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일이다. 당시 혼인보(本因坊) 슈사쿠(秀策)는 흑1 협공에 대해 백2, 백4, 백6, 세 수를 두는데 6시간을 소비했다(기보 참조). 상대는 22세 연상인 오오타 유조(太田雄藏)로, 야스이(安井) 가문이었다. 그리 장고해도 되는 걸까. 상대에게 미안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리 제한시간이 없었다 해도 그렇지, 돌이 10개도 채 놓이지 않은 상태에서 단 세 수에 6시간을 소비한다? 오오타는 당시 46세로 앉아 있기 힘든 나이였지만 이를 용인해 주었기에 슈사쿠도 6시간을 고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루는 12시진(24시간을 12개 시간 단위로 나눈 것). 짧으면 향 한 자루 탈 시간, 또는 차 한 잔 할 시간(一茶頃·일다경). 시간은 자유로운 공기처럼 주어졌다. 딱 부러지지 않았다.
바둑의 시간은 사회마다 달랐다. 일본은 몇 날 며칠을 밤새워 대국하고, 그 바둑을 쇼군(將軍, 막부체제의 최고 권력자) 면전에서 잠깐 복기했다. 중국 기사들은 한림원에 기대조(棋待詔·임금의 바둑에 응대하는 벼슬)로 속할 때가 있었다. 황제가 부르면 황제가 필요한 시간만큼 두었다. 조선에선 사랑방에서 인간적 유대감이 제공하는 시간만큼 바둑을 즐겼다.
아마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장 시간은 한 수에 8시간일 것이다. 1908년 34세에 혼인보 슈사이(秀哉) 명인이 된 다무라 야스히사(田村保壽) 7단은 나카가와 센지(中川千治) 6단과의 4차 10번기 1국(1907년 12월 2~10일)에서 백148 한 수에 8시간을 장고했다. 277수 종국까지 읽고 1집 승리를 확인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묵좌(黙坐)로 8시간이라니!
1924년 일본기원이 설립되면서 바둑은 단선적인 시간 문화를 받아들여 제한시간 개념을 만들었다. 32년 2월 요미우리신문 10인 연승전에서 우칭위안(吳淸源)은 10연승 했다. 11번째 대국자로 나선 스즈키 다메지로(鈴木為次郎) 7단은 각자 16시간 나흘에 걸친 대국에서 우 소년을 집으로 불러들여 두었다. 나흘째 기록계에게 물었다. “남은 시간은?” “1시간 반입니다.” 노발대발했다. “이런 바둑을 어떻게 1시간 반 안에 두란 말이냐! ” 부랴부랴 시간을 18시간으로 연장했고 소년은 지쳐 무너지고 말았다.
시간은 좋은 바둑의 다른 이름이었다. 33년 슈사이 명인과 우칭위안의 명인 환갑 기념대국은 각자 24시간, 38년의 명인 은퇴기 제한시간은 각자 40시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돈. 점차 시간을 아끼게 되었다. 일본에서 명인전이나 혼인보전 같은 큰 타이틀 도전기의 경우 한 판을 이틀에 둔다. 처음엔 10시간을 주었지만 요즘은 각자 7시간을 주고 있다.
한국은 어땠는가. 한국 바둑을 일으킨 조남철은 바둑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싸웠다. 바둑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老)국수들의 속기 관행에서 벗어나 일본처럼 긴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56년 시작한 국수전 도전기는 5시간의 제한시간이 있었지만 그것도 짧다고 보았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대부분의 도전기는 제한시간이 5시간이었다.
50~60년대를 풍미했던 사카타 에이오(坂田榮男) 9단은 33년 13세 때 입단대회에 참가했다. 몸이 허약했다. 시간제한 없고 철야가 보통인 시절 경쟁자들은 사카다에게 시간으로 대적했다. 오래 앉아 밤을 새웠다. 사카타는 기진맥진했다. 시합이 끝난 후에야 일본기원은 사정을 알았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입단대회에서도 제한시간을 도입했다. 사카다는 34년 입단했다.
1939~58년 유명한 우칭위안의 10번기 승부에서 대국자 사이의 갈등 중 제일 큰 것도 역시 시간이었다. 49년 우칭위안과 후지사와 호사이(藤澤朋霽) 9단 간의 제2차 10번기에서 우는 6시간을 요구했지만 후지사와는 13시간을 요구했다. 결국 13시간으로 낙착됐다.
시간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시간은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공간적 사건이 있어야만 드러난다. 공간은 변화가 드러나는 곳이다. 해시계만 해도 그렇다. 그림자 공간을 설정한 다음에야 우린 비로소 시간을 붙든다.
바둑에서 재밌는 현상 하나는 소비시간과 제한시간과의 관련이다. 1990~97년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 네 명의 대국 자료를 분석했다. 서로가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을까. 표1이 조사 결과다.
시간은 상대적이었다. 상대가 장고하면 나도 장고하고 상대가 빨리 두면 나도 빨리 두고. 흑과 백의 소비시간 상관계수가 0.58인데 반해 제한시간(3시간)과 소비시간과의 상관계수는 0.31(흑)과 0.28(백)에 불과했다.
청나라 때 유명한 황룡사와 서성우의 혈루편(血淚篇) 10국이 있다. 남은 건 기보밖에 없지만 내용을 보면 속기로 두었음이 틀림없다. 서로가 실수를 연발하는데 속기의 리듬이 잘 드러나 있다. 서로가 상대에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 반응을 보니 조훈현과 이창호의 시간이 생각난다. 표2를 보자. 두 기사가 처음 만났을 때엔 제자 이창호가 많이 밀렸다. 89년엔 107분을 더 썼다. 하지만 91년엔 이창호가 21분을 더 썼고, 조훈현이 밀리는 게 분명했던 92년엔 오히려 조훈현이 18분을 더 썼다. 소비시간이 성적에 의해 일부 결정되는 것이다.
묘한 현상도 있다. 2004년은 제한시간 3시간에 덤 6집반이 보통일 때다. 기사들에게 물었다. “한 수에 소비시간을 30초만 준다면 덤은 몇 집이 되어야 공평할까.” “한 수 10초라면.” 응답은 표3에 요약되어 있다.
답이 흥미롭다. 기사들은 짧은 제한시간이 흑에게 유리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흑이 부담해야 할 덤의 크기를 늘리자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당시 속기에서 백의 승률이 높았다. 그런데도 기사들은 반대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짧을수록 흑이 유리하다고 보는 이유는 대국자의 심리적 불안 때문이다. 시간이 짧아지면 판단에 불안이 늘어난다. 그러나 흑을 잡으면 선택권이 주어지고 그건 권력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다.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실제는 그와 다르다 할지라도. 기사들에게 덤과 시간은 혼돈되고 있다.
시간이 많으면 좋은 바둑이 나오는 걸까. 오래 전엔 많은 기사들이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3시간 정도면 7시간이 주어졌을 때와 별 차이가 없는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견해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건 국제대회가 많아지는 것과 관련 있다. 국제대회는 하루에 한 판을 끝내야 한다. 이동 시간을 고려해야 하고 경비 문제도 있어 아무리 길어도 4시간을 주기 어렵다. 그래서 보통 3시간이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 그와 관련해 19세기 명인 조와(丈和)가 명언을 하나 남겼다. 조와는 “50수 안에 승부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며 “빨리 두어야 하고 오랫동안 생각하면 삿되다(행동이 바르지 못하고 나쁘다)”고 했다.
바둑은 형상의 놀이지, 논리의 놀이가 아니다. 형상은 직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평상시 공부할 때야 생각해도 되지만 대국에서는 빨리 직관적으로 핵심을 잡아챌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하는 순간 벌써 욕심이 싹터 수법이 산만해진다. 조훈현의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는 조훈현이 빨리 두면서도 핵심을 잘 짚어내자 최고의 재능이라고 감탄했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다. 바둑의 초반은 모호하다. 일본기원 최초의 9단이었던 후지사와 호사이는 초반 한 수에 2시간 이상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기사가 많다.
시간은 어려운 문제. 이쯤에서 세상의 변천이나 서술하자. 한국은 제한시간이 급격하게 줄었는데, 이제는 타이틀전 결승에서 제일 긴 게 3시간이고 대개는 1~2시간에 그치고 있다. 바둑의 정체성을 기예(技藝)에서 스포츠로 바꾼 때문일까. 그것만도 아니다. 바둑TV와 인터넷이 보다 짧은 시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TV 대국에선 한 수 30초 속기도 적지 않다.
입단대회를 통과한 세 명의 얼굴. 천풍조 9단, 노영하 9단, 고(故) 전영선 8단(왼쪽부터)이 덕수궁에 모였다. 1968년. [사진 한국기원] |
“너무 초조한 나머지 초반에 3연패를 당하고는 눈앞에 캄캄했다. 네 번째 대국부터 담담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판 한 판 승부에 집착없이 두어나간 결과… 침착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마음은 점점 더 흥분되어 초조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1977년 4월 입단한 허장회(60) 9단의 입단 소감이다. 그는 본선리그에서 3연패 후 9연승 했다. 친구인 고(故) 임창식은 10승2패를 기록, 1위로 입단했다. 9승3패의 성적을 올린 자가 3명이라, 다시 3인만의 리그를 치렀다. 2승. 천신만고 끝의 입단이었다.
바둑 한 판에는 대략 230수가 소요된다. 한 수 한 수마다 초조감이 쌓이는데 그것이 230번. 그런 바둑을 입단대회 본선 기간 5일 내내 10~12판 두어야 한다. 다들 말한다. 입단대회 본선리그야말로 견디기 힘든 긴장감을 준다고. 절망은 희망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 겪는 감정. 수준이 닿지 못하면 절망은 아예 없다. 목표에 가까이 갈수록 희망과 절망이 대조되는 법이다.
1 조치훈은 11살에 입단했다. 일본 바둑 사상 최연소였다. 고(故) 기타니 레이코 6단, 고(故) 기타니 미노루 9단, 조치훈 9단(왼쪽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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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인구 늘며 10대 입단자 드물어62년 9살의 조훈현(62·9단)이 입단했다. 겨우 9살, 입단이 그리 쉬운 걸까. 고(故) 강철민 9단은 58년 19살에 입단했고 홍종현(69) 9단도 64년 대학 1학년에 입단했다. 강철민은 서울대 상대, 홍종현은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하지만 70년대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10대 입단이 드물어졌고, 서울대 출신 입단자도 찾을 수 없다. 60년대와 달리 수준이 크게 높아진 데다 일본책이 많이 번역되면서 공부할 게 많아진 때문이다. 69년 애기가 100만, 72년 200만. 79년 300만~400만 운운했다. 프로 지망생이 많아져 경쟁은 치열해졌고 입단은 어려워졌다.
아마 강자에게 프로 입단은 절대적인 명제였다. 프로가 되지 못하면 프로기전 참가는 고사하고, 권위도 없으며 생활 기반도 얻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입단을 고시 합격과 비교하나,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의 경쟁이다. 물론 입단도 10년 공부가 필요하고, 고시도 중·고 6년에 대학 4년을 생각하면 10년은 되겠다. 하지만 고시는 평균 점수가 합격선만 넘으면 되는 데 반해 입단은 일종의 결투였다. 70~80년대 봄·가을에 각각 입단자를 두 명씩 뽑았다. 격투사를 모두 방 하나에 밀어넣고 두 명만 나오게 하는 방식.
입단대회 참가비는 5000원~1만원이었다. 짜장면 대여섯 그릇 정도 값이다. 실력 약한 사람은 참가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입단대회엔 강한 1급들만 전국에서 모인다. 100~150명 정도. 보통 1급을 서너 점 접을 수 있는 실력이다. 일반 아마추어와는 차원이 다르다. 기원에서 오래 지내면 구부러진 등, 숙인 머리가 보통이지만 프로를 지향하는 아마는 그렇지 않다. 실력에 자부가 들어가 자세가 다르다.
대회를 앞두고는 입단 유망자가 점쳐진다. 지난 1년 전국대회 입상 성적이 가장 큰 기준이다. 그리고 세미프로들이 운집하는 기원에서 최근 성적이 좋은 1급들이 물망에 오른다. 바둑의 세계는 좁았다. 어느 분야든 주제가 잡히면 좁아지는 법이다. 유망주로 꼽히면 부담스럽다. 내면에 타인의 평가가 들어오는 것은 불편하다. 입단대회 때 의외의 인물이 왕왕 예상을 깨고 입단하는 이유다. 신인은 부담이 없다. 마음껏 둔다.
입단대회는 풍성한 잔치 분위기 같았다. 서울 종로 관철동 한국기원 1층 유전다방은 평상시 40~50대 문화계 인사들로 채워지지만 이때만큼은 20대 청년들로 북적였다. 중원장·원산정 등 주변 음식점과 밤비 등 경양식집도 열흘 정도 호황을 누렸다.
예선 대국장은 5층의 큰 대국장 하나로는 모자라 3층 일반회원실을 이틀 정도 빌려 썼다. 1, 2, 3차 예선을 먼저 조별 리그로 치른다. 4~6명의 조에서 단 한 명을 다음 단계로 올려 보낸다. 3차 예선은 특히 험난했다. 한 판이라도 지면 1등은 물 건너간다. 1등만 본선에 올라간다.
10~12명이 치르는 본선 리그는 약간의 여유가 있다. 두 명이 입단하기에 한 판 지더라도 그대로 무너지지는 않는다. 대개 2~3패 정도면 입단한다. 그렇지만 한 판 한 판이 살얼음이다.
2 1977년 4월 제44회 입단대회에서 입단에 성공한 고(故) 임창식(왼쪽)과 허장회. 열흘간의 대회를 거쳐 임창식은 1등, 허장회는 2등으로 통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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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방하면 또 1년… 돌 놓는 손가락 덜덜까짓 거 할 수 있다, 내가 못하면 말도 안 된다. 이런 분발이 내면에 있어야 하지만 맘 만으로 되지 않는다. 내 바둑도 중요하지만 경쟁자의 성적도 중요하다. 경쟁자의 성적이 신경 쓰일 때 고통은 커진다. 한 판 두 판 두어서 7~8국에 다다르면 희망은 구체적이 된다. 유력한 경쟁자를 이겨야 하는 승부판은 있는 법이고 승부판을 넘기면 입단이 눈앞에 잡힌다.
그래도 무사히 리그전을 마치기란 참으로 어렵다. 입단이 불가능한 자들도 양보하지 않는다. 시드가 있기 때문이다. 3~5위를 하면 다음 대회 본선 진출 자격을 준다. 져 줄 수 없다.
전패자(全敗者)는 져 줄까. 아니다. 적당히 두어서 지면 입단이 가능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된다.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라 누구에겐 이기고 누구에겐 져 준다는 게 부담이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적당히 두면 기백이 사라진다. 오늘 바둑을 그리 두면 6개월 후 입단대회에서도 패기 있는 바둑을 두기 힘들다. 실로 바둑에서 이것만큼 진실한 사실이 없다. 져 주면 져 준 사람에게는 다음에 만났을 때 ‘절대’ 못 이긴다.
전패자가 허리춤을 붙잡고 두면 입단이 걸린 쪽은 이기기가 매우 어렵다. 떨리기 때문이다. 서로가 친밀하다면 적당히 두기도 한다. 져 준다면 담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드물지만 “한 판 양보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인간사에 나쁘다고 할 것만은 아니다. 우린 약한 존재다. 의지만 강조하면 어리석을 수 있다. 통찰력만이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어려운 분위기 하나만 살려보자. 입단이 가까워지면 돌 놓는 손가락이 떨린다. 돌에 땀이 찐득하게 베인다. 예외 없다. 지금 두는 이 착점이 행여 잘못된 곳에 놓이는 게 아닐까, 걱정은 천만가지다. 담배 한 대 피우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낙방하면 다시 1년이다. 6개월 후 다시 도전할 수 있지만 심정적으로는 1년이다. 그 어두운 터널.
기보 허장회(흑)의 입단 결정국이다. 박상돈의 백3이 나약한 수로 곧 패착이 되었다. 피차 이기면 입단이라 착점이 얼어붙은 게 분명해 보인다. 4에 젖혀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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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보는 77년 봄의 입단 결정국이다. 허장회(흑)의 기세에 백이 무너졌다. 백3이 이해하기 힘든 점. 당연히 4에 젖혀야 했다. 우변 백A 급소가 있어 백이 잡힐 말이 아니다.
입단이 결정되는 리그 다섯째 날은 파장 분위기가 역력하다. 탈락한 사람들은 아쉽고 저 홀로 억울해서 힘이 빠진다. 비유를 해보자. 적지 않은 이혼자들이 ‘아차’ 싶을 때가 이혼 당일 저녁이라고 한다. 미처 예상 못한 곤혹이다. 그처럼 갈 곳 막막해지는 심정이 곧 탈락자의 마음이다.
참가비 5000원 못구해 애태우기도 70년대 한국 사회는 바둑에 힘을 실어주었다. 남산공전과 충암고·배문고는 바둑 특기생을 두었다. 바둑을 전문으로 하겠다는 학생들에게 편의를 봐주었다. 야구부처럼 운영했고 장학금도 주었다.
프로의 세계는 정직했다. 실력으로 두었고 실력으로 성적을 냈다. 많은 소년들이 프로를 지망한 이유로, 노력만큼 실력이 오고 실력만큼 성적을 낸다는 것을 꼽았다. 어느 사회든지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사회적으로 분화할 때엔 공정한 룰(rule)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법이다.
입단을 목표로 하는 청년에게는 시(詩) 한 편 읽을 시간이 없다. 그럴 여유는 누구도 없었다. 입단은 절박한 문제였다. 조개로 투표해 추방을 결정하는 오스트라시즘(ostracism)과 비교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에선 최고의 형벌이 공동체로부터 내다버려지는 것, 곧 추방이었다. 죽음이 아니었다. 입단하면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이고 못하면 추방되는 것과 같다.
다들 고독하고 서러웠다. 입단할 실력이 되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고, 또 실력이 되어도 운이 따라야 했다. 운명을 믿든 말든. 운명이 있든 없든. 그것이 서러움의 본질이다. 재능과 운은 감히 다룰 주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뜻을 둔 청년은 열심히 노력한다. 수도자마냥 정좌해 정신을 먼저 모으고 마음이 그칠 때에야 비로소 바둑알을 잡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입단을 못한 청년도 적지 않다. 어느 누구는 결승국을 반(半) 집으로 패해 3등에 그친 것이 몇 번이나 됐다. 입단과 입단 못한 차이는 컸다. 하늘과 땅 차이만큼 컸다. 인생에서의 차이야 누구도 말 못하지만 말이다.
우연과 인연도 피할 수 없는 요소다. 홍태선(61) 8단은 용산고 2학년까지 바둑을 두다가 대학을 낙방했다. 입단은 꿈 꾸지 않았지만 할 게 없어 바둑만 두었다. 가난했는데 주위 아는 사람이 참가금 5000원을 대신 내주면서 한번 나가 보라고 했다. 그래서 참가했고 첫 참가에 시드까지 남았다. 다음 해에 입단했다. 매우 드문 입단 운이다. 대체로 7전8기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앞서의 허장회는입단에 뜻을 둔 지 5년 만에 9전10기로 입단했고 임창식은 7년 만에 입단했다.
불안은 다들 겪어야 했던 문제였다. 운이든 노력이든 입단할 때쯤이면 평상심이 조금은 찾아왔다. 평상심이 오는 것도 운인 걸까. 열에 아홉, 입단자들의 토로에는 평상심이 언제나 들어 있었다.
