠났다. 유명한 몽블랑 터널을 25유로나 지불하고 나야 통과할 수 있다.

이 터널의 길이는 11.6 km. 1958년 착공되어 65년 7월에 개통되었다. 이 터널의 개통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자동차 거리가 약 200 km가 단축되었다. ‘유럽의 새 동맥’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집 사람이 나에게 “무슨 굴이 아무리 달려도 끝이 없어요?” 한다. 1999년 이 터널에서 불이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일이 있다. 지금은 굴 안에 소화기가 자주 설치되어 있다. 차를 천천히 달려서 그런지 체감으로 30 분은 달린 것 같다. 터널을 지나니까 스위스 국경이 나온다.

이탈리아는 면적이 301,338 평방 미터로 한반도보다 약 반배쯤 크다. 2011년 인구조사에는 6천 백만명으로 나왔다. 국민 일인당 평균소득은 GDP로 36,267불이고 PPP로는 30,464불이다. ‘G 8’과 ‘G 20’에 속하고 있으며 경제규모 세계 8위다. IMF 수치에 의하면 2010년도 GDP는 한국 1조 70억불, 이탈리아 2조 551억불이며, GDP 순위는 한국 15위, 이탈리아는 8위다. 그러나 최근 남유럽 전체와 같이 경제난을 겪고 있다. 화폐는 유로(Euro)를 쓰고 북으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접경하고 있다.


여기서 이탈리아 편을 마친다
TYGEM / 한상대(전 시드니대 교수 sdhahn@gmail.com

일본통신
日 아마3대기전에 대해 말하다
전통과 품격을 중요시하는 일본 아마 3대기전
2011-08-31 오후 1:25:19 입력 / 2011-08-31 오후 4:34:50 수정
*8월부터 관서기원에서 입단한 홍맑은샘 초단의 일본통신이 매월 1~2회 연재됩니다. 일본통신은 현재 일본 도쿄에서 거주하는 홍맑은샘 초단이 일본바둑에 대한 다양한 이슈 및 일본바둑계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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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7월이 되면 일본 아마바둑계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1년 동안 준비해온 모든 성인대회와 어린이 대회의 본선이 열리기 때문이지요. 일본은 47개의 토도후켄(都道府県)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전인구가 1억3천 만명 정도 됩니다. 한때 일천만의 바둑팬이 있다고 했었지만 현재는 2백 만명 을 약간 넘기는 정도이며 바둑팬의 대부분은 노년층이 어서 어린이, 여성, 중장년의 보급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대회를 참가하시는 분들을 봐도 머리가 하얀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노인 인구도 매우 중요하지만 바둑계의 미래를 위해서는 역시 다양한 연령층에 보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따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성인 메이저대회 

오랜 역사과 전통으로 아마 3대 기전으로 꼽히는 성인아마추어바둑대회가 있습니다. 바로 아마본인방전, 아마명인전, 세계아마 일본대표선발전입니다.

▲57회 아마본인방 나카조노 세이조씨.(사진출처-일본기원)

이 중 가장 역사가 깊은 대회는 올해 57회를 맞이한 아마본인방전입니다. 역사가 깊어서인지 아마본인방은 일본바둑계가 모두 존중하는 타이틀이며 아마추어선수로써 본인방라고 불리는 것은 매우 큰 명예입니다. 아마 본인방전 우승자는 명예뿐만 아니라 그 해 아마본인방 자격으로 각종 이벤트나 공식석상에 초대를 받습니다. 따라서 본인방이라는 상징성을 떠나 매우 인기가 많은 기전입니다. 

본인방전은 전국대회 8강에 들어간 선수가 다음해 아함동산배에 아마대표로 참가하기 때문에 16강전은 매우 치열합니다. 본인방전의 또 하나의 특징은 매년 열리는 프로본인방과 아마본인방과의 치수고치기입니다. 매년 바둑팬들의 즐거움이기도 하며 해설회는 항상 200명 정도가 찾는 인기이벤트입니다. 

아마본인방전 최다우승자는 기쿠치 야스로 아마 7단으로 무려 13회 우승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
 
다음 대회 설명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아함동산배에 대해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아함동산배는 오픈기전으로 본인방전(8명), 세계아마선발전(8명), 대학최강전․고교선수권, 여류아마대회 우승자 등 총 20명의 아마추어에게 참가를 허용합니다.

▲제6회 아마명인 홍석의. (사진출처-일본기원)

아마명인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인기기전입니다. 아사히신문이 주최하는 명인전은 프로명인과 아마명인이 많은 청중 앞에서 대국을 해 많은 호응을 얻고 있죠. 아마 본인방과의 차이는 치수가 매년 바뀌는 점입니다. 역시 그 해 명인이라고 불리며 매우 존중받는 자리입니다.

아마명인전의 시초는 1961년부터 45년간 이어진 아마십걸전입니다. 아마십걸전은 10위까지 선정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많은 인기가 있었는데, 2006년부터 아마명인전으로 개명함과 동시에 방식도 타이틀전으로 바꾸었고, 3번 승부로 우승자를 가립니다. 3번 승부로 우승자를 가리는 것은 선수권전인 아마본인방과 차별화를 둔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기 명인과 도전자간의 3번 승부는 하코네 부근 유명한 온천여관에서 치러지는데 아마추어 타이틀전이지만 주최 측에서 각별하게 신경 써 준비합니다. 이 때문인지 3번 승부를 치르는 아마추어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대국에 임하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전신 아마십걸전 최다우승자는 9번 우승을 차지한 키쿠치 야스로 8단이며 아마명인전으로 바뀐 후에는 새로운 얼굴이 명인이 되고 있습니다.

3대 기전의 마지막은 세계아마일본대표선발전입니다. 이 대회의 특징은 오로지 일본대표가 된다는 명예밖에 없으나 일본아마추어들은 이 기전을 매우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본은 아마 사천왕이 있어 세계아마바둑대회에서 8회 우승을 하였습니다. (한국은 현재 5회)

일본의 아마사천왕은 히라타, 키쿠치, 하라다, 무라카미인데 이 중 무라카미가 1999년에 별세해 나머지 3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전설'로 꼽히는 아마사천황에게는 많은 일화가 있는데 특히 키쿠치 8단은 녹성 바둑도장을 운영하며 야마시타 게이고 기성 등 많은 프로기사를 키워내 일본바둑계에 큰 공로를 세웠고, 지금도 입단지망생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히라타 8단. (사진출처-일본기원)

히라타 8단은 84세의 고령에도 올해 일본대표를 차지했을 정도로 정정합니다. 하라다 8단은 요새 건강이 좋지 않아 활동이 좀 뜸하지만 출신지인 카나가와켄의 바둑팬이 최고로 존경할 정도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사천왕의 나이 역시 노년으로 접어들었지만 그 뒤를 잇는 후배들의 활약이 부족합니다. 후배들이 실력이 부족하다고 하기 보다는 사천왕의 실력이 원가 뛰어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아마선수권대회는 일본이 주최하는 대회로 올해로 32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기원의 재정악화와 스폰서문제로 갈수록 주최가 힘들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계속해서 대회가 지속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상 간략히 일본 아마 3대 기전을 살펴보았습니다. 적다고 볼 수 있지만 무게감이 있습니다.

3대 기전에 대해 더 덧붙이자면 빠르면 3월부터 각 대회의 예선을 시작하지요. 예선은 인원에 따라 다르지만 2~3주에 걸쳐 1~3명의 지역대표를 결정하므로 대표에 선발된 선수는 꽤 어깨가 무겁기도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한국과 다른 점은 상금이 없다는 점과 시간아웃제도 입니다. 저도 일본에 와서 처음 그 점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상금이 없는데 열심히 둘까?' 하는 걱정과 의문은 기우였습니다. 자기가 사는 지역을 대표하는 일은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지역신문은 올해 지역을 대표하는 선수들의 인터뷰랑 사진을 실어 지역주민들에게 알리기도 합니다.

또 하나 독특한 시스템은 시간아웃제도입니다. 대부분의 일본 대회는 어린이는 30분~40분 성인은 40분~50분 시간아웃제로 진행합니다. 단 전국대회는 초읽기 제도로 대국을 합니다.

시간아웃제는 상대대국자의 매너에 따라 불상사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일본에서 참가해 본 결과 큰 문제는 경험해보지 못했고,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전 중국에서 1시간 시간아웃을 적용한 아마대회에 참가 했을 때 상대가 제 집속에 죽은 돌을 도망가며 시간승을 노린 씁쓸한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심판이 제지해주었습니다만 시간아웃제도는 그런 불안요소가 있으므로 단 10초라도 초읽기가 있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 합니다.

3월부터 결정되는 각 대표들은 7월 중순 열리는 아마명인전국대회부터 참가합니다. 상금이 없으므로 왕복교통비랑 숙박비는 주최측 부담입니다. 일본은 교통비가 매우 비쌉니다. 예를 들어 동경에서 오사카까지 신칸센으로 이동하게 되면 왕복으로만 2만7천엔(한화38만원)정도 합니다. 숙박도 동경에서는 1만엔(한화 약 14만원) 가깝게 생각해야 하니 주최측의 부담도 만만치 않습니다.

최근 주최측인 신문사들도 경영난을 이유로 3일동안 이었던 전국대회를 2일로 줄이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아마본인방전의 경우 입식추첨파티(전야제)도 했었지만 지금은 경비절약으로 폐지되었습니다.

전국대회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하루에 끝내지 않고 2~3일에 걸쳐 대국을 하므로 긴장을 풀 수 없었는데도 베테랑선수들이 1년 동안 준비해온 대회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그 자세에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전국대회는 매우 행복한 시간 이었던 걸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전국대회는 보통 일본기원 2층에서 열립니다. 2층 홀은 평일 500명 이상이 찾는 기원입니다만 전국대회에는 그 홀을 사용하므로 주위에는 갤러리가 가득찹니다. 기보를 적어가며 열심히 관전을 하시는 분들 등 참 많이 구경 옵니다. 단지 걱정되는 것은 젊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전부터 지적되는 일본바둑계의 큰 문제입니다.

▲후지쯔배 공개해설모습. 일본에서는 공개해설이 많다.

대부분의 결승대국은 대형바둑판으로 해설회가 열립니다. 300명 정도 봐주시는 데 대부분 유명한 기사들이 해설을 하므로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대국자입장에서도 청중 앞에서 두는 일, 대국이 끝나고 대국 감상, 인터뷰를 하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대회가 있습니다만 독특한 대회가 있어 소개합니다. 술 회사가 스폰서인 타카라슈조배입니다. 메이저대회는 아니지만 성인층을 대상으로 일본술 시음회, 사인회, 지도기 등 많은 이벤트를 겸해 대회를 진행하므로 매년 참가자가 불어나고 있습니다. 대회도 동경에서만 아니라 오사카, 교토, 센다이 등 각지방에서 대회를 하여 연말에 우승자들을 초청 동경에서 전국대회를 하게 됩니다.


아마대회에 대해

대국시간은 대회의 질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대회가 열립니다. 최근에는 축제형식의 단체전이 많이 늘어난 것으로 뉴스를 접하고 있습니다.

한국대회는 스폰서나 지자체 대표가 바뀌는 순간 대회가 없어지는 일이 종종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고 대회의 특색을 잘 살려서 오래오래 지속되었으면 합니다.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가장 전통이 깊은 아마국수전은 정말 소중한 대회라고 생각합니다.

아마추어선수였던 저로서는 최강의 아마기사를 뽑는 개인전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충분한 대국시간과 장소를 사용하여 진정한 승부를 가리는 대회, 프로 못지않은 그런 대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복장도 단정하게 하여 사진으로 비추어도 바둑기사는 정말 훌륭하고 멋지다는 그런 평을 보고 듣고 느끼고 싶습니다. 프로아마를 떠나 바둑인으로서 바둑의 품격을 올려 주었으면 하는 게 제 바램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입니다. 비슷한 점도 그렇지 않은 점도 많습니다. 특히 전쟁역사가 있어 무작정 싫어하는 점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배울 것은 배우며 버릴 것은 버려야겠죠.

