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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국 ,독일 네덜란드 바둑계

작성자고추잠자리|작성시간10.01.13|조회수1,696 목록 댓글 0

 

 

 

세계바둑사
미녀 삼총사와 파리를 찾다
윤영선· 한해원· 이하진 사범과 한국대사배 참가
2010-02-12 오후 2:23:56 입력 / 2010-02-13 오후 3:09:52 수정

1. 파리 도착
2006년 새 집행부로 새롭게 출발하는 프랑스바둑연맹은 한국대사배에 참가하러 오는 한국 미녀삼총사와 나를 맞는 준비로 바빴다. 숙소는 소피텔(Sofitel, Bercy) 호텔, 와인셀라(Wine cellar) 식당에서 환영만찬과 각자 교통비까지 준비하는 등 빈 틈이 없었다.

남자 기사들만 갔으면 이런 대우를 했을까? 만약 여자라 이런 대우를 한다면 그 덕은 내가 보고 있는 건가? ^^ 나는 프로기사 한해원, 이하진 사범과 같이 벨기에서 테제베(KTX 같은 고속열차)로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프랑스 바둑연맹 한국담당 갸랑(Paul Galan)씨를 비롯 프랑스 한인 챔피언 장석현씨 등 7~8명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윤영선 사범은 먼저 파리에 도착하여 다른 일을 보고 직접 호텔로 오겠다고 했다.


▲ 파리 북역에 도착한 우리 일행


마중 나온 사람들의 차를 분승해서 타고 우리는 숙소로 갔다. 호텔에 도착하니까 영선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짐만 풀고 프랑스 바둑협회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저녁 식사는 지하 포도주 저장소(Cellar)인 분위기 있는 식당 특석에 예약이 되어 있다. 프랑스 측에서 10여명이 나와 식사하면서 우리와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당시에는 여자기사들 영어가 서툴렀는데도 그들 주변에선 웃음꽃이 자주 핀다. 이러면서 밤 12시가 다 되어 간다. 내가 여자 사범들에게 “촌놈들이 파리에 오면 에펠탑 전자 쇼는 봐야지” 하며 장시간의 저녁 식사를 끝맺었다. 우리는 나와서 그 근처 야시장을 거쳐 에펠탑 근처로 갔다. 매 시간 정각마다 하는 전자 쇼를 보기 위해 자정인 12시에 가서 약 10분간 에펠탑이 번쩍이는 빛을 쏘는 쇼를 본 후 우리는 하루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 왔다.


전자 쇼를 하는 중 / 에펠탑


2. 한국 대사배
우리가 이번에 유럽에 온 목적은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에서 개최되는 ‘한국 대사배’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가 주관하는 아마추어 국제대회에 오는 각 나라의 대표 선발전을 한국 대사배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 바둑의 홍보도 되고 현지 바둑계와 유대를 강화할 기회도 된다. 그래서 타당성 조사를 끝낸 후 2003년부터 수 십 개국을 상대로 협상을 해 왔다. 그 결과 현재 약 10여 개 국가에서 한국대사배를 치르고 있다.

이번에 우리가 참가하는 주(駐) 프랑스 한국 대사배는 마침 한국대사관이 ‘한-불 수교 120주년’ 기념문화행사가 준비 중에 있어 그 행사의 일환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거기에다가 프랑스 정부도 2006년을 ‘한국의 해’로 정했다. 나는 파리에 있는 한국문화원 원장 모철민 원장과 프랑스 바둑연맹의 국제담당 갤랑씨와 주로 교신을 했다.

이번 우리의 방문을 위해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바둑협회가 대사배 일정을 일주일 간격으로 3 주 동안 매 주말마다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우리는 세 나라 대사배가 끝난 후에 아직 대사배를 치르지 않고 있는 영국에도 들려 대사배 개최 확정작업을 하고 런던과 옥스포드 대학에서 바둑 보급도 하기로 스케줄이 짜여 있다.

우리가 한국대사배를 열기 시작하니까 독일에서는 그 동안 중단했던 일본대사배가 부활해서 다시 개최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사배를 열기 위해 관계기관과 사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해 합의를 본 후 실행에 들어 갔다.

1)한국대사 배 목적:
- 한국바둑의 세계화
- 한국바둑인 세계무대진출(취업과 보급)
- 해외바둑전파: 올림픽종목 만들기 위한 노력
- 재외한인동포사회와의 친목
- 재외한인 2,3세 바둑교육을 통한 한국문화교육
- 재외한인사회와 현지바둑협회의 유대관계조성
- 바둑에 대한 한국 외교관들의 새로운 인식

2) 각 기관의 역할

a. 한국대사관
- 대사 컵 및 부상 제공
- 대사의 축사(개회사, 폐회사)
- 대회 다과
- 한국 프로기사 및 방문단 지원과 현지 바둑협회와 협력
- 홍보

b. 현지(프랑스) 바둑협회
- 대회 조직 및 운영
- 홍보
- 대회 장소 제공
- 한국 방문단 숙소 및 식사, 관광 등 담당
- 한국 프로, 아마기사 장기 체류를 통한 바둑보급 및 취업 안내
- 재외한인회와 연계하여 활동, 친목
- 한국바둑계와 관계 강화

c 한국아마바둑협회(대한 아마 바둑협회 KABA)
- 세계 바둑대회(국무총리배)에 대사배 우승자 초청
- 한상대교수 한국 바둑팀 대사배 파견 협조
- 국제 바둑보급사 파견
- 재외한인 2, 3세 바둑교육을 통한 한국문화 전파

d. 한국기원
- 프로기사 파견 (윤영선, 한해원, 이하진 사범)

다음 날 한국대사배 개막식이 오후 1시다. 우리는 그 동안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무슈장(장석현)이 돕겠다고 해서 오전 9시부터 그의 안내로 시내를 돌았다. 그런데 아침부터 한국에서 집 사람이 나에게 국제전화로 난리다. 행사에 나가기 전에 구두 한 켤레 사라는 내용이다.

우리 일행은 운동화만 신고 여행하고 있었다. 나는 한복에 운동화라 더욱 가관이었다. 할 수 없이 안드레라고 하는 구두점에 가서 나와 해원이가 구두를 한 켤레씩 샀다. 내 구두 가격은 약 10만원이었다.

구두점에서 나와서 우리는 몽마르트 언덕에 들렸다. 옛날에 이 곳은 높은 지대라 가난한 예술가와 학생들이 주로 살았다. 문호 빅토르 위고(레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꼽추 저자), 음악가 푸치니(이 곳이 오페라 라보헴의 무대가 된다), 외에도 미술가들이 특히 많이 살았다. 이 곳에 살았던 화가만 해도 고호(Vincent van Gogh), 모딜리아니(Modigliani), 모네(Claude Monet), 달리(Salvador Dalí), 피카소(Pablo Picasso), 등 미술사에 큰 획을 근 거장이 많다.

우리는 거리 화가들, 기념품 점을 돌아 본 후 그 옆에 있는 사크뢰커 성당에 갔다가 행사장으로 가는 도중 오페라하우에 들렸다.


▲ 윤영선 사범과 무슈 장(장석현) /몽마르트언덕


▲ 사크뢰커 성당(Basilica of the Sacré Cœur)/ 몽마르트 언덕(Montmartre- 130 미터)꼭대기에 있다.


▲ 오페라하우스 앞 이하진 사범/ 한해원 사범

우리가 대회 장소인 한국문화원에 도착하니까 주철기 대사를 비롯 대사관, 문화원 직원이 주말인데도 총 출동 되었다. 프랑스 바둑인도 많이 와 있어 북적 인다. 참가자 수를 물어 보니까 80 명이 넘는다고 한다. 주 대사는 우승자에게 특상을 마련 하는 등 준비를 열심히 했다.

개회사에서 주 대사가 불어로 연설을 한다. 불어를 못 하는 나는 부러웠다. 프랑스는 자기네 나라 말에 대한 자존심 때문인지 독일이나 네덜란드에 비해 영어 수준은 낮은 편이다. 내가 대회 창설자로 영어로 인사말을 하는데 농담을 해도 웃는 사람이 몇 안 된다.

1차 대전 무렵까지는 불어가 국제어였다. 지금도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네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영어는 장사꾼이 쓰는 언어이고, 이탈리아어는 소리 지르기 좋아 싸울 때 좋고, 독일어는 인간끼리 쓰기에는 좀 뭐하니까 개하고 의사소통 할 때 알맞고, 불어가 인간용 언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이탈리아 사람이 “독일어는 전쟁용이고 불어는 호모들이 사용하는 말이고 이탈리아어가 인간이 쓰기 좋은 언어다” 라고 한다. 이 말을 독일인에게 했더니 “그 사람들이 그러더냐" 하고 그냥 웃는다.

▲ 대회장으로 쓰인 파리 한국문화원

▲ 왼쪽부터 한해원, 윤영선, 주철기 대사, 필자, 이하진

▲ 개막식 청중석

최강자 16명으로 구성된 ‘수퍼그룹’ 멤버는 개막식에서 한 명씩 소개 된다. 이들은 프랑스에선 영웅들이다. 이 중에서 챔피언이 나온다. 한국 교민 바둑 강자가 여러 명 나왔으나 수퍼 그룹에서 바둑을 안 둔다. 프랑스 대표가 되려면 그 나라 여권 소지자라야 한다는 조항 때문이다. 내가 영선이, 해원이, 하진이를 한 명씩 간단한 배경과 함께 소개 할 때 프랑스 바둑 인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영한다.

개회식이 끝난 후 주최 측이 오늘은 저녁까지 계속 대국만 할 테니까 우리에게 관광을 하고 저녁 식사까지 먹고 오라고 권한다. 우리는 시내에 나가 노트르담 사원을 보고 다시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저녁 7시 이후에는 대국 장으로 와서 지도기를 두었다. 이 날은 여류기사 3명과 아마추어인 나까지 4명이 나서서 지도기를 두었다.

▲ 대사배에 온 한국인들에게 다면기 지도 중인 윤영선 사범

▲ 한해원 사범 다면기

저녁은 한국 바둑인들이 우리를 소르본느 대학촌에 데려가서 퐁듀를 대접했다. 그들은 장석현 5단, 이송렬 5단, 이경우 4단, 주태환 4단, 이원재 3단과 그들의 가족이었다. 퐁듀 전문 집은 ‘치즈접시’란 뜻을 가진 아씨에뜨 프로마쥐 (Assiette aux fromages)란 식당이다.

음식점에 들어서니까 치즈 냄새가 진동한다. 퐁듀(Fondue)는 치즈를 녹여 와인을 탄 후 빵을 찍어 먹는 음식이다. 감자와 치즈만 녹여 먹는 것을 하크레트라고 한다. 어린이들이 좋아한다. 술에 약한 해원이가 퐁듀 몇 조각 먹더니 취해서 얼떨떨해 한다. 얘기 중에 그들은 불경기라 암울한 ‘IMF’ 때 바둑인들이 모여 바둑두고, 퐁듀 먹고, 한잔하고, 노래방가고 하면서 우정이 더욱 돈독해 졌다고 한다. 바둑이 불경기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역할을 해주었다며 웃는다.

▲ 관광버스로 파리를 돌고 있다. /노트르담 사원

대회 이튿날. 주최측에서 오늘은 오후 5시가 지나서 대회장에 와 달라고 한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유럽에 처음이라고 했더니 꼭 필요할 때 빼고는 최대로 우리에게 자유시간을 주려고 하는 배려가 느껴진다. 이 금쪽 같은 시간을 어떻게 쓸까 하고 망설이는데 하진이 고모부가 안내를 맡겠다고 한다. 하진이 고모부는 프랑스에 유학 왔다가 프랑스에 살게 된 케이스. 파리에서 18년을 살았다고 한다.

한인 바둑인의 대부분이 유학생 배경을 갖고 있다. 현재 파리의 한국인 1만명 중 8천 명쯤은 유학생 출신이라고 한다. 신기한 일은 하진이가 고모부와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는데 신통하게도 많이 닮았다. 내가 하진이에게 “네 아버지라고 해도 사람들이 다 믿겠다” 고 했더니 옆에서들 고개를 끄덕인다.

▲ 우승자 말레크 6단/ 챔피언 말레크를 두 점 접어 주고 이긴 이하진 사범

▲ 두 점 대국 /환후이 2단의 복기해설

시상식 후에 약속대로 우승자 말레크에게 하진이가 두 점 특별 지도 대국을 했다. 무대 위에서 둘이 두고 있으면 한 사람이 옆 자석 판에 수순을 옮기고 해설은 중국 프로인 환후이 2단이 맡았다. 환후이 2단이 중반에 우세를 잡은 하진이의 완승 국이라고 평하며 하진이가 “강하다”고 한다. 이 동안에도 영선이와 해원이는 지도 다면기를 두느라고 바쁘다.

특별 대국이 끝난 후 나와 프랑스 바둑협회 간부 7~8명이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금년에 새로 선출된 집행부로 의욕이 넘쳤다. 회장 살몽(Emeric SALMON)과 부회장 시모노(Cyril SIMONOT)가 다 젊다. 그들은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계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싶어했다.

환후이 2단이 파리에서 세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데 협회가 월급제로 고용한다고 한다. 목적은 약 30명의 어린이 유망주를 뽑아 그들에게 바둑을 매일 가르치는 일이라고 한다. 1년 후에는 그 중에서 10명만 추려내 다시 1년을 훈련하여 전부 아마6단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나에게 “2~3년 후에는 유럽 바둑계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파리 사흘 째. 원래는 오늘이 파리를 관광하는 날로 잡혔는데 지난 사흘간 우리가 워낙 많이 돌아 다녀서 오늘은 박물관만 보기로 했다. 루불과 오르세이가 우리의 목표이다. 나는 영국행 기차표를 끊으러 무슈장과 역으로 가면서 해원이와 하진이만 루불 앞에 떨어뜨렸다.

12시 반에 주철기 대사가 우리 일행을 '사모'라는 한국 식당에 초대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다. 주대사와 점심을 한 후 우리는 샹제리제(Champs-Élysées) 거리로 나왔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말로만 듣던 샹제리제를 걷는데 추위쯤은 문제가 되질 않았다. 중간에 윌슨대통령,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차드 버튼, 에디트 삐아프 등이 출입했다는 ‘푸케 카페’가 보이길래 들어 가렸더니 안에 자리가 없다고 한다. 개선문 앞까지 걸어갔다가 커피 한잔 한 후에 주차장 쪽으로 다시 돌아 왔다.

▲ 샹젤리제의 밤

하진이가 오늘은 자기 사촌인 고모부 딸이 자기와 동갑내기인데 같이 지내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샹제리제에서 고모부네로 하진이를 보냈다. 나와 해원이만 남아 무슈장과 라데팡스(La Defence) 신 도시 쪽에 갔다. 개선문 두 배 만한 라데팡스 ‘그랑 아치’ 문 사이로 멀리 샹제리제와 개선문이 일직선으로 보인다. 파리에서 현대식 건물은 이 곳과 몽 파르나스 정도에서만 볼 수 있다.

▲ 개선문 두 배 만한 그란대 아치 문(Grande Arche)

▲ 파리의 신도시 라데팡스

저녁에 한국 바둑인들과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들도 모처럼 한국에서 온 바둑 사절단이 반가운가 보다. 그들과 합세하여 우리는 바토-무슈(Bateaux-Mouches) 에서 세느강변 유람선(La Seine River Cruise)을 탔다. 밤에 보는 파리 야경은 환상적이다. 바둑 회원 중 전문 관광 가이드가 있어 우리에게 부지런히 설명을 해 준다.

유람선 관광 후에 우리는 파리에서 유일하게 항상 여는 바둑 카페 '레스코'에 가 보기로 했다. 퐁피두센터 근처에 있는 레스코(Lescot)가에 있는 레스코호텔의 1층과 2층 카페가 파리 바둑인들의 아지트이다. 밤 11시가 되었는데도 10여명이 바둑을 두고 있다가 우리를 반긴다. 그들은 우리 일행 전체에게 차와 맥주를 대접하고 바둑 얘기 꽃을 한참 피웠다. 우리는 파리의 마지막 밤은 이렇게 보냈다. 호텔로 돌아오니 하진이가 벌써 와 있다.


3. 프랑스 바둑 약사(略史) 2 편

1982년에 처음으로 랭킹위원회에 의해 프랑스 바둑인 랭크를 정리한 팜플렛(RFG)이 발표되었다. 여기에 5단에서 1급까지 37 명이 등록되었다. 9월에는 스트라스보그(Strasbourg)에 있는 상 에티엔느(St-Etienne)이란 고등학교에 페네슈(Albert Fenech)가 바둑클럽을 만든다. 지금도 프랑스 내 학교에서는 가장 오래된 클럽으로 그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983년 3월에 나는 조훈현에게 전관왕을 내 주고 무관이 된 서봉수를 동행하고 유럽을 한달 반 정도 돌았다. 파리에 와서 임갑선생을 만나려고 애를 썼으나 한인식당, 한인회장 등이 연락처를 모른다. 프랑스바둑연맹도 번호부에 나와 있질 않았다.

이 해에 프랑스 바둑연맹은 본격적으로 바둑을 보급하는데 나선다. 그 동안 몇 차례 개인적으로 주관했던 여름 바둑캠프를 바둑연맹이 인수하여 정식으로 연맹행사로 공식화 했다. 이 해 마인드 스포츠의 한 종목으로 체스, 브리지, 드라웃츠(Draughts), 타로(Taro), 스크래블(Scrable)과 함께 바둑이 등록된다. 같은 해에 첫 파리 명인전이 일본교민회의 지원으로 개최 되었다.

나와 친한 고려대 은희천 교수(타이젬 7단)는 자기가 교환교수로 파리에 있을 때 ‘파리명인’에 올랐던 걸 아직도 자랑한다. 나도 그를 ‘파리명인’으로 자주 칭한다. ‘파리명인전’이 24회가 되는 2006년 11월 셋째 주일에는 140명이 세 조로 나뉘어 대회를 치렀다.

우리가 파리에 갔을 때 전년 파리대회에서 한국 아마추어 강자 황인성과 조석빈은 중국 프로 출신 환후이를 이겼다. 내가 환후이에게 “어떻게 하다가 아마추어한테 그 것도 두 명에게 졌느냐?” 하니까 환후이가 머리를 파 묻고 마구 저으며 “I am sorry”만 연발하더니 나에게 “다음대회에서는 그 두 명에게 꼭 이기겠다”라고 약속한다. 그는 약속대로 2006년 파리대회에서는 그 두 명을 이긴다.

▲ 파리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Concorde, l'obélisque) 과거 길로틴 처형장이었다

1984에는 랭킹제도가 컴퓨터화 되었다. 7월에는 그르노블(Grenoble)바둑클럽이 알프스의 상 삐에르(St Pierre)와 샤르트뢰즈(Chartreuse)에서 두 주간에 걸친 바둑캠프를 주최한다. 프랑스 챔피언 전이 오픈대회로 외국인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결과 프랑스 거주 한국인 양 5단이 앙드레 무사를 이기고 첫 오픈 챔피언이 되었다.

1985년부터는 각 지역별 리그가 시작된다. 청소년 대회도 5가지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스트라스보그에서 타이틀 3개를 가져간다. 프랑스 챔피언은 20세의 동줴(Frédéric Donzet)가 앙드레 무사를 물리치고 챔피언에 오른다. 무사는 10년간 6차례나 우승을 한다.

▲ 1987년 유럽대회가 열린 그레노블(Grenoble)

1987년에는 성인 바둑클럽 45군데, 청소년 클럽 15군데에 회원이 500명이 등록한다. 프랑스 바둑연맹은 유럽대회를 그레노블로 유치한다. 1988 년 (36-15 ELISE*GO, the FFG)이란 바둑 서버를 만든다. 이 해에 제 43회 혼인보(本人坊) 대국의 첫 판이 파리에서 열린다.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이 오다케 히데오 9단에게 승리한다. 이 때 일본 프로기사들이 따라와 다면기 등 행사를 많이 하고 돌아간다.

1991년 처음으로 유망 청소년을 뽑아 협회 지원으로 일본에 바둑유학을 보낸다. 1993 년 1년 반 동안 일본기원 원생(연구생)을 지내다가 돌아온 말레크가 앙드레 무사를 물리치고 새로운 프랑스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그 때 선발된 청소년 선수가 이번 대사배에서 우승한 마렠(Farid Ben Malek) 6단이다. 2월에 프랑스 바둑연맹은 청소년 교육기관으로 정부로부터 인정 받는다.

1994은 인터넷 시대가 열린다. 프랑스 바둑인의 연락처와 기초 정보가 ‘fr-go’에 입력된다. 1995년에 쟝 오쌍로(Jean Hossenlopp)와 프랑소와 미제생(François Mizessyn)이 프랑스 바둑 룰을 정리 발표한다. 이 룰은 미국 룰에 영향을 받아 중국식 계가법을 채택한다.

1995년 6년간 준우승에 머물렀던 삐에르 꼴메(Pierre Colmez) 6단이 세아이유(J.F Séailles)를 무찌르고 마침내 챔피언이 되어 한을 푼다. 95-96년에는 리옹대학 교수 티에리 에스코피에(Thierry Escoffier)가 모든 넷티즌이 사용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연다.

이 해 쌍힐라(Sanhilhac)에서 열린 바둑캠프는 일본 프로기사 사이조 8단을 초청하여 그의 헌신적인 가르침은 인기를 끈다. 1997년에는 41회 유럽대회(EGC)가 마르세이유에서 열렸다. 800명이 참가하고 매인 토너먼트에 590명이 경쟁한다. 프랑스 거주 일본 프로기사 와타루 6단은 다케미야 9단의 ‘우주류’를 책으로 출판하여 이 대회에서 선을 보인다.

1998년 프랑스 바둑협회 등록자가 1000명이 된다. 프랑스에 바둑 둘 줄 아는 사람이 약 1만 명이 된다는 얘기다. 새로 회장이 된 베르나르드 뒤봐(Bernard Dubois)는 정부에 바둑에 대한 연구를 요청한다. 99년 1월에는 일본 기성전 첫 대국이 파리에서 두어졌다. 이 해에 루 바니에(Luc Vannier)는 스위스 로빈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대국자를 결정하는 전 유럽 바둑인의 순위를 넣은 프로그램 ‘고따(Gotha)를 만들었다. (2000년부터는 다음 편에 계속……)

TYGEM / 한상대 교수

 

 

 

런던 한인 바둑회 회원들을 만나다

영국

위치 : 유럽 본토의 북서쪽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
면적 : 243,000 평방 킬로미터
인구 : 약 6천만 명
나라 꽃 : 장미
수도 : 런던


2006년 4월 4일

어제 기차 역에서 영국에 가는 표를 구매 하려니까 우리 3명이 합해서 1천2백 유로 이상을 내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미리 예약을 안 해서 그렇다. 서양 사람들은 예약 문화가 발달되어 보통 6 개월 전, 늦어도 한달 전쯤엔 예약을 한다.