70~80년대 바둑계는 척박했다. 적지 않은 청년들이 기원에서 사범으로 일해 돈 벌며 바둑을 두었다. 하루라도 돌을 잡지 않으면 바둑은 설어졌다. 어려운 현실 속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던 청년들에게 입단대회는 최후의 관문이었다. 많은 청년들이 청춘을 썩였다. 84년 한국기원은 10대 연구생에게만 입단을 허용한다는 정책을 결정했다. 입단에 실패한 청년들이 20~30대를 허무하게 보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70~80년대의 입단대회도 끝이 났다.
기보 1933년 기타니(흑)가 사상 처음으로 3연성을 두었다. 3연성은 세력 지향으로 흑7도 일관된 착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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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 일본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의 해변을 차녀 기타니 레이코와 함께 산책하고 있는 기타니 미노루 9단. 자택이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기타니는 젊은 날엔 투망을, 노년엔 해변 산책을 하루의 일과로 삼았다. 레이코도 바둑에 입문해 뒷날 프로 6단에 이르렀다. [사진 일본기원] |
침울했다. 아니다. 1941년 히라쓰카(平塚)에 있는 기타니 미노루(木谷實·1909~75) 7단의 집은 마치 초상집 같았다. 우칭위안(吳淸源·1914~2014) 7단에게 치수(置數) 고치기 10번기(番棋)에서 1승4패로 몰리자 기타니는 삭발하고 6국에 임했건만 결과는 패배였다.
조남철(1923~2006)의 회고다. 조남철은 1937~44년 기타니의 내제자(內弟子)로 지냈다. 37년 기타니는 혼인보(本因坊) 슈사이(秀哉·1874~1940) 명인의 인퇴기(引退碁·은퇴 기념 대국)를 이겨 1인자로 올라섰다. 하지만 곧 이은 10번기에서 패배해 순식간에 추락했다.
기타니는 일어섰다. 일을 했다. 75년 그가 작고했을 때 우리는 그를 한국 바둑계의 ‘은사’로 불렀다. 예(藝)의 구도자로 불렸던 그는 한국과 일본 바둑을 일으킨 거인이었다.
바둑의 새로운 100년을 열다
1861년 일본 에도(江戶) 막부가 무너졌다. 막부에 기댔던 4대 바둑 가문도 몰락했다. 혼란스러웠다. 호엔샤(方圓社), 혼인보 가문 등 5~6개의 조직이 난립했다.
기타니는 1909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발소를 운영했다. 이발소는 동네 놀이터. 바둑도 있고 장기도 있다. 그곳에서 바둑을 깨쳤다. “구경하는 동안 우물 정(井) 자(字)가 한 집이면 죽는 이치를 터득한 게, 다섯 살 무렵일까요.”
1918년 9세 때 구보마쓰 가쓰키요(久保松勝喜代·1894~1941) 4단에게 입문했다. 구보마쓰는 관서(關西) 바둑계의 왕자였지만 21년 기타니를 도쿄의 스즈키 다메지로(鈴木<70BA>次<90CE>·1883~1960) 6단에게 맡겼다. “넓은 세상을 보라.”
24년 기타니는 입단했고 바둑계도 일본기원으로 통합됐다.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에서 주최한 신예 토너먼트에서 10연승, 원사(院社)대항전에서 8연승하는 등 놀라운 성적을 냈다. 가이도마루(怪童丸·최고로 강한 전투력)라 불렸다. “훌륭한 기사들과 바둑을 둔다는 그것만이 기뻤다.”
33년 그는 신슈(信州) 지고쿠다니(地獄谷)의 처갓집인 여관 고라쿠칸(後樂館·‘후락’은 백성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거움은 백성보다 뒤에 한다는 뜻)으로 우칭위안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계곡은 유황 냄새 아득하고 청정한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곳에서 두 기사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바로 ‘신포석(新布石)’이었다. 세력과 속도를 강조했다. 반상은 혁신되었고 바둑계는 들끓었다. 책
신포석법은 5만 권이나 팔렸다. 신포석은 이후의 100년을 열었다. 기보는 33년 기타니(흑)가 사상 처음으로 3연성을 둔 바둑이다. 백은 마에다 노부아키(前田陳爾·1907~75).
그는 37년 명인 인퇴기(引退棋) 도전자 결정전에서 우승했다. 결승은 스승 구보마쓰와 두었는데 부담은 없다 했다. “막상 바둑판 앞에 앉으면 무념무상이니까요.” 스승의 시중을 들었고, 전후(戰後)에는 스승 유족을 자택에 모시고 보호를 다했다.
인퇴기를 이겼다. 1인자의 지위를 확립했다.
기타니 제자가 숲 이룬 한·일 바둑계
37년 그는 히라쓰카로 이사했다. 도쿄에서 기차로 1시간30분. 해변이었다. 밤에는 염불로 정신을 모았고 낮에는 투망으로 취미와 건강을 다졌다. 39~41년. 그는 우칭위안과 가마쿠라(鎌倉) 여러 절을 다니면서 치수 고치기 10번기를 두었다. 소위 가마쿠라 10번기다. 1국 종반에 그는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고투했지만 1승5패로 치수가 고쳐졌다. 우칭위안에게 1인자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명인 인퇴기부터 기풍을 세력에서 실리로 바꿨다. 전패를 기록하면서도 실험했다. 기풍을 바꾼다는 것은 인간이 두 번 태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우칭위안이 뒷날 말했다. “그는 신념에 찬 외로운 개척자였다.”
45년 일본기원은 B-29 공습으로 폐허가 됐고 그의 집도 잿더미로 변했다. 48년 일본기원과 함께 그도 집을 신축했다. 그는 제자를 다시 받아들였다.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73·전 일본기원 이사장) 9단 같은 준재들이 모여들었다.
혈압 높은 그에게 바둑은 위험했다. 54년 그는 마당에서 제자들과 탁구를 치고 쉬다가 쓰러졌다. 1년 반을 휴양했다. 그래도 57년 제2기 최고위전에서 37세의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를 누르고 우승했다. 48세로 9단 승단도 했다. 58년 최고위를 방어하고 60년엔 NHK 속기전도 우승했다. 63년 제18기 혼인보 리그전에서 졸도했다. 의사가 말렸다. 그래도 두었고 64년 명인전 리그전에서 또 졸도했다. 마침내 거목은 꺾였다.
그는 정성을 다했다. 아홉 점 하수와 두어도 시간을 다 썼다. 바둑은 너무 진지하면 타이밍을 놓친다. 최고의 기전 혼인보를 46, 53, 59년 세 번 도전했지만 모두 패했다.
그의 마지막 바둑은 68년 23세의 혼다 구니히사(本田邦久·70) 7단과의 프로 10걸전 대국이었다. 10걸전은 참가기사 20명 중 16명을 팬들의 투표로 뽑는다. 그는 1700여 표로 14위였다. 팬들의 부름에 노구를 이끌고 나온 그에게 팬들은 감동했다.
62년 그는 도쿄 요쓰야(四谷)에도 도장을 개설했다. 그만큼 제자를 아낀 인물이 없었다. 김인 9단이 60년 일본기원에서 파격적으로 3단을 인허받을 때에도 그의 설득이 컸다. 인재는 키우면 나무가 되고 곧 숲을 이룬다.
20세기 100년 동안의 일본 바둑 뼈대는 셋이었다. 하나는 일본기원 설립으로, 시장경제와 잘 맞았다. 300년의 구습도 털어냈다. 다른 하나는 신포석의 창조로, 반상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우리가 두는 바둑의 기초다. 그러곤 인재였다. 그것은 기타니 도장이 도맡아 했다.
오타케 히데오, 가토 마사오(加藤正夫·1947~2004),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67),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64),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63), 조치훈(59) 등 1970~90년대 최대 타이틀인 기성(棋聖)·명인·혼인보를 한손에 잡았던 인물들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오타케와 가토는 일본기원 이사장을 지냈다. 고바야시는 기타니의 차녀 기타니 레이코(木谷禮子·1939~96)와 결혼했다.
조남철(1923~2006), 김인(72), 윤기현(73), 하찬석(1948~2010) 등 1950~70년대 한국을 대표했던 기사들도 모두 그의 제자였다.
33년부터 제자를 받아들였다. 5남2녀를 두었지만 원래 아이들을 좋아했다. 평상시엔 20명 정도가 숙식했다. 3~4명의 여제자가 기타니의 부인 기타니 미하루(木谷美春·1910~91)의 식사 준비를 도왔다. 전중·전후 식량난 시대에 부인은 뜰에 호박과 감자를 심어가며 제자를 뒷바라지했다. 일주일 식사 메뉴를 정해 규칙적인 식사로 생활 리듬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하찬석 9단이 회고했다. “사모님이 세심하게 보살펴주고 문하생들도 친형제처럼 지내기에 분위기가 아주 좋다. 먹고 입는 것은 일체 도장에서 뒷바라지한다. 어쩌다 수입이라도 몇 푼 생기면 사모님께 드리고 용돈은 타서 쓴다. 술과 담배는 엄금되고 외출도 반드시 허락을 받는다.” 62년 김인 6단이 귀국할 때 기타니 여사는 저금통장을 안겨주었다.
스승은 제자와 단 세 판을 둔다. 입문과 입단, 타이틀을 딴다든가 독립할 때 각 한 판, 그것이 전통이다. 기타니는 묵묵히 제자들의 바둑을 몇 시간이고 지켜만 봤다. 바둑이 끝나면 아무런 말없이 자리를 떴다. 제자들의 자세가 바르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선후배의 질서가 있었다. 이시다 9단은 “타이틀을 따서 후배들에게 선물하는 게 나의 일”이라고 말했다. 선배에게 뺏은 타이틀을 도장 후배들이 가져갈 때다. 일부러 져 주었겠느냐마는.
김인 귀국 때 통장 안겨준 ‘사모님’
다케미야 9단이 저단(低段) 시절 선배와의 대국에서 분쟁이 생겼다. 이 일이 알려지자 선생이 전화했다. “다케미야는 아직 젊으니 선배의 승리로 처리하라.” 다툼은 대부분 서로가 할 말이 있는 것이다.
문하생은 모두 60명, 80년대 초엔 총 단위가 340~350단에 이르렀다. 90년대엔 500단을 넘었다. 조치훈이 62년 6세 때 린하이펑(林海峰·73) 9단에게 5점으로 배웠던 것이 ‘기타니 문하생 100단 돌파 기념회’ 석상이었다.
82년 4월 방한한 부인에게 기자가 물었다. “왜 그리 한국 제자에게 유독 정을 쏟았느냐.” 부인이 “과거 양국의 어두운 역사를 생각하면 미안하면서도 가슴이 아프기 때문에 어느 제자들보다도 정성을 다하게 됐다”며 눈물을 글썽여 참석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신라호텔 환영 리셉션에서 여사가 가져온 슬라이드를 상영했다. 조치훈의 어릴 적 성장과정을 담은 것이었다.
만년의 기타니는 차녀 레이코와 해변을 즐겨 거닐었다. 일본기원 공로상인 슈사이상(秀哉賞)이 기타니 내외에게 주어졌고 자수포장(紫綬<85F5>章·예능 공로자에게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바둑계에서는 세고에와 스즈키 다음 세 번째였다.
75년 그가 영면했을 때 일본 바둑계는 일본기원장(葬)으로 모셨다. 우칭위안이 추도했다. “선생은 나에게 있어 위대한 목표였다. 선생은 비상하게 바른 분이었으며 예(藝)로 일관된 생애는 존경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그는 신념에 찬 외로운 개척자였으며 많은 천재들의 사부였다.”
해변이 가까운 선생 댁은 울창한 나무로 뒤덮인 일본식 단층 목조건물이었다. 공부방으로 쓰인 여러 개의 다다미방이 있었지만 74년엔 선생의 건강 때문에 문하생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시간이 흘렀다. 유족은 유물을 히라쓰카 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하지만 목조건물과 울창한 정원은 남아 있어 찾아간 방문객에게 깊은 감회와 무상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 1933년부터 기타니 도장에서 사용하던 그릇들. 기타니 부인은 식량난이 심할 때엔 밭을 일궈 제자들을 뒷바라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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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盤上)의 향기] 풍진 세상일랑 잊고 … 사랑방 한편서 바둑 삼매
<19> 국수의 문화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joongang.co.kr | 제412호 | 20150201 입력
1956년 제1기 국수1위전 개회식 직후 기사와 대회 관계자들이 모였다. 서 있는 사람 왼쪽부터 장국원 초단·김명환 초단·김봉선 초단·김태현 초단·최상두 한국기원 총무(오른쪽 두 사람은 알 수 없다). 앉은 사람은 왼쪽부터 민영현 초단·조남철 4단·전봉덕 한국기원 부이사장·임호 초단·최두선 동아일보 사장·권재형 초단·이명휘 초단·민중식 초단·이석홍 초단. [사진 한국기원] |
1958년 여름 대구 동성로 경북기원. 원장은 엄보익(1903~74·변호사) 국수(國手·나라의 최고수). 많은 기객 중 경주에 사는 이석홍(1898~1975) 국수도 있었다.
섭씨 30도가 넘는 복날 대전에서 김태현(1910~2003) 국수가 왔다. 반가운 인사야 잠깐, 곧 골방으로 들어갔다. 일반 대국실로 쓰는 다다미 방 뒤에 작은 골방이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이 국수는 하얀 모시옷을 벗었고 김 국수도 양복을 벗었다. 파자마 바람이 되었다. 장기전 태세다. 대국을 시작했다. 밖엔 얼씬도 않고 밥은 시켜먹었다. 국수와 비빔밥·국밥 등이 메뉴였다.
사흘째 피곤이 절정이다. “아이구!” “에이, 숭축하다, 숭축해.” 숭축은 흉칙의 사투리다. 옆으로 눕기 몇 번이다. 눈의 충혈은 예사고 지쳐서 눕기도 힘들다. 얼추 승패가 비슷했다. 그래, 경비는 각자 물기로 하고 끝을 냈다. 89년 최갑영 영남일보 바둑해설위원이 들려준 풍경이다.
권력가가 즐겼던 조선시대한반도에서 바둑은 일찍부터 퍼졌다. 백제도 신라도 바둑을 좋아하고 잘 둔다고 『구당서(舊唐書)』 등 중국의 사서에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도 바둑은 널리 유행했다. 문인은 물론 무인도 즐겼다. 하지만 조선은 기예(技藝)를 하찮게 봤다. 문인은 물론 대궐에서도 궁녀들이 바둑을 두곤 했지만 『조선왕조실록』은 바둑의 폐해를 기록하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워낙 재밌는 거라 권력자들은 국수들을 애호했다. 국수를 사랑채에 두곤 했다. 조선시대 말 김만수는 바둑과 장기 모두 국수였는데 대원군(1820~98)의 총애를 받아 선달(先達) 벼슬까지 했다.
일화는 넘친다. 군왕을 기준으로 할 때 어느 시대나 적어도 국수 한둘의 이름은 남아 있다. 일종의 계보인데 예를 들어 현종(재위 1659~74) 때엔 종실 덕원군이 국수로 이름을 날렸고 그 뒤에 윤홍임이, 그리고 유찬홍이 있었다. 시와 문(文)이 뛰어나다, 풍진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 했다.
국수는 한 시대에 기껏해야 2~3명이었다.
한 시대에 국수가 많이 등장하기로는 일제강점기만 한 때가 없었다. 이름만 대도 무릎을 칠 만한 국수로 백남규·노사초·권재형·민중식·채극문·민영현·윤경문·손득주·유진하·권병욱·윤주병 등 수십 명에 이른다.
이유가 뭘까. 떠도는 이야기는 이렇다. 어릴 적부터 인물이 똑똑하고 부유했다. 하지만 시대를 잘못 만났다. 바둑을 배웠다. 반일(反日) 아니면 농사 외엔 할 게 없어 바둑만 두었다….
맞는 얘긴 아닌 거 같다. 그런 사람도 없진 않지만 고매한 사람이 그리 많을 수는 없다. 유성룡(1542~1607)과 김옥균(1851~94)이 국수였다는 얘기와 같다. 난세에 유성룡 같은 정치인이 시간이 많다? 글쎄다. 바둑이 그리 쉬운 건가. 김옥균은 실력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망명 후 그리 많이 두었지만 겨우 1급이다. 요즘 프로에게 6점 수준.
당시 국수가 많이 나타난 이유로는 20세기 들어 철로·도로의 개통과 통신 발달을 들 수 있겠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 거리가 짧아진다. 쉽게 모일 수 있다. 모이면 많이 둘 수 있다. 실력이 는다.
국수들의 놀이터는 사랑방이었다. 유명한 노사초(1875~1945)는 경남 함양 사람이지만 전주에 한번 가면 몇 달씩 묵는 게 예사였다. 천석꾼 이종림의 사랑방에 자리 잡고는 내기 바둑을 두었다. 이런 경우엔 대국자가 제한돼 실력 향상이 어렵다.
1930년대 서울 안국동엔 조선기원이, 수송동엔 경성기원이 있었다. 조선기원은 이완용의 조카로 재력가인 한상룡(1880~1947)이 주도했다. 국수 대부분이 조선기원에 속해 30원씩 월급을 받기도 했다. 조선·경성 양원을 합해 동호인은 줄잡아 100여 명. 기원도 사랑방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큰 사랑방이었다.
국수1위전 예선 장면. 왼쪽에서 두번째줄 앞에서부터 임호 초단·김명환 초단·이석홍 초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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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출신의 가난한 기사들국수들은 가난했다. 함양의 명문 출신 노사초나 경상도 성주의 배상연(1889~1970)은 천석꾼 부자였지만 대개는 생계조차 어려웠다. 이유가 있었다. 바둑 잘 두면서 집안 살림까지 잘 거두기는 힘들다.
본래 바둑은 양반들이 두었다. 행세하던 집이어야 바둑판이 있었다. 서울 출입도 하고 군수도 찾아오며 논마지기나 짓는 그런 집이 아니고선 바둑판도 없었다. 국수의 마지막 세대였던 한학자 신호열(1914~93)의 회고다.
국수의 반열에 들려면 어떠해야 했던가. 노사초처럼 며느리 산후조리 위해 보약 지으러 읍내 나왔다가 친구 만난 김에 손에 약 들고 한양으로 바로 떠날 여유는 있어야 했다. 10년, 20년 고향 떠나 떠돌아다녀야 했다. 5~6년 노력해서 될 세계가 아니었다.
이처럼 선비의 풍류 도락이었기에 남겨진 연구, 즉 책이 없었다. 책이 없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젊은 날을 다 보내야 했다. 그러면 가난하다.
1930~40년대에 변화가 왔다. 쉽게 모일 수 있었고 책도 있었다. 당시 활약한 국수들의 뒷날 직업을 보면 변호사(엄보익), 교사(김태현), 국회의원(배상연), 한학자(신호열), 의사(민영현) 등 명망 높은 직업도 많았다. 한국 바둑 초창기의 은인 이학진(1911~2009·의친왕 사위)은 일본 게이오(慶應) 대학 유학 시절 제대로 배운 바둑이 국수급이었다.
국수에 대한 사회적 대접은 상당했다. 사랑에 모시고는 며칠이고 극진히 대접했고 떠날 때는 노자를, 옷이 남루하면 갈아입을 의복을 드렸다.
내기는 성했다. 요즘과 달리 기전이 없던 시절이라 내기만이 돈이 되는 유일한 대국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숱하게 등장하는 내기 바둑. 물론 ‘시회(詩會)와 바둑’ 같은 아취(雅趣) 어린 풍경도 많았다.