일본바둑계가 지금 고전하고 있는 것은 변화의 물결을 느낄 줄 모르는 우물안개구리의 습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바둑계도 끓임 없이 발전하려면 좋은 것은 계속하여 흡수하고 업그레이드해야 하며. 시대에 뒤떨어지는 제도는 과감히 폐지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추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듯이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끝임 없는 개발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무엇이든지 자기만의 색깔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색이 없으면 오래 지속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둑의 초일류들은 자기만의 스타일,생각이 있습니다. 대회도 사람들도 제 각기 특색을 가져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그렇게 되었으면 좋겟습니다.
TYGEM / 홍맑은샘

 

일본바둑의 허리 관서기원
보급에 중점, 여류기사회 운영, 어린이 바둑교실 등 왕성한 활동
2011-08-11 오전 7:59:08 입력 / 2011-08-11 오후 2:46:19 수정
동서로 곧게 뻗은 일본 열도. 그 중심에는 24회 후지쯔배가 열리고 있는 오사카가 있다. 도쿄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오사카에는 동쪽으로 나라, 북동쪽으로는 쿄토 등 일본 최고의 관광지들이 둘러쌓여 있다.

그런 오사카에 일본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기원인 관서기원이 있다. 한국 바둑팬에게는 홍맑은샘, 윤춘호의 특별입단을 허가한 기원이라 조금은 더 친근함이 느껴지는 단체이기도 하다.


▲관서기원. 이 건물의 지하1층, 1,2,4,5,7층을 쓰고 있다. 

지난해 관서기원은 60주년을 맞이했다. 관서기원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일본기원 관서총본부에 속해 있던 기사들이 거리상의 이유 등 여러 이유로 일본기원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하시모토 우타로 9단을 필두로 일본기원에서 독립해 관서기원을 만들게 됐다.

이 때문에 창설된 당시에만 하더라도 관서기원과 일본기원은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협력하며 상호존중하는 모습이다. 이번 후지쯔배도 양 단체가 협력하고(공개해설-관서기원, 대국-후지쯔배 일본기원 관서총본부) 젊은 기사들은 공동연구도 함께 하는 등 최근에는 일본 바둑을 위해 뭉치고 있다. 지난 주에 열린 아마바둑대회에도 관서기원과 일본기원의 프로기사들이 함께 지도다면기 등 활동을 함께 했다.

관서기원 출신 프로기사들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전부터 관서기원의 희망이라고 불리던 유키 사토시와 늦깍이 입단한 의사출신 사카이 히데유키가 지난해부터 타이틀 획득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홍맑은샘 초단은 자신이 운영 중인 홍도장에서 매년 입단자를 배출하고 있다. 

관서기원은 어린이 바둑교실, 관서기원 아마단증 발급, 신문 관전기 등 다양한 바둑사업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바로 바둑 보급이다.

관서기원 후지와라 카츠야 6단은 "일본의 전통문화 중 하나인 바둑을 일본의 미래 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은 의무다"라고 강조하면서 "지금의 아이들이 바둑을 모르면 일본 바둑의 미래는 없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바둑을 보급하는 것을 주력하고 있다. 이 외에도 중·고등학교에 프로기사를 파견하고 있으며 20~30대 젊은 층에 대한 보급도 신경쓰고 있다. 관서기원 프로기사들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해 아마추어 강사협회와 연계해 보급활동에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노력 덕택인지 관서기원이 협력한 아키노진 어린이 바둑대회의 경우 700여명이 참가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특히 이 대회는 어제 바둑을 처음 접한 아이들도 참가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고심해서 기획했고, 프로기사들이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인형탈을 쓰고 행사에 참가했다.

관서기원은 건물 지하1층, 1,2,4,5,7층을 쓰고 있으며 7층- 여류연구회와 대국실, 5층- 성인 바둑교실, 4층- 검토실, 2층- 어린이 바둑교실, 1층-바둑클, 지하 1층은 사무국으로 되어있다.

관서기원 출신 프로기사 후지와라 카츠야 6단이 관서기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는데 사진과 함께 정리해봤다. 

▲1층에 위치한 바둑클럽 모습.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바둑을 즐기는 애기가들로 북적였다.

▲클럽 내 있는 TV와 휴게실. TV로는 관서기원 내에서 펼쳐지는 대국을 생중계로 감상할 수 있다.


▲클럽에서는 지도다면기도 펼쳐진다. 사진은 여성아마추어가 지도다면기를 하는 모습.


▲7층에는 여류연구실과 대국실이 있다. 사진은 여류연구실. 관서기원에서는 지난해부터 한국기원에서 하고 있는 여자상비군 제도와 비슷한 여류연구회 제도를 하고 있다. 관서기원 출신 30세 이하의 여류기사들을 주축으로 연구, 복기, 대국 등으로 훈련시키는 제도다. 요시다 미카(나이는 많지만 실력이 세서 여류연구회에서 활동 중)고니지 카츠코, 사키바라 후미코 등 15명이 여류연구회에서 연구 중이다.


▲여류연구회 코치는 유키 사토시와 사카이 히데유키가 맡고 있다. 윤춘호 초단도 여류연구회에서 적극적으로 여류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여류기사회 선수들이 푸는 문제. 홍맑은샘 초단이 정리한 자료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활, 끝내기 등으로 문제들이 이뤄져있고, 각 문제는 5분의 제한시간 안에 풀어야 한다.


▲여류연구회실과 함께 있는 대국실이다. 본선 대국 등 주요대국이 열리는 곳이며 이 곳 대국들은 천장 카메라로 1층과 4층 기사실에 중계된다. 각 바둑판에는 미리 대국할 선수들의 명패가 있다. 창가가 상석인데 단위가 높거나, 입단을 먼저 한 기사가 상석에 앉아 대국하게 된다.


▲카메라. 프로기사들의 대국에 방해가 되지 않게 중계를 해주는 역할을 한다.


▲대국실에서 밖을 바라 본 풍경이다.


▲이곳은 대국실 옆 특별 대국실이다. 도전기 이상의 중요한 대국들만 열리는데 이들 대국이 없을 때에는 그날 가장 이슈가 되는 대국이 열리기도 한다. 역시 천장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이 곳 역시 특별대국실로 다리가 불편한 대국자들을 위해 마련됐다.



▲5층 성인 바둑교실이다. 매일 기력에 따른 반이 열리며 한달 수강생은 200명 정도다. 단보다는 급이 많다고 한다.

▲성인 바둑교실에 있는 대형 바둑판.

▲2층 어린이 바둑교실이다. 사진에 보이는 아이들은 영재반 아이들로 가장 센 기력은 프로기사에게 두 점 정도의 치수의 실력을 갖추고 있으며 현 일본 연구생에 있는 아이들도 포함되어있다. 아이들은 매일 학교를 마치고 이 곳을 찾으며 수요일은 휴무다.


▲영재반 지도사범 오코다 사케아키 9단이 복기를 해주는 모습.

▲영재반 알림판에 붙어있는 포스터 및 아이들의 점수표.


▲영재반 외에도 기력에 따라 아이들이 배울 수 있다. 사진은 초-중급반 아이들로 대국을 하면서 기보를 적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평일 오후 4시부터 9시까지 운영되며 주말반은 100명이 참가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
▲아이들이 푸는 문제집이다. 프로기사들의 기보를 매월 모아 모음집을 만들어 아이들이 보게 하고, 아이들의 전적, 숙제(사활 등)을 문서화해 보관한다.

▲어린이 바둑교실 한 켠에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도 마련되어 있다.

▲진지한 한 어린이. 자세가 프로기사 못지 앟다.



▲4층에 있는 검토실이다. 관서기원 프로기사들이 연구하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대형모니터에는 대국실에서 열리는 대국들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검토실에서 발견한 방망이. 지난해 관서기원과 한국기원 프로기사들이 야구교류를 했을 때 기념으로 각 팀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TYGEM / 일본 오사카-김지은

 

미국바둑보급 '가능성 있다'
앤드류 오쿤 미국바둑협회 회장, 김명완 8단 인터뷰
2012-11-20 오후 4:30:02 입력 / 2012-11-20 오후 5:18:08 수정
▲ 앤드류 오쿤 미국바둑협회 이사장(왼쪽)과 김명완 8단.

20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이사장실에 기자들이 모두 모였다. 미국 LA에서 바둑을 보급하고 있는 김명완 8단이 앤드류 오쿤(Andrew Okun) 미국바둑협회(American Go Association) 이사장을 대신해 이날 인터뷰 취지에 대해 먼저 설명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한 계기는 해외바둑보급 실정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전략적 큰 그림으로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바둑계 모두와 함께 강구하고자 입니다."  

덧붙여 옆에 앉은 파란 눈의 사내를 소개했다. "앤드류 오쿤 입니다. 지난 해에는 미국바둑협회 이사회 의장이었는데, 올해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미국바둑협회에는 2500명가량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으며 산하에는 100여개의 바둑클럽이 있습니다."

▲ 앤드류 오쿤.

미국협회장 앤드류 오쿤은 방한 이유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미국입단대회의 공식후원사 타이젬과도 만났습니다만, 무엇보다 양재호 한국기원 사무총장과도 만났고, 한국의 여러 도장에 가서 연구생들이 어떻게 바둑을 공부해 세계적인 프로기사가 되는 것인지 관찰하고자 했습니다. 우리 미국바둑에도 그러한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서 입니다."

덧붙여 앤드류 오쿤은 "한국기원, 혹은 한국에서 미국 바둑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올해는 입단제도가 처음 도입된 해로, 앞으로 2~3년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미국바둑협회는 보급에 힘쓰려하는데, 한국기원에서는 보급에 필요한 지도자 파견과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이번 방한의 요점을 말했다.

그는 지도자 파견과 재정적 지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강한 프로기사를 미국에서 육성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 파견과 재정적 지원이 필수다. 현재 체계적이지는 않으나 미국에서 바둑교육을 하고 있는 학교는 200군데 정도 있는데, 이 중 기존의 선생님이 바둑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아 체계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과학 선생님이 바둑 선생님도 겸임) 따라서 한국의 방과후 지도자 또는 바둑프로기사 등을 미국에 파견하고, 재정적 지원으로는 센터 등을 설립해 바둑 교과서를 지원하는 등의 노력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 지난해 미국입단대회를 통과한 앤디 리우와 간승쉬.

한편, 지난해 타이젬은 미국바둑협회와 MOU를 협약해, 미국입단대회 비용을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원활한 미국입단대회 진행을 위해 타이젬 대국실에서 온라인 예선 운영을 돕는 등 입단대회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도운 결과, 2011년 8월 5일 새벽 첫 미국입단대회를 통과한 두 명의 프로기사가 탄생했다. 바로 미국의 앤디 리우(Andy Liu·1991년생)와 캐나다의 간승쉬(Gan Sheng Shi·1994년생)이다. ☞ 미국입단자 서면 인터뷰 바로가기

앤드류 오쿤은 이들의 소식도 전해주었다. "앤디는 뉴욕대에 재학 중이다. 바둑대회에 항상 참가하고, 바둑을 가르치기도 한다. 바둑활동에 적극적이다. 그리고 간승쉬에 경우, 내년 봄에 5개월 정도 한국에 유학을 갈 예정이다. 한국 주최의 5개 오픈기전(삼성화재배·LG배·비씨카드배·olleh배·하이원배)에 참가해 프로들과도 겨루는 등 기량을 늘려갈 생각인 것 같다.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두 기사는 앞으로 꾸준히 활동을 넓혀 나갈 것이다."

한국은 바둑팬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갈수록 다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느림의 미학'인 바둑이 미국에서 과연 보급에 희망적일 수 있을지 묻자, 그는 "미국에서는 워낙 적은 숫자에서 보급을 시작하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바라 본다.(웃음) 미국 사람들은 바둑의 전략적 요소 또는 동양적 요소 등에서 매력을 느끼며 바둑에 빠진다. 앞으로 미국의 바둑인구도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우리는 갈 길이 멀다."고 전했다.  

