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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색불루 단군의 녹산 아사달 문화
b.c.1289년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이 서북 땅을 차지하고 귀방(鬼方)을 멸망시키고 우현왕 두막루(右賢王 豆莫婁)라고 불렀다. 이때 상장 서우여(徐于餘)가 탕지산의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암살하였다. b.c.1286년 21세 단군 소태(蘇台)는 상장 서우여에게 양위하고저 하였으나 고등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을 세습하고, 부여신궁(夫餘新宮)에서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서우여가 패퇴하고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도 전사하고, 단군 소태는 은거하였다. b.c. 1285년 색불루는 녹산(鹿山)에 수도를 정하고 아사달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때는 진한의 단군도 없고 마한도 없고 번한도 없었다. 오직 색불루 혼자였다. 색불루의 녹산(鹿山)은 노로아호산(奴魯兒虎山) 산맥이며, 그 끝자락에 백록산도 있다. 노로아호산 산맥에서 발원하는 대릉하(大凌河)의 상류인 조양시(朝陽市) 건평현(建平縣) 일대가 녹산 아사달이다. 건평현의 서쪽 녕성현(寧城縣)과 남쪽 객좌현(客左縣), 동쪽 조양시(朝陽市)에서 발굴된 청동검이 무려 80 자루에 이르는데 이는 이제까지 동북방에서 발견된 청동검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것이다. 한반도나 길림성은 통털어서 각각 청동검 7자루가 발견되었다. 또한 은나라 시기의 청동 그릇, 청동 제기들이 이 곳에서 다량 발굴되었다. 그리하여 은의 민족이 바로 동이족이고 이곳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굳어가고 있다.

건평현 유수림자(楡樹林子)에서 나온 비파형 청동단검에 동반된 우면형(牛面形) 당로(當盧)가 있다.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조양시 12대영자에서의 비파형동검이 출현하는 같은 시기 고분을 보면 개 3마리의 스키타이식 동패와 인면쌍뱀의 동패가 출현한다.
건평현에서 노합하를 건너 서쪽에 있는 적봉시(赤峰市) 영성현(寧城縣) 팔리한(八里罕) 고성의 남산근(南山根) 유적지는 곤도하 (坤都河: 노합하 지류) 연안으로서 대형 석곽묘 2기 등 분묘 9좌가 발굴되고 500여건의 청동기물이 나왔다. 그외 각문골판(刻文骨板)을 보면 쌍기(雙騎) 수레 두 대가 새겨져 있다. 이는 음산 암각화에 나오는 수레와 같은 것이고, 같은 도법(圖法)이다.

그림26. 12대영자에서 발굴된 청동기, 청동검, 청동장식. (기원전 10세기 전후)

남산근 유적지에서 발굴된 갑골 그림/// 마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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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근 청동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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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근 청동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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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과(창)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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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부(도끼) 등 |
결론적으로 내몽고에서 청동기 문화가 가장 최고로 번성한 곳이 바로 영성현이다. 기물의 연대는 대략 상나라 후반부터 춘추전국시대까지다. 남산근에 발굴된 청동기물을 내용적으로 보면 청동도가 9건, 청동부가 8건, 청동검이 7건, 칼집이 4건, 투구 1건, 원형 방패 1건, 청동과 3건, 청동모 3건, 등 무기와 말과 마차 기물 6건에, 짐승형 패식 14건이 있다.
아래 한자리에 모아놓은 녕성과 객좌 등지의 청동기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건평현의 배후인 우하량 문화를 아래에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2. 솔나 단군의 영고탑 문화
 파림우기 출토 비파형청동검, 길이 총38cm, 날길이 29cm 영고탑 북쪽 (신석기 환웅문명 나리사대 유적지 부근)
b.c.1583년 위나 16세 단군 때에 구환(九桓)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제사지냈다. 경을 읽으며 마당을 밟는 창경답정(唱經踏庭)을 5일간 하였다.
b.c. 1112년 (단군기원 1222년) 25세 솔나 단군은 영고탑(寧古塔)으로 천도하였다.