나는 우리 유레일 파스로 무조건 칼레(Calai)까지 가기로 했다. 오늘은 프랑스 철도 파업 날이라 칼레 가는 기차가 9시 58분 한 편 밖에 없다. 택시로 9시에 호텔에서 출발했는데 역에 가는 길이 막혀 못 가나 보다 하고 마음속으로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길이 뚫리며 차가 잘 빠진다.

우리는 열차 출발 10분전에 파리 북역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택시 기사가 우리가 운이 좋다고 한다. 우리는 가방을 끌면서 뛰어서 간신히 탔다. 칼레에서 페리를 타고 도버로 건너가고 도버에서 런던은 일반 버스로 가겠다는 게 내 계획이다. 이렇게 여행하면 1 인당 150 유로면 될 것 같다. 칼레에서 같은 EU 국가인데도 영국 입국 수속을 따로 한다. 페리호 내부가 너무 크고 좋아 하진이가 “교수님, 이거 배 맞아요?”한다.


 


▲ 영국으로 가는 페리 안에서.

 

영국의 해리 펀리(Harry Fearnly)는 2003 러시아 쌍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2회 바둑 학술대회와 2005년에 명지대에서 열린 제3회 대회에 영국 참가자였다. 그래서 나와 친해 졌다. 그가 우리 일행을 계획에도 없던 영국 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40년 전 옥스포드 대학생 시절 바둑 부에서 영국 최강자 맥훼이든과 스태이시 등과 함께 바둑을 두던 멤버다. 다른 두 명은 영국 챔피언 자리를 다투고 세계대회 출전을 번갈아 가며 했는데 해리는 지금도 2단이다. 그 얘기만 나오면 그는 가슴 아파하고 변명을 길게 한다.. 해원이와 하진이는 영국에 간다니까 무조건 좋아한다. 영국에 오니까 의사소통이 너무 잘 되어 아주 편하다.

 

해리는 내가 독일, 프랑스에 있는 동안 많을 땐 하루에 10번도 전화를 한다. 자기가 영국 체류비는 책임 질 테니까 오기만 하면 되다는 얘기다. 최근 런던 한인 촌인 뉴 몰든(New Malden)에 바둑회관이 유럽 최초로 세워졌다고 한다. 거기에 한국 바둑인들도 우리가 오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사실 나도 독일에서 그 바둑회관 뉴스를 듣고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해리는 뉴 몰든 한인 바둑회에도 매일 연락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도버에서 일반 버스를 타고 런던의 빅토리아 역에 내려 김용훈 씨와 만났다. 그는 바둑회관을 만든 장본인이며 런던에 산지 30년이 되었다고 한다.

 

런던 시내 남쪽에 있는 한인촌은 차로 한 시간쯤 걸린다. 약 1만 명의 한국인이 이 곳에 집결해 산다. 저녁 시간이라 우리는 곧장 식당으로 갔다. 김선생이 먼저 한인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 가길래 저녁 식사 전에 무얼 사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문이 또 있고 그 안이 식당이다. 아는 사람만 찾아오도록 되어 있다. 갖가지 생선회가 나오고 진수 성찬이다. 한식을 안 먹은 지 하루만 지나면 나는 한식을 찾는데 해원이와 하진이는 전혀 다르다. 빵과 서양 음식을 너무 잘 먹는다. 살이 찐다고 걱정하면서도 계속 먹는다.


 


▲ 영국 한인 바둑회 멤버들에게 지도다면기를 하는 이하진 2단.


▲ 영국 한인 바둑회 멤버들에게 지도다면기를 하는 한해원 2단.


▲ 영국 뉴몰든 한인 바둑회 회원들과 함께.

 

저녁 식사 자리에는 런던 한인 바둑회 간부들이 다 모였다. 저녁 식사 후에 우리는 바둑회관으로 걸어서 갔다. 김선생 부인이 경영하는 박준 미용실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면 방이 있고 거기가 바둑회관이다. 3~40 명 정도가 바둑을 둘 수 있는 작은 곳이지만 바둑 전용회관이 영국에 처음 생겼다는데 의의가 크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한인 바둑회 멤버들을 상대로 다면 기를 두었다. 두 명이 바둑을 두고 나서 나에게 “한국 분들은 다 싸움 바둑이예요” 하며 웃는다. 우리 숙소는 베아트리체(천주교명) 아줌마네 집이다. 남편이 바둑 광이라 부인까지 고생이다.

 

한인 바둑 회원과 새벽까지 바둑을 두다

2006년 4월 5일

우리는 아침에 교민신문 '영국생활'의 발행인 서동현 아마4단의 안내로 시내 관광을 나갔다. 어제 김선생도 벤츠를 몰고 왔는데 오늘 차도 벤츠다. 교민 사회에서 벤츠는 부와 성공의 상징이다. 시내로 가는 도중 리치몬드 공원(Richmond park)을 지나가는데 공원 규모가 커 해원이와 하진이가 놀란다. 왕실 소유지다. 부자 촌을 거쳐 시내로 들어간 후 우리는 중국 촌 근처에 주차를 시켰다. 여기서부터는 다 걸어서 다녔다.

피카딜리 광장에서 출발하여 리전트 거리의 고급 상점들, 옥스포드 거리만 돌아다니는데 4시간쯤 걸렸다. 중간에 카페도 가고 서사장이 경영하는 '아싸'라는 한 식당에서 점심도 먹었다. 식당은 크지는 않지만 천장 전체가 거대한 태극기 그림으로 된 곳이다.

 

“런던이 실증 난 사람은 삶에 지친 사람이다”라는 사무엘 존슨의 말처럼 런던에는 가 볼 곳이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어 버킹엄 궁전, 런던 브리지, 웨스트민스트 사원, 국회의사당 등을 차로만 대강 보고 부지런히 뉴몰든으로 돌아 왔다.

 


▲ (오른쪽부터) 해리 씨와 한상대 교수, 이하진 2단.

 

저녁 7시에 해리가 옥스포드에서부터 와서 우리일행과 한인 바둑회 간부들에게 저녁을 사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제와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음식이 너무 지나치게 많이 나온다. 해리가 쏘기로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중에 계산서를 보니까 400유로가 넘는다. 나와 김선생이 나서서 300유로로 줄였다. 바가지를 쓰는 사람이 불쾌해지는 마음을 배려해 주는 게 상도덕이 아닐까.

 

우리는 장소를 옮겨 한인 회관으로 갔다. 이 곳에 런던에 사는 영국 바둑인들이 오기로 되어 있다. 밤 8시에 약 20여 명이 모였는데 유럽 바둑 연맹 회장인 토니 앳킨스(Tony Atkins)와 다음 주부터 영국 바둑 회장이 될 론 벨(Ron Bell)이 와서 나와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해리가 나를 소개하는데 옥스포드 영어라 듣기가 참 좋다. 나는 해원이와 하진이를 소개했다. 곧 이어 해원이와 하진이가 약 10명씩 나누어서 다면기를 두었다.

 

그런데 영국 사람이 너무 많이 와 어제 바둑을 둔 한인 바둑 회원들이 바둑을 못 두고 구경만 했다. 우리가 숙소로 돌아오니까 밤 11시가 넘었다. 그런데 한인 바둑인들 6~7명이 찾아 들어온다. 오늘 다면 기를 못 둔 사람들이다. 프로와 바둑을 두고 싶어서 바둑 세트도 몇 개 가져왔다. 그들이 바둑을 두자고 요청 하니까 해원이와 하진이가 마지못해 응한다.

이들은 새벽 한시가 넘도록 두 명과 바둑을 두는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아무리 젊다고 해도 낮에 그렇게 많이 걸어 다니고 조금 전까지 몇 시간에 걸쳐 다면 기를 두었는데…. 생각 좀 해 주어야지. 이 날 무리한 것이 다음 날 해원이가 몸살 기운으로 빌빌거리게 만든다.
한국에 와서 해원이가 "그 땐 원망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모처럼 프로와 바둑을 두고 싶어서 애기가들이 그런 것이라 이해가 되요." 하며 웃는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지도 다면기를 하다

2006년 4월 6일

아침에 해리 차로 우리는 옥스포드로 향했다. 나는 가는 길에 옥스포드 남 쪽 솔스버리 근처에 있는 스톤힌지(Stone Henge)에 들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거석(巨石) 문화재다. 그런데 베아트리체 아줌마가 해원이와 하진이에게 옥스포드에서 20분 거리 북 쪽에 있는 Bicester란 명품 아울렛에 가라고 충고를 했다. 거기에 가면 쇼핑을 싸게 할 수 있다고 해서 이 두 명이 벌써 해리에게 거길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뒀다. 그 곳에 가니까 정말 물건이 쌌다. 내가 69유로에 산 똑같은 구두가 39유로다. 홧김에 내가 한 켤레를 더 샀다. 덕분에 나는 앞으로 한 동안은 구두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옥스퍼드 대학을 안내해준 옥스퍼드 대학원 유학생 김홍기씨와 함께 이하진 2단.

 

옥스포드에 와서 차를 해리 연구실 앞에 세우고 옥스포드 투어버스를 탔다. 해원이가 몸이 안 좋아 차 안에서 자기만 한다. 옥스포드를 한 바퀴 돈 후에 내가 하진이에게 “해원이가 몸이 안 좋으니까 네가 강자들을 맡으면 내가 하수들을 맡아 다면기를 두겠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해원이가 “제가 두겠어요. 자고 났더니 좀 나아 졌어요” 한다. 해원이의 자세가 진짜 프로다. 하긴 프로하고 두어 보겠다고 먼 길을 온 영국 하수들이 아마추어인 내가 두어 주면 김 샐 것이 뻔하다.

 

우리는 해리가 예약해 놓은 옥스포드의 고급 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영국 음식에 대한 평이 나쁘다. 그래서 '세계에서 제일 얇은 책'이 영국 요리 책이란 농담이 생겼다. 그런데 이 식당의 맛은 너무 훌륭하다. 시간이 조금 남는 틈을 타서 우리는 옥스포드 셔츠와 모자를 샀다. 해리가 해원이와 하진이를 데리고 카페에 들어간 동안 나는 뮤직숍에 들려서 모짜르트의 코시판 투떼 영국 글라인본 프로덕션을 찾았으나 재고가 없다고 해서 못 샀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건데….

 


▲ 옥스퍼드 대학교 바둑동호회와 함께.

 

옥스포드는 1130년 학자 같은 왕 헨리 1세 때부터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헨리 2세도 여기에 살면서 1167년에 대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은 법학, 수사학, 의학, 철학 등 4 과목으로 출발했으나 지금은 단과 대학만도 무려 35개나 된다. 대학 자체가 도시이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이 대학 분위기에 너무 감명 받는다. 오래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쿼드랭글(Quardrangle)로 불리는 잔디밭이 있어 더욱 분위기를 돋운다. 여기에선 2~3백 년 된 건물은 새 건물 취급을 받는다. 7~8백 년 이상 된 건물이 수두룩하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영국이 전 세계의 26%를 식민지로 삼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고 런던이 세계의 수도였을 대영제국 당시 세계를 실질적으로 주무른 사람들은 옥스포드와 켐브리지 출신들이었다.

 


▲ 옥스퍼드 대학 다면기.

 

대학교 컴퓨터학과 2층에서 약 20명이 다면기 지도를 받았다. 나는 유럽 회장 앳킨스, 해리와 함께 옆 방에서 차를 마시며 내년에 한국 대사배 개최 문제, 런던에 바둑 사범 보내는 문제, 바둑 TV, Internet 보급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다. 타이젬 평균 접속 숫자를 말하고 한, 중 프로들 대부분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놀란다. 나에게 타이젬이 왜 영어화 안 하느냐고 묻는다. 서양 바둑인의 약 90%는 일본이 운영하는 KGS(Kiseido) 에서 인터넷 바둑을 둔다. 이 사이트에서 자기네끼리 채팅도 많이 한다.

 


▲ 옥스퍼드 대학에서 다면기하는 이하진 2단.

 

영국의 1인자 매튜 맥페이든(Matthew Macfadyen) 6단은 1980~90년대 유럽 강자였다. 그는 항상 첫 점을 천원에 두면서 전 유럽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그는 한 때 '공포의 천원'으로 서양인들 사이에서 다케미아 9단의 세력 바둑과 버금 가는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오늘은 그의 부인과 와서 곧 있을 페어(Pair) 바둑대회를 준비한다면서 하진이에게 5점을 놓고 두고 있다. 둘이서 의논을 안하고 번갈아 두면서 하진이에게 완승을 거뒀다. 하진이가 “워낙 단단하게 두어서 중반 이후 판을 흔들 곳이 없어서 제가 던졌어요” 한다.

 


▲ 옥스퍼드 대학에서 다면기하는 한해원 2단.

 

다면기 후에 우리는 옥스포드의 밤거리를 걸어서 바둑클럽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카페에 갔다. 옥스포드에서 제일 비싼 카페라고 하는데 교회를 카페로 개조한 곳이다. 스테인 글라스가 벽면을 차지하고 천정이 높다. 생음악도 있다. 멋있는 줄은 알겠는데 아늑한 맛은 없다. 나가는 문 옆에 낮은 나무 벽장 같은 게 있는데 바둑 용품을 넣어 두는 곳이라고 한다. 바둑회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원이와 하진이가 옥스포드에 점점 반한다. “이 곳에는 사범 안 부르나요?” , “일년간 어학 연수 오는 방법은 어떻게 되죠?”

 

우리 숙소는 기숙사의 일부인데 약 300년 된 방이다. 내가 해리의 부담도 덜어 줄 겸 우리가 기숙사에서 자겠다고 국제 전화로 말했다. 해원이와 하진이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했다. 해 마다 열리고 있는 유럽 대회 등 서양 바둑 대회는 참가자 모두를 기숙사에 묵는다.

여행이 이제 끝내기에 접어들었다

2006년 4월 7

우리는 아침 식사를 7백년 된 소강당 같은 곳에서 했는데 고색창연하고 무게있는 분위기에 해원이와 하진이가 껌벅 죽는다. 식사 후 그 곳 한국 유학생 한 명이 해원이와 하진이를 데리고 신과 대학 등을 포함해서 한 시간 동안 옥스포드를 걸어서 돌겠다고 해서 보냈다. 그 안엘 들어가 봐야 진짜 분위기를 경험하는 건데 지금은 아침 8시라 문을 안 열었겠다.

 

나도 해리와 대화하며 다른 코스로 한 시간을 걸었다. 우리 코스도 너무 좋았다. 약속 시간 5분전에 우리는 돌아와서 택시를 불러놓고 기다리는데 애들이 안 온다. 10분이나 늦게 나타나서 내가 화를 냈다. 우리는 곧 기차역으로 갔다. 한국에서 유레일 파스를 살 적에 영국은 포함을 안 시켰기 때문에 여기선 일일이 표를 사야 한다. 해리가 우리 표를 사더니 자기도 런던으로 따라 온다. 런던에 도착 한 후 지하철을 통해 도버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기가 보통 까다롭지가 않다고 한다. 자기가 우리를 도버 행 기차 속까지 집어넣고 다시 옥스포드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수가….

 


▲ 마틴밀이라는 영국의 시골역.

 

이런 해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배를 놓치고 모든 기차 스케줄도 엉망으로 꼬이게 된다. 발단은 도버에서 내려야 했는데 우리가 무슨 얘기 끝에 웃다가 내릴 곳을 지나친 것이다. 도버 다음 정거장은 Martin Mill(마틴의 방앗간)이란 곳이다. 역에 내리니까 아무도 없고 택시도 없는 깡 촌이다. 걸어서 내려오니까 펍(Pub) 이 하나 있다. 이런 깡 시골에 동양인들이 들어서니까 신기한가 보다. 기차는 한 시간 후에 온다고 해서 택시를 불렀다. 도버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려니까 45분전에는 해야 하는데 이미 늦었다고 한다. 입국 수속 등 때문이다. 우리는 1시간 20분을 더 기다린 후에 배를 타게 되었다. 해리가 나에게 암스텔담으로 가는 연결 기차 시간표를 적어 주었는데 이제는 소용이 없어 졌다. 우리는 무조건 제일 먼저 오는 기차를 타는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 네덜란드에 가는 여정 중 영국 기차안에서 해리 교수님과 함께 한해원 2단과 이하진 2단.

 

이번 페리는 금요일에다가 고등학교가 단체로 타는 바람에 만원이다. 하진이가 1년간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는 22세의 미국 청년에게 말을 걸어 우리와 어울려 칼레까지 같이 갔다. 자기 아버지가 캔사스에서 가구점을 하는데 비틀즈 중 존 레논의 팬이라 아들 이름을 '레논(Lenon)'으로 지었다고 한다.

 

하진이가 “교수님, 너는 매력 있다”가 영어로 뭐예요? 하길래 내가 “You are attractive” 더 강한 표현은 “You are irresistible(저항 할 수 없이 매력적인)”이라고 한 후 레논에게 발음을 시키고 두 명은 따라 하게 했다. 레논이 얼굴이 빨개져 “Oh, my God!”을 연발하면서도 발음을 한다. 백인과 동양인 젊은 남녀가 그것도 1대 2로 앉아 서로 쳐다보며 서로 매력 있다는 말을 실루엣처럼 반복하고 있는 광경은 보는 사람에겐 코메디였을 것이다.

 

내가 “하진아, 네가 레논에게 먼저 작업 들어갔지?” 하니까 “아니오. 제 가방이 바퀴가 네 개인데 그리로 잘못 굴러가서 제가 미안하다고 하니까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 와서 말이 시작된 거예요” 하며 핑계를 대는데 무언지 궁색하다. 해원이가 “아까 도버항에서부터 서로 쳐다보고 이상했어요” 하고 나에게 말한다. 이 일로 하진이는 계속 놀림을 받는다.

이 무렵부터 해원이와 하진이는 “교수님 우리 여행이 이제는 정말 끝내기로 들어가네요” 하며 아쉬워한다. 내가 “너희들이 노는 물 상왕십리로 돌아가는데 뭘 그래?” 하고 놀리면 “유럽은 상왕십리 하고는 너무 달라요” 한다.

영어수필 - 영국 챔피언 테리 스테이시

5) 영국 챔피언 테리 스테이시 Terry Stacy, the British Champion
 

1986년 세계 아마 바둑 대회에서 나와 영국 챔피언 테리 스테이시는 초 읽기에 몰리면서도 서로 사투를 벌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 많은 사람들이 우리 판 앞으로 몰려와 열심히 계가를 시작하지 않는가. 나는 우리 판의 승부 결과가 대회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During the World Amateur Baduk Championship of '86, in the game between myself and Terry Stacey (British champion), even though we were pressed by Boyomi we were desperately fighting with each other. And then wouldn't you know, all of a sudden a number of people gathered around and started to calculate our game intensely. I realized that the result of our game would have an important influence on the whole Championship.

 



▲ 중국 첸가예와 필자(오른쪾)가 대국 중. 내 뒤에는 기꾸치 7단이 스테이시와 대국 중.


 

관전자들 중엔 조남철 9단, 조선진 5단(당시), 다케미야 9단, 가또 9단 등의 얼굴도 보인다. 나중 알고 보니 우리가 둔 판이 챔피언 결정국 이었다. 나는 천가예(陳 加悅)에게 5회 전에서 졌고 테리는 기쿠지(鞠池康郞)에게 졌기 때문에 스위스식 채점으로 내가 이기면 천, 테리가 이기면 기쿠지가 우승자가 된다. 그 때 양자는 각각 7승 1패 동률로 모든 대국을 마치고 우리 판의 결과만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Amongst the spectators I could see Nam-Chul Cho 9 dan, Sun-Jin Cho 5 dan (at the time), Takemiya 9 dan, and Kato 9 dan etc. Later on I found out that our game decided the winner of the championship. Since I had lost to Chun Gai-Ye in round 5, and Terry had lost to Gikuchi, according to the Swiss system of marking if I won then Chun would win, and if Terry won then Gikuchi would be the winner. The both of them had finished their games with 7 wins and 1 loss each so they were in a situation to wait for the result of our game.

 

당시 판세가 엎치락 뒤치락 하여 관전 객들도 떠날 수가 없었다. 종국을 한 후 집을 세어 보니 내가 1집 반 신승을 하여 천이 처음으로 세계 대회 우승자가 된다. 계가 후 오다케 9단이 나의 1 집 반을 선언해 주었고 수 십명의 대가들이 내 바둑을 구경했다. 이런 영광은 내 일생에 다시는 올 기회가 없을 것이다.
At the time, the drift of the game was turn over and over, and the spectators couldn't leave. When the game finished and we had counted the territories, I had narrowly won by 1 and half points, and Chun had become the World Champion for the first time. After the calculations, Otake 9 dan proclaimed my 1point and a half win, and lots of distinguished people came to observe my Baduk. I'll probably not have another chance to be honored like this again for the rest of my life.

 

세계대회 후 관서기원 초청으로 1주일을 같이 여행하게 된 나와 테리는 버스 안에서 많은 얘기를 주고 받았다. 자기 부인과 한 살쯤 돼 보이는 애기도 함께 여행했다. 주로 최종국 바둑 내용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 바둑은 테리가 나의 화점을 날 일자로 걸쳤다. 그 돌을 내가 한 칸 바짝 협공을 했고 테리는 내돌 머리에 자기 돌을 붙였다. 테리는 이렇게 시작된 정석을 둘러싼 공방전에 대한 자기 의견을 말하고 반드시 내 의견을 묻고는 했다.
After the World Championship, Terry and I were invited to Kansai Kiwon and we had conversed a lot on our 1 week trip on the bus. He brought along his wife and a baby that looked about 1 year old. We talked mostly about the contents of the Baduk games at the end of the competition, and in those Baduk games Terry had approached my flower points with knight moves. I had tightly one-space pincer attacked his stone, and he had a contact move at the head of my stone in return. Terry spoke his opinion on the way the development of the offensive and defensive battle with the beginning of that jungsuk (joseki), and he made sure that he asked my opinion, too.

 

테리는 자기의 라이벌이며 또 다른 영국 최강자 매튜 맥패이든 (McFadden)에 대한 얘기도 자주 했다. 맥패이든은 첫 점을 항상 천원에 두는데 거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묻기도 했다. 그는 자기 생각으로는 맥패이든이 첫점을 천원에 놓는 것은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하는 설 익은 짓 이라며 비판적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매튜의 “천원 첫점 + 높은 승률” 의 인기는 다케미야의 세력바둑 다음 쯤은 돼 보였다.
Terry also talked often about his rival Mathew McFadden, who is another strong player in England. McFadden would always place his first stone on chunWon, and he would ask me what I thought about that. He said that he thought McFadden only placed his first stone on the chunWon to keep a maintenance level on his image, and he criticized his immatureness. At the time, the popularity of Mathew’s “first stone on Chun Won + high winning rate” seemed to be second only to Takamiya’s center oriented Baduk.

