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大漠鹏城(대막붕성)
--대막의 신화, 그리고 남겨진 자들--
서문웅은 문득 형언할 수 없는 고독과 무력감을 느꼈고, 막다른 길에 들어선 자의 비애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는 그제야 두려움을 깨달았다.
강호에는 더 이상 자신이 발붙일 곳이 없다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그를 떠나갔다.
아들과 딸, 그리고 한때 생사를 함께했던 동지들마저 하나둘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는 불현듯 품 안에서 방문열이 남긴 청옥 반지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마음 한구석에서 다시금 한 줄기 희망이 솟구쳤다.
반지를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주먹을 꽉 쥐며 크게 외쳤다.
"아직 희망이 있다!"
죽음의 벼랑 끝에 선 사람은 한 줄기 빛에도 모든 희망을 건다.
삶을 향한 집념이 다시 그의 가슴 속에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서문웅은 살아남고 싶었고, 이렇게 강호에서 쫓겨나는 것도, 피땀 흘려 일군 자신의 기반을 포기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특히 그의 분신과도 같은 유령궁(幽灵宫)은 더욱 그러했다.
아들 서문기의 참혹한 죽음과 문법상의 돌연한 이탈은 이 늙은 여우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상심이 극에 달한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더욱 미쳐갔고, 무엇보다 그를 상심하게 한 것은, 유령궁의 제자들이 하나둘씩 몰래 도망쳐 버린 일이었다.
그는 정말로 궁지에 몰려 있었고,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더욱 공포스럽고 잔인하게 변해갔으며, 그의 마음속에 정(情)이나 친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모든 것은 더욱 독해진 심성을 따라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고, 이는 그의 생명마저 곧 파멸될 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
황혼 무렵의 하늘에는 옅은 구름 몇 조각만이 바람을 따라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유령대제 서문웅은 홀로 말에 올라 사막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띤 채 사위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쉰 듯 낮고 거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석지중아, 석지중아! 이 서문웅이 정말 네놈 손에 무너진다면 평생 강호를 누볐다는 이름이 아깝지 않겠느냐! 언젠가는 반드시 네놈을 내 손으로 죽이고 말 것이다...."
그가 증오를 담아 긴 채찍을 휘두르자, '솨악'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채찍이 말의 등 위로 매섭게 떨어졌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이 짐승이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양, 무자비한 채찍질이었다.
말은 길게 울부짖으며 몸을 솟구치더니,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대막의 끝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는지 그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어느덧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적막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짙은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이자,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가볍게 훔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찾았군."
그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장정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양고기를 굽고 있었는데, 사내들은 갑자기 나타난 노회한 이방인을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서문웅이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리며 물었다.
"방등운(房登云) 형이 여기 계시오?"
사내 중 하나가 말없이 왼편의 천막을 가리켰다.
커다란 천막 안에서는 가느다란 등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서문웅이 조심스럽게 휘장을 들추자, 한 사내가 등불 아래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골몰히 연구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방문열이 내가 그린 대막금성(大漠金城)의 위치도를 벌써 형에게 넘겨주었을 줄이야!'
"방 형!"
천막 안의 방등운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탁자 위의 지도를 갈무리하며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무슨 일로 오셨소? 이 비도(秘图)를 다시 뺏으러 온 것인가?"
서문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깟 지도는 이제 내게 중요하지 않소. 방 형, 안심하시오. 나는 더 이상 금성을 두고 다툴 생각이 없소. 대막금성은 결국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방등운이 비웃듯 내뱉었다.
"그 안의 금은보화와 세상을 호령할 붕성비급(鹏城秘笈)까지 포기하겠다고? 서문웅, 당신이 그리 쉽게 손을 뗄 위인이 아닐 텐데."
서문웅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그대 말이 틀린 것은 아니오. 솔직히 미련이 남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 그러나 지금은 그 권리를 다투고 싶지 않구려. 그저 방 형과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왔소."
방등운이 차갑게 다시 물었다.
"비도를 돌려받으려는 게 아니란 말이오?"
서문웅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말하지 않았소?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 비도 문제로 다투기 위함이 아니고, 그대 아우에 관한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오."
방등운이 잠시 멈칫했다.
"내 아우가 어쨌다는 거요?"
서문웅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불행히도.... 목숨을 잃었소."
방등운의 온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뭐라고?"
방등운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앞으로 성큼 다가와 서문웅의 옷깃을 움켜잡으며 다그쳤다.
"다시 말해 봐라!"
