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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바둑계 (한상대 교수님 께서 쓰신 글에서)

작성자고추잠자리|작성시간09.10.27|조회수1,305 목록 댓글 1


▲ 코알라(Koala)


▲ 로젤라 (Rosella). 내가 아침에 우리 집 베란다에 나가면 이 놈들이 날라 와서 내 머리와 어깨에 앉는다


▲ 쿠카바라(Kookaburra) 웃는 소리가 사람 같은 새(Laughing bird)


▲ 항구 베란다에 온 코카투(Cockatoo). 훈련시키면 말을 잘 한다. 고기 맛이 없고 우는 소리가 시끄럽다


▲ 멜본 시내 한 복판으로 흐르는 야라(Yarra) 강


○…한인 바둑회

호주 첫 한인 바둑회는 멜본에서 생겼다. 1976년에 내가 조직했다. 3 형제가 태권도 사범으로 수 천명의 제자를 두어 국위를 선양한 “Rhee’s Taekwondo” 맏형 이종협 사범이 초대회장이 되었다. 나는 사범이 되었다. 그러나 멜본 한인바둑회는 회원이 20 여명 밖에 안 되는 작은 클럽이었다. 내가 멜본대학 대학원에 있으면서 같은 해 멜본대학 바둑클럽도 만들었는데 이 클럽은 아직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한인동포 인구가 제일 많은 시드니에서 한인바둑회는 1985년 8월 15일 광복절기념 바둑대회를 계기로 창립되었다. 교민신문 ‘대한신보’ 편집인이었던 내가 산파역을 맡았다. 초대회장은 원로 바둑인 안광호 5단이 맡았다. 그는 많은 기행과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멜본대학 클럽(Melbourne Uni Students Playing Go, 15 May 2009)

1) 안광호 초대회장
황해도가 고향인 안 선생은 서울대학교 재학 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에 나가 장교가 된다. 전쟁 중 총탄부상도 당하고 대위로 육사교관 시절엔 전두환과 노태우 생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월남전에 기술자로 진출하여 17만 재월 한국인 중 바둑챔피언을 지냈다. 그는 1974년에 호주로 들어 와서 가족과 함께 시드니 중심부에서 약 40분 떨어진 쿠링가이란 외곽에 살았다. 내가 전화를 하여 “안선생님, 바둑 한판 하실 시간 있으세요?” 하면 30킬로나 떨어진 우리 집에 금방 나타난다. 연로하신 분이 시내를 평균 100킬로로 달리기 때문이다. 그는 과속으로 운전면허가 취소 되기도 했다. 그는 자존심이 엄청나게 강하면서 누구보다 겸손하다. 그는 내기바둑 판에서는 언제나 좌장이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함부로 행동을 못 했다. 그의 고집과 칼날 같은 성격 때문에 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안 5단을 주인공으로 바둑소설을 쓰려는 시도도 몇 번 있었다. 안 선생(5단 1930년생)은 이제는 연로해서 활동이 뜸해지고 집에서 자적하고 있다.


▲ 초기 시드니 바둑회 중심인물: 앞줄 왼쪽 신7단, 가운데 필자 오른쪽 끝 최화백 그 뒤 안회장

2) 초기 바둑인의 애환
나는 바둑을 통해서 너무 많은 걸 얻었다. 그러나 바둑을 통해 많은 걸 잃은 사람들도 있다. 1970~80년대에는 시드니에 사는 한인바둑 회원들은 모일 장소가 없어 주말이면 이 집 저 집으로 몰려 다니면서 바둑을 두었다. 내기 바둑의 속성상 걸핏하면 밤을 새우는 등 민폐가 심했다. 한국에선 고학력자자들이 당시 시드니에선 청소, 택시운전 등 노동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이 주말에 모여 바둑으로 웃고 떠들 때가 이민생활의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부부가 단순 노동으로 맞벌이를 하던 시절 음식대접 등 온갖 심부름을 해야 하는 부인네들에겐 못 할 짓이었다. 점점 바둑 기피증-혐오증 가정이 생기더니 드디어 바둑 두는 남편 때문에 우울증 증세를 나타내는 부인들까지 생겼다. 사방에서 부부싸움도 잦아졌다.

한번은 H씨집 부인이 바둑을 아주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수순상 그 집에서 바둑모임을 가졌을 때 일이다. 바둑을 한참 즐기고 있는데 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 집 부인이 눈에 초점을 잃고 실성한 표정에 손에는 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 그 표정과 도끼가 너무 섬찟해서 다 숨도 못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부인이 갑자기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어와 자기 남편이 두고 있던 4촌 두께 바둑판을 도끼로 몇 차례 찍었다. 바둑 알이 사방으로 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10여명이 바둑을 두다가 말고 허겁지겁 신발을 찾아 신고 뺑소니를 쳤다. 사실 그 집 남편은 바둑을 너무 좋아해서 절제는 없었다.

내가 1978년 초대 호주챔피언이 되었을 때 그가 “한상대 바둑은 관전해 봤는데 별거 아니야. 내가 가서 혼을 내 주고 오지” 하고 1000킬로가 넘는 멜본 우리집에 와서 치수고치기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치수가 더 벌어지자 그는 본전이라도 찾으려고 사흘 밤을 새우게 된다. 방학 때라고 해도 우리가 계획한 일이 많았는데 그 분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나보다 한참 연상인 분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새벽 두 시쯤 그가 “아주머니 출출한데 밤참 좀 내 오세요” 하고 소리를 지르면 자고 있던 우리집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차리곤 했다. 그는 또 바둑을 두며 쉬지 않고 노래를 한다. 그 것도 가곡만 부른다. 내 원래 전공은 정치학이지만 음대에서 정식으로 성악공부도 한 나에겐 괴로운 시간이었다.

우리 집 사람도 그 때부터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하물며 자기 아내에게는 어떻게 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 후 그 부인 증세가 점점 나빠진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스트레스가 암으로 발전했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그래도 남편은 계속 바둑을 두었다. 몇 년 후에 우리는 그 부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사실 그 부인을 바둑인들은 용서를 못하고 기회만 있으면 뒤에서 비난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었다. 사망 소식이 들려오자 그 비난이 멈추었다. 바둑광이던 남편도 바둑을 끊었다. 그는 그 후 신앙생활에 몰두하고 있다는 소문만 들린다. 최근 내가 시드니에 전화로 물어 봤더니 현재도 바둑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부인들이 있다고 한다. 서양인 같으면 남편을 집에서 쫓아내고 이혼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이 글에서 한국인 바둑광 얘기는 생략할 생각이다. 조금 써보려니까 나도 연루 된 일이 많고 감당 못할 내용이 많아서다.

3) 최해택 회장
안 5단 뒤를 이어 정광철, 최종옥씨 등 바둑계 원로들이 차례로 회장을 역임했다. 1988년에는 시드니로 이사간 필자가 회장을 맡았다. 2004년 한인바둑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호주바둑협회(AGA) 데본 베일리 회장이 축사를 했다. 그는 축사 에서 “한인 바둑역사 20년 중 첫 10년간은 한상대교수를 구심점으로 돌아갔고 그가 귀국한 후 다음 10년은 최해택 화백이 중심이 되어 움직였다”고 했다. 호주문인협회 윤필립 회장은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최화백이 ‘바둑의 낭만시대를 열었다’는 평을 했다. 대구 계명대학에서 미술강사였던 최 5단은 화풍이 미국의 천재화가 폴록(Jackson Pollock)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 내가 그를 “최폴록” 이라고 부른다. 그는 1991년 자기 화실을 기원으로 꾸며 ‘시드니 기원’을 차렸다. 당시 시드니에는 한국인 유단자가 7~80명에 5단만 2~30명을 헤아렸다.


▲ 잭슨 폴록(1912~1956) 작품

모일 자리가 생긴 바둑인들은 시드니 기원에 모였다. 더 이상 ‘도끼사건’은 생길 일이 없어졌다. 친화력이 좋은 기분파 최회장은 회원들과 자주 어울려 술집에도 가고 노래방도 다녔다. 특히 카페 ‘템테이션(Temptation)’이 아지트였다고 한다. 바둑인들은 여행도 같이 가고 내기 바둑으로 야통(夜通)도 하고 한-중-일 3국 바둑클럽 대항전도 주선했다. 한국에서 온 중앙일보 전문위원 박치문 7단 VS 왕우비 8단, 세계일보 기자 이승현 6단 VS 지보근 7단과 내기 바둑 3번기도 성사 시켰다. 이 시기에 바둑인들은 최화백의 주도로 낭만을 만끽하면서 바둑을 즐길 수 있었다. 나에겐 없는 능력이다.ㅠㅠ


▲ 박치문위원과 이승현기자 시드니기원 방문(1991). (내 옆 안경)왕우비 VS 박치문 3번기. 왕우비 2대 0 승. 나는 이 바람에 50불을 잃었다. 그 옆 대국은 지보근 VS 이승현. 플래카드는 원장인 최화백이 썼다.

안영길 사범이 호주에 오자 최화백은 시드니에서 500킬로쯤 떨어진 탬워스(Tamworth)란 내륙도시에서 열리는 컨트리 뮤직 페스티벌(Country Music Festival)에 그를 데려갔다. 멋쟁이 아니면 엄두를 못 낼 일이다. 그는 그림소재를 찾는다는 핑계로 평소 여행을 많이 다닌다. 추상화를 그리는 사람이 소재를 찾으러 그렇게 자주 여행을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의 ‘방황성의 발로’인 것 같다. ^^ 그는 가끔 안사범을 자기 모텔에 데려가 재우기도 한다. 최화백과 안사범. ‘둘만의 낭만시대’를 열기 라도 한 건가?


▲ 탬워스 골든기타 앞에 선 안사범, 최화백, 허사범(모자에 반바지는 호주식 차림) 그런다고 호주사람처럼 보일까? ㅎㅎ

4) 창립 20주년 행사
2004년 시드니 한인바둑회는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기념행사의 하나로 한국에서 3명을 시드니에 초청한다. 조훈현, 양재호 9단과 나다. 나는 바둑회 창립공신으로, 조국수는 유명해서, 양사범은 친호파라 불렀다. 내가 1993년 호주바둑협회(AGA) 회장이 되자 호주대회 심판으로 양사범을 초청했다. 호주대회를 전 후하여 약 한 달을 나는 양사범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다. 양사범은 그 때 호주에 반해서 나중엔 식구들만 데리고 세 번인가 호주를 더 찾았다. 사람이 겸허하고 진지한 그는 교포 바둑인들과 친해지며 양 9단은 친호주파가 되고 호주에는 ‘양재호 팬클럽’이 생긴다. 조훈현 9단의 경우 ‘위대한 챔피언의 방문’이라며 호주 바둑계 전체가 들썩였다.


▲ 필자와 조국수

한인바둑회 20주년 행사 때 나는 마침 폴란드에서 열린 유럽대회(EGC)에 한국팀 단장으로 가 있어서 못 왔다. 바르샤바에서 전화로 축하 인사말만 전했다. 이런 일을 계획하고 경비를 확보하고 지휘한 최화백의 열정과 능력은 알아 주어야 한다. 회장이 누구이던 간에 이런 행사의 “추진체(Driving force)”는 최화백이었다. 그러다가 최화백이 시드니 북쪽 100킬로쯤에 있는 엔트런스(The Entrance)란 관광지에 모텔을 사서 이사를 가버린다. 그러자 그런 분위기도 바뀌었다. 바둑계에 구심점이 없어진 것이다. 최화백이 바둑행사 때마다 시드니로 와서 돕기는 하나 모텔경영이 바빠서 ‘낭만시대’를 계속 끌고 가지는 못한다. 시드니에서 떨어진 곳에 모텔을 산 것이 나는 혹시 최화백 부인의 묘책이 아니었나 의심도 된다. 그래야 남편이 시드니와 바둑을 떠날 테니까.


▲ 야생 펠리컨(Pelican). 최화백네 모텔서 걸어 가는 거리에 있다

내가 바둑팀을 인솔하고 호주에 갈 때마다 최화백은 앞장서서 도움을 준다. 친선교류전의 플래카드 붓글씨는 꼭 본인이 쓰고 대회를 준비하는 모든 일에 도움을 준다. 그의 모텔에 우리가 단체로 묵으면 그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공금에서 내는 거니까 받으라”고 강제로 주면 기어이 반 값만 받는다.


▲ 바둑영어교실 2005년 팀과 시드니 팀의 친선대회.

5) 신명길 회장
1985년 멜본 한인바둑회가 10주년을 마지 한다. 교민 인구가 늘면서 그 동안 많이 성장했다. 황용기 바둑회장이 내가 설립자라고 모든 경비를 대주며 우리 가족을 멜본에 초청했다. 내가 공로 패를 받고 난 후 나와 멜본 최강자 신명길 7단과 특별 3 번기가 마련 되었다. 1대1이 되자 호주 챔피언인 내가 질 까봐 그랬는지 황회장이 그만 하자고 한다. 그때 나의 연세대 후배이며 사람이 성실한 신7단이 나와 친해진다. 그가 시드니에 이사온 다음 내가 회장인 단체에는 신명길 사장이 단골 총무였다. 내가 그의 능력과 사람 됨됨을 믿기 때문이었다.

당시 시드니에는 내가 8년 동안 매 월 주도하던 교양모임이 있었다. 원래 이 모임을 시드니 사람들이 “한상대 사단”이라고 불렀는데 시인 고은선생이 참가해 본 후 “밤에 모여 웃는 모임” 이란 뜻의 “야소회(夜笑會)”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거기 총무도 신사장이었다. 모임은 먼저 교양강좌를 1시간 갖고 그 후에 BBQ를 곁 드려 각 집에서 가져 온 반찬을 함께 먹는다. 그 다음 여흥 시간에 재미로 회원들을 노래 잘하는 순서를 매기는 프로그램이 가끔 있었다. 여기서 신총무의 순위는 12~3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자기가 10위 안에 들은 적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회원들에게 물어 보면 “희망사항이겠지요” 하며 웃는다. 순위가 10위 밖으로 나간 가수들 노래는 참고 들어 주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그런 신 7단에게도 일생 딱 한번 앵콜 곡을 부를 기회가 찾아 온다. 자기 약혼식에서 신랑 노래순서가 있었는데 노래가 끝난 후 누가 실수로 “앵콜!” 하고 외쳤다. 신랑 자리로 돌아가던 신사장이 “앵콜?” 하고 뒤 돌아 보더니 부리나케 마이크로 돌아와 한 곡을 더 부르고 말았다. 주례를 보던 나도 손쓸 틈이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

신 7단은 2006년 한인바둑회장을 지냈다. 그는 한인 바둑계를 소리 없이 돕는다. 예를 들어 한국대사배 바둑대회를 치를 때면 몇 천불 경비가 발생하는데 대사관에서는 이름만 걸고 지원금은 천불 미만으로 나온다. 그러면 신사장이 조용히 자기 돈으로 나머지 경비를 메우곤 한다. 실질적으로 그 대회는 “신명길 배(杯)”나 다름 없다. 한국인 중 최강자인 신 7단은 호주챔피언도 지내고 지난 해엔 국무총리배에 호주대표로 참가했다. 나와는 호주팀으로 평양에도 다녀 왔다 그러나 그는 사업이 바빠 바둑공부를 할 시간이 없어서 중국 강자들에게 추월 당하고 있다.
☞ 평양 기행문 바로가기

6) 한인 강자들
신7단 다음으로는 송관섭 6단이 강한데 그는 뉴질랜드에서 거주하다가 1년 반 전에 시드니로 왔다고 한다. 호주나 뉴질랜드 시민권자는 두 나라 간에 거주지를 옮기면 자동으로 영주권을 받는다. 송 6단의 연배는 신 7단과 비슷하다. 정석은 거의 모르지만 오직 수읽기 하나로 2인자 자리에 올랐다. 내가 “깡패 바둑”이라고 명명한 최해택 5단이 3위인데 60대 중반에 들어선 최화백이 요즈음은 실수가 잦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지난 2년 동안 바둑회 총무를 맡은 최태진 5단은 서열 4위다. 그는 이번 2009년 8월 8일 열린 한국대사배에서 호주 최강 궈이밍 7단을 꺾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바둑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고 한다. 지난 선거에 차기 회장으로 추천 되었으나 본인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라는 이유로 고사했다고 한다.

