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 十三 回. 오결얼연(誤結孼緣)....잘못하여 악연을 맺다. >
그녀가 그의 허리에 매인 비단 끈을 풀어 느슨하게 만들었을 때야, 그는 비로소 그녀의 손을 붙잡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내가 처자의 이토록 정결한 몸을 모욕할 수는 없으니, 제발 놓아다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말투였으니, 그는 여전히 하화련을 소월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화련(夏火蓮)은 과연 조금 의아해했으나, 속으로 추오상을 사모해 온 지 오래였기에 자연히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반쯤 밀착시키며 교염하게 웃었다. “상공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궁에 들어온 그날부터 화련의 몸은 진작 상공의 것이었습니다.”
화련(火蓮)이라는 두 글자는 마치 찬물 한 바가지와 같아서, 추오상의 정욕의 불꽃을 단숨에 꺼뜨리고 영민한 지혜를 깨워주었다.
여색을 가까이하여 평생 익힌 검법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 따위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다른 여인을 소월매의 대용품으로 삼아 자신의 갈망을 채우려 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그는 즉시 하화련의 몸을 밀쳐내려 했으나, 이내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까 두려워졌다. 이에 아금바리를 물고 손가락을 튕겨 하화련의 혼혈(기절하는 혈자리)을 찔렀다.
하화련의 알몸이 무력하게 흘러내렸다. 추오상이 몸을 돌려 일어나 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 줄기 달빛이 마침 하화련의 허리께를 가로질러 비추고 있었기에, 추오상의 눈에는 너비 한 치쯤 되는 옥처럼 하얀 알몸이 들어왔다. 나머지 부위는 어두워 분간하기 어려웠으나, 추오상의 눈에는 마치 수많은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이는 듯했다. 물론 그것은 소월매의 눈동자였다.
그는 하마터면 다시 손을 들어 하화련의 혈도를 풀어줄 뻔했으나 간신히 참아냈다. 지혜가 아직 흐려지지 않은 찰나에 얼른 흰 천 이불보를 끌어당겨 하화련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버렸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하화련의 신체가 이불보 속으로 가려지자 추오상의 마음속 환상도 함께 사라졌다. 당연히 그의 심境도 점차 평온해졌고, 마침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추오상은 문득 들려오는 나직한 대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검이란 만인적(萬人敵 :만 명을 대적함)의 학문이기에, 검을 익히는 사람은 정, 기, 신, 신법, 보법뿐만 아니라 눈과 귀 역시 단련해야 한다. 어두운 밤에 공방을 주고받을 때는 귀와 눈의 공력 높낮이가 승부를 가르는 큰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 대화 소리는 지극히 미미하여 엄밀히 말하면 여름 벌레의 울음소리보다도 가늘었으나, 추오상의 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은 남녀 한 쌍이었는데, 남자는 강상추라는 노어옹이었고 여자의 목소리는 무척 낯설었다.
강상추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네게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 일렀거늘, 어찌하여 또 돌아온 것이냐?”
그 여자의 목소리가 대꾸했다. “아버님 말씀이 참으로 기이하군요! 여기가 제 집이거늘 어찌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강상추가 말했다. “내 진작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이제부터 내게 너 같은 딸은 없는 것으로 치겠다고.”
추오상은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다. 알고 보니 강상추의 딸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찌하여 부녀간의 정이 이토록 단절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으니, 그 여자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모질게 딸을 모른 척하시더라도, 딸 된 자는 차마 모질게 아버님을 모른 척할 수가 없더이다.”
강상추가 말했다. “네가 나를 보러 오는 횟수를 몇 번만 줄여도 내가 몇 년은 더 살 것이다.”
여자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버님! 사실 저도 돌아와 아버님을 노엽게 해 드리고 싶지는 않았으나,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왔습니다.”
강상추가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속히 하거라!”
여자가 말했다. “만약 저를 딸로 인정하지 않으실 양이면, 앞으로 제 사생활에 간섭하지 마십시오.”
강상추가 말했다. “네가 스스로 몸가짐을 깨끗이 하지 않는다면, 나는 여전히 너를 엄히 훈계할 수밖에 없다.”
여자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를 딸로 여기지 않으신다면서 어찌 제 일에 참견을 하려 하십니까.”
강상추가 말했다. “네가 강씨 성을 버리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다.”