서문웅은 그 초조하고 비통한 모습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
그는 천천히 방등운의 팔을 밀어내며 말했다.
"당신 아우가 죽었단 말이오."
방등운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막내아우의 무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강호에서 손꼽히는 몇몇 고수를 제외하고는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조차 불가능했기에, 죽었다는 말은 더더욱 믿기 힘들었다.
방등운은 차디찬 시선으로 서문웅을 노려보며 입가에 냉혹한 웃음을 띠었다.
"믿지 못하겠군. 서문웅,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인가?"
서문웅은 탄식하며 말했다.
"참말이오. 내 어찌 이런 일로 당신을 속이겠소!"
방등운이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은 궤계가 워낙 깊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니, 본인에게 유리하다면 술수와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쯤은 예삿일이 아니지."
서문웅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하나같이 이토록 모질다는 사실에,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어려웠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 마음이오. 나는 임종 직전 당신 아우가 부탁한 대로 부고를 전했으니, 이제 내 할 일은 다했소."
방등운이 냉소를 머금고 물었다.
"내 아우가 죽었다면, 내가 가장 먼저 누구를 죽이려 할지 아는가?"
서문웅이 주춤하며 답했다.
"그야 당연히 아우를 죽인 흉수를 찾아야겠지."
방등운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틀렸소. 내가 가장 먼저 죽이고자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서문웅은 분노를 터뜨리며 외쳤다.
"네 아우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거늘, 어찌 나를 걸고넘어지는 것이냐!"
방등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대꾸했다.
"아우는 유령궁으로 떠나기 전 내게 일러두었지. 만약 자신이 불행히 죽게 된다면, 틀림없이 당신의 음모와 계략에 당한 것일 거라고. 당신이 우리 형제를 제거하려 한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까."
서문웅이 코웃음쳤다.
"동생을 죽인 원수가 누군지 묻지도 않고 먼저 나를 원망하다니, 그게 무슨 영웅의 도리란 말인가! 나에게 분풀이해 봐야 소용없소. 죽여야 할 흉수는 따로 있단 말이오!"
방등운이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내가 묻지 않아도 그자가 누군지 말해 주겠지. 아우를 죽일 정도의 실력자라면 언젠가는 당신도 죽일 자니까. 오늘 당신이 나를 찾아온 것도 결국은 내 힘을 빌려 그를 제거하려는 속셈 아니겠소? 내 말이 맞는지 틀린 지는 서문웅, 당신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서문웅이 살기등등하게 내뱉었다.
"그건 그쪽 생각일 뿐이고, 나 유령대제 서문웅은 강호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걸할 일은 없다! 네 아우를 죽인 자는 바로 회천검객 석지중이다. 내 할 말은 여기까지니,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말을 마친 서문웅은 품속에서 청옥 반지를 꺼내 방등운에게 내밀며 싸늘하게 덧붙였다.
"이것을 보면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오."
방등운은 반지를 낚아채듯 받아 들고는 살펴보더니 중얼거렸다.
"우리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반지가 맞군...."
서문웅이 득의에 찬 웃음을 지었다.
"그대 아우는 숨을 거두기 전, 내게 이것을 당신에게 전해달라고 했소. 형님이 이 반지를 보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면서 말이오. 이게 그의 유일한 유품이니 잘 간직하시오!"
방등운의 눈가에 흐릿하게 눈물이 맺혔다.
그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청옥 반지 뚫어지게 응시할 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에서 이상한 낌새를 챈 서문웅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였다.
"방 형,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운명의 장난이라 생각해야지. 노부는 이만 유령궁으로 돌아갈 터이니, 동생의 원수를 갚는 일에 대해서는, 나를 믿는다면 언제든 찾아와 상의하시오. 나 역시 목숨을 걸고라도, 석지중을 찾아내 아우의 한을 풀어주는 일에 함께할 것이오!"
그가 몸을 돌려 막 발걸음을 떼었을 때, 방등운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서문 형, 잠시만... 물어볼 것이 있소."
서문웅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방 형, 또 무슨 당부할 말이 남았소?"
방등운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내 아우의 죽음에는 당신도 절반의 책임이 있소!"
서문웅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내가 세심히 살피지 못한 탓에 벌어진 불찰이었소. 방 형, 나 역시 아우의 불행에 가슴이 찢어지는구려."
방등운은 히죽 웃으며 비꼬듯 말을 이었다.
"아우에게 베푼 은혜가 참으로 눈물겹군. 특히 천 리 길을 달려와 소식을 전해준 그 정성은 경탄스럽기까지 하구려. 그런데 서문 형, 내게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말해도 되겠소?"