김명완은 말한다. "미국에 바둑 보급을 나서면 물론 힘들 수 있죠. 하지만 이번에 미국에 프로 제도가 생기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배우고 싶다는 이메일 문의도 쇄도합니다. 내년 초에는 한국바둑센터를 LA에 오픈할 생각이에요. 미국은 교육열이 높아요. 그리고 바둑을 배우려는 목적 자체가 달라요. 이들은 대학 진학을 위해 바둑을 배워요. 바둑은 가외 활동 점수인 Special Talent로 적용되거든요. 이번에 입단한 앤디는 뉴욕대에, 간승쉬는 토론토 대학에 진학했어요. 그 외에도 제자 중에는 가외 활동 점수를 받아 버클리대 등 대학 입시에 유리하게 적용된 사례가 많아요. 미국 바둑 보급은… 가능성 있다고 봐요.(웃음)"   
TYGEM / 강나연 기자

도심 속 바둑축제 '히라츠카 1천명 다면기'
9~10월에 진행되는 다양한 일본의 행사들
2012-09-15 오전 7:48:07 입력 / 2012-09-15 오전 9:30:13 수정
안녕하세요? 일본에서 프로기사로 활동하고 있는 홍맑은샘 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9~10월 일본에서 열리는 영화개봉 소식을 비롯한 다양한 일본 바둑계 소식을 정리해봤습니다.^^


▲9월 15일 개봉한 바둑과 천문을 소재로 한 텐치메이사츠(이하 사진제공-홍맑은샘) 

■ 바둑과 천문을 소재로 - 영화 텐치메이사츠
9월15일 일본 전국에서 바둑과 천문을 소재로 한 영화 [텐치메이사츠]라는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텐치메이사츠]는 우부카타 토우[冲方丁]씨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마키 에비시(槇えびし)씨의 그림으로 이미 만화책으로 3권까지 발매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도쿠가와쇼군(将軍왕과 같은 존재)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바둑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네 가문(본인방, 야스이, 이노우에, 하야시)이 있었습니다. 영화는 2세 야스이산테츠[安井算哲]를 주인공으로 진행되는데, 실제로 야스이산테츠는 본인방 도책과의 대국에서 첫 수 천원을 두는 등 기풍이 매우 독특했고, 당시 매우 유명한 천문학자였다고 합니다.

주인공이 최고수중의 한 명인 산테츠이므로 바둑의 많은 요소가 등장하지만 수학과 천문학을 중심으로 영화는 진행됩니다. 내용이 매우 심오해서 흥행에 성공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출연하는 배우들과 스탭들도 일본 내에서 베스트 멤버입니다. 산테츠 역에는 쟈니즈 그룹으로 유명한 V6의 오카다쥰이치(岡田 准一)가 맡았는데 지적인 얼굴과 함께 뛰어난 연기력으로 드라마와 영화에서 인정을 받은 바 있습니다. 오카다 쥰이치의 많은 젊은 여성팬이 바둑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산테츠의 부인역은 미야자키 아오이(宮﨑 あおい)씨로 청초한 마스크와 훌륭한 연기력의 소유자입니다.

특히 감독은 오쿠리비토(한국명 굿바이)의 타키타 요지로씨로 개인적으로 어떤 앵글로 야스이 산테츠를 그리고 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오쿠리비토는 장의사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훌륭한 음악과 함께 바둑과 연관되는 점이 많아 매우 공부가 된 영화입니다.

저는 영화를 매우 좋아하여(바둑보다 좋아할지 모릅니다^^) 한 달에 15편 이상 보는데 오쿠리비토는 강추영화중의 하나입니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흘렀네요.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소식은 다음 일본소식에서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둑이 매스컴에 자주 등장할수 있게 여러가지 방향으로 진출하여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되 는것이 제 바램입니다. 영화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영화 홈페이지

▲1000명 다면기 모습.

도심 속 바둑축제 - 히라츠카 1000명 다면기

매년 10월 일본 히라츠카시(平塚市)에는 1000명 다면기 이벤트가 열립니다. 대형 바둑 이벤트가 도심 한복판의 거리에서 열리니 매우 감동적이며 놀랍습니다.

히라츠카시는 기다니도장(木谷道場)이 있던 곳인데, 이를 계기로 바둑을 사랑하는 분들이 모여 다면기 이벤트가 시작됐습니다. 올해로 17회를 맞이하는 1,000명 다면기 이벤트에 참가하는 기사만 90명. 기다니 문하 기사가 반 정도를 차지하는데 한국에도 유명한 이시다 요시오, 오다케 히데오, 다케미야 마사키 9단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분들 뿐입니다.

다면기 이벤트와 함께 [7줄 바둑대회]와 [기사들과 함께하는 교류파티]도 진행됩니다. 신청자는 이벤트 3주전까지 엽서신청을 받아 800명을 현장에서 200명을 받아 1000명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속도를 다투는 시대에 엽서신청이 매우 낭만적입니다.

지도기 참가자는 참가비를 내야 하는데요. 성인 1000엔, 학생 500엔이며, 지도기 이후 진행되는 교류파티에는 1명당 4000엔의 추가 비용이 있습니다.
히라츠카 바둑축제 홈페이지

▲바둑알 모나카.

히라츠카시의 과자가게 - 로월당

로월당(鷺月堂)은 기다니선생님이 생전 자주 이용하던 가게로 바둑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바둑알을 모티브로 한 [바둑알 모나카]를 판매하기도 하여 그 지역특산품이 되었습니다. 저도 몇 번 먹어 본 적이 있지만 먹기 아까울 정도로 귀엽고, 맛있습니다. ^^

최근 한국에도 바둑을 통해 팬들에게 다가가는 이벤트가 많이 생겨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프로는 팬을 즐겁게 해야 하며 많은 대화도 나누어 팬클럽과 같은 모임이 많이 생겨 바둑을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언가 끌어당기는 그런 매력이 있는 프로가 되어야 하겠지요지요. 복장이나 말투, 매너는 물론 사회적인 지식까지 모든 면이 프로페셔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자기자신을 돌아보며 다듬고 개발해 사랑받는 기사가 많이 나왔으면 좋겟습니다.
바둑알모나카소개 홈페이지 

신예기사와 연구생들을 후원하는 나카노배
나카노배는 작가이신 故나카노 코우지씨가 신예바둑의 발전을 위해 기금을 만들어 2004년부터 매년 후원하고 있는 대회입니다. 동경 일본기원과 나고야 오사카 관서기원의 4곳에서 8월말에 예선이 일제히 열려 본선 멤버가 결정이 되었습니다. 연구생참가수가 과거 최대인 30명이 참가하여 비둑팬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연구생은 단 1명만이 예선을 통과하였습니다. 비록 지긴 하였지만 신예프로들과 진검승부를 한 것은 연구생들에게 많은 공부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젊은 기사들과 연구생들에게는 이런 시합이 자주 열려 대국이 많아 졌으면 좋겟습니다. 아직 일본은 연구생들의 실력이 한중에 비해 아직 부족하지만 매년 레벨이 올라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가장 부족한 것은 전문적으로 바둑을 배우고 공부할수 있는 도장, 교실, 프로기사지망생입니다. 한 때 동경연구생이 100명이 넘을 때가 있었지만 현재 53명뿐입니다. 특히 나고야와 오사카의 연구생수는 10명 정도여서 많은 걱정입니다.

전쟁으로 생각하면 식량이나 장비보급이 안 되는 전쟁은 이미 져 있는 것이니까요. 일본바둑계는 연구생은 물론 그 밑의 한바연과 같은 조직을 구성운영하여 계속하여 수혈, 육성을 해야 되며 무엇보다도 바둑의 매력과 장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보급을 통해 바둑팬을 늘려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카노배의 본선은 9월 말에 열릴 예정입니다. 올해는 누가 신예톱이 될지 매우 기대됩니다.
TYGEM / 홍맑은샘

 

새로이 등장한 일본바둑콘텐츠
일본바둑콘텐츠 소개
2012-07-07 오전 10:27:05 입력 / 2012-07-07 오전 11:35:37 수정

일본에 바둑을 테마로 한 만화가 새롭게 등장하여 바둑팬들의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원고에서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만화 호시노라조 카라스(이하 이미지 제공= 홍맑은샘)

호시노라조 카라스
만화제목은 호시조라노 카라스[星空のカラス]로 월 2회 발매하는 여성 만화지 꽃과 꿈[花とゆめ] 7월5일호에 게재되엇습니다. 한국어로는 밤하늘의 까마귀라는 뜻이며 13세 소녀가 주인공입니다.

카라스마루 와카라는 소녀가 바둑의 깊은 세계에 매력을 느끼고 프로기사가 되기 위해 마음을 굳히기까지의 스토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저도 직접사서 봤는데 여성지 특유의 그림채와 스토리로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바둑계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만화는 웃음과 눈물 그리고 더욱 더 성장하고 싶어하는 13세 소녀 마음이 잘 그려졌다고 생각합니다. 58페이지 단편이지만 더 연재를 하여 한 번 더 고스트바둑왕 열풍을 재현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하치완 81

읽고 난 뒤 바로 출판사에 감사하다는 그리고 연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일본 장기 쇼기에서는 바둑보다 다양한 장르로 여러가지 만화가 나와 있습니다. 최근 발매되어 TV 드라마화 되었던 것은 하치완 다이버 (하치완 81은 장기판의 크기입니다)로 목숨을 건 내기장기의 세계를 그리고 있어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바둑계도 다각도로 노력하여 바둑이 더욱 팬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둑 소녀 (IGO GIRL)
일본에서는 최근 이고 걸(바둑소녀)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매주 주간바둑신문 슈칸고에는 바둑소녀의 사진과 간단한 스토리가 연재되어 잔잔한(?) 인기가 있습니다. 매주 바둑신문을 보는 저도 어떤 기사보다 바둑 소녀 란을 가장 빨리 봅니다. (본능인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T.T)

2~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바둑잡지(고테키碁的)와 각종 블로그에서 바둑소녀라는 단어와 사진이 게재되었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팬을 끌어 들이려는 생각은 바둑의 품격이 저하된다는 의견도 많지만 시대는 변했습니다.
바둑소녀의 등장인물들은 대학생이나 사회인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바둑을 시작하였으며 사회생활에 도움이 된 이야기 등 매우 재미있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예전부터 남자 10명에게 가르치기보다 여성 1명에게 가르치는 것이 보급률이 높다고 말해왔습니다. 제가 여성기우회원들에게 간단한 앙케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 분들은 아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셨습니다.
 
홍: 어떻게 하면 여성들이 더욱 더 바둑을 접할 수 있을까요?

☆밝은 분위기   
☆친구들과 편하게 갈 수 있는 장소 (백화점,문화센터) ☆쇼핑을 겸할 수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바둑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다과도 하며 같은 바둑친구들과 이야기도 하여 바둑을 통해 친목을 하고 싶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간이 탁아소] 가 있는 곳이면 주부들은 안심입니다. ☆강사가 너무 바둑지도에만 치우치지 않게 화술에 능하여 다각도로 교류를 하고 싶습니다.
☆친구가 있으면 계속하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바둑 여행 등 이벤트 실시

바둑 온라인잡지(囲碁人)
2011년 9월부터 바둑책을 출판하고 있는 마이니치 커뮤니케이션이 매달 온라인바둑잡지 바둑인(囲碁人)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기사들의 솔직 담백한 인터뷰와 특집기사,사진 등으로 구성된 이 잡지는 무료입니다.

바둑잡지답게 강좌물도 충실합니다. 강좌물은 마이니치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책들을 중심으로 책의 선전과 좋은 부분들을 부각시키고 있어 또 하나의 홍보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 일본기원은 예전과 같이 바둑책을 많이 출판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책이 예전만큼 팔리지 않는 것이 큰 이유겠지요. 힘든 상황임에도 마이니치출판은 바둑계를 생각하여 독특한 컨셉과 다양한 테마로 많은 바둑책을 출판하고 있습니다. 최근 출판된 [장쉬의 사활] [사활의 철인] [큐신 사활]등 좋은 사활책은 거의 마이니치에서 출판하고 있습니다. 바둑온라인 잡지를 보기 위해서는 아래의 주소로 접속을 하시면 됩니다. 
바로가기 

책이라는 존재가 점점 잊혀져가는 요즘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책을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시대는 너무나도 가볍게 보고 잊혀 지는 영상들이 많습니다만 좋은 책은 일생 마음에 남는다도 생각합니다.

아이디어 제안
바둑을 널리 보급을 하기 위해서는 보급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분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바둑계를 책임지고 있는 일본기원에는 전문 광고홍보부가 있어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과 잦은 미팅을 가져 스폰서, 보급확대등에 대해 장기계획 추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둑소녀는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내어 바둑계가 더욱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의 스마트폰에 미남, 미녀달력 어플리케이션이 있습니다. 밤 12시가 지나면 매일매일 새로운 미남, 미녀들의 사진이 업데이트 되고, 이 뿐만 아니라 각 취미에 맞추어 많은 종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 무료라 사진이 업데이트되는 12시를 기다리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실은 저도 사용하고 있는데 매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체크합니다. ^^;;

바둑에서도 이런 점을 이용하면 좋은 아이디어 상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그리고 내일은 뭐가 나올까. 단순하지만 사람을 기대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습니다.
 