여자가 말했다. “오 년 전에 저는 이미 강씨 성을 버렸습니다. 게다가 밖을 떠돌 때도 강씨 성의 명호를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명호’라는 두 글자가 나오자 추오상의 마음이 문득 움직였다. ‘혹시 이 처자 또한 무림의 인물인 것일까?’
추오상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상추가 씩씩거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다! 내가 이제부터 네 일에 절대 관여하지 않을 터이니, 너 역시 내게서 멀리 떠나거라. 만약 내 눈에 띄기만 하면 네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놓을 것이다.”
여자가 냉소하며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그 기운을 아끼셔서 물고기나 몇 마리 더 낚으시지요!”
말소리가 끊기자 추오상의 귀에 지극히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고, 이어 노어옹의 무거운 탄식 소리가 울렸다.
추오상은 얼른 신발을 꿰어 차고 단검을 움켜쥔 채 문을 박차고 나가 그 뒤를 쫓았다.
그에게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효도라곤 눈곱만큼도 모르는 이 여인의 생김새가 대체 어떠한지 보고 싶을 뿐이었다.
추오상의 움직임은 무척 빨랐으나 사방의 지형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나무 숲이 드넓은 데다 숲 밖은 끝이 보이지 않는 풀숲이었기에, 그가 쫓아 나갔을 때는 쏟아지는 달빛 아래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추오상에게는 그 여인을 반드시 쫓아가 잡고야 말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사방에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자 이내 걸음을 늦추었다.
하지만 초가집으로 곧장 돌아갈 마음도 나지 않았다. 이 장의 시간은 대략 축시 초(새벽 1시 무렵)였고, 한 줄기 환한 달빛은 이미 중천을 지나 있었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 위에는 돛배 한 척 보이지 않았고, 고요한 대지 위에도 사람 자취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추오상은 달밤의 경치가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미처 몰랐기에, 그대로 강변을 따라 상류를 향해 걸어갔다. 편안히 걸음을 옮기며 완만하게 한참을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대나무 숲과 초가집은 보이지 않았다.
추오상은 한껏 흥이 돋아 걸음에 속도를 내며 강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한숨에 걸어간 거리가 무려 이십여 리에 달했다.
저 멀리 앞쪽에 대나무 숲이 나타났는데,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강남에서 꽤 명성이 자자한 자죽(붉은 대나무)이었으니, 명귀한 퉁소들은 대개 이 대나무로 만들어지곤 했다. 추오상은 걸음을 늦추고 그 대나무 숲을 향해 걸어갔다.
대나무 숲을 뚫고 들어가 보니, 숲 한가운데에 작고 아담하면서도 정교하게 지어진 초가집 한 채가 보였다. 문 양쪽에는 대나무로 만든 창살이 있었고 눈부시게 하얀 창호지가 발라져 있었는데, 종이 너머로 일렁이는 촛불 그림자가 새어 나왔다.
추오상은 괜히 남의 집을 훔쳐본다는 혐의를 살까 두려워 몸을 돌려 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초가집 문이 삐걱 하는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녹색 옷을 입은 한 미인이 문을 열고 몸을 내밀었다.
추오상은 그녀를 보자마자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그 녹색 옷의 미인은 늘 그의 마음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던 고운 그림자, 바로 소월매였다.
소월매의 얼굴에도 약간 놀란 기색이 스쳤으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추 부궁주께서 어찌 이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추오상이 숨을 깊게 들이쉬며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말했다. “소 처자께서 이곳에 머물고 계신 줄은 미처 몰랐다.”
소월매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연한 만남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 비록 우연한 만남이라 하나 아주 우연만은 아닌 것이, 나 역시 마침 소 처자를 찾으려던 참이었다.”
소월매가 말했다. “나를 찾으시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처자에게 밝혀두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소월매가 몸을 비켜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안으로 드시지요! 앉아서 이야기 나누는 편이 더 수월할 것입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소월매를 보기 전에는 온갖 사악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추오상이었으나, 막상 살아 숨 쉬는 그녀가 눈앞에 다가오자 오히려 마음이 맑게 가라앉았다. 그리하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불편하지 않겠느냐?”