"허!"
서문웅이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말씀하시오! 우리 사이에 숨길 게 무엇이 있겠소. 방 형이 묻는다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해 주리다."
방등운의 안광이 살기가 어렸다.
"내 아우가 죽기 전, 당신이 그에게 무언가 먹이지 않았소?"
서문웅이 멍해져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방등운의 얼굴에 노골적인 살기가 드리워지며,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번졌다.
"당신은 내 동생뿐만 아니라 문법상(文法相)에게까지 수작을 부렸지. 내 아우가 죽은 것은 전적으로 당신이 쓴 약물 때문이었어. 당신은 그걸 비밀이라 여겼겠지만, 동생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단 말이다!"
서문웅이 손사래를 쳤다.
"오해요! 그건 천부당만부당한 오해란 말이오!"
방등운이 비스듬히 한 걸음 다가서며 다그쳤다.
"당신은 그들에게 만성(慢性) 독물(毒物)을 먹였지. 석지중을 죽이고 나면 그 약효가 나타나게끔 안배하여, 대적(大敌)을 제거함과 동시에 동지들까지 일거에 소멸시키려 한 게지. 서문웅, 네놈의 심보가 참으로 독하구나!"
서문웅의 안색이 홱 변했다.
"방 형,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증거가 있소?"
방등운이 냉소하며 청옥 반지를 천천히 내밀었다.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라! 내 아우가 여기에 명명백백히 기록해 두었으니.... 자신의 몸에 흐르는 독을 감지했음은 물론, 문법상 또한 네놈의 궤계를 간파했다고 말이다. 두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네놈을 도울 마음이 없었지만, 당장 맞설 수는 없었으니 꾹 참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었지. 아우는 결국 부상을 당한 뒤, 아주 짧은 순간에 침(针)을 사용해 모든 전말을 이 반지에 새겨 넣었다. 네놈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겠지만."
서문웅이 반지를 가로채듯 뺏어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과연 그 위에는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힘든 미세한 글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그 짧은 시간에 이 많은 글자를 새겼다고...?"
방등운이 차갑게 대꾸했다.
"잊었는가? 우리 육조산(六诏山)이 무예뿐 아니라 침각(针刻) 조예로도 강호에 이름난 것을? 우리 가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침각술을 할 줄 알고, 심지어는 머리카락 한 올에 시 한 수를 새길 수도 있으니, 반지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다."
평생 남을 속이며 살아온 유령대제 서문웅이었으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방문열이 죽어가는 마당에 이런 수작을 부려 자신의 음모를 천하에 낱낱이 드러낼 줄이야!
그는 온몸을 엄습하는 소름에 부르르 떨었다.
대막 무림대회를 이용하여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도리어 자신이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마치 종말을 맞는 듯한 공포에 휩싸였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 형,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보시게. 이건 필시 아우가 오해한 것이오!"
방등운이 호통쳤다.
"내 아우가 비록 성정은 괴팍했으나, 남을 함부로 모함할 위인은 아니다! 피의 빚은 피로 갚는 법, 나는 형으로서 네놈에게서 그 피값을 먼저 받아내야겠다!"
서문웅은 깊이 경계하며 소리쳤다.
"이렇게 나오는 건, 너무 무도한 짓이 아니오?"
방등운은 잠시 멈칫하더니 차갑게 응수했다.
"아직도 부릴 수작이 남았단 말이냐! 서문웅, 오늘 네 발로 그물에 걸려들었으니, 온전히 도망치기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 서렸고, 치켜 올라간 눈썹 아래 차가운 안광이 서문웅의 전신을 꿰뚫을 듯 압박했다.
서문웅은 음산하게 웃으며 응수했다.
"이토록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니, 노부로서도 주먹이든 칼이든 손속으로 승부를 가릴 수밖에 없겠군. 방 형, 이건 자네가 날 부추겨 손을 쓰게 만든 것이네!"
"챙!"
하는 맑은 금속음과 함께 서문웅의 손에는 어느새 사방으로 한광(寒光)을 내뿜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검을 가볍게 휘둘러 허공에 비스듬히 광호(光弧)를 그려 보이고는, 신중한 자세로 방등운을 응시했다.
방등운이 냉소하며 비아냥거렸다.
"당신의 그 알량한 재주야 익히 알고 있지! 게다가 병기를 다루는 일이라면 당신은 나와 비교할 수 없어. 나의 한산대필(寒山大筆)은 아직 다른 적수를 만나본 적이 없다."