2년 째 연임하는 현 이정웅회장은 사람이 겸손하고 틀림 없어 바둑계를 위해 많은 일을 하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이회장이 교회 일로 너무 바빠서 바둑에 전력투구하지 못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마지막으로 서학범 4단은 조훈현 9단과 양재호9단이 호주를 방문하였을 때 회장이었다(2003~2004). 그는 최해택 회장 때 총무로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내가 기억 하고 있다. 지금도 자기가 힘이 닿는데 까지 바둑계를 위해 공헌하고 있다고 한다. 초기만 빼고 한인바둑회 회장은 바둑회 총무출신이 대부분 하고 있다. 나도 그래야 좋은 회장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호주에 살면서 한국에서 바둑인을 여러 명 초청했다. 1980년대까지는 초청장이 있어야 호주엘 올 수 있었다. 1980년에 김재구사범 일행, 1981년에 강철민사범 일행, 86년에는 서봉수사범과 박치문씨가 왔는데 박치문씨는 그 후 몇 번 더 온다. 그들이 호주에서 저지른 기행도 책 한 권 분량은 나올 거다^^ 박치문씨 외에 관전필자로는 이광구씨, 이승현(세계일보)씨가 왔고 93년에는 양재호 9단이 다녀간다. 98년에 35명의 어린이 팀이 올 때 서능욱 9단이 가족과 같이 온다. 이 중 통틀어 모범생은 양 9단뿐이었다.


▲ 2005년 호주를 방문한 바둑영어교실 팀

○…중국 세 약진

1) 멜본 강자
내가 2005년 바둑팀을 인솔하고 멜본에 갔을 때다. 우리 팀 연구생출신 제자에게 “여기에 류둥밍(劉東明) 7단이 있는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고근태 선수가 4위를 할 때 그는 3위를 했다. 네가 최선을 다해 두어야 할 거다” 했더니 “교수님, 제가 설마 지겠어요? 안심하세요” 하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가 바둑이 끈끈한 류에게 참패를 당했다. 4단 이상 선수 7명이 두어 우리 팀이 1승 6패를 했다. 나하고 둔 13세의 캐빈 첸 7단은 나에게 완승을 했다. 고비마다 전투에서 나에게 이겨간다. 그는 기본기가 좋고 수 읽기도 강했다. 내 제자 김선기 6단이 “교수님, 저런 꼬마한테 어떻게 지세요? 제가 이기는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 두더니 참패를 당한다.


▲ 바둑영어 교실팀과 멜본팀의 교류전 2005년 7월(내가 케빈 첸과 두고 있다-우상귀 TV 앞)

그들이 나중에 “멜본에서 랭킹 1위는 캐빈 첸이고 류둥밍은 2위입니다” 해서 놀랐다. 우리 측은 4단 한 명이 호주 백인 4단에게 이긴 한판 밖에 없었다. 5단 이상은 다 중국 계다. 우리 팀이 상당히 센데도 고단 진에선 1승도 못 건지고 말았다. 그 날 진 우리 팀 연구생출신은 그 패배가 너무 아파 밤에 잠을 잘 못 잤다. 이튿날 비 공식 게임이지만 연구생 출신 박종욱이 캐빈을 이겼다. 류둥밍은 바둑 두기를 거절하고 관전만 했다. 그 다음해는 우리 팀이 조금 더 분발해 멜본팀과 5단 이상이 둔 10 게임 중 3승 7패를 했다. 그 7 패는 다 중국 계에게 당했다. 이 것이 서양바둑계의 현주소다. 서양 어느 나라에 가거나 강자는 거의가 중국인 들이다. 호주의 메이저대회 결승대국은 거의가 중국인끼리 치러진다.


▲ 멜본 시내 거리 카페. 이 근처에서 교류전을 가졌다.

2) 시드니 중국 강자
현재 호주 최강자는 시드니에 사는 궈이밍(郭以明)이다. 그는 2000년 이후 호주대회 네 번 우승을 비롯 2009년 8월 한국대사배에서도 우승하여 오는 11월에 전주에서 개최되는 국무총리배 세계대회에 호주대표로 출전한다. 그는 58년생으로 한 살 위인 신명길 7단과는 친구 사이다. 그는 중국에서 치과의사 자격을 땄으나 호주에서 인정을 못 받자 무역업으로 방향을 바꿨다. 항주가 고향인 궈 7단은 지난 11월에 열린 항주국제친선대회에 참가한 나에게 자기 고향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나와는 30년 전부터 알았고 신사장 소유의 항주기원 식당에도 투자를 하여 공동경영을 하고 있다. 사람이 싹싹하며 기풍은 정통파이면서도 쉽게 무너지질 않는다. 지난 번 항주호텔에서 나에게 자기가 천야오예(陳耀燁) 9단과 호선으로 둔 바둑을 복기하며 다 이긴 바둑을 끝내기 실수로 졌다며 아까워했다. 자기 바둑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친구다.

궈 7단 외에 시드니 중국계 강자를 꼽으라면 데이빗 허, 먀오쟈오, 그리고 구위리우가 있다. 데이빗 허(David He)는 40살이고 애쉬필드에서 핸드폰(Mobile phone) 가게를 경영하고 있다. 바둑은 두텁고 힘이 좋지만 정교함이 부족하다. 2007년에 호주대회(AGA) 우승을 차지했고, 2008년 NSW 대회에서도 우승했다. 먀오쟈오(Miao Zhao)는 27살의 청년으로 현재는 시드니 북쪽에 있는 뉴캐슬에서 컴퓨터 관련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바둑은 끈끈하고 잔 바둑을 잘 둔다. 2008년에 호주 오픈과 캔베라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구위 리우(Guyu Liu)는 25살로 현재 호주의 강자들 중에 가장 어리다. 그는 호주시민권을 한달 전에 받았는데 역시 컴퓨터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올 해 NSW 대회와 캔베라 대회에서 우승했다. 위에 언급한 세 명의 중국인들은 토요일마다 시드니기원에 와서 안영길 사범과 다면기를 두고 복기를 하며 기력을 연마하고 있다. 바둑에 대해 열성적이고 기풍은 다 다르지만 모범적인 사람들이라고 안영길 사범은 전한다. 이들이 시드니 중국인 강자들이다.


▲ 한-중 친선 바둑대회. 앞 줄에 궈 7단(모자), 신명길 7단, 이세나 7단 등이 보인다

2009 유럽대회(EGC)에 우리 바둑영어교실 학생 5명(김은국, 황인성, 김준상, 오치민, 전상윤)이 참가 해서 1~5위를 휩쓸었다. 미국대회(USGC)는 프로 김명완 8단이 작년에 이어 2연패를 했다. 이런 일들이 서양인에게 “한국 바둑은 세다”는 인상을 심어 준다. 중국의 인해전술에 밀릴 땐 우리는 소수의 엘리트를 파견하여 이런 효과를 보는 일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은 안사범처럼 현지에 살면서 그들을 가르치는 거다. 시드니에서 한국 바둑전성기 시절 교민이 5만 명 정도였다. 지금은 시드니에 교민이 약 10만 명이 사는데도 한인 바둑인구는 눈에 띄게 줄었다. 모든 원인이 국내 바둑인구가 줄면서 나오는 현상이다.


▲ 김은국 황인성 김준상 오치민 전상윤

○…프로 사범

1) 오송생 사범
1985년 오송생 9단이 이민을 왔다. 전 호주 바둑인이 그가 오면 호주바둑계가 크게 발전하리라 기대했다. 9단이면 구름 위에 사는 신선쯤 생각했다. 그러나 호인(好人) 형인 오 9단은 호주에 와서 바둑만 열심히 두었다. 교실을 열고 바둑을 가르치고 하는 일은 생각도 안 했다. 언어 장벽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가 이민 와서 2년쯤 됐을까? 내가 아직 캔베라에 살고 있을 때다. 오 9단이 4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시드니에서 3백킬로 이상 떨어진 우리 집엘 찾아왔다. 그는 나와 3일 밤을 새면서 바둑을 두었다. 그런 후에야 캔베라 구경에 나섰다. 나는 그 때 “프로도 이렇게 바둑을 좋아 할 수 있구나” 하고 놀랬다. 내가 시드니로 이사를 가서 그와 자주 만나면서 그가 물 떠난 물고기라는 걸 알았다. 결국 나의 주선으로 오 9단은 1989년부터 한국에서 기사생활을 하게 된다. 객원기사로 10년을 한국에 머문 그가 청도 바둑학교 교감으로 중국으로 돌아 갔다가 몇 년 지나 다시 호주로 돌아 온다. 먼 여로였다. 그러나 오 9단은 심장이 나빠 건강상 문제로 바둑사범 역할은 거의 못 하고 타계한다. 호주는 프로기사를 국가사범으로 갖고 있었으나 실제로 그의 지도는 많이 받지 못 했다. ☞ 오송생 9단 바로가기


▲ 2005년 시드니에서 나에게 오 9단이 자기 저서에 서명을 해 주고 있다. 이 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2) 안영길 사범
신명길 7단이 하루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오송생 9단 빈 자리에 교수님 제자 중 한 명 안 보내세요?” 한다. 나는 그 때서야 “맞아, 그 자리가 비었지. 내가 왜 그 생각은 한번도 안 했지?” 나는 곧 안영길 사범을 추천했다. 나의 제 2의 고향인 호주에 내가 아들처럼 사랑하는 안사범을 보낸다고 생각하니까 흥분이 된다. 곧 호주 바둑협회 집행부에 편지를 쓰고 안사범을 서둘러 보냈다. 2008년 8월이었다. 안사범은 아주 매력적인 청년이다. 그는 성실하고 근면하다. 성격도 달콤하고 남에게 절대로 무례한 법이 없다. 그래서 가는 곳 마다 인기가 좋다. 바둑성적도 군대 가기 전에는 우리나라 톱10에 들곤 했다. 내가 내 바둑영어교실에서 2년쯤 가르쳤는데 공부도 잘 한다. 총무를 맡아 리더쉽을 발휘해 교실을 잘 끌고 나갔다. 그가 명지대 바둑학과생이었을 때도 공부를 잘했다. 다른 프로기사들에 비해 일반상식도 많고 문화적 호기심도 많아 그를 데리고 여행을 하면 심심치가 않다. 그는 호주에 사는 같은 또래의 내 아들을 대신하여 한국에서 우리부부를 잘 돌봐 주어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호주에서 기회가 오면 대학에서 공부할 꿈도 갖고 있다.


▲ 결승국 해설 지도다면기

지보근 7단이 처음 호주에 왔을 때다. 내가 그에게 한국 2세들에게 바둑을 가르쳐 보라고 권했다. 교실이 시작된 후 2주쯤 지나 지사범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교수님, 저는 안 되겠습니다. 아이들이 걸핏하면 그거 영어로 설명해 주세요! 하는데 제 영어가 그렇게 안 됩니다” 한다. 나도 그제서야 새삼 그가 영어로 강의가 안 되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안사범은 영어로 강의를 잘한다. ‘브리스번 바둑 캠프 2009’에서 안사범 영어강의는 훌륭했다고 하디 회장이 나에게 전해 왔다. 그는 피아노도 잘 친다. 자기가 직접 작곡한 곡을 치기도 한다. 바둑대회장에 피아노만 있는 곳이면 그의 반주로 내가 노래를 불렀다. 안사범의 호주진출로 호주바둑이 “새로운 전환기(Turning Point)”를 맞이 하고 있다.


▲ 안사범 반주로 내가 노래하고 있다. 2007 영국 런던 한국대사배

3) 허기철 - 이세나 부부
2년 반전쯤 우리 바둑영어교실에서 공부하던 허기철사범이 호주로 왔다. 허사범 보다 이세돌 9단의 누나이며 여류강자인 이세나 7단이 더 잘 알려져 있다. 허사범은 호주로 오는 결심을 하기 전에 사전답사 차 나를 따라 두 번이나 호주에 다녀간다. 호주에 온 그가 시드니 북쪽 한인 집거지인 이스트우드(Eastwood)에 기원을 열었다. 그 동안 이세나 7단은 중국계 강자 속에서 2006년 도요타 덴소배에서 우승을 하고 지난 2008년 한국대사배에서도 우승을 했다. 그러나 이세나 7단은 평소에 바둑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바둑대회에 나가는 것이 양심에 꺼린다며 적극적인 참여는 안 하고 있다. 그들은 기원에서 유학생과 바둑인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그들은 작년에 호주에 안사범이 오자 그를 돌보아 주고 기원을 더 적임자인 안사범에게 인계하기로 한다. 현재 허기철사범은 한국으로 돌아와 바둑세계 기자로 일하고 있다. 이세나 7단은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해 왔고 호주영주권도 신청한 상태로 알고 있다. 이 7단이 호주영주권을 얻으면 한인 바둑계는 보배를 얻게 된다.