소월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어찌 이리 고리타분하십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추오상으로서도 더는 거절하기 겸연쩍었기에, 가볍게 이를 악물고 발을 내딛어 초가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소월매의 곁을 지나쳐 갈 때 코를 찌르는 향긋한 바람이 불어왔고, 그의 마음은 또 한 번 크게 요동쳤다. 이 때문에 방 안으로 들어선 후에는 그저 실내 내부의 집기들만 두루 살필 뿐, 한동안 감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비록 초가집 한 칸이었으나 무척이나 우아하고 깔끔했다. 안방 안의 대나무 탁자와 의자 몇 개는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고 먼지 하나 앉지 않은 상태였다.
오른쪽 방에는 문이 따로 없었고 그저 천 가림막 하나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가림막이 높이 걷혀 있어 방 안의 집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장대와 밝은 거울, 비단 이불과 자수 침상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로 보아 이곳은 소월매가 잠시 머무는 임시 거처가 아니라, 이미 여러 해 동안 살아온 향방(여인의 방)이 분명해 보였다.
방 안의 화사한 장식들을 보니 추오상의 마음은 다시금 흔들렸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앉으십시오. 여기에 오셨으니 손님이십니다. 내가 가서 차 한 항아리를 내오겠습니다.”
추오상은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대나무 의자에 앉으며 손을 내저었다. “처자는 번거롭게 구지 마라. 나는 몇 마디 말만 전하고 곧 떠날 터이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어찌 이리 급하십니까? 외할머님께서 금릉으로 가셔서 내일 밤에나 돌아오실 터라, 나 홀로 이 강가 초가집에 머물자니 마음이 내내 불안했습니다. 마침 추 부궁주께서 오셔서 촛불을 밝히고 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으니, 이 긴 밤의 적막함을 달래기에 딱 좋습니다. 잠시만 앉아 계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녀는 초가집 뒤편으로 걸어 들어갔다.
추오상은 속으로 은밀히 생각에 잠겼다. 소월매의 태도가 금릉에 있을 때와는 크게 달랐으나, 그 속사정까지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잠시 후 소월매가 뜨거운 차 한 항아리와 두 개의 찻잔을 받쳐 들고 나왔다. 그녀는 차를 따르며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그날 밤 금릉 객잔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부디 잊어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이 뜨거운 차 한 잔조차 부궁주께서는 감히 입에 대지 못하실 것입니다.”
추오상은 그녀가 하는 말이 자신이 ‘난성향(亂性香 :이성을 잃게 만드는 향)’을 들이마셨던 일을 가리킴을 알아차렸고, 마음속으로 과연 조금 불쾌한 감정이 일었다.
그러나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그날 밤의 일은 내 잊을 수 있을지 모르나, 처자가 내뱉은 몇 마디 말은 내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소월매가 말했다. “대체 어떤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처자는 하류배의 수단으로 하류배를 대하는 것은 절대 과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처자에게 물어보고 싶구나. 대체 어떤 면을 보고 나를 하류배 같은 인물로 단정 지은 것이냐?”
소월매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그저 추 부궁주께서 도동돈과 교제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것뿐입니다...”
추오상이 중얼거렸다. “성급한 결론이라? 그렇다면 처자는 지금은 나를 하류배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냐?”
소월매가 말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 역시 감히 추 부궁주를 안으로 모셔 차를 대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처자의 지금 태도가 어찌 이전과 이토록 크게 다른 것이냐?”
소월매(蕭月梅)가 웃으며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 이곳에 손님으로 오셨으니, 나는 당연히 웃는 얼굴로 대해야 마땅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훗날 다른 곳에서 마주치게 되더라도, 처자는 여전히 내게 차가운 말투와 매서운 안색을 보여줄 것이냐?”
소월매가 말했다. “오늘 밤 촛불을 밝히고 긴 대화를 나누고 나면, 형세가 어찌 바뀔지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내게는 그런 과분한 바람은 없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그저 내가 뒤이어 할 말을 내뱉은 후에도 처자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대처해 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그리 놀라운 말씀을 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귀를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처자는 아마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소월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내 예상 적중의 범위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추오상이 어조를 무겁게 가라앉히며 말했다. “나는 처자에게 사십구 일 동안 검을 봉인하겠다고 약속했었다. 내 검 아래 목숨을 잃은 그 가련한 어린아이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고 계시니 참으로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추오상이 천천히 말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저께 밤에 이미 그 약속을 깨뜨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소월매는 지극히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염라대왕을 마주하고 검을 뽑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추오상이 미묘하게 멍해지며 말했다. “처자는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었단 말이냐?”
