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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선생님의 글

작성자고추잠자리|작성시간10.03.11|조회수177 목록 댓글 0

 

 

여류 바둑행.

女流 바둑行.

-책을 믿지 않는 곳에 책이 있다.

 

 

아마도 한국의 여성들중에서 가장 먼저 바둑을 기록한 사람은 동인홍(動人紅) 일 듯 하다. 동인홍은 고려시대의 유녀(遊女)로 '최자'의 보한집에 시 두수를 남겨 놓고 있는데 그중에 바둑을 주재로 한 시 한수가 있어 놀랍다.

 

동인홍은 13세기의 또 다른 유녀 우돌 (于乭)과는 다르게 생몰 연대가 명확하지 않는데 시의 내용으로 보면 고려초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12세기쯤의 여자로 여겨진다.

 

太守分營一局棋.

夢不知生死.

幸逢榛洧會.

芍藥贈如何.

買酒羅裳解.

召君玉手謠.

 

 

위의 시를 '이상보' '정비석'등이 해독을 한 바 있는데 무엇인가 답답한 구석이 있고 기(棋)자를 두고 바둑이다 장기다 하며 다투는 사람들까지 있어 실소를 금한다. 필자가 보기에 다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을 다투니 식자우환이 남의 일이 아니다.

 

 

태수께서 편을 갈라 바둑 장기판 벌이시니

진수 유수의 만남인양 만나게 된것 반가워라.

어찌 내게 함박꽃을 건네시는지.

술을 준비하고 치마단 풀려 하니

님 부르며 예쁜 손 흔든다네.

 

 

태수는 신라시대 지방 관직(삼국사기 경덕왕조 757년에 115명의 지방 태수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의 이름이니 이 시가 고려초 생산된 것임을 말해준다. 분영(分營)은 군대를 나눈다는 뜻이니 이곳에서는 편을 가르다고  일국(一局)은 한판의 바둑이며   일기(一棋)는 장기를 말한다. 局棋는 바둑과 장기를 함께 이른 말이다. 바둑을 둘 줄 아는사람들과 장기를 둘 줄 아는 사람들이 편을 갈라 바둑 장기판을 벌린것이겠다.

 

설문에 국(局)은 서두르다는 뜻으로 나온다. 바둑이란 뜻도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태수분영을 태수에게 지방 병마사가 찾아온 것으로 해석을 한다. 병마사는 고려시대 지방 위수사령관이다. 위수사령관이 군수급의 관원을 찾아가 바둑을 두는 것도 이상 하지만 나누다(分)를 아에 무시한 해독은 동조 할 수 없다.

 

동인홍은 자못 도전적이다. 유녀가 노는 여자이기는 하나 이렇게 노골적인 언사는 놀랍다. 동인홍은 술을 준비 하고 치마단을 풀 준비가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녀의 또 다른 시, 자서(自敍)는 창녀와 양가집 규수의 차이가 무엇이냐 묻고 있다. 참으로 거침 없는 여자다.

 

고려시대 바둑의 기록은 내외사(內外史)를 막론하고 나온다. 이규보는 19로라는 말로 당시대의 19줄판 바둑을 증언한다. 혹자는 고려시대의 바둑은 귀족들과 남성들의 전유물인양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은 자신만의 생각이다. 잔치 마당에서 고려시대 가장 하층 계급인 유녀가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바둑 을 두고 있는 저 모습을 보라. 바둑 두고 싶은 사람 바둑을 두고, 장기 두고 싶은 사람 장기를 두는 모습이 자못 흥미롭다.

 

향은 이장찬은 잔치집에서 바둑판을 준비 한다 했다. 올 해 고려대에서 나온 조선 시대 바둑화를 연구한 논문에서는 잔치집에 바둑판을 준비한것은 조선의 일상이었다 한다. 기생이란 말은 삼국시대 유녀로 부르다 고려말에 와서 기녀(技女)로 쓰기 시작한 말이다. 기생에 대한 이해를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정약용이다. 정양용은 기생이 양수척에서 나왔다고 한다. 연원이야 어찌되었던 기생의 연원은 슬픈것이다.

 

얼마전에 불국사에 갔었다. 분황사에서 나온 격자무늬전돌(15도)이 바둑판이 아닌듯한 생각이 있어 얼마간 고민을 하다가 불교안에 바둑무늬가 타당한가를 검토 하면서 그곳까지 가게 되었다. 무작정 불교관계 유물보고서인 '고고예술' 30년분량을 뒤적이다가 불국사에 바둑무늬가 있는 유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과정에 경북대 '조대식'의 논문에 탑전돌(塔塼乭)이라 부르는 정방형전돌이 삼국시대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안영희가 말하는 장략리 7층 모전석탑에서 나왔다는 바둑 파편(?)의 미스터리가 분황사에서 나온 격자무늬 전돌과 맞물려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고고예술'은 고고학의 발굴 보고서다. 보고서는 불국사에 있는 연화교(국부 22호) 위에 연꽃 무늬가 있고 열개의 바둑판이 연달아 있는 격자무늬가 있다고 하고 있었다.