색불루 단군이 옛 번한 땅인 녹산 아사달에 도읍하였으므로 번한 주민들은 산동반도 남쪽 회대(淮岱)로 내보냈다. 그러나 상장 서우여가 되돌아와서 좌원(坐原)에서 독립하였고 스스로 기자(奇子)라고 하였다. 변방의 장수 신독이 녹산 아사달을 함락시켰다. 색불루 단군은 영고탑으로 피신했다가 서우여에게 번한을 인정하여 주고, 대신에 녹산 아사달을 되찾았다. 서우여 번한은 봉지였던 망평 등에서 부신시 호두구 평정산으로 옮겼다고 보여진다.
이후 은(殷)나라 왕자인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을 피하여 1114년에 요서(遼西)로 들어왔다. 이에 2년뒤 솔나 단군은 영고탑으로 천도했다.
영고탑(寧古塔)은 ongot라는 옹우특기(翁牛特旗) 해금산(海金山) 지역으로 추정된다. 노합하와 서요하가 만나는 곳이다. 영고탑은 지명이지만 부여의 제천행사는 영고(迎鼓)였으니 영고와 옹구는 발음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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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7. 옹우특기 삼성타라 옥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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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 (三星塔拉) 해금산(海錦山)은 서요하 (西遼河)와 노합하(老哈河)가 만나는 지점으로서 세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이곳에서도 홍산문화의 특징인 옥룡(玉龍)이 많이 보인다.
해금산은 요나라 강성주(降聖州)로 알려졌다. 요나라 태조의 이 지역을 부인이 지나가다가, 12지신을 거느리고 금관을 쓰고 소복을 입은 성인(聖人)을 만나서 저절로 임신하여 요나라 태종을 낳았다고 한다. 요나라 건국 훨씬 전에 이미 삼성사와 같은 신성한 사당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태종은 그 지역을 금역으로 만들었다.
옹우특기 서쪽 이웃인 극시극등기(克什克騰旗)의 천보동(天寶洞)과 용두산(龍頭山) 문화지에서는 청동기물이 발굴되었다. 또한 나사대 서쪽 임서현(林西縣)에서는 구리를 캐던 고대 동광(銅鑛)이 발굴 되었다. 은허에서 발굴되는 것과 비슷한 은말주초의 청동기물이 주로 노합하와 시라무렌 사이에서 옹우특기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발굴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여기서는 옹우특기 소하연문화, 석붕산 문화와 극시극등기 천보동 유적, 극시극등기 백분하 암화를 차례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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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연문화 (小河沿文化)는 내몽고 오한기 소하연향 백시랑영자촌(敖汉旗 小河沿乡 白斯朗营子村)과 옹우특기시 대남구촌의 80좌 고묘장(翁牛特旗大南沟村 80余座古墓葬)은 약 4500년전에 나타났다. 원시적인 부호문자(原始刻划文字符号或祭文)가 출현한다.
옹우특기 석붕산(石棚山) 유적지는 약 70개의 묘장이 있고 대량으로 부호문이 나타나는데 사슴 그림과 섞인 부호글자다. 그중 한 도기에서만 7글자의 부호가 나왔는데 田, 卍 이외에 비(飛), 연(燕), 부(斧), 기(己), 을(乙) 등의 고어체가 추가 된다. 만(卍)형 글자에 대하여 진혜(陳惠, 內蒙古 石棚山 陶文試釋, 문물춘추, 1992)는 백적(白翟)의 부족 족휘(族徽)라고 주장했다. 적(翟)은 뒤에 북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적(狄)으로 바뀌어서 많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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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0년전 환웅시대 내몽고의 도자기 부호와, 3000년전의 백적족 중산국(하북성 소재) 도끼의 부호 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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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9.옹우특기 도자기 부호글자 |
그림20.춘추시대 중산국왕의 도끼 |
본래 적족은 꿩 깃을 머리에 꽂고 다녔을 수도 있다. 공통적인 것은 앞의 卍이 태양문 암각화나 태양문 동경 문양에서 부호로 발전했고, 뒤의 적(狄)이 역시 태양(火)족속을 의미하니 해, 하이라고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백적(白翟)과 적적(赤翟)은 [사기]에서 춘추시대 주나라를 좌지우지하며 주왕실과 통혼까지 한 북쪽의 종족이다. 이는 [단기고사] 마물(麻勿) 10년조에도 주나라 공주를 얻어 통혼한 기록이 있는데, bc 637년이다. [사기]에서는 정(鄭)나라에 원한이 쌓인 주양왕(襄王 bc 651-619)은 15년(bc636년)에 스스로 적사(翟師)에게 항복하고, 적장(翟將)과 통혼하여 그의 딸로 주나라 황실에 적후(翟后)를 삼았었고, 적인(翟人)들의 도움으로 정(鄭)나라를 정벌했다. 이듬해 주나라 신하가 적후에 반대하고 적후를 축출했으나 적인들이 와서 그 신하를 잡아 죽였다.