소월매가 말했다. “나는 비록 이곳에 살고 있으나 외할머님께서 금릉을 드나드시니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내 마음이 놓이는구나. 처자가 내가 신의를 저버린 것을 탓하지 않으니 말이다.”
소월매가 말했다. “신의와 목숨을 서로 견주어 보면 목숨이 더 중한 법이니, 자연히 나무랄 수 없는 일입니다.”
추오상이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향후 내가 여전히 검을 봉인하는 구속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소월매가 한참 동안 추오상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 스스로 결정하십시오!”
추오상이 한동안 멍해지더니 이내 말했다. “처자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만 같구나.”
소월매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추 부궁주께서 검을 봉인하겠다는 약속을 너무 무겁게 여기신 모양입니다.”
추오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며 말했다.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다. 향후에는 내 온 힘을 다해 검을 봉인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터이니,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겠다.”
소월매 역시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차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으십니까?”
추오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되었다! 다른 날 다시 와서 폐를 끼치마.”
소월매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방 안으로 가셔서 물건을 하나 보아주셨으면 하는데, 기꺼이 응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추오상이 한 자락 멍해지며 말했다. “불편하지 않겠느냐?”
소월매가 말했다. “남녀 간의 일이라 불편하다 하십니까? 추 부궁주께서도 정말 너무 고리타분하십니다. 무림의 남녀는 그런 부질없는 염려를 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른바 군자는 어두운 방에서도 속이지 않는다 했으니, 어서 들어오십시오!” 말을 마치고 그녀가 먼저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추오상은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뒤따라 들어갔다. 본래 그럴 마음이 없었으나 그의 두 발이 제멋대로 움직인 탓이었다.
소월매는 그에게 앉으라는 권유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다가가 단향 한 이불에 불을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는 향기로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코를 찌르는 향내가 가득 찼다.
추오상의 마음이 크게 출렁였다. 본래 당장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발밑에 마치 뿌리가 내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월매가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 얹은 것을 풀어내리니, 검은 구름 같은 긴 머리타래가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가다듬는 동시에 물었다. “지금이 대략 어느 시진쯤 되었습니까?”
추오상이 나직하게 말했다. “대략 인시 초(새벽 3시 무렵)는 되었을 터다.”
소월매가 말했다. “진시 초(아침 7시 무렵)에 해가 뜨니, 아직 두 시진은 남았군요.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
추오상은 지금 이미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상대방이 내뱉은 말속의 함의를 용케 알아차렸기에 심경이 더욱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물건 하나를 보는데 두 시진이나 걸린단 말이냐?”
소월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는 깃을 풀어헤쳐 눈부시게 하얀 목덜미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여인의 신체에서 가장 매혹적인 부위는 아니었으나, 추오상의 심경을 크게 뒤흔들어놓기에는 충분했다. 다행히 그녀의 두 눈동자가 이전에 금릉에서 보았던 것처럼 형형하게 감정을 전해오지는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진작에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했을 터였다.
소월매가 그를 한참 동안 응시하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이는 이 물건을 마주하고 평생을 보아도 여전히 부족하다 여기지만, 또 어떤 이는 본척만척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추 부궁주께서는 전자이십니까? 아니면 후자이십니까?”
추오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
소월매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추 부궁주 곁에는 늘 네 명의 희가 따르고 있으니, 필시 여인의 겉모습을 품평하는 데 능하겠지요?”
추오상이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처자의 오늘 밤 태도가 너무도 크게 변하니, 내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소월매가 고개를 살짝 가누고 교태 가득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추 부궁주가 보시기에 내 머리카락이 검고 윤기가 흐릅니까?”
추오상이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내뱉었다. “과연 검고 윤기가 흐르는구나.”
소월매가 말했다. “눈썹은 가늘고 길며 고운가요?”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
소월매가 뒤이어 묻는 속도가 극히 빨라졌다. “뺨은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듯합니까? 입술은 붉고 치아는 하얀가요? 눈은 크고 요염합니까?...”
추오상은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저 으응 소리만 연거푸 내며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소월매가 갑자기 속적삼의 단추를 연달아 풀어헤치며 웃으며 물었다. “내 가슴이 충분히 희고 고운가요?”
추오상은 자신도 모르게 멍해지고 말았다.