TYGEM / 홍맑은샘

연구회로 기력연마하는 일본
정상급 기사들부터 신예기사까지 다양한 성격의 연구회로 기력을 연마해
2012-04-29 오전 9:53:50 입력 / 2012-04-29 오전 10:03:09 수정
한국, 일본, 중국은 각각 다른 문화로 특색 있게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연구회 문화가 발달 되어 많은 연구회가 있습니다. 일본은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이 공식 대국일로 지정되어 있기에 연구회는 금~화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연구회를 여러 개 참가하다 보면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매우 바쁘지요. 이번 시간에는 일본바둑계를 지켜주고 이끌어줄 대표적인 연구회(硏究會-일본어:켄큐카이)를 알아 보겠습니다.


▲올해 초 비씨카드배 통합예선에 참가한 고마츠 히데티 9단(오른쪽)

[동경 일본기원]

고마켄 (小松硏究會 고마츠연구회)
연구회를 주재하는 기사에 따라 성격과 참여하는 기사도 달라집니다. 후배기사들을 위해 고마츠 히데키 9단이 주도하고 있는 고마켄은 전통의 매월 2, 4번째 금요일 열립니다. 고마켄은 대국을 중심으로 하루에 두 판씩 소화하며 3개월에 한번 리그가 끝납니다. 참여 기사는 베테랑기사부터 젊은 기사, 연구생들까지 다양하게 참가합니다. 참가비와 물론 상금도 있습니다.

저도 도일초기에 고마츠 선생이 고마켄 참가를 권유해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일본기사가 저를 경계하는 시기였는데 이 때문에 고마츠 선생에게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시쥬카이(四十會)
주축멤버들이 40대에 만들었기에 연구회 이름이 사십회라고 합니다. 왕리청, 왕밍완, 가타오카 사토시, 고바야시 사토루 9단 등 7대 기전에서 우승한 적있는 맹장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각종 테마를 가지고 공부를 하며 월요일에 열립니다.

이마켄(今硏)
이마켄은 지금 이순간을 소중히 하겠다는 이념으로 대만출신의 장리요우(張豊猷) 8단이 만든 연구회입니다. 연구회 중에서 압도적인 참가율을 보이고 있는데 장쉬, 이야마 유타 9단 같은 톱기사들도 시간이 될 때마다 꼭 참여하고 있습니다. 젊은 기사들과 베테랑기사들까지 매 모임 때마다 30명 이상이 모이며 속기로 하루 4판 이상의 대국을 소화하는 등 젊은 기사들의 실전 량을 늘리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매년 한번씩 카루이자와(軽井沢)에서 단합 연수도 가지고 있는데 오사카 거주 기사들까지 매번 50~60명이 참가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일본바둑계를 위한 장리요우 8단의 노력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린하이펑 9단

린켄 (林海峯硏究會 린하이펑 연구회)
'이중허리'로 유명한 린하이펑 선생이 주도하는 연구회로 린하이펑 선생의 자택에서 매달 2회 열립니다. 가족적인 분위기인 린켄 연구회는 장쉬, 고노린, 씨에이민등 모두 일본바둑계에서 맹활약하는 기사들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장쉬 9단은 임선생의 제자이기도 해 그 주에 두었던 대국을 스승의 앞에서 복기하는데 그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습니다.

린하이펑 선생은 연세는 드셨지만 지금도 어느 젊은 기사들보다도 열정적으로 복기를 하시며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십니다. 젊으실 때는 일본기원에서 대국 후 아침까지 복기를 하셨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하루에 한판만 두며 반년에 한번 리그가 끝납니다. 복기를 중심으로 공부하며 대국이 빨리 끝난 기사들은 조용히 속기를 두기도 합니다. 린하이펑 선생 댁에 찾아 가면 항상 반갑게 맞아 주시는 사모님의 미소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비밀연구회(??)
저도 직접 보지는 못하였습니다만 타카오 신지, 고노린, 야마시타 게이고 9단과 같은 톱기사들이 매일 모여 공부하는 연구회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2011년의 타카오 신지 9단의 성적이 수직 상승한 것에는 연구회의 도움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톱기사들의 연구회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더욱 발전시켜 일본바둑을 위해 연구해야겠지요.



▲관서기원 연구회는 유키 사토시, 사카이 히데유키(오른쪽)
등 두 대표기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관서기원]

굿치켄(滝口硏究會 타키구치연구회)
매주 화요일 오전 중에 열리는 연구회로 대국중심입니다. 동경의 연구회와 달리 시간을 길게 한판씩 리그전을 치르게 됩니다. 각 1시간 1분 초읽기로 대국을 하니 공식시합의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프로, 아마 모두 자유롭게 참가가 가능한 것도 특징입니다.

쇼우오우카이(翔鷹會 상응회)
매달 2, 4번째 주 금요일에 열리는 연구회로 유키 사토시 9단, 사카이 히데유키 8단 등 관서기원의 톱기사들을 비롯해 아마추어 기사들까지 참가할 수 있는 연구회입니다. 인기가 많아 많은 인원이 참가하며, 3개월에 걸쳐 리그전을 진행합니다. 오전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열리는 쇼우오 우카이 연구회는 제한시간 30분 1분 초읽기로 두 판을 소화하게 됩니다. 1분 초읽기이기에 매우 긴 시간이 걸립니다.

요코다 연구회(横田硏究會)
매달 2회 열리며 요코다 9단의 자택에 모여 대국과 복기 위주로 공부를 하며 오전은 대국, 오후는 오전중의 대국을 전부 복기하는 독특한 시스템의 연구회입니다. 참가자격은 매우 엄격하다고 하며 유키 사토시 9단,사카이 8단, 세토 다이키 7단,무라카와 다이스케 7단등 관서기원 대표기사 10명이 참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매우 드문 벌금제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연구회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바둑의 대한 열정을 가진 이러한 연구회들이 일본바둑계를 지켜내고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바둑연구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각기 생활도 신경 써야 하기에 모든 연구회 참가는 힘듭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기사들을 보면 바둑의 대한 마음가짐을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시간이 짧으며 연속적인 것이 부족한 것이 단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도 중국 국가 팀같이 기원에 모여 톱기사는 물론 젊은 기사들까지 매일 공부를 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지면 더욱 강해지지 않을까요. 지금 시대는 정신력이 필요하기에 자유롭게 풀어 놔서는 한계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해결을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각오한 강한 추진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가 이끌어야 할 과제라고 보여집니다.

바둑의 기술연구는 꼭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바둑을 널리 보급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일본의 바둑인구가 몇 백만이라는 조사가 있었습니다만 1951년 창간된 전통의 圍棋월간지가 너무 팔리지 않아 다음달 호부터 휴간하는 것을 보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바둑 계를 지원해주는 확실한 10만 명의 바둑 팬만 있었어도 이런 슬픈 일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근 세계대회를 지켜보며]

한중일의 바둑은 제각기 특색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색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바둑의 독하고 격렬하며 목표를 향한 열정 노력 그런 것이 모여 세계최강이라는 자리를 지켜왔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중국이 매우 훌륭한 성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국을 넘어서려고 노력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2월 중국기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스파이라면 스파이라고 할 수 있죠.^^ 운 좋게 라이벌의 심장부를 봤으니까요. 오전 9시 30분에 도착한 저는 구리 9단과 창하오 9단의 대국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중반이었으니 몇 시에 시작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죠. 중국기사들의 공부방에 들어가니 위빈 감독이 젊은 기사들과 같이 복기를 하다가 반갑게 맞아 주어 놀랐습니다.

말로는 들어 왔지만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며 지금까지의 나태함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중국 팀의 리그전을 자세히 보니 한국 룰로 대국 중이었으며 속기를 의식하여 제한시간도 한국에 맞추고 있었지요. 1조랑 2조로 나뉘어 승강급제도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멤버는 어디 하나 구멍이 안 보일 정도로 최강이었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을 개발해야 하며 적을 알아야 합니다. 적을 이기기 위해서 적군과 똑같이 해서는 이미 늦으며 적군의 그것을 넘어서는 자기만의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죠.

한국의 추진력은 매우 뛰어납니다.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싸워야죠. 지난 역사 속에서 중국과 일본에게 적지 않은 세월 동안 핍박을 당했어도 굳건히 나라를 지킨 한국의 근성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국이 확실한 세계최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음세대를 지켜줄 젊고 강한 기사들을 더욱 많이 육성해야 하며 그들이 예전 입단전과 같이 맹렬하게 공부할 수 있게 체계적이고 매우 엄격한 훈련관리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강하고 멋진 발 빠른 다음행마를 기대합니다.
TYGEM / 홍맑은샘

오늘보다 내일이 기대되는 싱가포르
명지대 바둑선수단과 베트남 바둑인 교류 가져
2012-07-15 오전 11:53:19 입력 / 2012-07-15 오후 12:40:24 수정
바둑팬 여러분 안녕하세요,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남치형 교수입니다. 그 동안 이런 저런 곳에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글을 써 왔는데 타이젬은 처음인 것 같네요. 저는 지난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학생들과 베트남, 싱가포르에 다녀왔습니다. 두 나라의 바둑계 체험 및 바둑으로 교류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죠.

일행은 저를 포함하여 총 16명으로 학부생 11명, 대학원생 4명(박사 2, 석사 2)으로 구성되었고, 대학원생들은 해외학술탐방 지원금을, 학부생들은 명지대 특성과 지원금을 받아서 가게 되었습니다. 학생 중에는바둑학 박사 과정에 있는 독일 유학생 다니엘라, 프로기사이자 석사 과정생인 백지희 2단, 싱가포르 유학생 다니엘 등 꽤나 다채로운 구성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단체 여행은 해외 바둑대회 참가 경험밖에 없고, 더욱이 이번처럼 인솔자로 따라가게 된 것은 처음이라 혹시 사고라도 생기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만, 다양성과 자율이 오히려 학생들에게 책임감을 일깨워주었는지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베트남과 싱가포르는 프로기사 이강욱, 조미경 두 기사가 파견되어 바둑을 보급하고 있는 나라로 이미 몇몇 매체를 통해 어느 정도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이번 여행기는 두 나라 바둑계의 일반적인 현황보다는 제가 여행하면서 보고 느꼈던 점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합니다. 재미있게 보시고 베트남과 싱가포르 바둑계에 대한 여러분들의 관심이 좀 더 깊어지시길 바랍니다.

●○●○●○●○●○●○●○●○●○●○●○●○●○●○●○●○●○

▲깔끔하고 자연과 어우러진 느낌을 주는 싱가포르 주택들.

싱가포르에서의 2박 3일

창이(Changi)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모두는 베트남과는 전혀 다른 나라에 왔다는 것을 금새 느낄 수 있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공항은 세계 제일의 공항이라는 인천 공항보다 훨씬 깨끗하고 화려했고, 세관 직원들의 표정 또한 베트남과는 달리 여유가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연결되는 전철 역시 서울 지하철 이상으로 깨끗하고 새 냄새가 났고, 열차 밖으로 보이는 유럽식 주택들과 잘 꾸며진 공원들은 싱가포르 전체가 하나의 테마파크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싱가포르에서 가이드를 맡은 유학생 다니엘이 짐을 풀기가 무섭게 우리를 데려간 곳은 자신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음식점. 쇼핑몰 내 푸드코트처럼 여러 가게들이 한 데 모여있고 야외에 테이블을 놓아 둔 곳이었는데, 오후 5시라는 이른 시간에 먹는 저녁이었음에도 나오는 음식마다 모두 맛있었다.

하나 문제가 있었다면 숙소로부터의 거리. 서울보다 면적이 아주 조금 크고, 남북보다 동서로 더 긴 형태도 서울을 닮은 싱가포르는 생각보다 작지 않았다. 싱가포르에선 숙소가 제공되지 않아 숙박비를 줄이기 위해 공항에서 가까운 동쪽 끝에 숙소를 잡았는데, 다니엘 부모님의 식당은 서쪽의 끝.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가는데 편도로만 1시간 45분이 걸렸다. 베트남에서 오는데 2시간밖에 안 걸렸는데…….