▲ 2006 바둑영어교실팀 VS 한인 바둑회팀 교류전에 앞서 신명길 한인바둑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단체사진


▲ 현재는 안사범이 원장인 시드니기원. 개업한 날 바둑영어교실 2006년 팀과 시드니 한인팀 교류전 이모저모


▲ 호주바둑협회 엠블럼(Emblem) 인구 200만의 퀸스랜드 수도 브리스번

○…호주 바둑협회 현 집행부(AGA Committee 2008/9)

회장(President) 존 하디(John Hardy)
총무(Secretary) 데이빗 오머로드(David Ormerod)
재무(Treasurer) 래리 웬(Larry Wen)

1) 존 하디 회장
1980년대 초 골드코스트에서 가족과 휴가를 즐기던 나는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브리스번 시립도서관에 갔다. 매주 화요일마다 존 하디가 바둑강의를 한다는 날이었다. 내가 도서관에 들어서니까 고등학생 약 50명과 일반인 30여명이 존의 강의를 듣고 있다. 내가 들어서자 존이 놀라면서 “조금 전에 호주챔피언은 한국계 한상대 씨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본인이 여기엘 왔다”고 하자 모두 일어나서 박수로 환영한다. 존은 나에게 “챔피언 앞에선 강의를 못 하겠다. 대신 강의를 해달라”고 한다. 내가 “당신 강의를 들으러 온 거니까 계속하라”고 하자 존은 하던 강의를 계속한다. 이 날도 확인했지만 초보자강의는 원어민이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나는 존처럼 초보자들을 그렇게 웃겨가며 강의할 자신이 없다. 내가 학생들에게 초보자 교육시키는 방법을 중지한 것도 현지인이 가르치는 것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 하디는 브리스번에서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바둑을 보급해 왔다. 시드니-멜본 쪽에서 주도하던 호주바둑업무를 그는 시드니 북쪽 1000킬로 이상 떨어진 퀸스랜드로 가져갔다. 그는 회장이 되고 2008년 의욕적으로 한, 중, 일 바둑강국을 돌며 바둑계 지도자들을 만났다. 2005년에는 우리 교실 바둑 팀이 브리스번에 가서 교류전이란 이름으로 그들에게 한 수 가르쳐 준 일이 있다.


▲ 골드 코스트


▲ 브리스번(Brisbane) 다른 나라에서는 ‘브리스베인’이라고 발음하지만 호주인들은 ‘브리스번’이라고 한다.


▲ 2008년 부산방문: 김향희 부산여성바둑연맹 총무, 장명한사범, 필자, 하디(John Hardy) 호주바둑협회장

2) 호주의 바둑 클럽(Club Directory)
애들레이드 Adelaide Go Club
Contact: Kazuya Miki, 08 8357 3328; email miki38@tpg.com.au
브리스번 Brisbane Go Club
Contact: John Hardy, 0409-786050; email J.Hardy@uq.net.au
캔베라 Canberra Go Club
Contact: Neville Smythe, 02 6232 7277; email Neville.Smythe@anu.edu.au
멜본 Melbourne Go Club
Contact: Brad Melki, 03 9528 1149 (W); email bmelki@hotkey.net.au
멜본 일본클럽 Melbourne Japanese Go Club
Contact: Yoshi Nagami, 03 9727 3388; email nagami@optusnet.com.au
멜본대학클럽 Melbourne Students Playing Go
Contact: Dilshan Angampitiya; email mail@spgo.org.au
시드니 시(市) 클럽 Sydney City Go Club
Contact: Robert Vadas; email ravadas@yahoo.com
시드니 카스클럽 The CASS Go Club (Sydney)
Contact: Devon Bailey, (02) 9534 1321; email devonbailey@optushome.com.au
시드니 기원 Sydney Ki-Won (Korean Baduk Club)
Contact: Young-Gil An (02) 9874 4843; email anyoungkil@gmail.com,
시드니 중국클럽 Sydney Chinese Weichi Club
Contact: Yiming Guo; email yimingguo@optushome.com.au
커튼클럽 Curtin Go Club Contact: Adam Harley, 0402 931 807; email
uizado@iinet.net.au

3) 바둑대회 (Tournaments and Events)
AGA 가 주관하는 바둑대회:
Toyota-Denso Cup, Brisbane, 1월 (짝수 해에 개최)
Queensland State Championships, Brisbane 2월
Victorian State Championships, Melbourne 3월
NEC Cup, Melbourne, 4월
NSW State Championships, Sydney, 6월
ACT Championships, Canberra, 7월
The Korean Ambassador’s Cup 8월
Australian National Championships, 10월

이 외에도 몇 개 군소대회가 있으나 주로 위에 열거된 대회성적에 따라 점수를 획득한다. 점수가 많은 사람이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대회나 다른 국제대회에 참가한다. 한국대사배 우승자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무총리배에 참가한다. 그 동안 많은 예산을 투입해 호주 바둑인들을 열광케 했던 도요타 덴소배와 NEC컵은 일본의 사정으로 올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 세계는 이제 일본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중국세가 몰려 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나아갈 길은? (호주는 여기서 마치고 다음은 뉴질랜드 편)

한상대(전 호주바둑협회(AGA) 회장, 시드니 대학 교수)
(sdhahn@gmail.com) 017)276-5878




▲ 호주 바다에 많은 거북이 아래: 호주 북부에 사는 7미터짜리 악어. 사람도 잡아 먹는다.



▲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해안 포트켐벌(Port Campbell). 멜본 남쪽으로 300킬로


▲ 2005 바둑영어교실팀


▲ 석회암 기암 절벽이 100킬로쯤 계속 된다


▲ 포트켐벌의 석양


▲ 뭍짐승 , 날짐승 , 물짐승 셋을 다 가진 플래티푸스 (Platypus) 호주동전에 있다 . 백조대신 호주엔 흑조가 있다.

세계바둑사
기인열전(奇人列傳) 호주 ②
한상대 교수의 해외 바둑계 둘러보기
2009-08-22 오전 12:53:21 입력 / 2009-09-16 오후 3:51:07 수정


▲ 호주 원주민 기 ( 旗 ) 노란 태양, 붉은 흙, 검은 피부의 3색


▲ 원주민 춤 . 1788년 1월 26일 백인이 처음 호주에 이주한다


▲ 붉은 캥거루 (Red Kangaroo)


▲ 회색 캥거루 (Grey Kangaroo)

1. 호주의 바둑 광

나는 호주에서 살면서 바둑을 통해 많은 친구를 만났다. 그들과 만나고 바둑을 두는 일은 호주생활의 큰 기쁨이었다. 나는 바둑만 두면 민족을 가리지 않고 친구가 되었다. 지금 돌아다봐도 그 때가 그립고 그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고 싶을 뿐이다. 서양 바둑인 중에는 마음 약한 지식인이 많다. 지적(知的) 능력은 있으나 사회 적응력은 좀 문제가 있다. 그들은 어떤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어쩌면 그들이 진정한 자유인인지도 모른다. 자기네 본성이 가리키는 대로 인생을 맡기고 있다. “혹시 그들이 바둑을 통해 무위(無爲)사상을 실천하는 현대판 도인(道人)들은 아닐까?” ^^ 호주의 바둑광들(Go Freaks). 그 중 나와 친한 몇 사람을 소개한다.

1) 톰 포인튼(Tom Poynton)
1975년 어느 날. 나는 멜본 식물원공원(Botanic garden) 잔디밭에 앉아 한국에서 온 ‘월간 바둑’을 보며 복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누가 지나가다가 나에게 “바둑 두는 사람이세요? (Are you a Go player?”)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는 7급인데 한판 두어달라고 한다. 9점을 깔라고 하니 흠칫 놀라는 눈치다. 9점에 두 판을 지고 나서 그가 “나는 바둑을 배우기 전까지는 동양인은 백인에 비해 머리가 단순한 줄 알았다. 이제 보니까 영어 때문에 표현이 단순했지, 머리가 단순한 게 아닌 걸 깨달았다”며 바둑이 자기를 개안(開眼)시켰다고 한다. 그는 즉석에서 우리 부부를 주말에 자기집으로 초대를 한다. 그의 집은 바닷가 브라이튼(Brighton) 부자동네에 있는 큰 저택이었다. 점심식사 후 당시 70대였던 그의 어머니와 나는 크로케(Croquet)라는 잔디 밭에서 하는 게임을 하며 놀았다. 그의 차림이 허름해서 이렇게 부자 집 외아들인 걸 몰랐다.



▲ 나와 톰이 처음 만난 곳 . 이 공원을 다 보려면 2~3 시간이 걸린다

톰은 나에게 자기는 원래 대학교 불어교수인데, 일본어를 계속 공부해서 대학에서 일본어교수로 자리를 바꾸었다고 한다. 한 나라말로 교수되기도 힘든데 대단한 사람이다. 내가 일본어와 한국어가 문법은 같다고 하자 이제부터는 한국어를 공부하겠다고 한다. 당시 50쯤 된 그가 쉽게 다른 나라 말을 배우겠다고 해서 놀랐다. 그리고 몇 년 후 그가 독학으로 한국말이 어느 수준에 오른 걸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는 한국말 실습과 바둑을 두기 위해 한국에 다섯 번이나 찾아온다. 한번은 제프리(G. Gray)와 같이 찾아와 권갑룡도장에서 몇 달 동안 바둑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 때 바둑에 소질이 있는 알렉스란 20살 된 호주 청년을 데려와서 권도장에서 공부를 시켰다. 물론 경비는 톰과 제프리가 부담했다.

한 번은 종로 2가 근처 여관에 몇 달간 묵으면서 매일 파고다(탑골) 공원에 나가 그곳 노인들과 바둑을 두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바둑 실력도 비슷하여 좋았다”고 한다. 점심 때면 서울시에서 나오는 트럭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다가 공짜 국수를 얻어 먹는다. 누가 이들이 대학교수 지식인에 백만장자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아마 외국 거지 정도로 알지 않았을까? 이렇게 30년을 노력한 톰은 지금 1~2단 정도다. 서양 바둑광은 우리와 차원을 달리 한다. 하는 짓이 대책이 없다. 톰이 결혼에 실패한 얘기만 들었지 그 이유는 모른다. 톰은 지금 80이 넘은 노인인데도 작년에 호주에 간 안영길 사범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 두 사람의 성분을 보아 앞으로 더 많이 가까워 질 것 같다.



▲ 안영길 사범과 톰 포인튼

2) 제프리 그래이(Geoffrey Gray)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프리는 호주에 바둑을 소개한 사람이다. 그는 부자가 된 후 전 세계를 돌며 기행(棋行+奇行)을 벌였다. 1970년대 초에는 만리장성에 올라가서 바둑을 둔 최초의 호주인이 되었고, 관계자도 아닌데 미국이나 유럽대회에 자주 얼굴을 나타내곤 했다. 그도 한국을 좋아해서 위의 글대로 포인튼과 바둑 공부도 하고 한국 일주여행도 했다. 그는 바둑으로 천하를 주유하며 다른 걱정은 다 잊고 살아 온 인물이다. 최근에는 연로해서 KGS에서 인터넷 바둑을 주로 두고 주요행사 때나 바둑계에 얼굴을 내민다. 호주 바둑 초창기 시절 제프리는 명실공히 ‘호주의 조남철’이었다.

*서양인 90% 이상이 일본 사이트 KGS(Kiseido Go Server)에서 바둑을 두는데 Tygem은 언제나 영어 사이트가 나오려나?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파고다 공원 . 바둑 두는 노인들

3) 돈 포터(Don Potter)
나는 돈이 바둑 기인 중 세계 랭킹 1위 후보라고 생각한다. 그와 30년 간 친하게 지내면서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일을 그가 계속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는 동양학을 전공했고 박사 학위가 있는 사람이 바둑으로 석사논문을 또 쓴 사람이다. 피아노는 전공자보다 실력이 좋아 어려운 오페라 아리아도 초견(初見)으로 반주를 한다. 호주 바둑모임에는 그가 반주를 하고 내가 노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도 그래이처럼 대학교수였다가 부자가 되어 조기사임을 한 사람이다. 자기 부모가 죽으면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 돈 포터

세계바둑대회에 가면 프로들이 각국 아마대표가 둔 바둑을 복기해 준다. 여기에 참여해 일본어나 중국어로 마구 떠들고 거침없이 깔깔대고 웃는 서양인이 한 명 있으면 그는 분명 돈이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카랑카랑해서 웃음 소리가 멀리서도 들린다. 그는 대회와 아무 관련 없이 선수단이 묵는 호텔에 자비로 묵으면서 바둑인과 몰려 다닌다. 그는 일본 프로기사들과도 친분이 많아 마치 대회 관계자처럼 보인다. 그는 중국계 일본기사 왕리청 9단을 저단시절에 자기 집에 몇 달간 묵게 한 일도 있다. 그는 종종 나에게 “한국 바둑이 세계최강이 될 줄 알았으면 젊어서 중국어, 일본어 대신 한국어를 배울 걸 그랬다”고 한다. 그의 중국어나 일본어 실력은 중국/일본인들이 수준급이라고 인정한다. 어디에 가서 한문 시(詩)가 걸려 있으면 돈은 중국어로 읽어 내려가며 뜻을 해석해 준다.



▲ 돈은 목장에서 아침마다 조깅을 했다고 한다

그가 20년 전쯤 타스마니아(Tasmania)란 섬에 500만 평이 넘는 목장을 샀다. 목장 일을 모르는 사람이 그 먼 곳에 목장을 왜 샀는지 그것조차 엉뚱하다. 다만 타스마니아에 사는 에반스 2단과 친분이 있어 그쪽으로 연관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짐작만 간다. 그가 거기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을 벌일 거라는 나의 예감은 적중한다. 돈이 목동을 뽑을 적에 응모자들은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고용이 됐다. 그 서약서는 목장 일이 끝나고 식사 후 두 시간쯤 돈에게서 바둑을 배운다는 약속이다. 돈은 자신이 채용한 목동들에게 바둑이 그들의 두뇌를 개발시켜 준다고 설득해서 고용인 전체가 바둑을 배우게 했다. 밤마다 자석판으로 돈이 강의한 뒤 그들끼리 바둑을 두게 했다. 3년쯤 지나 그 중 17세 소년이 2단이 되어 호주 청소년대표로 세계대회에 출전을 한다.



▲ 타스마니아 수도 호바트 (Hobart). 86년 호주대회 개최. 서봉수 9단과 박치문씨가 온다. 여기서 서사범은 오송생 9단과 5번기를 두고 박위원은 나를 꺾고 오픈 챔피언에 오른다.

그것으로 그의 시험이 끝났음인가? 그는 목장을 팔고 시드니에 팜(Palm)비치라는 부자동네로 이사를 간다. 그가 우리부부를 식사에 초청하길래 가 봤더니 그의 집에 동네 아이들 40여명이 몰려와 바둑을 두고 있다. 웬 아이들이냐고 물었더니 “바둑을 두어 이긴 아이에게는 2불씩을 준다. 40명이면 이기는 애가 20명이 나오고 2불씩 20명이면 40불밖에 안 된다. 이 중에 벌써 바둑에 호기심을 보이는 애들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2불씩 받은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집으로 뛰어 가는 게 보인다. 그가 창안해 낸 독특한 방법의 바둑보급이다.