 



▲ 스테이시와 대국 후 한국계 참가자들과 (오른쪽부터) 필자, 신흥수 미국 챔피언,
에반스 호주 바둑협회장, 김인 한국단장, 홍성화 캐나다 챔피언(입단연가 저자, 작고)
이학용 한국 챔피언, 정의선 스웨덴 챔피언.


 

테리는 세계대회 선발전 최종국에서 맥패이든을 이기고 자기가 참가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매튜에게 만은 자신 있어 했다. 말할 때 테리의 태도는 항상 진지하고 겸허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30살쯤 됐을까. 여행이 끝날 무렵 테리 부부는 나와 퍽 친해졌다. 테리는 나에게 영국에 오면 자기를 꼭 찾아 와야 한다고 하여 나도 쾌히 약속했다. 헤어지면서 우리가 세계대회 챔피언 결정 전을 둔 사람들 이란 자부심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Terry said that before the International Competition had begun, he had defeated McFadden in order to participate. Just towards Mathew, he had a lot of confidence. Whenever Terry spoke, he was always sincere and modest. Perhaps he was around 30 years old at the time. Towards the end of our trip, Terry and his wife grew quite close to me. Terry said that if I ever went to England I would have to meet him, and I pleasantly gladly promised him that I would. When we departed we made sure that we remembered to be proud of the fact that we were the two people that played the decision making game of the International Competition’s championship result.

 



▲ 스테이시와 대국.


 

94년 말 드디어 나에게 기회가 왔다. 잉글랜드 중 북부 도시 리즈(Leeds) 세미나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나는 1 주일 전에 도착하여 자동차를 빌려 영국 북부를 먼저 돌아 보고 회의가 끝난 후 런던으로 가서 테리를 만나 바둑도 두고 런던 안내도 받을 계획을 세웠다.
At the end of ’94, I finally got an opportunity. I was able to participate in a seminar at Leeds, a town of the Mid-Northern area of England. I had hired a car 1 week in advance and traveled around the North of England, and after the end of the conference I made plans to go to London and meet Terry to play some Baduk and be guided around London, too.

 

시저의 로마군에게 정복 당했던 고도(古都) 요크(York), 중세와 현대가 멋지게 조화를 이룬 에딘버러(Edinburgh), 산업혁명이 시작된 글라스고(Glasgow), 괴물 출현 설로 유명한 네스(Ness) 호(湖)를 거쳐 영국 산업의 중심지 였던 만체스터(Manchester), 리버풀(Liverpool) 등 을 거쳐 리즈에 갔다.
York, the old city that was conquered by Caesar’s Roman Army, Edinburgh (where Medieval! and Modern collaboration has formed a majestic combination), the place where the Industrial Revolution began, Glasgow, passed Loch ness (famous for the Loch ness monster) to the center of England’s industries, Manchester, Liverpool etc. all the way to Leeds.

 

이 도시들은 중심 산업이 기울어 지며 사람들이 떠나 빈 건물이 많았다. 중심가와 상가엔 사람들이 왁자지껄 거려도 텅 빈 뒷 거리의 모습은 보고 있는 내 마음까지 암울하게 만든다. 리즈에서 나는 런던에 있는 테리에게 전화했다. 이틀 후 내가 런던에 가면 만날 약속을 하기 위함 이었다. 그러나 너무 충격적인 소식은 그가 몇 년 전 교통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When the center of industries swayed to different place, many of the buildings in these cities were abandoned by the people who used to live there, leaving them empty. The main streets and the markets are full of people, but when I see the empty back alleys even my mind feels gloomy and depressed. From Leeds I gave Terry a call in London. It was to make an appointment to meet him when I arrive in London two days later. However, I was shocked to find out that he had died a few years ago in a car accident.

 

다시 가본 런던(London)은 여전했다. 전체적으로 어둠 침침하나 오래된 역사와 문화, 찌들고 낡았으나 실하고 분위기 있는 건축물들이 전 도시 골목에 꽉 찼다. 지금 이라도 셜록 홈즈(Sherlock Holmes)가 나타나 범인을 추적하고 다닐 것 만 같다. 문득 테리 생각을 하니 갑자기 런던의 한 쪽이 텅 빈 것 같다. 런던의 잿빛 하늘에선 비까지 휘적 휘적 오고 있었다.
When I visited London again, it was the same as before. It is dark and gloomy overall, but it has a long history and culture. Although it is worn out and weathered, it is filled with buildings that have a solid atmosphere. It seemed like Sherlock Holmes would appear and he’d be in pursuit of a villain at any moment. Thinking about Terry suddenly made me feel as though a part of London was empty. It was even ash colored sky of London was spilling swaggering rain

 

 

 

 

 

독일 베를린을 향해 출발

2006년 3월 24일

오후 1시 30분. 독일 베를린으로 향하기 위해 네덜란드 항공(KLM)에 몸을 실었다. 프로기사 한해원 2단, 이하진 2단이 나와 동행한다. 원래는 최철한 9단 윤영선 5단도 함께 갈 예정이었으나 최9단은 맥심배 입신최강전 결승에 올라 이세돌 9단과 대결을 벌이게 되어 참가하지 못했다. 윤5단은 자신의 최근 저서 '패'라는 영어 바둑 책 교정을 끝내고 1주일 뒤에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우리는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한국대사배 바둑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팀을 짜서 떠나는 길이다.
 

우리는 11시간 비행을 했고 암스텔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1시간쯤 머문 뒤에 EU 입국절차를 밟았고 베를린 행으로 비행기를 갈아탔다. 그리고 다시 1시간을 날아서 베를린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서 베를린으로 직항은 없다. 해원이와 하진이는 평소 친한 사이고 성격이 밝아 작은 일에도 잘 웃는다. 게다가 첫 유럽 방문이라 그런지 기대감에 들떠 있다.

 


▲ 공항에서 한해원 2단과 이하진 2단이 다정하게 사진 한장!

 

우리 일행은 베를린에(현지 시간) 오후 6시 반에 도착했다. 한국과 유럽은 시차가 8시간임으로 아직 같은 날 저녁인 것이다. 공항에 베를린 바둑 협회장 룽거(Bernhard Runger) 박사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마중 나왔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까 베를린은 우리나라 초겨울만큼 쌀쌀하다. 우리는 곧장 시내에 있는 한국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서 우리 일행을 보려고 온 황인성 아마7단, 조석빈 아마7단과 독일 여성 챔피언 다니엘라 아마4단을 만났다. 파인 룽거씨가 김치를 한국 사람보다 더 잘 먹는다. 나는 벤(Bernd)이라는 변호사 집에, 해원이와 하진이는 안드레아스(Andreas) 베를린 바둑협회 부회장 집에 숙소가 배정 됐다. 양쪽이다 옛 동 베를린 지역이다. 사회주의 도시는 덜 화려하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는 불편함이 없다.

 


▲ 공항을 둘러보는 한상대 교수와 이하진 2단.

 

내 숙소인 변호사 벤은 혼자 살고 있다. 가구도 적고 집안이 썰렁하다. 내 직감으로 이혼 당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어 보지는 않았다. ^^ 내가 웃으며 변호사치고 가난해 뵌다고 하니까 벤은 "중국에 1년 동안 바둑 유학을 다녀와서 이 집에 이사 온지 1 주일 밖에 안되었다."라며 변명을 한다. 책장에는 바둑 책이 많고 특히 한국어로 된 바둑 책이 많았다. 집 밖으로는 전차(S Bahn)가 다니고 복잡해 집안이 시끄러울 것으로 예상됐으나 조용하다. 알고 보니 특수 유리 창문 때문이다. 내가 벤에게 자기 전에 바둑 한판 두자고 했더니 벤이 내일 아침부터 시합이라 에너지를 아끼겠다고 하며 거절한다. (겨우?)아마 4단인 그가 나름대로 운기조식하고 있었다.

 

독일 한국대사배 1회전 시작

 

 

2006년 3월 25일

아침에 전차로 먼저 '친한파' 룽거 씨 집에갔다. 그리고 룽거씨 차를 타고 해원이와 하진이를 데리러 갔다. 약 40분이 걸렸다. 해원이와 하진이는 자신들이 묵은 아파트는 깨끗했다고 한다. 안드레아스 씨와 아침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우리는 40분쯤 달려 대회장인 산 수지 궁(宮)으로 갔다. 비가 오는 고속도로를 룽거씨가 160km 속도로 달린다. 하진이가 신나 하니까 기회가 되면 200Km를 경험하게 해 주겠다고 한다. 나는 "그런 경험은 안 해도 좋으니까 나는 빼 달라."고 말해서 모두 웃었다. 4년 전인가 나도 베를린에서 본까지 약 1천Km 쯤 되는 거리를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평균속도 190Km로 달린 적이 있었다. 내 일생 최고로 빨리 달린 기록이다. 독일 고속도로(Autobahn)는 속도 제한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한국 대사배가 벌어지고 있는 대회장. 아직 대회가 시작되지 않았다.

 

아침 10시. 대사 배 개회식장. 주독 한국 대사가 출장 중이라 대리 대사인 한공사(韓公使)가 나왔다. 한공사가 “종친회 같습니다” 해서 보니까 하진이만 빼고 나와 해원이까지 3명이 성(性)이 같다. 한공사는 독일어로 나는 영어로 개회사와 인사말을 했다. 독일 참가자들이 영어를 잘 알아듣는 것 같아 편했다. 수퍼그룹(Super Group)의 16명이 이틀간 스위스 제도로 대회를 치르고 이 중 상위 3명이 한국에서 열릴 국제아마 바둑 팀 대회에 독일 팀 대표로 출전한다. 한국 행을 위해 모두가 전력 투구하는 모습이다. 유단자조는 총호선, 급조는 접바둑으로 진행된다.

 

1회전이 끝나자 독일 선수들이 자신들의 바둑을 프로기사에게 복기를 요구해왔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바빠진다. 이 두 명은 두 달 전 시작한 바둑영어교실에서는 6일 밖에 강의를 안 받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바둑용어를 영어로 열심히 외우고 필요한 기초 대화를 강의 받으며 이날을 준비해 왔다.

용어 중에서도 비마(monkey jump), 이적수(Thank you move), 축(Ladder), 장문(Net), 쌍립(Bamboo joint) 등은 외우기가 쉽다고 재미있어 한다. 두 명이 나름대로 독일인들에게 영어로 복기를 해 주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나는 흐뭇했다. 중간에 하진이가 나에게 부지런히 오더니 영어 표현을 하나 물어 본 후에 다시 돌아간다. 대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틈틈이 우리는 산 수지 궁 내부를 돌아보고 햇빛이 날 때면 정원을 걸었다.

 


▲ 대회장 산수지 궁을 뒤로 하고.

 

대회장인 포츠담(Potsdam)에 있는 산수지(Sans Souci) 궁은 프리드리히 2세가 황태자 시절에 지내던 별궁이다. 그는 1740년부터 86년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재위하면서 오늘날 독일 문화의 저력을 키운 대단한 인물이다. 그의 독선적인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는 아들의 예술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때 그가 철학, 음악 등 정서적인 분야에 몰두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의 반항적 행동은 아버지의 미움을 더 받아 결국 이 곳 별궁으로 보내어진다.

 

산 수지에 온 황태자는 자신의 뜻을 활짝 펴게 된다. 자기가 평소 존경하던 프랑스 계몽철학자 볼테르(Voltaire)를 초청하여 3년간 궁에 묵히면서 자주 강연회, 세미나를 가졌다. 또 당시 무명이던 음악가 바흐(Johan Sebastian Bach)를 불러 매일 음악회를 열고 자신도 플룻 연주회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바흐곡 중 유명한 헌정(Offering)은 바흐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바친 곡이고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도 이 당시 여기에서 작곡되었다고 한다. 이런 곳에 있는 홀을 빌려 한국 대사배 바둑대회를 베를린 협회가 개최하고 있었다. 아주 뜻깊은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국 3개국이 항복한지 한달 밖에 안된 독일에서 회담을 갖고 일본에게 항복을 권유한 “포츠담선언”을 한 건물이 산 수지 궁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내부가 품위 있는 고급 식당 같은 분위기이다.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 등이 이 곳에 앉아서 세계질서를 정하던 장소라고 생각 하니 마음이 숙연해 진다. 2차 대전 후 한국 독립 문제가 특별조항으로 처음 국제적으로 인정 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으로 갈 독일 선수 3명 결정

2006년 3월 26일

대회 이틀 째 오후. 5라운드를 끝으로 드디어 한국으로 갈 입상자 3명이 결정 됐다. 1위에 펠릭스(Felix von Arnim, 6단, 함부르크), 벤(Bernd Schutze, 5단, 베를린) 데이빗(David Ongaro, 4단, 함부르크)이다. 작년에 한국에 왔던 마르코 5단은 분전을 했으나 아깝게 4위를 했다. 우승자 펠릭스에게 하진이와 두점 특별대국을 제안했다. 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피한다. 두점이란 말에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두 점 대국이면 나는 하진이에게 걸겠다.

 

▲ 왼쪽부터 한국 대사배에서 수상을 한 데이빗(David Ongaro, 4단, 함부르크), 펠릭스(Felix von Arnim, 6단, 함부르크), 벤(Bernd Schutze, 5단, 베를린).

 
나에게 숙소를 제공 해 준 벤이 2위를 해서 내가 축하해 주었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그는 5단으로 승단도 했다. 시종 싱글벙글 기쁨을 감추지 못 한다. 대사관의 한공사가 우리 세 명과 룽거씨, 인성이를 한국 식당으로 초청하여 환담을 나누었다. 벤은 그날 혼자 단골 펍(Pub)에 가서 자축 파티를 열고 밤에 아주 늦게 귀가했다. 이 날 벤은 술에 취해 나와 바둑을 두지 못 했지만 화기애애한 가운데서 대화를 나누었다.
 

저녁엔 룽거 씨 안내로 베를린 시내를 걸어 다녔다. 룽거씨는 컴퓨터 박사로 아마2단인데 그의 꿈은 한국에 직장을 얻어 3년 만에 아마 5단으로 금의환향하는 것이다. 그런 뒤에 수퍼그룹에서 바둑을 두는 일이다. 그는 한국을 “드림 랜드(Dream Land)” 라고 부른다. 그의 부인인 소설가 마누엘라는 남편의 이런 계획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그는 바둑 얘기를 부인이 없는 곳에서만 하기 때문이다. 룽거 씨가 3년 전에 나에게 베를린에 사범을 한 명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바둑도 세고 영어도 잘 하는 내 학생 중 한 명을 골라 달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마땅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다. 바둑 강자 중 영어 강자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연구생 출신인 조석빈 아마7단이 친구의 도움으로 먼저 베를린의 라이벌 도시인 함부르크에 가서 바둑 보급을 하자 룽거 씨가 날마다 이메일, 전화 등으로 나를 독촉했다. 할 수 없어 당시 청아모 회장으로 내 바둑 영어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던 황인성 아마 7단을 베를린에 보냈다. 조건은 숙식제공, 영어, 독일어 수업 협조, 바둑을 둘 때마다 2~30 유로 정도의 지도비를 받는 것이다. 계약 기간은 1년으로 했다. 서로 만족하면 연장하는 조건이었다. 언어능력이 좋아지면 학교 동아리 학생들도 지도하고 태권도 사범들처럼 자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 내 계산이다. 인성이가 영어도 많이 늘고 바둑인들 사이에 인기도 있고 이 곳 생활을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안도했다.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가 태권도 사범 7천여 명을 전 세계에 내 보냈다. 태권도는 몸으로 하는 운동이라 유창한 언어가 필요 없지만 바둑은 많은 설명이 필요하므로 다르다. 7천명의 태권도 사범의 대부분이 초기 고생을 딛고 지금은 현지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태권도가 일본 가라데를 누르고 동양 무술의 대명사가 되고 올림픽 경기 종목으로 되는 데까지 많은 사범들을 해외로 내 보낸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바둑도 태권도 처럼 전 세계에 퍼지는 것이 내 꿈이다.

 

베를린 바둑 챔피언 타이틀매치에 참가하다

2006년 3월 27일

오늘은 관광을 하고 저녁에만 훔볼트 대학에서 열리는 베를린 바둑 챔피언 타이틀매치에 참가하는 스케줄이다.
 

히틀러가 베를린을 세계의 수도로 삼으려고 했으나 2차 대전에 연합국 측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다시 동과 서로 분단되었던 베를린이 1990년 통일 이후 새로운 유럽의 중심 도시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로 현재 인구는 4백만 이지만 도시가 넓어서 인구 밀도가 적어 보인다. 다른 유럽 도시와는 반대로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모습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도 시내의 포츠다머 플랏츠(Potsdamer Platz)는 광장 전체가 마치 우주선에 들어 온 것으로 착각이 갈 정도다. 설계가 초 현대적으로 대담하여 인상적이다. 이 주변에는 미술관, 박물관 등이 많다.

 


▲ 브란덴브루크 문 근처 유태인 추모 작품에서.

 

분단의 상징이었던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문은 1년 반 전에 내가 왔을 때는 보수공사를 하고 있더니 지금은 새로 단장된 모습이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국회의사당, 유태인 위령 조각공원 등을 돌았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멕시코 텔레비전 팀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전 세계인이 멕시코 축구를 응원하는 모습을 TV에 담는데 도와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판초를 입고 멕시코 모자 솜브레로를 쓰고 노래를 하며 멕시코 기를 휘두르는 모습을 찍고 말았다. 특히 빨강, 파랑 물감들인 가발을 쓰고 멕시코를 응원하는 룽거 씨 모습에 우리가 많이 웃었다. 이 장면의 모델이 된 다음 “이거 멕시코에서만 방영되어야지…. 한국 바둑팬이 보면 안 되는데” 하면서 우리는 웃었다. ^^ 사실 걱정이 됐다.

 


▲ (왼쪽부터) 이하진 2단과 한상대 교수, 룽거, 한해원 2단이 멕시코 축구를 응원하는 모습.

 

브란덴부르크 문 내부에 침묵의 방(Silence Room)이 있다. 우리도 UN 평화 기도문을 읽고 세계평화를 생각하는 시간을 10분 정도 가졌다. 이후 분단의 상징인 벽 박물관(Wall Museum)에 가서 당시 장벽을 돌아 봤다. 점심은 룽거씨 사무실 구내식당에서 독일식으로 먹었다. 우리 세 명만 박물관 지역을 걸어서 시립 오페라 하우스에 갔다. 또 오페라 하우스 앞에 있는 전형적인 독일 카페에서 차 한잔을 마시고 대국장인 훔볼트 대학으로 향했다.

 

훔볼트 대학은 변증법의 헤겔, 공산주의 이론의 칼 마르크스, 상대성 원리의 아인슈타인을 배출한 유명한 대학이다. 노벨상 수상자도 27명이나 된다. 이들은 훔볼트 대학이 세계 최고의 대학이란 자부심이 대단하다. 동독에 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대학의 다른 이름이 베를린 대학이다. 이 대학에 1890년경에 일본 유학생들이 바둑 클럽(Go Club)을 열었고 이 것이 유럽 최초의 바둑 클럽일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2층에 올라가니까 독일 바둑인 20여명이 모여 지도 다면기의 방법을 의논하고 있다. 내가 챔피언 매치는 어디에서 하느냐고 물어 보니까 우리 일행을 옆 강당으로 데려간다. 텅 빈 강당 무대 위에서 챔피언과 도전자 두 명만 마주 보고 바둑을 두고 있다. 관전자는 아래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보다가 나가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들어서니까 대국자들이 일어나 인사를 한 뒤에 다시 대국을 한다.

 

다면기에서 보통은 해원이와 하진이가 80∼90%의 승률을 올리는데 이 날 승률은 80%를 못 넘긴 것 같다. 특히 벤이 두 점으로 하진이에게 이긴 뒤 나에게 무용담을 자랑을 하며 시종일관 웃는다. 저렇게도 좋을까. 벤은 바둑에 단단히 미친 독일 변호사의 모습을 나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서양인은 취미를 본업처럼 진지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본업과 취미가 상충 될 때는 취미를 죽이는 것이 보통인데 서양인들은 자기가 정말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장고한 후에 방향을 결정한다. 서양인 중에 바둑 때문에 인생이 초라해진 사람도 꽤 많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착잡해 진다.

 

지도 다면기 뒤에 베를린 바둑 클럽이 저녁을 사겠다고 말했다. 갑자기 해원이와 하진이가 '인도음식'이 먹고 싶다고 말한다. “인도음식?” 아마 황인성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인도음식을 먹고 싶다고 말한 것 같다. ^^ 해원이와 하진이의 의견대로 10여명이 인도 음식점에 갔다.

'상점 유리를 깨고 우산을 꺼낼까요?'

2006년 3월 28일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그 동안 정 들었던 베를린을 뒤로하고 동베를린 역에서 룽거 씨의 배웅을 받았다. 우리는 모차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의 짤츠부르크를 향해 긴 기차 여행을 떠났다. 유래일 패스를 한국에서 미리 구입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1등칸을 타고 여행한다. 숲이 절반인 독일 평야, 그림 같은 마을들을 지나며 나는 틈 나는 데로 독일, 유럽 역사 강의를 해원이와 하진이에게 해줬다. 밖은 아직 눈이 덮인 곳이 많다. 유럽이 금년엔 이상하게 추워 봄이 한달 늦게 온다고 한다.
 

3년 전에 내가 명지대학교 바둑 팀 18명을 인솔하고 유럽 9개국을 돌았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유럽은 기상 역사상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가장 추운 봄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침에 떠나 저녁 7시경에 짤츠부르크에 도착했다. 이 곳에 바둑 클럽이 있으나 오늘이 모이는 날도 아니고 마침 회장도 타지에 나가 있어 바둑클럽에는 연락을 안 하기로 했다. 룽거 씨가 우리가 가는 도시의 바둑 클럽에 계속 연락을 해 준다.

 
 

▲ 모짜르트 집 앞에서 이하진 2단과 한상대 교수.

 

역 근처에 저렴한 호텔에 여장을 푼 후 우리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택시를 타고 모차르트 집 앞으로 갔다. 비가 많이 온다. 모짜르트 하우스가 있는 게터라이테 거리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유럽적인 거리인데 밤 9시가 되니까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고 사람이 없다. 텅 빈 밤거리를 우리는 우산이 없어 비만 쫄쫄 맞고 돌아 다녔다.


해원이와 하진이 중 한 명이 나에게 “교수님, 우리 상점 유리를 깨고 우산 좀 꺼내면 어떨까요?” 한다. “너희들이 좀 깨봐라. 나도 우산이 절실하다"라고 말했지만 실행에는 안 옮긴다.

결국 우리는 택시로 숙소에 다시 돌아 왔다. 숙소에서 추위를 달래고 호텔 1층에 내려와 맥주와 음료를 시켰다. 중국계 주인이 우리가 한국 사람인걸 알아보고 아리랑 TV를 틀어 준다. 어떻게 여기까지 아리랑 텔레비전이 나올까 신기하다. ^^

 


▲ 독일이 통일하기 전 베를린 장벽이 있던 곳.