그는 웬만한 상대라면 좀처럼 꺼내지 않던 굵직한 한산대필을 천천히 꺼내 가볍게 쥐었다.
서문웅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분노하여 소리쳤다.
"그래 봤자 네놈이 나보다 얼마나 강하겠느냐! 내 결코 믿지 못하겠다!"
이 늙은 여우가 강호에서 독자적인 일파를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의 몸이 기묘하게 흔들리더니, 장검이 환영처럼 허공을 갈랐는데, 단 한 초식만으로도 그 공력의 심후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나 오늘 밤 그가 마주한 상대는 너무도 강했고, 육조산(六诏山)이 무림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괜한 일이 아니었다.
방등운은 코웃음을 치며 한산대필(寒山大筆)을 번쩍 들어 상대의 검날을 정확히 찍어냈다.
"띵!"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고 두 사람의 팔에 묵직한 진동이 전해지며 각자 다섯 자가량 뒤로 물러났으나, 이 한 번의 격돌로 방등운의 기량이 서문웅보다 한 수 위임이 증명되었다.
방등운은 신형을 가다듬자마자 다시 붓을 거머쥐고 매섭게 쇄도해 들어갔다.
유령대제 서문웅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신형을 수 척 높이로 솟구쳤고, 수중의 장검이 백색 광채를 뿜어내며 연달아 칠 검을 베어냈다.
두 절정 고수는 몸이 스치듯 맞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초를 주고받았는데, 이 격전은 즉시 천막 주변에 흩어져 있던 방등운의 부하들을 놀라게 했고, 그들이 일제히 장검을 뽑아 들고 서문웅을 겹겹이 포위하니, 이제 그가 이곳을 뚫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음이 급해진 서문웅이 악을 쓰듯 고함쳤다.
"방등운, 네놈이 사람을 너무 몰아붙이는구나!"
방등운이 손에 쥔 한산대필을 펼치는 솜씨는 거의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여서, 유령대제 서문웅은 숨을 쉴 틈조차 얻지 못했다.
방등운은 몇 수를 더 매섭게 몰아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대영웅이시여, 옛 위세는 다 어디로 갔소!"
서문웅이,
"좋다, 끝장을 보자!"
하고 포효하며 장검을 벼락같이 휘두르자, 가공할 경기를 동반한 한 줄기 섬광이 번개가 내리치듯 방등운의 허리께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방등운은 즉시 일갈하며 신형을 영활하게 비틀어 피하면서, 한산대필을 넓은 폭으로 휘둘러 커다란 원호를 그리고는, 곧장 그 중심을 향해 굵은 대필을 밀어 넣었다.
양측의 병기가 허공에서 뒤엉켰다가 다시 교차하는 순간, 한산대필의 예리한 붓끝에서 돌연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몇 줄기 검은 암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뿜어져 나왔다.
"으윽!"
서문웅의 입에서 단말마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오더니, 수중의 장검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핏물을 울컥 토해내고는 몸을 떨며 포효했다.
"비겁하구나! 암기로 사람을 해치다니!"
방등운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이 정도면 그나마 손에 정을 둔 것으로, 내가 작정하고 고통을 주려 했다면, 이리 편안하게 죽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이제 살지 못할 터, 이제 남은 것은 석지중뿐, 내 아우를 죽인 자는 그 누구도 살려두지 않겠다!"
서문웅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절규했다.
"너는 인간의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구나!"
그 말에 분노한 방등운이 달려들어 발로 그를 걷어차니, 서문웅은 바닥을 구르며 다시 한입 가득 선혈을 토해냈다.
방등운이 냉소했다.
"너를 죽이는 것은 돼지를 잡는 것과 다를 바 없거늘, 무슨 놈의 정 따위를 논하느냐!"
서문웅이 분노에 가득 차 울부짖었다.
"유령궁(幽灵宫)의 제자들이 반드시 네놈에게 복수할 것이다!"
방등운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그 귀신 소굴 같은 곳은 말도 꺼내지 마라!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미니까. 서문웅, 나를 더 자극하면 네놈의 소굴을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
서문웅이 안간힘을 다해 갈라진 목소리로 절규했다.
"너... 네 이놈...!"
하지만 이미 동공이 풀린 서문웅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몇 번 더 뒤척이더니, 끝내 절망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악행으로 점철된 생을 살아온 자가 그 죄업을 짊어진 채 황천길로 떠난 것이다.
인과응보의 굴레를 그는 죽기 직전의 찰나에야 비로소 깨달았으리라!