 

연화교는 칠보교와 함께 국보다. 연화는 무량수전에 나오는 극락세계의 환생을 말한다. 부처님을 따라 극락에 다시 태어나 칠보로 된 연꽃 가운데 환생 하고 싶다는 염원인것이다. 과연 연화교위에는 8옆의 연꽃 문양과 열개의 바둑판 모양의 무늬가 있었다. 심하게 마모되고 입장 불가라는 제약으로 자세한 확인은 불가 했으나 여타 자료에서 그것을 확인하는데는 어렵지 않았다.

 

 분황사 15도 격자무늬 전돌이 바둑판이라면 연화교위에 있는 열개의 바둑판 모양의 무늬도 바둑판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쯤에서 필자는 허탈 했다. 오래전에 베트남에 갔을때 캄보디아 국경 부근의 사원에서 본 승려들의 옷이 온통 바둑무늬로 가득하던 것이 생각 났다. 결론은 작년에 분황사에서 발굴된 15도 바둑판(?)은 바둑판이 아니라는 심증이었다.

 

왜 아닐까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은 그렇다. 다시 동인홍의 시로 돌아가 보면 학문은 의심 하는 것에서 출발 한다는 기본에 도달 하게 된다. '태수분영일기국' 저 일곱자에 불과한 한시 한구절을 놓고도 갑론을박이 거듭 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렇다

 

조선 형리(刑吏)의 문초(조서) 기록.

-절도 사건을 둘러싼 골계와 혜학.

 

 

 

   (자료사진 -바둑시평 참조.)

 

 

(사진에 보이는 문초기록은 대전에 사는 오세남씨가 소장한 7쪽의 필사자 미상의 단편 자료다. 내용은 안변(함경도) 관아에서 있었던 (조선 후기로추정) 사또의 옷가지 분실 사건을 놓고 형리가 용의자로 지목된 기생 두명을 순차적으로 심문하고 엇갈리는 진술로 대질 신문까지 하여 윗사람에게 사건처리를 구하는 방식으로 되어있는데 뜻밖에 사건을 둘러 싸고 인근 고을인 문천군수의 치졸하고 엽기적인 성적 이탈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흥미를 끈다. 다만 원본의 표지가 누락된 관계로 심문의 조서의 기본인 육하원칙을 살펴 볼 수 없는 것이 흠이다. 그러함에도 '포청등록'이나 '추급안'등 기존의 조선시대 수사 자료와는 다르게 지방 관아의 수사 사건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특히 바둑 기록이 있기에 원문을 전량 한역했다.. 필자주.)

 

 

1. 모년모월모일. 기생 운진 (24세)을 문초하다.


 

너는 관아의 사환이자 행수기생(기생중 책임자)으로 관아의 옷가지와 이불등 의류 침구류등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지난날에도 도사의 도포를 분실하고 곤장을 맞은 적이 있는데도 이번에 백일장 행사를 온 문천군수의 걷옷과 바지를 잃어 버렸다.

범인은 너로 보이고 너가 아니라해도 다른 혐의자를 알것 같기에 문초하는 것이다.

 

(어리석고 용렬한 사람이 관아의 사환으로 있는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더구나 관기(官妓)로 있으며 사또의 보살핌을 받아 행수기생이 된 몸이라 아침 저녁으로 관아의 물품들을 관리하고 살피는 것이 임무이나 지난번 신.구 사또의 이퇴임식날  있었던 사건은 나와는 관계 없는 일입니다. 전임 사또는 순박한 분이십니다. 그러한데도 저희 기생들을 보자 풍류객을 자처 하며 수줍어 하는 기생들을 방으로 끌어들여 분탕질에 열중 했으나 내가 볼때에 어설프다못해(?) 설익은 것이었습니다.

자칭 먹이를 본 맹수의 자세와 먹이가 도망칠까 은밀히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초리로 노려 보기도 했으나 여자와 살정을 댈때면 정신을 못차리고 구름과 비가 충돌 하듯 거친 비명과 신음이 창밖을 어집럽히기 일쑤였읍니다. 한마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군요. 이런 경황에서 사또가 바지나 도포 한벌 잃어버리는 것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때 나는 방기(房妓)가 아닌탓에 다른 곳에서 잠을 잤는데 갑자기 도둑으로 몰리니 자고 일어나 그믈에 걸린 꼴입니다. 참으로 술은 김가가 마셨는데 이가가 취한 격이고 들판의 중이 짠 게를 먹었는데 산에 사는 중이 물을 켜는 모양입니다.

안변(安邊)이 크다고 하나 원래 기생수가 적고 반반한 인물도 적습니다. 문천군수(안변에서 문천으로 이임해간듯)는  풍정이 지나치고 안목까지 높아 함흥 일대의 여러 고을의 기생들까지 수탐 하여 불러 들이고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형식(?)으로 여인들을 탐하다가 나까지 영을 받아 수청을 든 일이 있읍니다.

엽색을 즐기다 단명을 하거나 건강을 헤치는 일이 허다한데도 전임 사또는 멈추지 않다가 끝내 내가 여자를 조달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건 내가 관장을 박대한것은 아닙니다.