새빨간 가슴싸개 윗가장자리로 눈부시게 하얀 가슴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붉은 빛깔은 추오상의 정욕의 불꽃에 불을 지폈고, 하얀 빛깔은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으며, 숨소리 또한 이내 가쁘게 몰아쉬어졌다.
추오상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부르짖었다. “소 처자...” 뒤이어 할 말이 목구멍에 턱 걸려 차마 내뱉지 못했다. 지금은 결코 ‘난성향’을 들이마신 상태가 아니었으나, 그가 느끼는 기분은 그날 밤 난성향을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소월매는 옷깃을 열어젖힌 후에도 고운 팔을 내리지 않은 채, 여전히 계속해서 네 번째 단추를 풀어내리며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 부궁주!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을 방 안으로 모셔 보여주려 한 물건입니다.”
추오상이 갑자기 크게 소리쳤다. “처자, 잠시 멈추어라!”
소월매가 과연 손길을 멈추더니 버들잎 같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무슨 부당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처자의 본뜻은 아마도 그저 나의 무공을 무너뜨리려는 것일 터다. 하지만 처자는 그와 동시에 자신의 정결한 신체 또한 무너뜨리게 되니, 처자는 부디 삼사하거라.”
소월매가 까르르 교태롭게 웃으며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어찌 내가 당신의 무공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그것이 처자의 초심이었으니, 필시 도중에 어떤 연고로 뜻을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월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아마 그런 독살스러운 생각을 품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변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나는 믿지 않는다. 처자는 그리 쉽게 초심을 바꿀 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월매가 말했다. “내가 당신이 도동돈을 찔러 죽이는 것을 막았고, 검을 봉인하게 강요했으며, 당신에게 금릉에서 커다란 굴욕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보아하니 당신은 나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더군요. 설령 내가 당신을 무너뜨리려는 마음을 품었다 한들, 지금은 차마 손을 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추오상은 마음속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는 그의 가슴속 가장 깊은 비밀이었는데, 상대방에게 단박에 간파당하고 만 것이었다.
한참 동안 정신을 잃고 있다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여전히 나의 무공을 무너뜨리게 될 뿐이다.”
소월매가 말했다. “내가 반드시 당신과 정을 통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내 신체가 당신에게 진정어린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을 뿐입니다.”
추오상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처음 마주쳤을 때 처자는 내게 적의를 품고 있었으나, 나는 처자에게 조금도 원망을 품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처자의 인상이 가슴 깊이 각인되었다. 처자가 만약 그 고운 몸을 온전히 드러낸다면, 그 뒷감당은 상당히 두려울 것이다.”
소월매가 말했다. “당신의 뜻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많은 무림 선배들이 말씀하시기를, 생사의 현관은 깨뜨리기 쉬우나 정욕의 관문은 넘기 어렵다 하셨다. 일찍이 자질이 깊고 두터운 무림의 총아들이 정욕의 관문을 간파하지 못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거늘, 하물며 나 같은 평범한 범인이야 오죽하겠느냐. 처자는 부디 이 생각을 거두어라.”
소월매가 말했다. “당신의 말을 들으니, 마치 내게 정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어찌 정을 품은 것뿐이겠느냐. 실로 그 정념의 뿌리가 내 심장 속에 깊이 박혀버렸다.”
소월매가 말했다. “정연(좋은 인연)은 정녕 악연보다 나은 법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처자에게는 이것이 틀림없이 하나의 악연이 될 것이다.”
소월매가 말했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만약 내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한 번 처자의 향기로운 은택을 입는다면, 설령 무공을 버리게 되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 터다. 내 처자에게 이미 정념의 뿌리를 깊이 박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자는 그저 시험해 보려는 마음을 품었을 뿐 정녕 내게 정을 품은 것은 아니니, 정결한 신체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것이 어찌 악연이 아니겠느냐?”
소월매가 교태롭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음란함에 빠져들 것이라 믿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는 그저 당신이 받아들이기 싫어 핑계를 대는 것뿐일지도 모르지요.”
추오상이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이 아마 하늘의 뜻인가 보구나.”
소월매가 말했다. “어찌 고개를 돌리지 않으십니까?”