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口
‘딸랑딸랑’
고요한 사막에 한 가닥 동령(铜铃)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맑은 방울 소리는 공기를 가르며 퍼져 나가 아스라이 사라지는 듯 싶더니, 이내 다시 딸랑거리며 은은히 이어졌다.
붉은 말의 그림자와 그 위에 올라탄 백의의 기사...
끝없이 펼쳐진 누런 모래밭 위를 홀로 달리는 모습은 더없이 고독하고 적막해, 이 신비로운 기사의 비감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석지중, 사막의 신처럼 이곳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마치 은둔하는 유령처럼, 아무도 없는 곳,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을 숨기고자 떠나온 것이었다.
마치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처럼 묵연히 떠나는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이라곤, 전설 같은 무용담과 한 줄기 낭만적인 사랑 얘기뿐이었다.
서문웅의 죽음이 그의 귀에도 전해졌으나, 그는 방등운이 왜 그 노회한 여우를 죽였는지 짐작할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잊지 못할 이 땅을 홀로 배회하며, 이곳의 모든 것을 아쉬워했다.
모래 한 알, 돌멩이 하나조차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깊은 정으로 맺어져 있었다.
오늘 이 땅을 떠나면 다시는 이 사막의 풍정을 느끼지 못하리라.
그는 자신의 귀착점을 알고 있었고, 그를 기다리는 것은 끝없는 고독과 끝이 보이지 않는 추억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앞날에 대한 일말의 아득함과 지울 수 없는 서글픔이 깊게 고여 있었다.
탄식만 내뿜던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며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평평이 이해하고 용서해 줄까?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구고 우울한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간절한 눈빛으로 사막 저편을 응시했는데,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눈빛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거친 사막의 끝자락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석지중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나직이 읊조렸다.
"드디어 그가 오는군. 이제 내 염원도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겠지...."
나타난 이는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의 당산객(唐山客)이었다.
예전보다 다소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눈처럼 흰 머리칼은 그를 상징하는 표식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석지중을 보자마자 물었다.
"석 형, 나를 이토록 급히 찾는 이유가 무엇이오?"
석지중은 격동된 마음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당 형, 간곡히 청할 일이 있소!"
당산객이 말했다.
"석 형, 소제는 몇 차례나 형의 자비로 목숨을 건진 몸으로, 형께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뿐이니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시오."
석지중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 형, 평평은 명분상 여전히 그대의 아내이고, 당 형 또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내가 떠나기 전에 부탁하오. 예전처럼 변치 않는 사랑으로 그녀를 아끼고 보살펴 주시오. 그녀는 좋은 아내가 될 것이니, 부디 두 사람이 백년해로하기를 바라오!"
당산객은 멍해져서 물었다.
"떠난다니.... 석 형, 대체 무슨 말씀이오? 평평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인데, 어찌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려 하는 거요! 소제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거늘, 석 형, 그녀를 상심하게 해서는 안 되오!"
석지중이 다시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소. 나는 본래 사해(四海)를 떠도는 나그네였고, 이제 멈췄던 길을 다시 떠날 때가 된 것뿐이오. 당 형은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으로, 그녀는 그대 곁에서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오.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평생의 한이 될 것이오!"
당산객이 격앙된 음성으로 외쳤다.
"그녀가 석 형에게 품은 마음, 그리고 그녀를 향한 석 형의 마음이 어찌 참된 정이 아니란 말이오! 두 사람이 원만한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이는 천하 사람 모두가 통곡할 한스러운 일이 될 것이오!"
석지중의 신색이 처연하게 변하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참된 정이란 게 대체 무엇이오? 결국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불과하오. 서로 나누었던 수많은 약속을 모두 다 마음에 담아두었다간 평생 고통 속에서 살 뿐이지요. 당 형, 이것이 내가 당신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니,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마시오. 평평은 그저 순수한 여인일 뿐이니..."
당산객이 정색하며 무겁게 말을 가로챘다.
"남녀 간의 정이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오. 진정 서로 사랑한다면 지난날의 기억 또한 한 점 후회가 없어야 하지 않겠소? 석 형, 당신의 이 선택은 세상에 큰 한을 남기는 일이라 생각하오."
석지중이,
"당 형, 더는 말하지 마시오!"
하고는 허리에 찼던 금붕묵검(金鹏墨剑)을 풀었다
반평생을 함께해 온 신검을 깊은 애정이 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에는 차마 떼어내지 못하는 미련이 가득했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묵검은 내 두 번째 생명이자, 의지해 온 벗이오. 이것을 평평에게 주고자 하니, 부디 그녀에게 전해주고, 나 대신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시오!"