▲ 룽거 씨와 한상대 교수.

다음 목적지는 뮌헨이다

2006년 3월 29일


▲ 미라벨 정원 앞에서 한상대 교수와 이하진 2단.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호텔에서 한 다음 우리는 다시 30분 동안 걸어서 모짜르트 하우스로 갔다. 가는 도중에 있는 미라벨 공원은 짤스부르크 성을 사진 찍기에 좋은 곳이다. 이 성은 영화 사운드 오프 뮤직에서 나왔던 곳이다. 이 영화를 찍은 곳만 돌아보는 관광 코스도 있다. 한편 올해가 모짜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이 되는 해라 전 세계에서 많은 모짜르트 기념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내달에는 짤츠부르크 모짜르트 축제가 이 곳에서 열린다. 모짜르트 하우스를 돌아보는데 1시간쯤 걸렸다. 일본 사람들이 눈에 많이 뜨인다. 아버지가 궁정 음악가이라서 그런지 집이 좋다. 집은 약 500년 전쯤 지어졌고 250년 전쯤에는 모차르트 가족들이 살았다 3층 돌 집으로 베이지 계란 색이고 꽤 크다. 모짜르트가 연주하던 합시코드, 비올라 등이 전시되고 있다.
 

비인에서 서쪽으로 300Km 거리에 위치한 짤즈부르크는 건축물들의 질감이 독일에서 느끼던 것과는 달리 힘이 빠지고 온화하며 부드럽다. 해원이가 “파스텔 풍이네요”한다. 이곳에는 ‘오스트리안~로마'풍으로 알려진 건축물들로 가득 차 있다. 여행자 중에는 이곳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 오스트리아 짤츠부르크 소금강에서.

 

‘소금의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짤즈부르크는 696년 루퍼트 주교가 이 땅에 대주교가 관할하는 도시를 세웠다. 수세기에 걸쳐 짤즈부르크는 바바리아 귀족으로부터 소금 광산의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당시 소금 광산은 ‘흰색의 금광’으로 알려져 있었다. 소금은 '명성과 부' 라는 선물을 안겨준다. 추기경들이 대규모의 성과 성당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금이 뒷바침 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시장 터를 구경한 뒤 성 피터 성당으로 갔다. 모짜르트와 살리에르가 이 성당에서 연주 활동을 하던 곳이다. 피터 성당의 내부는 규모도 크거니와 내부 돌기둥 벽면에 있는 조각장식은 보는 이의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해원이와 하진이도 감명을 받는다. “너희 같은 촌놈들까지도 감명을 받을 줄 아냐?” 하며 내가 두 명을 놀렸다. 성당 앞 미술품 점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팔고 있었다. 해원이가 작품 두어 개를 산다. 우리는 모짜르트 동상이 있는 광장으로 나와 사진을 찍은 후 이 곳을 서둘러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뮌헨이다.

 

뮌헨(Munhen)
인구 약 150만. 바이에른 주의 수도로 정치, 경제, 예술, 문화, 교통의 중심지. 베를린과 함부르크 다음으로 독일 제3의 도시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혁명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히틀러는 이곳에서 나치스 운동을 일으켰다.

 

세계 최대의 “10월 맥주 페스티발”이 매년 열리며 1972년 뮌헨 올림픽을 개최했다. 독일 북쪽은 과학, 힘(국력)을 대표하고 남쪽은 문화, 예술을 대표한다. 뮌헨은 남쪽 지방의 중심지다. 자동차 비엠 다블유(BMW) 본사가 여기에 있다.

 

뮌헨 바둑회장 필립(Philip Hillers)을 저녁 7시에 중앙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우리는 낮 12시에 도착했다. 7 시간이나 빈다. 나는 두 명을 데리고 마리안느 플랏츠(Marien Platz)로 먼저 갔다. 구 시가 중심에 있는 큰 광장인데도 주변 건축물, setting 때문에 방문자가 아늑하게 느끼게 만든다. 중세 풍의 대형 교회들, 거리 음악가, 판토마임, 각종 상인들이 관광객의 발길을 잡는다. 광장 북부에는 웅장한 새 시청 청사가 있고, 동부에는 작은 구 시청 청사가 있다. 그 밖에 구시가에는 뮌헨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페터스 교회, 르네상스 양식의 미하엘스 교회, 고딕 양식의 프라우엔 교회 등이 있다. 우리는 백화점과 교회를 돌아 본 후 약 4시간 이상을 걸어서 뮌헨을 탐험했다. 맥시밀리안 거리에서는 카페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예쁜 젊은 여자 애들이 있어서 그런지 남자 종업원들의 서비스가 좋다.


 


▲ 필립을 만나기 전 시간이 남아서 방문한 백화점에서 이하진 2단.

 

저녁 7시에 필립을 역에서 만나 바둑 클럽엘 갔다. 3년 전 내가 갔던 곳이 아니다. 물어 보니까 그 곳에는 다른 요일에 모인다고 한다. 스포츠 클럽 지하에 있는 방 하나가 바둑 두는 곳이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저녁 식사로 파스타를 시켰는데 맛이 생각하던 것하고 달랐다고 한다. 그 때 바둑 회원 한 명이 치즈 가루를 가르쳐 주자 두 명이 다 가루를 한참 쳤다. 가루를 쳤으면 먹어야 하는데 맛은 없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으로 서로 눈이 마주치자 두 명이 웃기 시작하는데 10분 이상 그치질 못 한다. 드디어 해원이는 자리까지 박차고 나가 밖에서 웃는다. 어리둥절해진 독일인들이 나만 쳐다본다. 나도 그 땐 이유를 몰랐는데….

 

이날 2급짜리와 둔 바둑을 해원이가 이번 여행에서 잊지 못 할 내용이라고 한다. 저녁에 필립네 집에 자러 갔다. 필립의 집은 뮌헨 시내 중심가에 있는 좋은 곳인데 방을 보니까 꼭 폭탄 맞은 곳 같다. 발 디딜 곳이 없는데 깔린 것들이 대부분 바둑 관련 책이나 물건들이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잔 방도 내 방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중에 필립네 집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후진 곳으로 우리들에게 뽑힌 곳이 됐다. 필립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인데 혼자 살고 바둑밖에 모른다. 술, 담배를 지독하게 해서 40대인 그의 손이 수전증으로 떨고 있었다. 서양에는 사회적응력이 모자란 마음 약한 지식인이 바둑에 몰입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프랑크푸르트 바둑 클럽에 가다

2006년 3월 30일

다음날 아침 우리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필립은 자기가 마신 빈 맥주병 한 박스를 들고 나가 쓰레기 처분 하는 곳 옆에 갖다 놓는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쓸쓸해진다. 필립과 헤어져 우리는 기차로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담스퀘어 바둑회장인 클레멘 스(Clemens Winklemaire)와 만나기로 되어 있다.


담슈타트(Darmstadt) 는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 중간에 위치한 소도시인데 고등학교 교사인 클레멘스 때문에 바둑클럽 활동이 활발하다. 그는 바둑이 3급 밖에 안 되는데 중고생 제자 300명에게 바둑 지도를 하고 있다. 클레멘스는 자기 보다 실력이 세어진 제자의 건방진 행위에 정이 떨어져 요즘 바둑을 안 두고 다른 취미인 록 밴드에서 드럼을 치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3명이 다녀간 뒤에 다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어제 메일로 이런 사실을 알려 왔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우리가 하이델베르크로 가려면 칼스루어라는 곳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데 안내 방송이 독일어로만 나오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 내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돌아 가라고 한다. 우리는 한 시간쯤 더 지나 와서 프랑스 국경에 가까이 있는 킬(Kehl)이란 곳에서 내렸다. 내가 클레멘스에게 전화를 걸어 기차를 잘못 타서 킬에 와 있으니까 그 시간에 하이델베르크는 못 간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 독일어 발음이 키일(Kiel) 이라고 들린 모양이다. 키일은 독일 최북단 덴마크 옆에 있는 곳이다.

 


▲ 한상대 교수, 이하진 2단, 클레멘스.
클레멘스는 곧 프랑크푸르트의 크리스에게 전화하여 이 소식을 전했다. 크리스는 우리를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특별 바둑 모임을 주선 했는데 우리가 기차로 6시간 떨어진 곳에 있으므로 큰 일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걱정 끝에 회의를 소집했다고 한다. 우리가 모임에 못 올 것 같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을 즈음 나는 다시 되돌아 가는 기차를 타려고 필사의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골에다가 프랑스에 가까이 있는 마을이라 영어가 안 통한다. 나는 기차를 잘못 타서 열 받아있고 영어를 못 알아 들어서 화가 나 있는데 해원이와 하진이는 무엇이 좋은지 계속 낄낄거리기만 한다.

다행히 기차가 곧 와서 한 시간 후에 우리는 시간이 너무 지연되어 하이델베르크를 포기하고 대신 담슈타트에 갔다. 클레멘스의 집이 있는 곳이다. 클레멘스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녀서 영어가 아주 유창하다.

나이는 30세. 총각이다. 그의 특징은 말 총 머리인데 이번에 만나니까 예수와 같은 머리를 하고 있다. 레오날드 다빈치가 그린 예수 초상화와 거의 비슷하다. 하진이가 예수 같다고 하니까 자기 학생들도 그런다고 대답 한다. 자기 컨셉트를 그렇게 잡은 것 같다.

나는 클레멘스에게만 걸리면 최소 두 시간 이상을 걸어야 한다. 그는 걷는 것과 설명하는 것이 취미라 잘 못 걸리면 네 시간도 넘어 걷게 된다. 3년전에는 너무 더운데다가 우리 학생 중 걷기가 불편한 사람이 있는데도 '금방'이라고 하면서 8km를 돌았다. 그에게 걸리면 최소 그 정도는 걸어야 한다. 준비 해온 자료들을 읽으면서 열심히 설명하는 그를 보면 원망할 수도 안할 수도 없게 만든다.

클레멘스는 우리에게 두 시간 이상 시간이 남으니까 담슈타트를 돌아보자고 한다. 나는 속으로 또 얼마를 걸어야 하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는 우리를 먼저 옛 영주 별장이 있는 공원엘 데려 갔다. 그는 이 곳에서 매년 담슈타트 바둑대회를 여는데 지난 번엔 성인부에 120명, 어린이부에 20명이 출전했다고 자랑한다. 공원도 아름답고 대국장도 훌륭하다. 그 다음 그는 우리를 건축가 촌에 데려 갔다. 옛날 이 곳 영주가 유럽 각지 건축가들을 불러모아 이 마을을 건설 했는데 건축가 들에게는 자기가 사는 집을 직접 설계하고 지어서 살도록 했다. 건축가들이 최선을 다한 건축물이라 그런지 모두가 특징이 있고 멋지다.

 

건축가 촌 옆에 지은 아방가르트 초 현대식 전위예술 아파트는 사진에서 보다시피 우리가 알고 있던 건축물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전망을 보기 위해 결혼 탑 7층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자고 했더니 클레멘스가 완강히 거절하는 바람에 달팽이 식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했다. 우리 일행은 프랑크푸르트에 차로 30분 간 달려 와서 다시 비를 맞으며 시내를 걸어 돌아 다녔다. 2천여년 전에 로마 지배 시절 목욕탕 자리, 옛 시청 건물, 독일 연방 의회 건물 등을 돌아 본 후 바둑 모임 장소로 갔다.


▲ 현대식 전위예술 건물에서 이하진 2단과 한상대 교수.

 

프랑크푸르트는 북부 라인강(江)의 지류인 마인쯔강(江)을 끼고 있는 상업도시이다. 문호 괴테의 출생지로 18세기까지는 국왕의 선거 및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었다. 현재의 독일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2차 대전 중 도시의 83%가 파괴되어 그 자리에 현대식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많은 은행의 본점들이 이 곳에 있다. 근년에 와서는 교통의 요지로 이 곳 공항은 유럽의 관문이다. 우리에겐 프랑크프루트(손가락) 소시지(Sausage)로 유명한 곳.

 

바둑 클럽에서 20여명의 현지 바둑인들이 우리를 반긴다. 나는 이 곳 클럽을 7~8차례 이상 와서 모두 낯이 익다. 다만 항상 나를 반기던 미모의 짜오페이 6단이 상해에 가서 살고 있어 안보였다. 섭섭했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7~8명씩 맡아 다면기를 두고 있는 동안 나와 바둑 회 간부 몇 명은 앉아서 바둑계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이 베를린에서 우리가 한 일을 샅샅이 알고 있는 걸 보니 독일 바둑계가 얼마나 좁은지 알겠다. 바둑행사가 끝난 후 나는 팀 네 집에 해원이와 하진이는 크리스네 집에 숙소가 배정 됐다. 주차가 힘들어서 팀이 3블럭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는 바람에 나는 비를 쫄딱 맞았다. 팀네 방은 없는 바둑책이 없다. 일본에서 출판된 바둑책은 다 산 것 같다. 팀의 부인까지 합세하여 바둑 얘기를 새벽 1시까지 하고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독일 바둑계는 특징있는 바둑인이 많다. 발두인이라는 4급 두는 베를린 사람은 전직이 정원사 였는데 전문 학교에서 아동 교육학을 이수 한 후에 초등학교 어린이에게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제자가 600명쯤으로 늘어 자기의 직업이 됐다. 제자 300명의 클레멘스, 바둑 룰만 공부하는 베를린의 야시크, 바둑 책을 몇 권 쓴 프랑크푸르트의 딕펠트 3단과 바둑에 대한 자료는 무엇이든지 다 있는 크리스, 하노버의 겔락, 함브르크의 데이빗, 드림랜드 한국 행을 꿈꾸는 룽거씨 등 이름을 열거 하려면 한이 없다. 나중에 서양 바둑 광들에 대한 얘기만 모아 내가 책으로 내면 인기가 있을 것 같다.

 

세계바둑사
바둑 3급이 제자만 3백명
바둑은 클레멘스의 생활 중심
2009-12-04 오전 9:22:24 입력 / 2009-12-04 오후 1:39:44 수정

1. 클레멘스 - 바둑제자 3백 명

나는 뮌헨(Munchen)에서 그 곳 바둑회장 필립(Philip Hillers)과 작별한 후 여류기사 한해원, 이하진과 같이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행 기차를 탔다. 하이델베르크에선 클레멘스가 우리를 만나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고가 발생한다. 칼스루어(Karlsruhe)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데 안내방송이 독일어로만 나오기 때문에 그만 프랑스 국경도시 킬(Kehl)까지 가고 말았다. 갈아타야 할 곳에서 한 시간쯤을 더 지나왔다.

거기에다가 이 시골 마을 사람들이 독일어와 프랑스어만 하고 영어는 하는 사람이 없어서 물어 보는데 고전을 했다. 유럽 국경지방에 사는 주민들은 자기가 사는 곳 옆 나라 말도 하는 게 상례다. 내가 클레멘스에게 전화하여 기차를 잘못 타서 킬에 와 있으니까 약속시간에 하이델베르크는 못 갈 것 같다고 말했다.



▲ 한해원, 이하진 사범

그런데 내 독일어 발음이 키일(Kiel) 이라고 들린 모양이다. 키일은 독일 최북단 덴마크 옆에 있는 곳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로 6시간 이상 떨어진 곳이다. 내가 클레멘스에게 돌아가는 기차 시간을 아는 대로 다시 전화 하겠다고 하고 끊었다.

그 동안 클레멘스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크리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크리스는 키일에서 오는 기차시간을 확인하고 우리가 8시간쯤 늦을 거라고 계산했다. 그는 오늘 저녁모임의 취소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서 곧 바둑 관계자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행사를 준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한 편 우리는 다행히 기차가 곧 와서 다시 칼스루어로 가서 담슈타트 행을 갈아탔다.

내가 도착시간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했더니 클레멘스가 그 이야기를 한다. 내가 여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가까운 거리라며 마을 이름의 스펠링을 불러주었더니 그제서야 클레멘스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가 시간 절약을 위해 그가 살고 있는 담슈타트로 직접 오는 게 좋겠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 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훨씬 가깝다. 나는 담슈타트에 몇 번 가 봤는데 그 곳도 아름다운 곳이다. 오히려 하이델베르크는 관광지라 상업화 되어 있는데 이 곳은 순수한 데가 있다. 우리가 도착하니까 역에서 클레멘스가 기다리고 있다. 클레멘스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녀서 영어가 아주 유창하다.



▲ 루이센 광장(Luisenplatz) 담슈타트

클레멘스 빈클마이어(Clemens Winklemaire)는 프랑크푸르트에서 20~30분 거리에 있는 담슈타트(Darmstadt)에 살고 있다. 그는 30대 초반으로 고등학교 수학선생이다. 그는 여러 해 째 담슈타트 바둑회장을 지내며 많은 활동을 해 왔다. 내가 전에 그의 집에서 몇 번 묵으면서 그의 부모와 가까워졌다.

그의 아버지가 나와 연령이 비슷해서 내가 아들처럼 대하겠다고 했더니 자기도 나 같은 아버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 때부터 나는 그를 “내 독일 아들”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부엉이 장식 수집이 취미다. 각 종 부엉이 모습의 장식품을 400 여 개나 수집했다. 온 집안이 부엉이 천지다. 이번에 클레멘스를 만나니까 부모로부터 독립해 나왔다고 한다.

그의 기력은 3급 밖에 안 되지만 그는 한 때 약 300명의 학생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그의 생활은 바둑을 중심으로 살아갔다. 그런데 얼마 전 그의 14살 된 제자 한 명이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중국계 6단에게 6 개월 이상 지도를 받으면서 실력이 많이 늘어 많은 학생들 앞에서 그와 호선 바둑을 두자고 도전해 왔다.

클레멘스는 그 바둑에서 참패를 한다. 그의 제자가 “바둑을 가르치려면 실력 좀 더 늘이라”며 선생에게 충고하고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언행을 했다. 학생 중 몇 명이 낄낄대며 그 버릇 없는 제자에게 동조를 하자 클레멘스는 바둑에 대해 정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바둑을 끊고 재스밴드(Jass band)에 들어가서 드러머가 되어 몇 달 간 매일 북만 때리고 살고 있다가 내가 여류기사 두 명과 간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곳 재스 계는 독일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바둑보다 나와 인간관계 때문에 우리 안내를 맡았다.

내가 그 얘길 듣고 “우리나라는 한 번 선생은 영원한 선생이다. 예를 들어 권갑룡 도장 출신 중 이세돌, 최철한 등은 그의 스승보다 바둑이 강해져서 세계챔피언이 된 후에도 선생 앞에선 쩔쩔맨다”고 하니까 그가 “그런 유교식 인간관계가 인생을 보람 있게 만드는 사회 같다” 며 한국을 부러워한다. 내가 “일부 못 된 학생들에게 지질 말고 대부분 착한 학생들에게 그런 가치관을 심어 주도록 노력하라”고 충고 했다.



▲ 클레멘스가 뒤로 보이는 담슈타트 영주 별장에서 독일바둑대회를 유치해 개최했다며 이리로 우릴 데려왔다.

서양에선 실력이 뒤쳐지면 선생의 권위가 금방 땅에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호주 태권도 사범 중 한 명이 나에게 자기는 비장의 무기를 감추고 있다가 그의 제자 중 유단자 한 명이 제자들 앞에서 공개 스파링 도전을 해 왔을 때 그의 갈비 뼈 하나를 부러 트려 놓았더니 모두 다시 자기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래야 한 동안 도전을 안 받고 가르칠 수 있다고 한다. 바둑도 봐 주면 자기가 누구에게 이겼다고 자랑하고 다닌다. 내 경험으로는 서양인들은 철저히 밟아 주어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 러시아 공주가 담슈타트 영주에게 시집온 기념으로 지었다는 러시아 정교회

내가 그가 총각인 걸 알고 “여자친구가 생겼느냐?”고 하니까 클레멘스가 “No!”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들이 한참 웃었다. 내가 “너희들이 예쁘니까 지금 목소리와 얼굴에 힘주고 다니는데 내가 그런 질문을 하니까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고 하니까 해원이와 하진이가 또 웃기 시작한다.

이 두 명은 뭐가 좋은지 기차를 잘못 타고 프랑스 국경에 갔을 때도 나는 열 받아 있는데 계속 웃어댔다. 클레멘스의 특징은 말 총 머리인데 이번에 만나니까 예수와 같은 수염과 머리를 하고 있다. 레오날드 다빈치가 그린 예수 초상화와 거의 비슷하다. 하진이가 예수 같다고 하니까 자기 학생들도 그런다고 대답한다. 자기 컨셉트를 그렇게 잡은 것 같다. 예수 같다는 소릴 들은 후 표정관리도 약간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

나는 클레멘스에게만 걸리면 최소 두 시간 이상을 걸어야 한다. 그는 걷는 것과 설명하는 것이 취미라 잘 못 걸리면 네 시간도 넘어 걷게 된다. 2003년 유럽에 사상 최고의 더위가 찾아 왔다. 18 명의 명지대 바둑학과 팀을 클레멘스가 안내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8월 초라 너무 더운데다가 바둑학과에 걷기가 불편한 학생이 있어서 내가 그에게 많이 걸리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금방'이라고 하면서 8km를 돌았다. 클레멘스에게 걸리면 최소 그 정도는 걸어야 한다. 준비 해온 자료들을 읽으면서 열심히 설명하는 그를 보면 원망할 수도 없게 만든다. 그가 “지금 두 시간쯤 여유가 있으니까 그 동안 담슈타트를 열심히 보자”고 하길래 내가 속으로 “이거 또 걸렸구나” 했다. 오늘도 결혼기념탑에 왔는데 엘리베이터를 보니까 7층까지 있다.

그 다음이 옥상이다. 그가 “옥상에 올라 가면 담슈타트가 한 눈에 보인다”고 한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자”고 하니까 그가 또 한번 큰 목소리로 “No!” 한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또 웃기 시작한다. 나는 옥상까지 걸어 올라가느라고 힘이 들었지만 나 혼자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겠다며 우기면 분위기를 깰까 봐 그대로 달팽이식 계단을 따라 올라 갔다. 그는 각 층 마다 서서 그 곳에 진열된 그림, 사진 등에 대해 설명을 한다.



▲ 결혼 기념탑 입구



▲ 옥상에서 보는 담슈타트



▲ 미술관입구



▲ 약간은 가우디 풍의 아방가르트 식 아파트. 창문은 입주자 각자가 알아서 장식하도록 했다.

그 다음 클레멘스는 우리를 건축가 촌에 데려 간다. 옛날 건축이 취미인 이 곳 영주가 유럽 각지 건축가들을 불러모아 이 마을을 건설했다. 건축가들에게는 자기가 사는 집을 직접 설계하고 지어서 살도록 했다. 그들이 최선을 다한 건축물이라 그런지 모두가 특징이 있고 멋지다.