이 당시 적인들의 활동 지역은 하북, 산동, 산서성이었다. bc. 7세기에 적인은 백적(白翟), 적적(赤翟), 장적(長翟)으로 나누어졌다. 백적은 흰옷을 입어서 생긴 별명이다. 그중 백적은 섬서성(陜西城) 연안(延安),에 있다가 하북성으로 동천하였다. 백적은 선우(鮮虞), 비(肥), 고(鼓) 3부로 나뉘어졌다. 이중 선우(鮮虞)족이 춘추말에 중산국(中山國)을 세웠다. 이 백적의 후손이 선우(單于)라는 왕칭을 내세운 북적(北狄) 흉노(匈奴)라고도 한다. 백적의 지맥인 선우(鮮虞)가 전국시대에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평산현(平山縣) 영수고성(靈壽古城)에 세웠던 중산국이 1974년에 발굴되었다. 그중에서 중산왕묘의 동월(銅鉞)이 발굴되었는데 이 동월에 새겨진 10개의 卍자 문양이 내몽고 옹우특기(翁牛特旗)와 오한기(敖漢旗) 등에서 80년대에 똑같이 발견된 것이다.
이 동월의 앞면에는 만(卍)자 문양이 10개 새겨져 있다. 글자의 상형은 卍자가 더 꼬부린 상형인데 앞서는 雷자로, 또 진혜는 翟자로 본 것이다. 한편 이 동월의 날에는 16개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天子建邦 中山后[ ] 作[88=聯?]軍 , 以[ ][ ]衆" 이라 읽힌다. 흉노의 조상인 적인(翟人)은 단군 색불루 시대에 중원으로 정복해 들어간 부여-조선인들로 추정된다. 이 卍자 표식은 하, 상의 청동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명문중의 천자는 단군이 된다. 그런데 옹우특기 석붕산의 70여개 묘좌 중에서 주로 나타나고 그 연대는 bc 2200년경부터 출현한다. 즉 옹우특기 석붕산은 단군시대이며 이미 bc. 2200년 이상부터 출현한 卍자는 고작 적인(狄人)들의 글자이기에 앞서 단군조선의 국가 표식이 마땅하다. 다음으로 진혜가 해독한 글은 卍자에 더하여 △를 매단 글자로서 鬼로 해석하고 적적(赤翟)의 표기로 본다. 귀방(鬼方)은 산서성(山西省) 북쪽에 있던 나라로서, 북적(北狄)에 속하는데, [단군세기]에서는 색불루 단군이 bc13세기에 귀방을 멸망시켰다고 전한다. 적녀(翟女)의 성은 귀(鬼)씨라고 했다. 내몽고 화림격이기(和林格爾= 林胡族 도읍)의 오환족(烏桓族) 고분벽화에서 그들이 적색옷을 즐겨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더욱 적적(赤翟)이 귀방(鬼方)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卍자의 꼬리마다 깃털을 세개씩 그린 바람개비 글자는 장적(長翟)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장적은 산서성의 임분(臨汾)에서 일어나 하북성의 무안(武安)으로 옮겨갔다고 전하고 무안의 앙소문화의 도기에서도 비슷한 부호 글자가 나온다. 장적은 뒤에 하남성 박양([]陽)의 우지산([]之山)에 살았고 삼적인들 중에서 가장 일찍 중원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필자는 치우족을 줄여서 적(翟)족이라 했던 것이 아닌지 의심되고, 치우기가 꼬리별 모양이라 했는데 치우의 표식으로 고려된다. 그외 라(羅), 필(畢) 등의 글자는 물론 새모양의 두 글자(燕의 고체 비슷한)도 역시 종족부호(鳥夷, 燕 等)일 것으로 진혜는 해석하였다. 이 옹우특기 부호 문자를 발생시킨 소하연 문화도 왕검의 진한 조선문화다. 한편 산서성 북쪽 내몽고 지역은 적인(翟人) 다음으로 임호(林胡), 즉 서호(西胡)가 있다가 흉노에게 땅을 내주었다.