당산객은 눈물을 머금은 채 검을 받아 들며 물었다.
"석 형, 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이오?"
석지중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가야만 할 곳이오. 시간은 기억을 무디게 할 거고, 머지않아 그대들은 나를 잊겠지. 흐르는 물은 막지 말고, 가야 할 사람은 보내주시오."
바로 그때였다.
왼편의 낮은 모래언덕 너머에서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은밀하게 다가왔다.
석지중과 당산객은 즉각 그가 품은 사악한 기운을 감지하고 시선을 돌렸다.
방등운(房登云)이었다.
얼굴에 살기가 가득한 방등운이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석지중, 기다리고 있었다!"
석지중은 차갑게 말했다.
"전해 듣자니 당신이 서문웅을 죽였다던데, 같은 무리가 서로를 해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방 형, 그 이유나 들어봅시다."
방등운은 대답 대신 차갑게 쏘아붙였다.
"내 아우를 죽인 자가 네놈이 맞느냐?"
석지중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묻는가? 흑도 인물 하나가 죽는 것은 강호의 복이니, 내가 한 일에 거리낄 것은 없소."
방등운은 내심 당황했다.
석지중이 이토록 거침없고 단호하게 응수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의 두 눈이 이글거리며 핏발이 섰고, 몸을 부르르 떨며 싸늘하게 외쳤다.
"내 아우와 무슨 깊은 원한이 있기에 기어이 목숨까지 앗았단 말이냐!"
석지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우의 죽음만을 슬퍼할 줄 알지, 그가 해친 수많은 목숨은 생각지도 않는군. 그가 당신과 서문웅의 꾐에 빠져, 강호에 얼마나 많은 화를 일으켰는지 아시오? 그대는 형으로서 그를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부추겨 악행을 일삼게 만들었으니, 오늘의 결과는 전적으로 당신 책임이요!"
방등운이 차갑게 내뱉었다.
"참으로 쉽게도 지껄이는구나!"
석지중은 냉담하게 대꾸했다.
"나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오!"
"개소리 마라!"
방등운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한 걸음 내디뎌 오며 외쳤다.
"내 아우를 죽인 것도 모자라 그 책임까지 내게 떠넘기다니.... 석지중, 네놈은 참으로 가증스럽구나! 우리 육조산(六诏山)의 후손들은 강호에서의 모욕을 용납하지 않는다. 네가 내 아우에게 했던 짓 그대로 되갚아 주마!"
석지중이 냉소를 머금었다.
"육조산의 대가 끊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순순히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방등운이 낮게 웃으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떠나는 건 어렵지 않지. 네놈의 머리통을 챙긴 뒤라면 말이야!"
당산객이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한마디했다.
"친구, 현명하게 행동하시오. 이곳은 당신이 함부로 날뛸 자리가 아니오!"
"퉤!"
방등운이 경멸하듯 침을 내뱉으며 일갈했다.
"당(唐)가야, 네놈은 줏대도 없단 말이냐? 제 마누라를 빼앗은 놈에게 염치도 없이 아부나 떨고 있다니. 나라면 부끄러워서 진즉에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갔을 것이다!"
이 말은 너무 지나쳤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당산객의 얼굴빛이 홱 변한 것은 물론, 석지중조차 참기 힘든 모욕감을 느꼈다.
당산객이 성큼 앞으로 나서며 살기 띤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나로 하여금 손을 쓰게 만드는구나!"
방등운이 싸늘하게 받아쳤다.
"내가 찾는 건 네놈이 아니니, 당가 네놈은 저리 비켜나 있어라!"
당산객이 분노로 크게 포효하며 달려들려는 순간, 석지중이 손을 뻗어 그를 가로막았다.
"그의 말이 맞소. 이 일은 나로 인해 비롯된 것이니 내 손으로 매듭지어야 할 일이오. 당 형, 이 수모를 잠시만 참고 내게 맡겨주시오. 저자는 방금 내뱉은 말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오."
방등운이 굵다란 한산대필(寒山大筆)을 꺼내 허공에서 한 번 털어내니, 붓끝에서 웅웅거리는 파공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짙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가 고함을 질렀다.
"석지중! 오늘 네놈을 죽이지 않고서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
석지중이 싸늘하게 응수했다.
"너무 큰소리치지 마라. 혀를 지나치게 놀리면 몸을 상하게 하는 수가 있다!"
방등운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굵직한 대필을 사정없이 휘둘러 왔는데, 그는 오늘 목숨을 걸 작정이었는지 내놓는 수마다 매서운 살초였다.