담슈타트에는 13세기 성(城) 프랑켄슈타인이 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이 곳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만들어 낸 후 일어나는 일을 그린 소설인데 나도 어려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서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담슈타트는 많은 연구소와 과학단지가 있어 ‘과학도시’로 불린다. 클레멘스가 나에게 “다음에 오면 구텐베르그 고향 마인츠(Mainz)를 열심히 공부한 후 안내 하겠다”고 한다. “또 나를 몇 시간이나 걷게 하려고 이런 음모를?”




▲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성(城)

2. 유럽의 관문 프랑크푸르트(Frankfurt)
두 시간 동안 담슈타트를 돈 후 우리 일행은 차로 30분쯤 달려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아직도 시간이 남아 우리는 비를 맞으며 클레멘스를 따라 다시 시내를 한 시간쯤 걸어 돌아다녔다. 2천여 년 전에 로마 지배시절 목욕탕 자리, 옛 시청 건물, 독일통일의 산실 연방의회 건물 등을 돌아 본 후 바둑 모임 장소로 갔다. ‘괴테의 집’은 관람 시간이 넘어 못 들어 갔다.



▲ 클레멘스 안내로 프랑크푸르트 구 시청 옆을 지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Frankfurt)는 북부 라인강(江)의 지류인 마인(Main) 강(江)을 끼고 있는 상업도시이다. 문호 괴테의 출생지로 18세기까지는 국왕의 선거 및 대관식이 거행되던 곳이었다. 현재의 독일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2차 대전 중 도시의 83%가 파괴되어 그 자리에 현대식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많은 은행의 본점들이 이 곳에 있다. 근년에 와서는 교통의 요지로 이 곳 공항은 유럽의 관문이다. 우리에겐 프랑크프루트(손가락) 소시지(Sausage)로 유명한 곳.



▲ 문호 괴테 집 근처



▲ 프랑크푸르트



▲ 현대와 과거가 어울린 프랑크푸르트



▲ 프랑크푸르트 바둑클럽 근처

바둑 클럽에서 20여명의 현지 바둑인들이 우리를 반긴다. 나는 이 곳 클럽을 7~8차례 이상 와서 모두 낯이 익다. 다만 항상 나를 반기던 미모의 중국계 짜오페이 6단이 상해에 가서 살고 있어 안보였다. 섭섭했다. 이 곳의 5~6단 고수들은 다 중국계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7~8명씩 맡아 다면기를 두고 있는 동안 나와 바둑 회 간부 몇 명은 앉아서 바둑계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이 베를린과 뮨헨에서 우리가 한 일을 샅샅이 알고 있는 걸 보니 독일 바둑계가 얼마나 좁은지 알겠다.

바둑행사가 끝난 후 나는 팀(Tim) 네 집에 가고 해원이와 하진이는 크리스(Christian)네 집에 숙소가 배정 됐다. 주차가 힘들어서 팀이 3블록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는 바람에 나는 비를 쫄딱 맞았다. 팀네 방은 없는 바둑책이 없다. 일본에서 출판된 바둑책은 다 산 것 같다. 팀의 부인까지 합세하여 치즈를 곁들인 와인 한잔하며 바둑얘기를 새벽 1시까지 하고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을 먹고 크리스의 아파트로 해원이와 하진이를 데리러 갔더니 이 집 아침은 진수성찬이다. 크리스가 미녀 두 명을 위해 새벽에 시장에 가서 뭘 잔뜩 사왔다. 맛있는 음식이 많길래 나는 아침을 또 한번 먹었다. ^^

독일 바둑계는 특징 있는 바둑인이 많다. 프랑크푸르트에는 클레멘스 외에 바둑 책(Stein und stein - 돌과 돌)을 몇 권 쓴 딕펠트 3단과 바둑에 대한 자료는 무엇이든지 다 있는 크리스 3단이 있다. 크리스는 나중에 황인성 사범이 프랑크푸르트에 와 있을 때 자기 집에 묵도록 해주었다.

베를린에는 룽어씨 말고도 발두인이라는 4급 두는 사람이 있다. 전직이 정원사였는데 전문학교에서 아동교육학을 이수 한 후에 초등학교 어린이에게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제자가 600명쯤으로 늘어 자기의 직업이 됐다. 그는 문제아 터키계 학생이 많은 초등학교마다 찾아가서 교장에게 바둑을 가르치면 애들이 말썽을 덜 피운다고 설득하여 과외시간(Extra Curricular Activities) 바둑교실을 만들었다. 실제로 효과가 있어 인기가 높다고 한다. 내가 발두인을 만났더니 그는 6백 명 학생의 카드를 일일이 만들어 그 학생의 기력, 발전속도, 특징들을 써 놓았다. 본인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게 보인다.

바둑 룰만 공부하는 약간은 이상한 친구 야시크(Robert Yasiek)도 베를린 사람이다. 내가 며칠 전 베를린에 있을 때 그가 나를 향해 걸어 온다. 나는 당연히 나에게 인사하러 오는 줄 알고 미소로 쳐다보고 있는데 내 앞에 오더니 첫 마디가 “난 당신 제도를 싫어한다(I don’t like your system)” 한다. 내가 “왜 싫어하냐?” 했더니 “바둑 원칙에 어긋난다” 한다. 내가 “바둑원칙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느냐? 내 대회에 출전해 봤느냐?” 하니까 “내가 그런 대회에 참가할 것 같으냐?” 하더니 다른 데로 가 버린다. 그는 나에게 “Hello!” 한 마디도 안 했다.

나는 2000년부터 그와는 세미나에서 두 번을 만난 걸 비롯 거의 매년 만나고 있고 나와는 대화도 많이 한 친구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독일 바둑인들에 의해 이 얘기는 전 유럽에 퍼졌다. 야시크를 잘 아는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배를 잡고 웃는다. 룽어 회장이 나에게 “그게 전형적 야시크다(That’s typical Yasiek!)” 한다. 내 생각으로는 야시크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데 이런 식 처세 때문에 유럽 바둑계에서 왕따 당하는 것 같다.

이번에 내가 베를린에서 5일간 그의 집에서 묵은 베언트(Bernd Schutze) 5단도 있다. 그는 변호사인데 사무실을 닫고 중국에 가서 1년간 바둑공부만 하고 돌아왔다. 그는 대회성적이 좋아 벌써 5단으로 승단했는데 자기 생각으론 4단이라며 승단을 거부하고 있다. 이 외에 하노버의 겔락, 함부르크의 펠릭스 등 이름을 열거 하려면 한이 없다.

인성이가 독일에서 1년 이상 바둑을 가르친 후 나에게 한 말이 있다. “제가 관찰해보니까 유럽에서 바둑이 5단 이상이면 가정, 집, 직업 중에 하나는 없어요” 한다. 사회적 적응력이 부족한 마음 약한 지식인들이 바둑에 빠지면 인생에서는 패자(Loser)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수록 바둑이 더욱 그들의 피신처가 된다. 내가 유럽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컴퓨터를 켜니까 반가운 이메일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클레멘스가 보낸 거다. 내용은 “바둑활동을 다시 시작했음”.

3. 독일 바둑역사
유럽인들이 바둑을 접한 것은 꽤 오래 전이고 그 중에서 독일의 바둑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다. 1868년 시작 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일본의 사회구조를 전면 개혁한다. 그들은 구미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많은 유학생을 선진국에 보내고 외국학자들을 일본에 초청한다.

이 때 바둑이 일본문화의 일부로 서양에 소개되었다. 1876년 독일 화학자 오스카(Oskar Korschelt)가 일본에 건너가 동경대의 부교수가 되었다. 1880년 그가 아팠을 때 바둑을 배우게 된다. 그 후 그는 ‘동아시아 문화에 관한 정보’ 라는 독일어 논문에서 바둑을 처음으로 서방에 알렸다. 여기에서 바둑역사, 바둑룰, 바둑문화, 사활과 포석, 끝내기 이론이 설명되었고 실전대국 12국 (Game)을 소개하였다.

또한 바둑판 선에 아랍숫자와 라틴어(A.B.)로 표기했다. 그는 최초로 독일어로 된 바둑논문 저자이며, 영어로 번역하여를 발간했다. 나도 호주에서 이 책을 사 보았는데 오래 전에 썼는데 놀라울 정도로 바둑을 잘 소개했다.

1890년대 독일로 유학간 일본학생들이 훔볼트대학에서 바둑클럽을 열었다. 기록을 보면 독일바둑잡지(DGoZ: Deutsche Go-Zeitung)가 만들어지기 시작한지 100년이 다 되어간다. 2년 전인가는 윤영선 사범의 얼굴이 커버에 보여 반가웠다.

미국에 처음 바둑보급을 하고 1930년대에 미국 바둑협회를 창립한 사람도 독일인 라스커 박사다. 바둑역사가 오래 된 독일의 바둑인구는 2만 여 명 정도다. 바둑인구가 유럽에선 가장 많다는 독일에서도 대부분 사람들은 바둑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바둑을 보급할 시장이 아직 넓다는 얘기도 된다.

한국이 독일에 바둑을 보급한 역사는 긴 편이다. 1960년대에 프로기사 이창세 사범이 건너 갔다. 그러나 그는 바둑보급 보다는 사업으로 성공한다. 그 후 유종수 사범이 독일에 유학 가서 8년간 있으면서 유럽의 1인자 노릇을 했다. 지금도 나이 먹은 사람들은 유사범 얘길 한다.

최근에는 독일인이 된 윤영선사범 외에 강승희 사범, 연구생 출신 조석빈 사범이 있고 다니엘라 초청으로 단기간이지만 순회지도를 한 이기봉 사범, 김세영 사범이 있다. 내 교실에서는 독일로 파견 된 연구생 출신 황인성 사범, 홍슬기 사범, 오치민 사범이 베를린에서 1년씩 체류하고 돌아 왔다. 현재는 군에서 제대한 황인성 사범이 다시 베를린에 가 있다.



▲ 황인성사범/ 홍슬기 사범/ 오치민 사범



▲ 에센 바둑대회로 가는 중 열차 대국/지도 중인 김세영 사범



▲ 한국인 이선화씨 남편 디쿠트 6단/ 에센 바둑대회

4. 바둑클럽
바둑협회에 총180여 개의 클럽이 가입되어 있다. 클럽의 대부분은 경우 레스트랑, 카페/바, 대학클럽, 문화시설 이용하여 모인다. 아래 지도에서 검은 점이 클럽이 있는 곳.



▲ 지도

5. 독일바둑협회 DGoB (Deutscher Go Bund = German Go Federation)
모든 클럽이 이곳에 속해있다. 각 담당부서:(federal-league, high-performance sport, Hikarunogo, profi-coordination, tournaments, rules, law, marketing 등)

● DGoB회장: Michael Marz = E-Mail: mmarz@dgob.de
● 부회장: Matthias Terwey = E-Mail: mterwey@dgob.de


6. 최근 대회
독일에는 대회가 너무 많아 2009년 11월 20일 이후 대회만 성적표와 소개한다.
1) Go to Innovation (Hahn System대회) Berlin
20-22 November 2009



▲ Go to Innovation (Hahn System대회) Berlin

2) Berliner Kranich(백조대회)
28-29 November 2009



▲ Berliner Kranich(백조대회)

3) Japanischer Generalkonsul-Pokal Duseldorf(일본 총영사배)
21-22 November 2009



▲ Japanischer Generalkonsul-Pokal Duseldorf(일본 총영사배)

※ Korean Insei League on KGS - Join now!
2009년 11월 30일자 독일 바둑지 ‘Go Bund’에 보면 디너스타인(사샤-한국기원 프로)가 운영하고 보조사범 쉭시나(스베타 동생) 두 명이 지도하는 “한국식 연구생제도”를 KGS에서 운영한다는 광고가 나 있다. 한 번에 4~5명이 지도다면기를 받는다. 1조는 호선, 2조는 두 점, 3조는 3점 식이다. 한국 인터넷 바둑사이트도 빠른 시일 내에 영어화하여 이런 식으로 인터넷 지도를 국제적으로 해야 한다.

한상대(전 시드니대학 교수 sdhahn@gmail.com 017)276-5878)



▲ 가브릴로프 EGF(유럽바둑연맹) 부회장, 필자, 사샤

 

독일로 시집간 윤영선 사범
유럽국가 중 가장 활발한 바둑활동을 보이는 독일
2009-11-18 오후 6:05:32 입력 / 2009-11-23 오전 11:18:55 수정

함부르크 시청. 안팎이 다 아름답다.

함부르크는 인구 180만으로 독일 제2의 도시며 최대 항구다. 도시 외곽까지 합한 메트로 인구는 430만 명이다. ‘독일의 부산’이다. 유럽에서는 로테르담에 이어 두 번 째 큰 항구이며 하역양은 유럽 최대다. 항구는 발틱(Baltic)해로 흘러 들어가는 엘베강 하구에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다. 13~17세기에 북부 유럽 상업도시들이 공동이익을 위해 한자(Hansa)동맹을 맺는다. 함부르크는 이 동맹의 중심도시였다. 함부르크엔 ‘리퍼반(Reeperbahn)’이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창(公娼)이 있다.

내가 처음 함부르크에 갔을 때 음악가 브람스(Johannes Brahms) 집 주소를 찾아 갔더니 리퍼반 한 복판이었다. 브람스 집을 찾는데 창녀들이 호객을 하는 등 창녀촌 분위기 때문에 포기하고 그냥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리퍼반의 다른 부분에서는 음악홀, 카페, 겔러리 등이 있어 활발한 예술활동을 하고 있었다. 비틀즈(Beatles)도 유명해 지기 전에는 여기에서 노래를 불렀고 내가 갔을 때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캐츠(Cats)’가 장기공연 중이었다. 항구도시라고 해도 공원과 호수가 발달되어 있어 아름다운 곳이다. 이 곳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독일바둑의 중심지였다. 현재는 여류국수였던 윤영선 사범의 활동무대이기도 하다.


홍등가리퍼반

엘베 강의 야경

엘베강 하구의 항구 제자 김선기 6단 / 바둑클럽 카페(바) 주인 4단

1. 독일로 시집간 윤영선 사범
여류기사 윤영선5단은 내 제자다. 영선이는 명지대 재학시절 바둑학과 강의 말고도 교양학부에서 하는 내 강의도 다 들었다. 영선이는 바둑이 강할 뿐 아니라 학습능력도 뛰어났다. 강의 이해능력이 빨랐다. 과제물도 충실히 해 오고 특히 단어처럼 외워 오는 일에도 항상 점수가 좋았다. 그래서 학교 성적이 좋았다. 어느 날 같은 반 학생 한 명이 나에게 “영선이는 조금만 노력해도 다 아는 거 같아요” 하며 부러워하던 생각이 난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 폴란드 투홀라 대회장 선수단 버스

영선이가 자기와 친한 하호정, 김민희, 강승희랑 4명이 짝을 지어 2001년 아일랜드 더불린(Dublin) 유럽바둑 콩그레스(대회)에 참가했다. 평소 그들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이런 행마를 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네 명을 2003년 러시아에서 만났다. 이 때 패어 바둑을 내가 러시아인과 한 조가 되어 하호정 조와 대국을 했던 일이 기억난다. 유럽대회에 한국 미녀 ‘4인조’가 나타나면서 유럽 바둑인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남자 바둑인에게는 이 들의 등장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러시아 상 페테르부르크에서 어느 젊은 유럽 친구가 나에게 “한국 여류기사들과 친해지고 싶은데 내 바둑이 너무 약하다. 무슨 방법이 없겠는가?”하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이 때 벌써 이들 네 명은 유럽 바둑계에 명물이 되어 있었다.

다음 해 폴란드의 작은 마을 투홀라 콩그레스(Tuchola European Go Congress)에 ‘4인조’가 다시 나타났다. 그들이 유럽인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모습을 내가 지나 다니면서 자주 볼 수 있었다. 여름이라 그들은 옥외 테이블에서 주로 지도를 했다. 그 중 한 명이 라스무스였다. 나중에 영선이에게 들은 얘긴데 폴란드에서 라스무스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방영부, 최준원, 송중택, 하호정, 필자, 김민희, 조창삼, 강승희, 이기봉, 윤영선, 스베타 – 폴란드 2004

하호정 왼 쪽이 라스무스 오른 쪽이 윤영선(머리 끝만 보인다^^) 폴란드 대회

영선이 건너편이 라스무스 – 그가 이렇게 영선이 근처에서 계속 얼쩡거린 걸 나중에 사진으로 알았다

한국인 각 조 입상자: 챔피언 윤광선7단 양 옆에 이정애, 이승현 자매. 맹인 챔프 송중택 5단 딸

한국 여류 프로들의 지도다면기(폴란드)

나와 영선(스웨덴 렉산) / 렉산 대회장 안내

폴란드 유럽 콩그레스에 뒤 이어서 스웨덴 렉산(Leksand) 대회가 열렸다. 거기에도 라스무스가 왔다. 여기서 연기(連棋)와 패어 바둑 등을 같이 두며 영선이와 더 가까워 졌다고 한다. 나는 독일에서 따로 자동차를 빌려 육로로 렉산에 가서 이들과 합류했다. 다음 날 나는 렉산 근처에 있는 유명한 야외 음악당 달할라(Dalhalla)에 네 명의 여자 프로와 김선기, 홍승희 등을 데리고 갔다. 3억 년 전에 이곳에 운석이 떨어져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일부를 노천 음악당으로 쓰고 있는데 좌석이 4000석이나 된다. 이런 커다란 웅덩이를 음악당으로 쓰겠다는 발상이 멋지다. 달할라에 도착하니까 입구엔 나비부인, 라트라비아타 등 오페라 포스터가 붙어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까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지다. “천정은 하늘이고 벽은 바위인데 어떤 울림이 나올까? 이런데 오면 음향을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음악 하는 사람들의 생리다. 내가 매니저에게 허락을 받고 무대에 가서 노래를 했는데 음향(Acoustics)이 생각보다 훌륭하다.


4천 석 좌석에 한국 미녀들과 저 뒤편에 관광객 30여명이 청중의 전부였다.

달할라(렉산 Leksand) 3억년 전 운석으로 생긴 웅덩이를 음악 홀로 쓰고 있다

나는 스웨덴에서 ‘4인조’와 헤어진 후 제자 김선기와 홍승희만 데리고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거쳐 다시 독일로 와서 라스무스의 고향 하노버(Hannover)에 갔다. 하노버는 프로이센에 합병되기 전까지는 왕국이었다. 이 곳 바둑 계의 중심인물은 크리스토프 겔락(Christoph Garlach) 6단이다. 그는 멋쟁이 컴퓨터 전문가로 좋은 집에 살고 있다. 나와는 E-메일만 주고 받다가 처음 만났다. 그는 우리 일행을 맞이하여 자기 집에서 묵도록 해 주었다. 그 날 밤 자기 집에서 교류전을 가졌다. 거기에 라스무스가 왔다. 내가 다음 날 하노버를 구경하겠다고 하니까 라스무스와 린다가 안내를 자청하고 나선다. 우리는 다음 날 하노버 역 기마상 앞에서 점심 시간에 만나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하노버 공원과 시청을 미리 돌아 본 후 역으로 갔다.


바둑TV 홍승희 PD / 여기에서 역을 어떻게 가죠? 하노버 시청 하노버역 기마상 앞.

린다와 라스무스. 기마상 앞 아이스크림 집 / 라스무스 3단과 필자

겔락 6단과 김선기 6단 / 필자와 린다 3단

라스무스 부흐만(Rasmus Buchmann)은 키 197cm에 미남에다가 성격도 좋다. 영선이가 반할만 하다. 내가 “톰 크루즈와 닮았다는 얘길 들어 봤느냐?” 하니까 “들어 봤다”고 한다. 그런데 옆에 있던 린다가 날 보고 고개를 저으며 자기 생각엔 안 닮았다고 한다. 그는 기마상 앞 노천 아이스크림 집이 하노버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라며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을 쏜다. 정말 맛이 좋다. 그 후 하노버의 구 시가지(Altstadt)를 4km 이상 걸어서 돌며 우리에게 하노버를 소개한다. 구 시가지는 선을 따라 돌도록 시에서 색칠해 놓았다.

내가 유럽에서 제일 즐기는 곳이 각 도시의 옛 중심지(Old town)다. 3~4백 년 이상 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걸 보면 너무 아름답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해 놓고 살았을까?” 이 날 우리는 500년 이상 된 건물도 여러 개 보았다. 이 후 이 두 명은 하노버 왕궁과 식물원에 우리를 안내한다. 두 시간 이상 라스무스와 대화를 한 나는 이 청년에 대해 감을 많이 잡았다. 당시 라스무스는 하노버대학 수학과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판사, 어머니는 교수 집안에서 반듯하게 자란 청년이다.

한편 렉산대회 이후 영선이는 한국에 돌아와서 라스무스와 메일을 주고 받았다. 이 무렵 영선이가 내 바둑영어 교실에 나와 영어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너무 열심이라 가르치는 내가 놀랐다. 초보자를 위한 보충수업까지 빠지지 않고 영선이는 나왔다. 동기부여가 되어 있는데다가 승부사라 독하게 마음을 먹고 공부를 한 것 같다. 영선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내 경험으로는 프로기사들이 공부하겠다고 맘을 먹으면 보통 사람 보다 더 지독한 면을 보인다. 그 해 11월 나는 스카이 바둑 텔레비전 팀의 단장으로 유럽 취재에 나섰다. 일행은 스카이 TV 조남철 본부장, 윤영선, 강승희, 김선기 등이다. 선기는 나와 해외 여행을 같이 많이 했고 운전경험이 많아 필수 요원이었다 ^^


코블렌츠 구 시가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우리는 내 안내로 곧장 라인강 유역을 돌아 중심도시 코블렌츠(Koblenz)에 갔다. 이 곳 옛 시가지를 한 바퀴 걸어서 돈 후 영선이가 “유럽에서 본 구 시가지 중 가장 인상이 깊어요” 한다. 이 날 무슨 불길한 일이 일어나려는지 내가 빗길에 운전하다가 내 일생 처음 자동차 사고를 내고 300유로나 벌금을 냈다. 나는 이런 일은 얼른 잊어 버리기로 하고 일행을 데리고 코블렌츠 성(城)으로 올라 갔다. 옛 성을 유스호스텔로 개조한 곳이다. 내가 알기론 ‘세계에서 가장 좋은 유스호스텔’이다. 1년 반 전 내가 명지대 팀을 데리고 와서 잔 곳이다. 그 때는 사람이 수 백 명이 있었는데도 여학생들은 분위기를 무서워했다.