돌아보면 하찮은 옷가지를 잃어버렸다고 전임 관아에 고변을 넣어 일을 이렇게 만든것도 그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난 7월7석날에 있었던 문천군수 행차후에 또 옷가지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내가 아랫사람으로 의심을 받은것에 불과합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고 바늘도둑 소도독 된다는 속담등이 있어 더욱 난처하기도 합니다. 부처밑을 더듬으면 삼검불이 나오고 상추밭에서 대변을 보는 것은 재범(再犯)의 우려때문인데 아닌땐 굴뚝에 어찌 연기가 나겠습니까.  혼자서 고민을하다가 그날 문천군수를 동행한 차례(次禮)가 미심쩍기에 한밤중에 비를 무릅쓰고 백리길을 달려가 기생들방을 뒤지다가 바로 그 옷가지를 찾았습니다. 관아의 물건은 함부로 훔치기 힘듭니다. 겹겹이 보는 눈이 있고 지키는 아전들의  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통이 없이는 안되는 것이지요. 차례는 문천군수와 형부 처제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입니다. 차례를 잡아다  조사하면 나의 억울한 죄가 풀어질듯 합니다.)

 

 

 

2.    다음날.  기생 차례(次禮.23세)을 문초하다.

 

수청기생 운진이 진술하기를 운진이 문천 관아에서 찾아낸 옷가지를 내가(차례) 훔친것이라 하였고 또 내가 문천군수와 형부 처제라 부를 정도로 친하다 하며 의심을 한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관아의 관비이고 문천군수는 한양의 사대부입니다. 어떻게 조금 친하다 하여 방종을 떨겠습니까. 그리고 관아의  내밀한 방에 있는 군수의 옷가지를 훔쳐 문천 관아의 기생들방에 놓아 두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은연중 여기까지 이르렀고 문초까지 받는 입장이니 낱낱이 실토를 하겠습니다.

먼저 내가 문천군수와 각별하다 하는 것은 나의 언니 때문입니다. 문천 고을에는 아미산과 옥녀봉이 있어 맑은 산과 물이 깊기에 미녀들이 난다고 합니다. 수목이 울창하여 서시(西施)가 태어나고 정기가 모여 '달기'가 태어난다하는 이치겠습니다. 나의 언니가 그렇습니다.

침착하고 고상하고 자태가 얌전하니 이름답기가 그림같습니다. 마치 고기가 물속을 노니는듯 하고 기러기가 강가에 앉은듯 언니의 기품은 빼어났습니다. 백옥한수(白玉寒水)보다 더 곱상한 언니이기에 문천군수의 사랑을 받았고 좋은 날에 인연을 만들어 신혼을 즐기다가 뱀꿈을 꾸어 딸까지 낳았습니다.

아내를 염려하는 사람은 은장도를 생각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처가의 기둥도 사랑한다 했으니 내가 문천군수와 형부 처형 한다해서 무슨 잘못일 수 있습니까.

속담에 돌로치면 돌로 때리고 메로치면 메로 때린다 했으니 '예양' 은 '지백'에게 예로(두 사람다 춘추시대의 협객)대했고 여희(如姬)는 자신을 알아주던 공자에게 죽음으로 갚았으니 이 모두 은과 예를 아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문천군수는 원래 습성이 시와 술을 좋아하는데 여색을 밝히는 것은 고질적입니다. 관원들과 공무를 나누는 동안에도 술과 시로 시간을 보내며 기생들을 불러 아득한 회포를 풀고는 했습니다. 비유하면 바둑을 두며 하잘것 없는 잡새들을 생각 하고 술잔을 받으면 향분 냄새부터 느끼며 시를 읊조리면서 벌써 여자와 운우(雲雨)의 뜨거움을 생각하는 지경에 이른자입니다.

내가 미녀들을 뽑아 그에게 대어 주는 일로 시간을 보내면서 평소 여자들에게 질투와 투정을 일삼는 문천군수를 잘 압니다. 아마도 옷가지일도 무엇인가가 마음에 들지 않은 문천군수의 헤꼬지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로 생각 됩니다.

잘 살펴 처리해 주십시오.

 

 

 

3.    모일(某日)  운진 차례를 다시 조사하다.

 

다시 문초하기에 답합니다. 이번 옷가지 사건은 이미 다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당모자(唐帽子)도 잃어 버렸다 하니 이건 그날 일이 문천군수가 장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두 사람이 즉각 문천 군수에게 편지를 써 모자는 또 무엇이냐 따지자 문천군수는 니들 기생들이 나를 박정하게 대하고 멋적게 하여 조금 타박을 하니 이런 해꼬지를 한것이 아니냐며 빈정거리기만 했습니다. 그냥 희롱삼아 작난친것인데 일이 이모양이 되어 비난을 사게 되었으니 그칠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천군수의 답변대로 우리들 기생들은 그를 그리 박대하지 않았습니다. 당모자 또한 사소한 것입니다. 옷가지나 당모자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문천군수는 수법이 교모하고 생각이 민첩하여 재임기간에도 물건을 취하는데 구애됨이 없이 조심스럽거나 눈치 볼것도 없이 마구 취하여 관아에 실오라기 한줌 남은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박정하고 무미하기로 따지면 그를 당할 사람이 없는데도 오히려 우리들을 탓하고 욕하니 적반하장이라 하겠습니다. 마음이 굽은자가 홍화(弘化)의 문을 넘고 바둑에서 선수(先手)를 쓰는 자는 반드시 열두벽을 만나게 된다했습니다. 가는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고 되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문천군수에게 하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보증하건데 문천군수는 지난번 함흥에서도 관아에서 우연히 마주친 기생을 밤을 핑계로 마구잡이로 욕을 보이고 관아에 속한 여자들을 마구 불러내어 음탕한 짓을 일삼았습니다. 특히 숙소에서는 자신의 친한 친구와 함께 기생 한명을 불러 둘이서 욕을보여 사람들 앞에서 똥을 눟는 봉변을  보게 하였고 행수기생을 친구와 더불어 다시 욕을보이는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더구나 한기생을 보고 밤을 이용하여 기생들의 방을 들어가 무릅으로 기어 다니다가 다른 여자의 다리를 쳐드는 일로 웃음 거리가 되는등 필설로 형용하기 힘듭니다.