▲ 건너편 섬에서 본 팜 비치 (Palm beach)


▲ 팜 비치 (Palm beach). 이 해변가에 돈이 살았다

돈이 착한 일만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바둑회에서 쫓아내는 일도 한다. 클라이브(Clive Davis)는 고졸 학력의 재향군인회 직원이다. 그는 바둑을 열심히 두어 20대 중반에 강한 3단이 되었다. 클라이브는 호주바둑협회 초대재무로 공헌도 많이 했다. 1980년에 내가 김재구 8단 일행을 초청했을 때 한 달 휴가를 내어 자기 차로 수천 킬로를 운전하며 도와준 일도 있다. 거기에다 클라이브는 잘생기고 날카로운 눈매에 자존심이 강한 만만치 않은 청년이었다.

그가 총을 갖고 있다고 수근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가 화를 내면 누구나 충돌을 피했다. 그리고 클라이브 외 또 한 명. 나이트 클럽 트럼펫 주자 글렌(Glynn Divine) 2단이 있다. 그들은 돈의 눈으로는 바둑회 회원이 되기에는 수준미달이었다. 돈은 가끔 “우리들 사이에 저 두 명이 끼어서 분위기 망친다”고 투덜댔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감싸고 있어 어떻게 하질 못 했다.



▲ 앞줄 오른 쪽이 돈 포터 2009년 8월 8일 한국대사배

그러다가 한번은 클라이브가 세계대회에 나가는 결정판을 나에게 지고 화가 나서 소리를 막 지른 일이 있었다. 나는 그 해에는 어차피 못 나가기 때문에 져도 상관 없는 판이었다. 그렇다고 내 입장에서 일부러 져 줄 수는 없었다. 그 패배로 클라이브가 가장 미워하는 라이벌 쿵이 세계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승률은 같은데 스위스 제도로 꼭 1점 차였다.

조용히 바둑 두던 모든 사람이 놀랐다. 나에게 소리지른 게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낸 거라고 변명했으나 나는 그를 불러 “연장자에다가 상수 앞에서 무례한 짓” 이라며 기어이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사과를 시킨 일이 있었다. 그 때 저 멀리 앉아서 놀라움과 반가운 웃음으로 날 쳐다 보는 돈의 얼굴이 내 눈에 비쳤다. 나중에 사람들이 한국문화가 자기네와 다른 걸 그 때 나의 단호함을 보고 알았다고 했다.

클라이브의 사과를 받은 후 나는 그와 다시 친한 감정으로 돌아왔는데 돈은 내가 클라이브를 싫어하는 줄 알고 그를 바둑계에서 쫓아 낸다. 쫓아내는 방법도 좋지 않았다. 돈은 먼저 포커 판을 크게 벌였다. 돈이 클라이브에게 1500불 이상을 따게 되었다. 클라이브가 “지금 돈이 없으니 나중에 주겠다”고 하자 돈은 “그 돈을 안 받을 테니까 영원히 꺼지라”는 가장 모멸적인 방법으로 그를 그 포커 판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그는 글렌도 쫓아냈다. 글렌은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내가 한인회관 바둑클럽에서 자도록 해 주었다. 그는 침낭을 가져와 그 방에서 자면서 청소도 잘하고 관리도 잘 했다.

글렌은 바퀴벌레를 손으로 잡는 재주가 있다. 호주 바퀴벌레는 크고 아주 빠르다. 잡은 바퀴벌레를 왼 주먹에 쥔 채 오른손으로 바둑을 두고 있으면 마음 약한 상대는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고 돈을 잃는다고 했다. 당시 한 판에 10불짜리 내기가 유행했었다. 그를 어떻게 쫓아 냈는지 모르지만 역시 돈이 그의 가난한 약점을 잡은 후 모멸감을 주었으리라 짐작한다. 그 후 돈은 자기가 바둑계를 정화했다며 의기양양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일로 돈에게 한 동안 화가 나 있었다. 2년 전에 시드니 공항에서 그가 날 보고 반가워 달려와서 포옹을 한다. 그 동안 그의 몸이 불어서 처음엔 내가 누군지 얼른 몰라봤다. 60대까지는 매일 조깅을 해서 호리호리했는데 70이 넘은 지금은 옛날 그만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없어졌다.



▲ 시드니 한인 바둑모임 ( 앞줄 왼편 이정웅 한인바둑회장 . 다음 줄은 최해택 화백 ( 좌 ) 과 진양일 박사

돈은 바둑이 두고 싶어서 부자동네 팜비치에서 가난한 한인촌 캠시(Campsie)로 거처를 옮겼다. 부자인 그가 독신으로 일생을 사는 이유는 나도 모른다. 혹시 바둑 때문에? 그도 최근에 안영길 사범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 마침 안 사범도 피아노를 치고 작곡도 한다. 70대 중반의 그가 안 사범과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까? 기대된다.

4) 데이빗 에반스(David Evans)
하루는 데이빗이 시드니대학 내 연구실로 장거리 전화를 했다. 자기의 어려서부터 취미가 목수 일인데 요즘 바둑판을 만들어 보면서 직업을 목수로 바꾸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는 내용이다. 그가 은퇴를 3년 앞 당겨 바둑판 제작업자가 되려고 하는데 나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내용이었다. 보통 65세가 은퇴니까 그가 그 때 62세였나 보다. 당시 그는 타스마니아 국립의료원 원장으로 저명한 의사였다. 내가 말리니까 그럼 자기가 만든 바둑판만이라도 평가해 달라고 한다. 나에게 바둑판을 가져오겠다고 한다. 그것까지 말릴 수 없어서 허락했다. 사흘 후 주말을 이용해 데이빗이 2000 킬로를 비행기로 날아와 시드니 우리집에 찾아 왔다. 타스마니아에서 나오는 11가지 나무로 소형 바둑판 11조를 만들어 들고 왔다. 내가 바둑돌을 두들겨 보고 너무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것은 빼고 몇 개를 골라 주었다.

그는 장시간 바둑판 만드는 일에 대해 설명을 했다. 한국에 보낼 판이면 한국 1년 평균 습도에 맞추어 컴퓨터 건조실에서 말린다고 했다. 그러면 한국에서 판이 휘지 않는다고 한다. 결을 따라 판을 자르는 방법도 알려 준다. 또 판을 반 쪽씩 나누어 붙여야 왜 더 좋은지도 설명한다. 줄은 컴퓨터로 1000분의 1 밀리도 안 틀리게 친다고 한다. 나무 색깔도 본인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고 한다. 바둑판 밑에 코르크 판을 붙여 유리 테이블에 올려 놔도 상처가 안 나게 했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면 생산가가 높아 수지가 맞겠느냐고 했더니 명품 만드는 보람을 말하고 자기가 돈은 좀 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아무리 목수 일이 좋아도 이렇게 까지?” 그는 이미 상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 내가 갖고 있는 에반스 바둑 판 . 바닥에 코르크를 붙여 유리 위에 놔도 긁히거나 움직이질 않는다 .

데이빗이 나에게 한국에 언제 가느냐고 묻길래 다음 달 방학에 간다고 했더니 자기가 따라가도 되겠느냐고 한다. 수천 년 바둑판을 만들어 온 한국 명인들의 바둑판 제작의 노하우를 알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음 달 내가 그와 같이 한국에 와서 한국기원에 데려갔다. 한국기원은 데이빗에게 직원 한 명과 함께 한일바둑판 수원공장에 견학을 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나는 그가 다녀올 동안 기사실에서 바둑도 두고 양재호, 유창혁 두 사범과 식사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 데이빗이 수원에 간 동안 양재호 , 유창혁 사범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필자(관철동 어느 카페)

저녁 무렵에 돌아온 그는 실망한 태도가 역력했다. 나에게 “한일바둑 공장엘 갔더니 대패질, 줄로 가늠해서 나무를 자르고 줄을 치는 모든 게 너무 원시적 방법이라 놀랐다” 고 한다. 한국이 자동차와 컴퓨터를 만드는데 왜 바둑판은 아직도 그렇게 만드느냐고 한다. 자기 예상과 너무 달랐다고 쓴 입맛을 다신다. 바둑판 제작에 미쳐 일찍 은퇴한 데이빗은 결국 이혼을 당한다. 그의 바둑판은 거의 안 팔렸다. 그가 나에게 1986년에 준 ‘자라’라는 나무로 만든 바둑판은 20년 이상 쓰자 줄이 희미해졌다. 줄은 똑바로 쳤어도 물감은 잘못 선택한 것 같다. ^^



▲ 줄이 희미해진 자라 나무 바둑 판

홀아비가 된 데이빗은 시드니로 돈 포터를 찾아가 일생 그의 꿈이었던 슈베르트(Schubert)의 연 가곡 ‘겨울 나그네(Winterreise)’ 전 24 곡을 독일어로 외워서 불렀다. 완창(完唱)하는데 1 시간 반쯤 걸린다. 돈의 반주로 6개월간 맹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의 발표회에 갔던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아서 부르는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못 즐겼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는 작고 달달 떨기까지 한다. 그리고 보니까 에반스가 한국 룸살롱 술자리에서도 성곡(聖曲)을 불러서 분위기를 망친 기억이 난다. 그는 타스마니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단에서는 오보를 불었다.



▲ Franz Schubert 와 그의 친필 악보

데이빗은 이 무렵 주위의 권고와 도움으로 호주바둑협회(AGA) 회장 자리에 오른다. 그는 회장직에 전력을 다 했다. 그러나 열성하고 능력은 조금 달랐다. 그가 3년간 회장을 하고 났을 때 내가 회장직에 출마를 하자 그가 당혹해 하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다. 그가 나에게 선거에서 지자 실망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었다. 내가 일본 바둑클럽과 교류전에서 호주바둑인을 대표해서 그에게 인사말도 시키고 전임회장 예우를 계속 잘 해주자 나에게 마음을 풀고 협조하기 시작한다. 잘 나가던 의사가 이혼을 당하고 타향에서 작은 방을 하나 얻어 살고 있는 데이빗을 보는 내 마음은 착잡하다. 그러나 그가 좋아하는 바둑을 두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지금이 저 사람에겐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행복은 주관적인 거니까.



▲ 세계대회 동포챔피언 좌 (左): 정의선(스웨덴) 이학용(한국) 홍성화(캐나다) 김인(한국단장) 에반스(호주단장) 신흥수(미국) 한상대(호주)

5) 데본 베일리(Devon Baily)
3년 전인가 우리집 사람이 호주에 세미나 참석차 가게 되었다. 내가 간 김에 호주바둑협회 회장 데본을 만나 몇 가지 일에 대해 상의하고 결과를 알아오라고 했다. 시드니에 도착한 집 사람이 데본에게 전화를 했더니 목소리에 힘이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오늘은 힘이 들고 내일쯤 만나도록 노력해 보겠다”고 하길래 집사람이 “나도 내일은 캔베라에서 회의가 있는데 오늘은 안 되느냐”고 했더니 데본이 “사실은 심장수술을 받고 어제 퇴원했다. 의사가 나더러 여러 날 침대에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는데 바둑 일이라면 무리를 해 보겠다”고 했다. 놀란 집사람은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다시 연락 하겠다”고 하며 얼른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집사람은 지금도 “그때 데본이 나와서 저와 얘길 하다가 쓰러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어요?” 하며 아찔해 한다. 진정한 바둑 쟁이는 바둑이라면 목숨도 건다?



▲ 데본 베일리

데본은 대학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했으나 교육자로 풀려 고등학교 물리교사, 교감을 거쳐 교장이 되었다. 시드니 남부에 있는 명문 사립고 교장이었다. 호주–뉴질랜드 국가대항전이 그의 학교에서 주말을 이용해서 열렸을 때다. 대회장이었던 내가 “내일 블루마운튼(Blue Mountain)에 피크닉을 가는데 우리가 오후 6시경에 바비큐(Barbeque)를 하니까 점심은 샌드위치로 먹으려고 한다. 30인 분이 필요한데 자원자를 찾는다” 고 했더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데본이 손을 든다. 내가 “몇 명분이나 해 오겠느냐”고 했더니 “30인분을 다 해오겠다”고 한다.



▲ 호주 - 뉴질랜드팀이 피크닉을 간 불루 마운틴 (Blue Mountains) 의 세 자매봉 (3 Sisters)

나는 그때 대학생 딸과 같이 서있던 그의 부인이 그를 노려보는 눈빛을 보았다. 죽일 것 같았다. 단상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 나만 다 볼 수 있었다. 교장관사가 학교 바로 옆이라 데본 가족이 총출동하여 행사를 도와주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나누어서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내 아내와 딸이 샌드위치를 맛있게 만든다”며 “다 만들겠다”고 한다. “이 사람이 가정에서 수읽기가 제대로 되고 있는 거야?” 나는 걱정이 되었다. 다음 날 샌드위치 30인 분은 해 왔으나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데본은 이혼을 당한다.

그는 교수들이 주축이 된 바둑협회 집행부와 코드가 안 맞아 이사직 한번 안 한 채 시드니 바둑클럽 회장만 20년 가까이 하고 있었다. 한인촌에서 가까운 애쉬필드(Ashfield)에 있는 웨스트리그 클럽(West League Club)에 방 하나를 얻어 시드니 바둑클럽(Sydney Go Club)을 운영했다. 데본은 항상 제일 먼저 나와 바둑판 세트를 제 자리에 놓고 끝난 후에도 끝까지 남아 정리를 했다. 오랜 세월 꾸준히 봉사하는 데본을 보면서 나는 존경심까지 생겼다. 데본도 자존심이 세어서 섣불리 타협을 안 하는 성격이다.

그가 시드니 바둑클럽 이름으로 1990년에는 일본 기성전 도전기를 시드니에 유치한 적이 있었다. 가토, 고바야시, 다케미야, 임해봉 등이 오고 해설은 레드몬드가 맡았다. 호주 문화성장관과 일본대사, 국회의원도 여러 명 참석한 자리에서 데본이 호주챔피언인 나는 자세히 소개하면서 바둑협회 회장단 소개는 한마디만 슬쩍 하고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데본과 사이가 별로이었던 집행부가 다 물러가고 10여 년 후에야 회장이 되더니 그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무른다.

호주대회가 시드니에서 열렸을 때다. 대회장인 내가 애들래이드에서 온 짐(Jim Bates)을 데본 네 집으로 배정했다. 조금 있다가 짐이 나에게 혼자 찾아 와서 “다른 집은 없느냐?”고 한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자기와 데본은 사이가 안 좋다고 한다. 내가 “2년 전에도 그 집에 묵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 때 서로 말을 한 마디도 안 했다”고 한다. “그 집에 닷새를 지냈는데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할 수 있나? 내가 같이 차를 타고 다니는 걸 봤다”고 하자 “차 안에서도 한마디 안하고 그 집에 가서도 지정해 준 침실로 들어가고 아침에 부엌에 가서 먹을 걸 먹고 그의 차를 타고 대회장을 왔다 갔다 했으나 서로 말은 전혀 안 했다”고 한다. “이런 변태들 봤나?” 나는 할말을 잃었다. 할 수 없이 짐을 한국인 집으로 보냈다.