옹우특기 동남쪽 오한기(敖漢旗) 고로판호(古魯板蒿) 북쪽 마을인 주가지(周家地) 묘지는 노합하 중류의 홍산 저수지(紅山水庫) 끝지점 동안(東岸)이다. 이곳에서는 하가점 상층문화에 해당하는 54좌 묘장이 있는데, 토갱수혈묘이며 목곽장이다. 부장품은 남산근과 같은 피혁도초(刀 )와 청동도 3건인데 동물문 병도(柄刀)와 철치병도(凸齒柄刀) 등이 있다. 철치병도는 검자루 부분에 톱니 모양이 있는 것으로서 나무 자루에 매다는 것이다. 그외 구리송곳, 귀걸이, 연주(聯珠)형식, 동포, 원포, 쌍련포(雙連泡), 방구(方 ), 쌍미동식(雙尾銅飾), 조형식(鳥形飾), 고동목걸이(箕形蝸器), 녹송석, 마포(麻布) 이면(裏面) 등이 보인다. 특히 이중 많은 것이 13세경의 남아 분묘에서 발굴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주가지로부터 노합하 반대쪽인 서북쪽의 옹우특기 대포자(大泡子) 유지에서는 공병식 청동단검 2개가 부장된 묘가 발굴되었고 특히 흑룡강 백금보 유지 형식의 도기가 나왔다.

극시극등기(克什克腾旗)현에 위치한 칠로도산맥(七老圖山脈)의 대광정자산(2067m)은 서요하 남북을 통털어서 최고봉이다. 대광정자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서요하의 지류인 백분하(白汾河) 계곡를 따라서 신석기 시대부터 암각화가 발달해 있다. 강안을 따라서 약 140개의 암벽에 가지가지 주제로 벽화가 남아있다. 여러곳의 암화와 비교하여 이곳의 암화 주제 중에 사슴이 유독하게 많다. 부여가 원래 사슴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양을 주로 목축하는 몽고족보다 북쪽 시베리아 지역에서 순록을 끌고 내려온 목축 민족인 것이다. 한편

토성자 서쪽 백분하(白汾河) 암각화에는 수렵화, 부엉이형 인물화, 군무화(群舞畵), 생식화(生殖畵), 천체성수화(星宿畵)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토성자에서도 사냥 기마도 같은 암화가 보인다. 이중 일부는 신석기 시대 것으로 보고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 것으로 본다.
참고로 부여족이 활약했던 내몽고 음산(陰山) 산맥의 남쪽은 황하의 최북단으로서 산서성과 섬서성의 북단이 교차한다. 음산 문화(陰山 文化)를 보면 소위 암각화(巖刻畵) 문화다. 음산에는 수없이 많은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데 한반도 울주군 천전리 암각화도 그 파생품이다.

