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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중국 북방인과 남방인

작성자閑雲|작성시간20.10.24|조회수782 목록 댓글 0

 

 

[중국 북방인과 남방인]   

나는 중국의 북방지역인 심양(瀋陽), 청도(青岛), 위해(威海)와 남방지역인 상해(上海),

소주(蘇州)지역에서 외국인 교수의 신분으로 6~7년 정도 살았다.

지난 40여 년 동안 수십 차례나 왕래했던 경험도 있다.

그러는 동안 현지인들로부터 "북경 사람은 애국자(北京人爱國)이며, 상해 사람은 돈 벌어

출국하려 하며(上海人出國), 광동 사람은 나라를 팔아 돈을 벌겠다 하며(廣東人賣國),

홍콩 사람은 조국이 없다(香港人没有國)"라는 말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의 국토 면적이 남한의 99배,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의 44배 정도나 넓기 때문에 지역별

생각과 가치관이 그 만큼 다를 수 있다고 본다.  

 
옛부터 남방은 날씨가 따뜻하고 강과 호수 등의 수자원이 풍부하여 논이 많으며, 교통수단으로는 

주로 배를 이용했다. 남방인은 성품이 대체로 세심하고 신중한 편이다. 

산이 많아 협소한 농토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에 작은 일도 따져 보는 성격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산과 강이 많아서 왕래가 불편하기 때문에 고립지역이 많아서 언어도 고립되어 방언도 그 만큼 많다.

남방 사람들은 옛 선조들의 영향을 받아 두뇌 회전이 빠르며 이해 타산력이 강해서 개혁 개방 시절에도

빠르게 경제적인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날에도 남방지역에서 유명한 기업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에 반해 북방은 날씨가 춥고 바람이 심하게 불며, 황토 지대가 많아 밭이 많으며 주로 말을

이용한 교통이 발달하였다.

북방 사람들은 대체로 시원 시원하며 열정적인 성격인데, 지리적 조건이 산이 적고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서 이런 대범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유머스럽고 소탈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 역시 거친 지리적 환경의 단점을 극복하고 

서로 돕고 살기 위해서 이런 성격이 형성되게 되었다.

대부분 평야이기 때문에 말을 타고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 있어서 언어가 비슷하여 방언도

그 만큰 적고, 남방인에 비해 발음도 통일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남자는 북방에서 찾고(北方找男人), 여자는 남방에서 찾는다(南方找女人)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남방 사람은 작은 잔으로 술을 마시며, 손님 접대시에도 적당 양(量)의 음식만 준비한다. 

이들은 논 농사를 짓기 때문에 쌀을 주식으로 하며, 국수도 쌀이 들어간 "미펀(米粉)"과 "미씨엔

(米線)"이라 부르는 쌀국수를 먹는다.

이에 비해 북방 사람들은 큰 잔으로 술을 마시기 좋아하며 손님이 술에 취해야 하고,

음식도 넘칠 정도로 준비해야 손님 대접을 제대로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북방인은 주량이 세고, 술 소비량도 많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손님 접대를 좋아한다는 "호객(好客)"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북방은 논이 적은 대신에 밭이 많아서 논을 의미하는 "답(沓)"이라는 글자는 잘 쓰지 않고

대신에 물밭이라는 뜻의 "수전(水田)"이라는 글자를 쓰며, 주식으로 밀가루를 이용한 찐빵(馒頭)과

구운 전병(烤餅)을 즐겨 먹는다.

이와 같은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인은 의(義)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색채가 강하고,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남방인들은 패(貝)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색채가 강하다. 

이런 특성은 남방과 북방의 지리환경적 특성 뿐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유래에서 그 단서를 찾아 

볼 수 있다. 

 

3,000여 년 전에는 서로 다른 지역 민족이었던 은(殷) 나라와 주(周) 나라의 오랜 역사를 알게 되면

이런 기질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은(殷)은 지금의 산동성(山東)지역과 산서성(山西省)지역 사이의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한 동방계의

농경민족으로 상당히 발달된 문명을 자랑했던 국가였다. 

그에 비해 주(周)는 오늘 날의 서안(西安)에서 시작된 서쪽의 유목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민족이었다.

그런데 이런 서로 다른 민족들이 전쟁을 하면서 은(殷)이 멸망하게 되었지만, 오늘 날의 중국인들은

그래도 동방계인 은(殷)과 서방계인 주(周)의 기질적 특성을 모두 이어 받았다. 
은 나라의 본거지는 풍요로운 동쪽의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이들은 옛부터 재화를 중요시했다. 

그러나 당시 금속화폐가 발달하기 전이라 화폐로 자안패(子安貝)라는 조개를 사용했다.

그래서 이런 문자 흔적을 살펴보면 당시 어떤 정신적 특징이 있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보(寶:보배), 재(財:재물), 비(費:쓰다), 공(貢:바치다), 화(貨:재화), 탐(貪:탐하다), 판(販:팔다),

빈(貧:가난하다), 귀(貴:귀하다), 대(貸:빌리다), 저(貯:쌓다), 무(貿:바꾸다), 매(買:팔다), 자(資:재물), 

임(賃:품팔이), 사(賜:주다), 질(質:바탕), 상(賞:상을 주다), 배(賠:물어 주다), 부(賦:구실), 도(賭:걸다),

췌(贅:혹), 속(贖:바치다) 등의 글에는 모두 재화를 뜻하는 "패(貝)"라는 글자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글자를 단서로 볼 때 당시 은(殷) 나라 사람들의 정신적 기질을 "패(貝)의 문화"라 칭할 수 있다.