말은 천리를 가고 방(榜)이 길가에 붙으면 지나는 사람마다 보고 전하여 모두 알기 마련입니다. 이 행위 하나만 보아도 우리들 기생의 처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습니까.

 

-이로볼때 가마솥밑이 검은지 살필 필요 없고 내가 노래 하는데 사돈이 선창을 한다면 다들 웃을일로 보입니다. 각 개인의 말을 상고해 보건데 운진의 죄는 가볍고 차례 또한 그러 하니 도둑에는 살필바가 있고 허물에도 정리가 있기에 정상을 참작할만 합니다. 도둑은 용서할 수 있어도 간음은 용서 할 수 없으니 이점을 잘 살펴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도사(都事)께 보고드립니다.

 

*도사(정5품관) 감영에서 근무하며 각 관아를 순회하며  재판을 담당.

*당모자. 조선후기 청에서 전량 수입해 오던 양털로 만든 모자. 당시 최고의 상품이었고 유행 품목이었다. 이로볼때 영정조 시기의 문서로 보인다.

 

왕필과 이창호.

왕필과 이창호.

-천재들이 사는 법.

 

 

경방은 상하사방고금왕래라 했고 반고는 엉뚱하게도 바둑판에서 땅의 모습을 보고 바둑판의 줄에서 덕의 본질이 신명임을 알았다고 했다.

(上下四方古今往來. 局必方正象地則也.道必正直神明德也. 경방역전, 반고기국문)

 

경방은 우주라는 절대의 공간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3차원의 자각을 했고, 반고는 이 3차원의 자각을 바둑판으로 표현하려 했다. 표현은 언어와 문자라는 상징과 기호 체계속에서 눈사태 정석마냥 천변만화 한다.

 

동중서, 정현, 묵자, 공자등 언어 학자들은 말로 사물을 기르키면 名이라 했다. 名이 곧 字라는 것이다. 설문은 名을 스스로 부르는 것이라 한다. 임의광도 이에 동조를 했다.

 

좌전에 臣妾多逃라는 말이 있다. 신하들과 첩들이 도망 갔다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글귀다. 다시 좌전에 男爲人臣女爲人妾이 나온다. 신첩다조로 본다면 이 말의 뜻은 남자는 신하고 여자는 첩인것일까.

 

설문(설문해자)은 동중서, 묵자, 공자,정현등이 말한 名이다. 명은 사전이란 뜻이다. 이 설문은 신과 첩을 이렇게 말한다.

 

臣- 牽也事君也.象屈眼之形.

 

정현은 臣謂因孚가 臣이다 해석한다. 臣은 곧 포로로 잡은 노예를 말한다. 첩은 포로로 잡은 여자 노예다. 臣과 妾을 포로로 잡은 노예로 해석 할 때  좌전의 저 두 문장은 명쾌해 진다. 춘추시대 臣 妾 畜은 같은 의미였다. 남자 노예,  여자 노예, 가축은 같은 의미다.  臣과 妾이 신하와 데리고 사는 여자로 격상된 것은 따질 일이 아니다. 노자는 천재가 있다고 했다. 설문은 천재를 특별한 존재라 한다.

 

구당서는 천재를 말한다. 열 살 된 왕자가 논어를 이해 하니 천재가 아니냐는 것이다.  율곡행장에는 율곡이 다섯살에 시를 지었을 정도로 천재라 한다. 천재는 하늘이 낸 사람이란 뜻이고  어린 재목들에게  세상의 기대를 당부 하는 덕담으로 곧잘 쓰이는 말이다.

 

어린 재목에게 바라는 세상의 덕담이 천재라면, 어린 나이에 세상의 기대의 정점에 선 사람을 천재라 일러 과찬이 아닐것이다. 나는 역사속의 모든 인물들 중 천재 두 사람을 꼽으라면 왕필과 이창호를 꼽 겠다. 이 두사람은 20대 초반에 한 세계를 완전히 제압했던 사람들이다.

 

왕필(226-249)은 위진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노자주'라는 저서를 통해 오늘날 세상에 전하는 노자 담론의 9할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그 어떤 학자가 노자를 운운 해도 결국은 왕필의 보법안에서 좌충우돌 할 뿐이다. 왕필은 또 다른 저작 '주역주'를 통해 4세기에 이미 상수주역의 견강부회와 치졸성을 털어 내는 혁명적(?)인 주역관을 펼쳐낸다.