▲싱가포르 바둑협회 임원들과의 회의를 위해 이동 중 한 컷.

식사 후, 요즘 싱가포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관광지인 마리나 배이 샌즈를 구경하고 나니 밤 11시. 하지만 나와 대학원생인 백지희 2단의 하루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정이 짧은 탓에 낮 동안에는 만날 기회를 잡지 못한 싱가포르 바둑협회의 탄(Tan)회장과 부회장 제임스가 의논할 일이 있다며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이다. 마침 근처에 "싱가포르 슬링"이라는 칵테일의 원조로 유명한 래플스 호텔이 있어 그곳에서 원조 싱가포르 슬링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싱가포르 아이들과 만나기 전 싱가포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명지대학교 선수단.

▲싱가포르에서 보급 활동 중인 조미경,

현재 싱가포르에는 한국의 조미경 사범이 보급을 나와 있는데, 그녀가 주로 하는 일은 초, 중, 고교는 물론 대학교에까지 있는 바둑강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

싱가포르에는 각급 학교를 통틀어 30여 개의 학교에서 이런 수업을 개설하고 있는데, 한 학교가 두 개 이상의 강의를 개설하는 곳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상당하다. 때문에 조미경 사범과 제임스를 포함한 3명의 정규 강사, 그리고 회장인 탄씨와 명지대 바둑학과를 졸업하고 협회 일을 맡고 있는 신디, 자원봉사 학생들까지 1주일에 하루밖에 쉬지 못한 채 열심히 강의하고 있다.

▲강의를 듣고 있는 싱가포르 아이들.

▲바둑실습 중인 싱가포르 아이들

탄씨와 제임스는 이러한 강의를 좀더 늘리고 싶어한다. 500만 인구 중 80%가 중국계인 싱가포르에는 학생들에게 중국 문화를 가르치고자 하는 학교들이 많은데, 바둑은 중국의 여러 문화 중에서 '다도(茶道)' 다음으로 인기 있는 분야로서, 학교와 강의의 수를 늘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옆 나라인 베트남에서 이강욱 사범 같은 고급 인력이 학생을 찾지 못해 호치민과 하노이를 오가며 고생하는 것을 본 우리로서는 싱가포르의 상황은 사치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이런 싱가포르에도 고민이 있었다. 강의를 늘리고 싶어도 가르칠 선생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싱가포르의 경우 바둑 연령층이 매우 젊어 아직까지는 봉사차원에서 강의를 해주는 대학생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현재 열심히 활동 중인 학생들이 대학 졸업 후에도 더 좋은 직장을 찾아가지 않고 박봉의 협회 일을 선택할 지는 의문이다.

또한 최근 들어 외국인의 취업에 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싱가포르 정부가 조미경 사범같은 파견 기사의 비자를 연장해 줄 지도 장담할 수 없다. 학교에서 바둑 강의를 개설하고 싶어하는 분위기는 바둑 보급의 관점에서는 분명 엄청난 기회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선생을 구해서 이 좋은 기회를 살릴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며 싱가포르에서의 첫째 날이 지나갔다.


▲싱가포르 본부에 있는 바둑 서적, 신문 들

협회 방문과 교류전은 둘째 날 저녁 7시부터였다. 싱가포르에는 협회 사무실만 두 곳이 있는데, 우리가 찾아간 곳이 본부. 호치민 협회 바둑실의 두 배가 넘는 대국실이 두 곳에 휴게공간과 창고까지 갖춘 깨끗하고 쾌적한 공간. 더욱이 시내 한 가운데 위치하여 접근성도 매우 좋다.

그런데, 베트남 시간은 베트남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7시가 훨씬 지났는데도 몇 명의 학생들이 기웃거릴 뿐 교류전을 시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 대국이 시작된 것은 거의 8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교류전 모습

대국은 다니엘의 주도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호치민과는 달리 실력이 만만치 않다. 결국 실전 경험이 많은 바둑학과 학생들 대부분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호락호락하게 보았다가는 큰 코 다칠 정도로 실력은 만만치 않았다.

이는 기력 인플레이션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싱가포르에서 승급이나 승단을 하기 위해서는 각종 공식 대국에서 일정한 승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류전 선수들의 전반적인 기력은 아마추어 4-7단 정도였고 개중에는 13세 소년도 있었다.


▲강의 중인 제임스.

저녁 비행기로 돌아가는 여정이어서 싱가포르에서의 마지막 날도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이날은 성영(聖嬰, Holy Child)소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바둑 수업의 참관이 예정되어 있었다. 성영소학교는 중국계 공립학교로 다도와 바둑을 중국 문화의 하나로 가르치고 있는데, 바둑을 가르치는 학교들 중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곳으로 입문자를 위한 강좌가 2개에 각각 40여명, 중급 이상을 위한 강좌 역시 2개로 각각 20여명이 바둑을 배운다.

영어와 중국어를 함께 쓰며 진행되는 강의는 협회 부회장인 제임스와 자원봉사 학생이 한 반씩 맡아 진행되었는데, 화상자료나 수업의 진행 방식이 재미있으면서도 실질적인 내용을 전달하고 있어 인상 깊었다.


▲성영소학교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친 명지대 바둑선수단

우리 일행도 수업 진행을 도왔는데 외국인이 단체로 방문한 것이 신기했는지 학생들도 예상 외로 크게 호응해 주었다. 이 학교는 향후 몇 년 내에 바둑만을 위한 강의실과 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금을 모으는 중이었는데, 반드시 실현되길 빈다.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모든 수업을 끝까지 참관하지는 못한 것, 그리고 이튿날부터 열리는 싱가포르 마인드 스포츠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나는 물론이고 바둑학과 학생들 모두에게 싱가포르 바둑계의 예상 밖의 발전된 모습은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특히, 싱가포르 바둑협회의 주최로 열리는 마인드 스포츠 대회에는 400여 명의 바둑부문 참가자를 포함해 약 2,000명이 체스와 중국장기, 브릿지, 포커 부문에 참가한다니 인구가 10배인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일 듯 하다. 싱가포르의 바둑이 우리나라와 어깨를 겨룰 날이 그리 먼 미래는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조심스런 예상을 해 본다.
TYGEM /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남치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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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국 9단, 서른 세 번째 바둑특강
3월 5일부터 16주간 강의
[단신] 오로IN  2013-02-05 오후 6:25   [프린트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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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상국 9단


EBS바둑교실의 훈장 선생님으로 바둑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양상국 9단이 서른 세 번째 바둑특강을 연다.

3월 5일부터 매주 화요일 16주간 열리는 바둑특강은 서울 양재동(양재역 5번 출구 도보 5분)에서 열리며 수강료는 50만원이다.

‘바둑판 짊어지고 대중 속으로’를 몸소 실천하는 국내 바둑 보급의 숨은 공로자 양상국 9단은 1970년 입단해 2006년 입신(入神‧9단의 별칭)에 등극했으며 현재 한국기원 감사와 ‘EBS바둑교실’ 해설위원을 맡고 있다.


제33기 양상국 바둑특강

- 전 성균관대학교 사회교육원 바둑과(初志會)

일시 : 2013년 3월 5일~6월 18일(16주-매주 화요일)
실전대국 : 오후 3시~6시, 강의 : 오후 6시~7시
장소 : 서초구 양재동 1-7 양재종합시장빌딩 303호
(3호선 양재역 5번 출구 도보 5분)
수강료 : 50만원
문의전화 : 011-9933-8899

[자료제공 : 한국기원 기전사업팀/홍보파트]
 

 

'황인성-이세미'의 유럽바둑 탐험기2
유럽에서 바둑을 '직업'으로 인정받기
[인터뷰] 최병준 2013-03-02 오후 4:36 [프린트스크랩]
▲ 스위스에서, 황인성-이세미 부부


○● 미생, '장그래'의 트라우마, 한국 연구생들의 트라우마

황인성은 인기만화 '미생'의 주인공 캐릭터 장그래와 닮았다. 미생의 윤태호 작가가 작품 시작에 앞서 입단에 실패한 연구생 출신들을 인터뷰했기 때문이고 그때 윤태호 작가와 여러차례 인터뷰한 사람중 하나가 황인성이다. 물론 장그래캐릭터는 여러 사람의 성격이 녹아 들었고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다.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장그래와 닮은 사람이 바로 앞에 마주앉아 만화 속 '장그래'의 성격과 행동을 이야기하니 만화 속 인물이 금방 튀어나온 듯 하다.

2월 19일 오후, 중구초동의 카페 Parati. 장그래와 닮은 이 사내가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한다.

"만화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가 자신이 바둑을 뒀다는 걸 절대 밝히려 하지 않잖아요. 그게 이유가 있는 거고 많이들 그래요. 입단을 포기하고 사회로 진출한 연구생들이 자신들이 진출한 분야에서 바둑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거의 안해요. 저는 이 풍토가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연구생 출신들이 가진 '트라우마'가 있다. 보통의 경우, 바둑을 좀 뒀다고 하거나 바둑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 상대는 '혹시 프로냐?'하고 툭 질문을 던진다. 질문자의 입장에서 보면 관심을 가진 '선(善)'한 호기심이다, 그렇지만 질문을 받은 사람, 연구생 출신 입장에선 수 백번 같은 질문을 받아도 항시 받는 상처 같은 게 있다. 만화 미생의 도입부에 입단에 실패한 연구생들의 이 아픔과 좌절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황인성은 그조차도 조금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 지역사회의 공동프로젝트로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리치는 일이 황인성-이세미 부부에게 더 넓게 볼 수 있는 통찰의 힘을 줬다.


▲프랑스 그레노블의 한 어린이와 함께, 이세미 씨를 잘 따르던 아이

황인성은 이를 잘 극복한 사례다.황인성은 프로기사 자격증이 없는 상태로 유럽에서 바둑보급을 시작했다. 프로기사 자격증이 있냐 없냐는 보급활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전문 바둑인'임에 틀림 없지만 외국에서 '아마7단'이런 식으로 소개를 하면 그냥 취미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황인성은 그때 '보급프로(레슨프로)' 제도 같은 걸 대한바둑협회나 한국기원이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 봤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바둑을 직업이라고 인정해주는 의미가 있어요. 가령 유럽에서 세미나를 잘 끝내고 나면 사람들이 물어봐요, '전공은? 무슨 공부하고 있어?' 그리고 나서 '아. 전공이 바둑이네, 아~ 이게 일(직업=프로페셔널)이었어?' 하고 고개를 끄덕이죠. 밖에선 프로기사란게 한국, 여기서처럼 대단한 의미가 아니라, '직업' 그 자체를 뜻해요. 유럽에선 '아마추어'란 의미는 직업이 아니란 의미(취미 혹은 아르바이트)'에요. 지금은 저를 아는 유럽인들이 '마스터'라고 불러주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프로와 아마추어(연구생)를 설명해줘야 할 때마다 자꾸 아팠죠."

한국의 입시제도가 약간 그렇다. 그리고 음악,미술,무용, 연예인이 되는 길, 거기에 바둑까지 거의 대부분의 길이 인생을 올인해서 성과를 맛보고 그 성과를 맛보지 못 한 경우 그냥 '백수'가 되서 사람구실을 하기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다. 중간지대가 없다. 입단에 실패한 과거의 한국기원 연구생들도 이런 좌절을 겪었던 것이다.

"입단에 한끗 차이로 실패해서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과 한국에 왔을 때 가끔 만나게 되요. 많은 친구들이 회사에서 자신이 프로가 될 정도로 바둑을 잘 뒀다는 걸 숨겨요. 바둑에 인생을 올인해서 바둑을 더 잘 알릴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 그 사실을 건드릴 때 마다 계속 마음 아파하고 숨긴다면 이건 바둑계에도 손해 아닌가요?, 프로대회에 나갈 자격이 없더라도, 바둑이 그의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자격, 보급프로로 부르든 레슨프로로 부르든 그런 제도가 필요했겠죠. 보급을 하다보니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2010년 대바협(KABA)에서 세계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써포트를 받으니까 '직업으로서의 바둑'을 설명할 때 나름 요긴했어요."

황인성이 이런 이야기를 솔직히 할 수 있는 것은 유럽에서 그의 제자, 수강생들이 그에게 '마스터'라 불러주고 그의 바둑이 직업으로서 인정 받기 때문이다.