라인강에서 올려다 보이는 코블렌츠 성

문(굴)을 셋이나 거쳐 들어 온 내부. 이 넓은 곳에 우리만 달랑 있는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성에서 내려다 보는 라인강과 코블렌츠

어둠이 깔린 후

이 날은 겨울이라 그런지 문을 안 열어 사람이 아무도 없다. 어둠 컴컴한 굴을 몇 개 지나 중세 성으로 들어 서자 뭔지 으스스하다. 달 빛 아래 성이 주는 분위기에 영선이와 승희가 겁을 먹었다. 성안 빈 방에 침구가 있는 걸 보고 내가 “오늘은 여기서 공짜로 잔다” 했더니 여자들이 질색을 한다. 특히 겁 많은 승희가 “전 가위 눌려서 이런 데서 못 자요. 교수님, 제발 시내로 내려 가요” 하며 애원 한다. 내가 짓 굳게 “무서우면 한 방에 침대가 6개나 되니까 남자들이 같이 자 줄게” 하니까 옆에 있던 선기가 “나도 같이 자 줄게” 하니까 “그럼 더 싫어요” 한다. 영선이가 “교수님, 오늘은 제가 호텔 값 낼 테니까 제발 시내로 가 주세요” 하며 애원한다. 내가 못 이기는 척 하며 시내로 내려와서 잤다. 지금도 그 일로 나는 가끔 “우리 다시 코블렌츠에 가서 그 성에서 한번 자 볼까?” 하며 두 명을 놀린다.

우리가 베를린에 간 후 회의 도중 나는 부친상을 당한다. 충격 받은 나에게 독일인들이 “무얼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하길래 “빨리 한국으로 돌아 가야 한다”고 하니까 한 사람은 전화로 가서 비행기표 예약을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공항에 가는 길을 자기가 잘 아니까 차를 아래층에 대기 시켜 놓겠다고 한다. 내가 텔레비전 팀이 유럽을 돌아야 할 텐데 나 없이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하자 “이 팀이 가는 코스에 있는 유럽 도시마다 우리가 연락을 해 놓아 영어가 부족해도 일이 잘 되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며 날 안심시킨다.

내가 베를린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니까 내 좌석을 제일 앞 자리 좋은 데로 마련해 주고 기장이 와서 나에게 위로의 말을 한다. 이미 베를린 바둑협회가 연락을 해 놓았다. 내가 부친상을 당한 걸 안 후 독일인들이 하던 회의를 중단하고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날 돕는 모습에서 선진독일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내가 서울로 떠난 후 그들은 스카이TV 팀을 하노버로 가는 고속도로 입구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그나마 지난번 같은 코스를 나와 같이 운전하고 돌아 본 선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하노버에 도착하니까 거기부터는 라스무스가 나머지 유럽일정 전체를 동행하여 우리 팀이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이 때 여러 날을 같이 여행하며 영선이와 라스가 본격적으로 가까워 진다. 영선이 말로는 “얼굴이나 잠깐 볼까 했는데 라스가 아예 짐을 싸 들고 합류했어요” 한다.

두어 달 후 겨울방학에 라스무스가 한국에 왔다. 내가 이 둘을 압구정에 있는 삼원가든에 식사초대를 했다. 이 때 처음으로 영선이가 나에게 자기네 둘이 사귄다는 얘길 한다. 나는 라스와 잘 아는 사이라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영선이는 자기 능력에 비해 자신감이 없다. 나 같으면 한국 바둑 1인자를 몇 년 했고 세계챔피언(호작배)까지 되었으면 마구 뽐낼 텐데 영선이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라스가 너무 반가와 한다. 자기도 마음 속으로 항상 그 생각을 하고 있다며 영선이에게 “당신은 잘 났으니까 더 자신감을 가지라”고 한다. 라스무스가 연하라도 영선이를 챙기고 아끼는 모습을 보니까 이 둘의 장래가 괜찮을 것 같다. 라스는 한국음식 중독자다. 매운 음식을 영선이보다 더 밝힌다. 불고기, 갈비, 삼겹살도 좋아하지만 혀가 얼 떨떨 해지는 불 닭을 제일 즐긴다.


우리 교실에 온 영선이와 라스무스

2006년 4월에 파리에서 프랑스 한국대사배만 참가하고 영선이는 독일로 떠났다. 함부르크에 있는 독일어학원에 등록했기 때문에 우리 일정을 따라 올 수 없었다. 나는 한해원, 이하진만 데리고 네덜란드로 갔다. 영선이는 다음 해 9월 라스무스와 결혼한다. 함부르크에 사범으로 있던 조석빈이 군복무를 위해 귀국하면서 자연히 영선이가 지존으로 자리를 잡는다. 얼마 후 강승희가 함부르크로 가서 윤영선과 1년쯤 같이 바둑 활동을 한다. 함부르크에는 함부르크 바둑클럽, 랄슈테트 클럽 외에 함부르크 대학 클럽, 하부르크(Harburg) 클럽이 있다.


한해원, 윤영선, 주철기대사, 필자, 이하진. 파리 2006. 4 / 몽마르트 언덕의 사크뢰커 성당.


영선, 라스 부부

2. 윤사범의 바둑활동
1) 함부르크 바둑클럽: 매주 월요일에 나가 다면기 및 강의를 한다. 한 달에 두 번은 다면기, 나머지는 강의. 저녁 7~9시. 수강생은 보통 30~40명 정도. 원래 클럽 멤버는 약 200명.
2) 개인, 그룹레슨: 주중에 한다. 학생은 6살부터 40대까지. 직장인은 저녁에 하고, 학생과 어린이는 오후에 한다.
3) 세미나와 토너먼트: 한 달에 두 번 주말에는 다른 도시나 다른 나라에 가서 세미나를 하거나 토너먼트에 참가해 가르친다. 요즘에는 장거리 여행 때문에 조금 피곤함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윤사범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바둑을 가르친 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4) 인터넷 강의: 금년 5월부터 시작. 매 달 독일어로 KGS에서 한다. 한번은 유료 테마강의(약 20명~30명 유료회원) 한번은 프로바둑을 소개하는 코너(약 160~180명)가 있다. 5) 세미나: 1년에 한번 크게 하는데 바둑계 마당발 토비아스 베르벤 4단이 운영자다. 약 30 명이 합숙하며 세 개조로 나누어 5일 간 지도한다.

3. 함부르크 4 대 바둑대회
1) 3월: 환격대회(Mausefalle-Snaback)
2) 5월: 비마대회(Affensprung-Monkey jump)
3) 10월: 기도 컵(Kido) 한국 주최
4) 11월: 천원대회(Tengen)

이상 4 개의 함부르크 대회에 보통100~200 명이 참가한다. 매년 7월 마지막 주와8월 첫 주에는 유럽대회(EGC)가 열린다. 이 때 유럽 바둑인은 거의가 유럽대회가 열리는 도시로 모인다. 독일에서는 거의 매 주 바둑대회가 열린다. 윤사범이 대회를 방문하면 독일 바둑협회에서 절반의 보조비가 나온다. 얼마 전 열린 독일바둑 챔피언대회에는 윤사범이 독일어로 라이브 인터넷 강의를 했다. 이 대회에서 3위를 한 디쿠트 6단도 한국인 부인과 살고 있다. (다음은 성적표)

Rang
Name
Ort
1
Christoph Gerlach
6D
Hannover
2
Benjamin Teuber
6D
Hamburg
3
Franz-Josef Dickhut

6D

Mönchengladbach
4
Marco Firnhaber
5D
Berlin
5
Zhang Yi

4D

Leipzig
6
Robert Jasiek
5D
Berlin
7
Christian Stodte
4D
Hamburg
8
Matthias Terwey

4D

Münster

4. 바둑 분데스리가
독일의 바둑 분데스리가는 2004년 독일의 한 바둑광이 제안해서 만들어졌는데 매년 9월 15일에 시작해서 이듬해 5월 31일에 막을 내린다.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팀에 4명씩 구성되는데 후보선수도 있다. 팀 수는 총 50개로 10개씩 1부에서 5부까지 나뉜다. 상위리그의 하위 2팀이 하위리그로 내려가고 하위리그의 상위 2팀이 상위리그로 올라가는 방식이다.

특히 1조는 경쟁도 치열하지만 실력도 상당해서 대부분 아마 4단 이상의 선수들로 구성돼 있다. 대국은 일본이 운영하는 ‘KGS’라는 바둑 사이트에서 이루어진다. 팀 간 서로 상의 하에 시간 약속을 한다. 현재 리그 1위는 함부르크 팀이 달리고 있는데 2위와 3위가 베를린 팀으로 뒤를 바짝 쫓고 있다.

5. 기도 컵
한국기업이 후원하는 바둑대회가 처음 유럽에서 개최되었다. 지난 10월 3~4일 이틀 간, 독일 함부르크에서 유럽바둑연맹, 독일바둑협회, 함부르크바둑협회가 주관하는 ‘제1회 Kido Cup 유로피안 바둑 챔피언십(Kido Cup European Baduk Championship)’이 열렸다. 이번 대회는 한국의 (주)기도산업이 스폰서이고 해외바둑 보급의 선두업체인 오로미디어(주)가 주관했다. 240명이 참가해 성황리에 대회를 마쳤다. 독일에서는 가장 큰 대회였다고 한다. 이 대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모든 일을 윤 5단이 해 냈다.


기도 컵 대회 2009. 10월

기도컵 초청기사 백성호 9단 윤 5단이 제작한 한국기사 소개 판

지도다면기

기도 컵 대회 여성부

<나가며>
한국 여류 바둑의 간판스타였던 윤영선 5단이 독일로 시집가서 그 곳에서 한국바둑보급에 힘쓰고 있다. 외국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윤 5단은 초기의 힘든 역경을 이겨내고 이제는 독일어로 강의까지 한다. 그 동안 영어로 바둑 책도 몇 권 썼다. 서양 바둑인의 약점을 보충해 주는 책이 앞으로 몇 권 더 나올 것 같다. 앞으로 윤 5단은 한국바둑 유럽진출 역사에 첫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한국사범이 유럽에 진출할 경우 윤사범이 모든 면에서 선례가 될 것이다. ‘한국바둑의 세계화’가 화두인 요즘 윤 5단은 한국바둑 ‘세계화의 첨병’역할을 하고 있다. 이 보다 더 큰 민간외교가 또 있을까? ‘유럽 한국바둑보급의 선구자’ 영선이에게 갈채를 보낸다.


 

독일인 바둑쟁이 '버나드 룽어'
유럽국가 중 가장 활발한 바둑활동을 보이는 독일
2009-10-30 오후 6:19:10 입력 / 2009-10-30 오후 11:17:10 수정

▲ 브란덴부르크 문. 프리드리히 2세가 ‘평화의 상징’으로 1788년에 베를린 정문으로 세웠다. 서울의 남대문 격이다. 독일 분단 시 이 문으로만 왕래가 가능했다. ‘냉전시대(Cold War)의 심볼’

독일
독일은 경제, 과학, 철학, 예술,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달리는 선진국이다. 독일은 962년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 되었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망한다. 39 개 공국으로 분열되었던 독일은 1871년 프러시아 수상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통일된다. 독일은 1~2차 대전을 일으켜 전세계를 상대로 싸웠다. 1-2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전 국토가 황폐해졌으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며 20년 내에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2차 대전 후 동서로 분단되었다가 1990년 통일되었다.

동서독이 서로 엄청난 양보를 하며 통일을 추진하던 일을 생각하면 우리 민족과 남북한 지도자들이 다 못나 보인다. 독일 통일로 지구상 분단된 나라는 우리만 남게 되었다. 한반도 통일은 주변 4대국 미, 중, 러, 일이 다 원치 않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자구적 노력 없이는 통일은 힘들다. 그런데 남북이 다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느라고 민족의 장래를 위한 큰 결단은 내릴 줄 모른다. 독일 인구는 8206만 명, 게르만 족이 91.5%, 터키계가 2.4%, 나머지 6.1%가 기타 민족이다. 독일은 대도시나 작은 시골이나 생활수준의 차이를 못 느끼게 평준화 되어 있다. 면적은 남한의 3.7배. 세계 4위의 경제력을 갖고 있으며 1인당 소득은 약 4만 5000 달러다. 유럽연합(EU)의 실질적 지도국이며 바둑 활동도 유럽 국가 중 가장 활발하다.

▲ 1871년 프랑스를 점령한 후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이 탄생한다

1. 역사의 현장 베를린(Berlin)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은 독일 수도 베를린에 대한 총 공격을 시작했다. 2주 동안 독일인 15만 명, 러시아인 10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격전이었다. 4월 30일에는 베를린 시 중심부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문에 소련의 적기가 계양 되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56세의 히틀러(Adolph Hitler)는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수상관저 지하 방공호에서 권총 자살을 한다. 그리고 1주일 후에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다. 이로써 베를린을 “세계의 수도”로 만들려던 히틀러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5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일은 동부는 소련, 서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점령했다. 동독 한 복판에 위치한 수도 베를린도 동서로 분할되어 서부 베를린은 섬처럼 동독에 둘러 쌓였다.

1948년 6월 서독 마르크(Mark)가 동 베를린에 유입되는 걸 막기 위해 소련은 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교통수단을 차단하고 서쪽 베를린 지구에 대해 전기, 석탄,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이 것이 “베를린 봉쇄”다. 인구 235만 명의 서 베를린은 서독 경계선에서 2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육지의 고도”가 되었다. 연합군 측은 서부 베를린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역사상 유래 없는 “대 공수작전”이 시작 되었다. 대형 수송기 1400대가 식량, 연료를 총 19만 6천회에 걸쳐 수송되었다. 매 90초 마다 수송기가 한대씩 뜨고 하루에 1만 3천 톤이나 되는 물자가 서 베를린으로 운반되었다. 1949년 5월, 소련은 11개월 간의 봉쇄를 해제한다. 그 후 동 베를린에서 서 베를린으로 망명하는 인구가 점점 늘자 1958년 소련 수상 후르시초프는 연합국 측에게 베를린에서 퇴거할 것을 요구했지만 연합국은 이를 거부했다. 1961년에는 하루에 약 1천 5백 명의 청년, 지식인 등이 서독으로 망명한다. 이 일로 동독 경제건설이 타격을 받자 1961년 8월 13일 동독 측은 베를린 시내의 동서 경계선을 따라 45킬로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 장벽을 쌓는다. 3백 군데가 넘는 감시 탑에는 1만 4천명의 병사가 경비를 맡았다.

▲ 19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쌓고 있다.(왼쪽 사진) 지금은 일부 벽을 기념으로 남겨 두었다

내가 학생 때 읽고 감명 받은 얘긴데 장벽의 담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는 시민을 동독경비가 구경만 하고 있자 소련군이 “왜 저 사람을 쏘지 않느냐?”고 하자 동독 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신네는 같은 민족에게도 총을 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후 경비병은 소련군으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한국전쟁(1950~1953)에서 동족끼리 이념이란 미명하에 서로 수 백만 명을 죽이는 비극을 저지른다. 독일은 이념보다 민족이 우선했다. 내가 세계바둑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동서독 선수는 친하게 같이 식사도 하고 돌아다닌다. 그러나 남북한선수는 전혀 어울리질 않았다.

1989 년 헝가리가 국경의 철조망을 제거하자 20만 명 이상의 동독 시민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이 일을 계기로 동독 정부는 벽을 헐고 자유선거를 할 것을 국민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동 베를린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50만 명의 데모대가 그들 힘으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냉전의 종말을 고하는 상징적 사건이 된다. 이 당시 나는 소련 모스크바에 1개월 반 동안 있었는데 장벽 무너지는 뉴스를 모스크바 TV가 하는 걸 못 봤다. 동독 해방의 최대무기는 위성TV이었다. 위성TV로 인해 세계는 더 이상 비밀이 없어졌다. 내가 2007년에 가 본 북한은 인터넷이나 위성 텔레비전이 개방이 안 됐다.

1990년 10월 3일 0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 위치한 제국의회 의사당 광장 앞에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빌리 브란트 전 총리, 동독의 바이츠게커 대통령, 데메지에르 총리, 인민회의 의장 베르그만 등 동서 독일의 최고 지도자들이 엄숙하게 열립해 서 있었다. 이 곳에서 전승 탑까지 약 백만 명의 베를린 시민이 모였다. 광장의 국기계양 대에 독일 국기인 3색 기가 천천히 계양 되었다. 군중은 일제히 독일 국가를 합창했다. 그들은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어서 ‘자유의 종’이 은은히 울려 퍼졌다. 이어 군중들의 환성이 터지고, 폭음과 함께 불꽃이 베를린 하늘을 아름답게 수 놓았다. 총선거에서 압승한 서독이 45년 만에 동독을 흡수 통일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독일은 인구 8천 2백만의 대국으로 다시 태어났고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된다.

▲ 내가 동독 군 모자를 쓰고 미군과 소련군 사이에 섰다. ‘분단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2. 친한파 룽어씨
나는 2003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유럽바둑대회에 40명의 한국팀 단장으로 갔다. 2 주간 대회 후 그 중 18명의 명지대 팀을 인솔하고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며 한국 바둑을 알렸다. 그 중 인구 400만의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2박 3일을 묵는다. 그들이 마련한 바둑행사와 민박은 완벽했다. 훔볼트(일명 베를린)대학에서 개최된 환영회와 교류전, 관광 안내 등은 우리가 미안할 정도로 준비가 철저했다. 그 중심에 버나드 룽어(Bernhard Runge)박사가 있었다. 헤어지면서 베를린 바둑인들은 나에게 이구동성으로 “한국 바둑강자들과 보낸 시간은 좋았는데 말이 안 통해 답답했다. 제자들에게 영어 좀 부지런히 가르쳐 다음 올 때는 의사소통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당시 바둑학과 학생들의 영어 수준은 거의 벙어리였다. 영어로 복기는 엄두도 못 냈다.

나는 베를린에 있는 동안 반나절 시간을 내어 한국대사(공사가 대신 옴), 독일 바둑협회 회장단, 한국 측 바둑관계자 등 10여 명을 한국식당에 모이도록 주선했다. 거기에서 독일주재 ‘한국대사배 바둑대회’ 개최에 대한 4자(대사관, 독일협회, 한국기원, 한상대)역할 분담에 대한 합의를 끝내고 돌아왔다. 이후 버나드가 그 때 합의사항을 충실히 이행하며 대사배를 진행시킨다. 한편 버나드는 나에게 “제자 중 영어 하는 사범 한 명을 베를린으로 보내 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그런데 막상 영어를 잘 하는 바둑 강자를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평소에 나는 국제사범을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여기 저기 협조를 구했으나 서울에 교실 하나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돈을 내고 구하면 수강생들의 부담이 너무 커진다. 시간을 끌고 있는데 버나드가 또 독촉을 해 온다. 나는 2004년 당시 한국 아마바둑협회 회장이던 곽영필 회장 사무실로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가 “이제까지 내가 들어본 얘기 중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며 부하 직원에게 당장 내가 강의할 공간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그래서 생긴 것이 지금 역삼동 ‘영 빌딩’에서 운영되고 있는 바둑영어교실이다. 곽 회장은 한국바둑 세계화를 위한 숨은 공로자다.

▲ 베를린

이듬해 봄, 어느 날 버나드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 온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는 대로 청량리 역으로 가서 춘천행 기차를 타야 한다고 했다. 그가 오는 날 나는 강의가 있어서 공항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자 중 영어와 운전이 가능한 최유진에게 연락했다. “공항에 가서 룽어 씨를 태우고 청량리 역으로 가서 춘천행 기차를 태워드려라. 그런 후 강원대학 김 교수에게 룽어 씨 도착시간을 전화로 알려 드려라”고 했다. 유진이는 유럽 여행을 나와 같이해서 룽어 씨 얼굴을 안다. 이 일로 유진이는 하루를 거의 보냈다. 유진이는 바둑학과를 졸업했으나 대학원은 나에게 와서 ‘해외동포학’을 배우고 있었다. 유진이가 요즘은 잘 나가는 바둑 TV진행자로 유명해 졌다. 버나드 룽어(Bernhard Runge) 씨는 친한파로서 한국 바둑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내가 유진이를 공항에 보내면서까지 성의를 보인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베를린에 갔을 때 잘 돌보아준 감사의 뜻도 있었지만 앞으로 한국 바둑계를 위해 그가 유익한 일을 할 인물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 나와 버나드 폴란드.(2004) 최유진 캐스터(오른쪽 사진).

춘천에서 1주일을 보낸 버나드는 서울로 와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자기가 세종회관 뒤편 어느 기원에 있다고 한다. “기원을 어떻게 찾았느냐?”고 하니까 “춘천에 있을 때 김 교수가 강의하는 시간에는 혼자 대학 근처 기원에 가서 바둑만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원 찾는 건 전문”이라고 한다. 내가 기원에 가니까 그는 남의 바둑을 관전하고 있었다. “벌써 7시니까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하자 그는 “우리 바둑 좀 두고 가자”고 한다. 바둑 두 판을 두고 우리는 8시 반쯤 식당엘 갔다. 식사 중에도 그는 바둑 얘기만 한다.
(버나드) “내가 한국에 와서 3년쯤 살면서 바둑공부를 하면 5단이 될 수 있겠나?”
(한) “사범만 제대로 만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버나드) “그럼 수퍼 그룹(Super group)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긴가?”
(한) “그렇다.”
버나드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유럽 국가들은 1년간 성적에 따라 16명이 ‘수퍼 그룹’에 속하고 그들 중에서 챔피언을 뽑는다. 쉽게 말해서 ‘챔피언 조’다. 수퍼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표정부터 달라진다. 그들은 하수들에겐 경외의 대상이다. 버나드는 자기가 그 그룹에 속한다는 상상만 해도 벅찬가 보다. 그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에게 자기가 컴퓨터 SP(Session Announcement Protocol) 분야의 박사인데 삼성전자 같은 곳엔 분명히 자기가 취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지금 독일에서 받는 월급의 반만 주어도 한국에 와서 3년쯤 근무 하고 싶다”고 한다. 내가 “가족도 같이 올 생각이냐?”고 묻자 “아들 둘은 거기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아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그곳에 있어야 한다” 며 자기 혼자 와 있겠다고 한다. 수퍼 그룹 멤버가 될 수 있다면 그 정도 희생은 치르겠다는 각오가 그의 표정에 묻어 있었다.

▲ 인사동 차(茶)집. 룽어, 필자, 볼리(시애틀 바둑센터 매니저), 한해원3단, 다니엘라, 버럴(미국서부 챔피언)

그가 “한국은 나의 꿈의 나라(Dream Land)”라고 한다. “한국에선 바둑 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기원에만 가면 되니까 얼마나 좋으냐?”고 하면서 “그런 나라에 사는 당신은 ‘행운’”이라고 한다. 웃는 말이 아니고 너무 진지하게 말한다. 그는 “다만 기원에서 담배들을 피우는 게 괴로웠고 11시에 개업하는 게 불편했다”고 한다. “춘천에서 하루는 김 교수가 9시에 출근했는데 기원을 안 열어 두 시간쯤 길에서 헤매야 했다”고 한다. 내가 “요즘에는 기원도 흡연실을 따로 두어 담배 안 피우는 공간이 많다”고 하자 그는 “한국은 역시 나의 Dream Land”라며 웃는다.