 

-올무는 토끼를 잡기위한 목적이니 토끼를 잡으면 올무를 버려도 좋고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위한 도구니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버려도 좋다. 언어는 象의 올무이고 象은 意의 통발이다. 하여 언어에 집착 하면 象을 얻기 어렵고 象에 집착 하면 意를 얻기 어렵다.

 

得意忘象.

저 유명한 득의망상은 동양 철학사의 한 축으로 군림 하며 아직도 전혀 식상 하지 않은 담론이다. 노자와 주역이란 담론안에서 왕필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학문적 업적을 이룬 그가 죽은 나이는 23세다. 왕필은 23세에 이미 공자를 심각 하게 몰아 부치며 유가보다 학문적 우위에 섰던 사람이다. 적어도 당대에 그를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면에서 현대를 살고 있는 이창호도 예외가 아니다. 이창호의 23세는 바둑이라는 세계안에서 천의무봉이다. 명징함과 조화로움으로 현대 바둑의 아버지로 통하는 오청원과 쾌속행마로 질풍노도했던 조훈현도 '잠식완색'의 鈍刀의 그것에는 부족했다. 바둑이 스포츠의 범주에 속하는 탓에 20대 초반이 전성기(?)라는 인식은 하지 말자. 이 또한 이창호의 출현으로 생겨난 말에 불과 하다.

 

이창호가 득세를 하기전에 바둑은 여타 분야와 마찮가지로 3-40대에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었고 실재로도 그랬다. 그러나 이창호는 달랐다. 11살 또랑 또랑한 눈으로 프로의 문턱을 넘었고 그 때 부터 왕필의 23세까지 일방독주였다.

 

나이 23세면 대학을 졸업하던지 겨우 군대를 다녀온 나이로 자격증이다 취업 시험이다 공사가 다망할 때이다. 그런데 왕필은 이 나이에 동양 2천년 철학사의 주역이 되었고 이창호는 아에 바둑의 神이 되어 버렸다. 이 두사람은 인생을 천년 만년 살 필요가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준 사람들이다.  왕필은 요절을 한탓에 아쉬움이 있고 이창호는 30대에 와 산보를 하고 있다.

 

이창호는 산보중에 수많은 책을 읽고 있는 모양이다. 잡식성 도서로 알려져 있다. 요즘에는 주역을 읽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창호를 왕필에 비교하는 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바둑과 철학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바둑과 철학은 서로 통한다. 특히 동양 철학이 그렇다. 어떤 사람은 작취미상에서 바둑과 철학을 말하기도 하지만 바둑과 철학은 외연과 내연에서 분명 궁합이 맞는다.

 

하여 이창호 국수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기왕 산보에 나섰다면 여유롭게 충분히 하시라고...

바둑계의 책임이고 뭐고 그런것 잠시 접어 두고 한 이 삼년, 아니면 몇 년 더 편한 산보를 하면서 편한 휴식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가 다시 등장 하여 바둑계에 쓰나미를 한 번 일으킨 다면 아에 이창호는 苦山(삼황오제가 살던 곳)의 碁神이 될것이다.

문용직의 주역의 발견.

(서평)   주역의 발견.

-주역에 빠지지 말고 주역 밖에 나와 놀아라.

 

 

귀신이 귀신의 일을 말한다.

 

 

전국시대 유적지인 호북성 강릉 천성관에서 나온 '초간'에 '반유'가 갈대풀로 점을 구해 주역 쾌괘와 서합괘를 얻고 점괘를 해석한 기록이 나온다. 위나라 유적지인 '목천자간'에는 송괘를 말하는데 '초목과 연못이 성하니 정공(正公)을 바로 하면 군사의 일이나 가정의 일, 사냥일이 길하다'고 한다. 오늘날의 주역의 괘와는 함유와 내용이 달라 주역을 당혹시킨 일례다.

 

나는 이것을 문헌학을 고고학이 교정을 한 학술용어라기 보다  '귀신이 귀신의 일을 말한'것으로 본다.  주역이 산자와 죽은자의 사유의 결집이고 그 결집의 과정에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의 인위적 가공이 가해져 오늘날 아무도 모르는 혼돈의 블랙박스가 된 것이라면, 오늘날의 주역은 문자 그대로 귀신의 담론이나 귀신의 사유가 된지 오래라 할 수 있다.

 

고대에 무(舞)가 있었다. 샤먼은 이 무를 행하며 주(繇)를 했다. 무와 요는 舞와 樂이겠다. 이 무와 악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것이 사(史)다. 이것이 무에서 사(史)가  악(樂)에서 사가 나왔다는 말이다. 사(史)는 일종의 기호다. 문자라는 그것말이다. 샤먼은 史가 있기전 무와 악을 독점 했다. 그러나 사(史) 곧 문자가 나오면서 샤먼의 천지의 비밀은 세상의 것이 된다. 이것을 '회남자'는 이렇게 기록 한다.

 

-창힐이 문자를 만들자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그날 귀신이 목을 놓고 울었다.