맨손으로 맞서는 석지중은 다소 버거운 듯, 순간적으로 몇 걸음 뒤로 밀려났다.
당산객(唐山客)은 형세가 급박해진 것을 보고 금붕묵검(金鹏墨剑)을 건네며 소리쳤다.
"석 형, 이 검을 받으시오!"
석지중이 장풍을 한 차례 내뿜으며 말했다.
"아니오. 신검에 다시는 피를 묻히고 싶지 않소. 내게 대적할 방도가 있으니 안심하시오!"
방등운이 괴이한 수법으로 연거푸 두 초식를 몰아치며 냉소를 터뜨렸다.
"석지중, 죽는 게 두렵다면 차라리 당당하게 그 보검을 받아 들지 그러냐!"
석지중이 신형을 유령처럼 스르륵 움직여 피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나를 너무 얕보는군."
그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장심(掌心)에서 한 줄기 유려(流丽)한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백옥처럼 청아하고 서늘한 그 광화(光华)는, 지난 몇 년 사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석지중의 ‘단은수(断银手)’를 의미했다.
석지중이 방등운을 응시하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맞게 될 거다!"
방등운이 한산대필을 휘두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입 닥쳐라! 그깟 개 앞발 같은 손바닥이 뭐가 무섭단 말이냐!"
석지중은 끝내 미망(迷妄)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상대를 보며 암연히 탄식했다.
그는 늠연(凛然)하게 정기를 들이마시고는, 서늘한 광망을 머금은 오른 손바닥을 가볍게 밀어냈다.
"윽!"
수정처럼 맑은 광채가 물결치듯 훑고 지나가자, 방등운은 나직한 신음과 함께 한 모금의 선혈을 와락 내뿜더니 신형이 바닥으로 크게 나뒹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그는, 원독에 찬 눈빛으로 석지중을 노려보았다.
"왜... 어째서 날 죽이지 않았지?"
석지중이 담담히 대답했다.
"너희 방가(房家)의 대를 끊어버리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방등운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나는 반드시 다시 너를 찾아와 원수를 갚을 것이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석지중이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네게 이제 그럴 능력은 없다. 네 목숨은 거두지 않았지만, 전신의 무공은 모두 폐했기 때문이다. 이제 무공으로 남을 해칠 생각 말고 부디 새사람이 되어 살아가길 바란다."
"네놈이……!"
방등운은 분노로 몸을 떨며 울부짖었다.
"참으로 독랄한 수단이로다!"
석지중은 씁쓸하게 말했다.
"네가 나를 어떻게 비난하든 상관없고,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음을 알 뿐이다."
그때였다.
고요하던 대막에 갑자기 ‘쾅, 쾅!’ 하는 거대한 울림이 두 차례 울려 퍼지더니, 자욱한 모래 먼지가 사방에 가득 일며 황금빛 안개처럼 온 하늘을 뒤덮었고, 바닥의 모래와 잔돌들이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가듯 갑자기 소용돌이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산객이 경악하며 외쳤다.
"유사(流沙)다!"
석지중이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출현이오. 당 형, 이제 곧 붕성(鹏城)을 보게 될 것이오!"
"무엇이라고!"
방등운이 경악하며 외쳤다.
"붕성이 여기에 있다고?"
석지중은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대막에서 오랫동안 붕성을 찾아 헤맨 이 사도(邪道)의 고수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혐오감이 일었으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붕성은 스스로 움직이는 성이다. 고로 그 누구도 진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지!"
방등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럼 너는 붕성이 이곳에 나타날 줄 어찌 알았단 말이냐?"
석지중은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나는 다르지. 나는 그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으니, 언제 어디서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도 아는 방법이 있소. 방 형, 얻을 수 없는 것은 억지로 탐한다고 구해지지 않는 법이오. 부디 깨닫기를 바라오."
방등운은 갑자기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멍하니 굳어 버렸다.
그러고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신비로운 빛무리를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경이로운 광경에 완전히 압도당한 듯했다.
이윽고, 하늘을 가득 채운 노을 사이로 만 갈래 금빛 서광이 쏟아져 내리며 눈부신 광채를 사방에 흩뿌리기 시작했고, 그 찬란한 빛무리 속에서 황금으로 지어진 성 한 채가, 반공(半空)의 운무(云雾) 속에 떠오르는 듯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형체가 또렷하지는 않았으나, 신비로운 붕성(鹏城)의 윤곽만큼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히히힝!"
