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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역사

[단군역사]단군의 역사(기록중심) (7)

작성자올빼미|작성시간01.08.21|조회수99 목록 댓글 0
기독교인들이 단군상이 우상이라고 하는 데는 단군신화라서 라고 하는 주장이 많다..기독교인들이 이제 역사가 밝혀지고 있다.. 제대로 배워라...알고 덤벼라... 열한번째 단군조선의 주거생활 ========================= @건물은 반지하, 장방형 (긴변과 짧은 변의 비율은 1 : 1.4의 황금비율) @지붕은 짚, 풀, 진흙(자연친화 재료) @온돌 사용 열두번째 단군조선의 풍속 =======================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했을 때, 당시 고조선의 풍속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었다. “고조선의 부인들은 행실이 단정하고 신의가 있으며, 음탕하지 않다” -한서지리지- *고선선 사회윤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 세가지 (최치운의 난랑비문) 하나, 집안에 들어와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밖에 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유가) 둘 , 처신을 하는데 일을 억질 만들어 하지 않고, 행동을 하되 말을 앞세우지 않으며(=도가) 셋, ,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고, 악한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불가) 유가, 도가, 불가가 우리나라에 들어기 전에 우리민족의 기본사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후에 유가, 도가, 불가가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그것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았기 때문에 쉽게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불,도교의 사상들의 원형은 외래적인 것이 아니다.(=윤내현) 풍류도에는 유, 불, 선 삼교가 이미 다 포함되어 있다( = 최치원) *8조금법 하나,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둘, 상해를 입히면 곡물로써 보상한다. 셋,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거두어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데,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하고자 하는 자는 각자 50만전을 내야 했다. 그리고 설사 죄를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었더라도 그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 혼인의 대상으로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군조선에는 도둑이 없어 대문이나 방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다. (한서지리지, 윤내현) 열세번째, 단군조선의 민주성 ========================== @“부여에는 영고, 고구려에는 동맹, 예에는 무천, 한에는 5월제, 10월제 등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때에는 나라안의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밤낮없이 음식을 먹고 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부여, 고구려, 예, 한은 모두 단군조선의 거수국 = 단군조선의 계승문화 일 것)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곧 특정 계층만이 아니라 모두 초월하여 천제후 축제를 즐겼음) 반면,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노래와 춤을 즐긴다는 것은 중국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다. 중국에서는 신분이 다르면 관, 혼, 상, 제는 물론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 차별되는 규정이 있어 이를 지켜야 했다. 심지어 훗날, 공자는 이런 차별화된 규범을 “예”라며 극구 찬양했다. @한(韓)사람들은 옷을 입고 모자를 쓰기를 좋아하는데, 하호(下戶)들도 일이 있어 군(郡)에 갈 적에는 모두 옷과 모자를 빌려서 착용한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韓전” -윤내현-) (하호는 우리 나라 고대사회에서 노비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이들은 귀족에게 종속되어 농사를 짓던 종속 농민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군에 일이 있어 갈 적에는, 옷과 모자를 빌려서 착용하고 갔다는 것이다. 이들이 빌려 입은 옷은 이들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것이었을 것이다. 하호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착용하는 옷과 모자를 하호들이 빌려서 착용할 수 있었다면, 이것은 신분에 대한 차별이 매우 적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중국에서 이런 일은 상상 할수도 없었다.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韓의 풍속을 말한 것이다. 한은 원래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로 단군조선에서는 이보다 훨씬 차별이 적었을 것이다. 고대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조선 사회에는 신분의 분화가 심해졌겠지만, 가능하면 신분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회전반에 깔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이 사회주도 사상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윤내현) 열네번째, 단군조선의 실제적 힘 - 청동기와 철기 =========================================== @ 청동기 청동의 발명과 사용은 인류사회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것이다. (황금색 찬란함과 강도 = 핵무기 처음 개발 때의 위력을 연상시킴) - 중국의 황하보다 수백년 앞선 서기 2500년경의 청동기 문화 (단군릉 유물은 서기 3500년) - 초기국가인 단군조선이난 은나라가 그렇게 넓은 강역을 확보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지배층이 소유하고 있던 청동기의 위력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 구리의 용해점은 1083도 : 무르다 -> 강한 금속을 얻기 위해 합금 기술 발명 - 청동은 구리를 주성분으로 하고 그 밖의 몇 가지 원소를 합금한 것이다. - 청동의 합리적 비율은 구리 80 ~ 90 %와 주석 10 ~ 20 % - 구리와 주석의 합금 비율에 따라 청동의 성질이 달라진다. 그래서 단군조선에서는 용도에 따라 합금비율을 달리 하였다. - 청동에 아연을 적당히 배합하면 합금의 색깔과 유동성을 조절할 수 있다. 