버나드는 2단이다. 나에게 4점 놓는 하수가 바둑에 대한 애착은 나보다 상수다. 나는 당시 용인에 있는 명지대 캠퍼스 안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바둑학과 최고령 학생 김종수(55세) 씨 집에 묵도록 해주었다. 김종수 씨의 집은 서부이촌동이고 바둑은 버나드가 선으로 들어갔다. 밤 10시가 넘어 김종수 씨의 아파트에 도착한 버나드는 식구들과 인사가 끝난 후 곧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버나드는 원래 동독 출신이다. 바둑도 동독에서 배웠다. 독일 챔피언 마르코, 한국에 유학 온 다니엘라가 다 동독 출신이다. 통일이 되자 버나드는 만하임(Manheim) 대학의 강사가 되어 컴퓨터를 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에서 교환교수로 김 교수가 왔는데 바둑이 호선이었다. 버나드 말로 “그 1년 동안 우리는 매일 바둑만 두었다”고 회상한다. 마치 꿈 같은 신혼생활을 회상하는 말투다. 버나드는 바둑 둘 상대가 마땅치 않은 만하임에서 바둑 인구가 많은 베를린으로 직장을 옮긴다. 이번에 버나드는 휴가 중 2주일을 할애하여 김 교수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한국엘 왔다. 그러나 그의 진짜 목적은 바둑유학 가능성 타진과 바둑을 실컷 두고 싶어서였다. 그는 2주 동안 바둑만 두다가 떠나기 전 하루만 서울 관광을 했다. 독일에 가서 사진이라도 보여주어야 했던 것 같다 ^^

▲ 탱고를 추는 서양 바둑쟁이들. 버나드 룽어와 얀 볼리 압구정 ‘탱고 클럽’

2004년 폴란드 시골 투홀라(Tuchola)에서 열린 유럽 바둑대회에 온 버나드는 나에게 자기 차 열쇠를 주며 “필요할 땐 이 차를 쓰라”고 한다. 그는 나와 탁구도 치고 맥주도 마시며 주로 한국팀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그는 2주 동안 열리는 대회에 1주만 참가하고 돌아갔다. 나에게 “가족과 휴가의 반을 안 쓰면 쫓겨나게 생겼다”며 웃는다. 그가 모든 휴가를 바둑에만 쓰기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음을 알겠다. 그는 그 무렵 베를린 바둑협회 회장이 된다. 몇 달 후 우리 집사람이 독일에 연구여행을 갔을 때 버나드는 이 사람을 자기 집에 묵도록 했다. 그래서 부인네끼리 친구가 된다.

버나드의 부인 마누엘라(anuela)는 소설가다. 라이트 형제(The Wright Brothers)가 1903년 인류사상 첫 비행에 성공했을 때 이미 1890년 독일에서는 릴리엔탈(Otto Lilienthal)이라는 사람이 비행에 성공을 한다. 그리고 그는 1896년 추락사한다. 그러나 아직도 비행기 발명은 라이트 형제(The Wright Brothers)로 되어 있다. 마치 구텐베르그 보다 2백여 년 전에 우리나라가 인쇄술을 발명해 놓고도 아직도 인쇄술 발명은 구텐베르그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은가 보다.

집사람이 베를린에 갔을 때 마누엘라는 릴리엔탈을 소재로 글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쓴 책 “차도르(Chador)를 벗겨라”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중 하나로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팔리고 있다. 저녁식사 후 응접실에 같이 앉아 차를 마실 때는 버나드가 바둑에 대한 얘기를 전혀 안 한다. 그는 여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주제로만 얘기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침에 자기 차를 몰고 우리 집사람과 둘이서 출근할 때는 바둑 얘기만 한다고 한다. 자기가 한국에 바둑을 배우러 오는 문제를 얘기를 할 땐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 속삭이기까지 한다고 한다.

▲ 인사동 방문(왼쪽 사진). 추석 날 내 부모님 산소 성묘에 따라 붙은 서양 바둑쟁이들.

내가 그 해 11월에 베를린에 갔을 때다. 베를린에서 ‘Go to Innovation’이란 이름으로 바둑대회를 혁신적이고 재미있게 하는 방법에 대해 아이디어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걸 위한 세미나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응모한 아이디어들은 모두 독일을 비롯한 서양 국가에서만 온 것들이다. 버나드가 “Big Three(한중일)에도 연락했는데 응모자가 없어 섭섭하다” 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세계 바둑인구의 대부분이 동양3국에 있는데 응모가 없었다는 게 이상하고 한편 창피했다. 영어로 써 내는 게 불편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호텔로 돌아가서 곧 방내기를 대회용으로 변형시킨 ‘한상대 점수 제도(Hahn Pointing System)’를 만들어 제출했다.

얼마 후 버나드가 나에게 회의장에 나와 내 제도에 대한 설명을 해 달라고 한다. 내가 설명할 때 회장인 버나드가 열심히 독일어로 통역한다. 독일에서 영어가 잘 통하는데 이 날은 주요사안이라 확실히 한다는 의미에서 통역을 했다고 한다. 이 날 질문 중 “호선 바둑인 경우 한 방이 9.5나 10.5 점 중 어느 쪽이냐?”고 하는데 내가 대답을 얼른 못하니까 자기네끼리 어느 쪽이 맞는지 토론을 한다. 놀랍게도 이날 거의 만장일치로 ‘한 제도(Hahn System)’가 ‘Go(碁) to Innovation’가 바둑대회방식으로 채택되었다. 이 대회는 1년에 두 번 열리며 지금까지 우승은 다 한국인이 했다. 우승 상금은 1000 유로(약 180만원), 유럽대회에선 최고 수준이다. 이 대회의 ‘사이드 대회’는 재독사범들의 노력으로 순장바둑으로 결정 되었다. 그래서 이 대회는 ‘한국바둑의 날’이 된다
☞한 제도 관련사이트 바로가기

이 제도는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실험적으로 시도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둑의 원리에 어긋난다” 며 대회에 참가조차 하지 않고, 참가자들은 “더 짜릿하다” “한국 싸움바둑의 진수다”라고 한다. ‘한 시스템’은 한 방 이기면 승자는 60점을 받지만 패자도 40점을 받는다. 두 방이면 승자 70점, 패자 30점, 이렇게 올라가 다섯 방 이상을 이겨야 승자 100점 패자 0점이 된다. 7라운드 전체를 한 방씩 전승한 사람보다 5승2패 한 사람이 집 차이가 크게 이기면 우승할 수 있다. 이 제도는 누구나 욕심 때문에 싸움 바둑을 피하지 못하게 만든다. 20점 이상 이기고 있는 사람이 더 이기려고 무리를 하다가 거꾸로 지는 등 웃지 못할 일이 많이 일어 난다. 그래서 이 제도는 바둑을 끝까지 포기 않고 두어야 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감정소모’가 다른 대회 보다 많다고 한다 ^^

▲ ‘Hahn System” 2009 봄 대회 우승자 오치민 7단. 가을대회는 11월 21~22일에 열린다.

2005년 말 버나드가 급한 목소리로 전화해 왔다. “함부르크에 조석빈이란 사범이 나타났는데 내가 사범 부탁한지 2년이나 되었는데 베를린은 왜 아직도 안 오느냐? 너무 섭섭하다”는 내용이다. 그 얘길 듣자 나도 마음이 급해졌다. 내 제자 중 황인성을 불렀다. “네가 곧 베를린에 가야겠다. 네 영어가 아직 6개월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영어는 현지에 가서 계속 공부하고 우선 떠나라” 했다. 인성이는 내 교실에서 공부하다가 갑자기 베를린으로 떠났다. 베를린과 함부르크는 해마다 ‘도시대항전’을 한다. 각 10명씩 뽑아 대항전을 하는데 그럴 땐 흥분한 바둑인들이 모여서 밤새 복기도 하고 한판한판 승부에 열광을 한다. 버나드가 나에게 사범을 부탁한 것은 함부르크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있었다. 그런데 석빈이가 먼저 함부르크에 나타나니까 나에게 그런 반응이 올 만도 하다.


▲ 2006 독일 한국대사배를 참관하는 황인성 사범

황인성 7단은 베를린으로 간 후 그의 바둑실력과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베를린 바둑인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은다. 거기에다가 그를 완벽하게 돌봐주는 룽어 회장이 있다. 인성이는 “룽어 씨는 저의 독일 아버지”라고 말한다. 마침 버나드의 아들과 인성이가 동갑이다. 인성이와 석빈이는 유럽대회마다 출전하여 둘이서 우승을 다툰다. 그 1년 동안 두 명은 유럽에서 한국바둑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내가 거의 1년 만에 만난 인성이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성장해 있었다. 영어 실력도 좋아지고 인간적으로도 성숙했다. 베를린은 물론 유럽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굳혀놓고 있었다. 제자가 이러면 선생은 보람을 느낀다.

2006년 나는 여류기사 한해원, 이하진 사범을 대동하고 유럽에 간다. 베를린 공항에 도착하니까 버나드의 웃는 얼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우리가 베를린에 4박5일 있는 동안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돌보아준다. 한국대사배를 베를린 외곽 포츠담에 있는 ‘상수지 궁’에서 열었다. 이 궁은 오늘날 강대국 독일이 있게 만든 프리드리히 2세가 황태자 시절을 보낸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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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회 진행에 바쁜 버나드 룽어 회장(왼쪽 사진)과 로베르트 5단, 현 챔피언 마르코 6단

나는 변호사 번트(Bernd Schütze) 아파트에서, 해원이와 하진이는 베를린 바둑협회 부회장이며 남자 간호원인 안드레아스(Andreas) 아파트에서 묵었다. 우리 숙소는 베를린 중심지에서 가까웠으나 구 동독지역이었다. 서독지역에 비해 사회주의 잔재가 많이 보이는 곳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바둑행사가 끝나면 저녁엔 버나드가 우리를 베를린의 유명한 곳을 데리고 다녔다.


▲ 2006 한국대사배


▲ 이하진 사범과 상수지 궁에서(왼쪽 사진). 2006 한국대사배 입상자 3명


▲ 독일 국회의사당


▲ 브란덴부르크 앞에서 ‘독일 월드컵’ 멕시코 응원 TV프로에 말려들어가서 판초입고 솜브레로(모자)를 썼다


▲ 서울에 온 버나드 바둑영어교실에서 한해원, 이하진 사범과 재회.

그 여행에서 나는 당시 만 16세의 하진이에게 각 국 챔피언이 두 점을 놓고 두게 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응했고 하진이가 두 판 다 이겼다. 하진이는 초단이 되자마자. 루이를 꺾고 성적이 수직 상승 할 때라 기세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한국대사배 우승자 펠릭스 6단은 거절한다. 자존심 상 두 점을 놓기 싫은 모양이다. 자기 생각으론 이겨야 본전이고 지면 망신이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대신 까다로운 정석을 바둑판 위에 놓아보며 하진이에게 “이런 경우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다른 독일인이 나에게 귀속말로 “저 정석을 지난번 일본 9단과 연구를 끝낸 거”라며 “하진이 실력을 테스트하는 중”이라고 한다. 하진이는 바둑 실력으로 유럽인들에게 겁을 주었다. 해원이는 바둑 TV를 통해 일부 사람들이 벌써 알고 있었고 그 곳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해원이를 사람들이 보급용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해원이가 유럽에서 둔 다면기 성적이 높은 걸 보고 바둑도 강한데 놀랐다. 해원이가 좀처럼 지질 않는다. 귀국 후 해원이와 하진이가 유럽기행문을 썼는데 두 명이 다 유럽 여행 중 잊을 수 없는 인물 1호로 “룽어 아저씨”를 꼽았다.

유럽에서는 우리를 위해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가 한국대사배를 1주일 간격으로 주말에 열었다. ‘대사배’를 차례로 참석하며 대회 창설자인 나는 감회가 남달랐다. 우리는 영국에도 가서 한인바둑회, 옥스포드 대학 바둑클럽을 돌며 다면기 행사를 하고 한국 대사배 개최와 사범파견 문제에 기본 합의를 보고 돌아 왔다.


▲ 버나드 룽어, 김수정 기자, 황인성 사범, 한해원 사범


▲ 버나드가 우리 교실에서 독일 바둑 현황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버나드는 내가 베를린에 가면 항상 한식으로 저녁을 산다. 내 옆은 안영길 8단

2007년에 나는 안영길 8단, 이강욱 3단, 강경낭(여자연구생 1조)을 대동하고 베를린에 갔다. 인성이는 군대에 가기 위해 귀국했고 대신 홍슬기가 2대 사범이 되어 우리와 같이 다녔다. 슬기는 2003 유럽 챔피언으로 나와 베를린에 간 일이 있어 현지에 잘 알려져 있다. 슬기도 1년 동안 버나드의 비호 속에서 보내다가 귀국한다. 3대 사범으론 오치민이 간다. 하루는 버나드 집 근처 월남식당에 우리가 내리고 버나드는 자기 집으로 갔다. 우리가 월남국수를 막 먹기 시작하는데 버나드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에게 왔다. 슬기가 가방을 자기 차에 두고 내려서 그 걸 가지고 다시 왔다.

나는 월남국수 한 그릇을 더 시키려고 하는데 버나드가 한사코 사양한다. 나는 속으로 “별로 배고프지가 않은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경낭이가 자기 국수를 3분의 1쯤 남기고 수저를 놨다. 조금 후 버나드가 경낭이에게 “다 먹은 거냐?”고 묻자 경낭이가 “그렇다”고 하자 그 남은 음식을 자기가 순식간에 먹어 버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은 잘 안 먹는데….독일인들은 사과를 껍질, 씨까지 다 먹어 버린다. 우리에겐 비싼 음식도 척척 사면서도 검소하고 거품이 전혀 없는 독일인의 모습을 버나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또 한 명의 친한파 홀거(2단 Holger)박사가 우리의 안내를 맡았다 강경낭, 필자, 홍슬기(포츠다머 광장)


▲ 베를린 시내


▲ 독일 챔피언 마르코와 경낭이의 대국


▲ 안영길 8단의 ‘마르코 VS 경낭’ 대국을 옆 방에서 동시해설. 훔볼트 대학


▲ 2007 베를린 대회 훔볼트 대학


▲ 8강부터는 강당 무대를 사용한다.

나는 버나드 부부가 별거에 들어 갔다는 소문에 너무 놀랐다. 이유는 바둑이라고 한다. 그러나 버나드는 마누엘라를 포기를 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하였다. 그 결과 가정은 원상복귀 되었으나 버나드의 바둑 유학의 꿈은 접는 수 밖에 없었다. ‘아쉬움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버나드는 자기 아들 게오르그(Georg)를 대신 고려대학에 1년간 보내 한국어와 문화를 배우게 했다. 버나드는 황인성, 홍슬기, 오치민 세 사범을 베를린에서 1년씩 자기 아들처럼 돌보아 주었다. 지금은 황인성 사범이 다시 베를린에 가서 버나드의 도움을 받고 있다. 김치중독자가 된 버나드는 한국에 관한 일이면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이런 친한파 바둑인이 있다는 게 우리에겐 행운이다.


▲ 베를린 협회 재무를 맡은 다니엘라 엄마가 우리 일행을 만났다. 훔볼트 대학교.


▲ 독일국기(왼쪽 사진)와 국장.


▲ 독일지도(왼쪽 사진)와 베토벤.


▲ 강경낭, 이강욱과 벤츠 박물관. 슈투트가르트


▲ 독일의 젖 줄 라인(Rhine) 강


▲ 1000년 전 마을 로텐부르그(Rothenburg)


▲ 독일 전통 마을


▲ 베를린 영화제

 

네덜란드는 바둑도 약물 검사를 한다

<네덜란드 편>네덜란드 편

위치 : 영국 건너 편, 독일, 벨기에와 접경
수도 : 암스텔담
나라 꽃 : 튜맆
인구 : 1 천 7백만 명

 

다시 프랑스 칼레에서 브룻셀로 가는 기차를 타고 거기에서 암스텔담 가기 전 역인 레이든(Leiden)까지 우리는 가야 한다. 이 곳 홀리데이 인(Holiday Inn)이 우리의 숙소이다. 그런데 브룻셀에서 네덜란드 행 마지막 기차를 탔는데 항구도시 로테르담까지 밖에 안 간다고 한다. 그것도 도착 시간이 밤 12시다. 나는 10시에 하리(Harry van der Krogt 3단)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하리는 우리 호텔 값을 벌써 지불했으며 자기가 운전해서 지금 곧 로테르담으로 떠나겠다고 한다. 우리는 마치 서울에 올 사람이 대전에 밤 12에 도착해서 데리러 오라는 꼴이 됐다.

 

우리가 로테르담에 도착하여 하리를 기다리는 20분 동안에 내가 해원이에게 먹을 걸 좀 사오라고 했다. 여기에 오는 기차에는 식당 칸이 없었다. 해원이가 조금 후 돌아 오더나 “교수님, 여자 혼자 들어가기는 식당 분위기가 좀 그런 것 같아요” 해서 내가 길 건너 음식점에 해원이와 같이 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그 동안 짐은 하진이가 지키고 앉았다. 우리는 역 앞 아랍 계통 사람들이 하는 식당에 들어갔다. 각종 인종들이 북적거리는 속에서 케밥(Kebab) 비슷한 음식을 사 갔고 왔다. 역시 해원이와 하진이가 끝내주게 잘 먹는다. 조금 있다가 하리가 웃으며 역으로 걸어 들어오는데 미안해 죽겠다. 도버 역만 안 지나쳤으면 이런 민폐를 안 끼쳤을 텐데.

 


▲ 영국에서 프랑스로 가는 기차안, 프랑스에서 기차로 네덜란드에 갈 예정이다. 이하진 2단 옆의 남학생이 배낭여행 중이라는 레논.

 

 

2006년 4월 8

새벽 두 시가 넘어 잠자리에 든 우리는 아침 식사를 좀 늦게 하고 테오의 안내를 받아서 나갔다. 테오(Theo van Ees 2단)는 작년에 명지대 학술대회에 네덜란드 대표로 왔던 사람이다. 그는 '바둑이 서양까지 오게 된 배경'에 대해 발표했다. 테오는 역으로 가서 이 곳에서 1 시간 떨어진 힐버섬(Hilversum) 이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고 한다. 내가“우리는 1등 기차표가 있다.”며 웃으면서 하진이에게 '유레일 파스'하니까 하진이가 호텔에 두고 나왔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기차표를 사서 우리는 힐버섬에 갔다. 인구 10만명의 소도시 힐버섬 쇼핑센터는 마인드 스포츠(Mind Sports)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1 층에는 바둑과 첵커, 2층에는 체스와 브릿지 대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유럽 바둑 문화 센터 매니저인 프랑켄 얀센(Franken Jansen 6단-현 네덜란드 챔피언)씨가 일본 옷을 입고 열심히 바둑 강의를 하다가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이 곳에서 첵커 세계 챔피언도 만났다. 우리도 지도기도 두어 주면서 참여했다. 점심 때 모두가 같이 몇 블록 떨어진 식당으로 갔다. 비가 오니까 테오가 자기의 코트를 벗어서 하진이에게 입혀 준다. 자기는 와이셔츠 바람으로 움츠리고 비를 맞으며 간다. 거기에다가 날씨가 꽤 춥다. 소위 서양식 신사도를 발휘한 것이다.

 

네덜란드 바둑협회는 그 나라 체육부 소속으로 되어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다. 이 돈으로 어린 유망주 바둑 교육비에 쓰려는 생각이 있다며 한국 유명도장에 자기네 영재를 보내면 경비가 어떻게 드는지 문의를 해 온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모든 체육부 산하 기관은 경기를 하기 전에 약물검사(Doping Test)를 해야 하는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거다. 내가 "바둑에 무슨 약물 검사가 필요하냐?"고 묻자 롱엔씨가 "바둑에도 필요하다. 집중력 유지시간(Concentration span)을 늘려 주는 약, 긴장완화제 등은 어느 선수들에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도 바둑이 체육부에 소속이 되면 바둑대회에 약물검사가 규정화 되려나?

 


▲ 네덜란드 대사배 바둑대회장 수퍼그룹의 대회 모습.

 

오후에 래이든 바둑클럽 대사배 대국장으로 왔다. 다음 주에 한국 대사가 바뀐다고 한다. 그래서 대사관에서는 김 영사 혼자만 나와 있다. 네덜란드 바둑 협회장 롱엔(Jan van Rongen 3단)씨가 나에게 대사가 안 나와 개막식이 없어져 일부러 힐버섬에 우리를 먼저 가도록 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에게는 대신 시상식 때 인사말을 해 달라고 한다.

 

“한국 대사배에 대사 자신이 안 나오다니”속으로 기분이 안 좋았으나 하필 대사가 바뀔 때 이런 행사가 있게 된 것도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했다. 수퍼그룹 16명이 바둑 두는 모습을 우리는 유리문을 통해서 들여다보았다. 해원이가 “바둑 두는 모습들이 너무 진지해요.” 한다.

 

기분이 찜찜해 있는 나에게 김 영사가 “저녁 늦게나 오늘 3라운드가 끝 날 테니까 그 동안 제가 헤이그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한다. 주최측에 얘기하고 우리 3명은 김 영사 차로 1 시간쯤 떨어진 곳에 있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 갔다. 김 영사는 바둑이 아마 3단이고 우리에 대해 벌써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와 먼저 아름다운 해안 휴양지인 스케이브닝헨을 차로 돈 후 시내로 갔다.

 


▲ (왼쪽부터) 네덜란드 영사와 이하진 2단, 한해원 2단. 한상대 교수.

 

그는 우리에게 국제사법 재판소, 국회의사당 등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만국 평화 회의장에 가서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건물이 크고 무게 있어 보인다. 이 곳은 이준 열사가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가서 을사보호조약을 무효화시키려고 노력하던 장소다. 한국 대표는 회의장에 못 들어가게 해서 밖에서 각국 대표를 상대로 전단을 뿌리고 애를 쓰다가 이 곳에서 운명했다. 그 당시 이준 열사에게 이 곳은 얼마나 생소한 곳이었을까. 그 분의 명복을 빈다. 우리는 저녁을 한국 식당에서 먹었다. 주인이 나와 바둑 사절단을 환영한다고 인사를 한다.

 

유럽 여행 마지막 날

2006년 4월 10일

드디어 이번 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저녁 6시 반 비행기니까 아침부터 서둘러 암스텔담을 봐야 한다. 아침에 호텔 기념품점에서 하진이가 전통 나막신에 관심을 보이며 신어 보고 하더니 가격이 안 맞는지 안 산다. 우리는 기차로 먼저 스키폴 공항에 가서 짐을 Locker에 넣고 몸만 가볍게 다니기로 했다. 나는 30여 년 전에 미국에서 기차 여행을 한 후에 첫 기차 여행이다. 내가 운전하고 다니는 걸 좋아해서 항상 자동차 여행만 해 왔는데 기차 여행을 해 보니 장단점이 있다. 기차 여행은 짐이 무거우면 지옥이다.
 


▲ 네덜란드에 있는 유럽바둑문화센터로 들어가는 길.