한혈보마 대홍(大紅)이 갑자기 맑고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며, 네 발굽으로 땅을 박차며 이리저리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석지중이 손짓해 부르자 보마는 곧 다가왔다.
석지중이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대홍, 이제 작별이구나!"
오랜 세월을 함께한 충직한 노우(老友)를 바라보는 석지중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고, 대홍 역시 이별을 예감한 듯 석지중의 얼굴을 핥았다.
석지중이 당산객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 형, 이 말을 형께 맡기겠소."
당산객은 고개를 저었다.
"내게는 그럴 복이 없소. 석 형, 제발 이러지 마시오!"
석지중이 꿈을 꾸듯 몽환적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보검(宝剑)은 옥녀(玉女)에게 바치고, 명마는 영웅에게 보내라고 했소. 당 형, 부디 나의 이 간곡한 마음을 저버리지 마시오!"
말을 마친 석지중은 적막한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모래 그림자 속에 어른거리는 신비한 성을 향해 비스듬히 몸을 날렸다.
그가 허공을 가로질러 붕성의 황금 대문 앞에 이르자, 육중한 황금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석지중은 문가에서 몸을 돌려 밖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당산객의 얼굴에 일그러지듯 경련이 일었다.
그는 고통스레 손을 흔들며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석 형, 당신은 사막의 신이오(沙漠之神)!"
모래 그림자 속에서 석지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으시오. 지난 모든 것을 잊어버리시오!"
흐르던 유사(流沙)가 다시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자, 거대한 황금성은 사막 위를 천천히 움직였고, 하늘에서는 또다시 쿵쾅거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짙은 모래와 자갈이 흩날리며 시야를 가렸고, 눈부신 금빛은 점차 흐릿해져 갔다.
"지중—!"
날카로운 절규가 허공을 가르며 울렸다.
당산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을 탄 동방평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휘날리며 이곳을 향해 미친 듯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은 당산객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가 고통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평평!"
"아—!"
동방평이 애끓는 신음을 내뱉으며 유령처럼 비산하는 모래 안개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가 그곳에 닿았을 때, 붕성은 이미 흔적도 없이 지하로 사라진 뒤였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얼굴을 감싼 채 흐느꼈다.
"지중, 어째서 내게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는 건가요...!"
당산객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위로했다.
"평평, 그는 사막의 신이 되었소. 부디 기운 차리고 마음을 추스르시오!"
동방평이 천천히 고개를 들다가 문득 당산객의 손에 들린 금붕묵검(金鹏墨剑)을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은 다시 미어졌다.
"그 사람의.... 그의 검이잖아요....!"
당산객은 두 손으로 검을 받쳐 그녀에게 내밀며 탄식했다.
"그가 당신께 남긴 것이오."
동방평은 얼굴의 눈물을 살며시 닦아냈다.
마음속은 한없이 공허하고 아득하기만 해, 지난 기억들마저 점차 흩어지고 흐릿해져 갔다.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그가 우리를... 맺어주려 한 걸까요?"
당산객은 당황하여 말했다.
"아니오! 나 역시 결코 그런 생각은 품은 적이 없고...."
동방평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당산객, 나를 용서하세요.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당산객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비록 내가 여전히 그대를 연모할지라도, 그대의 결정을 존중할 것이오."
동방평이 쓸쓸하게 말했다.
"당신이라면 그러실 줄 알았어요. 저도 이제 떠납니다. 영원히 안녕히....."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다시는 백룡호(白龙湖)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부디 백룡호의 주인 자리를 이어받아 주세요. 늘 당신을 축복할게요."
당산객은 멍하니 굳어져 물었다.
"평평,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요?"
동방평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잊으세요. 지난 모든 것을 잊어버리세요!"
동방평은 금붕묵검을 등에 메고 홀로 말에 올라, 그녀에게 슬픔만을 안겨준 이 땅을 뒤로하고 멀리 내달렸다.
아득한 하늘가에서 한 줄기 은방울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지더니, 황량한 사막은 다시 죽은 듯한 고요에 잠겼다.
당산객은 길게 탄식하며 대홍(大红)의 목에 매여 있던 고삐를 풀어주고 말의 엉덩이를 가볍게 찼다.
그러자 한혈보마(汗血宝马)는 앞발을 높이 들고 길게 울부짖더니,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의 지평선을 향해 광풍처럼 질주하여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텅 빈 사막.
외로운 기마의 그림자.
만 리에 펼쳐진 맑은 하늘.
바람마저 잠든 고요.
(대막붕정 完--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