 

그랬다. 귀신과 세상 사이의 은밀한 비빌을 샤먼 혼자서 독점 하던것을 문자가 나와 비로서 세상에 공개된 사연을 회남자는 창힐을 들어 말하고 있다. 주역은 바로 이 샤먼들이 행하던 주문을 결집한 책이다. 샤먼은 한 두 사람이 아니었고 그들의 이름도 전하지는 않는다. 이곳에서 복희씨, 문왕, 무왕, 성인이 어쩌구 하는 이름을 달고 주역사는 동양 2천년사를 쓰게 된다.  이 주역사에 맹희, 경방, 위백양, 정현, 왕필, 서중서,공양국, 정이천, 주자등이 역해(易解)라는 이름으로 문풍을 날린다.

 

그들은 주역은 성인이 만든 것이라 말한다. 성인이 만들었기에 주역은 천지자연의 근본원리가 내재 되어 있고 잘 깨달으면 성인도 되고 귀신도 된다는 것이다. 동양사의 천재들은 누구나 한마디씩 주역을 논했다. 그들의 논림의 바다가 만든 혼돈(?)의 사상이 바로 주역이라 할 수 있다.

 

 

주역이 모든것이 아니다.

 

 

주역이 한대 이후 상수와 의리라는 양 날개를 달고 동양 2천년사를 날아 오면서 뿌린 씨앗은 숲이 되고 쟝글이 되어 세상에 존재 하는 '주역해서(周易解書)'만도 능히 역림(易林)이 되었고 상수 의리의 씨앗 몇점 얻어 키운 한국안에서의 주역만도 수백종이 족히 될 정도다. 그러나 그 주역해서라는 책들의 실상을 보면 참담하다. 주역의 경과 전을 대충 해석하고 옛 주역을 재소개 하는 일색이여 주역의 근본이 의심되는 이 시대의 주역으로는 도무지 무용(無用)한 것들뿐이다.

 

기왕의 주역에 디자인을 달리 하고  필자 이름만 달면 새 주역이 되는 이상한 책 내기는 개탄스럽다. 이런 주역의 풍토에서 문용직의 '주역의 발견'은 일대 사건이다. 문용직은 상수와 의리라는 덪칠로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오늘의 주역의 모양세에 직접 칼을 들고 재단 하겠다고 나선다.

문용직은 상수와 의리라는 전근대적인 이데오르기로 쓰여진 주역을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고증과 분석을 통해 주역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 줄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용직은 주역을 알겠다고 고시 공부하듯 파고드는 우를 경계한다. 주역을 알겠다고 종교적으로 몰입하는 것도 경계한다. 그런 극단으로는 결코 주역을 알수 없다고 한다. 쉬운 방법이 있단다.

 

-주역을 알려면 주역속을 헤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주역 밖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밖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주역을 아는것이 아니라 주역에 관해서 (about)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타(meta) 주역의 관점을 지닐 필요가 있는 것이다.

                                                    (주역의 발견 53쪽)

 

 

문용직은 주역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주역속에 층층히 쌓여 있는 온갓 몰이해와 견강부회와 고질적 미신의 습성을 벗어 나야 한다고 한다. 그 방법으로 주역을 연구 하는 과정에서 나온 학계의 성과와 고고학적 유물들의 재 해석을 내놓는다. 그 해석들중 주목할 것이 있다.

 

 

가. 점서는 독립적이다.

나. 8상은 본래 없었다. 8괘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점사는 8괘와 8상에서 나온것이 아니다.

 

 

주역의 발견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이 이 두가지로 보인다. 가)항은  주역의 64괘가 주민등록 번호처럼 일사분란하고 상경 하경이니 선천수 후천수 하며 논리적이지도 않으면서 비상식적으로 복잡 하기만 한 상수 주역에 대한 한 방이다. 나)항은 태극이니 8괘니 하며 상수 의리할것 없이 절대 종교화된 모든 주역에 대한 라스트 한방이겠다.

 

이제까지 주역을 알았던 독자들에게는 놀라운 일이다. 충격적이다.  그러나 이 한 방 두 방이 제대로된 주먹인지는 조금 따져 보아야 겠다. 가)항은 이미 '고형' '이경지'등이 괘상, 괘효사, 효사와 괘등이 각기 필연적인 논리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했고 나)항은 결국 가)항의 연장선에서 지금도 논의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용직이 말하는 음양이 주역의 원시의 모습이 아니란 말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일이다.

 

장정랑의 논문 '백서 64발'에 보면 서수(筮數) 1과 6이 이미 부호의 성질과 함께 기수와 우수라는 음양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 것을 보면 말이다. 물론 음양이란 한자와 의미가 홍범과 좌전에 와서야 특정 되어 있음은 차치하고 말이다.

 

어쨌든 64괘는 샤먼의 점사들이 결집 되어 주역이 만들어질 때 생긴 것이기에 8상이니 8괘니 하는 것들도 그렇게 의미를 둘 수 없다는 것이 문용직의 주장이다. 문용직은 그 증거로 마왕퇴 백서본 주역을 든다. 마왕퇴 백서본 주역은 금문본(통용본) 주역과는 64괘의 배열과 괘의 한자가 굉장히 많이 다르다. 8괘의 한자는 전부 다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배열과 한자의 쓰임이 다르다 하여

이 두 주역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왕퇴본 주역이 통용본 주역 보다 더 유교적으로 손이 보아진 것으로 밝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문용직이 지적하는 64괘의 맹목적 종교성은 백번 옳은 말이다. 주역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거의 알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8상과 8괘의 논증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64괘의 배열에 감탄한 유럽의 수학자 '라히프니찌'는 주역의 역배열에서 힌트를 얻어 '2진법의 원리'를 발견 하지 않았던가. 이 말은 라히프니찌 자신이 한 말이다.

