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바둑 기념관은 ‘제1회 조훈현 배 전국학생바둑대회’
가 열린 영암 실내체육관에서 차로 3분 거리
에 있다.
2017년 11월에,
개관한 [조훈현 바둑기념관] 앞에는 조훈현9단이
평소에 좋아하는 ‘無心’이라는 글귀가 큰돌에
새겨져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니,
장엄한 월출山 사진과 얼마 전 상영되었던
영화 ‘승부’의 주인공 이병헌과 조훈현 국수
의 사진이 일행을 안내한다.
조훈현 국수의 본향, 영암.
⌜대한민국, 바둑을 대표하는 절대 고수,
한국바둑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인 조훈현
의 집안은 대대로 영암에서 살아왔다.
조상 대대로 태를 묻은 월출산 기슭에 위치
한 마을, 영암읍 회문리.」
1962년 만9살에,
입단한 조훈현 9단은,
⌜조남철 9단의 권유로 혈혈단신 열 살
나이에 홀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부모님의 벌이만으로는 유학비용을 댈
수 없어 조선일보에서 조훈현의 항공료
를 지원해주는 등 지인들의 도움을받아
유학길에 오른다. 소년 조훈현과
동행한 이는 재일교포 박순조 씨였다.
그때 만해도 조남철을 필두로 한국의
기사들이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되면거의
무조건 기다니 미노루 9단의 문하로 들
어가는 것이 관례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기타니 9단도 조훈현도 당
연히 관례에 따라 자신의 도장에 들어올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유학길의 안내자는 세고에 겐사쿠
선생의 인품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
고 소년 조훈현을 세고에 겐사쿠 선생에
게 데려갔다.」
고독한 승부사, 운명의 시작.
⌜당시 세고에 겐사쿠는 워낙 연로한
탓에 도장을 운영하고 있지도 않았고
내제자를 두지도 않았다. 처음엔
김희운 씨가 세고에 9단에게 조훈현의
입문을 청하자 선생은 고령을 이유로
거절했었다.
그랬던 세고에 선생이 유달리 눈빛이
총명해 보이는 조훈현을 보자마자 대뜸
바둑판을 꺼내어 기량을 보고 싶어했다.
석 점을 깔고 흑을 쥔 소년은 시작부터
백말을 협공하고 코너로 몰아붙여 단숨
에 승기를 포착해 나갔다.
세고에 9단은 패배를 인정 하며 두점
치수로 재대국을 주문했다. 그들의 승
부를 옆에서 지켜보던 관계자들도 세고
에 9단의 말에 깜짝 놀랐다.
엄격한 선생의 지도기는 1년에 한 판
둘까 말까 할 만큼 대국에 인색했던 고
수였던 까닭이다. 그렇게 이어진
제2국에서 한 점을 덜 놓고도 소년 조훈
현은 특유의 속기로 노인을 매료시켰다.
두 판 내리 연속으로 소년의 승리였고,
세고에는 소년을 내제자로 삼기로 했다.
뒷날 세고에 선생은 주변 바둑계 인사와
지인들에게 “이 아이는 오늘부터 내가 죽
는날까지 데리고 있겠다”는 결심을 밝혔
다고 한다.
조훈현,
소년의 기재가 얼마나 출중했는
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랄 수 있다.
가르침과 정신.
⌜어린 조훈현이 세고에 선생 문하에
서 마당쇠처럼 마당도 쓸고 소소한
심부름을 하며 지낼때, 같은 시기 기
타니 도장에는 여덟살짜리 꼬마 조치
훈이 입문해 수련을 쌓고 있었다.
기타니 도장에는 많은 바둑 엘리트
들이 있었고 조치훈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도 바둑을 빠르게 습득해 가는
중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스승의
유유자적한 가르침을 받는 조훈현을
바라보며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애가
탔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아주 정중한
항의의 뜻을 담은 편지를 일본으로 보
냈다. 그러자 얼마 안 가서
세고에 선생은 그의 지도 철학이 담긴
정중하고 간결한 답장을 보내왔다」
세고에 겐사쿠 선생의,
첫 번째 제자 일본인.
하시모토 우타로(1907~1994)
일본 내에서는 비중이 큰 기사로
오사카 관서기원의 창립자이다.
두 번째 제자 중국인.
기성(棋聖)우칭위안(吳淸源1914~2014)
근대 바둑의 틀을 완전히 바꿔
버린 혁명가이자, 현대 바둑의
창조자이다.
중.일 전쟁 중 양국이 대립한
시기에 주위의 시선과 압력을 뒤로
하고, 중국인 우칭위안(오청원)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세 번째 제자 한국인.