데본은 스위스제도 진행전문가이고 짐은 랭킹점수제 전문가다. 내가 머리를 굴려 둘에게 대회진행을 맡겼다. 서로 의논과 협력을 안 하면 대회 진행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다. 둘이서 진행도표를 테이블 위에 놓고 앉아 서로 대화를 한다. 서로 쳐다보고 웃기까지 한다. 내가 한국인들에게 그들을 가리키며 “저 두 명이 서로 원수인데 내가 저렇게 친하게 만들었다”고 자랑을 했다. 그런데 웬 걸 대회가 끝나자 마자 다시 원수로 돌아 간다. 공과 사가 분명했다. 나는 서양에 그렇게 오래 살면서도 그들이 자기 감정과 책임을 명확히 구분하는데 문화충격을 받았다.



▲ 양사범에게 지도 받는 데본 그 옆은 돈 포터 ▲ 호주 팬에게 사인해 주는 조훈현 9 단

1990년대 후반 어느 날. 강남 법원 건너편 한일바둑판 근처 중국식당에서 나는 데본 베일리와 오송생 9단을 만나고 있었다. 호주바둑협회(AGA) 전임회장, 현 회장, 국가사범 3인이 서울에서 회동한 셈이다. 그 자리에 데본은 루(Lou)라는 자기의 새 부인을 데리고 나왔다. 전 부인은 교장 부인 같았는데 비해 루는 젊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데본이 나에게 “루는 나의 바둑활동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해서 결혼했다”고 그녀 앞에서 말한다. 거기다 오 9단은 한 술 더 뜬다. 한국말로 “내 처는 호랑이 띠고 나는 닭 띠라 서로 안 맞아. 그래서 이혼했어” 한 사람은 바둑활동에 협조한다는 조건으로 결혼하고 한 사람은 띠가 안 맞는다고 이혼했다. “이 거 결혼과 이혼이 이렇게 쉬운 거야?” 내가 좀 혼동되어 있는데 오 9단이 “이거 내 새 와이프(Wife)입니다” 하며 사진을 보여준다. 그 당시 그는 존댓말과 반말을 혼용하고 있었다. 하얼빈 여자라는데 딸이 하나 있고 나이는 오 9단 보다 20여 년이 아래였다. 미인이라 모델처럼 보였다. 그들의 전처들과 잘아는 나로서는 젊은 부인을 얻은 이 두 명에게 무슨 말로 어떻게 축하를 해 주어야 할지 몰라 한 동안 헤맸다.



▲ 앞줄 오른쪽이 데본 베일리 . 한국대사배 시드니(2009년 8월 8일)


▲ 톰 , 데본, 돈 3명이 함께 모였다. 2009년 8월

6) 네블 스마이스(Neville Smythe)
네블은 호주 바둑계에서 비중으로는 가장 큰 인물이다. 그는 초대 호주 바둑회장을 맡아 10년간 회장으로 호주 바둑계를 이끌었다. 그를 지금에서야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기인(Weirdo)이 아니어서 사고를 안 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없다. 네블은 다만 조심성이 너무 많아 나를 답답하게는 만들기는 한다. 그러나 언행이 언제나 모범생다웠다. 예를 들어 내가 북한에 간다니까 그렇게 말리더니 내 결심이 굳은 걸 보고는 “그럼 호주팀 단장을 맡지 말고 숨죽이고 바둑만 두고 오라”고 한다. 호주팀 단장은 북한에 잘 안 알려진 신명길 7단을 시키라고 한다. 네블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당신이 단장을 맡아 어쩌다가 발언을 잘 못해 북한에 억류되면 어떻게 할 거냐”며 국제전화로 걱정걱정을 한다. “북한에 가는 나는 걱정을 안 하는데 왜 자기가 난리야?” 나는 평양에 가서 호주팀 단장을 맡았다. 그리고 무사히 돌아 왔다.



▲ (좌) 네블 스마이스, 안영길 사범, 이정웅 한인바둑회장, 이세나 7단, 신명길 7단, 최태진 총무(2009년)

내가 1993년 회장이 됐을 때다. 신임 총무를 지명해야 하는데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안 보인다. 그 때 네블의 얼굴을 보니까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단상에 올라가서 “네블 스마이스 교수가 10년 이상은 회장직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썩히기에는 호주 바둑계를 위해 너무 아깝다. 네블이 총무직을 맡아 나를 도와주길 바란다”고 하며 네블을 총무로 지명했다. 참석자들이 모두 놀랐다. 그는 호주 바둑계 대부로서 최고의 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숨죽이고 있는데 네블이 일어나더니 “총무로서 신임회장 한교수를 도와 열심히 일을 하겠다”고 하자 다들 또 한 번 놀란다. 그래서 네블이 호주 바둑협회 총무가 되었다.

그 무렵 호주 야당인 자유당에서는 당수와 부당수가 의견 충돌을 빚었다. 그들은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투표로 대결했는데 부당수가 이겨 새로운 당수가 되었다. 그러자 그가 곧 퇴출 당한 당수를 부당수에 지명하자 어제까지 당수였던 사람이 그걸 수락한다. 두 명이 자리만 바꿔 앉았다. 예비내각(Shadow Cabinet)에서 야당의 당수는 수상, 부 당수는 외무상을 맡는다. 전직 당수인 새 부당수는 외교문제를 열심히 공부해서 국회에서 여당의 외교정책을 공격하며 그 방면에 전문가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때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직접 목격했다. 3년 후 전당대회에서 그가 이겨 다시 당수로 돌아온다. 바둑회 사람들은 네블이 총무가 된 걸 “바둑계의 자유당 사건”이라고 했다.

내가 멜본에서 8년을 산 뒤 켄베라로 옮겨갈 적에 네블 부부가 나서서 내가 살 집을 구해 주었다. 자기네가 약 20군데 후보를 미리 찾아 놓고 국립대학 행정직 높은 자리에 있던 그의 부인 모우라가 우릴 안내하고 다녔다. 나는 네블 집에서 약 5분 거리에 집을 샀다. 그 후 내가 시드니대학 교수가 되어 시드니로 이사 갈 때까지 5년간 이웃으로 우리는 가깝게 지냈다. 내가 네블이란 사람을 알기 때문에 그를 총무로 지명할 수가 있었다. 네블은 현재 국제바둑연맹(IGF) 오세아니아 이사로 있다. 돌이켜 보면 누가 회장이 되든지 네블은 언제나 호주 바둑계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 나와 네블이 살던 동네 Red Hill.


▲ 앞줄 : 안영길사범, 이정웅회장, 네블 스마이스 교수 뒷줄: 2009 한국대사배 각 조 입상자들


▲ 캔베라 신 , 구국회의사당(앞 건물)


▲ 캔베라 타워 . 오른쪽 산 (남산타워와 똑 같이 생겼다 . 캔베라가 1년 먼저 세움 )


▲ 캔베라의 밤.


▲ 600미터 고원에 들어선 호주 수도 캔베라.


▲ 저녁에 골프장에 모인 야행성 동물 캥거루.


▲ 백인들이 5백만명이었던 원주민을 노예로 쓰고 거의 다 죽였다. 현재 인구는 47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 4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동굴 속 원주민 벽화 ▲ 속이 빈 통나무 관(棺)


▲ 원주민 발명품.


▲ 원주민 발명품들. 부머랭과 디저리두. 

 

세계바둑사
거꾸로 가는 나라 호주 ①
한상대 교수의 해외 바둑계 탐방
2009-08-13 오후 9:25:19 입력 / 2009-09-03 오전 11:47:59 수정

호주는 독립된 대륙으로 혼자 진화하여 동식물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와는 가장 이질적 대륙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와 거꾸로 가는 게 너무 많다. 계절이 거꾸로 가고 장마철이 겨울에 있다. 사람이 만든 것도 자동차가 좌측통행을 하고 전기 스위치도 내리면 켜지고 올리면 꺼진다. 호주는 남한의 78배 이상 크지만 인구는 약 2000만이다. 자연이 아름답고 오염이 전혀 없다. 나라의 별명은 “Lucky country”. 이런 나라에서도 바둑을 둔다. 바둑인구는 3000명 정도.


1. 초기

호주에 바둑을 제일 먼저 소개한 사람은 그래이(Geoffrey Gray)로 당시 그는 시드니대학 수학과 교수였다. 1934년에 독일인 라스커가 ‘바둑 입문서(An Elementary Book on Go)’를 미국에서 출간했는데 그래이는 그 책으로 공부하였다. 1950년대 그래이가 고등학생을 위한 수학참고서를 썼는데 그 책이 히트를 쳐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대학교수직을 조기 사임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바둑에 전념했다. 그 때 그래이에게서 바둑을 배운 플래토(Kurt Flatau)는 호주 체스챔피언이었다. 플래토가 시드니 체스클럽 한 모퉁이에 최초의 바둑클럽을 열고 바둑을 가르쳤다. 1960년대 시드니 대학생 스마이스와 파워가 그곳에서 바둑을 배웠다. 초대 시드니클럽 회장은 그래이 박사가 맡았다.


▲ 미항 ( 美港 ) 시드니

내가 1975년에 시드니에서 그래이를 만났을 때 그는 50대 후반이었고 바둑은 2단으로 나에게 4점 놓고도 잘 안 되는 수준이었다. 플래토 4단은 나에게 3점으로 두었다. 미국 프린스톤 대학에서 수학박사를 획득하고 돌아온 스마이스 (Neville Smythe)가 그의 지도교수 폭스(Ralph Fox)로 부터 바둑을 연마하고 4단이 되어 돌아와 가세했다. 폭스 교수는 프린스톤 대학에 미국 최초의 바둑 클럽을 만든 인물이다. 한편 일본에서 8년 간 체류하며 일본학을 전공한 파워(John Power)도 일본 5단이 되어 돌아왔다. 다른 동양학교수 포터(Don Potter) 4단과 포인튼 교수까지 합해 지식인 중심 호주 바둑계가 형성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 이민자가 늘면서 이들 화초 바둑은 한국의 힘 바둑 앞에서 맥 없이 무너진다. 특히 파워 교수는 필자와 며칠 사이에 바둑을 50판쯤 두어 전패를 하자 “내가 앞으로 10년은 호주 챔피언을 할 줄 생각했는데 한국인들이 이민 온다는 건 생각도 못 했다. 앞으로 내가 10년은 바둑 공부만 해야 당신을 따라 잡을까 말까 한데 나에겐 그럴 시간이 없다” 며 호주대회에 출전을 안 하기 시작했다. 그는 호주챔피언이 되겠다는 꿈을 접고 바둑 필자로 돌아 섰다. 일본에 가서 ‘바둑세계(Go World)’ 란 영어 바둑잡지를 내고 현존 영어바둑서적 중 최고로 꼽히는 그의 필생의 걸작 ‘무적 슈사쿠(秀策-Invincible Shusaku)’를 집필한다. 내가 “그 책이 나오는데 나도 한 몫 했다” 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


▲ 무적 슈사쿠

▲ 슈사쿠의 대국보를 모은 책

호주 바둑협회가 결성된 것은 1978년이었다. 197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릴 제 1회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에 호주대표를 뽑기 위해 시드니에서 제1회 호주바둑챔피언대회가 열렸다. 그 대회 중 정기총회를 열고 호주바둑협회(AGA)가 탄생했다. 캔베라 국립대 수학과 과장인 스마이스 교수가 초대회장에 취임했다. 초대 호주챔피언은 내가 되고 일본 아마강자 마쯔다가 나를 반 집으로 누르고 오픈챔피언에 올랐다. 이 대회에 한국에서 기원 1급이었다고 자처하는 아마 5단 동포 바둑인 2~30명이 대거 출전하여 상위권을 휩쓸며 앞으로 한국세가 호주 바둑계를 석권할 것을 예고했다. 이 당시 호주 최고수 20명을 뽑으라면 그 중 15명은 한국인이었다. 지금은 중국이 그렇다.

일본기원이 호주바둑협회 창립에 적극 협조했다. 이 무렵 일본은 전 세계 여러 나라가 바둑협회를 설립하는 데에 인력과 재정을 지원했다. 호주에도 프로기사 2 명이 바둑세트 30조쯤을 선물로 들고 와서 도왔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공로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힘들여 만든 각국의 협회와 세계아마추어대회를 우리나라 국무총리배가 똑같이 흉내 내고 이용만 하면서 세계대회를 개최하는 걸 일본이 좋아할 이유가 없다. 나는 우리가 선발한 국가끼리 단체전을 개최할 것을 지금도 주장한다. 어차피 세계대회의 성적에는 관심이 없는 바둑 하수국가들의 선수와 단장을 한국에 공짜 여행을 시켜준다고 해서 그 나라 바둑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기도보급은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


▲ 세계에서 가장 큰 돌 울루루 (Uluru). 호주 내륙 한 복판에 있다 . 둘레가 9km

이 무렵 호주 주요 도시에 바둑 클럽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스마이스 교수가 수도 캔베라(Canberra)에 클럽을 창설했고 한국과 일본대사관 직원들이 중심 멤버가 되었다. 빅토리아 주에서는 변호사 햇필드(Bruce Hatfield) 2단이 멜본(Melbourne) 클럽을 설립하고 나는 사범이 되었다. 퀸즈랜드에서는 회계사 레버릿(Bill Leverett) 초단이 브리스베인 클럽을 만들었다. 뉴사우스 웨일즈에서는 20대 젊은 공무원 데이비스(Clive Davis) 3단이 시드니(Sydney) 클럽을 재 정비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가서야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주에는 영국인 컴퓨터 강사 배이트(Jim Bates) 5단이 애들레이드(Adelaide) 클럽을 열었고, 타스마니아 주 호바트(Hobart)에서는 의사 에반스(David Evans) 초단이 클럽을 열고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에 들어 와서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주 퍼스(Perth)에 컴퓨터 전문가 클레이(Paul Clay) 초단이 한국교민 중심으로 클럽을 개설해 드디어 호주 주요도시 전체에 바둑 클럽이 생겼다.


▲ 달리는데 앞에 348 미터 높이의 거대한 바위가 막고 서 있을 때 느끼는 위압감을 생각해 보라 ( 서울 남산 265 미터 )


2. 한국계 활약

초기 호주 바둑계는 나의 독무대였다. 나는 총 15번 호주대회에 나가 12번을 우승했다. 외국인에게도 개방된 오픈 챔피언 자리에는 8번 올랐다. 세계대회는 두 번 계속 못 나간다는 규정 때문에 6번 출전했다. 그러는 동안에 한국과 중국에서 강자들이 속속 이민 와서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으로는 1980년대 중반에 이민 온 성균관대 선수 출신의 지보근과 연구생 출신 문춘식이 있다. 1993년을 마지막으로 나는 호주대회에 더 이상 출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보근의 독주시대가 시작되었다.