 

그런데 은(殷) 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조를 상(商)이라고 믿고 있는데, 주(周)에 의해 멸망하게 되자

그들은 토지를 빼앗긴 망국의 백성으로 중국판 유대인으로 전락해 버렸다.
상인(商人)이라 부르기도 하는 은(殷) 나라 사람들은 패망하기 전까지는 원래 농경생활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나 주(周)로부터 패망한 후부터는 각지로 흩어진 채로 서로 연락을 하며 주로 재물교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이것이 "상인(商人)"과 "상업(商業)"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건으로 해서 오늘 날에도 중국의 경제는 과거 은 나라 지역이었던 동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해 오고 있다.

특히 상해(上海) 사람과 절강성 온주(温州) 사람들이 특별한 상거래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기술은 은 나라 사람들의 원형(原型 : Archetype)인 집단 무의식에 그 뿌리가 있다고 본다. 


한편 주(周) 나라 사람의 선조는 서북부 유목민과 관련 되어 있어서 혈통이나 기질도 유목민과 같은

집단무의식인 원형(原型)을 지니고 있다.

은 나라 사람들이 "패(貝)"와 관련된 것처럼, 주 나라 사람들은 유목의 대상인 "양(羊)"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은(殷) 나라 사람들은 원래부터 농경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자연을 중시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자연과 밀착된

다신교(多神教)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광활한 초원과 사막지대를 이동하면서 살아왔던 유목민은 오직 하늘로부터 큰 힘이 내려온다는

일신교(一神教)를 믿게 된다. 그래서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주 나라 사람들은 물질적 공물보다

선(善), 의(義), 예(禮)와 같은 무형의 선행을 좋아했다. 
주 나라 사람들은 하늘에 양(羊)을 바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善)과 의(義)와

같은 보이지 않는 "좋은 일"을 함께 하려 했다.

의(義:옳다), 미(美:아름답다), 선(善:착하다), 상(祥:상서롭다), 양(養:기르다), 의(儀:거동), 희(犠:희생), 

의(議:의논하다), 선(羡:부러워하다) 등의 글자에는 무형의 좋은 일과 관련된 글자에 "양(羊)"이 포함돼

있는 것은 이념적인 신으로 "하늘"을 섬겼던 주 나라 사람들의 기질적 흔적이다.

그래서 주 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양(羊)의 문화"라 할 수 있고, 이런 기질적 특성은 북방인들의

중심적 가치관이 되었다.


모택동(毛澤東)은 19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과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을 통해 패(貝)의

문화를 버리고 북방인들의 양(羊)의 정신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1978년부터 등소평(鄧小平)은 남방인들의 정신인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만 잡으면 

그만이다"라는 백묘흑묘론(白猫黑猫論)을 정책의 기치로 삼아 경제 개혁개방노선, 즉 패(貝)의 정신을

일깨우며 강력하게 경제발전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2013년부터 집권한 시진핑(習近平)은 모택동이 강조한 양(羊)의 문화와 등소평이 강조한 패(貝)의

문화를 함께 혼용하기 시작했다. 

정치는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양(羊)의 정신을 강조하고, 경제는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패(貝)의 정신을

강조하는 정책이다. 이른바 북방지역의 사회주의적 정치이념과 남방지역의 지본주의적 경제이념을

섞어서 혼용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요컨데 3,000년에 걸쳐 내려 온 양(羊)과 패(貝)라는 두 가지 문화를 동시에 함께 혼용해 온 이런 정책은

아직까지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인류 역사상 패(貝)의 정신인 "물질 문명"과 양(羊)의 정신인 "정신 문명"이 함께 공존하며

발전했던 역사적 사례가 없기 때문에 중국의 이러한 양 다리 정책이 언제까지 성공하게 될런지 귀추가

주목된다. 
왜냐하면 물질과 정신은 서로 상대적인 역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강해지면 시차를 두고

다른 한 쪽은 점차 약화되는 역사적 사례가 이러한 관계를 입증해 왔기 때문이다.

정신이 강해지면 물질이 풍부해지기 시작하게 되고, 물질이 풍부해 지면 다시 정신이 약해지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물질적 빈자(貧者)와 부자(富者)들은 주기적으로 뒤바뀌게 되고, 그런 결과로

국가 간 물질문명도 이동하는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런 이동은 800년을 주기로 일어난다고 본다.

예를 들면 물질문명은 3세기부터 13세기까지는 동양이 우세했었고, 이 후 1800년 대부터는 다시 서양이

문명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토인비의 이런 주장을 근거로 해서 예측해 보면 2,000년대 중후반부터 점차 물질문명의 추가 또 다시

동양으로 이동해 올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세로 볼 때 특별한 큰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에 편승하여 사회주의

"정신"을 표방하는 양(羊)의 문화는 점차 쇠퇴하게 될 것이고, "경제"를 표방하는 패(貝)의 문화가 한 동안

중국을 지배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게 된다.

 

출처:전남대 이종목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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