좁은 사랑방 공간에서는 국수들에게 적절한 대가를 지불할 메커니즘이 없었다. 시골 지주들이 추수 후 서울로 올라가 몽땅 털리고 내려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만석지기가 몰락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나 들린다.
며칠 동안 골방에서 바둑을 두다 지친 나머지 뒤로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거나 내기로 얼굴 붉혀 결별한 기적(棋敵)이라도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면 흔연히 술 마시고 열흘을 함께 뒹군다거나 하는 일은 일화 축에도 끼지 못했다.
풍류야 있었다. 풍류 없는 인생이 서글픈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한때나마 자신의 몰락을 잊고 노는 게 풍류다. 풍류는 메마른 세파를 정화하는 보상체계로 기능한다. 바둑의 가치는 바둑 자체의 즐거움에 있지 않다.
일본에 한참 뒤졌던 실력일본 바둑계는 일본 정치·경제의 파급효과를 많이 누렸다. 경제성장이 이루어져 신문이 크게 일어났다. 신문에 바둑이 실렸고 바둑은 힘을 얻었다. 중국으로 발을 넓혔고 오가는 길에 조선에도 들렀다.
1934년 여름 기타니 미노루(木谷實·1909~75) 5단이 우칭위안(吳淸源·1914~2014) 4단과 중국을 순회하고 돌아가는 길에 경성에 들렀다.
기타니와 노사초가 둘 때다. 노사초가 실수했다. 이미 나이 60. 착각하기 쉬운 나이다. 기타니가 말했다. “선생님, 이건 축입니다.” 한 수 무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노사초 왈, “아, 축이면 몰아 잡아가면 될 거 아닌가.”
기보 62세 노사초(흑)는 싸움을 좋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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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들이 두 점으로 연속 패하자 성주 출신 권병욱 국수가 분연히 나섰다. 주변은 석 점으로 두라고 권했고 권 국수는 강권에 밀렸다. 노타임으로 두었고 기타니는 숙고했다. 또 졌다. 몇 달 후 지병으로 권 국수가 작고했을 때 세간엔 “화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국수들은 사랑방에서 서서히 세상으로 나왔다. 기보는 1937년 7월 경성에서 국수선정위기대회(國手選定圍棋大會)에서 노사초(흑)와 채극문(백)이 둔 바둑의 초반이다.
현대바둑 오며 국수 밀려나국수의 시대는 밀려날 운명이었다. 광복을 앞두고 조남철(1923~2006)이 일본기원 초단으로 돌아오자 모든 게 변하기 시작했다. 조남철은 48년 여름 사동궁 조선기원에서 국수들을 모아 바둑대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대회 참가는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 길이었고 그것은 곧 국수 문화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었다.
피할 수는 없었다. 50년 국수들은 프로 초단을 받았다. 56년 동아일보는 한국 프로기전의 효시인 국수전을 개최하면서 이름을 ‘국수1위전’이라고 했다. 이미 프로가 된 국수들이지만 체면은 다른 문제였다. 50년대엔 젊은 친구들이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그랬다. 국수 문화는 서열이 아니라 실력이 비슷한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노는 세계였다. 바둑의 형식이 오늘과 달랐다.
과도기는 시간이 아니라 구조의 차이에서 찾아진다. 국수들은 실력이 부족했기에 권위가 약했으며 근본적으로 사랑방 문화라 시장경제와 양립할 수 없었다. 제한된 공급과 제한된 수요가 만든 무대였다. 수요와 공급의 탄력성을 요구하는 시장에서는 사라져야만 했다.
내기도 있었고 가난도 있었지만 국수들에게 바둑은 목적 없는 그 무엇이기도 했다. 그것은 세상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탈속(脫俗)과 가까웠다. 역사상 바둑이 가장 성했던 시기는 전한(前漢) 때였다. 도교 사상이 팽배해 자연 속에서 바둑 삼매에 빠질 수 있었다. 국수들의 문화는 그런 것에 가까웠다.
[반상(盤上)의 향기] 두 점 접어주고 한 집 패배, 명인에겐 극도의 자부심
<18> 명국의 조건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joongang.co.kr | 제408호 | 20150104 입력
제4세(世) 혼인보(本因坊) 도사쿠의 고향인 일본 혼슈(本州) 시마네(島根)현에 보관돼 있는 도사쿠의 바둑판과 돌. [사진 일본기원] |
바둑 역사상 최고의 기사는 누구일까. 도사쿠(道策·1645~1702)와 우칭위안(吳淸源·1914~2014)이다. 두 기사 모두 패러다임 혁명을 한 번 이뤄 반상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우칭위안이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업적은 도사쿠가 크면 크지 못하지 않다. 하지만 그건 이 글의 초점이 아니다. 오늘은 ‘명국의 기준’이 주제다.
#1. 도사쿠가 자신의 명국으로 꼽은 게 하나 있다. 1683년 어성기(御城碁·쇼군(將軍) 앞에서 두던 공식 대국)에서 야스이 슌치(安井春知·1653~1689)와의 두 점 대국으로 한 집을 진 바둑이다. 도사쿠는 “슌치는 뛰어난 기사”라고 치켜세우면서 “그도 나도 역량을 다해 조금도 후회 없이 두었다”고 뒷날 돌아봤다. 기보를 보면 상변 백3에 이은 백5 세 칸 협공이 놀라운 발상이다. 일본 바둑 300년을 정초(定礎)한 수로 전개와 협공을 겸했다. 전개와 협공을 겸한 수는 고대 중국엔 없었다.
기보 백3, 백5가 도사쿠가 창안한 포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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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와(丈和·1787~1847) 명인은 자신의 명국으로 내기꾼 시미야 요네조(四宮米藏·1769~1835)와 1821년에 둔 두 점 바둑을 꼽았다. 승부는 빅(무승부)이었다. 빅이 아니라 한 집을 졌다면 더욱 유쾌했을지도 모르겠다.
#3. 1913년 슈사이(秀哉·1874~1940) 명인은 노자와 지쿠초(野澤竹朝·1881~1931) 5단과의 두 점 대국을 명국으로 꼽았다. 백으로 한 집을 이겼다. 객관적으로도 명국이었다. 흑도 잘 두었지만 백의 안목과 수읽기, 판단의 신랄함이 당대의 명인임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4. 하나만 더 하자. ‘패국(敗局)의 묘수’로 알려진 대국이다.
걸물 이노우에 인세키(井上因碩·1798~1859)가 오사카(大阪)에 머물던 1852년. 11월 17~23일 조와 명인의 문인 가쓰타 에이스케(勝田榮輔·?~?) 2단과 대국했다. 19일 흑이 묘수를 던져 중반의 우세를 점하자 인세키는 봉수(封手·대국을 중단하는 것)했다. “내일 두자.” 그날 밤 찾아온 손님에게 자만을 섞어 말했다. “내 묘수를 당해 질 바둑이나, 상대의 실력을 요량해본즉 내가 한 집은 이길 것이라….” 말을 맞추느라 그랬는지 바둑은 인세키가 한 집을 이기고 가쓰타는 돈이 다 털렸다. 가쓰타가 돌아가면서 한마디 했다. “내 그래도 묘수는 남겼다!” 인세키의 “한 집 이길 것이라” 운운은 도사쿠가 한 집 진 것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일본 바둑 300년의 기초를 닦은 도사쿠. 그는 실력 13단으로 불렸던 바둑의 기성(棋聖)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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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 통틀어 두 집 이긴 예 본 적 없어실제 두 점 바둑에서 명국이 많이 등장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우연히 도사쿠가 그리 말했기에, 그 다음부터 두 점에서 한 집 정도 차이가 나오는 바둑이 있다면 도사쿠를 따라 하고 싶은 걸까. 가만 보면 이런 현상이 일본에는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20세기 초까지다. 한국과 중국에는 그런 현상이 없다. 문화적 이유일까. 아니면 바둑의 본질 때문일까. 고금에 묘한 현상의 하나다.
생각해 보자. 한 집 진 것, 또는 한 집 이긴 것이 초점인가. 아니면 두 점이 초점인가. 두 점을 먼저 생각하자. 바둑에서 두 점 바둑이란 말 그대로 흑이 돌 두 개를 반상에 먼저 깔고 대국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맞바둑과 달리 백이 먼저 둔다. 그러면 반상은 귀가 4개고 서로가 착수교대를 하기에 이리 된다. 두 점이라면 귀의 점거 비율이 1대3이 된다. 백 하나에 흑 세 개. 하지만 선(先·맞바둑이되 흑이 먼저 두는 것)이면 점거 비율이 2대2가 된다.
1대3과 2대2니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겠다. 하지만 과연 어떤 차이인가. 두 점이면 차이는 있지만 하수의 실력이 상수에 꽤 쫓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차이가 현격하다는 걸까. 참고로 20세기 이전엔 명인과 초단의 실력 차이는 석 점이었다. 프로 수준이 아니라면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바둑 외적인 비유를 찾아볼까. 시인 서정주(1915~2000)의 호는 미당(未堂)이다. 호는 어디에서 왔을까.
논어에 말씀이 있다. 子曰 由之鼓瑟 奚爲於丘之門. 門人不敬子路. 子曰 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공자 말씀하기를 “유(由·공자의 제자로 자는 자로)가 비파를 거칠게 뜯는구나. 좀 듣기 그렇군.” 그 말을 듣고 문인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아직 방에는 들어가지 못했지. 하지만 당에는 오른 인물이야.”) 방(室)에 들어가려면 순서가 있다. 당(마루)에 오른 다음에야 실(室)에 들어갈 수 있다. 당에는 오른 인물이라 했으니 자격이 있다 하겠고 문인들이 함부로 대할 그런 낮은 수준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리도 이해된다. 당에 오르지 못하면 실 여부는 왈가왈부할 바 못된다. 먼저 당에 오르라. 그 다음에 실을 논하라. 고약한 이야기도 하나 하자. 예전엔 정실(正室) 자식이 아니면 부친 제사에서도 마루에 오르지 못한 적이 있었다. 마당에 서 있었다.
그 뛰어난 서정주지만 겸손했음도 알겠고 자부심도 알겠다. 자신은 아직 당에도 오르지 못했다 했다.
바둑을 견주면 대략 이리 말할 수 있다. 석 점은 미당(未堂)에 해당되고 두 점은 ‘승당이되 미실(未室)’이며, 선(先)이면 입실이되 아직은 점검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그렇기에 이렇다. 두 점으로 한 집 승부를 낸다는 것은 겨우 당에는 올랐는지 모르지만 실에는 아직 못 들어간다. 그런 이야기다.
두 점 하수를 이기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아무리 도사쿠라 해도 상대가 슌치와 같은 실력자라면. 아무리 슈사이라 해도 상대가 노자와 5단과 같은 고단자라면. 그런데 이기든 지든 요점은 불과 한 집 차이라는 것이다! 두 집은 아니다. 고금 역사에서도 두 집 이긴 것을 자랑한 예는 본 바가 없다.
초점은 한 집이 ‘힘을 다했다’라는 점이다. 최선을 다하면 극미한 차이까지도 알 수 있다는 의미다. 실력이 미진한 상대를 입실시킬 수는 없다. 불가(佛家)에 비유하면 깨달았다 큰소리치는 상대를 철두철미 검증해야만 한다. 그것이 역사에서 마조(馬祖·709~788, 당나라의 승려로 깨달음이 컸다)와 같은 선지식이 한 일이었다.
그러니 두 점으로 한 집을 이긴다든가 진다든가 하면 아직은 상대를 입실시키지 않겠다는 자부가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면 어찌 되는가. 타인의 평가가 필요 없다. 명인들은 스스로 진짜 명인임을 자부할 수 있다. 명인의 입장에서 보면 두 점 하수는 거의 등 뒤까지 쫓아온 기사. 상대가 강한 만큼 져도 한 집을 져서 최대한 버텼다면 자부심을 안겨주는 존재가 두 점이다.
반상의 典故는 문학에서의 전고와 같다역사를 대변하는 인물 없이는 전고(典故·앞선 범례)는 없다. 자부는 역사 속 자신의 위치를 알 때 비로소 오는 것. 그러기에 자부와 전고는 함께한다.
40년은 된 듯한데 한국 제1세대 정치학자 서임수(93)씨 수필이 생각난다. 하루는 집으로 막 돌아오니 현관까지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가 들려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 톨스토이!” 하고 한마디 던졌는데, 방에서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어린 아들이 크게 웃더라는 이야기. 그래서 자신도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
빙그레 웃음 짓는 분이 계실 듯하다. “아~ 톨스토이!” 하고 미소 지을지도 모르겠고 “아~ 크로이체르!” 탄식도 있을 듯하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중에 크로이체르 소나타가 있다. 도덕적으로 엄격했던 톨스토이가 세간의 사랑을 그린 것이다. 그래, 좌우간 이런 게 전고의 활용이다.
문학에서 전고는 자주 활용되는 수사학적 기법이다. 쓰는 자는 읽는 자를 겨냥해서, 그것도 고급스러운 독자만 겨냥해서 사용하는 기법이다. 권위가 실린 긴 이야기를 축약하는 것도 속성 중 하나. 이야기가 축약되면 상징이 되고 신화가 된다.
도사쿠는 『논어』를 읽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본 중세 막부시대 혼인보(本因坊·승려 출신 바둑가문) 등 바둑가문은 공부도 했다. 남겨진 서찰을 보면 그들의 공부가 만만찮았음을 알 수 있다. 도사쿠는 자신도 모르게 승당입실(升堂入室)을 주관하는 자의 자부를 드러냈다. 그 이후엔 후대의 기사들이 도사쿠를 전고로 삼았다. 바둑만 보면 도사쿠는 성인의 자리에 있다. 기성(棋聖)이라 불렸고 실력 13단이라 했다. 성인은 세상에 의미를 주는 자리다. 그러니 바둑에서 후대 명인들은 적어도 한 번은 두 점으로 한 집을 다퉈 도사쿠와 같은 반열에 서고 싶어 했다. 어느덧 “두 점에 한 집”은 신화가 됐다.
조훈현 이긴 뒤 아무 말 안한 우칭위안1966년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1889~1972) 9단이 바둑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자색포장(紫色褒章)을 받을 때 기념식장에서 우칭위안 9단과 조훈현(62) 초단이 기념대국을 했다. 우칭위안과 조훈현은 둘 다 세고에의 제자다. 막 입단한 조훈현이 두 점을 놓았는데 우 9단이 한 집을 이겼다. 하지만 이에 대해 우 9단은 아무런 말을 남기지 않았다.
대국장이 화기애애해서 그런 걸까. 그렇겠다. 하지만 이미 그런 시대가 지난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전통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전통은 관습과 달리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제도인 까닭이다.
실력마저 변했다. 명인이 프로 초단을 두 점 접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실력의 편차는 현저하게 좁혀졌다. 요즘 명인들은 두 점 바둑 둘 기회가 아예 없다.
굳이 두 점에 한 집이 아니어도 당대 최정상급의 누군가가 “이것이 나의 명국이다”라고 한마디 한다면,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 든다면, 그 다음부터 좀 더 쉽게 “이것도 명국이다”고 한마디 할 수 있을 것인가.
[반상(盤上)의 향기] 술과 藝와 無心 … ‘낭만 기객’ 김인 세상과 반상을 잇다
<17> 영원한 국수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joongang.co.kr | 제406호 | 20141221 입력
젊을 때의 김인(왼쪽)이 1977년 마등령에서 조훈현과 함께했다. 등산으로 전국을 누볐던 김인과 조훈현은 특히 북한산과 설악산을 좋아했다. [사진 한국기원] |
“김인 8단과 조훈현 7단. 두 사람이 대국할 때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조 7단과 서봉수 5단의 대국 분위기와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따뜻함이었다. 상대방이 잘 두면 잘 둘수록 뭔지 고맙고 든든한 그런 관계, 승부 자체보다 더욱 커다란 신뢰의 안개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
1978년 바둑 평론가 노승일(79)의 관전기 일부다. 승부는 차갑다. 반상은 전쟁터. 그런 세상에서 따뜻한 훈풍이 도는 바둑이 있다는 것은 실로 의외다. 하지만 실제 그런 것이 있었다. 김인(金寅·1943~) 국수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조남철(1923~2006)은 한국의 바둑을 열었다. 45년 한국기원의 모태인 한성기원을 창립해 현대 바둑을 보급했다. 구한말 사랑방 놀이에서 시작한 바둑을 사회적 차원으로 일으켰다. 바둑은 성장했다. 64년엔 프로와 아마를 구별했고, 프로 기사는 34명이었다. 기전 수는 4개(국수전·왕좌전·최고위전·청소년배). 64년 전문지 ‘기원(棋苑)’이 나온 데 이어 ‘바둑세계’와 ‘기계(棋界)’(67년 ‘바둑’으로 제호 변경)가 창간되는 등 바둑은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바둑과 세상은 뭔가 소원했다. 바둑 인구가 적은 탓도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바둑에 대한 살가운 공감대가 부족했다. 조남철 1인 천하라 바둑계의 무기력증도 컸다. 비슷한 나이의 김봉선 5단이나 김명환 4단 등 도전자가 나섰으나 상대도 되지 않았고 변화가 없어 애기가들도 시무룩해했다. 조남철을 넘어서는 인물이 없었다.
세속적인 정치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저 세상을 말하는 종교만 해도 예배의 대상이 없다면 종교는 없다. 바둑도 그렇다. 바둑을 상징하는 인물 없이는 바둑은 없다. 60년대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 9단과 린하이펑(林海峰·72) 9단이 없었다면 일본 바둑계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릴 수가 없을 것이다. 사카다의 승부 철학과 린하이펑의 태산 같은 자세는 곧 바둑의 얼굴이었다.
김인 국수가 즐겨 쓰는 휘호 ‘구현(鉤玄·현묘함을 낚다)’. 바둑은 현현(玄玄)으로 표현되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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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땐 초단 건너 뛰고 3단 ‘직행’바둑은 문화적인 그 무엇이다. 동어 반복 같지만 ‘바둑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인식이 투사된 그 무엇이다. 그 때문에 언제나 바둑은 변했다. 사카다가, 린하이펑이, 조남철이… 모두가 바둑에 살을 보탰다. 이미지를 키웠다.
그처럼 누군가가 넓은 상징성으로 바둑의 격을 변화시키는 그런 과정이 없다면 바둑이 문화로 성장하기란 매우 힘들다.
남쪽 강진 바닷가에서 자맥질하던 떠꺼머리 소년이 있었다. 어깨 너머 배운 바둑에 재능을 보여 소년은 55년 서울로 바둑 유학을 떠났다. 조남철이 개인 기원으로 별도로 운영한 송원기원에서 바둑을 공부했다. 이학진(1911~2009·구한말 의친왕의 사위)씨 등 바둑계 인사들이 알게 모르게 아낀 소년은 단연 두각을 나타내 58년 전국 아마추어 대회 우승 이후 프로로 입단했다.
62~63년 일본 유학 당시엔 파격적으로 3단을 인허받았다. 초단을 거치지 않은 3단 인허는 우칭위안(吳淸源·1914~2014) 이후 그가 처음이었다. “김·죽·림(金·竹·林)이 장래 바둑계를 짊어지리라”는 말이 일본 바둑계에 떠돌았다. ‘죽’은 일본의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72) 9단이고 ‘림’은 대만 출신의 린하이펑이다. 물론 ‘김’은 한국의 김인이었다.