음산 암각화 모음

한국 울주군 천전리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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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파림우기,2.연운항,3.음산,4.금석문)
암각 인물화의 특징은 부엉이형([휴]鳥頭) 사람 얼굴이다. 호두구 문화 옥기에 다량의 부엉이 옥장식이 있었는데 이 부엉이가 [부여]족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중국은 퉁구스족이 발해를 거쳐서, 산동반도 아래 강소성 연운항까지 내려온 결과로 해석하기도 하며 그들이 상(商)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부엉이형 얼굴을 태양신의 얼굴로도 해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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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현조(天命玄鳥) 항이생상(降以生商)라는 상의 전설과도 이어지며 상의 청동기물 중에 부엉이잔([휴]尊)으로 이어진다. 그는 상인(商人)을 조이(鳥夷)로 보았고 특히 상인의 시조신은 요순시대 순(舜)이고 순은 동이인(東夷人)이라고 주장하는데 굴원(屈原)의 [천문(天問)]을 사료로 들었다. 그리하여 태양신 숭배의 전통이 일치한다고 하였는데 음산암화의 태양도와 강소성 연운항의 태양제단 태양석의 암화가 일치하며, 이것이 銅鏡의 태양문, 기하문 동경으로 발전하고 옹우특기의 卍자 부호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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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凉城)의 노호산(老虎山)에서는 고대 성곽이 발굴되었고, 또 양성 서남쪽의 오포량(敖包梁)에서는 23개의 석퇴(石堆)가 발견되었는데 바로 제단(祭壇)이다. 석퇴의 연장 길이는 60m 인데 그중 중앙 1개의 돌은 길이가 10m, 높이가 2m이고, 그 중앙에 3개의 구멍을 뚫어서 제사를 지낸 흔적이 있고, 양 옆으로 각기 11개의 석퇴가 펼쳐진 것이다. 22개의 석퇴에도 각기 중앙에 한 구멍씩 뚫려 있다. 양성(凉城) 영고탑에는 적적인(赤翟人)들이 살았다. 춘추시대말에 적적인들은 하북성 무안(武安)에 옮겨갔다. 이 뒤에 양성에 남아서 살던 사람들이 임호(林胡)다. 전국시대 bc 300년경 백적인(白翟人)의 중산국(中山國, 하북성 靈壽고성)을 멸망시킨 조무령왕(趙武靈王)에게 임호는 이 양성을 빼앗겼다. 임호족은 동쪽 하북성 난하 상류인 난평([]平)로 옮겨갔다. 이때 임호, 동호의 별칭이 산융(山戎)이다. 연나라 때에 난하 동쪽 하북성 노룡(盧龍)의 고죽국(孤竹國)의 북쪽에 산융이 있었고 고죽국은 산융국의 제후국이었다. 산융국은 또한 단군의 제후국이었다. 난평에는 본래 남국(藍國)이 있었고 남국(藍國) 때문에 강 이름도 난하([]河)인 것이다. [한서지리지]에서 어양군(魚陽郡) 백단현(白壇縣)이었던 난평은 약 10개의 북방형 청동검이 발굴된 곳이며 왕묘가 남아 있다. 남국은 단군 초기부터 제후국이었고 산서성의 려국(黎國) 등을 세우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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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시극등기 동북쪽 25km의 대청산 남쪽 상점 유지에서는 패독(貝禿)과 채도, 활석 팔찌, 마노(瑪瑙) 고리, 와환(蝸環), 골주(骨珠) 등이 발굴되었다. 하가점문화와 다른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로 분류하는데 옹우특기 석붕산 문화와 비슷하다. 극시극등기 서요하 남쪽 5km 지점인 토성자(土城子)는 위당하(葦唐河)가 서남에서 동북으로 흘러 서요하로 들어가는 곳이다. 토성자진 천보동(天寶洞)에서는 상(商)나라 때의 청동기물이 4점 발굴되었다. 청동솥, 추부(錘斧) 등이다.