자 그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무엇을 가르치기에 어떻게 가르치기에 그들의 '마스터'가 됐을까? 그리고 수입은 얼마나 될까. 결혼한 외국인 부부가 유럽에서 살려면 비슷한 나이의 현지인들보다 수입이 조금 더 많아야지 적으면 생활유지가 어렵다. 서유럽 지역의 1인당 국민소득은 4만불 이상이고 스위스 같은 경우 8만불에 이른다. - 2008년 터진 유럽경제위기를 논하면서 유럽이 복지제도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간간히 있었지만 지난 수 십년에서 최근까지 우리가 그들보다 소득이 많았던 적이 없고 그들보다 휴가가 많았던 적도 없고 여유가 많았던 적도 없다. 아무튼.


▲ 2012 스위스 바둑 챔피언십의 참가자들과 부부, 스위스 루체른

○● 바둑은 '인문(人文)'이다

이세미씨가 소개하는 황인성의 세미나와 강의는 바둑의 수법(테크닉)에 인문학을 겸비한 것이었다.

"오빠랑 같이 다니니까 같은 강의를 여러 번 듣게 되요. 그래도 들을 때마다 재미가 있던 걸요. 준비한 교재로 강의를 하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요. 그냥 이럴 때 이런 수 , 저럴 땐 저런 수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수를 두게 되기 까지의 역사적인 맥락을 이야기할 때도 있고, 한국 바둑역사를 이야기해주도 하고, 본인의 연구생 경험을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질문도 굉장히 많이 받아요."

" 쉬운 예로 이런 거요. '이거 누가 뒀지? 슈샤쿠라고 있어'. 그러면서 현대바둑에서 공동연구를 하는 그런 스토리도 알려주고, 옛날 정석이 나쁜 건 아닌데 새로운 거를 배우는 거에 재미를 느끼게 하죠. 때론 스토리로 설득을 해요. 현대의 이세돌하고 과거의 슈사쿠하고 누가 더 잘 두냐?는 그런 질문이나 궁금증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그땐 화점이라는 걸 둘줄 몰랐어. 그런 차이가 있지. 이세돌 강하지만 슈사쿠도 '탤런트'가 있으니까 1년 정도면 이세돌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일본은 긴 시간 바둑에 대해 투자한 것이 많다. 어느 곳을 가도 그렇다. 그런 부분은 그냥 인정하면 된다.

"일본 기사들을 여기사람들이 좋아해요,스토리가 많이 입혀져 있어서 그래요. 지하철 바둑 고바야시, 대마킬러 가토, 우주류 다케미야, 우주류는 그렇게 멋있게 두고 우승까지 많이 했으니 다들 좋아해요. 캐릭터가 워낙 잘 입혀져 있다보니까 그들의 전성기가 완전히 지났어도 하나의 기풍을 완성한 '대가'로 인식하고 좋아들 해요."

"어떤 수를 누가 발견했어? 이건 '공동연구'와 지식인가?. 왜 중국식 포석인가? 이런 질문에 재밌게 답을 해주고 수법을 강의한다. 이게 최신 유행이니까 '그냥 둬' 하면 안 되는 것이죠. 심지어 '드래곤 포석(한 쪽 변부터 중앙을 거쳐 반대편 변까지 일렬로 눈목자 네번을 둔다)'을 자랑스러워 하는 경우도 '승부에 나쁘다' 하는 것보다 서로 가볍게 토론하는 것이 좋아요. 전투력이 강한 사람이면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과 더 재밌게 둘 수 있다는 장점이 분명 있거든요. "

여러가지 예가 많다. 대표적으론 천원에 첫 수 두는 것처럼 (덤이 없던 시절, 우칭위엔이 흑으로 천원에 첫 착수를 하고 흉내바둑을 뒀다. 백에게 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한 사례다) - 이론적으로 왜 나쁜지 설명하기는 힘들고 애매한 것도 '두지마, 혹은 나쁜 것'이라고 절대 이야기하진 않는다.



▲ 스위스의 한 마을, 사람이 없고 소똥냄새가 나는 이런 마을에서도 몇 개월 머문 적이 있다. 인터넷이 있기 때문에 이를 적극 활용한 것.


▲ 이런 재미!

유럽인들은 '마스터'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황인성은 "충암도장에 나가서 초등학생 연구생과 겨뤘는데 내가 졌어"하면 그쪽 사람들이 전부 놀란다. 아니 '마스터가 꼬맹이에게 지다니.' - 그냥 '한국바둑이 최강이에요' 하는 것보다 황인성의 강의 내용은 늘 새롭고 재밌다.

본인이 경험했던 연구생과 도장을 결합한 시스템을 현지 스위스, 프랑스에 도입하기도 했다. 물론 비슷하긴 하지만 한국과는 다르다, 그래도 한국 바둑이 가졌던 점을 체험하고 황인성 마스터가 직접 지도를 하는 것에 큰 장점이 있다. 70여명 정도를 가르치는데 온라인과 오프라인 리그, 그리고 영상복기 오프라인 강좌를 병행한다. 만족도는 높다. '마스터'로서의 실력은 다들 인정하는 터라 이제는 유럽 현지 대회의 토너먼트에 나가지는 않는다.

"토너먼트 수익은 거의 없어요, 현지 바둑고수들이 그런 상금은 챙길 수 있어야죠, '결혼하기 전에 아. 연구생 시스템을 유럽에 입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봤어요. 대충 바둑을 두던 사람들도 '챔피언십' 같은 형식을 붙여주면 정말 열심히 두거든요. 그렇게 둘 수 있는 리그 시스템을 성인들에게 적용해 가르치고 스위스에서 차음으로 연구생 도장 리그를 15~20으로 시작했어요. 유럽전체로는 70명 정도에요"

황인성-이세미 부부의 한 달 수입은 한국으로 치면 600만원~1000만원, 평균적으론 700 만원 정도다. 같은 또래의 한국인들보단 많은 편이지만 국민 1인 평균 소득이 4만달러가 넘고 5~6만달러에 육박하는 유럽에선 이게 아주 많은 편이라 할 수는 없다. 어찌됐든 외국인이라 원래 살던 사람보다는 돈이 더 필요하다. 거주지에서 월세를 내야하고, 가르치기 위해 이동하려면 기본 숙박과 교통비가 많이 드니, 이 정도는 벌어줘야 바둑만으로 생활이 가능하다. 가령 스위스와 프랑스를 부부가 함께 이동하면서 생활하면 교통 숙박으로 150만원에서 200만원이 금방 사라진다.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부부가 몇 개월 살던 곳에서 이런 수로가 보였다.


▲ 4월 30일 네덜란드, Queen's birthday. 일명 Crazy day라고 부르는 축제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 뭔 행사 같긴 한데, 사람들은 끊임없이 맥주를 마신다.

○● 전문 바둑인, 또한 생활인

이쯤에선 생활인으로서의 황인성-이세미 부부를 만날 수 있겠다. 이런 이야기는 하기 힘들 수도 있다. 원래 영업이 힘든 이유는 자기 입으로 '돈'을 이야기 해야 하는데 있다. 우리네 연구생 출신(프로를 포함해서)들이 얼마나 내성적인가. 황인성도 초반에는 이런 이야기에는 '입'이 열리지 않아 고생을 좀 했다.

"결혼 전, 과거에 오프라인 강좌를 '저렴한' 가격에 정말 열심히 가르친 적이 있어요. 다들 만족하고 노력에 비해 너무 싼 거 아니냐는 반응도 많았는데 강좌에 참여한 한 꼬마가 '강의료'를 죽어라 안 내는 거에요. 꼬박꼬박 나와서 잘 들으면서요. 그래서 참고 참다가 불러서 조용히 이야기했죠. '내 강좌가 듣기 좋았고 도움이 되었으면 강의료를 내야 하는 거다. 너도 내 강좌를 좋아하잖니'라는 식으로 말했죠. 쑥스럽기도 하고 정말 그 이야기를 직접 입밖으로꺼내기까지 너무 힘들더군요." - 결국 꼬마는 '납득'하고 강의료를 냈다. 설득과 납득이 중요하다. 이곳은 유럽, 한국이 아니다. 바둑 잘 둔다고 알아서 인정해주지는 않는 풍토다.

유럽은 기본적인 '휴가'가 많다. 그래서 바둑 캠프(대회 등)가 있으면 자신의 휴가를 할애해, 며칠씩 고정적으로 낼 수 있는 시간들이 있다. 그래서 교육시장의 잠재 가능성이 있고, 황인성-이세미 부부가 이 시장을 고생하며 창출해 나가며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일단 스케쥴을 잡으면 웬만하면 그렇게 간다. 이들은 한국처럼 쫓기며 살지는 않는다.

2일~4일씩의 외부 세미나 혹은 출장은 대회가 있을 때다. 황인성-이세미 부부가 전화를 건다. '거기 사범이 필요한가? 그쪽에선 얼마면 되지?' 하며 서로 협상한다. 주최측에선 깎아달라고 하고, 황-이 부부는 좀 더달라고 한다. 뻔뻔하게 보이지만 유럽선 일상이다. 물론 처음엔 이런 협상에서 (뻔뻔하게) 입 여는 것은 고통스럽고 힘들다.

물론 이건 공짜가 아니다. 내년에 다시 오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그냥 가서 다면기 한 판 두고 여행하다 오는 게 아니다. 한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강의하고, 복기하고,쉴 틈 없이 참가자들과 같이 어울려줘야한다. 강철같은 체력도 요구되는 부분이다.

때론 한-중-일에선 보내오는 전문 바둑인들이 보급의 명분으로 무료 봉사를 하는 수가 생긴다. 이런 경우 동유럽 지역의 자생적인 바둑고수들이 피해를 호소하기도 한다. 바둑으로 경제적 수입을 취하는 사람들이 유럽에는 있다. 황인성-이세미 부부는 어떨까?

"단기로 와서 무료로 서비스를 하는 경우는 역시 여기서 유료로 열심히 하는 사람들과 서비스에서 큰 차이가 있게 마련이에요." 황인성이 준비한 PDF자료나 강좌 구성물, 대회 공식 심판과 지도사범으로 참여해 며칠씩 어울리는 서비스는 일단 따라하기 힘들다. 상당히 체계화된, 숙련된 전문 작업이라는 느낌이 풍겨 나온다.

"물론 일로선 일이고, 돈도 벌어야 해요. 최근에는 그 일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

사람들이 마스터라 불러주고, 그냥 재밌게 사는 게 보이지만,어쨌든 그 삶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것이 필요하다. 부부는 결혼했기에 결혼 전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언제나 떠돌아다니면서만은 살기 어렵다. 2012년만 하더라도 근 3개월에 한 번씩 살던 곳을 옮겼다. 프랑스 그레노블 시, 스위스 취리히, 제네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위스 셔텔쌍드니, 로잔근처 문화센터 같은 곳에 초빙되어 바둑클럽 활동을 하기도 했다.



▲ 벨기에 브뤼허에서


▲ 벨기에 브뤼셀에서의 바둑세미나


정착이 필요했고, 그 정착지는 일단 프랑스가 될 것 같다. 바둑교육에 열성적인 죠세 선생님을 통해 프랑스 사람들과 끈끈한 인맥이 생겼다. 그레노블 시장이 황인성-이세미 부부를 보증하는 문서에 직접 사인을 할 정도가 됐다.(프랑스는 중국처럼 '꽌시' 비슷한 신용 문화가 있다. 직접 사인을 해줬다는 건, 내가 아는 사람이니 필요한 일에 협조해달라는 의미다.) 그레노블 시와 공동으로 '사회적인 교육 프로젝트'를 해봤다는 건 큰 경험이다.

황인성-이세미 부부는 이런 경험으로 인해 "바둑은 당신이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감있게 상대에게 다가설 수 있게 됐다.

"바둑을 보통 '마인드(정신) 스포츠'라고 부르지만 보통 사람들이 '아 지금 내가 정신이 피폐해졌으니까 바둑을 배워야겠어' 이러지는 않아요. 하하. "

"더 즐길 수 있게 더 깊은 것을 느낄 수 있게 위해서 바둑을 배우죠. 꼭 이기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요. 남들에게 보여지는 거 보단 자기가 즐겁다는 거가 중요하죠. 제가 '이기는 것이 선' 이라는 워낙 좁은 시각에 갇혀있다 이걸 즐기는 것, 다른 사람이 좋은 바둑을 알게 하는 즐거움으로 깨닫는 과정에 있어요."