김인은 63년 겨울 군 입대 때문에 한국에 돌아왔고 이후 국내에서 바둑에 집중했다. 그러곤 66년 조남철의 국수 10연패를 저지하면서 그의 아성을 깨나가기 시작했다. 60년대 말에는 7개 타이틀을 모두 휩쓸었다. 국수 6연패, 왕위 7연패(통산 8회) 등 77년까지 획득한 타이틀만 30개를 넘어섰다. 월간 ‘바둑’엔 그의 얼굴이 화보를 장식했으며, 신문에서도 그의 이름은 언제나 나왔다. 조남철을 넘어선 그는 곧 한국 바둑의 얼굴이 되었다.
얼굴에 눈·코·귀가 있듯이 그는 세 가지 인연을 통해 바둑에 살을 붙였다. 술과 예(藝)와 무심(無心)이 그것이다.
첫째, 그는 술을 잘 샀다. 그가 타이틀 최종국을 둘 때엔 기사들이 모였다. 끝난 다음에 술자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년에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금의 반 이상을 술자리에서 풀었다. 동료가 안 보이면 “아무개 어디 갔나?”하고 찾았다. 그러기에 너나없이 모였다. 관철동 중국집 ‘중원장’은 그가 자주 간 술집이다. 김인은 낭비벽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낭만적이고 정을 잃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런 풍경은 뒷날엔 사라졌다. 70년대 중반부터는 승부가 낭만을 앞서는 소위 실력주의 시대가 들어섰다.
자신부터 술을 좋아했다. 그는 “10대 후반부터 마셨다. 바둑을 두기 위해 지방에 가면 언제나 술이 있었다”고 했다. 나이가 한참 많은 신동문(1928~93·시인)과도 교유했고 고은(81·시인)과도 자주 마셨다. 따질 게 없었으며 마음만 맞으면 됐다. 마음을 허물면 현실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와 만나는 사람들은 바둑 동네를 가까이 여겼다.
둘째로 그는 바둑의 예(藝)를 살렸다. 기(技)에 치우치지 않도록 했다. 박치문(66·한국기원 부총재) 바둑전문기자가 “그는 자신의 바둑에다… 자신의 인생관을 그대로 도입시키고 있다”고 일찍이 간파했듯이 인생의 의미를 바둑에 투사했다. 그것이 예였다. 안영이(79·바둑 서지학자) 선생이 지난 4일 장승백에서 열린 송년회 자리에서 그때를 회고하며 감탄했다. “아, 당시엔 정말이지 대국이 진지했어요.” 김인은 그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비록 그것이 인간이 바둑에 덧씌운 허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예는 허명 비슷한 그런 것이고, 도인은 허명으로 실체를 얻는다.
기보 백 80을 보고 김인은 돌을 던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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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미(美)를 떠날 수 없고 철학을 떠난 미도 없다. 그는 모양을 중시해 모양이 어긋나는 것을 참지 못했다. 69년 강철민(1939~2002) 5단과의 최고위전 4국에서는 80수 만에 돌을 던져 친구인 강 5단마저 “어, 이거 왜 이러나. 왜 던지나” 하고 되레 놀랐다(기보). 타이틀을 잃었다.
미는 자긍심을 높인다. 후배들이 경외했고 바둑을 지망하는 청년이라면 누구나 만나보고 싶은 인물이 되었다. 기술이 먼저인 승부 세계지만 승부 외에 경외하는 그 무엇이 없다면 바둑은 기술로 끝날 뿐이다.
셋째, 그는 무심으로 승부를 대했다. 대국 때 각박하지 않았다. 평온했다. 조훈현(61) 9단에게 타이틀을 물려줄 때엔 훈훈한 정마저 감돌았다. 시퍼런 기운일랑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승리 그 자체를 추구하는 현대 바둑의 흐름 속에서 악착같지 않음은 하나의 낭만성이자 김인의 담백함을 보여주는 매력이 되었다.”
바둑 잡지서 인기 투표하면 늘 1위기자들이 찾고 시인들이 만났으며 학생들이 따랐다. 월간 ‘바둑’의 인기 투표엔 언제나 1위였다. 타이틀을 상실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그는 조훈현 다음 2위에 머물렀다. 그가 세상과 반상의 거리감을 좁히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바둑은 실력의 세계. 제1인자가 추구하는 것은 곧 바둑계 전체가 추구하는 것이 된다. 굳이 소박한 프로이트(S. Freud) 심리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대통령의 언행은 국민의 의식에 새겨지고 부모의 태도는 자식에 대물림된다. 승부 세계는 그보다 더하다.
김인이 추구하는 그 무엇이 담긴 것. 그것이 60~70년대 한국의 바둑이었다. 그의 중후(重厚)한 기풍은 애기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바둑이란 것은 두터워야 제대로구나!” 중후는 빠름의 대극이다. 애기가들의 안목이 두터움에 쏠리자 사회적으로도 바둑이 두터워졌다. 도시의 소외와 각박함에 대해 바둑이 보상해줄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두터운 바둑으로 각박한 시대 힐링72년 조훈현이 일본에서 돌아오고 냉정한 서봉수가 명인을 따낼 때 실력주의는 밀어닥쳤다. 그 시간을 10년 앞둔 60년대 조남철은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변화하는 세상과 잘 안 맞았다. 그런 한계, 그런 위험. 그런 게 있었다. 만약 실력주의의 풍조가 조남철 시대에 바로 들이닥쳤다면 바둑은 좁아졌을 것이다.
일본과 달리 예의 기운이 한 번도 제대로 피어나지 못한 상태였기에 바둑은 해방 전 노(老)국수 시절의 내기바둑 기운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세우는 게 일이었던 조남철은 68년 한국기원 낙성으로 일을 다했다. 조훈현은 일본을 이기는 게 몫이었고 89년 응씨배 우승으로 절정을 이뤘다. 그 중간에서 김인의 의무는 넓히는 것이었다.
기풍과 이름은 현실의 반영이다. 조훈현은 ‘빠른 창, 부드러운 바람’으로, 서봉수는 ‘잡초 바둑’으로 표현된다. 실력주의 시대의 표상이다. 김인은 ‘청산(靑山)’으로 불렸다. 유장하고 두터운 수법이 중후한 인품을 반영했다. 바둑의 격을 높인 김인은 잊지 못할 인물이었다. 기념이 아니라 잊지 못해 반복되는 존재. 반복되는 것은 의례가 되고 의례는 언제나 새롭게 의미를 던져준다. 소설가 김성동(67)이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그를 ‘영원한 국수’로 부른다 했다. 그가 타이틀을 잃었을 때 비로소 얻게 된 이름이다.
반상(盤上)의 향기] 한판 바둑 며칠 이어질 땐 ‘봉수’로 컨닝 바둑 봉쇄
<15> 훈수의 세계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joongang.co.kr | 제402호 | 20141123 입력
대국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시간 계산, 기록, 사물 정리, 입회인 등…. 사진은 1964년 일본 제3기 명인전 도전기 종국 장면. 정면이 사카다 명인이다. [사진 일본기원] |
점심이 사라졌다. 요즘 세계대회에 가면 만나는 풍경이다. 삼성화재배는 2010년부터, LG배는 올해부터 점심시간을 없앴다.
왜 그런가. 프로에게 훈수(訓手)는 쉽다. 가벼운 표정만으로도 귀띔해 줄 수 있다. 동료와 함께하는 점심이 의심을 사는 이유다. 그래서 점심을 없애는 대신 대국장 한쪽에 과자와 과일과 같은 간식을 준비해 두기로 했다.
초읽기에서의 화장실 사용도 같은 맥락의 문제다. 남은 시간 10초인데 화장실에 가야 할 때가 없지 않다. 생리적인 문제지만 손까지 씻고 오면 짧아야 1~2분이다. 수읽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상대는 불쾌하다. 요컨대 훈수의 문제다.
두 대국자 같은 숙소서 외부 접촉 차단1938년 6월 26일~12월 4일. 한 판의 바둑이 6개월에 걸쳐 완성됐다. 혼인보(本因坊) 슈사이(秀哉·1874~1940) 명인의 은퇴 기념기. 상대는 기타니 미노루(木谷實·1909~75) 7단. 1968년 노벨 문학상을 받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가 관전기를 도쿄 니치니치(東京日日) 신문과 오사카 마이니치(大阪每日) 신문에 게재해 공전의 관심을 끌었다. 가와바타는 이 대국을 소재로 소설 『명인(名人)』을 펴냈다. 메마른 터치로 그려진 승부와 승부사의 세계.
하코네(箱根) 나라야료칸(奈良屋旅館)의 대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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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시바구(芝區) 고요칸(紅葉館·회원제 고급 요정)에서 흑1과 백2를 두고, 하코네(箱根) 나라야료칸(奈良屋旅館)에서 다음 수를 진행하는 등 대국장을 세 번 옮겼다. 제한시간 각 40시간에 봉수(封手·대국을 잠시 중단하는 것)가 15회였다. 소위 통조림 대국이었다. 1940년대 이후 이틀 또는 사흘에 한 판 두는 도전기에서 대국자는 대국 날 같은 여관이나 호텔에서 묵는다. 동료와의 접촉도 제한되는데 이를 일러 통조림 대국이라 불렀다.
담합은 인간의 속성이다. 일본기원에서도 담합은 있었다. 대국료를 많이 타기 위해 일부러 빅을 연속해 세 번 만든 경우도 있었다. 세 판 두면 대국료를 세 번 받는다.
야마베 도시로(山部俊郞·1926~2000) 9단은 5단이던 1950년 12월 24~25일의 승단대회에서 411수까지 가는 긴 바둑을 두어 진기록을 세웠는데 기록된 패만 본다 하더라도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당연히 의문이 있었다. 장국(長局)을 의식해 일부러 패를 즐겨 한 거 아니냐?
기보 백1이 의심을 받은 묘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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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0월 16일~1934년 1월 29일 ‘3三·화점·천원의 바둑’으로 알려진 슈사이 명인과 우칭위안(吳淸源·100) 5단의 대국이 있었다. 명인의 환갑을 기념한 대국으로 제한시간은 각 24시간. 첫날 가지바시료칸(鍛冶橋旅館)에서 대국을 시작하자마자 명인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바깥도 소란스러워졌다. 우 5단이 파천황의 실험을 했기 때문이다. 우 5단은 흑1을 화점, 흑3을 3三, 흑5를 천원에 두었다. 3三은 일본 바둑 300년의 터부(taboo)였다. 중반 흑이 약간 우세할 때 명인의 묘수가 터졌다. <기보>를 보자. 백1(실전 백162)이 묘수로 흑2는 최선의 응수. 묘수의 힘으로 명인은 2집을 남겼다.
그런데 묘수에 대해서는 명인의 제자 마에다 노부아키(前田陳爾·1907~75)가 발견했다는 설이 당시 파다했다. 제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스승의 바둑을 연구했기에 어떤 식으로든 말은 명인에게 들어갔을 것 아닌가. 그런 의심이 대국장 안팎에 떠다녔다.
가문의 비수 총동원된 토혈지국1835년의 토혈지국(吐血之局)은 지난번 글에서 본 바다. 이런 판은 가문의 흥망이 걸린 것이라 숨겨둔 비수(秘手)를 총동원해야만 한다. 초반에 이노우에(井上) 가문의 비수가 나왔다. 큰 승부를 대비해 깊이 연구해 둔 것이었다. 조와(丈和·1787~1847)는 낯선 수를 만나 크게 당황했고 초반 비세(非勢)의 원인이 되었다.
혼인보 도사쿠(道策·1645~1702)의 이야기도 보자. 1668년 혼인보와 야스이(安井) 가문 간에 명인 자리를 둘러싼 쟁기(爭碁)가 일어나 10월 20일 야스이 산지(安井算知·1617~1703)와 도에쓰(道悅·1636~1727)가 60국 쟁기 제1국을 두었다. 1670년 제20국이 끝났을 때 도에쓰가 12승4패4빅으로 앞섰다. 산지는 승부를 멈추고 은퇴했다. 재미있는 것은 포석의 변화다. 도에쓰는 12국부터 제자인 도사쿠가 창안한 포석을 들고 나왔다. 제자와 연구한 것이다. 도사쿠는 ‘실력 13단’이라 불린 기사로 일본 바둑 300년의 터전을 닦은 인물이다. 도사쿠의 포석은 이제는 현대 바둑의 기초이기도 한데 당시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스포츠 대접 받게 되자 공정성에 초점 20세기 초까지 일본에서 승부는 권위 속의 승부였다. 대표적인 것이 봉수(封手) 제도. 두다가 상수(上手)가 “오늘은 여기서 멈추지”라고 말하면 일어서야만 했다.
토혈국(吐血局)과 이적지국(耳赤之局)을 보자. 토혈국엔 다음 기록이 남아 있다. 1835년 7월 19일 59까지 두었다. 21일 99까지. 24일 172에서 멈췄다. 27일 246까지 두고 종국했다. 이적지국은 다음과 같다. 1846년 7월 20일 89까지 두다. 23일 141에서 멈추다. 25일 325 끝수까지 끝장을 봤다. 초점은 홀수일 때 중단됐다는 점이다. 홀수는 흑의 착수. 토혈국에서 아카보시 인테쓰(赤星因徹·1810~35)가 흑59를 놓자 조와(丈和·1787~1847)가 “오늘은 이만 두지”라고 말하고 일어섰던 것이다.
의문이 있다. 24일엔 172, 즉 백 172가 끝인데?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승부가 끝난 뒤였다. 조와가 인심을 쓴 거다. 이미 반상에 돌이 놓인 후 대국을 중단하면 의도는 환히 드러난다. 상대는 집에 돌아가 가문과 함께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1932년 2월 요미우리신문 10인발(人拔·연승전)에서 우칭위안은 10연승을 했다. 11번째 대국자로 나선 스즈키 다메지로(鈴木爲次郎·1883~1960)7단은 각자 16시간 나흘에 걸친 대국에서 우 소년을 집으로 불러 두기도 했다. 나흘째 기록계에게 시간을 물었다. “남은 시간은 1시간 반입니다.” 노발대발했다. “이런 바둑을 1시간 반으로 어떻게 두란 말이냐!” 부랴부랴 시간을 18시간으로 연장했다. 소비시간은 흑 10시간 37분, 백 17시간 33분. 우 소년은 지쳤고 11연승은 실패했다.
1924년 일본기원이 세워진 이후에도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자의적인 봉수는 사라졌다. 이틀 둘 때 첫날 오후 4시를 봉수 시간으로 했다고 하자. 그러면 4시가 왔을 때 둘 차례가 된 대국자가 봉수를 한다. 그는 1시간이든 2시간이든 필요한 만큼 생각해 다음 수를 결정하고 기보 용지에 기록한다. 그러곤 봉(封)한다. 다음 날 입회인이 금고에 넣어둔 봉투를 열어서 확인하고 대국을 재개했다.
1968년 일본기원이 자부심을 갖고 펴낸 방대한 책 『위기백년(囲碁百年)』(平凡社)의 제3권은 사카다(坂田榮男·1920~2010) 9단이 편찬했는데, 부제(副題)를 ‘실력주의의 시대’라고 붙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의 경우 1965년 국수전 도전기는 제한시간이 5시간이었다. 하지만 2007년 왕위전 도전기는 각 2시간이었고 요즘엔 1~2시간이 보통이다. 봉수는 없었다. 점심엔 계시기를 눌러 시간을 정지시키고 식사 후 다시 두었다. 서울 운니동 운당여관에서 둘 때엔 점심을 주변 한식집에 미리 주문해두곤 했다.
세상은 그랬는데 왜 요즘 갑자기 점심시간이 사라졌을까. 먼저 세계대회가 많아졌다. 88년 후지쓰배, 89년 응씨배 이후 많아진 세계대회는 국가대항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시간도 짧아졌으며 바둑의 정체성도 기예(技藝)에서 스포츠로 이동하고 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모아진다. 점심과 화장실 문제를 조정해 공정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바둑의 철학성 해치는 부작용도인간은 경계(境界)가 필요한 존재다. 지나치게 투명하면 자신이 사라져 투명인간이 된다. 문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인 한.
맑은 것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가 자라난다. 인도가 좋은 예다. 종교적 문화가 지나쳐 거짓말이 횡행한다. 바라나시(varanasi) 갠지스 강 가트(gart)에서 목욕은 하지만 강물은 정화(淨化)시켜 주지 않는다. 오탁(汚濁)을 키울 뿐이다. 잠깐의 정화는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한 채 타인의 불결만 엿보게 한다.
최근 바둑에서 공정성이 강조되고 있다. 조심해야 한다. 인도의 경우에서 보듯, 맑은 것이 강제되면 대국자는 자신도 모르게 어두운 부분에 손댈 수 있다. 투명해진 대국자는 사라진 경계 때문에 무의식에 휩쓸리기 쉽다. 바둑에서 철학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도 그에 있다. 철학은 모호한 경계를 갖고 노는 것. 반상은 본래 경계가 모호하다. ‘바둑’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상대적인 게 뒤섞인 것을 말한다.
어쨌든 초점은 ‘나’ 자신이다. 시합은 공정하게 하되 세상은 대충 사는 게 좋다. 몸과 마음에 모두 좋다.
[반상(盤上)의 향기] 처절히 깨진 명인의 꿈 … 인세키 “바둑은 운의 기예” 탄식
<14> 이노우에 가문의 승부사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joongang.co.kr | 제400호 | 20141109 입력
19세기의 나가사키 데지마 항구. 가운데 보이는 반원(半圓) 부분이 데지마로 크기는 축구장 2개 정도에 불과했다. 서양의 문물은 저 섬을 통해서만 일본으로 들어왔다. [사진 위키피디아] |
흔들리는 운명에 능력은 없지 않고 자부심도 강한 인물. 그런 인간은 격정의 시간을 보낸 다음엔 무엇을 할까.
1835년 제자 아카보시 인테쓰(赤星因徹·1810~35)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토혈국(吐血局)이 지나갔다. 그 4년 후 이노우에 인세키(井上因碩·1798~1859)는 다시 한번 명인에 도전했다. 1838년 혼인보(本因坊) 조와(丈和·1787~1847)가 명인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공석이 된 명인 자리를 두고 관(官)과 바둑계가 논의를 거듭했다. 당국은 장로 격인 인세키를 명인으로 올리고자 했으나 혼인보 가문에서 반대했다. 혼인보 가문엔 후계자 슈와(秀和·1820~73)가 있었다. 슈와는 근대 바둑의 선구자로 당시 20세. 분 바른 듯한 얼굴에 여린 몸매였다. 하지만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1840년 인세키와 슈와의 쟁기(爭碁) 허가가 떨어졌다.
11월 29일~12월 13일 열닷새에 걸쳐 대국이 이뤄졌다. 12월 2일 인세키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주위 사람들은 토혈국의 악몽이 생각나 몸을 떨었다. 휴양을 취한 다음 9일에 다시 두었지만 10일에 이르러 또 피를 토했다. 12일은 밤을 새웠고 13일 오전 10시 마침내 끝을 봤다. 슈와의 4집 승리였다. 죽자 살자 내용이 험했다. 본래 스무 판(20番棋)을 두기로 했으나 지친 인세키는 한 판으로 의욕을 잃고 명인 출원(出願)을 취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산을 유람하던 인세키에게 다시금 투지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쟁기는 신청할 수 없었기에 계속해 기회를 엿봤다. 1842년 5월 16일 어느 애호가의 저택에서 기회(碁會)가 개최되고 인세키와 슈와의 대국이 주선됐다. 사교적인 자리지만 승부의 결과는 다시 한번 바둑계를 뒤흔들 수 있었다. 16~18일 사흘에 걸친 대국에서 인세키는 슈와를 감당하지 못했다. 자신은 8단. 슈와는 7단. 백을 잡고 7단을 이길 수 없다면 명인이 되겠다고 청원하기란 어렵다.