지보근은 호주동아 기자로 일하면서 기타도 잘 쳤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는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한다. 지보근만 중국강자 왕우비를 가끔 꺾을 수 있었다. 문춘식은 한번 우승한 뒤 공부에만 전념해 시드니대학을 졸업하고 치과의사가 된다. 한국인 중에는 지보근, 임의재, 신명길 3명이 라이벌이었으나 임의재마저 지병을 얻어 10여년 전에 한국으로 가 버리자 한국인 강자는 신명길 7단 혼자 남게 되었다.

20년 전에 멜본서 시드니로 거처를 옮긴 신명길 7단은 한 동안 바둑보다 사업에 전념하여 성공한다. 그는 현재 시드니에 일식식당 10개와 중국 항주기원 6층 식당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식당경영은 부인에게 맡기고 그의 본업인 건설업에 올인하고 있다. 내가 호주에 가면 그가 건설하는 아파트 단지나 상가를 보여 주곤 한다. 부부가 고급 벤츠를 몰고 다니고 바둑계를 많이 돕고 있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중국계가 휩쓰는 속에서 한국바둑의 존재를 알리느라고 바둑대회만은 계속 출전하고 있다.


▲ 박창규사범 , 김 북한단장 , 필자 , 신명길 7단 (2008년 11월 항주 )

바둑협회 참여도도 한국인이 높다. 1978년 이래 호주 바둑협회 이사직을 계속 맡아 온 내가 1993년에는 회장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그러나 3년 후 한국으로 영주귀국하기 위해 사임한다. 나의 회장취임은 한국인이 외국에 이민 가서 그 나라 문화단체의 총수가 된 최초의 사례로 회자(膾炙)되었다. 이후 호주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원인 공학박사 진양일 4단이 2002년부터 부회장으로 있다가 2004년에는 회장이 된다. 한국인이 처음으로 회장이 된 내 경우도 특별한 일인데 호주에선 한 명이 더 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매년 200명쯤이 참가하는 정기총회에 20여 년 동안 한국인은 나와 진 박사 두 명만 참석해 왔다. 다른 한국인들은 영어로 하는 회의라 잘 참석을 하지 않았다.


▲ 왼쪽 앞에서 무얼 마시고 있는 사람이 진양일 박사 (2008 년 11 월 )

그 후 2006년에는 신명길 7단이 AGA 부회장을 맡는다. 한국세가 호주에서는 유달리 극성을 부렸다. 다른 나라는 캐나다에서 치과의사며 ‘입단연가’ 작가인 고(故) 홍성화 5단이 부회장을 맡았던 일이 있다. 나와 진 박사가 호주에서 공부를 했고 홍박사도 캐나다에서 공부를 해서 현지인들과 문화격차가 적었던 공통점이 있다.

호주 국가 사범이었던 중국인 오송생 9단이 세상을 떠나고 그 빈자리에 한국인 안영길 6단이 2008년 8월 호주에 상륙한다. 안사범은 바둑도 영어도 오 9단 보다 상수다. 안사범이라면 새로운 한국 붐을 기대해 볼만 하다. 호주 바둑계의 새로운 지각 변동이 일어날 조짐이다. 그의 얘기는 뒤에 다시 하겠다.


▲ 인류 건축사상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불리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 오페라하우스 내부 (Concert Hall). 큰 홀 두 개와 중소형 홀 15 개가 있다 .

역대 호주 오픈 챔피언(AGA Open Champions)

연도
이름
연도
이름
연도
이름
연도
이름
1978
H. Masuda
(마쓰다)
1986
Chi-Moon Park
(박치문)
1994
Yufei Wang
(왕우비)
2002
Chengliang
Wang (왕진량)
1979
I. Hou (허인)
1987
Choon-Sik
Moon (문춘식)
1995
Andrew Chi
(지보근)
2003
Yiming Guo
(곽이명)
1980
Sang-Dae
Hahn (한상대)
1988
Yufei Wang
(왕우비)
1996
Andrew Chi
(지보근)
2004
Yiming Guo
(곽이명)
1981
Sang-Dae
Hahn (한상대)
1989
Sang-Dae
Hahn(한상대)
1997
Andrew Chi
(지보근)
2005
Kevin Chen
(첸 케빈)
1982
Sang-Dae
Hahn (한상대)
1990
Yufei Wang
(왕우비)
1998
Andrew Chi
(지보근)
2006
Raphael Shin
(신명길)
1983
Kwang-Ho An
(안광호)
1991
Sang-Dae
Hahn (한상대)
1999
Andrew Chi
(지보근)
2007
David He
(허 데이빗)
1984
Sang-Dae
Hahn(한상대)
1992
Yoon Huh
(허윤)
2000
Yiming Guo
(곽이명)
2008
Miao Zhao
(자오 먀오)
1985
Sang-Dae
Hahn(한상대)
1993
Sang-Dae
Hahn (한상대)
2001
Yiming Guo
(곽이명)
2009
10월에 결정

*호주 오픈챔피언도 30년 동안 한국인이 19회나 우승을 한다. 이 중에는 원로 강자 허윤씨 이름도 보이고 중앙일보 관전필자 박치문씨도 보인다. 1994년 이후에는 1인자 왕우비(王宇飛)가 지병으로 안 나타나고 몇 년 후 지보근도 타계하자 중국계 2인자였던 곽이명(郭以明)이 호주 1인자로 올라 선다. 특히 2000년부터 호주대회는 중국인이 휩쓸고 한국인 우승은 2006년 신명길 7단 한 번뿐이었다.

2005년에는 멜본의 1인자 13세 중국소년 첸이 우승을 한다. 2008년에는 호주인으로 첫 프로기사가 탄생한다. 브리스베인에서 태어난 중국계 혼혈 14세 소녀 미싱엄(Joanne Missingham)이 대만에서 바둑훈련을 받고 중국에 가서 여류 프로기사로 입단했다.

1970~80년대 호주를 주름 잡던 한국 바둑인들은 다 연로해 지고 그나마 취미도 바둑에서 골프로 바꾼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2세들에게는 바둑을 안 가르친다. 중국이민자는 자꾸 늘어나고 바둑인구도 그 만큼 늘고 있다. 조금씩 들어 오는 한국 이민자 중에는 바둑 인구가 거의 없다. 젊은 사람들이 바둑을 못 두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서양 국가면 거의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호주 바둑지도자들은 순수 호주 백인 중에 강자가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다.


▲ 2008 응창기배 호주 결승 곽이명과 미싱엄

▲ 호주국기 : 영국 유니언 잭과 남십자성 별자리를 혼합

▲ 호주 국장 . 호주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캥거루와 이뮤 ( 타조과 ). 두 동물의 특징은 후진을 못 한다

한상대(전 시드니 대학 교수, 호주바둑협회(AGA) 회장)
(sdhahn@gmail.com) 017)276-5878

 

지옥에서 보낸 한철

호주에는 한상대가 있었다 There was Hahn Sang-Dae in Australia.

 

(Note: 1983 서봉수 그의 마지막 타이틀인 명인 조훈현에게 잃었다. 이로써 조훈현 7 타이틀을 차지하고 천하 통일을 이룬다. 그러자 서봉수 홀연히 한상대 유럽 여행을 떠난다. 유럽에서 돌아온 서봉수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3개의 타이틀을 차지 때까지 조훈현 계속 무찔렀다. 당시 바둑 팬들은 여행만을 통해 무엇이 서봉수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는지 의아해 했다.
Note : In early 1983, Seo Bong-Soo lost his last title “Myongin” to Cho Hoon-Hyun and it made Cho to become all the 7 major titles holder (天下統一). Then Seo suddenly took a trip to Europe with Hahn Sang-Dae. He became a different person when he came back from Europe and kept beating Cho until he took 3 major titles from Cho. Baduk fans wondered, at that time, what made Seo so strong only after he took a trip).

 

서봉수는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성적을 낼 수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불과 몇 달 사이에. 서봉수가 한 일이라곤 한상대라는 사람과 함께 유럽 여행을 한 것 뿐이었다. 여행을 하면 바둑이 느는 것일까? 그렇다. 조훈현에게 2차 천하통일의 영광을 선사하고 또 다시 무관으로 전락했던 서봉수가 돌연 폭풍과 같은 기세로, 80년 겨울에 그랬던 것처럼, 잇달아 세 개의 타이틀을 쟁취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에 대해 당시 바둑관계자들은 "그것은 여행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What made Seo Bong-Soo suddenly produce, within only a few months, good results? The only thing Seo Bong-Soo did was to travel around Europe with a man called Hahn Sang-Dae. Can traveling contribute to better baduk skills? Yes it can. Seo Bong-Soo, who fell into the disgrace of “no-title” after presenting the 2nd grand slam to Cho Hun-Hyun, reclaimed 3 major titles like a sudden tidal wave. Everyone said it was the "traveling".

 

서봉수를 새로운 에너지로 충전시켜 준 것, 그것은 여행이었다. 무엇 보다도 결정적인 변화는 서봉수가 조훈현과의 싸움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이었다. 서봉수는 조훈현의 타이틀을 연거푸 빼앗아냈다. 마치 80년 겨울 시즌의 재판 같았다. 서봉수는 유럽 여행을 가서 바둑의 비급이라도 구경하고 온 사람 같았다.
The energizer which recharged Seo was indeed traveling. The most significant phenomenon was Seo's return from the defeat against Cho HunHyun. Seo reclaimed titles from Cho one by one. It was like a revival for the winter of '80. Seo looked as if he had discovered the secret code to Baduk during the trip to Europe.

 

조훈현에게 두번째 천하통일의 영광을 안겨 준 서봉수는 홀연히 여행을 떠났다. 서봉수에게 해외여행을 권한 사람은 원로 한글학자 한갑수의 장남 한상대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한상대는 호주교포였다. 호주 바둑 챔피언이었다. 1979년부터 해마다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아마추어 바둑 선수권 대회의 호주 대표는 네 번에 세 번 꼴은 한상대였다.
Seo Bong-Soo left on a sudden journey after he had given the honor of the 2nd grand slam to Cho Hun-Hyun. The man who advised Seo for the overseas trip was Hahn Sang-Dae, the first born son of the distinguished Korean language scholar Hahn Gap-Soo. Hahn Sang-Dae was an expatriate (Korean-Australian) at the time, and he resided in Australia. He was the Australian Baduk Champion. He represented Australia many times at the World Amateur Go Championships organized by Nihon Ki-in since 1979.

 

한상대는 말하자면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당당한 체격에 호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연세대 정외과를 나왔는데, 호주에서는 정치학과 성악을 공부했다. 베이스-바리톤의 목소리가 그럴 듯했다. 동, 서양의 역사, 철학, 예술에 박학했으며 바둑 외에 승마, 탁구 등 스포츠가 또한 만능이었다. 볼링은 2백, 당구도 5백점이었다.
Hahn is what we call “a Renaissance man” His well-built body and favorable impression appeal to people's heart. He graduated from Yon-Sei University with Politics major. He continued his study in politics and music (singing) in Australia. He has nice baritone voice. He has wide - knowledge in Eastern and Western History, Philosophy, Arts, and his hobbies are diverse such as horse-back riding, table tennis, and so on... His ten-pin bowling average score is 200, and 500 for billiard.

 

한상대가 번번이 선발전에서 우승해 호주대표로 세계대회에 참가하자, 호주바둑협회가 묘수를 낸 적이 있었다. 바둑대회를 시드니나 멜버른 같은 대도시에서 열지를 않고 시드니로부터 한 5백 킬로쯤 떨어진 섬에서 개최한 것이다. 시간과 경비의 부담을 높여 한상대의 출전 자체를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When Hahn Sang-Dae won the Australian Championship every year, the AGA changed its regulation to limit his frequent (monopolistic) participation. If one person represented Australia at the World Championships, he or she has to wait 2 more years to be eligible again. In addition to that, they applied a very complicated point system for qualification.

 

대학 교수로 직장을 다니면서 바둑대회 참가를 위해 며칠씩 자리를 비우기는 곤란한 일이었다. 협회가 노린 게 바로 그거였다. 그러나 한상대는 태연히, 끝까지 대회에 참가해 우승컵을 가져갔다. 협회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까지 하는데야 더 할 말이 없었다.
He attended the every Australian National Championships wherever and wherever it is held and always victorious. It was not easy to do it while he works as an academic at Sydney University.

 

세계대회에 참가한 한상대는, 대회가 끝나면 대회에 참가했던 서양 친구들을 전부 데리고 한국을 찾곤 했다. 길지 않은 일정이어서 둘러보는 곳도 한국기원과 용인 민속촌 정도였지만, 한국 바둑의 홍보 효과는 컸다. 그들은 한국의 프로기사에게 우연히 한 수 지도를 받게 되는 경우에는 그 행운에 황송해 했고, 한국의 아마추어들과 교류전을 가질 땐 그 따뜻한 우의를 고마워했다.
After the world amateur Baduk(Go) championships, he usually took western players to Korea for a visit. Due to the brevity of the trip, they only managed to visit Hankuk-Kiwon and folk village in Yongin. However, its impact on the Korean Baduk and the promotion of the Korean Baduk to the world was significant. The Western players are honored whenever they had chance to have games with professionals, and they were appreciative when they had friendship matches with Korean amateur players.

 

한상대는 호주 사람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영어로 강의를 할 수 있는 어학 실력과 교수라는 신분이 큰 도움이 되었다. 수많은 제자가 생겼다. 한상대는 그들의 실전 전투력을 길러 주기 위해 한 가지 기발한 룰을 만들었다. 대회에서 전적이 똑같을 경우에는 집 수 차이로 서열을 정한다는 것이었다.
Hahn Sang-Dae taught Australians Baduk. His well conversed English and his position as a professor helped. He has made a number of Baduk students. He invented a unique rule to develop the fighting skills of his students'. They will be placed in hierarchy according to the size of their territory when the winning result was equal at the competition.

 

예컨대 어떤 두 사람이 6승1패로 동률이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A라는 선수는 반 집, 두 집 반, 아무튼 대개 그런 식으로 이겼고, 그에 비해 B는 주로 대마를 잡고 불계로 이긴 판이 많았다면 B에게 점수를 더 주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의 방내기 개념을 도입한 것이었다.
For instance, let's say 2 players' result were equal with 6 wins and 1 loss. One won by a few points while the other won by resignation. Then the latter should be given higher ranking. In other words, he introduced the concept of Korean Bangnaegi 1).