그 깨달음의 보다 큰 실천과정이 '유럽의 유소년 바둑교육 프로젝트'다. 바둑을 할 줄 아는 유럽의 교사 24명(현재 유소년 교육 프로젝트가 있을 때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현역 교사 들의 수다.)은 1년에 약 900~1000명을 가르칠 수 있다. 이들을 한 데 모아 이것이 제도화하면 공식화된 바둑 교육자 과정이 탄생할 것도 같다. 이들은 말하자면 '국제 바둑 교육자'로 불러도 될 것같다. 아무튼 바둑이 공식적인 뭔가를 가지게 된다는 게 중요하다.

유럽에서 프로제도가 생길 수 있을까? 황인성은 아직 이르다고 본다. 같은 경제권이지만 여러나라의 소리가 제각각이라 지금은 아니고 한 참 나중에 따져 볼 문제라 본다.

글쎄, 한국에서 바둑을 직업으로 인정하는 '가장 쓸 모 있는 자격증'은 '전문기사 면장'이다. 아마추어 단증 자체는 직업으로서의 바둑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먼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유럽에서 이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쓸 모 있는 바둑 자격증' 하나가 생길 지도 모르겠다. 교육적으로 인정받는 '국제 바둑 지도자'같은 그런 것 말이다. 그래서 때론 그것을 따러 국내 바둑인들이 유럽에 연수를 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 한국에서도 프로와 아마추어 단증 사이의 중간지대에 위치하는 '쓸 모 있는 자격증'이 보다 필요하다. 직업으로서의 바둑을 보증하는 그런 것 말이다.

황인성-이세미 부부가 마지막 '바둑관'을 펼친다.

"우리가 할머니,할아버지가 됐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행복하게 눈을 감는 꿈이 있어요. 지금 바둑보급 이름이 세계화 그런 거지만, 바둑을 통해 사회에 의미있는 일을 하고 주위의 사람들이 행복해 하면 정말 보람있어요. 소외된 아이들이 바둑으로 나아지면 같이 행복하고 그래요."

"바둑이 인류에 대한 이익이 없다면, 그냥 내 밥벌이일 뿐이지만, 그런 가치가 있고 그 이상이 있다면 관점을 크게 키워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바둑의 힘이 아닐까요? 가르칠 때 그런 가치를 제가 가지고 믿고 가르치면, 상대도 저와 같이 즐기고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취재 | 최병준, 박주성]

 

'황인성,이세미'의 '유럽 바둑'탐험기1
'바둑'은 KPOP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인터뷰] 최병준 2013-03-01 오후 9:43 [프린트스크랩]
▲ 프랑스 그레노블 시의 한 학교,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황인성,이세미 부부, 가장 먼저는 돌 따먹기 놀이를 한다


황인성-이세미 부부 인터뷰/ 유럽바둑 유소년 프로젝트

○● 유럽바둑에 섞이기

"바둑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다른 나라에 바둑보급을 하러 간다고 해보죠. 바둑 인구가 작은 곳이라 해서 바둑의 황무지, 혹은 바둑의 미개척지, 미개발지역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바둑만큼은 앞서 있다, 그런 생각들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은 별로 도움이 안되요.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거지만, 특히 유럽이 그래요. 바둑 역사 자체가 오래되었거든요."

프랑스,독일, 스위등 유럽 지역에서 바둑교육과 보급 활동을 하다 잠시 귀국한 '황인성-이세미'부부를 만났다. 2월 19일 서울 중구 초동의 카페 PATRI, 유럽서 어떻게 지냈느냐는 안부 인사가 나오기가 무섭게 '바둑 이야기'로 물꼬가 트인다.

황인성(31)은 2005년에 처음 독일에 갔다. 그 전엔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이었고 프로입단에 실패했다. 연구생 출신 바둑강자들이 아마대회에 출전하거나 도장에서 계속 공부하며 사범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황인성은 즉각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이지만 여러모로 잘 풀렸다. 각종 바둑레슨과 바둑TV 출연으로 웬만한 프로보다 수입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에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어 택한 독일행은 바둑 인생에 새로운 계기가 됐다.

"2005년의 유럽에서 희망을 봤죠. 고스트바둑왕(원제, 히카루의 바둑, 일본만화로 전세계적인 바둑 배우기 트렌드를 몰고 왔다.) 이 대히트를 칠 때 였어요. 04~06년이 고스트 바둑왕의 열기가 살아 있을 때였죠. 어딜가도 아이들이 북적였어요. 바로 여기가 내 바둑인생의 승부처라고 봤어요. 유럽 현지 대회에 나가면 저 같은 동양인을 마치 '히카루'인양 어린이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던 그런 때였죠."

그러나 승부처를 눈앞에 두고 황인성은 몇 년뒤의 유럽에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고고 국내로 귀국해야만 했다. 군 복무를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그게 한 때의 패션이었던 걸 알았던 건 그 후에요. 군대에 가느라 귀국했다 끝마치고 다시 유럽에 가보니 그게, 그 열기가 없어진 거에요.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유럽에 건너간 게 2009년인데 2년반만에 그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승부를 걸었던 이유가 군에 있던 동안의 유럽에서 갑작스레 증발했다. 생동하던 어린아이들의 눈빛은 사라지고 늘 참가하던 골수 바둑팬들만이 지역 대회와 강좌에 참여하고 있었다.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바이나 당장은 바둑만 가지고는 생활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바둑팬 증발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황인성은 그것을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황인성은 유럽에서 '바둑(Go, Baduk, Weiqi)이란 개념을 알고 있는 인구를 15만~20만으로 추산했다. 한 번이라도 둬봤거나 배워본 사람을 끌어모은 숫자다. 이와는 달리 황인성의 '액티브 바둑팬' 개념으로 추산하면 유럽의 실질적인 바둑팬은 적게는 6200명 많게는 1만명으로 본다. '자기 스스로를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1년에 한 번쯤은 대회에 참여한 사람', 황인성은 이를 액티브 바둑팬으로 정의하는데, 2005년도쯤에 이 숫자가 30%이상 급증했다가 2009년 이후 최근까지 쭉 빠진 것이라고 봤다.

" 그때의 그런 열정을 담아 둘 시스템이 그때는 없었던 거에요. 시간이 계속 지나면서 그 열정들이 유지가 안 된 거죠, 다시 2005년 전과 비슷한 바둑 인구로 돌아왔죠. 그때와 같은 활기차고 시끌벅적한 느낌이 사라졌어요. 군 제대후 2009년에 독일에 다시 와서 깜짝 놀랐죠. 인생의 승부처로 택했는데 열기가 차갑게 식었으니까."

한국은 2010년부터 대한바둑협회와 한국기원이 정부지원을 받아 바둑 세계화 사업을 펼쳤다. 그 전에 일본이 이런 사업을 수 십년에 걸쳐 굉장히 오래한 역사가 있고, 중국 또한 최근들어 유럽과 미국의 바둑 콩그레스에 대규모 인력을 파견하는 등 비슷한 종류의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한중일 삼국은 이렇게 대부분 바둑 보급에 긍정적이다. 그런데 정작 보급을 받는 나라와 지역의 바둑팬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황인성은 일단 한중일 삼국의 보급사업을 이렇게 비유했다. "사실 한 곳에 오래 살지 않는 이상은 잘 모르니까요. 그냥 막연하게 바둑의 미개척지로 생각하기 쉬우니까요. 하나의 거대한 주전자 속에 담겨진 차가운 물로 보면 어떨까요. 보급이란 이 차가운 물을 덥히는 게 목적이구요. 한중일의 바둑 보급사업은 말하자면 이 거대한 주전자 속 차가운 물에 따뜻한 컵 한 잔씩을 붓는 방식이 많았죠. 팔팔 끓는 물을 만들려면 이 주전자 밑의 가스불에 점화를 시켜야 하는데 말이죠. 저도 5년이 지나서야 그런 방식을 고민하게 됐어요."

황인성도 처음엔 '맨땅에 헤딩'이었다. 대한바둑협회의 지원이 없을 때는 많은 바둑대회를 다니며 '마스터'급의 실력을 입증해야했고, 자신의 바둑 세미나와 강좌가 매우 가치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유럽 바둑인들에게 어필해야 했다. 협회의 지원이 있고서는 훨씬 도움이 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 이런 경우 흔히들 '의병활동'에 대한 '관군'의 지원이 시작되었다'라고도 한다.

황인성은 군대 시절을 빼고 총 5년을 유럽에서 전문 바둑인으로서 활동을 해왔다. 특히 2011년 말에는 세계화 사업 Wbaduk 담당자였던 이세미씨와 결혼해 2012년 1년을 부부가 함께 유럽에서 생활했다. 총 5년간의 성과를 무엇이라 보고 있을까? 가장 큰 성과는 유럽의 바둑팬들 사이에 바둑'시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럽이 두는 사람 자체가 적을 뿐 완전 백지가 아니었어요. 바둑 두는 사람들 자체로는 한국보다 체계적인 점이 많아요. 참가자들 대부분 어느 바둑대회에서 누구를 상대로 몇 승 몇 패를 했는지 기록이 되고 있어요. 1900년대 초에 독일바둑협회가 창설이 됐으니까 일단 한국기원보다 협회의 역사가 길잖아요? 또 우리로 치면 월간바둑이라 할만한 협회지도 1907년부터 시작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내가 왜 바둑에 돈을 내야하지' 하는 문제로 들어가면 조금 복잡해져요. 아직 그런 분위기가 없는 나라면 와서 바둑보급을 하려 해도 크게 힘이 들어요. 국민소득도 중요하지만 의식의 문제이죠. '바둑이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냐'하는 판단을 그들이 먼저 해야 하고, 두 번째로 다 큰 문제. '왜 바둑에 돈을 왜 내야 하는지' 그들 스스로 납득해야 하는 게 있어요. 제가 5년간 활동하면서 바둑팬이 아주 크게 늘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이 저를 바둑에 대한 마스터로 생각하고 저와 같이하는 세미나와 제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 당연히 대가를 지불할만하다고 판단하게 만든 거가 있겠죠."


▲ 황인성-이세미 부부, 유럽바둑 유소년 프로젝트를 들고 왔다.

○● '내가 해줄께'가 아니라 '같이 뭐를 해볼까'로 나서야

다시 한 번, 유럽사람들은 동북아 바둑 3국에서 건너오는 바둑인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실은 5년간 활동을 지속한 황인성의 성과가 여기에 있었다. 유럽바둑인과 힘을 합쳐 공동의 프로젝트를 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시혜를 베푼다는 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까지 다다른 사람은 많지 않다. - 보급 역사가 길었던 일본 바둑인 중에는 있을 것 같다 - 동양의 많은 바둑인들이 유럽 바둑계를 1년여 정도 겉돌다 본국으로 돌아갔었다.

"보통은 유럽에서 완전히 섞이지는 못하죠. 조그맣지만 바둑 조직자체는 튼튼한 경우도 많아서 은근히 나름대로 잘 즐기는 사람들이라서요. 우리가 바둑 좀 잘둔다고 생색내며 활동하려하면 그들에겐 되려 생뚱맞은 느낌을 줄 수도 있어요. - 너가 잘 두는거 맞는데 어쩌라고 - 그런데다 대부분은 '1년 지나면 다 너네 나라로 돌아 갈 거 잖아'라는 식으로 봐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랬으니까. 제가 계속 있으니까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졌어요. 그러면서 얘는 여기 살 거구나 하면서, 믿고 도움을 주는 거죠."

"'뭐가 필요한지 멀리서 대략 판단하고, 당신들은 그게 없으니까 내가 그걸 해줄께' 이런 식은 아니에요. 같이 해야해요, 기존의 체계적인 유럽 시스템과 같이 활동해야 효과가 높아요. 그렇게 섞여봐야 아이디어도 많이 나와요, 5년동안 비벼대며 살았던 경험, 보이는 것, 들리는 것, 그런 거로 해서 나오는 거가 있어요. 이제 그런 거를 할 수 있게 됐어요."