물론 속담은 삼세번이다. 1842년 연례행사인 어성기(御城碁·장군 앞에서 두는 최고의 공식 대국) 계절이 왔다. 인세키는 관을 움직여 특별대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11월 17~19일 또다시 슈와가 승리하면서 꿈은 깨지고 야망도 끝났다.
“바둑은 운(運)의 기예(技藝)로구나!”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일찍이 재주를 인정받아 기대를 한 몸에 모았던 삶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10여 년 절치부심도 허사 … 전국 유랑길에“… 무릇 비상한 인물이 있어야 비상한 일을 이루고 그런 뒤에야 비상한 공을 세우는 것이니 비상하다는 것은 실로 보통 사람들이 모방할 바가 아니다.”
『삼국지』에서 원소와 조조가 백마(白馬)전투를 벌이기 전 원소의 기실(記室·문서담당관) 진림(陳琳)이 쓴 격문의 일부다. ‘삼국지’의 주제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면 그것은 곧 ‘정의란 무엇인가’와 통용되고, ‘인간의 자유 의지’ 질문과도 교차된다. 온갖 인물들이 삼국지에 출몰하는 이유다.
인세키는 용모부터 특이했다. “곰보. 그 딱지 하나하나가 유난히도 검다. 눈썹은 짙고 굵으며 양미간이 잇댈 정도로 한 줄로 이어져 있다. 정열이 넘치는 태도.”
10여 년의 절치부심이 실패하자 인세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행을 떠났다. 전국 각지에는 제자들이 많아 심심치 않게 다닐 수 있었다. 1846년 여름 그는 오사카(大阪)에 들어섰다.
그에게 애기가들이 찾아왔다. 혼인보 가문의 슈사쿠(秀策·1829~62)가 마침 함께 있으니 지도를 요청했다. 혼인보라면 치를 떨 인세키도 흔쾌히 승락했고, 슈사쿠는 조심스레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당시 기사들은 전국으로 유력(遊歷)을 떠나곤 했다.
7월 20일~8월 29일 인세키는 슈사쿠와 모두 다섯 판을 두었다. 슈사쿠는 4단이기에 치수는 두 점이었다. 하지만 첫날 인세키는 실력을 인정해 곧 대국을 멈추고, 다음날 슈사쿠가 흑으로 두게 했다. 7월 21~25일 두 사람은 대국장을 세 번 옮기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긴 바둑을 완성했다. ‘이적(耳赤)의 바둑’이었다.
기보 흑2가 이적(耳赤)의 묘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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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엔 슈사쿠가 초반 정석에서 실수를 해 인세키가 크게 우세했다. 이튿날 대국장에 의사가 있었다. 그는 바둑을 몰랐지만 방을 빠져나와선 말했다. “인세키 선생이 질 거 같다.” 까닭은 이랬다. “귀가 빨개지는 것은 당황했을 때다. 흑2<기보>가 반상에 놓인 순간 선생의 귀가 붉어졌다.”
흑2가 ‘이적(耳赤)의 수(手)’라고 불린 묘착. 상변을 넓히고 우변 백 세력을 삭감하며 하변 흑 넉 점을 지원했다. 백1은 흑2 근처에 두어야 했다.
고운 품성에 깊은 효자였던 슈사쿠는 어성기 19연승의 주인공으로 서른셋에 세상을 떠났다. 일찍 떠난 천재는 이름이 남는다. 그는 뒷날 기성(棋聖)으로 불렸고 바둑은 영원히 남았다. 때는 200여 년의 평화가 가져온 태평천하로 풍류가 넘쳐 몰락을 내다보는 절정기였다.
반상은 알려준다. 슈사쿠와 둘 때는 인세키도 마음이 편했다. 슈와와 대적할 때의 투지와 기백, 의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천천히 반상을 즐기고 있다는 인상이다.
하지만 앞길은 여전히 멀었다. 은원과 가문의 중흥이 인세키를 마주했다. 제자 인테쓰가 세상을 떠난 후 이노우에 가문은 인재가 귀했다. 고민을 거듭한 그는 1845년 숙적 조와의 장남 도야 우메타로(戶谷梅太郞·1820~56)를 이노우에 가문의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조와도 찬성했다.
혼인보 가문은 실력자가 가주(家主)를 계승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조와의 맏아들은 재주는 슈와 못잖았지만 6단을 앞두고 안질(眼疾)에 걸려 그만 슈와에게 뒤처졌었다. 조와는 아들에게 길이 열리는 것을 반겼다. 도야 우메타로는 이노우에 가문으로 들어가 이름을 이노우에 슈테쓰(井上秀徹)로 바꾸었다. 절묘했다. 인세키는 자신의 야망으로 인해 벌어진 갖가지 파란을 한꺼번에 다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첩과 도망친 제자 찾아가 대국그러나 1850년 슈테쓰가 정신이상으로 사건을 일으켜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다른 제자가 인세키의 첩을 데리고 도망친 사건도 있었다.
네 가문 중에서 야스이(安井)와 하야시(林) 가문은 혈통에 따른 계승을 원칙으로 했지만 혼인보와 이노우에 가문은 사문(沙門) 출신이었다. 대처(帶妻)가 금지됐다. 그래도 첩(妾)을 두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는 제자가 에도(江戶) 시내 빈민촌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비 오는 날 밤 인세키는 하인의 어깨에 바둑판을 지우고 집을 찾아가 몸 둘 바 모르는 제자에게 무덤덤히 말을 했다. “바둑도 못 두고 있다기에 판 하나 가져왔네. 바둑꾼이라면 그래도 연구는 해야 하지 않겠나.” 허락이었다. 숨어 지낼 때 제자도 바둑으로 입에 풀칠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당장 소문이 날 테니 말이다.
“바둑꾼이 된 것부터 나는 불행”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사건이 또 있었다. 1844년 5월 에도(江戶)성에 화재가 일어나 성곽이 거의 다 타버리고 인명 피해도 컸다. 막부(幕府)는 성의 수축(修築) 비용을 제후(諸侯)에게 부과했으며, 제후는 그 부담을 백성에게 돌렸다. 의분을 느낀 인세키가 당국에 상신했다.
“단순한 실화(失火)임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가냘픈 어깨를 핍박한다는 것은….”
옳은 상신이라도 극형을 당하기 일쑤인 봉건체제 속에서 신분에 넘치는 상신이었다. 그는 문을 잠그고 들어앉아 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의외로 등성(登城)하여 장군을 배알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제후들은 다투어 교제를 청했고 그는 국사(國士)로서의 명성을 누리기 시작했다. 1848년 인세키는 은퇴를 하고 병학자(兵學者)를 자처하면서 호를 겐난(幻庵)이라 했다. 그는 가끔 “바둑꾼이 된 것부터 나는 불행하다”고 했다.
풍랑으로 물거품 된 마지막 도전1852년 54세의 인세키는 중국에 가서 웅지를 펼쳐보겠노라는 뜻을 품고 나가사키(長崎)로 내려갔다. 데지마(出島·그림·1636년 축조된 인공 섬으로 쇄국정책을 펼쳤던 일본에서 200여 년간 유일의 해외 무역창구 역할을 했다.) 주변에서 이리저리 길을 모색해보았다.
당시 중국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크게 어지러웠지만 그는 그것도 모른 채 밀항을 시도했다. 고맙게도 풍랑이 크게 일어나 배는 남쪽 가고시마(鹿兒島)로 떠내려갔고 그는 변소에 갔다가 그만 돈주머니를 바다에 떨어뜨렸다. 180냥의 금화였다. 비싼 똥을 누었다.
그는 에도로 돌아갈 여비도 없어 가고시마에서 단위 면장(免狀)을 남발했다. 뒷날 가고시마의 애기가들은 그가 발행한 면장을 두고 ‘인세키 초단(因碩初段)’이라 불렀다.
1859년 마침내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엔 병란(兵亂) 없던 태평천하도 끝이 났다.
막부가 무너지고, 1924년 일본기원이 설립되어 다시금 바둑이 세상에 나설 수 있게 되기까지 일본 바둑계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반상(盤上)의 향기] 가문 명예 건 9일 전쟁 … 돌 던진 뒤 피 토한 인테쓰
<13> 혼인보家 vs 이노우에家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joongang.co.kr | 제397호 | 20141019 입력
1829년 발행된 목판(木版) 기사(棋士) 명부(名簿)인 ‘諸國名碁鑑(제국명기감)’. 일본 바둑 4대 가문에 속한 약 150 명 가까운 기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부다. 가운데 제일 아래에 혼인보 조와(丈和) 이름이 굵게 새겨져 있다. [사진 일본기원] |
1835년 7월 19일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지방 영주 마쓰다이라 스오노카미(松平 周防守)의 저택에서 성대한 기회(棋會)가 열렸다. 당대의 명수(名手)들이 자리를 잡았다.
명인 혼인보(本因坊) 조와(丈和), 선(先) 7단 아카보시 인테쓰(赤星因徹).
8단 이노우에 인세키(井上因碩), 선(先) 6단 야스이 슌테쓰(安井俊哲).
8단 야스이 센치(安井仙知), 선(先) 6단 하야시 하쿠에이(林伯榮).
인테쓰(1810~35)는 인세키(1798~1859)의 제자로 바로 옆에서 대국했다. 그 외에 기적(棋籍)에 이름을 올린 많은 기사가 운집했고, 연회를 겸한 기회는 중간 중간에 쉬어가면서 아흐레가 지난 27일에야 끝났다. 만개한 문화 속 야심에 찬 모임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괴(慙愧)와 처참(悽慘)을 동반했다.
기보 1 조와의 묘수: 첫째(백2) 둘째(백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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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이나 대국 멈출 만큼 치열한 승부대중의 초점은 단연 조와(1787~1847)와 인테쓰의 대국이었다. 뒷날 ‘토혈국(吐血局)’으로 불린 바둑으로 숨이 찼다. 시간을 끌었다. 19일·21일·24일, 도합 세 번을 봉수(封手·잠시 대국을 멈추는 것)하면서 27일 마침내 승부를 끝냈다.
첫날은 59수까지 둔 다음 봉수했다. 조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혔다. 바둑판을 붙들고 앉았다. 한밤중이다. ‘거, 누구 없느냐’ 하는 소리에 들어가 보니 조와의 아랫도리가 젖어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오줌 싸는 줄도 모르고 골몰했던 것이다.
인테쓰도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여름을 타는 체질이었는데 그해는 유난히도 더웠다. 시내 한복판에 배를 띄우고 들어앉아서 날이 새는지도 모르고 바둑만 들여다보았다.
기보 2 조와의 묘수: 셋째(백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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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인 19일(1~59수 진행)엔 인테쓰가 우세했다. 21일(60~99)엔 조와의 묘수가 터졌다. <기보1>에서 백2·백4가 좌상귀 백을 선수로 안전하게 탈출시킨 묘착. 상대의 집 안에서 수를 만들어냈기에 허(虛)를 찔렀다고 하겠다. <기보2>에서 백1이 빈삼각의 묘수. 역시 인테쓰의 심리적 허를 찔렀다.
이후 국면이 복잡해졌지만 흑이 불리하지 않았다. 할 만했다. 하지만 무거운 부담에 판단이 흔들렸다. 24일(100~172)엔 국세가 무너졌다. 27일 마지막 날 백246이 반상에 놓이자 인테쓰는 돌을 던졌다.
승부가 끝난 자리엔 뭔가 형언키 어려운 처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기운 때문인지 주변의 어느 누구도 감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인테쓰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입을 막으면서 상체를 움츠렸다. 입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전국시대엔 명인이 병법도 강의인테쓰는 두 달 후 세상을 떴다. 원래 몸이 약했다고도 하고 폐병이 아니었나, 간이 나쁘지 않았나 뒷말이 무성했다. 하나는 분명했다. 대국은 목숨을 내놓은 승부였다.
대체 왜 그런 바둑을 두었을까? 명인(名人)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명인은 전국시대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82)가 처음 사용했다. 교토(京都) 자코지(寂光寺)의 부속 암자인 혼인보(本因坊)의 주지 닛카이(日海·1559~1623)를 고금 제일로 인정해 닛카이 앞에 ‘명인’을 붙여 불렀다.
전국시대의 풍운아들은 바둑을 특별히 환대했다. 부하 무장들을 모아놓고 닛카이로 하여금 병법 강의도 하게 했다.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98)는 닛카이를 고도코로(碁所·제도화된 바둑계 최고 지위·이하 ‘기소’)에 임명하면서 해마다 쌀 20석과 10명분 급여(給與)를 지급했다.
그 후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는 닛카이를 에도(江戶)로 데려오면서 ‘혼인보’를 성(姓)으로 내렸다. 1612년 바둑과 장기 전문가들에게 녹봉을 지급하고 세습(世襲)을 허용했다. 혼인보의 경우 백미 55석에 공로를 봐서 별도로 300석을 하사했다. 닛카이는 이름을 산샤(算砂)로 바꾸었다.
혼인보·이노우에(井上)·야스이(安井)·하야시(林) 네 개의 가문이 일본 바둑계를 이루었고 명인기소(名人碁所)는 이들을 관장했다. 명인은 9단을 의미했고, 기사들은 8단이 먼저 돼야만 명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각 가문은 명인의 승인 없이는 승단도, 면장(免狀·단위 정하는 것) 발행도 불가능했다. 받는 단에 따라 수수료도 납부해야 했다.
물론 기소와 명인은 별개다. 산샤는 제자들 중에서 기력이 가장 뛰어난 도세키(中村道碩·1582~1630)를 2대 기소로 임명하고 혼인보 가문은 따로 제자 산세키(算碩·1611~58)로 하여금 계승케 했다. 기소 제도와 혼인보 가문을 구별하기 위한 조치였다. 도세키는 이노우에 가문의 1세(世)가 됐다. 기소는 명인이어야 한다는 게 조건이라, 명인이 없을 때엔 기소는 공석(空席)이었다.
명인을 인정하는 방식에 세 가지가 있었다.
1. 관명(官命) - 혼인보 산샤가 좋은 예다.
2. 공동 추천 - 바둑계는 경쟁과 타협을 이뤄 살아갔다.
3. 쟁기(爭碁) - 타협도 아니 될 때엔 쟁기(승부바둑)에 기댔다.
봉건적인 일본 바둑이 낳은 토혈국인세키 시절엔 기소가 비어 있었다. 조와와 인세키는 야망이 컸다. 인세키는 명인에 오르고 싶었지만 단위는 7단이었다. 먼저 8단이 돼야만 명인을 청원(請願)할 수 있었다.
꾀를 냈다. 스승 10대(代) 인사 인세키(因砂 因碩·1785~1829)를 조와에게 보냈다. 10대 인세키 왈(曰), “이제 이 몸은 늙어서 제자가 잘 되는 걸 보고 죽고 싶습니다. 선생이 힘을 써서 제자를 8단에 올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조와가 바보인가. 단을 주고받고 수작이 오갔다. 그러다가 1831년 갑자기 관명(官命)이 떨어졌다. “조와를 명인으로 임명한다.” 조와가 관계를 구워삶은 것이었다. 인세키는 ‘아차’ 했지만 그렇다고 관(官)에 불만을 터뜨릴 입장은 아니었다.
시간이 흘렀다. 후원자 영주 마쓰다이라 스오노카미에게 청원해 기회(棋會)를 열었다. 조와를 한 판 이기기만 하면 “조와는 명인의 실력이 없다”고 바둑계를 어수선하게 만들 참이었다. 조와도 피할 수 없었다. 세상은 어느 한 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인세키는 날짜만 세고 있었다. 자기는 8단. 조와는 9단. 자기가 먼저 둔다. 이길 자신이 만만했다. 예나 지금이나 바둑은 먼저 두면 많이 유리하다.
그러던 하루. 멀리 지방을 유람했던 제자 인테쓰가 오랜만에 집에 들렀다. 당시 지방의 초청은 적지 않았고 답례 또한 자연스러웠다. “오, 인테쓰. 그래 어디 한 판 하자.” 시합에 대비한 몸 풀기였다. 하지만 웬걸. 네 판을 뒀는데 모두 졌다.
흠~ 그래. 인테쓰는 7단이지만 나보다 나은 것 같으니 잘 됐다. 조와와 붙이자. 훨씬 희망적인데!
“인테쓰야. 네가 나가라. 나가서 조와를 혼내라.” 이기면 조와는 흠집이 난다.
인테쓰는 깜짝 놀랐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 스승님은 큰 대국을 앞두고 계셨다. 최선을 다하지 말았어야 했구나!”
착한 인테쓰. 인테쓰는 갇혔다.
인세키는 두려웠을까. 37세 패기만만했지만 역시 두려웠을까. 20대가 이미 명인급인 요즘과 달리 바둑 정보가 많지 않았던 당시 실력의 진보는 40대 중반까지 시간을 요했다. 조와는 48세지만 전성기였다.
토혈국은 비장(悲壯)했다. 그래서 의문이다. 왜 그리 비장하냐?
낙인(烙印)의 속성 때문이다. 타이틀 획득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모두의 이목이 쏠리는 그 어떤 도덕감, 비장감이 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나가는 길은, 심리적으로는 무의식에 의해 이끌린다. 무의식은 도덕의 배경. 낙인은 그 결말.
명인 제도가 유지되는 한 바둑계의 암투는 끊임이 없었다. 쟁기(爭棋)는 권위 싸움이다. 돈은 그 후에 따라온다. 오늘의 명인은 시장경제하에서 얻어진다. 타이틀전은 1년에 1회. 1년 지나면 효력이 사라진다. 하지만 쟁기는 평생 1회 가문 싸움이다. 나라의 행운과 불운을 한몸에 안고 있는 왕의 운명과 같다. 그러니 토혈국은 바둑의 비장감에서 온 게 아니었다. 16~19세기 봉건적인 일본 바둑계의 속성에서 온 것이었다. 바둑은 비장하지 않다. 비장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명인 조와, 토혈국 치른 뒤엔 은거 뒷날 이런 이야기들이 남았다.
첫째, 그까짓 명인이 무어라고. 아니다. 그래도 가문의 일 아닌가.
둘째, 잔인했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슬쩍 상대를 떠본 다음 병풍 뒤에서 두고 보는 것만 같다.
셋째, 대국 후 집으로 데려와 요양시키다니, 어리석고 어리석다. 인테쓰를 두 번 갇히게 했다. 불운(不運)을 가진 사람은 집에서 내보내야 한다. 출문(黜門)은 죄 지은 자를 살리는 길도 된다. 인테쓰 이후 인재가 없어 이노우에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넷째, 착한 인테쓰. 운이 나빴다. 그 놈의 인연이 뭐라고. 위안은 있는가. 아마, 짐작했을 거다. 운명을. 예민하고도 도덕심 깊은 사람은 올가미가 쳐질 때엔 다 안다. 숙명으로 안다. 예수가 다 보여주었다.
숙명의 그림자가 있었다면, 숙명의 낌새는 위안이 되었을까. 숙명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위안을 구성하는 속성이다.
인테쓰 사후 방 한쪽 궤(机) 속에서 저술 중이던 『현람(玄覽)』이 나왔다. 바둑 사상 최고의 진롱(珍瓏·묘수풀이)으로 꼽히는 ‘수극굴산실국지형(垂棘屈山失國之形)’이 실린 책. 돌을 84개나 잡고도 한 집밖에 집을 못 내 잡히는 문제. 제목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고사(故事)에서 따왔다.