 

나는 문용직의 주장에 이의를 달 생각이 없다. 그럴만한 자리에 있지도 않다. 그러나 문용직의 주역의 발견을 읽고 놀란것은 사실이다. 문용직은 말한다. 주역에 빠지지 말고 주역 밖으로 나와 주역을 보라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문용직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조금 더 주역 안에 머물며 강화된 주역을 지도 해 달라고... 그리고 '주역의 발견' 대단 했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바둑의 노래

19로에서 길을 잃다

2010-03-14 조회 2876    프린트스크랩

 

이청 씨는 소설가다. 소설로 등단한 작가다. 그러함에도 어느 순간 그의 관심은 온통 바둑사에 쏠려 있다. 시쳇말로 돈도 되지 않는 일에 골수를 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돈을 생각했다면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 좋아서...그저 바둑이 좋아서 '피끌림'마냥, 운명처럼 발품 팔며 고서를 뒤지고 여러날 밤을 하얗게 태우며 번역하고 퍼즐 맞추듯 시대를 추적하고 있다. 그래서 종종 나는 그를 말할 때 "하늘이 바둑계에 보내준 귀인"이라고 한다. 잃어버린 우리의 바둑사, 화석조차도 구경할 수 없었던 우리의 옛 바둑문화를 순전히 한 사람의 노력 덕분으로 다시 보는 행운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연초면 바둑대상이라는 잔치를 성대히 여는데, 줄줄이 주는 공로상에 이런 사람 이름 하나쯤 끼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저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유폐되었던 우리 바둑시대, 바둑사를 이만큼 복원한 사람이라면 그 신명장단에 멍석 정도는 깔아줄 때도 된 것이다. 세계 일등이라고 자부하는 대한민국 바둑계라면 말이다.

한동안 잠적했던 이청 씨가 언제나 그러하듯 불쑥 도깨비처럼 연락해 왔다. 새로운 자료를 발굴했다며 얼른 코너 하나 만들어달라 이르는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그가 또다시 선보이는 [조선의 노래 바둑의 노래]는 조선시대 바둑을 좋아했던 한 사람의 일기-<갑오음청록(甲午陰晴錄)>을 번역한 글이다. 한학에 해박하지 않으면 번역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단순 번역이 아니라 이를 현대인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맛깔스럽게 풀어써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소설가의 필치와 바둑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엄두도 못낼 작업이다. 

코너를 칼럼난에 배치하긴 하였지만, 칼럼이라 해야할지 소설이라고 해야할지. 굳이 성격을 규정한다면 '논픽션칼럼'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칼럼으로 받아들여도 좋고 소설로 읽어도 좋다. 무엇이건, 이러한 글쓰기 또한 우리 바둑계에 처음 선보이는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가 처음 접하는 바둑사료라는 것이다. 일주일에 2~3회, 당분간 나는 조선시대 한 바둑마니아가 부른 '바둑의 노래'를 듣는 재미에 빠질 터이다. -정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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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서 우는 짐승

 

밥들고 찾아갔다가 돌아와서는

슬프디 슬프게 혼자 운다네.

(獨婦餉糧還哀哀舍南哭)

고대에  한 여자가 있었다. 광산 부역에 끌고가 진종일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식은 밥 한덩이 주지 않던 관아의 처사는 국가의 횡포다. 부역자들은 옥을 캐는 광산에서 진종일 일하고 지붕도 없는 더불 속에서 잠을 잔 모양이다. 부역자들을 면회하고 온 가족은 절망한다. 주먹밥 한덩이를 만들어 면회를 다녀온 여자의 슬피우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던 모양이다.

위응물(韋應物)이 목도한 이 시(詩)는 천지를 미친 듯 주유하며 돌아갈 귀로마저 잊었다던 대복고(戴復古)의 차디찬 냉기와,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했던 이탁오(李倬悟)의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기상 속을 맴돈다. 독한 언어만이 메시지가 되지는 않는다.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너도 나도 따라 짖어댔다. 누군가가 왜 짖냐고 물어오면 그냥 중의 주문마냥 웃었다.-이탁오.

 

인간은 누구나 세계 속에 놓여진 자신과 자신 속에서 분열하는 정신세계의 굴절과 대면한다. 세계는 마주치는 자기자신의 자아로 파악되기 마련이다. 개인의 파악은 이미 굴절을 담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의 색안경 말이다. 이탁오가 말한 오십 이전의 개였다는 의미는 오만과 편견 그리고 맹목으로 무장했던 자신의 반성문으로 읽힌다.

위응물, 대복고, 이탁오 등은 모두 왜(?)를 묻던 사람들이다. 그림자를 보고 맹목을 외치지 않겠다던 사람들인 것이다. 그만큼 맹목을 벗어나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필자도 그 맹목에 빠져 사는 사람이다. 바둑사가 궁금 하다는 가장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한 행보가 이제는 너무 멀리(?) 왔다. 산책이 일이 되었다는 것 그것도 부담이다.
 