유럽 바둑은 '황인성'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됐다. 실력 위주, 이기는 바둑에 정진했던 황인성에게 그동안 잊고 있던 것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맨 처음 05년도에 봤던 것도 실은 '고스트바둑왕'의 열기 뿐 아니라 바둑자체의 매력이었을 것이다.

"저도 프로를 지망했던 연구생 출신이라, 저도 모르게 바둑실력으로 인격을 판단하곤 했어요. 그런데 유럽가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저는 이게 제 시야가 트인거라고 봐요. 사실 바둑학과를 다닐 때도 '교수님이 나보다 바둑이 약할 거 같으면, 저 사람이 도대체 내게 뭘 가르칠 수 있는 거지' 하는 못 된 생각을 버리지 못했거든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기와서야 완전히 깨닫게 게 된 거죠."

"그런 것들이었어요. 이들은 이 시간에 자신이 바둑을 즐긴다는 것에 집중해요. 바둑을 매개로 해서 친구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죠. 프랑스가 특히 그래요. 바둑이 가진 '매개, 매체'의 특성이죠. 사람을 자연스레 사귀는 것으로 활용하고, 바둑 두다가 지면 좀 어때'라는 식이에요. 독일은 개인적으로 파고드는 성향이 있죠. 바둑을 스스로의 '道',로 생각해서, 열정을 쏟아 붓는 그 자체로 좋아해요"

"그래서 바둑이 운동이랑 다를 바가 없어요. 땀 뻘뻘 흘리며 운동하듯이 운동 끝내고 상쾌하게 사우나하는 기분. 얼마나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살아왔냐. 이런 걸로 바둑의 가치를 평가하기도 하구요."

황인성-이세미 바둑부부의 결실은 이런 것들이다. 유럽인들의 공동체에 끼일 수 있게 된 것이고 그들로부터 1년있다 떠날, 바둑만 잘 두는 이방인이 아니라 그들 사회에 속해 있는 '바둑 마스터'로 인정받은 것이다. 또 이들부부가 소득수준이 높고 물가수준이 높은 유럽에서 오로지 바둑활동만으로 경제적인 근거를 마련한 것도 의미가 크다.



▲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이세미 씨, 특히 이세미씨를 아이들이 잘 따른다고

2013년 이들 부부는 비자갱신을 위해 한국에 들렀다. 그냥 온 것은 아니고 몇가지 계획과 제안서들을 들고 왔다. 한국에 들고 온 것은 무엇일까?

"2010년 월간바둑 4월호에도 비슷한 아이디어를 제안했어요, 그때도 그랬지만 '이건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같이 해야 하는 것이로구나' 느꼈었죠. 작년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일하면서 프로젝트의 토대를 마련했어요. 프랑스 그레노블 시의 '죠세' 선생님 때문이죠. 14급인 학교 선생님 '죠세'씨가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겁니다. 본인이 가르치는 학교는 물론이고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까지 몇 학교에서 바둑을 가르치는데 바둑반 학생 수가 다 합치면 70명쯤 되요. 프랑스에 있는 3개월동안 저희도 두 학교에 가서 바둑을 가르쳤는데, 진짜 보람되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

이세미-황인성 부부는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 몰려사는 학교, 혹은 공격성이 강한 아이들이 별도로 격리되어 수업을 받는 곳에서도 바둑을 가르쳤다. 아내인 '이세미'씨가 특히 이런 봉사활동을 좋아했다.

"오빠랑 둘이 있으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바둑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유럽은 복지가 잘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소외된 경우도 있거든요. 우리가 찾아가면 아이들이 생각보다 너무 잘 따라서 깜짝 놀랄 정도였어요. 바둑이 아이들과 정을 나눌 수 있는 매체가 되어서 더 좋았구요. 익숙치 않은 프랑스어 몇 마디와 바디랭귀지, 그리고 통역을 맡은 선생님들과 함께였는데 선생님들도 아이들 반응이 좋아서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자주 오기를 바라더군요."

이세미-황인성의 이런 공적인 무료봉사와 친화적인 바둑교육은 프랑스와 스위스 교사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부부의 바둑 세미나 활동(이건 유료다!)에도 현지 바둑 동호인들의 도움이 굉장히 컸다.

부부의 계획을 들었다.

"5년간 이곳에 있는 동안 유럽에 얼만큼 바둑보급을 했을까, 인구를 정말 얼마나 늘렸느냐, 정말 100명. 200명씩 뭉텅뭉텅 늘렸던 것은 아니에요. 물론 열심히 배운 사람들이 오래오래 바둑을 즐기겠죠. 그리고 이런 분들 중에 죠세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은근히 많고, 그런 분들이 자리잡은 도시들이 많아요. 그렇게 되면 현지인 교사가 바둑을 가르치는 거죠. 이런 분들을 한데 모아 바둑을 잘 가르치면 이게 정말 바둑보급이다 싶은 거죠. 제가 직접 어린이들을요? 가르칠수 있느냐? 못해요. 언어 때문에. 아이들은 영어를 못하거든요. 그렇지만 아이들의 교사들을 가르치면 이게 해결이 되요."

선생님들을 모아 가르치는 것인만큼 목표 수치도 확실하다. 3년간 노력하면 '액티브 바둑인구' '2200명 정도'를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바둑이 무슨 게임인지 알고만 있는 인구가 아니라, '액티브'하다는 게 중요하다. 숫자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액티브'한 인구는 매우 큰 것이기 때문.

"공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분들이 바둑을 좋게 보기 시작했어요. 바둑을 처음부터 비뚤어지게 이해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이 분들이 바둑을 제대로 알고 들어가면 더 많은 효과가 있을 거에요. 정말 '좋은 게임이고 동양에서도 4000년이상 사람들이 즐긴 게임, 일단 이 정도 인식을 할 수 있을 거고 학부모들에게도 그렇게 인식을 시키려는게 이 프로젝트의 목표에요. 바둑세계화 작업의 하나로서도 의미가 큽니다. 유럽 바둑을 위한, 유럽인의 바둑 보급에 '한국 바둑인이 같이 참여'하는 것이죠. 이곳에선 바둑은 'Go'이고 일본 문화와 캐릭터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에선 바둑(Baduk)이라고 하며 이렇게 좋은 일을 같이 한다는 것는 것도 이런 프로젝트를 통해 동시에 자연스럽게 알릴 수 있죠."

프랑스에서 죠세 선생님과 힘을 합쳐 학교교육을 매회 진행했던 것도 부부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시의 지원을 얻은 것이다. 시청 교육파트에서 이들 부부를 초빙해 교육을 맡기고, 바둑이 어린이들에게 교육효과가 있다고 인정을 한 것이다. 물론 그레노블시에서 죠세 선생님이 이리저리 발로 뛰었기 때문이고 죠세 선생과 황인성-이세미 부부가 호흡이 잘 맞은 것이다. 시청에선 바둑을 어린이 교육프로그램의 하나로 만들었고, 심지어 현지 방송매체에서 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부부가 프랑스에서 봉사 활동한 지역은 아프리카 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상대적으로 범죄가 많고, 팽개쳐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아이들이 바둑을 배움으로써 '집중력이 생기고 삶의 자세가 좋아지고, 케어가 된다,'는 내용은 프랑스의 TV매체가 주목할 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한 지역이 아닌 유럽 전체의 관심있는 교사들을 한 곳으로 모아 교육을 하고 통일된 교재를 만들어 주고 학부모들에게 간단하게나마 바둑을 긍정적으로 알릴 수 있는 팜플렛을 만들고 하는 것은 일 개인이 감당할수 없는 비용이 든다. 유럽 바둑인들이나 이들 부부의 무료봉사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될 수는 없다.

다행히 이 부분에 '바둑포럼'이란 한국의 단체가 관심을 가졌다. 바둑포럼은 황인성-이세미 부부의 활동을 관심있게 지켜봤고 이번 프로젝트가 바둑 인구를 상당히 늘릴 수 있다고 보고있다. 특히 바둑포럼에선 '바둑은 한국이 가진 좋은 컨텐츠며, 현실적으로 세계의 주류가 되기 위해선 백인들도 즐겨야 한다. 아직까진 그렇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는 입장이다. 이들 부부가 계획한 야심찬 프로젝트는 이 단체의 후원과 유럽바둑인들의 참여로 상당 부분을 구체화 시킬 수 있을 것 같다. - 일단 그렇게 낙관하고 시작한다. 2005년에 유럽에 처음 올 때 처럼말이다.



▲ 서로에 대한 신뢰가 해외에서의 오랜 보급활동을 지탱해주고 있다.

○● 바둑은 'KPOP'이 될 수 있을까?
마침 부부가 한국에 왔을 때, "이세돌이 3년 뒤에는 미국간다"는 게 큰 뉴스였다. 이세돌의 미국행은 미국 바둑 보급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세돌의 미래는 '황인성-이세미' 부부처럼 해외에 가족이 나가 정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조언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황인성은 이세돌의 미국 이민에 대해, 분명 '임팩트'가 있을 것이지만 이를 받아줄 어떤 시스템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보통의 바둑인들보다야 이세돌은 임팩트가 무척 강하겠죠, 이슈니까요. 그런데 어떤 시스템이 현지에서 뒷받침을 안한다면 6개월에서 1년정도 가면 그 임팩트도 점점 떨어지게 될 것이에요. 과거의 고스트 바둑왕을 생각해보면 정말 엄청난 것이었거든요, 이런 것도 지나가니까요. 보통의 '일반인들이 나도 바둑을 배워볼까' 하는 이슈가 생기는 것도 힘들고 그 이슈가 장기로 가긴 더 힘들어요. 내실의 문제가 있을 것이니까 가기 전에 준비를 잘 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황인성-이세미 부부의 프로젝트는 현지화된 것이라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성도 높다. 이런 과정이 쌓이고 쌓여 바둑이 'KPOP'처럼 확산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부부는 '수줍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기대가 커도 너무 크다는 생각이다.

"(가르치다 보니 알게 된 것이) 바둑은 아주 대중적이지는 않아요. 그보단 매니아적 게임이에요. 히카루의 바둑이 유행하는 것과는 분명 달라요. 그땐 만화를 보던 100명중 50명이 바둑을 몰라도 재밌게 봤어요. 일종의 패션이었죠. 바둑 자체는 분명 그런 일시적인 재미도 있겠지만, 취미 이상으로 가는 부분이 있어요, 만약 10명이 '인터액티브'하게 바둑과 연을 맺으면 그 10명은 끝까지 갑니다"

'K-POP'은 아니구나. 그럼 한국의 태권도처럼 가야할까? 서양의 체스는 바둑과 비교해서 어떨까? 부부의 대답은 일반적인 생각과 묘하게 차이가 있었다.

"태권도와 바둑은 비슷한 요소가 있을 거지만 다릅니다. 태권도를 흉내내기보단 바둑보급은 요가처럼 해야합니다. 고상한 느낌, 정말 좋은 것이라는 느낌으로 그렇게 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바둑을 고상하게 생각하는 게 실은 더욱 중요해요. 현재 유럽에서 바둑의 위상이 '고상함'이라 보지만 막상 닥쳐보면 그렇지는 않거든요. 물론 컴퓨터 업종 종사자분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고, 교사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 그래서 교육적 효과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 바둑을 동양의 '체스'로 소개하면 바둑이 무엇인지 일단 이해시키긴 편하지만 이 방법은 그리 좋진 않아요. 체스가 좋은 이미지도 많지만 서양인에겐 낡고 고리타분하고 어렵고 그런 느낌을 틀림없이 같이 주게되어 있거든요. 체스와도 비슷하지만 동양의 다른 매력적인 게임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해요."

이는 현재 유럽에서 바둑이 위치한 '매니아적인 하위 문화'에서 주류 문화로 올리기 위한 황인성-이세미의 전략이자 인식일 수도 있다.

"바둑이 무척 고급스럽다는 느낌 때문에 바둑을 접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느낌을 살려줘야해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주변 권유로 온 사람들은 재미 없으면 바로 가버립니다. 그들에게도 그런 고급스러운 재미를 주려고해요, 만약 2005년의 '고스트바둑왕' 같은 바둑열풍이 다시 분다면 절대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에요"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안놓치고 꾸준히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유럽 바둑인들과 소통하고 그런 시스템을 같이 만들어놔서 같이 공유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유럽에 있었어도 결국 튕겨져 나가기 때문이다.

(2편 이어집니다)

[취재 | 최병준, 박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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