인테쓰는 갔지만 일본 바둑계는 만개한 모란의 형국이었다. 하지만 1860년대 바쿠후 정권의 몰락을 겨우 20~30년 남겨둔 때였다. 아무도 몰랐다. 1838년 조와는 기소에서 물러났다. 다음 해 은거에 들어갔다. 사람이 죽는 마당에 책임 없는 지배자는 없는 법이다. 지배와 향유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 신(神)은 향유자가 될 수 없다. 장로(長老)도 그렇고 각자(覺者)도 그렇다.
[반상(盤上)의 향기] 6·25 난리통에 싹 튼 기원문화, 혼돈의 시대 살게한 힘
<12> 한국 현대바둑의 시작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joongang.co.kr | 제394호 | 20140928 입력
70년대 중반 한국기원 일반회원실 모습. 이성범(시인부락 동인·서 있는 사람)과 천상병(맨 오른쪽에 얼굴이 보이는 이) 시인이 보인다. [사진 한국기원] |
“기원이 많은 것을 보니 대체로 시간이 많으며 또 그만큼 먹고 살기가 힘들 것 같다.”
1970년 내한한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 9단이 지나가듯 말했다. 당시 서울에는 기원이 넘쳐흘렀다. 모두 273개였다. 인구는 543만. 전국적으로 바둑 인구는 100만을 넘었다. 당시 1000만 인구 도쿄(東京)엔 기원이 150개에 못 미쳤다.
그건 사실이다. 기원에는 실업자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성장이 한창일 때는 인플레가 있는 법. 60~70년대 바둑이 그랬다. 65년 고려대 정문 앞엔 기원이 셋이나 있었다.
해방 직후 바둑 인구는 2000~3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한국 바둑의 대부 조남철(1923~2006) 선생은 “당시 바둑 팬은 남쪽에 2000명 정도나 되었을까” 라고 의문했고, 신호열(1914~93·한학자·프로 2단) 선생은 “읍, 군 같은 지역에는 바둑판 하나 변변한 게 없었다”고 탄식했다. 조남철이 “돌과 책을 구하려고 철수하는 일본사람들을 찾아 다닌” 이유였다.
조선시대에 바둑은 양반과 지식인의 도락이었다. 20세기 초에도 다르지 않았다. 1930년대에 발간된 『조선위기총람(朝鮮圍棋總攬)』이나 『군산위기총람(群山圍棋總攬)』 등을 보면 애기가들은 거의가 유지였다. 은행원·경찰관·세무서 공무원·신문기자….
해방 후 20여 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1978년 전일컵(全日盃) 전국 아마추어 대회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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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다방은 피난민들의 ‘심리적 고향’ 첫 번째 답은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6·25 전쟁. 전쟁이 발발하자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철로의 끝 부산역에 내린 사람들은 갈 데가 없었지만 그래도 가야만 했다. 전선(戰線)은 험하지만 일상도 영위해야만 했다. 일상 중 하나는 ‘만나는 것’이었다.
김동리(1913~95)의 소설 ‘밀다원시대’(1955)에서 시인 박운삼이 남긴 “잘 있거라, 그리운 사람들”, 그 정서가 살아있는 공간. 초량동 부산역 앞에는 스타 다방, 아리랑 다방이 있었다. 광복동에는 밀다원이 있었다.
51년 부산에 모인 기객들은 바둑구락부(기원)를 만들었다. 53년엔 7~8개가 성업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기원은 절로 생겨나는 걸까. 전쟁 직후 입대했던 조남철은 고지 탈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전역했다. 상이용사인 그는 다시 바둑돌을 잡았다. 상이용사 요양원에 방 한 칸짜리 기원을 차렸다.
하지만 상이군인들이 을러대는 바람에 중앙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료(棋料)를 받았다. 패자가 승자 몫까지 내는 식이었다. 돈이 제법 돌자 그는 서울에 남아 있던 가족을 불렀다. 김명환·김봉선 등 동료들도 기원을 차렸다.
전국대회까지 열었다. 조남철은 “각 일간지의 성원으로 선전이 잘 된 덕인지 임호 2단, 김재일 초단 등을 비롯하여 쟁쟁한 실력자들이 운집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부산에서 전국 아마대회를 2번 개최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부산에 바둑 붐이 일었다. 56년 중앙기원은 의자식 기원으로 바둑판을 40조(組)나 구비했다. 이전에는 다다미방에 앉아서 두었다. 60년대엔 광복동 남포동 등 밀집지역에 바둑단지가 형성되었고, 동서지역개발에 따라 서면로터리 일대에도 붐을 이뤘다. 부산의 영향을 받아 진주에 첫 번째 기원이 생긴 것은 55년. 60년대 중반 서울엔 기원이 80개를 넘었다.
의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부산의 기객(棋客)들은 제각각 흩어졌다. 흩어지면 만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기원은 확산되었을까.
두 번째 답은 한국의 근대화에 있었다. 근대화는 부산에서 뿌린 씨앗이 자랄 토양이었다.
문인, 화가 … 지식인들 ‘명동 기원’으로 출근60년대 근대화를 따라 도시화가 본격화됐다. 근대화의 노변 풍경은 공장과 시장(市場). 공장이 서면 노동자가 필요하다. 노동자는 시골에서 올라오고 이들은 모인다. 도시의 탄생이다. 팽창하는 도시 속에서 소외는 촉진된다. 뿌리를 뽑힌 개인이 정(情)을 나눌 대상이 없는, 무의미하고 고독한 감정의 소외.
보상이 필요하다. 지근(至近)거리의 만남이 보상 방식 중 하나였다. 너와 내가 만나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그것.
노동자는 청춘. 낮엔 일하지만 늦은 밤엔 외롭고 피곤하다. 소주가 필요하다. 술집이 마련된다. 다방도 문을 연다.
다방은 이미 하나의 문화였다. 1930년대부터 지식인들의 집합소였다. 낙랑·아세아·비너스·제비… 지적(知的) 산책을 하던, 엽차만 마시던, 좌우간 모였다. 그런 문화에 기원도 참가했다. 기원은 놀이를 더했다. 권투도, 레슬링도 한때는 국민의 오락이었지만 그것은 개인이 직접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외의 극복에는 접촉이 중요하다. 휴식 없이 노동은 없는 법이다. 오락이 없었던 시대에 도시로 모여든 젊은이들에게 바둑은 유용한 놀이였다. 바둑은 외로운 청년들의 대화 속에서 정서를 먹고 살았다.
기원과 다방은 한국 사회의 풍속도를 이루었다. 다방 있는 곳에 기원 있으며 기원 있는 곳에 다방 있었다. 68~94년 관철동 한국기원 1층에는 유전(有田)다방이 자리를 잡았다.
“조남철 선생이 명동에 송원기원을 열자 그곳은 문인·화가·교수·기자들의 새로운 살롱으로 각광을 받았다. … 관철동에 한국기원 빌딩이 서자 송원기원의 수많은 애기가들은 이곳으로 흡수되었다. … 일반회원실에는 유명한 문인들이 여럿 드나들었다. … 그곳에 온갖 천재, 기인, 학자들이 다 있었다.”(노승일 『그리운 관철동』)
사진은 일반회원실의 하루 풍경이다. ‘귀천(歸天)’의 시인 천상병(1930~93)이나 ‘관철동의 디오게네스’ 민병산(1928~90) 선생을 보고 싶다면 유전다방엘 가면 됐다. 없다면 기원 3층 일반회원실을 찾아가면 만날 수 있었다.
위안을 준 다방, 휴식을 준 기원기원과 다방은 외양은 비슷해도 힘은 달랐다. 전쟁은 혼돈(混沌). 혼돈은 신화적 차원의 변동이다. 근대화도 혼돈을 야기해 존재의 질서를 위협한다. 전쟁과 근대화로 꺼져가는 존재감은 정신의 밑바탕을 뒤흔든다.
다방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차와 음악, 대화가 섞이는 다방은 감정을 어루만져 준다. 하지만 감정 차원의 이해로는 전쟁과 같은 격변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수동적 위안에 그친다 .
기원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놀이 속 휴식을 권한다.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1872~1945)의 고전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1938)이 밝혔듯 놀이는 현실이 아니다. 완전 딴 세상이다.
인간은 약하다. 자신의 의식에 자신이 휘둘린다. 자기 자신을 먼 거리에서 바라볼 힘은 갖기 쉽지 않다. 바둑은 놀이. 놀이 속에 들어간 자, 자신을 잊고 내면의 긴장으로부터 멀어진다. 휴식을 취하도록 한 다음, 힘이 생길 때 돌아오도록 한다.
시인 김정림의 경험 또한 그랬다.
“하루 종일 굶고, 연거푸 엽차나 홀짝거리면서 바둑에 미쳤던 시절, 그 시절을 회상하면 나는 약간 히스테릭해지고, 우울해질 때가 많지만 한편으론 그 때 내 손에 바둑알이 쥐어지지 않았다면….”
그렇다. 삶이 휘청거릴 때 인간은 잠시나마 놀이로 들어가야 한다.
전쟁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근대화는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을 안겨준다. 삶의 터전을 잃고서 도시로 알알이 흩어지는 사람들. 현실은 무너진 질서다.
황폐한 들판에 선 인간은 착근(着根)이 필요하다. 인간이 질서 찾는 방식은 둘. 하나는 질서를 상정하고 현실을 그 질서의 투영으로 보는 것이다. 현실이 질서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느냐. 그것을 본다. 서양이 택한 운명으로 기독교의 세계관이 대표적이다.
바둑의 놀이성이 동양의 질서 되찾게 해동양은 다르다. 질서는 혼돈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태극은 한편으로 혼돈이다. 그로부터 둘(양의·兩儀), 넷(四象), 여덟(八象), 64괘가 나온다. 숫자는 질서 자체다. 한자문화에서 숫자를 나타내는 상형문자는 산가지를 하나하나 쌓은 것으로부터 왔다. 일(一), 이(二), 삼(三). 혼돈은 불쾌한 일면이 아니다. 생명의 원천이기에 우리는 가슴 깊이 받아들인다. 혼돈은 ‘천자문(千字文)’의 우주관인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의 내용이다.
‘천자문’의 관념은 주역 곤괘(坤卦) 상효(上爻)에서 왔다. 龍戰于野, 其血玄黃. 용이 들판에서 싸우니 그 피, 검고도 누렇다. 글자 하나하나가 은유다. 용은 형상이 없는 것. 그러므로 변화를 상징한다. 신뢰할 만하고 또 가장 오래된 주석인 문언전(文言傳)의 설명을 보자. “현황(玄黃)이라는 것은 천지가 뒤섞인 것이니, 하늘을 검다(玄) 하고 땅은 누렇다(黃) 말하자.” 음양이라 칭하든 천지라 부르든 이항(二項) 대립적인 것은 서로 뒤섞여 우주를 이룬다. 혈(血)은 한 몸임을 나타낸다. 천지는 이름만 이리 불리고 저리 불릴 뿐 실은 하나다. 하나는 곧 상대적인 것이 뒤섞인 거다.
바둑의 놀이성은 동양의 질서 찾기에 걸맞다. 첫수부터 모호한 반상은 혼돈과 다름없는 세계지만 포석을 하고 전략을 짜면서 질서를 형성해 간다.
기원의 속성도 다르지 않았다. 전국 바둑대회도 다르지 않았다. 사진을 보자. 도떼기시장 같은 혼돈이지만 생명력 넘치는 축제다. 어느 아마추어 대회를 가더라도 저런 풍경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기원은 그런 혼돈이 축약된 곳이었다.
60년대 많은 기원이 봄·가을로 바둑대회를 열곤 했다. 금반지·쌀가마니·주전자·공책 한 묶음…. 대회는 혼돈을 여는 잔치판이었다. 한데 모여 잔치마냥 대회를 치르고 승자에게 상품과 승급을 수여한다. 바둑은 단급(段級)이 있기에 가끔 사회적으로 정돈하지 않으면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소도시의 기원 주최 대회는 질서를 재편성하는 공물(供物) 체계였다. 대회가 끝난 밤 기객에겐 안온감이 찾아 든다. 대회를 통해 바둑 공동체를 일으키고 자신의 위치를 바로 잡았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질서를 잡아가는 것. 종교의 의례도 안팎의 논리는 같다.
어수선한 혼돈은 오히려 생명이었다. 그러므로 소외에 힘든 60~70년대 청년들은 누구나 되고 싶었다. 사진 속 현실이 되고 싶었다. 프로는 선망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관철동 한국기원을 오가며 삶을 지탱했다.
바둑평론가 이광구(59)의 묘사처럼 “한국기원 3층의 일반회원실은 문화의 소광장이다. 각양각색의 연령과 인물들이 이렇게 매일같이 모이는 곳도 없다. 수많은 인생행로가 제각기 뚜렷한 개성을 주장하며 간단없이 교차하고 있다. 교통의 지휘자가 따로 없어 매우 불규칙하고 무질서하지만….”
[반상(盤上)의 향기] 6·25 난리통에 싹 튼 기원문화, 혼돈의 시대 살게한 힘
<12> 한국 현대바둑의 시작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joongang.co.kr | 제394호 | 20140928 입력
70년대 중반 한국기원 일반회원실 모습. 이성범(시인부락 동인·서 있는 사람)과 천상병(맨 오른쪽에 얼굴이 보이는 이) 시인이 보인다. [사진 한국기원] |
“기원이 많은 것을 보니 대체로 시간이 많으며 또 그만큼 먹고 살기가 힘들 것 같다.”
1970년 내한한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 9단이 지나가듯 말했다. 당시 서울에는 기원이 넘쳐흘렀다. 모두 273개였다. 인구는 543만. 전국적으로 바둑 인구는 100만을 넘었다. 당시 1000만 인구 도쿄(東京)엔 기원이 150개에 못 미쳤다.
그건 사실이다. 기원에는 실업자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성장이 한창일 때는 인플레가 있는 법. 60~70년대 바둑이 그랬다. 65년 고려대 정문 앞엔 기원이 셋이나 있었다.
해방 직후 바둑 인구는 2000~3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한국 바둑의 대부 조남철(1923~2006) 선생은 “당시 바둑 팬은 남쪽에 2000명 정도나 되었을까” 라고 의문했고, 신호열(1914~93·한학자·프로 2단) 선생은 “읍, 군 같은 지역에는 바둑판 하나 변변한 게 없었다”고 탄식했다. 조남철이 “돌과 책을 구하려고 철수하는 일본사람들을 찾아 다닌” 이유였다.
조선시대에 바둑은 양반과 지식인의 도락이었다. 20세기 초에도 다르지 않았다. 1930년대에 발간된 『조선위기총람(朝鮮圍棋總攬)』이나 『군산위기총람(群山圍棋總攬)』 등을 보면 애기가들은 거의가 유지였다. 은행원·경찰관·세무서 공무원·신문기자….
해방 후 20여 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1978년 전일컵(全日盃) 전국 아마추어 대회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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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다방은 피난민들의 ‘심리적 고향’ 첫 번째 답은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6·25 전쟁. 전쟁이 발발하자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철로의 끝 부산역에 내린 사람들은 갈 데가 없었지만 그래도 가야만 했다. 전선(戰線)은 험하지만 일상도 영위해야만 했다. 일상 중 하나는 ‘만나는 것’이었다.
김동리(1913~95)의 소설 ‘밀다원시대’(1955)에서 시인 박운삼이 남긴 “잘 있거라, 그리운 사람들”, 그 정서가 살아있는 공간. 초량동 부산역 앞에는 스타 다방, 아리랑 다방이 있었다. 광복동에는 밀다원이 있었다.
51년 부산에 모인 기객들은 바둑구락부(기원)를 만들었다. 53년엔 7~8개가 성업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기원은 절로 생겨나는 걸까. 전쟁 직후 입대했던 조남철은 고지 탈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전역했다. 상이용사인 그는 다시 바둑돌을 잡았다. 상이용사 요양원에 방 한 칸짜리 기원을 차렸다.
하지만 상이군인들이 을러대는 바람에 중앙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료(棋料)를 받았다. 패자가 승자 몫까지 내는 식이었다. 돈이 제법 돌자 그는 서울에 남아 있던 가족을 불렀다. 김명환·김봉선 등 동료들도 기원을 차렸다.
전국대회까지 열었다. 조남철은 “각 일간지의 성원으로 선전이 잘 된 덕인지 임호 2단, 김재일 초단 등을 비롯하여 쟁쟁한 실력자들이 운집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부산에서 전국 아마대회를 2번 개최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부산에 바둑 붐이 일었다. 56년 중앙기원은 의자식 기원으로 바둑판을 40조(組)나 구비했다. 이전에는 다다미방에 앉아서 두었다. 60년대엔 광복동 남포동 등 밀집지역에 바둑단지가 형성되었고, 동서지역개발에 따라 서면로터리 일대에도 붐을 이뤘다. 부산의 영향을 받아 진주에 첫 번째 기원이 생긴 것은 55년. 60년대 중반 서울엔 기원이 80개를 넘었다.
의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부산의 기객(棋客)들은 제각각 흩어졌다. 흩어지면 만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기원은 확산되었을까.
두 번째 답은 한국의 근대화에 있었다. 근대화는 부산에서 뿌린 씨앗이 자랄 토양이었다.
문인, 화가 … 지식인들 ‘명동 기원’으로 출근60년대 근대화를 따라 도시화가 본격화됐다. 근대화의 노변 풍경은 공장과 시장(市場). 공장이 서면 노동자가 필요하다. 노동자는 시골에서 올라오고 이들은 모인다. 도시의 탄생이다. 팽창하는 도시 속에서 소외는 촉진된다. 뿌리를 뽑힌 개인이 정(情)을 나눌 대상이 없는, 무의미하고 고독한 감정의 소외.
보상이 필요하다. 지근(至近)거리의 만남이 보상 방식 중 하나였다. 너와 내가 만나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그것.
노동자는 청춘. 낮엔 일하지만 늦은 밤엔 외롭고 피곤하다. 소주가 필요하다. 술집이 마련된다. 다방도 문을 연다.
다방은 이미 하나의 문화였다. 1930년대부터 지식인들의 집합소였다. 낙랑·아세아·비너스·제비… 지적(知的) 산책을 하던, 엽차만 마시던, 좌우간 모였다. 그런 문화에 기원도 참가했다. 기원은 놀이를 더했다. 권투도, 레슬링도 한때는 국민의 오락이었지만 그것은 개인이 직접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외의 극복에는 접촉이 중요하다. 휴식 없이 노동은 없는 법이다. 오락이 없었던 시대에 도시로 모여든 젊은이들에게 바둑은 유용한 놀이였다. 바둑은 외로운 청년들의 대화 속에서 정서를 먹고 살았다.
기원과 다방은 한국 사회의 풍속도를 이루었다. 다방 있는 곳에 기원 있으며 기원 있는 곳에 다방 있었다. 68~94년 관철동 한국기원 1층에는 유전(有田)다방이 자리를 잡았다.
“조남철 선생이 명동에 송원기원을 열자 그곳은 문인·화가·교수·기자들의 새로운 살롱으로 각광을 받았다. … 관철동에 한국기원 빌딩이 서자 송원기원의 수많은 애기가들은 이곳으로 흡수되었다. … 일반회원실에는 유명한 문인들이 여럿 드나들었다. … 그곳에 온갖 천재, 기인, 학자들이 다 있었다.”(노승일 『그리운 관철동』)
사진은 일반회원실의 하루 풍경이다. ‘귀천(歸天)’의 시인 천상병(1930~93)이나 ‘관철동의 디오게네스’ 민병산(1928~90) 선생을 보고 싶다면 유전다방엘 가면 됐다. 없다면 기원 3층 일반회원실을 찾아가면 만날 수 있었다.
