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6대 임금 인조(14년,1636)가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바꾸자는 후금(후,청나라)의 요구를 물리
치자, 청태종은 이윽고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70년대 말쯤, 남한산성에서 필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청나라에게 항거
하다가 항복을 선언하고 당시 한강 나루터였던
삼전도로 끌려나온다.
지금의 석촌호수 자리
끌려 나온 인조는 청태종 앞에서 군신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에 찧는 것을
세 번 하는 의식.
청태종이 항복의식에 집착한 이유는 그 동안의
조선과 청의 관계가 형제관계였다면 이후로는
군신관계로 전환되었음을 확실하게 못 박고 싶
어 했기 때문이다.
청태종은 삼배구고두례 후 곧바로 인조를 단상
위로 올라오게 함으로써 한 나라의 왕으로 예의
를 해 주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치욕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 가장 최악의 굴욕인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의 하루는,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병자호란 후 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태
종은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7년(1639)에 삼전도비를 세웠다.
석천호수 4거리에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
삼전도비에 새겨진 내용은 조선이 청나라와의
약속을 먼저 어겼지만 청태종이 그런 조선을 너
그러운 은혜로 보살피고 항복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삼전도비의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
功德碑)이며 이러한 치욕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로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용 모양으로 장식했다.
비석 옆에는 작은 크기의 받침돌이 하
나 남아있는데 이는 더 큰 비석을 세우
라는 청의 요구 때문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할아버지: 손자야, 여기가 조선 인조왕이 청나
라 청태종한테 ‘삼배구고두례’를 한
곳이야.
손자 : (머리를 땅에 대는 흉내를 내며) 이렇
게 아홉 번 절했데요.
삼전도비 앞에 선 손자.
녹음 가득한 계절, 옅은 여름빛이 선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