 

그러자 아주 재미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계가로 끝나는 판은 거의 없어졌고, 유리한 쪽에서 안전운행을 하기는 커녕 더욱 사납게, 돌 하나라도 더 잡아 먹으려고 기를 쓰게 되었다.
Then interesting phenomena appeared. The safe counting territory games disappeared and more aggressive and fighting games from winning side became popular. The winner tried harder to capture more stones until last minute.

 

1) Bangnaegi : when Koreans play for money, they decide the amount for winning the game and in addition to that, they pay certain amount for each Bang which is 10 points up to 100 (from 91 points and it is called Manbang). For instance, If you won by 11 points, that means you won by 2 Bang. if you decided basic amount as 20 dollars and 10 dollars for each Bang, then you have to pay your opponent 40 dollars when he/she won by 21~30 points(3 Bang). If you won by more than 91 points, you will get paid 120 dollars. This system makes players greedy and plays fighting oriented games.

 

한상대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어이(?) 호주바둑협회 회장이 되었다. 호주바둑협회 회장이라는 자리가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에 이민을 가서 그 나라 한 문화단체의 회장이 된 케이스는 없었다. 그 방면에서 한상대는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중국의 방랑기객 오송생9단을 호주에 나중에는 한국에 데려온 것도 그였다.
He was elected, at last, as President of Australian Go Association. He was the first case of an ethnic Korean becoming the president of the national Baduk Association in foreign country. He was the first Korean who became the head of a nation wide cultural organization outside Korean peninsula. It was also him who brought Wu Sung-Seng, a well-known Chinese 9 dan player to Australia and later to Korea.

 

한상대는 시드니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는 교수이기도 했으며, 또 틈만나면 세계 각국을 여행하는 여행전문가였다. 서봉수는 그런 한상대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파트너로 한상대를 만난 것은 서봉수의 행운이자, 불운이었다. 한상대는 박학다식한 여행전문가였으므로 서봉수는 도서관이나 박물관, 혹은 백과사전을 옆에 끼고 여행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Hahn Sang-Dae was a scholar who lectures the Korean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Sydney and he is also a travel expert. Seo Bong-Soo left for the trip to Europe with Him. For Seo, it was lucky and unlucky to have encountered Hahn. Hahn was a versatile intellectual, and knowledgeable about travel. For Seo, it was like traveling with a walking encyclopedia, a library, or a museum.


 

지옥에서 보낸 한철 A season spent in Hell
그러나 서봉수는 한상대의 체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승마와 탁구 등으로 단련된 한상대는 체력이 또한 절륜의 수준이었다. 대국에 지치고 "야통"에 지친 서봉수는 언감생심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야통이란 글자 그대로 밤을 새는 것을 말한다. 서봉수는 한상대를 따라가느라 허덕였다.
Seo could not keep up with Hahn’s energy. Hahn’s fitness built up through years of horse-riding and table tennis was unbelievable. For Seo whose energy was drained by title matches and “Yatong”(break through a night), it was beyond comparison(언감생심! How dare!). Seo was not Hahn’s match counterpart. ‘Yatong” is a Korean word for staying up all night. Seo was breathless following Hahn.

 

한상대는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자동차로 달리는 적도 있었다. 어떤 때는 밤을 새워 달리는 때도 있었다. 끼니는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으로 때우는 적도 있었다. 서봉수는 지쳤다.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서봉수는 그는 조금만 쉬었다 가자고, 뭘 좀 먹고 가자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마이동풍이었고 쇠 귀에 경 읽기였다.
Someday, Hahn drove for more than 10 hours. It was even worse when he just drove all night through. When they could not find a snack bar open in those hours, Seo was too hungry to go on. Seo pleaded to take a rest and to eat something. But his plea was like chanting in a cow’s ears. It was like 마이동풍(East wind to horse ear-not influential).

 

한상대는 여행전문가답게 빈틈없이 스케줄을 짜놓고 있었다. 모든 행동은 그 일정표에 따랐다. 일정에 없는 일은 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제트코스터 (Roller coaster) 비슷한 것을 타기도 했는데, 그 아찔함과 무서움이 또 우리나라 놀이공원에 있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서봉수는 "이러다가 잘못하면 죽는 거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겁이 더럭 났지만, 애처로운 눈길로 한상대를 쳐다보면 한상대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다.
Hahn’s itinerary was very tightly planned to suit a professional traveler. All activities were being done according to the schedule. He did not do anything impulsive. In France, they rode the Roller coaster which was much more frightening and rigorous than the ones in Korea. Seo was so scared. “I could even die” Seo thought at one point. When he tried pleading look toward Hahn, he only found Hahn’s grin in return.

어느 해변에서는 늘씬한 팔등신 아가씨들이 앞가슴을 다 내놓고 활보를 하고 있었다. 한상대는 그런 것 조차 구경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체력을 길러야 한다며 서봉수를 바닷물로 그냥 밀어넣기도 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가 이미 주눅이 들어있던 서봉수는 꼼짝없이 한상대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고, 한상대의 의중을 좇아야 했다.
On a beach, glamorous girls were striding with their breasts completely naked. Hahn even did not allow time for Seo to enjoy that. He once pushed Seo into the water to build up his fitness. Seo who already had been feeling timid did not have any option but to follow Hahn and his plan. Seo’s language barrier discouraged him even more.

 

여행은 즐거운 것이어야 했건만, 한상대와 함께 한 여행은 그 여름의 두 달은 글자 그대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었다. 그 때의 얘기가 나오면 지금도 서봉수는 치를 떤다. 내 다시는 그 양반과 여행을 하지 않으리. 내가 두 번 다시 그 양반과 여행을 하면 내 성을 갈리라!
Travel was supposed to be an enjoyable thing. But those two months Seo had had with Hahn was literally the season spent in hell. When people talk about that trip, Seo still shivers. He vows not to go on a trip with Hahn. “I will rather change my surname than travel with him again!”

 

청년도 아니고 소년도 아닌 더벅머리로 승부의 세계에 데뷔한 서봉수가 이기고지는 것에 뼈를 깎고, 살을 녹인 것도 어느덧 10여 년이었다. 이제는 몸과 마음을 한번쯤 세탁해 줄 때였다. 한상대의 등장, 한상대와의 만남은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Seo made debut in Baduk with untidy hair not suitable either for a young man or a boy. It had been already 10 years that he had ground his bones and had melted his flesh for the winning and the losing. It was about time that he cleansed his body and mind. Hahn’s entry into his life, the meeting with a man called Hahn Sang Dae was fatal timing in his life.

 

그러나 이번에도 서봉수는 타이틀 세개가 한계였다. 무관의 평민에서 순식간에 3관의 영주로 신분의 수직상승이 이루어지자, 넓어졌던 시야가 도로 좁아지고, 텅 비었던 마음에 다시 번뇌의 구정물이 고이며 겸손 대신 오만이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일까?
But alas! Holing 3 titles was his limit. When he made vertical rise from a commoner to a lord with 3 crowns, his sight get narrowed again, his cleansed mind started to gather carnal anguish and his humble state of mind was replaced by conceit, may be?

 

(이광구 “현대 한국 바둑사” 중에서)
(From “The History of Modern Korean Baduk ” by Lee Kwang-Koo)

 

영어수필 - 호주 vs 뉴질랜드

존(John)이 또 장고에 들어갔다. 내가 존의 오른쪽 말을 공격하기 위해 먼저 왼쪽 말을 먼저 공격하는 와중에 왼쪽 말 생사가 불확실해진 시점이었다. 이 친구가 판을 뚫어지게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는 몸을 도로 소파 의자에 파묻고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빤다. 존은 이번 대회에 참가한 선수중 유일한 흡연자였다. 존은 뉴질랜드 최대도시인 오클랜드(Auckland) 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데 평소엔 나에게 석점을 놓는다.
John fell into deep reading again. I was trying to take John's right side stones by attacking his left flank first, but in the process of attacking, the life of the left side stones had become uncertain. John stared into the board as if he were burning a hole into it, and then he fell back into his couch chair and took a deep drag of his cigarette. John was the only smoker amongst the players who were participating in the National Match. John is from Auckland, the largest city in New Zealand, and he usually played with a three - stone handicap against me.

 

이번 제4 회 호주 VS 뉴질랜드 국가 대항전에서도 3 단으로 뉴질랜드 팀의 말석인 4 장으로 참가하여 호주팀 주장인 나와 첫판을 두고 있는 중이다. 내가 답답하여 산책을 하러 잠깐 호텔 밖으로 나왔다. 뉴질랜드 남섬의 유명한 온천 휴양지인 이곳 해머스프링(Hammer Spring)호텔의 주변 경치는 환상적이었다. 바로 호텔 뒷산의 정상부분은 흰 눈으로 덮였는데도 호텔 주변은 온갖 꽃이 만발했다. 불과 몇백 미터 밖에는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온 천지는 녹색카펫을 깔아놓은 것처럼 푸른 초원이다.
In this tournament, which was the 4th ‘Australia VS New Zealand’ international rivalry match, he had entered in the last seat as a 4th player and was now playing in the middle of the first game with me, the Australian team captain. I was feeling a bit stuffy so I went out for a while to walk around. This was a famous resort in the South Island of New Zealand, and the scenery from this Hammer Spring hotel was fantastic! The summit of the mountain right behind the hotel was covered in snow but the surroundings of the hotel were in full bloom with all sorts of flowers. Merely a few hundred meters away there were flocks of sheep leisurely grazing in the plains. It seemed as though a green carpet had been laid there, because the whole world was grassland.

 

 

국가대항전이 거행되고 있는 호텔 볼륨(Ball Room-호텔에서 무도회나 파티 용으로 사용하는 제일 크고 좋은 홀)을 밖에서 내가 들여 다 봤다. 안에는 샨델리아 밑 4개의 테이블에서 양국선수들이 진지하게 바둑판을 마주하고 앉아 대국에 열중하고 있다. 내가 밖에서 제3자의 눈으로 대회장을 들여다보니 세상에 변태들이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친구들이 이 좋은 날씨와 경치엔 아랑곳없이 바둑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이 한편 기특하다는 생각과 또 한편으론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I looked into the Hotel ballroom from outside where the National Baduk Matches were being held. There were four tables set up under the chandelier and players from both countries were seriously engrossed in their games. As I saw them from the outside with a 3rd person’s eye, a thought came to my mind that there were no other freaks like them in the whole world. The Westerners, without caring about the scenery and beautiful weather, were absorbed into reading the game. On one hand, I felt that they were praise worthy, and on the other hand I had a pity for them.

 

나는 밖으로 나온 김에 호텔의 실내풀장에서 수영까지 하고 들어가니까 그때서야 존이 착점을 한다. 다음날 나와 대국한 뉴질랜드의 3장 그레이엄은 조금 달랐다. 그가 들여다보기를 시작하길래 내가 빠져나가서 탁구를 치고 돌아오니까 내 시계가 혼자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까 내가 나가자마자 눌러 놓은 것이다. 이 친구는 내가 중간에 자리를 뜨는 습관을 알고 시간 공격을 하고 있었다.
Since I left the room, I swam at the hotel pool and came back to the match table, and then John made his move. The 3rd captain of the New Zealand team, Graeme, who played against me next day, was a little bit different. When he started to read the sequence I sneaked out of the room and returned after I played table tennis. When I returned my timing watch was running alone. He knew that I had a habit to go out in the middle of the game and he was attacking me with time.

 

호주와 뉴질랜드의 국가 대항전은 1980년에 시작되어 격년제로 홈 앤드 어웨이 (Home & Away)방식으로 치르고 있다. 양국 선수가 4명씩 출전하여 1회전은 주장 대 4장, 부장 대 3장, 2회전은 주장 대 3장, 부장 대 4장 순서로 대국하여 마지막 4회전은 주장 대 주장, 부장 대 부장 식으로 각자 자기 순위와 같은 상대 선수와 대결한다. 결국 풀리그가 되며 총 16국을 두어 승국이 많은 팀이 이기게 된다.
The National Match of rivalry between Australia and New Zealand began in 1980, and was held every second year as “home and away” games. Four players from each country participate, and for the first round they have games where the captain versus the 4th captain, the 2nd player versus the 3rd captain and for the final round they play against the same ranking player such as ‘a captain versus captain’ or ‘a 4th player versus a 4th player'. Eventually, it becomes a 16 games full league match and the team with more wins becomes the winner of the tournament.

 

선수선발을 할 땐 단위수를 서로 맞추어 뽑는다. 만약 한쪽 팀이 4명을 합하여 20단이 된다면 상대팀도 알아서 거기에서 1~2단 차이 이내로 조절한다. 이 국가 대항전은 하루에 한판을 두며 각자 제한시간은 3시간씩이다. 오전 10시에 시작하면 보통 오후 5~6시에 끝난다. 이번 대회도 뉴질랜드 측이 이곳호텔을 4일간 잡아놓고 대항전을 개최하고 있었다.
When each team recruits the players, they select players of similar ranking on both sides to play against the each other. If one team’s total dan of 4players is 20dan, the opponent team choose players within 1~2 dan difference all together. This International Match plays one game a day and gives a 3 hour limit to each player for a game. It starts from 10 am and finishes usually around 5~6 pm. This time the New Zealand team booked the hotel here for four days to hold the International Matches.

 

90년부터는 내가 강력히 주장하여 이제가지 시간의 절반도 안 되는 1시간 15분으로 줄여 하루에 두 판씩을 소화하도록 하고 있다. 경기 룰은 주최측의 방식을 따르기로 되어있다. 뉴질랜드에서 대국 시에는 중국식, 호주에서는 일본식이 각각 적용되고 있다.
From the year 1990, with my strong allegation, it was reduced to 1 hour and 15 minutes which is less than half of the time it used to be, and it could accommodate two games a day. The host country’s game rules are applied respectively. If it is hosted by New Zealand; they take the Chinese rules, and if it is held in Australia; the Japanese rules are applied.

 

중국식은 대국이 끝나면 죽은 돌은 다 들어내서 통에 담아 버리고 흑이나 백 어느 한편의 살아있는 돌과 집 수만 센다. 뉴질랜드가 중국식 룰을 사용하는 것 때문에 호주 팀이 덕을 본 일이 있었다. 80년 제1회 오클랜드 대회 때였다. 마지막 4일째 4장끼리 대국 1국만 남겨놓고 있을 때 전적이 호주가 7대 8로 지고 있었다.
In the Chinese rules, all the captives are taken out and put back into the stone case, and then they count the numbers of the territories and the stones alive. Once, Australia took the advantage of these rules because New Zealand adopted the Chinese rules. It was the 1st International Match held in Auckland in 1980. Australia was behind by 7 wins and 8 losses on the last day (day 4) and only the 4th player' game was not yet finished.