위안을 준 다방, 휴식을 준 기원기원과 다방은 외양은 비슷해도 힘은 달랐다. 전쟁은 혼돈(混沌). 혼돈은 신화적 차원의 변동이다. 근대화도 혼돈을 야기해 존재의 질서를 위협한다. 전쟁과 근대화로 꺼져가는 존재감은 정신의 밑바탕을 뒤흔든다.
다방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차와 음악, 대화가 섞이는 다방은 감정을 어루만져 준다. 하지만 감정 차원의 이해로는 전쟁과 같은 격변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수동적 위안에 그친다 .
기원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놀이 속 휴식을 권한다.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1872~1945)의 고전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1938)이 밝혔듯 놀이는 현실이 아니다. 완전 딴 세상이다.
인간은 약하다. 자신의 의식에 자신이 휘둘린다. 자기 자신을 먼 거리에서 바라볼 힘은 갖기 쉽지 않다. 바둑은 놀이. 놀이 속에 들어간 자, 자신을 잊고 내면의 긴장으로부터 멀어진다. 휴식을 취하도록 한 다음, 힘이 생길 때 돌아오도록 한다.
시인 김정림의 경험 또한 그랬다.
“하루 종일 굶고, 연거푸 엽차나 홀짝거리면서 바둑에 미쳤던 시절, 그 시절을 회상하면 나는 약간 히스테릭해지고, 우울해질 때가 많지만 한편으론 그 때 내 손에 바둑알이 쥐어지지 않았다면….”
그렇다. 삶이 휘청거릴 때 인간은 잠시나마 놀이로 들어가야 한다.
전쟁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근대화는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을 안겨준다. 삶의 터전을 잃고서 도시로 알알이 흩어지는 사람들. 현실은 무너진 질서다.
황폐한 들판에 선 인간은 착근(着根)이 필요하다. 인간이 질서 찾는 방식은 둘. 하나는 질서를 상정하고 현실을 그 질서의 투영으로 보는 것이다. 현실이 질서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느냐. 그것을 본다. 서양이 택한 운명으로 기독교의 세계관이 대표적이다.
바둑의 놀이성이 동양의 질서 되찾게 해동양은 다르다. 질서는 혼돈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태극은 한편으로 혼돈이다. 그로부터 둘(양의·兩儀), 넷(四象), 여덟(八象), 64괘가 나온다. 숫자는 질서 자체다. 한자문화에서 숫자를 나타내는 상형문자는 산가지를 하나하나 쌓은 것으로부터 왔다. 일(一), 이(二), 삼(三). 혼돈은 불쾌한 일면이 아니다. 생명의 원천이기에 우리는 가슴 깊이 받아들인다. 혼돈은 ‘천자문(千字文)’의 우주관인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의 내용이다.
‘천자문’의 관념은 주역 곤괘(坤卦) 상효(上爻)에서 왔다. 龍戰于野, 其血玄黃. 용이 들판에서 싸우니 그 피, 검고도 누렇다. 글자 하나하나가 은유다. 용은 형상이 없는 것. 그러므로 변화를 상징한다. 신뢰할 만하고 또 가장 오래된 주석인 문언전(文言傳)의 설명을 보자. “현황(玄黃)이라는 것은 천지가 뒤섞인 것이니, 하늘을 검다(玄) 하고 땅은 누렇다(黃) 말하자.” 음양이라 칭하든 천지라 부르든 이항(二項) 대립적인 것은 서로 뒤섞여 우주를 이룬다. 혈(血)은 한 몸임을 나타낸다. 천지는 이름만 이리 불리고 저리 불릴 뿐 실은 하나다. 하나는 곧 상대적인 것이 뒤섞인 거다.
바둑의 놀이성은 동양의 질서 찾기에 걸맞다. 첫수부터 모호한 반상은 혼돈과 다름없는 세계지만 포석을 하고 전략을 짜면서 질서를 형성해 간다.
기원의 속성도 다르지 않았다. 전국 바둑대회도 다르지 않았다. 사진을 보자. 도떼기시장 같은 혼돈이지만 생명력 넘치는 축제다. 어느 아마추어 대회를 가더라도 저런 풍경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기원은 그런 혼돈이 축약된 곳이었다.
60년대 많은 기원이 봄·가을로 바둑대회를 열곤 했다. 금반지·쌀가마니·주전자·공책 한 묶음…. 대회는 혼돈을 여는 잔치판이었다. 한데 모여 잔치마냥 대회를 치르고 승자에게 상품과 승급을 수여한다. 바둑은 단급(段級)이 있기에 가끔 사회적으로 정돈하지 않으면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소도시의 기원 주최 대회는 질서를 재편성하는 공물(供物) 체계였다. 대회가 끝난 밤 기객에겐 안온감이 찾아 든다. 대회를 통해 바둑 공동체를 일으키고 자신의 위치를 바로 잡았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질서를 잡아가는 것. 종교의 의례도 안팎의 논리는 같다.
어수선한 혼돈은 오히려 생명이었다. 그러므로 소외에 힘든 60~70년대 청년들은 누구나 되고 싶었다. 사진 속 현실이 되고 싶었다. 프로는 선망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관철동 한국기원을 오가며 삶을 지탱했다.
바둑평론가 이광구(59)의 묘사처럼 “한국기원 3층의 일반회원실은 문화의 소광장이다. 각양각색의 연령과 인물들이 이렇게 매일같이 모이는 곳도 없다. 수많은 인생행로가 제각기 뚜렷한 개성을 주장하며 간단없이 교차하고 있다. 교통의 지휘자가 따로 없어 매우 불규칙하고 무질서하지만….”
반상(盤上)의 향기] 왕한년 “천원은 태극 자리 … 1착의 가치는 논할 수 없다”
<11> 바둑의 기원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joongang.co.kr | 제391호 | 20140907 입력
1958년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왕두현(望都懸) 유(劉)장군의 묘(墓)에서 출토된 석제(石製) 바둑판. 현대와 달리 17줄 바둑판이다. |
바둑이란 무엇일까? 고래(古來)로부터의 질문이다. 만약 바둑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어떻게 두어야 할지도 알 것이다. 그 답을 찾는 마음이 3000년을 흘러왔다.
누군가 답을 찾았다. 글을 썼다.
“冬至後左旋 夏至後右旋 冬至逆三 成一七四 夏至順三 成九六三 冬至起坎 一而逆歷三宮 成七自七宮 逆歷三宮 成四 故一七四 夏至起離 九而順歷三宮 成三 … 奇門劍家曰 逆三大者 是也 …”
(동지 이후는 (해가) 왼쪽으로 돌고, 하지 이후에는 오른쪽으로 돌며…)
19세기 말 ‘기국해(碁局解)’의 일부다. 1964년인가 바둑 잡지 『기원(碁苑)』에 “해석이 어려우니 함께 연구해 봅시다”라는 취지로 게재되었다. 40여 년이 흐른 후 이 글은 또다시 월간 『바둑』에 실렸다.
무슨 내용일까. 절기(節氣)와 마방진 같은 숫자, 주역, 간지(干支), 병법 … 이런저런 것들이 뒤섞였다. 여러 가지 다른 체계를 잡다하게 섞어서 바둑의 절대적인 답을 찾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체계는 쉽게 하나로 모아질 수 없다. 모으면 오류가 도처에 발생한다. 그래서 아무도 해석 못했다. 정신도 초점도 없는 글이다.
밤하늘 닮은 중국 출토 석제 바둑판바둑의 역사 3000년. 갖가지 철학과 관념이 출몰했다. 마술적(magic)인 정신과 신화적인 이해, 합리적인 사고가 역사를 이뤘다. 바둑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해 천원(天元·바둑판 위의 정중앙에 자리)과 결부된 답은 오랜 기간 바둑을 수놓았다.
명말 청초 왕한년(汪漢年)은 국수(國手)였다. 그는 첫 수를 천원에 즐겨 두었다. “천원은 태극(太極)의 자리. 태극은 출발점이니 천원 1착은 그 가치를 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문학의 고전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원(元)은 시작”이라 했다.
기보 천문의 실험으로 도사쿠에 도전한 산테쓰(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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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일본 최초의 역인 정향력(貞享曆)을 만든 천문학자 야스이 산테쓰(安井算哲·1639~1715)는 바둑에도 일류였다. 그는 천문(天文)의 이치가 반상에도 살아 있으리라 가정했다. 1670년 본인방 도사쿠(道策·1645~1702)에게 천원 1착으로 도전했다.(기보)
당시 많은 기사들이 천원에 첫 수를 두곤 했다. 모두가 천문의 이치를 기대했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실험 정신이 왕성했다. 천문은 매혹적인 관념이었다. 바둑의 기원설(起源說) 중 하나가 천문설(天文說)이다. 천문 관측 도구로부터 바둑이 왔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자. 1958년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왕두현(望都懸) 유(劉)장군의 묘(墓)에서 출토된 석제(石製) 바둑판이다. 돌이 깨진 탓이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은하수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 같다. 화점 문양도 아름답다. 하나 부언하면 이 바둑판이 17줄이라는 점이다. 늦어도 당나라(618~907) 때엔 바둑판이 19줄이 됐다.
1933년 홋카이도의 지고쿠다니(地獄谷) 계곡 입구에서 우칭위안(앉은 사람)과 기타니가 기념촬영을 했다. 두 기사는 반상의 논리만으로 반상의 지평을 크게 여는 데 성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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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여름 중국의 천재 우칭위안(吳淸源·1914~)은 기타니 미노루(木谷實·1909~75) 5단과의 대국에서 천원에 1착을 두었다. 역사상 첫 번째 흉내 바둑이었다. 천원 1착 이후 63수까지 기타니를 따라 두었다. 난데없는 시도에 기타니는 당황했다. 대국장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이 세 사건만을 봐도 바둑이 신비와 탈 신비를 오가면서 3000년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시간적인 선후(先後)가 있는 건 아니다. 중국의 경우 20세기 초까지도 바둑엔 병법의 이치가 살아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병법엔 궤계(詭計)가 핵심이다. 소위 정보를 제한하는 것인데, 그와 달리 바둑은 정보를 완벽히 공개하는 게임이다.
눈을 돌려보자. 태극은 좋은 결과를 맺지 못했다. 왕한년은 철학의 이치가 구체적으로 세상에 살아 있으리라 믿었다. 그는 관념과 실체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천원=태극’설은 바둑의 자유와 모순된 것이었다. 만약 제1착을 천원으로 정해놓는다면 다른 자리는 종속될 수밖에 없다. 1착 이후 모든 착수의 자유를 제한하는 강제력을 가진다. 사고를 제한한다.
사고의 제한! 그것이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천원 1착이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이는 두 번째 사건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다. 태극 대신에 북두로 대치했을 뿐이다. ‘천원=북두’였다. 사고는 굳어지고 유연성은 사라진다. 당연히 실패한다. 실제로 산테쓰의 실험은 실패했다. 기보를 보면 수법이 딱딱하기 그지없다. 흑9는 당연히 A에 두어야 부드럽고 반상에 생기가 돈다. 큰소리쳤던 그는 다시는 천원에 1착을 두지 않았으며 천문학자의 길로 인생 항로를 바꿨다.
우칭위안의 천원 1착은 성공이었다. 덤이 없다면 흑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증거가 됐다. 1940년대 덤의 채택에 논리적인 근거가 됐다. 다른 세계의 투영이 아니라 자체 논리로부터 출발했기에 현실적이었다.
철학과 천문 모사한 왕한년과 산테쓰도가(道家) 철학에서 태극은 신화에서의 천지창조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 우주적 질서를 상징한다. 그런데 세상의 질서를 이끄는 관념은 의례(儀禮)에 속한다. 잠시 의례와 게임의 차이를 보자. 제의(祭儀) 같은 의례는 불평등한 세상을 균형으로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정당성을 제공한다. 왕조의 봉선(封禪) 의식이나 제사가 그런 것이다. 태극은 그런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상한다.
하지만 바둑은 게임. 게임은 우연과 사건에 복속된다. 비록 출발은 규칙이 있어 공정한 것이지만 과정과 결과는 사건과 불균형, 불평등으로 귀결된다. 간단히 말해 태극과 게임은 맞지 않는 대응이자 틀린 유추 관계에 속한다. 물론 태극을 상정함으로써 지적(知的) 차원의 만족은 얻는다. 우주를 축소했으니 말이다. 축소하면 갖고 놀 수 있다.
천지·천문·하늘과 같은 개념은 게임의 세상과는 맞지 않다. 바둑의 놀이성과 거리가 멀다. 그러기에 프로들은 철학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프로들은 게임의 세상에서 노는 사람들. 게임은 우연과 사건의 세상이지 구조로 답하는 세상이 아니다.
실력 13단으로 불린 도사쿠가 남긴 글에서도 신비나 어려운 철학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가 전부다. “상대의 세(勢)를 갈라 두어라.” “끊기면 문제 되나니 조심하라.”
철학과 천문의 단순 모사(模寫)에 그쳤지만 왕한년과 산테쓰는 바둑을 통제하려고 했다. 바둑에 의례를 도입함으로써 주술적인 행위를 한 것이다. 주술은 자연에 영향을 미치려는 행위. 삶이 풍성하게 보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건 잠깐이다.
유사(類似)함에 현혹되는 태도의 밑바닥엔 질서를 찾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요청이 있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C Levi-Strauss·1908~2009)는 “인간은 다른 건 다 참아도 무질서는 참지 못한다”고 했다. 질서를 찾는 방법으로 원시인들이 발견한 것은 토테미즘(totemism)이었다. 동·식물 등 자연을 이용해서 세상을 분류하고 질서를 수립했다. 초점은 토템이 아니다. 토템을 이용해 사회를 나누고 관계를 설정하는 조작이 핵심이다.
오행설(五行說)도 맥락은 다르지 않다. 유사와 대응, 매개항을 이용한 분류법을 사용해 체계를 세운 것이다. 주역의 설괘전(說卦傳)도 그런 것이다.
분류의 핵심 하나는 축소다. 인간과 사회를 우주 질서의 축소판으로 보는 견해는 어디에나 있었다.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로 보는 것은 한의학의 바탕이다. 서양도 다르지 않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B.C. 25 ~A.D. 42)는 많이 인용되는 철학자다. “창조물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 애정을 가진 신은 하늘을 시작으로 인간을 끝으로… 축소된 우주(a miniature heaven)로서의 인간을 만들었다.”
간단한 분류는 매혹적이다. 이미지 하나로 복잡한 문제를 해명할 수 있다. 정치도 그렇다. ‘음모론’에 갇히면 세상 모든 것을 ‘음모’ 틀 속에서 설명한다. 단순하지만 스스로는 안다고 생각해 만족한다. 흑백은 회색보다 훨씬 분간하기 쉽다. 맑은 눈망울 가진 저개발 국가의 아이를 보고 그 사회를 평화로 채색하는 태도도 그런 것이다.
신비스런 현상은 있어도 신비는 없다돌아보면 ‘기국해’는 버젓이 책에도 실리고 칭송도 받았다. 글에 담긴 주술적 요소는 무시되었다. 위안은 있었다. “우린 모른다. 옛사람은 뭔가 알았을 것이다.”
옛사람은 성인(=진리)의 다른 얼굴. 뭔지는 몰라도 손 안에 열쇠 하나는 쥐고 있겠다는 심사다.
하지만 신비스런 현상은 있어도 신비는 없다. 그 점을 이해 못했다. 얻으려 하는 것이 손에 쉽게 잡히지 않고, 또 그것이 오랜 역사를 견뎌온 것이라면 그 대상엔 신비가 서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바둑에서도 권위 없이는 못 견디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다. 바둑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문명의 역사 길어야 1만 년. 어느 분야든 깊게 알면 신비스런 현상과 신비를 구별할 수 있지만, 약간 맛보면 신비에 넘어가기 쉬운 단계다. 그럴 때 문제는 이것이다. 인생 유한한데, 대체 얼마나 던져야 제대로 알게 될 것인가. 인생 짧은데, 신비의 권위를 인정하면 뭐가 문제인가.
[반상(盤上)의 향기] 일본의 절해고도에서 고균을 지켜준 건 바둑
<10> 고균 김옥균과 바둑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joongang.co.kr | 제388호 | 20140817 입력
1894년 김옥균이 죽기 사흘 전인 3월 25일 친구 미야케에게 선물한 바둑판(왼쪽)의 덮개 안 쪽에 쓰여진 글. [사진 한국기원] |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1851~94)이 본인방(本因坊) 슈에이(秀榮·1852~1907)를 방문했다. “이거 원, 밥상이 없어서 불편해 큰일이오. 뭔가 쓸 만한 것이 있으면 빌려 주구려.” 슈에이 선생은 “보다시피 나도 마찬가지요. 좀 깨끗지는 않지만 바둑판이 하나 여유가 있으니 이거라도 가지고 가구려”라고 말한 뒤 집안에서 유일하게 책상 구실을 하는 부목반(浮木盤)을 가리켰다. 김옥균은 아주 기뻐하며, “이거라면 때로 바둑도 둘 수 있겠다”면서 하숙집으로 가지고 갔다.
슈에이의 애제자 가리가네 준이치(雁金準一·1879~1959) 9단이 회고한 이야기다. (안영이,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 2005, p. 89)
고균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갑신정변(甲申政變·1884)의 주역으로 3일천하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두 번의 유배 등 험한 망명 생활을 거친 후 상하이(上海)에서 홍종우(1854~1913)에게 암살 당해 삶의 막을 내렸다.
슈에이는 누군가.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幕府) 체제가 1860년대에 끝났을 때 바둑계 4대 가문은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었다. 세태는 격변했다. 바둑 같은 기예(技藝)에 눈 둘 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본인방 가문은 두 번의 화재마저 있었던 터라 교습용 바둑판만 몇 개 남아 있을 정도였다. 가문을 상징하던 ‘부목반’이 식탁이 되는 형편이었다. 슈에이는 그런 때의 가문 적장자였다.
부목반은 일본 바둑 권위의 상징이었다. 1570년경 전국시대의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82)가 산을 따라 오르던 중 깊은 소(沼)에 백룡(白龍)이 산다는 말을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용이 아니라 폭포 아래에 큰 나무둥치가 떠다니고(浮木) 있었다. 그 나무를 가져다가 바둑판을 두 개 만들어 하나는 자신이 갖고 다른 하나는 초대 본인방 산샤(算砂·1559~1623)에게 주었다. 이 바둑판이 본인방 가문의 보물이 되었다. 권위가 되었다. 권위는 보물보다 귀하다. 18대 본인방 슈호(秀甫·1838~86)는 자신이 가문을 잇게 되자 무엇보다 먼저 부목반을 끌어안고 춤을 췄다.
하지만 바둑판으로 쓰기에는 부목반이 좋은 나무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가리가네 9단도 “듣기로는 단단한 나무”라고 말했다. 바둑판은 무른 것이 좋다. 돌을 놓을 때 나무가 충격을 흡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손가락에 금속성 충격이 전해지지 않아야 한다. 얼굴이 곰보처럼 되어야 좋은 바둑판이라 부르는 이유다. 김옥균이 받은 부목반은 그가 죽은 후 종적이 묘연했다.