조훈현(1953~)
우칭위안 이후 30년 만에 받아
들인 제자가 조훈현이다.
한국 바둑의 위상을 드높이고
세계 제패 신화를 이뤘다.
그러고 보면,
세고에 겐사쿠 선생은, 동양 3개국의
천재 기사를 모두 길러낸 스승이 된다.
국경을,
초월하여 이다지도 복이 많은 스승이
또 있을까 싶다.
한국에서,
입단을 하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기원
에서 다시 입단한 ‘초단 증’이 전시되
어 있다.
두 나라에서,
프로로 입단하는 기록도 또 있을까.
후지사와 히데유키.
⌜흔히 ‘후지사와 슈코’로 불린다.
일본 최대 기전인 기성전에서 당대
최강의 도전자들을 맞아 6연패를 달성
하며 ‘명예 기성’ 칭호를 받았고,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쟁쟁한 후배들을 상대해
전혀 밀리지 않는모습으로 ‘괴물’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1992년 67세의 나이로 왕좌전을
획득, 최고령 타이틀 기록을 세웠다.
일본,
최대 기전인 기성전에서 1년에 4판만
이기면 된다던 그 ‘후지사와’ 선생이다.
실전 바둑 스승.
⌜세계 바둑계에 기인이자 자유인으로
불린 후지사와는 ‘오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 준다’며 제자들을 거침없이 받아
들였다.
그런이유로 후지사와 문하에는 당대
최고의 신예들이 있었고 조훈현은 그
곳에서 자유분방하고 시원시원한 후지
사와의 각별한 애정을 받았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제일의
속기파이자 싸움 바둑으로 매섭게 몰
아 붙여 뚝딱 한판을 해치우는 실전바
둑의 대가로 불렸다.
조훈현의 제비라는 별명은 실전바둑
스승 후지사와 슈코를 따라다니며 두
었던 수많은 속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훗날 조훈현은 “사실 세고에 선생님
으로부터는 바둑을 많이 배웠다는 생
각이 들지 않습니다.
‘바둑의 도(道)’랄까, ’사람의 도리’랄
까, 그런 정신적인 것을 배웠다고 할수
있습니다.
진짜 피와 살이 튀는 실전바둑은 후
지사와 선생님에게 배웠습니다.”라고
고백 한다.
현,
일본 여류프로 1인자 후지사와 리나
가 그, 후지사와 슈코 선생의 손녀다.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1963년,
바둑유학으로 도일한 조훈현 사범은
1972년 병역문제로 귀국하여, 일본
기원의 5단을 한국기원에서 그대로
인정받는다.
1974년,
귀국한 후, 최고위에서 첫 우승을
따낸다.
그,
질주는 멈출 줄을 모르고,
1980년 9관왕.
1982년 10관왕.
1986년 11관왕.
3번에 걸쳐 전관왕을 차지한다.
전관왕할 때,
종로 관철동 한국기원 일반실에서
TV로 지켜보았는데, 어느새 江山
이 4번이나 바뀌었구나.
참,
세월도 빠르지.
1988년.
대만의 갑부 응창기씨가 4년마다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응씨배]를
연다고 발표한다.
당시만해도,
바둑의 변방이었던 한국은 조훈현
9단 1명만 초청한다.
그,
열악한 환경을 뚫고 중국의 섭위평
9단을 결승 5번기에서 이겨 우승을
하였다.
TV 생방송으로,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장하다
曺薰鉉’ 현수막을 두르고 한 카퍼레
이드는 지금도 짜릿하다.
초대,
응씨배 우승컵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한없이 자랑스럽다.
응씨배,
우승을 기점으로 지금은 없어진
후지쯔배, 동양증권배를 거머쥐
어 90년대 세계대회 그랜드슬램
의 업적을 쌓았다.
‘승부에서는
실력보다는
기백과 자신감의 차이,
압박감을 이겨내는
담력과 집중력의
차이가 승부를 가른다.’
바둑 공부하는 이들은, 조훈현
9단의 이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기념관에는,
조훈현 9단이 일본 지인에게 선
사 받았다는, 수령이 1,500년으
로 추정되는 바둑판(일본 야쿠시만
산, 스기목제 바둑판)이 진열되어 있다.
‘고수는,
날마다 복기한다’란 동상 앞에서
길이 남을 기념사진을 남겼다.
‘승부의 세계에서
나이와 체력은 핑계가 될 수 없다.
나이 때문에 체력 때문에
질 수밖에 없다고
인정해 버리는 순간
승부사로서의 인생은 끝난다’
시니어들이여,
깨어나라!
나이 먹다보니,
깜빡해서 졌다는
핑계는 이제는 정중히
거두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