 

우리의 첫 목적지는 유럽 바둑문화 센터(European Go Culture Centre)이다. 월요일은 쉬는 날인데 우리가 온다니까 프랑켄이 미리 나와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기차 한번, 전차 여섯 정거장, 그리고 1km를 걸어서 목적지에 도달했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건물이 큰데 놀란다. “한국기원보다 더 좋아요”한다. 그런데 사고가 발생했다. 항공표 담당 하진이가 우리 비행기표 전체를 호텔 방에 두고 나왔다고 한다. 해원이는 여권 담당이다. 내가 “너희 둘 중 한 명만 잃어 버려도 나는 망한다. 그러니까 잘 보관들 해라.” 하는 말을 몇 번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다.

 

믿을 곳은 또 하리 뿐이다. 하리에게 전화 하니까 하리가 웃으며 자기가 호텔에 가서 표를 찾아서 이리로 오겠다고 한다. 하리는 여기서 60km 떨어진 레이든에서 자기 집에 찾아 온 손님들과 얘기 중이라고 한다. “하리가 우리하고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자꾸 이렇게 꼬이지?”,“방 청소하는 사람이 항공표를 버렸으면 어떻게 하지?”,“항공 표를 분실했을 경우 일인당 백불 정도 내면 되니까 최악의 경우는 공항에 일찍 나가 그렇게 라도 하자” 우리는 별 상상을 다 해 봤다.

 

그동안 우리는 프랑켄의 안내로 문화센터를 돌아 봤다. 대국장으로 쓰는 큰 홀이 너 댓 개 되는데 일부를 브릿지 대회장으로 쓰고 있다. 홀을 대여 해 주어 그 수입으로 세 명이 월급을 받고 이 곳에서 일 한다고 한다. 작은 방은 많다. 어느 방은 일본 학교로 쓰이고 있다. 일본 식 다다미로 꾸며진 방은 일본 타이틀 매치 할 때 와 똑 같이 꾸며 놨다. 복도에는 이 곳 역사를 알려 주는 사진들이 걸려 있다. 프랑켄과 필립이 10대 소년일 적에 바둑 두는 사진도 있어 보면서 같이 웃었다. 그러다가 이와모토 9단 사진 앞에 오더니 프랑켄이 합장을 하고 절을 한다. 그가 이 센터의 건립 자이다. 


▲ 네덜란드에 있는 유럽바둑문화센터.

 

이와모토 가오루(岩本熏) 9단은 일본에서 본인방을 지낸 강자로서 일찍부터 브라질에 진출하여 국제기도보급을 해 온 기사다. 그가 1985년 동경의 자기 기원 땅 값이 폭등하여 돈을 벌자 그 돈으로 유럽에는 암스텔담, 미국에는 뉴욕과 시애틀, 브라질에는 상파울로에 바둑 문화 센터를 설립했다. 자기의 전 재산을 투입하여 세계 네 곳에 이런 바둑 센터를 건립하자 일본 기원에서도 많은 협조를 했다고 한다. 이와모토 9단은 생전에 본인방을 지낸 것 보다 바둑 인으로 훨씬 위대한 일을 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96세 때에도 이 곳에 와서 바둑 해설을 왕성하게 했다고 한다.
 

내가 3년 전에 이 곳에 왔을 때 이 센터의 설립 목적이 일본과 유럽의 문화증진 및 일본 바둑의 유럽 보급으로 되어 있었다. 내가 유럽 바둑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설립자도 기도보급이 목적이었지 저렇게 바둑을 한 나라 것으로만 국한 시키는 것은 원 뜻이 아니었을 걸로 믿는다.” 라고 했다. 이번에 오니까 센터의 목적이 유럽에 바둑 보급을 증진하는 것으로 고쳐 놨다.
 

아래층 바에 갔는데 3년 전에는 'Go Bar' , 'Go Hamburger' 등이 있어서 재미있었는데 이번에는 없다. 한 시간 후에 하리가 비행기표를 들고 웃으며 들어 오는데 미안해서 죽겠다. 내가 하리에게 “3년 전 한국대사관 직원, 네덜란드 바둑협회 간부 8명이 나와 함께 식사를 했던 한국 식당이 여기에서 멀지 않았는데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한다. 내가 “그리로 가서 점심을 맛있는 걸로 쏘겠다.”고 했다. 그런데 가니까 월요일은 휴업이다. 할 수 없이 그 옆 중국 식당에 들어가서 우리의 마지막 유럽 식사를 했다.(저녁부터는 기내식)


식사 후 하리는 우리를 반 고흐 박물관에 데려다 주고 작별 인사를 했다. 고흐와 램브란트 특별전을 같이 보면 표가 싸지만 시간이 없어 고흐만 보기로 했다. 줄이 길어 표를 사는 데까지 20분은 기다렸다. “신이 17세기에는 렘브란트, 19세기에는 고흐, 20세기에는 몬드리안을 우리 홀란드에 보내 주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Van Gogh 1853-1890) 만큼 전 세계에 많은 팬을 가진 화가도 드물 거다. 그는 인상파가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는 1886년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피사로, 세잔느, 시냑, 로트렉, 에밀 베르나르와 자주 만나면서 점묘법과 분할 법 등 새로운 화법을 개척한다. 그렇지만 고갱에게 매료 당한 빈센트는 그와 지내면서 자신에게만 주어진 메시지가 있다고 믿게 된다.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고흐 뮤지엄 가는 길.

 

그래서 그는 파리를 떠나 몇 년 동안 아를르 지방과 정신병원을 전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 살며, 그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완성한다. 그는 동생 테오(바둑쟁이 테오와 같은 이름)의 도움으로 그나마 그 만큼 생존 할 수 있었다. 빈센트가 권총 자살을 한 후 동생 테오가 너무 상심해 하다가 6개월 후에 따라 죽는다. 그들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 사진 앞에 사람들이 많이 서 있다. 이 박물관이 그의 일생과 작품을 사진과 함께 상세히 보여 주고 있다.

내 눈에는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하기 전까지 마지막 2년간의 작품이 가장 아름답다. 밝은 색채, 대담한 공간 활용은 정신병자 눈에만 보이는 순수한 세계가 아닐까. 나는 여기 오면 꼭 포스터 몇 장을 사게 된다. 해원이와 하진이도 몇 가지씩을 산다.
 

1983년에 우리 가족과 서봉수 9단이 암스텔담에 와서 당시 유럽 바둑 연맹 회장인 얀 프랑켄하우센(Jan Frankenhuisen 2단)씨 집에 5일 간 묵은 일이 있었다. 그 때 건축가인 얀의 형이 이 고흐 박물관을 지었다. 이 박물관에는 공중에 반은 떠있는 계단이 있다. 내가 그 계단으로 2층에 올라 가려니까 얀이 말린다. “내가 우리 형을 잘 아는데 틀림없이 어딘가 잊어 버리고 빠트린 곳이 있다. 저 계단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라고 단언한다. 자기는 계단을 절대 밟지 안는다. 23년이 지난 오늘도 그 많은 사람이 올라 다니는데 끄덕 없다. 얀을 만나면 물어 보고 싶은데 암스텔담까지 와서 그와 다른 친구들을 볼 시간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 
 

박물관에서 나오니까 이제는 암스텔담 시내를 구경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중앙 역으로 가는 전차를 타고 시내 한 복판을 통과하기로 했다. 해원이가 “그래도 고흐 박물관을 본 걸로 만족해요.” 한다. 우리는 역에서 유레일 파스를 마지막으로 사용하여 스키폴 공항에 갔다. 비행기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주머니에 남은 유로화를 다 털어 선물용 초콜릿을 샀다. 
 

네덜란드는 마약, 섹스, 안락사가 허용되는 유일한 국가다. 한국 관광객이 역 근처 창녀 촌, 담슈타트의 섹스 박물관, 튜맆 페스티발 등에 많이 간다. 우리 부부도 몇 년 전 암스텔담 시내에 있는 렘브란트 광장엘 밤에 나갔는데 알고 보니 호모들이 모이는 장소다. 남자끼리 키스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집 사람이 너무 놀라서 나에게 빨리 호텔로 돌아가자고 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이 나라의 국민 의식이나 생활수준을 보면 선진이고 살기 좋은 나라인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엔 필립스 전기회사, 축구 오렌지군단, 히딩크 감독이 풍차, 튤립과 함께 알려진 편이다.

 

한국으로 갈 네덜란드 선수들 선발

2006년 4월 9(1)

아침에 하리가 오후 5시경에 대회가 끝날 테니까 그 동안 우리에게 레이든을 안내 하겠다고 한다. 우리는 네덜란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풍차를 방문했다. 1~2층은 주인의 살림집. 3층부터 공장이다. 7층까지 있고 내부가 꽤 크다. 바람의 힘으로 저 큰 맷 돌과 기계가 돌아가다니. 거기에다 바람은 무한 동력이 아닌가. 옛날에는 네덜란드에 풍차가 1만 5천 군데가 있었는데 지금은 8백개 밖에 없다. 그 당시에는 풍차 집은 그 도시의 유지에 속했다고 한다.

 


▲ 풍차 위에서.

 

이 곳 레이든은 램브란트(Rembrandt)의 고향이고 램브란트가 바로 풍차 집 아들이었다. 램브란트의 집이 있던 곳에는 그를 상징하는 풍차가 세워져서 돌고 있다. 올해는 램브란트 탄생 400주년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그의 특별 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강렬한 힘과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탁월한 빛의 처리 기법으로 아직도 신비로 남아 있다.

 

풍차를 나와 우리는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하리가 자기 학생 시절 단골 카페를 지나가며 저 집 주인이 자기가 암스텔담에서 공부하다가 1년 반만에 다시 찾아갔더니 첫 마디가 “하리, 자네가 전에 맥주 값 1불 50전 밀린 게 있네.” 했다고 하며 웃는다. 그러나 하리가 나하고 3년 전에는 같은 길을 걸어 가면서는 자기가 학생 때 쫓아 다니던 여자애들 얘기를 신나게 했었다. 오늘은 해원이와 하진이 앞이라 안 하는 것 같다. 그의 별명은 '크로커다일(Crocodile-악어)'이다. 바둑을 순하게 두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무는데 상처가 치명적이라고 한다.

 


▲ 가운데쯤 멀리 보이는 풍차가 렘브란트 생가.

 

16~7세기에 래이든은 무역으로 돈을 번 부자가 많아 그들이 자기네 이름만 붙여 주면 다세대 주택을 지어주어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살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 4~5백 년 된 그 집들은 가장 고급 주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당시는 변두리가 지금은 시내 복판이 되고 집들은 아직도 튼튼하다고 한다. 하리가 자기가 찍어 놓은 집에 우리를 데려가서 “내가 은퇴한 후에 살 곳.”이라고 소개한다. 고풍이 나면서 고급 분위기다. 하리는 네덜란드 바둑협회 재무이면서 네셔날 지오그라피의 사진 작가다. 이 곳 바둑인들이 그를 가리켜 세계적인 사진 작가라고 한다. 하리는 몬드리안의 황금 분활 법칙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 하리 씨의 작품.

 

그는 몇 년 전 성격이 괴팍하여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옛 상사를 매일 병원에 찾아 가서 1년 이상 간병을 해 주었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서 유산을 4백만 불이나 하리에게 남기고 죽었다. 하리는“그 사람이 그렇게 부자인 줄 몰랐다.”고 한다. 거부가 된 하리는 지금도 바둑을 두고 사진을 찍으며 평범하게 살고 있다. 아직도 매 주 하루를 형무소에 자원봉사 하러 다니고 있다. 그의 부인은 계속 중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 벽에 쓰여있는 세계 각국의 시들 중 하나

 

레이든 시내를 걷다 보면 비어 있는 벽 면에 세계 각국어로 자기네 시(詩)가 적혀 있다. 시내 장식처럼 보이고 미관상 보기도 좋다. 일본 시도 몇 편 보인다. 100여 국가가 참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시는 눈에 안 띈다. 한글도 자랑 할 겸 있으면 보기가 좋을 텐데. 하리가 자기 부인이 시의원인데 한국 대사관에 연락했으나 아무 답도 없었다고 한다. 대사관 측에서는 한국에 연락해서 시를 고르고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쓰는 작업을 하고 하는 일이 귀찮아서였을까. 문화 수출이 세계화 시대에선 최고의 상품이라는 걸 인식해야 하겠다.

 

바다 보다 낮은 저 지대가 많은 네덜란드는 돌이 안 나와 거의가 벽돌집이다. 벽돌이 단단해 두 장을 깨던 한국태권도 사범이 이 곳 벽돌은 한 장도 깰 수 없어 격파용은 한국에서 수입해 들어 온다고 한다. 시내를 걷다가 옛 바둑판을 파는 중국 가게가 눈에 띄었다. 바둑 판과 돌이 처음 보는 모양이라 우리의 발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런데 일요일이라 문을 닫아서 못 들어갔다. 하리가 오늘 일찍부터 와있는 바둑인들이 있을 거라고 해서 우리는 시상식 전에 대회장에 가기로 했다. 우리는 레이든 시내를 1시간만 돌고 점심을 먹은 후에 대회장으로 갔다. 전에 내가 이 곳에 와서 2시간 코스를 돌았을 때 하리가 “다음엔 3시간 코스로 돌자.”고 했었는데.

 


▲ 네덜란드 레이든의 거리.

 

점심을 먹는데 영국의 해리가 나에게 전화 했다. “옥스포드에서 자매도시인 레이든으로, 해리에서 하리로(같은 Harry지만 이 곳에선 하리로 발음) 비슷한 배를 바꿔 타고 순항 중인 것을 축하 한다.”고 한다. 내가 어떻게 소식을 알았냐고 물어 보니까 “테오에게 전화가 와서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작년 학술대회에서 두 명이 며칠을 같이 보내 친 한 사이인 것을 내가 깜박 했다. 해리는 또 기차를 놓쳐서 고생했다는 얘기는 유감이라고 한다.

 

유럽 바둑계가 좁아서 소문이 빠르다. 해리는 한국에 있는 우리 집 사람에게까지 전화하여 내가 네덜란드에서 여행을 잘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레이든 대학에는 내가 여러 해 전에 대학 일로 와서 묵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엔 여기에 유럽 최강 바둑 클럽 중 하나가 있는 걸 상상도 못했었다. 그 후 내가 네 번이나 바둑 일로 여길 찾게 된다. 이 곳도 대학 도시 비슷하고 레이든 대학도 명문이라 옥스포드와 자매 결연을 맺었나 보다.

 


▲ 네덜란드 대사배 4강전, 첫날 일행을 마중나온 하리 씨가 관전중이다.

 

대회장에 도착해서 해원이와 하진이가 다면기를 두고 있는 동안 한국행 입상자들이 정해졌다. 1위는 작년에 3장으로 한국에 왔던 허트(Geert Groenen 6단), 2위는 미힐(Michiel Eijkhout), 3위는 멀린(Merlin Kuin 5단)이 했다.


한국 부인과 사는 강자 에밀(Emil Nijhuis 6단)은 아쉽게도 4위에 그쳤다. 허트는 우승 후 자기 동거녀와 오래 동안 포옹을 풀지 않는다. 너무 기쁜가 보다. 이 때 유럽 최고의 바둑 서적, 용품 판매 상 피터(Peter Zandveld)가 오더니 두 여자 프로에게 호주 사람 존 파워(John Power)가 번역한 '무적의 수책(Invincible Shusaku)'를 한 권 씩 선사한다. 영어 바둑 책 중 가장 유명한 꽤 두꺼운 책이다.

 

시상식과 내 인사말이 있었는데 네덜란드는 교육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영어를 원어민처럼 한다. 그래서 농담을 하면 전체가 동시에 웃는다. 통계를 보면 네덜란드 인구의 67%가 영어를 하고 23%가 3개 국어 이상을 한다. 시골 노인, 농민, 어린이를 빼면 누구나 자기네 말 더치(Dutch)와 영어를 잘 한다고 보면 된다.

 

우승자 허트와 하진이 간에 두 점 특별 대국이 있었다. 하진이의 5집 승. 대국 후 허트가 나에게 와서 자기가 바보 같은 수를 두었다며 자책을 많이 한다. 오늘 저녁엔 롱엔씨가 우리를 자기 집에 초청했다. 본인이 직접 요리를 하겠다고 한다. 바둑 외에 요리가 그의 취미 다. 그의 서가에는 온갖 바둑 책을 빼고 나면 제일 많은 게 요리 책이다. 그 다음이 자기 전공인 컴퓨터 책이다.

 

2006년 4월 9(2)

롱엔씨는 네덜란드 바둑협회장이면서 유럽 연맹의 총무이기도 하다. 유럽 바둑계의 실질적 지도자다. 그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조치훈 인터넷 사이트를 갖고 있다. 3년 전에 내가 한국대사배를 창설하기 위해 이 곳을 방문했을 때 그가 너무 적극적이라 놀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친한파 바둑인이다. 내가 이 얘기를 조치훈 9단의 형인 조상연 사범에게 했더니 조치훈 9단이 특별히 제작한 부채를 주어서 전해 주었다. 그 부채가 오늘 얀 네 집에 오니까 유리 케이스 안에 진열되어 있다. 지금도 유럽인들이 조치훈 소식이 알고 싶으면 다음 사이트로 들어 온다. (http://www.xs4all.nl/~rongen17/)

▶ 네덜란드 바둑협회장 롱앤 씨 집에 있는 바둑 서적들.

얀(롱엔 씨 이름)이 레이든에 사는 나와 친한 사람들만 같이 초청했다고 한다. 하리, 필립, 빔, 테오 등이다. 이 중 필립(Filip)은 고급 맥주 회사 사장의 외아들이다.그가 맥주 공장 인수 받을 생각은 않고 바둑에 미쳐 있어서 그의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다고 들었다. 네덜란드 맥주 중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것은 하이네켄이다.

그는 5단으로 이번 대회에서 5위를 했다.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바둑 교실은 학생이 1천 5백 명쯤 되는데 작년부터 이름을 'Go school'에서 'Baduk school'로 고쳤다. 내 놓고 친한 파가 된 것이다. 빔은 음악가다. 음대에서 기타를 전공했는데 전설의 기타 명인 세고비아 제자의 제자라고 한다. 그는 4단으로 이번에 처음 수퍼그룹에 들어갔다. 성적은 밑에서 세번째 인데도 만족해 한다. 우리 집 사람도 대학 일로 레이든에 몇 번 가서 이들과 다 친하다.


▲ 네덜란드 바둑협회장 롱앤 씨 집에서.

 

우리만 얀(Jan)의 차로 가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자전거로 온다. 우리가 도착하고 20분쯤 후에 자전거 부대가 도착한다. 내가 가본 나라 중에는 네덜란드와 중국이 자전거를 가장 많이 타는데 중국이 자동차 문화가 보편화 되면서 자전거 인구가 급격히 준다고 한다. 국민 건강을 위해서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을 텐데.

 

얀은 고급 주택가에서 잘 산다. 한국에 다녀 온 후로 얀이 자기 집을 온돌로 뜯어 고쳤다. 돌 바닥인 응접실도 온돌이라고 한다 얀의 부인이 한국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금년에는 바둑 대회에 남편 따라 한국에 오고 싶다고 한다. 얀이 요리한 음식은 맛은 좀 독특한 것은 같은데 양이 적어 우리가 실컷 먹지를 잘 못 했다. 내가 해원이와 하진이에게 “너희들에겐 질 보다 양인데.”하니까 둘이 웃는다. 거의가 185cm가 넘는 거구의 화란 사람들은 이 음식으로 어떻게 배를 채울까?

저녁식사 전에 이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었는데 해원이와 하진이가 그런 분위기에 이제는 꽤 익숙해 진 것 같다. 식사 후 우리측에서는 서비스로 다면기를 두어 주었다. 이 사람들은 바둑회 간부들이라 일 하느라고 빔만 빼고는 프로의 지도를 아직 못 받았다. 그래서 빔(Wim)은 나와 두고 나머지는 해원이와 하진이가 나누어서 두었다.

 

밤 늦게 얀이 우리를 호텔로 데려다 주고 작별 인사를 했다. 나만 알라고 하면서 자기가 건강상 이유로 바둑계 지도자 자리를 후배에게 내어 주고 은퇴하겠다고 한다. 그 후 평회원으로 바둑을 즐기려는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네덜란드 협회장만 17년을 했다고 한다. 아까 누군가 나에게 얀이 몇 달 전에 심장마비를 한번 일으켰었다고 한다. 우리 나이로 60이면 서양에선 은퇴 하기는 이른 나이다.

 

여행은 꿈이고 귀향은 현실이다


 

[에필로그]

 

일본은 지난 1세기 동안 국제 바둑 보급을 혼자 담당해 왔다. 우리는 그 동안 무임 승차를 해 온 셈이다. 프로 국제 기전에서 우승하는 것 만이 한국 바둑의 할 일 전부가 아니다. 일본 바둑계가 사양길에 접어드는 현상을 보이는 지금 마치 30년 전에 태권도가 가라데를 누르고 전세계를 장악했듯이 이제는 한국 바둑이 나설 때다. 그리고 일본이 했던 것 보다 차원이 다르고 훨씬 박력 있게 바둑 보급을 전 세계에 하면 좋겠다. 유럽 인구가 5억인데 바둑 인구는 겨우 10만이다. 내가 30년 전에 예상하던 것 보다 유럽 바둑 인구 증가 속도가 늦다. 바둑인구를 빨리 늘리려면 바둑 강국들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현지 바둑인들의 얘기다.

 

한국이 주최하는 국제 아마 팀 바둑대회는 금년에 제8회를 맞이한다. 제6회까지는 아시아 10개국만 참가하는 대회로 운영해 오다가 제7회부터 서양을 포함시킨 17개국이 참가한 국제 대회로 발전했다. 거기에다가 선발전을 '한국대사배란'이름으로 치르면서 서양에서 이 대회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한국 대사 배가 한국바둑의 홍보 효과를 증가 시키고있다.

 

20년 전에는 내가 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서양 국가 어디를 가든지 그 나라 랭킹 10위까지 절반 이상은 한국 교포였다. 그러나 지금은 반 이상이 중국계, 나머지 반에 그 나라 사람, 한국계, 일본계가 나누어서 차지하고 있다. 이대로 방치하면 앞으로 5~10년 후면 중국계가 자리를 잡아 사범 자리를 대부분 차지할지도 모른다. 한국 보다 중국이 이민도 훨씬 많이 보내고 있다. 한국 바둑이 최강인 현재가 한국 바둑 세계화를 위한 최적의 시기다. 더 늦추고 있다가는 영원히 기회를 날려 버릴 지도 모른다. 한국 바둑 지도층의 각성을 바란다.

 

해원이와 하진이도 세계와 바둑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느낀 점이 많으리라. “17일 이란 짧은 기간이지만 이번 여행이 저희 인생의 전환 점(Turning point)이 된 것 같아요” 본인들 얘기다. 귀국 할 때는 8시간을 잃어 10일에 떠나 11일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 하니까 마누라가 마중 나와 있다.

 

“여행은 꿈이고 귀향은 현실이다.”
한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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