 

호주 측 4장인 존(John-서양에선 가장 흔한 이름이라 양팀에 다 John이 있었음)이 이겨주어야 우리는 겨우 비길 형편이었다. 한집 끝내기에 돌입한 바둑을 옆에서 면밀히 계가를 해보니 뉴질랜드의 봅(Bob)이 반집을 이기고 있었다. 바둑이 끝나고 마지막 공배까지 교대로 다 채운 다음 계가로 들어가길래 나는 옆방으로 가서 소파에 벌렁 누워 버렸다.
The 4th player, John, on the Australian side (since “John” is the most common name for Westerners, it was no surprise that each team had a person named “John”) had to win in order for us to barely make a tie. They had launched into making 1 point end game and when I made a close counting the territories, I figured out that Bob, from the New Zealand team, was winning by half a point. At the end of the game, they were only going to start counting each other’s territories after they had finished taking turns of filling the dame (neutral points), so I went into the next room and slopped onto the sofa.

 

내가 주장으로 첫 국가 대항전에 원정 나와 진 것이 김이 새서 같이 어울려 계가할 기분이 안 나서였다. 2~3분 후 옆방에서 요란스런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의당 뉴질랜드 팀의 승리축하 박수소리로 생각하고 있을 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존이 내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이 친구가 곧장 나에게 달려와 나를 부둥켜안으며 “내가 이겼어요! 이겼어요!” 자기가 이겼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승전보를 전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빅이난 대마에 마지막 수를 존이 둘 수 있어서 일본식이면 반집을 졌을 텐데 중국식으로 거꾸로 반집을 이겼던 것이다.
It was because I had steamed out (lost) all interest in getting mingled with other players for counting the territories after I had realized that we had lost the first international away match. Then, after 2~3 minutes, a clamorous applause exploded from the next room. I naturally thought it was applause of congratulations to the New Zealand team for winning, and then John ran into the room where I was in with a flush face. He ran straight towards me and grasped me into a hug saying, “Dae, I won, I won!” He informed me of our victory in an excited voice. Later on, we found out that in the large group of stones that created a draw situation, and John had made the final move. If we were playing by the Japanese rules, we would have lost by half a point in territory, but on the contrary, since we were playing with the Chinese rules we had won by half a point in territory

 

두 나라간 원정 바둑대회에서의 숙식은 민박으로 해결한다. 나는 이제까지 네 번 뉴질랜드에 가서 네 가정과 친하게 됐고 호주 우리 집에 묵었던 뉴질랜드 선수들도 우리 가족과는 친숙해졌다. 국가대항전의 진행은 다른 나라 선수단이 도착하면 전야제를 열어 거기에서 서로 소개할 시간을 갖고 나흘간 대항전을 치른 후 종료파티를 갖는다. 그 다음날엔 주최측에서 바비큐(B-B-Q) 피크닉을 경치 좋은 곳에 가서 해주고 관광순서로 이어진다. 88년도 대회 때에는 뉴질랜드 측 요청으로 국가대항전이 끝난 후 나는 이 나라 각 도시를 돌며 바둑강의와 친선대국 등을 하며 지낼 수 있었다.
We had decided upon home-staying as accommodation during the Baduk tournament. Up till now, I have gone to New Zealand four times and have befriended four different families. The New Zealand players who had stayed at our house in Australia had become friends with my family, too. The procession of the international rivalry match started with an introduction session on the eve of the tournament, and after competing for four days here was a closing party. The next day, the hosting country had a BBQ picnic at a place with wonderful scenery, and then took us for a tour. After the ’88 International Tournament, to the New Zealand side’s request I was able to go around some cities of NZ and gave Baduk lectures and played friendly matches.

 

해밀톤(Hamilton)이란 도시에 있는 와이토모(Waitomo) 대학에서 바둑강의 때 소강당을 거의 매웠던 학생들, 오클랜드에서 뇌성마비 환자지만 뉴질랜드에서 가장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알려진 브라이언(Brian)이 휠체어를 탄 채 1국을 4시간 이상 진지하게 두던 모습, 원주민 마오리 여자 운전사가 모는 버스를 나 혼자 타고 비오는 날 간헐천(Geyser)의 도시 로토루아(Rotorua)를 여행하던 일, 남섬의 쿠크산(Mt Cook 3,767m) 주변 스키장과 빙하 호수들, 밀포드 사운드(Milford Sound)의 피오르드(Fiord) 지역의 숨막히는 절경들, 이 모든 아름다운 추억이 다 바둑덕분에 생겨난 것이다.
I could have experienced that in Waitomo University, Hamilton, and the magnitude of the students at my Baduk lecture, almost filled out the Rotunda Hall, and Brian, from Auckland, is the most capable computer programmer in New Zealand. Despite the fact of his cerebral palsy, with playing in his wheelchair for 4 hours for 1 game, with one hundred percent of commitment, and the trip to the geyser town Rotorua by taking the bus driven by a big Maori lady driver in a rainy night and I was the only passenger, ski resorts and glacier lakes around Mt. Cook (elevation-3,767), breath taking scenery of the Milford Sound Fiords, because of Baduk all these beautiful memories were possible to take place.

 

 

지난 93년도 대회는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톤(Wellington)에서 5월에 치루어졌다. 호주바둑협회(AGA)가 나를 주장으로 다시 뽑자 나는 곧 선수선발을 시작했다. 나는 아직 원정팀이 홈팀을 이겨본 일이 없는 전통을 이번엔 깨려는 구상을 했다. 부장에는 금년 호주대표로 세계대회에 나갈 짐 배이츠(Jim Bates) 6단, 3장으로 지금은 65세의 원로지만 왕년의 펀치력이 남아있는 시드니 한인 바둑회의 안광호 5단, 4장으론 최근 심상치 않게 한국 5단들을 호선바둑으로 꺾어 화재의 대상이 됐던 국립대학 대학원생 토니 맥커로크 (Tony McCulloch) 3단, 후보에는 「쇠고기 심줄」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끈질긴 박현용 5단 등 이길 수 있는 팀으로 구성했다.
The last National Match between Australia and New Zealand was held in May 93 in Wellington, the capital city of New Zealand,. As soon as the Australian Go (Baduk) Association appointed me as the team captain, I immediately began to select the team members. I planned to break the jinx that “away team” hasn’t yet won the home team. I have conceived a plot to form invincible team. I recruited as the 2nd player Jim Bate 6 dan who is going to compete at this year’s World Championship as the Australian representative, as the 3rd captain Kwang-Ho An 5 dan from Korean Baduk Club who is now 65 years old senior warrior but still has got destructive punches, as the 4th player Tony McCulloch 3dan who often recently defeated 5dan players to bring up into conversation and as the candidate player tenacious Hyun-Yong Park 5dan whose nick name is “elastic tendon”.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뉴질랜드에 가서 뚜껑을 열어본 결과 호주 팀의 5대 11로 참패였다. 특히 뉴질랜드 팀의 주장 카일 죤스(Kyle Johns) 6단의 분전은 인상적이었다. 80년 제1회 대회에서 13살의 어린 나이로 뉴질랜드 팀의 4장 선수로 출전한 카일은 한판 질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바둑을 두어 내가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가 지금은 늠름한 27살의 미 청년으로 뉴질랜드 팀의 주장으로 출전했다. 그의 바둑스승이고 왕년의 단골주장이던 그래엄 파멘터(Graeme Parmenter - 농업대 교수) 5단은 제3장으로 나와 열심히 두고 있었다.
However, somehow, probably something went wrong, when we open the case of results, we were beaten one sided 5 wins to 11 losses. Especially the New Zealand’s team captain Kyle Johns’ desperate commitment was impressive. When the 1st National Match was held in year 80, Kyle participated in the competition only 13 years of age as the 4th player and whenever he loses a game, he tried harder in tears in the next game and it made me to remember him. He is who became a manly mien, now competing as the NZ team captain. Kyle’s Baduk teacher and used to be regular NZ team captain Graeme Parmenter is participating as the 3rd captain and doing his best.

 

뉴질랜드 팀의 2장은 오클랜드에 살고 있는 한국인 강인중 씨(5단) 였다. 그는 나와 바둑관계로 한국기원에서 만난 바 있는 구면. 우린 반갑게 만났다. 오세아니아의 두 나라 바둑 대결에 한국계 선수가 3명이나 끼어있어 다른 면모의 바둑강국 한국의 이미지를 심고 있었다.
The second captain of the New Zealand team was a Korean who lived in Auckland, In-Joong Kang 5 dan. He was my acquaintance through Baduk relations, and I once had met him at the Korean Kiwon. We were happy to meet each other. The showdown between the two countries of Oceania included three Korean players, and they were planting the image of Korea as a strong Baduk nation,

 

마지막 날 주장전에서 카일에게 나는 졌다. 지난 10여년간 8번의 뉴질랜드 팀과 공식 대국중 카일이 처음으로 나를 이긴 것이다. 홀이 떠나갈 듯이 터지는 박수소리에 감격한 표정으로 기쁨을 참지 못하는 카일. 그에게 뉴질랜드 바둑인, 그 가족들, 관전자들이 모두 둘러서서 축하 악수와 포옹세례를 카일에게 퍼붓고 있었다.
On the last day, I had lost to Kyle in the captain's match. This was the first time that Kyle had beaten me in the past 10 years during the 8 official matches. When the hall exploded with applause, Kyle couldn't hide his joy and he showed a deeply moved facial expression‎. Kyle was flooded with embraces of congratulations from his fellow New Zealand players, family, and spectators.

 

카일의 스승 그레암은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대학교수인데 전부터 나에게 카일을 한국에 바둑유학 보내는 건을 의논해왔었다. 나고야 세계대회(1993 년)에서 나에게 패한 카일은 그 날밤 내 숙소로 찾아와서 한국유학 건을 부탁했다. 나도 한국기원 사무국장에게 구두로 카일을 내 제자로 영입할 프로 기사가 있겠느냐고 문의한 바 있었다. 당시 카일은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돈을 벌어 바둑공부를 1년 이상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 바둑에 매력을 느끼고 경비 문제도 상의하는 등 아주 진지하게 접근했으나 결국은 한국 측의 성의 없는 반응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Kyle's Baduk teacher, Graeme, who is a professor at a university on the South Island, had consulted me about sending Kyle to Korea to study Baduk. At the Nagoya World Amateur Championship (1993), after Kyle was defeated by me he had found his way to my room to ask me about the matter of studying Baduk in Korea. I had asked once director of Korean Kiwon, by word of mouth, if there were any professional players who would take Kyle as in-home-living prodigy. At the time Kyle was making money from teaching English in Japan, and he had been learning Baduk for over a year. He had felt the charisma of Korean Baduk and had even asked about the expenditures in a very sincere manner, but in the end there wasn't anyone that showed a reaction of good faith and the matter eventually dissipated.

 

카일 말고도 세계각처에 이런 후보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나도 여러 명에게 카일과 비슷한 부탁을 받은 바 있었다. 뉴질랜드팀의 승리축하 분위기가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약속대로 「3국 친선 바둑대회」를 시작했다. 일본팀이 참가한 것이다. 일본팀은 프로8단을 단장으로 아마추어가 20여명 따라왔다. 프로는 일본기원 측에서 경비를 대고 아마추어는 다 자비로 왔다고 한다. Apart from Kyle, there are many candidates like him in all corners of the world. I had many occasions where people like Kyle would ask of me similar requests. Before the atmosphere of congratulations had disappeared, we had started our pre-scheduled 「3 Nation Friendly Baduk Tournament」. The Japanese team had participated too. The Japanese team had 8 dan professional player in command and consisted of 20 amateur players. They say that the professional player had come at the Japanese Kiwon's expense, and the amateurs had all come at their own expense.

 

이들중 여자가 10명 정도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1주일전 오클랜드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닷세간 친선대국, 쇼핑센터나 학교 등을 돌면서 바둑보급, 시범 대국 등을 하고 로토루아(Rotorua)등을 관광했다. 그들은 호주 VS 뉴질랜드 대항전에 때를 맞추어 도착했다. 일본은 국내 아마 강자 7~8단 등 5명을 내 보내 세나라가 각기 5명씩 15명이 출전한 3국 친선 대회에서 무난히 우승을 했다. 뉴질랜드 팀이 준우승, 호주는 또 패배의 고통을 맛봐야 했다. (우째, 이런 일이...).
The fact that 10 players amongst the team were women was impressive. A week before they had arrived in Auckland, they had played friendly matches for 5 days, went around the shopping centres or schools and gave demonstration games to introduce Baduk to New Zealanders and traveled around Rotorua area and arrived on time for the Australia VS New Zealand tournament. Japan had sent 5 strong players of 7~8 dan level and out of each nation's 5 players, all together 15, they were victorious without difficulty at the friendly matches. New Zealand came second, and Australia had to taste the bitterness of defeat once again. (What on earth this kind of thing could happen?)

 

대회가 끝난 후 일본 대사관측 트로피 증정 등이 있은 후 우리는 일본팀 초청으로 웰링톤에서 제일 큰 일식 집에 초대되어갔다. 2층에 있는 긴 다다미방에는 바둑판이 30조쯤 있고 백인, 동양인이 섞여 음식도 먹고 바둑도 두기 시작한다. 세 나라 바둑인들이 말이 잘 통하지도 않는데도 자주 웃음소리가 들린다. 빈 바둑판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 30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일본 여자가 다가와서 자기는 3단인데 나에게 한수 가르쳐 주겠냐고 한다.
After the tournament, the Japanese Embassy gave a trophy presentation, and then we were all invited by the Japanese team to the largest Japanese restaurant in Wellington. On the second storey, in a long tatami floor room, there were about 30 Baduk boards and Caucasians and Asians were mingling with each other as they started to eat and play Baduk. Even though the three nations couldn't communicate that well with each other through talking, laughter could be heard often. A woman, who looked in her early 30's, had come to where I was sitting in front of an empty Baduk board and asked me if I could give her a teaching game.

 

내가 고개를 끄덕여 응하자 내 맞은 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깊이 숙이며 “오네가 이시마스(잘 부탁 드립니다).” 몇 자리 건너에는 안광호 5단이 카일에게 내기 바둑을 두어 20불을 딴 후 싱글벙글 기분이 아주 좋은 모습이다. (역시 한국인은 내기를 해야 강해지나?) 백인, 황인종이 어울려 약간은 이상하게 보이는 이날「바둑의 향연」은 웰링톤의 밤이 깊어 가는 것은 아랑곳 안한 체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As I nodded to say yes, she knelt down on the floor opposite of me and bowed her head deep as she said "Onenga ishimasu (please teach me well)". A few seats away Kwang-Ho Ahn 5 dan had just won $20 from a betting game against Kyle, and he looked very happy as he was chuckling. (Do Koreans have to bet to become stronger?) With Caucasians and Asians mingling together, the "Baduk Banquet" night would be seemed like a slightly strange sight, but as the night of Wellington grew deeper nobody looked concern about it seemed as though it would never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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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고추잠자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10.27 호주 브리스베인에 있는 딸아이가 갑자기 보고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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