고균(古筠) 김옥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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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단배로 20여일 걸리는 외딴 섬의 우정무너지고 떠내려가는 상황에서 고균과 슈에이는 만났다.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 도요마 미쓰루(頭山滿·1855-1944)가 바둑 모임을 열어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다. 두 사람은 의기 투합해 곧 친형제보다 더한 사이가 되었다. 우정이 어느 정도였던가. 고균이 1886~88년 오가사와라(小笠原) 섬에 유배되었을 때엔 슈에이 홀로 찾아가 3개월이나 묵을 정도였다. 오가사와라 섬은 30여 개의 작은 화산섬으로 이뤄진 제도(諸島)로 무인도와 다르지 않았다. 1862년 일본 이주민이 불과 38명이었다. 영·미와 영토 갈등을 겪은 후 1876년에야 비로소 일본에 속하게 되었고 1880년에 도쿄 관할이 되었다.
슈코마루(秀鄕丸) 호를 타고 21일 후 도착한 섬에서의 유배 생활은 형벌이었다. 일본에서 태평양 방향으로 1100km 떨어진 곳. 연평균 기온 22.6도. 비 내리는 날은 연중 190여 일을 넘었다. 아열대 지역으로 건강에 매우 나쁜 환경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피부가 곱고 희다 하여 이름을 옥균(玉均)이라 했던 고균.
움막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 망망대해, 돌아봐도 망망대해. 시간이 지나면서 섬 아이들에게 바둑도 가르치고 서예도 가르쳤다. 뒷날 상하이에서 죽던 날까지 고균을 돕던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는 섬에서 만난 9살 소년이었다. 그런 섬에 20여 일 돛단배를 타고 슈에이는 고균을 찾아갔다. 안도요지(安藤豊次)가 쓴 『좌은담총(坐隱談叢)』(1904) 제2권 ‘본인방 슈에이’ 편에 글이 하나 있다. 고균이 슈에이와 헤어질 때 써준 글이다.
본인방 슈에이는 내 스승이요 벗이다. 바둑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의(義)에 있어 벗이다. (本因坊秀榮君我師也我友也非獨碁道之師焉以義而友焉)
병술년(1880) 가을 남해 오가사와라 섬에 버려져 절해고도의 생활이 비할 바가 없을 정도로 괴롭다는 것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바다. (余于丙戌秋被逐南海小笠原島其箙寄孤絶幾無與比世人亦共知也)
(注: 책에는 比가 此로 되어 있었다. ‘箙’은 있다면 말이 잘 안 된다.)
이듬해 정해년 봄 군(君)이 문득 이곳에 왔다. 내 홀로 궁벽한 섬에 있음을 염려한 탓이다. (其翌年丁亥春君忽至焉爲念我孤寄窮島也)
그 남다른 의기를 어찌 나만 느끼겠는가. 3개월을 머물렀다. (其出人氣義豈獨在我而有感而已哉爲留三個月)
(注: 책에는 人을 入으로 썼다.)
있는 곳이 난산(亂山) 속이라 종일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날마다 흙을 옮기고 풀을 베어 아담한 정원을 하나 만들었으니 이는 군과 나의 소일거리였다. (余之所寓在于亂山中於日無人見每日只事搬土鋤草小築一庭園卽君與吾消笑法)
이제 초여름에 배가 다시 왔고 군이 경(京)에 돌아가려 하니, 이에 글 써두어 장차 손잡고 웃을 일 하나 만들어두노라. (夏初船至君將歸京爲書以贈留作異日幄手一笑之資)
의(義)란 무엇인가. 불우할 때의 정(情)이다. 뒷날 이 섬에는 유길준(1856~1914)도 1년 정도 유배를 왔다. 어디선가 이런 글 읽었다. 유길준이 고균이 만든 정원에서 고균을 생각해 쓴 글이 『구당시초(矩堂詩鈔)』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정원의 화초는 주인 떠난 줄도 모르고 푸르기만 하구나. 그 시절 봄인 듯. (庭草不知人已去 靑靑猶似舊時春)”
기보 슈에이(백)와 고균의 대국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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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에 남긴 글에선 단아한 기품고균은 빈민에게 지급하는 구휼금(救恤金)으로 생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탕한 생활로도 유명했다. 돈은 있으면 있는 대로 썼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다. 여자도 많아 적어도 7명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파격(破格)과 솔직 담백한 성품에 극한에 몰린 신세였으니 당연하다 해도 된다. 후원자도 있었고 실망과 반목도 있었다.
하지만 단아한 인품도 갖추었으리라 짐작된다. 글의 품격도 그렇지만 바둑도 그렇다. 슈에이와 고균의 대국보(작은 사진)를 보자. 1886년 2월 20일에 둔 것으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기보다. 칫수는 6점. 흑1~3은 공격과 수비를 겸한 깔끔한 수법. 흑9~15는 전국적 균형을 유지하는 맑은 대국관. 요즘으로 치면 강한 1급 수준이다.
정계의 사변이야 무상한 것이고 삶도 그러하지만 품격은 남는다. 사진을 보자. 바둑판 덮개 안쪽에 남은 고균의 글씨다. 고균은 덮개에 이 글을 쓰고 나서 사흘 후 죽었다.
이 바둑판은 내가 전에 무라키조의 바둑판 가게에서 구입했다. (此局余曾從村木町棋局店購得)
처음 봤을 땐 때 묻고 흠결 있어 가치가 별로 없었다. (初見黦黑歪缺價値爲瓦礫)
집에 돌아와 깎고 새롭게 다듬고 나니(歸而剗新之)
비록 극상품은 아닐지라도 중등의 가장 좋은 품질인 것은 분명하다. 틀림없다. (雖不入極佳材其爲中等之最佳品明矣)
내 벗 미야케(三宅)에게 주어 문방의 상서롭고 좋은 일로 삼게 한다. (遂留贈三宅我友用爲文房中吉羊善事)
갑오년 2월 고균이, 훌쩍 떠나면서 쓰다. (甲午仲春日古筠 頭陀志)
곤궁 속에도 갑신년의 희망 잃지 않아고균은 실력자 도요마의 돈으로 3년여 동안 도쿄 유라쿠초(有樂町)에서 흥청망청 방탕한 생활도 했다. 빈민 같은 삶도 살았다. 유배와 바둑과 술이 이어졌다. 그래저래 일본에서 10년을 살았다. 그리곤 상하이에서 죽었다. 혁명가로선 실패한 삶이었을까.
그에 대해 역사 해석은 대체로 하나인 듯하다. 1894년 암살로 그는 실패한 인물로 끝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의문이다. 고균은 방탕한 생활 속에서도 뜻은 넓게 가졌으며, 곤궁 속에서도 갑신년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 청나라 정치가 이홍장(李鴻章·1823~1901)을 만나러 위험을 무릅쓰고 상하이로 떠나는 결단을 내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바다.
고균의 죽음을 역사적 사실(事實)로만 바라본다면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적 주술(呪術)로 작용하여 사실(史實)로 남게 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균이 죽게됨으로써 갑신정변이 비로소 역사적 의미를 ‘풍성하게’ 갖게 되었다는, 그것.
삶과 죽음·의미·역사. 이 모든 것은 신(神)과 통한다. 우리가 신에게 접근하는 방식 중 하나는 공물(供物)이다. 신과 인간은 별개의 존재. 만날 필요가 있다. 두 존재를 하나의 연속선 위에 놓이게 하는 방식, 그것이 공물이다. 제사가 그런 것이고, 십자가의 숙명이 그렇다. 공물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신과 접속한다. 신과의 접속 없이 역사적 의미를 구하는 건 쉽지 않다.
접속 다음에는 어찌 하는가. 공물 희생(犧牲) 의식을 치른다. 신은 이제 인간에게 책임을 갖게 된다. 그것이 은총. 인간은 신에게 권리를 가진다. 신에 대한 권리 중에서 큰 것은 역사에 대한 희망. 사실(事實)이 사실(史實)이 되는 순간이다. 고균의 죽음으로 갑신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한 이유다. 갑신정변엔 고균 외에도 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 주역이 많았음에도 고균이 곧 정변의 이미지로 남은 배경이다.
그런 길을 고균은 떠났다. 슈에이와의 재회야 언제 다시 기약하리.
반상엔 한·중 문화 차 없어 … 手談 나누며 무언의 외교
서울서 열린 제2회 한·중 의회 바둑교류전
문용직 객원기자 moonro@joongang.co.kr | 제386호 | 20140803 입력
1일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제2회 한·중 의원 바둑교류전에서 원유철 의원(오른쪽·국회기우회 회장)과 레이샹 의원이 대국하고 있다. 한국 의원들이 연이틀 7대3으로 승리했다. 김춘식 기자 |
당(唐) 현종(玄宗)은 바둑을 즐겼다. 남겨진 기보로 보면 5~6급 정도 실력. 기보는 물론 위작(僞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을 즐긴 건 사실인 듯하다. 하루는 바둑을 두는데 현종이 불리했다. 안색도 변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양귀비가 고양이를 날렸다. 품에 안고 있던 고양이를 짐짓 놓친 척했던 것이다. 고양이는 바둑판을 쓸어버리고 승패는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귀비는 바둑판만 쳐다보는 현종을 시샘했을지 모르겠다. 현종이 귀비로부터 도피할 유일한 장소가 바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둑과 정치, 같은가 다른가바둑과 정치. 자주 등장하는 단어 조합이다. 지난달엔 시진핑(習近平·61) 중국 국가주석이 청와대 만찬장에서 이창호(39) 국수의 손을 잡고 반갑게 흔들었다. 며칠 후엔 박근혜(62)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귀한 바둑알과 통을 선물했다. 그보다 앞서 지난해엔 시 주석이 중국을 방문한 박 대통령에게 창하오(常昊·38) 9단을 소개하면서 중국 바둑을 은근히 자랑했다.
1~2일엔 한국 국회와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의 제2회 바둑교류전이 열렸다. 정협은 중국 공산당을 비롯, 각 정파의 대표, 군대표와 지구대표, 소수민족 대표 등으로 구성된 범국가적인 최고 국정자문회의다.
한국 의원 10명과 중국 의원 10명이 국회 ‘사랑재’에서 가린 승부에서 한국이 연이틀 7대 3으로 이겼다. 지난해 베이징(北京)에서 제1회 대회를 치른 후 두 번째다. 바둑 두면서 정치를 한다니, 일견 괜찮을 듯도 하고 “무슨 관계지” 하고 의문을 품을 만도 하다.
바둑과 정치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자주 만나는 이유가 뭘까. 속설이 많다. 바둑 두는 자 궤계(詭計)에 밝아 정치에 능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그러나 세상사 상식은 대부분 부정확하다. 바둑 속에 정치의 이치가 들어있다면 현재 한국의 프로기사 290명 중 국회의원 하나 없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다. 정치학 교수들 중 전문기사 한 명 없다는 것도 그렇다.
바둑과 정치를 구별하는 변수 하나는 정보다. 바둑판 위에서는 어떠한 정보도 숨겨지지 않는다. ‘완벽한 정보’ 게임이다.
하지만 정치에는 정보가 불완전하게 주어진다. 잠시 병법을 생각해보자. 병법의 요점 하나는 궤계인데 궤계는 상대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주는 행위다. 바둑판 위와 전혀 다르다. 바둑판 위에 돌 하나 놓은 후 상대에게 “너는 이 돌 보지 마라” 할 수는 없다.
정치는 병법을 포함하며 또 정보의 비대칭성이 훨씬 복잡한 세계다. 정보를 국민과 공유한다면 자유민주주의가 되겠고 독점한다면 독재가 되겠다. 정보가 곧 권력이다.
의원 면담 아닌 구체적 문화교류한·중 의회 교류전으로 주제를 넘겨보자. 바둑 두는 건 즐겁다. 하지만 한·중 의원들이 굳이 바둑 두는 재미로 만날 리는 없겠다. 실력이 늘고 싶다면 고수를 청하면 될 것이요, 즐기고 싶다면 두면 되지 굳이 비행기 타고 오갈 일은 없다. 그럼 뭘까. 바둑도 즐기고 한·중 의원 외교도 하자, 그것이 답이다. 그래도 의문이다. 외교야 하면 되지, 바둑이 매개가 돼야만 하나.
국회기우회 회장인 원유철(52) 의원은 “국가 지도자들의 면담 형태가 아닌 구체적인 문화교류”라면서 상징성을 강조했다. “70년대 핑퐁외교가 미·중 데탕트를 가져왔죠. 네트 위를 오가는 탁구공이 곧 이념을 넘어선다는 메시지 아닙니까. 바둑은 수담(手談)이니 말 없는 대화, 진실한 대화죠.”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원 의원은 “바둑 한 판 둔 다음엔 십년지기(十年知己)처럼 서로 마음을 털어놓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런가. 바둑을 두면 마음의 벽을 허물게 되는가. 답이 있다. 잠재의식 속 부정적인 그림자를 반상에 쏟아부어 던져버리기 때문이다.
유명한 명상(瞑想) 논리가 있다. 화가 날 때 종이를 앞에 두라. 그 위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을 그려보라. 그러면 종이 위로 마음이 이전(移轉)된다. 종이를 찢어서 던져버려라. 마음은 구체적인 것. 숨겨진 마음은 숲 속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나뭇잎, 즉 카를 융(Carl G. Jung)이 말한 ‘그림자’와 다름이 없다. 습기에 젖어 있다. 햇빛을 비추라. 습기 찬 나뭇잎이 사라지리라. 억눌린 감정의 뭉치가 사라지는 이치, 그와 같다.
정쟁하며 타협 끌어낼 수 있는 게 바둑바둑은 상징성이 큰 문화 텍스트다. 시 주석은 지난해와 올해 바둑을 몇 번 언급했고 언론은 보도했다. 변화가 일어났다. 그에게 지자(智者)라는 이미지가 새겨졌다. 왜 그런가. 바둑의 천변만화(千變萬化) 속성 때문에 정치는 바둑에 비유되곤 했다. 수담은 무위(無爲)로 세상 다루는 노장(老莊)의 지혜와 비슷하다. 그런 문화적 이미지가 시 주석에 투사되었다.
김종필(88)은 바둑을 좋아했다. 5급이었다. 정치적 외유(外遊) 등 격동 속에서도 언제나 가까이 했다. 68년 그는 낙마했다. 당(黨) 권력을 잃었다. 6월 2일 공화당 탈당계를 제출한 후 그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해운대 극동호텔에서 구태회(91) 의원과 한가롭게 바둑을 두었다. 그 장면이 기자의 눈에 잡혔다.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그의 정치적 좌절이 국민의 눈에 빨리듯이 들어왔다. 바둑의 풍운조화, 좌절과 역경… 모든 것이 오버랩됐다. 국민은 알았다. “아, 정치란 저런 거구나.”
바둑의 상징을 통해 정치가 이해됐다. 정치란 복잡하구나. 인생사도 정치도 바둑도 다 비슷비슷하구나. 실제로 정치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정치란 보듬어야 할 인생처럼 고운 것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정쟁(政爭)은 해도 좋다. 다만 여야는 바둑이라도 두면서 정쟁을 해야 한다.
놀이를 모르는 정치인, 엄격한 군자 타입 정치인은 곤란하다. 도덕군자는 대개 음험한 그림자를 의식 속에 갈무리한 사람들이다. 그래선 안 된다. 술도 먹고 잡담도 해서 탁한 내면을 풀어 던져야 한다. 바둑판에서 대판 싸워 쓸모 없는 증오는 던져버려야 한다.
서울 관철동 한국기원에서 바둑을 즐겼던 신상우(1937~2012) 의원은 타협을 이끌어내는 데 능했다. 15~16대 국회 때 한·일 의원 바둑대회도 열곤 했다. 하지만 17대엔 바둑이 사라졌다. 바둑 두던 의원들이 낙선했기 때문이다. 짐작건대 조사해보면 17대엔 싸구려 정쟁이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윤보선(1897~1990) 전 대통령의 집은 오가는 길목이 좋았다. 많은 정치인이 오가다가 들렀고 술과 차가 뒤따랐다. 바둑 두는 시간엔 대화가 있어 정보도 부드럽게 모여 들었다. 윤보선이 정치적 힘을 기르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국회 원내총무 제도도 그런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다. 사랑방 연락책에서 총무로 제도화되었다.
정치인은 바둑 좀 둘 줄 알아야 한다. 바둑이 아니어도 좋다.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하나도 갖지 못한다면 웃음 없는 정치인과 다름이 없다. 정치인은 상징으로 국민에게 어필하는 사람들. 상징적 이미지도 갖고 놀 수 없다면 대체 어떤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최근 정치의 상징적 화두 하나는 상생(相生)이다. 자연과의 상생, 남북 간의 상생…. 이번 대회에서 만난 유인태(66) 의원은 “바둑이란 게 정치와 비슷하다. 변화가 끊임없다는 것이 그렇다. 승리를 원하지만 상생을 전제한 승리라는 점도 그렇다”고 했다. 유 의원은 잘 둔다. 프로에게 넉 점 접히는 실력이다.
“바둑 두는 의원 대부분 친화력 좋아”중국인 린하이펑(林海峯·72) 9단이 1960년대에 일본인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에게 도전할 때다. 그는 묵묵하고 태산 같은 태도로 사카다의 귀수·묘수 세계를 유장하게 대처했다. 일본 바둑계는 ‘대륙성 짙은 바둑’이라면서 민족성으로 그의 반상 세계를 풀어냈다.
중국은 스케일 큰 문화로 유명하다. 의원들의 태도와 바둑을 지켜보았다. 과연 그런 문화적 차이가 반상에서도 드러날 것인가.
이인제(66) 의원은 신중했다. 장고를 거듭해 첫날 가장 늦게 대국을 끝냈다. 김기선(62) 의원은 아주 잘 닦인 수준급. 프로에게 두 점 치수였다. 유인태 의원은 대범한 기풍이었다. 좌우 큰 규모로 진(陣)을 펼친 다음 상대를 크게 공격했다.
중국의 쑨화이산(孫懷山·62) 의원은 실력은 약했지만 속기가 인상적이었다. 창전밍(常振明·58) 의원은 79년 전국대회에서 녜웨이핑(聶衛平·62) 9단, 천주더(陳祖德·1944~2012) 9단에 이어 3위에 입상한 실력이니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속기도 있었고 장고도 있었다. 실리와 세력은 서로서로 오갔다. 세력과 스케일은 다른 것이었다.
두 나라 의원들 간에 문화적 차이는 없었다. 멀리 내다보는 것을 ‘스케일 큰 안목’이라고 한다면, 미래를 내다보고 현재에 일희일비 않는 것. 사소한 문화적 갈등에 얽매이지 않는 것. 그것이 큰 스케일이다.
그러니 한·중 의원들 간에 문화적 차이가 반상엔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단지 반상을 얼마나 넓고 멀리 보느냐. 그것이 초점이다. 정치에서도 그것이 요점이다. 함께 내한한 중국기원 류쓰밍(劉思明·60) 원장이 “정치인들은 넓은 시야를 갖는 편”이라며 “바둑 두는 의원은 대부분이 친화력이 큰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렇겠다. 정치는 친화력이다. 너와 내가 다르니 드넓은 중국에는 서로 공존하는 기술이 더욱 요긴할 터다.
한·중 의원 바둑대회 참가자
▶한국
김기선·김민기·김성찬·노영민·문병호·박상은·설훈·오제세·원유철·이인제·유인태·정우택·최규성
▶중국
궁진화(龔錦華)·두잉(杜鹰)·레이샹(雷翔)·리잉제(李英杰)·쑨화이산(孫懷山)·옌중추(閆仲秋)·창전밍(常振明)·탕융(湯涌)·펑쉐펑(彭雪峰)·황젠추(黃建初)
|Opinion| | 제 385 호 2014-07-27 |
|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 |
|Opinion| | 제 382 호 2014-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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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 제 379 호 2014-0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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