용두산은 토성자진 6km 남쪽으로서 동으로는 위당하가 있어 옹우특기 빈수(濱水)와 이웃하고 남쪽에 용두산이 있다. 용두산유적지 규모는 600m x 400m 규모로서 해발 900m이다. 제단 유적지를 비롯해 많은 유물이 나왔고 묘장은 토갱수혈묘제였다. 1기 유적지에서는 연병동부(連柄銅斧; 도끼 자루를 도끼 머리 양쪽에 매는 것)가 나왔는데 상(商)나라 형식과 같고 러시아의 바이칼 북쪽 앙가라(고원)과 예니세이 (강)까지 퍼졌다고 한다. 공병식 직도검([]柄式直刀劍)과 넓고 둥근 청동 화살촉(銅鏃)과 가늘고 긴 두 종류의 화살촉이 나왔고, 동포(銅泡), 련주(連珠) 장식, 대식(帶飾) 등 청동 장식품도 다수 나오는데 석범(石范)의 발견으로 자체 제작한 것이 된다. 연대는 bc. 1250년경이다. 용두산의 제단은 전방후원 모양으로서 40 x 40m 규모다. 이곳에서 사슴 문양 동패식(銅鹿)이 나왔다. 2기 유적지에서는 흑룡강 백금보유지의 영향을 받은 기하문 도기들이 많이 나왔다. 이는 ewenki 퉁구스족, 즉 단군 색불루의 부여족 영향으로 고려된다. 기타 제사갱(祭祀坑)이 7개, 순장갱 2개, 그외 72갱이 나오고 별도의 묘장은 4개가 발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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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우특기 동남쪽 오한기(敖漢旗) 고로판호(古魯板蒿) 북쪽 마을인 주가지(周家地) 묘지는 노합하 중류의 홍산 저수지(紅山水庫) 끝지점 동안(東岸)이다. 이곳에서는 하가점 상층문화에 해당하는 54좌 묘장이 있는데, 토갱수혈묘이며 목곽장이다. 부장품은 남산근과 같은 피혁도초(刀 )와 청동도 3건인데 동물문 병도(柄刀)와 철치병도(凸齒柄刀) 등이 있다. 철치병도는 검자루 부분에 톱니 모양이 있는 것으로서 나무 자루에 매다는 것이다. 그외 구리송곳, 귀걸이, 연주(聯珠)형식, 동포, 원포, 쌍련포(雙連泡), 방구(方 ), 쌍미동식(雙尾銅飾), 조형식(鳥形飾), 고동목걸이(箕形蝸器), 녹송석, 마포(麻布) 이면(裏面) 등이 보인다. 특히 이중 많은 것이 13세경의 남아 분묘에서 발굴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주가지로부터 노합하 반대쪽인 서북쪽의 옹우특기 대포자(大泡子) 유지에서는 공병식 청동단검 2개가 부장된 묘가 발굴되었고 특히 흑룡강 백금보 유지 형식의 도기가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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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불루가 녹산에서 즉위하기 3년전에 조부 우현왕 고등이 귀방을 멸망시켰다고 했다. 부여 군대가 은나라 서북방에 살던 귀방을 멸망시키고 부여인으로 나라를 세웠던 곳이, 은기(殷紀) 중의 녹방(鹿方)이다. 춘추시대에는 악방(鄂方)이라고 했다. 섬서성(陝西城)의 녹주(鹿州)는 지금 부현(富縣)이 되었는데 bc. 7세기에 백적(白翟)인들이 살던 곳이다.
백적은 흰옷을 입어서 생긴 별명이며 섬서성(陜西城) 연안(延安)에 있다가 하북성 중산국으로 동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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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주는 바로 연안(延安)의 남쪽 마을 이었다. 이 적인들이 bc. 637년에 주나라와 통혼까지 하였고 주나라를 위해 정나라와 싸웠고 춘추말, bc 476년 이전 에는 하북성에 중산국을 세웠다. 통혼의 결과는 단군 마물의 배필이 된 주나라 공주와 주나라 황비가 된 적후(翟后)였다. 그런데 적녀(翟女)는 귀씨(鬼氏) 였다고도 전하니, 색불루 부여군에게 복종하게 된 귀방인(鬼方人)들이다.
오르도스 문화의 중심인 나린탑 주개구문화 (朱開口文化)지가 있다. 나린탑(納林塔)은 오르도스 고원의 동부로서 황하와 가까우며 고대에는 하남(河南)이라고도 하였다. 탑(塔)은 악이다사 고원에서 마을을 의미한다. 나린탑(納林塔)을 비롯하여 주변에 석불탑, 백가탑(白家塔), 장가탑(張家塔), 백초탑(白草塔) 등 탑으로 끝나는 지명이 나린탑 주위로 모여 있다. 영고는 만주말로 여섯, 육을 의미하는데 부여는 왕실과 오가제로서 육가를 이루었었고 탑이란 이름의 마을들이 지어진 것은 부여인의 흔적이다.