갑오음청록(甲午陰晴錄)의 발굴

'음청록'은 일기라는 뜻이다. 이 일기는 지남규(池南奎)가 1894년 갑오년에 쓴 일기로 동년 4월13일부터 다음해 2얼1일까지 대략 10개월 분량으로 앞뒤가 망실된 상태로 필자의 눈에 띄었다. 소장자의 허락을 받아 복사를 하고 해제를 하는 과정에 일기의 주인공이 바둑마니아였음을 알고 일기 전체를 번역했다.

지남규는 한강 동쪽에 살던 상인으로 잡품(雜品)을 취급하며 생업을 유지하는 한편 취미로 삼은 바둑이 부업(?)일 정도로 빠져 있던 사람이다. 10개월여의 일기 곳곳에 바둑에 대한 기록이 있어 바둑마니아를 자처하는 필자를 감동시켰다.

일기는 초서로 되어 있고 지명, 호, 전거 등이 난분분하여 내용파악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수십년 한문에 빠져 살았았으면서도 한문은 언제나 함들다. 중언부언 원고 4백자 분량의 일기를 번역하면서 필자는 많은 공부를 했다. 특히 1894을 앞뒤로 수십년간을 살았던 지남규의 증언으로 그 시대의 정보에 도움을 얻었고 근대와 현대 사이에 장막으로 가려진 바둑사를 엿본 것은 큰 수확이었다.

필자는 지남규의 일기를 공개하면서 필자가 찾아낸 수십 점의 조선의 바둑기보를 함께 소개하면서 미욱한 칼럼난을 채워갈까 한다. -이청

 

바둑의 노래

1회/ 바둑두러 한양 간 사람

2010-03-14 조회 2045    프린트스크랩

 

아침 흐리고 오후  갬.

음청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는 거의 죽은 문자가 된 한문 초서로 쓰여진 한 사람의 일상이 옛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서랍 속에서 잠을 자다 어느날 망실의 시간을 찢고 불쑥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인다. 1894년 4월13일로 가보자.

 

4월13일. 아침흐리고 오후 갬(朝陰晩晴).

경상 박점(朴店)에서 그릇 20바리(馱)를 받았다. 양근분원(도기공장)보다 비싸다. 땔감 15냥어치를 사고 김(金)이 고을 형리(刑吏)와 함께와 늦게까지 바둑을 두었다.


4월14일 맑음.

일꾼 4명을 얻어 밭일을 시켰다. 술값 국수값으로 4냥을 주었다. 김이 와 어제의 복수를 청하기에 일이 바빠 내일로 미뤘다. 상점이 성업을 이뤄 50냥 남짓 이익을 보았다.


4월15일. 종일 비, 바람도 불었다.

김이 오지 않았다. 한양(京)으로 바둑을 두러 간 모양이다. 기보(碁譜)를 보며 앉았다 섰다 했다. 늦게 술 5전어치를 사와 먹고 잤다.

 

음청록은 모두 이런식이다. '지남규'의 하루의 일과는 장사하고 집안일을 돌아보고 취미를 즐기는 지극히 소박한 생활인의 모습이다. 일기 하루 분량은 원고 한장에서 대여섯장 정도로 간단 간단하다. 지남규는 한강주변(송파 양주)에서 비교적 큰 상점을 운영하며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상인이다. 그릇을 한양상인들과 양주분원 등에서 도매로 사와 소매를 하는 식이다.

땔감을 15냥어치 샀다고 한다. 일기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술, 땔감, 쌀, 담배, 고깃값이 재미있다. 일기에 쌀 한섬(10말)이 150냥에서 250냥을 오르내리는 가격에 비교해 보면 품삯이나 땔감 등의 가격은 엄청나게 낮다. 상대적으로 쌀값은 거의 금값 수준이다.

지남규의 상점에 김(金)이란 사람이 찾아온다. 지남규와 가까운 곳에 살던 사람으로 바둑도박에 빠진 인물이다. 김이 형리와 함께 왔다고 한다. 형리는 고을 관아의 '형방'에 근무하는 포교다. 지역의 포교가 무상으로 출입하는 것만 봐도 안정된 지남규의 생활이 엿보인다.

그날 바둑은 지남규가 이겼다. 김이 다음날 복수전을 하겠다고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지남규의 상점이 바빠 대국을 다음날로 미룬다. 상점영업이 잘되어 50냥의 이문이 남는다. 50냥을 오늘날의 쌀값에 비추면 큰돈이 아니지만 당시 여타 물가에 견주면 상당한 액수다. 다음날 온다하던 김이 나타나지 않는다. 한양으로 바둑을 두러 간 모양이다 했다. 김(金)의 심상치 않은 포스가 느껴진다. 지남규는 '기보'를 보며 바람불고 비오는 날의 무료를 달랜다.

지남규의 3일간의 행적은 (바둑인의 입장에서) 흥미롭다.

바둑을 즐긴다. 내기 바둑꾼이 찾아온다. 내기 바둑꾼은 한양까지 바둑을 두러 원정을 다니는 사람이다. 비오고 바람부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지남규는 이런 날이면 기보를 꺼내 든다. '기보'라고 했다. 우리는 지남규가 말한 기보가 궁금하다. 1894년 4월 지금으로부터 117년전 송파 양주부근에 살던 지남규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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