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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며삽시다

제주도에서 천주교를 싫어하는 이유!

작성자출맨[양훈석]|작성시간15.03.26|조회수443 목록 댓글 1





이재수의 난 (1901년)



"교인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글을 배웠다고는 하나 본시 우리나라의 신민인데, 한번 교회에 들어가면 관에서도 다스릴 수가 없고, 감히 두려움도 없이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남의 소송에 간여하여도 감히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고 심지어 인명을 살상하여도 감옥에 가두지 못합니다. 금번 삼군의 민인들이 세폐를 견디지 못하여 일제히 모여서 호소한 것이 어찌 교인들에게 관계되겠습니까? 그런데 군기를 빼앗아서 성을 함락시키고 발포하니 이게 역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죽인 것은 역적인 것이요 양민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비록 죽어도 원한이 없습니다."


- 체포된 후 이재수가 한 말.





19세기말 천주교는 제주도에 유입되면서 탐관오리 및 모리배들과 손잡고 더러운 짓을 자행했는데, 천주교 세력은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아 온갖 횡포를 부렸다.

제주도 봉세관 강봉헌은 가옥세, 수목세, 가축세, 어장세, 어망세, 염분세, 노위세, 잡초세 등등 갖은 명목으로 세금을 징수해 갔고 징수하는 과정에서 천주교를 믿는 깡패들을 고용해 강압적으로 징수를 했다. 이 무리들이 제주도민들을 폭행하고 강간해도 천주교 교회로 도피하면 처벌을 못하는 등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를 막아야할 프랑스인 신부들은 교인을 빙자한 모리배들을 두둔하기에 바빴다.


당시 제주도는 뭍에 바치는 진상품으로 인해서 극심하게 가난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외세 종교의 평등 사상과 문물 도입으로 생활이 나아지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오히려 수탈에 동조하였고 제주도민은 분노하였다.



1901년 2월, 훈장이었던 현유순이 성당으로 끌려가 고문받다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참다 못한 제주도내 유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와 교회의 폐혜, 지나친 세금등을 토로했고 이를 제주목사에게 시정해줄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때까지만해도 민회(民會)를 개최하고 온건적이고 평화적인 요구와 시위로 전개 되었는데....


5월 14일 천주교인들이 도민 2명을 살해하고, 민회의 지도자였던 오대현을 납치해 가는 사고가 벌어지자 이재수를 새로운 지휘자로 추대하고 제주도 내의 여러 천주교회들을 불태웠다.

당황한 프랑스인 신부들과 천주교인들은 제주성으로 피난갔지만, 제주성을 지키던 대한제국 주둔군조차 그다지 이들을 지켜줄 마음이 없었다. 몰려오는 민군에게 일단 명색이 주둔군이라 간단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오래가지 않아 전투를 중지하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성으로 들어온 민군들은 그동안 악명이 높던 이들을 골라 효수했는데 그 수가 3백에 이르렀다. 몇몇 천주교 신부들도 한패라고 하여 같이 살해당했다.


당시 제주도청 고위관리들도 천주교인들이 관리들도 무시하며 저지른 짓에 이를 갈아왔기에 나몰라라 하였고, 제주도 군졸들은 되려 이들에게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으며 대정군수 채구석은 아예 반천주교 단체를 만들어 이들에게 무기를 지급하여 뒤로 돕기까지 했다. 제주성 지휘관인 김응석은 일단 공격 명령을 내려 몇 차례 사격을 가하여 몇몇 민군을 사살했으나, 그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주둔군에게 사실상 전투 중지명령을 내리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민군 측 사망자는 8명으로 그쳤다.





제주도성 부근의 천주교도 시체들



참수당한 천주교 신부들이 모두 프랑스인이었기에 프랑스 측은 이를 빌미삼아 제주도에 군대를 파병하면서 일이 커져 갔다.


5월 31일, 프랑스군이 제주도에 도착했고, 대대적으로 참전할 뜻을 보이자 비로소 대한제국 황실과 조정도 급히 제주도 측에 사람을 보내서 자칫하면 외국군대가 참전하여 무수한 제주도민이 학살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해주었다. 이미 동학혁명 당시 일본군이 멋대로 쳐들어와 민중을 학살하던 걸 겪었거니와 이번에는 프랑스가 들어와 간섭할 것을 우려한 조정에선 깊이 우려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이재수는 조정이 외국군대를 겁내고 백성을 지켜주지도 못하냐면서 비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있으면 무수한 제주도민이 학살될 것을 알고 6월 10일, 1만명에 달하는 제주도 민중저항군을 자진해산시켰다. 물론 이 과정에서 천주교, 조선정부와 교섭을 통해 요구조건이었던 교폐와 세폐방지를 보장 받았다.


이재수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기로 하고 자수했다. 이에 친구인 강우백이 너만 죽게 할 수 없다면서 같이 자수했으며 이 민란을 지지하던 양반 출신의 오대현도 자수했다.



오대현은 "관노 출신의 용기있는 이가 모든 책임을 다하는데, 내 어찌 양반으로서 가만 볼 수 있겠는가. 천한 것이라며 그를 얕보지마라. 그의 기개는 대장군감이었다."라며 이재수를 칭송했다. 그리고 "백성들이 괜히 무기를 들고 나섰겠는가? 조정의 무책임과 외세의 약탈로 피해보는 백성을 생각해 달라."라는 진술을 했다.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식 재판을 받고 교수형 당했다.


프랑스에게는 5,160원의 배상금이 지급됐다.



이재수의 난과 해방 직후 43사건의 서북청년단 때문에 제주도는 가톨릭이고 개신교고 간에 기독교 전체에 대해 별로 감정이 좋지 않은 편이다.



이재수의 난에 대해 천주교 고위 성직자들은


1. 일부 천주교인들이 비리 및 행패를 저질렀으며 비리를 저지른 관리들이 천주교인을 고용하여 더 행패를 조장했다.
2. 이에 대하여 프랑스 신부들은 그저 모리배들을 무조건 옹호하면서 외세와 종교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증오가 커졌다.


천주교가 제국주의 종교로서 세계에서 학살과 차별을 조장한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되새기고 반성하여야 할 부분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서귀포시에 있는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세 명을 기리는 삼의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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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황원장[황승혁] | 작성시간 15.04.23 잘 몰랐던 사실인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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