오르도스 고원의 신석기문화는 옥기도 전혀 없고 낙후되어 있었으므로 악이다사 청동기가 자생한 것이 아니다. 상당히 낙후되었던 악이다사가 이 무렵에 부여인들에 의해 개발되는 신천지가 되었다.
나린탑(納林塔)에는 고성이 있었다. 성둘레는 410m x 360m 정도다. 악이다사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주개구 문화(朱開口 文化)는 준격이기(准格爾旗)의 나린탑(納林塔) 북쪽 10km에서 발굴되었는데, 용산문화와 앙소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다시 스키타이(scythay)식 야수문(野獸文)을 받아들여 동방의 서요하로 전파한 것으로 해석하여왔다. 그러나 악이다사고원의 도기는 용산문화의 도기와 다르게 사문(蛇文), 즉 지자문(之字文)에서 비롯되는 토기 형식이 발전하여서 용산문화의 채도문 도기와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후기에는 남문(藍文) 토기가 우세해진다. 이는 즐문토기가 유행한 내몽고 동부로부터 토기가 직접 전래되었던 것이다. 스키타이 양식이라고 여겨졌던 금속 동물 공예품도 악이다사에서 전파되어 오기 전에 이미 악이다사식 청동 예술이 적봉시 극시극등기나 적봉시 영성에 존재하고 있었다. 즉 씨가 나온 곳은 서요하이며 토기와 함께 악이다사 고원에 전래되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또한 한반도의 스키타이양식 금속공예도 시베리아를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서요하에서 발원한 것이 직수입 된 것이다. 그리고 스키타이 양식의 전래가 내몽고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 내몽고 자체에서 발생하여 스키타이로 흘러간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동쪽에 살았던 스키타이인이 내몽고에서부터 그리스 연안으로 진입해들어갔을 것으로 고려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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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2. 주개구문화 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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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개구문화지는 bc. 18세기에 구리 팔찌, 귀걸이, 구리환 등이 보이며 청동기가 시작되고 bc. 15세기에 사문격(蛇文隔; 빗살무늬 종류)과 단검, 동도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미 이때부터 묘를 쓸 때에 양을 희생하여 매장하였으므로 목축 민족이었다. bc 13세기에는 양, 말, 사슴, 뱀, 용을 장식한 청동도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bc. 11세기에는 용이 사라지고 대신 새머리가 장식되고 춘추시기에는 쌍오회수 (雙烏回首) 와각식(蝸角式) 단검이 출현한다.(칼 자루 끝 장식이 둘로 갈라져서 새 두마리 얼굴이 마주 보는 것) 그외 아주 다양한 장식과 문양, 야수문 패식이 절정을 이루어가는 것이 춘추시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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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3. 와각식 동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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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다사 고원에서 나오는 북방식 청동검은 서군형(西群形)으로 분류되는데 적봉시 영성(寧城)으로부터 하북성을 따라서 악이다사 고원까지 분포한다.
나린탑(納林塔)은 우리말로 내린 탑이다. 북쪽 포두시(包頭市) 성곽에서는 선우천강(單于天降) 와전이 나오는데 이 강(降)이 하늘로부터 신인의 강림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린탑은 춘추시대에 악방(鄂方)이며, 이는 알유([]猶)의 땅이 된 것이다. 이제말로 오르도스다.
현재 부여씨의 잔류 민족으로 고려되는 악온극, 즉 에벤키(鄂溫克, ewenki) 민족은 한때 퉁구스(tungus), 또는 색륜(索倫=solong) 등으로 불려왔다. 그들은 지금 내몽고의 흑룡강 가까운 최북부 하이라얼(海拉爾)시와 몽고, 소련 바이칼호변, 그리고 예르니아강 퉁구스카, 야쿠트까지 퍼져 사는 겨우 수만명의 희소 종족이다. 이들은 아직도 사슴을 키우고, 곰, 멧돼지를 사냥하는 유목민이며, 또 산신과 불의 신, 그리고 곰을 숭상한다. 또한 그들 사회에서 무당은 신분이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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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키들이 야쿠트(yakut,siberia) 지방에서 기르는 야쿠트 말은 바로 과하마(果下馬)의 후손이다. 그들의 최고신 god‘Jiyachi’는 전쟁신 치우기(蚩尤旗; 彗星)일 수 있는데, 퉁구스카는 1908년에 혜성이 떨어져 대폭발한 곳이다.