아연을 의도적으로 주입하여 청동기를 주조한 것은 한국 청동기의 특징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단군조선의 청동주조 기술이 매우 높았던 증거 (일반적으로 청동은 구리의 함량이 높으면 경도는 낮아지는 반면 기포가 생기기 쉽다. 따라서 청동의 비율이 높은 단검의 경우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쉽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단검의 경우 현미경 관찰에서 기포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입자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단군조선의 구리광 유적-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임서현 대정에서는 서기전 1200년경의 동광이 발견되었다. @철기 - 단군조선 후기에 철기 출현(서기 전 8세기) (단군릉의 경우 서기전 3천년전, 치우천황의 동두철액, 에밀레종, 철자의 고문자) - 순철의 용해점은 섭씨 1539도, 자연계에 있는 일반의 산화철은 섭씨 700 ~ 800도에서 환원 시작 (산화철의 환원으로 얻어지는 철=연철=두드려 이물질 제거, 단조하여 철기를 만들어야 함) 1200도에서 액체가 됨(선철=주철) 연철+탄소 추가, 선철-탄소 일부 제거, 강철을 얻는 발전된 방법은 선철을 보다 높은 온도(섭씨 1350도 이상 섭씨 1500도 정도)로 가열하여, 탄소와 그 밖의 원소들을 연소시키는 방법으로 제련하는 것이다. - 단군조선 유적지 철기유물 시험분석 결과 - 연철, 선철, 강철이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 강철은 강도에 따라 연강(손칼), 반연강(창), 반경강(노동도끼), 극경강(무기도끼)까지 다양하였다. - 단군조선에서는 강철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이미 열처리 기술을 활용하였다. (현미경 관찰에 의한 분자구성 : 세죽리 유물은 두번 열처리 기술) - 철생산, 가공 위해서는 좋은 제철로와 송풍장치가 있어야 한다. 하나, 제철로 유적지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서기전 2세기의 제철로 발견) : 같은 시기의 서구 제철로 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더 잘 만들어진 것이었다. 둘, 송풍장치(경기도 가평군 마장리 유적지: 야철용 송풍토관의 파편출토) - 서구에서 선철을 얻는 발전된 제련방법을 사용한 것도 서기 14세기부터 였다. 그 전에 사용했던 강철은 연철을 단조하여 얻은 것이다. - 그런데 우리민족은 이보다 훨씬 빠른 고조선 시대에 이미 연철과 선철을 제련하였으며, 진보된 방법으로 강철도 제련하여 사용하였다. (단군조선의 철에 대한 지식과 가공, 기술문화가 매우 이르고 높았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 돌을 이용한 침술은 동방에서 기원했다. - 산해경 , 윤내현 - (서포항, 오동 등 단군조선 유적지에서 뼈로 만든 침 출토,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청동침의 주물 틀이 소장되어 있다) - 주나라 말기 선왕때, 고조선의 단군이 서주왕실을 방문하여 융숭한 접대를 받았다. 이때 단군은 서주 선왕의 생질녀를 아내로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시경(詩經), 한혁 편 - - 단군 조선시기에 중원에서는 요, 순, 하, 은, 주, 춘추, 전국, 진 제국, 한나라 초에 명멸했다. 열다섯째, 외국 학자들이 인정한 한국 고대사 ======================================== @ “사마천의 사기 25권은 단군조선이 중원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작업을 벌인것이다.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간 것에 불과하다.“ (일본학자 오향청언) @ (한반도와 만주에는)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았고, 신석기 시대 초에 이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 여류 민속학자 R.S.M 자리가시노바, 일본에서 발표) (신석기 시대 초는 지금부터 1 ~ 2만년전, 이때 우리 동이 족들은 주변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 높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와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공산국가의 학자가 발표했다는 의미) @ 산동반도 지역에서 남한 넓이 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는 대문구문명권(유적지)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발견하니까 문자가 나오고, 이곳을 통치한 소호씨란 통치자 이름까지 나왔다. 이곳을 방사선 탄소 측정을 해보니까 지금부터 5785년 전의 것이다. (중공의 유명한 고고학자 당란, 1977, 7. 14일자 중공 “광명일보” 발표내용) (“소호씨는 동이계야(東夷系也), 동이지인(東夷之人)이다 - 중국책 古史辯 ” 태호복희씨, 여와씨, 소호금천씨가 전부 동이족이다“) @ “조선족은 4천년 전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단군왕검이 있던 유적지도 발굴했고, 단군조선 시대 중앙 행정기관의 유적지도 발굴했다.” (유 엠 푸친 著 “고조선”) (“우리 조선족이 청동기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2천년경, 그러니까 지금부터 4천년전이다. 그때 농가의 유적도 발굴했고 농기구와 오곡씨앗까지 발굴했다) (북한 “중앙통신” 1978년 8월 14일 자 보도) @ “은나라는 동이족이다” (고사변) (현재 홍콩대학의 임혜상 교수, 대만대학의 서량지 교수) @ “동방(동이족이 살고있는 지역)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로 문화가 발생한 곳이다” (東方地域天地之所始生也) (4700년전 중원, 황제내경소문) @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절대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도 팔괘부호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5500년전에 서쪽으로 옮겨왔다.” (영국학자 크레머(1897 ~ ) & 일본의 우에노(上野景福)교수 발표) (송호수 교수, 김상일 저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국”) (언어학자들은 “수메르어가 한국어, 타밀어, 드라비다어와 같은 교착어”라고 말한다. 저 유명한 대영 백과사전도 현재 “수메르인의 교착어가 터어키와 다르고 한국어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수메르 말과 우리말이 같은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이 최근 미국에서 연구발표 되었다. 수메르는 “소머리”의 뜻이다. 한편 수메르인들의 상투, 씨름, 앉는 자세 등이 우리 나라의 그것과 같으며, 그들은 파미르 고원에서 나온 파를 즐겨먹었다고 한다. 또 수메르인은 머리털이 검고 곧으며 서양인보다 체구가 작고, 서양인들과는 달리 머리 뒷부분이 편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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