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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상의 아리아

작성자돌다리|작성시간26.06.20|조회수5 목록 댓글 4

볼일이 있어 이른 아침 찾은 시골 마을.

사방을 가득 채운 자욱한 안개 사이로, 뜻밖에도 은은한 클래식 향기가 흘러나옵니다.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지?'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커다란 느티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마을 스피커가 범인이었습니다.

 

흘러나오는 곡은 저도 아주 잘 아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였습니다.

 

이 예사롭지 않은 아침 음악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대체 누가 어떤 사연으로 이 이른 아침에 클래식을 틀었을까?

궁금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풀렸습니다.

 

“아아-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장입니다.”

보통의 시골 마을이라면 마이크를 툭툭 두드리며 "아, 아, 마이크 시험 중"

하거나 투박한 유행가 전주곡으로 시작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 젊은 감각의 이장님은 마을 방송의 '시그널 음악'으로 바흐를 선택하신 거였습니다.

 

노인들만 거주하는 한적한 촌락에 울려 퍼지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라니.

새로운 발상이 참 신선하고 멋지지 싶습니다.

이 신선한 변화를 보며,

이 마을에 앞으로 무궁무진한 발전이 이어질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마을 스피커로 듣는 'G선상의 아리아'는 저를 순식간에

깊은 추억 속으로 데려갔습니다. 제게 이 음악은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사글세방에 살면서도

거금의 인켈 전축을 들여놓을 만큼 저는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쉬는 날이면 작은방 문을 걸어 잠그고 '오페라의 유령' 메인 테마를

크게 틀어놓곤 했는데, 아내는 귀신 소리 같다며 질겁을 하곤 했습니다.

 

반면 'G선상의 아리아'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어,

글을 쓸 때마다 배경음악처럼 늘 곁에 두었던 곡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월드컵 열풍으로 붉게 물들었던 2002년 6월.

우연히 가입한 어느 인터넷 카페의 음악 방을 찾았더니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며 신청 곡을 듣던 그 방에 처음 들어섰던 날,

저는 제 오랜 애청곡인 'G선상의 아리아'를 신청했습니다.

“돌다리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들려드립니다.”

그날 이후, 디제이는 제가 들어가기만 하면

제 마음을 미리 읽어내듯 이 곡을 틀어주었습니다.

덕분에 그 방에서 저는 'G선상의 아리아 광팬'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조금은 시들은 지금과 달리, 무척이나 푸르고 활동적이었던 그 시절.

참 아늑하고도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이 곡은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가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추모곡으로 연주한 것으로도 유명하고,

전 세계 수많은 가수가 가사를 붙여 부르기도 한 명곡입니다.

 

문득, 이 음악이 가진 위대한 힘에 대해 알게 해 준

책 속의 유명한 일화 하나가 떠오릅니다.

 

평론가 박용구 선생의 저서 <음악과 인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글 속에 등장하는 젊은이는 훗날 서울대 교수가 된 바리톤 이인영 선생입니다.)

 

한 젊은이가 1·4 후퇴 때,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시간표도 정원도 없는 화물차 안은 그야말로 수라장이었습니다.

 

음악을 무척 사랑했던 그는 서울을 떠나오며 무거운 옷가지 대신

포터블 축음기와 레코드 몇 장을 배낭에 챙겨 넣었습니다.

 

제대로 달리지 못하던 열차가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허허벌판 위에 덜컥 멈춰 섰습니다.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젊은이는 조용히 축음기를 꺼내 바늘을 올렸습니다.

흘러나온 곡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였습니다.

 

고아하고 명상적인 바이올린 선율이

눈 덮인 정결한 공간 속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마치 맑은 허공 전체가 고스란히 공명하는 듯,

축음기의 가냘픈 소리가 한결 또렷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칠게 떠들썩하던 화차 안이 순식간에 고요하게 가라앉은 것입니다.

나이도, 지식도, 성격도 각양각색인 피난민들이

한결같은 감동 앞에 눈물을 삼키며 오늘의 괴로움을 잊고

경건하게 스스로를 다스렸습니다. 하늘과 땅마냥 숨을 죽인 채였습니다.

곡의 여운이 잔잔히 끝났을 때,

서양 음악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은 한 노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곡을... 한 번만 더 들려주시오.”

 

수년 전,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진주 운석 사건' 때

외지인들로 북적였던 그 마을이 바로 제가 찾은 이 마을이었습니다.

 

우주의 신비를 담은 운석이 떨어졌던 동네여서 그럴까?

아침을 깨우는 이장님의 바흐 선율 역시 우주만큼이나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연히 만난 음악 덕분에

가슴속 서랍에 넣어두었던 2002년의 푸르던 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오늘 어떤 선율이 흐르고 있습니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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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영수기 | 작성시간 26.06.21 마을 이장님이
    쎈쓰가 있으신분입니다
    ​서양 음악을 전혀 모르는 노인의 귀에들린. G선상의 아리아....
    음악은국경도, 시대도, 지식의 장벽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위대한 고백이 아닐까 싶습니다.
    ​1·4 후퇴의 매서운 추위와 피난 열차 안의 가혹한 현실 속에서,
    바흐의 선율이 사람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해 주었다는 일화를 읽으면서
    음악의 힘이 참 대단하네요
    ​음악 덕분에 2002년의 푸르던 소중한 시절을 다시 마주하셨다는 말씀도참 인상 깊습니다.
    ​소중한 추억과 깊은 사유가 담긴 글을
    읽으니
    돌다리님
    덕분에 평안하고 오늘 하루도
    바흐 선율처럼 깊고 평온함 으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돌다리님 도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세요.
  • 답댓글 작성자돌다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1 클래식 음악을 안다, 보다는 알려고 노력하는 중 입니다.ㅎㅎ
    평온한 나날 되세요~~~~
  • 작성자미소(명순) | 작성시간 26.06.22 new 젊을때 많이 들었던 'G선상의 아리아'
    내가 시골길을 걸으며 귓가에 들여 오는듯 합니다
    그 이장님 센스있는 것을 보면 마을도 잘 이끌어 갈것 같으네요
    돌다리 친구의 글을 읽으며 오늘도 활기찬 한주 시작할것 같아요 ^^
    항상 좋은 글 감사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돌다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2 new 주위에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이런 황당한? 음악도 들려요.ㅎㅎㅎㅎ
    차분한 음악이라 마음 다스리기엔 참 좋을 듯 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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