과하마의 후손? 오르도스 청동 장식물 영성 남산근에서 나온 사슴과 똑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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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다사 청동장식 (조류 문양) |

악이다사 동물패식, 전국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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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다사 청동장식(호랑이등) |

악이다사 인물도(씨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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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개수(蓋水)는 위서 <실위전>에서 철수(啜水)와 두료산(犢了山;1362m) 사이다. 철수는 자간목륜하(査干沐淪, 백수)이고, 두료산은 오환산이라고도 했는데, 파림좌기 오란달패소목(巴林左旗 乌兰达坝苏木)에 있으며 거란상경으로부터 100km거리다. 개수가 개사수라면 개사수는 오이길목륜하(烏爾吉沐淪)이고, 개사원은 요나라 상경도성 부근이다. 그 북쪽 부하구(富河沟门村)는 복골이 최초로 나타난 부하문화가 있었다.(환웅문명 참조) 즉 부하(富河)=개수(蓋水)가 된다.
주2. 두막루는 우현왕에 해당하는 관직 이름이었지만 후에는 부족명이 된다. [북사] [위서] [신당서] 등에 나오는데 [동북역사지도집]에서 제제하얼의 송눈평원(松嫩平原)으로 비정하였다. 금나라 대에는 포여로(蒲與路)라고 하였는데, 역시 [부여로]에서 비롯된 지역명이다. 바로 이 지역은 기하문토기의 원향(原鄕)인 흑룡강가 백금보문화(白金堡文化)를 모태로 한다.
주3. 또한 [수서]의 두막루는 스스로 북부여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색불루 이후 천년 뒤에 장당경에 대부여가 건국되고 다시 기백년 후에 옛 부여 도성에서 해모수의 북부여가 세워졌었다. 이들이 한무제의 침략 이후 궐기한 졸본부여에 의해 동북으로 이동하여 가섭원 부여라 했는데 다른 말로 동부여라고도 했다.
주4. 언어적으로 부여, 거란, 실위가 서로 통하고 숙신, 물길, 구려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이는 흥안령산맥을 따라서 가까운 부여, 거란 실위족과 흥안령산맥에서 좀 떨어진 구려, 숙신, 물길로 갈라진 것이다.
주5. [후한서부여전]에서는 부여왕 동명이 색리국(索離國, 索弗國 =반대말 藁離國, 古弗國)의 시비가 낳은 알에서 깨어나 색리국에서 도망하여 부여왕이 된다. 색리국은 바로 22세 단군 색불루의 도성 위치일 수 있다. 이 부여 동명왕은 졸본부여왕이 된 고두막한 동명왕으로 추정된다. 고주몽에 대해서는 고구려, 백제 후손들이 거의 모두가 추모왕으로 적었다.
주6. 색륜(索倫)이라는 지명이 길림성 백성시 서북쪽에 있다. 색륜은 솔롱이라고 읽힌다. 그러면 색불루는 당시 솔벌루라고 읽었을 것이다. 거란의 고지 송막(松漠)은 솔벌에서 유래한 것이 된다. 송막의 위치는 지금의 적봉시다. 사이한산 아래 자간목륜하(査干沐淪, 백수) 상류의 요나라 경주(慶州)터의 현재 지명이 색보리가(索布力嘎 = 索不力嘎)다.
주7. 색불루는 부여신경에서 즉위하고, 장당경의 구월산 삼성사에다가 조부인 고등(高登)을 모시고 제사지냈다. 이 고등에 대한 제사는 고구려까지 풍속이 이어졌는데 부여신, 고등신을 위해 신묘 사당을 지어서 관리했다. 그외 하백녀와 주몽신 등이 고구려에 있었다. [북사](北史)<고구려전>;信佛法, 敬鬼神, 多淫祠. 有神廟二所: 一曰 <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一曰<高登神>, 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 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云.) 시라무렌강 상류 유역에서는 여신상이 많이 발굴되는데 바로 부여 여신상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