추오상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즉시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 혈맥이 세차게 요동쳤다. 어느새 소월매가 저고리와 치마를 모두 벗어던진 채, 오직 가슴싸개 한 장과 반바지 차림으로 두 종아리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에는 소담한 금박 자수 신발을 신고 있었다. 완전히 알몸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으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보다 오히려 한층 더 요염하게 사람을 홀리는 듯했다.
소월매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볼 만하십니까?”
추오상이 깊이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지난 며칠 동안 부하인 세 검희에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게 한 채 내 손길로 만지고 자세히 살펴보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저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소월매가 말했다. “지금은 어떠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방금 처자가 말하기를, 많은 이들이 평생을 보아도 여전히 부족하다 여긴다 했는데 그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
소월매가 말했다. “세 희는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고 나는 겨우 발과 어깨만 드러냈을 뿐인데, 어찌 이토록 커다란 차이가 난단 말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관건은 바로 정(情)이라는 글자 하나에 있다.”
소월매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려 구리거울을 마주하니, 추오상의 눈에는 거울 속 그녀의 고운 뺨 위로 끝없는 춘색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붉은 빛 덩어리가 추오상의 눈에 가득 찼다. 소월매가 몸에 걸치고 있던 그 가슴싸개로 구리거울을 덮어버린 것이었다.
추오상의 눈에 그녀의 매끄러운 등줄기가 들어왔는데, 마치 빛이 거울처럼 비치는 옥석과 같이 희고도 둥그스름했다.
소월매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추오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소월매가 긴 머리타래로 가슴 앞을 가려주었기에, 그는 아직 겨우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소월매가 중얼거렸다. “지금이 아마 유시 정각(저녁 6시 무렵)쯤 되었겠지요?”
추오상은 자신도 모르게 천 가림막이 높이 걷힌 방 문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소월매가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누구도 이 초가집 이십 걸음 안으로는 발을 들이지 못합니다.” 말을 마치며 그녀의 신체가 비단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고, 천천히 추오상을 향해 걸어왔다.
추오상은 눈을 감아버린 채, 어떻게든 스승님이 자신에게 훈계했던 말들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이제는 온전한 문장 하나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 한편에서는 ‘이것은 함정일지 모른다! 이것은 올가미일지 모른다...’ 하고 나직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외침은 너무도 미약하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난 날것 그대로의 야성적인 정욕의 포효를 도저히 잠재울 수 없었다.
부드러운 손길 하나가 그의 어깨 위로 얹어지자, 그에게 커다란 전율이 전해졌다.
그는 더욱 세차게 눈을 감았으나 소월매의 고운 그림자는 그의 뇌리 속에 한층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순간 추오상은 호기로운 기세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만약 자신이 마음을 온전히 바친 사람을 마주하며 이 시골 마을에서 늙어갈 수 있다면 이 또한 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한사코 누차 고생스럽게 익힌 그 ‘선풍검법’에만 마음을 얽매여 살아야 한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두 팔을 벌려 맹렬하게 앞으로 껴안았다.
그러나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눈을 떠 보니 눈앞에 소월매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소월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 있으니 먼저 이리로 오십시오!”
추오상이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가 내내 유지하던 냉峻한 얼굴 위로 비로소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이전에 그는 세 희의 알몸을 단편적으로 본 적이 있었으나, 눈앞에 있는 이 가루를 바르고 옥을 깎아 만든 듯한 알몸이 주는 매혹에는 도저히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우니, 이번 생애를 통틀어 보아도 결코 다 보지 못할 터였다.
소월매는 이미 자수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그 비단 이불이 반쯤 가리고 반쯤 드러내며 그녀의 몸에서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많은 곳들을 은밀히 감추어주고 있었다.
사실 이런 절묘한 경치야말로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추오상은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겁이 나서도 아니요, 멍해져서도 아니었다. 그저 침상 위의 저 고운 이가 멀리서 바라보는 것보다 다가갔을 때 더 아름다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월매가 머리타래 한 가닥을 끌어당겨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머리카락 틈새로 눈길을 흘기며 추오상을 바라보았다. 나직하고 요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서서 구경만 하실 참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문득 옛사람의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소월매가 말했다. “어떤 말입니까?”
추오상이 한 자 한 자 천천히 내뱉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고향은 영웅의 무덤이라 하던데,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구나.”
소월매가 말했다. “겨우 그 한마디만 생각나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또한 ‘물고기와 곰 발바닥은 동시에 얻을 수 없다’는 말도 있는 듯하니, 이제 나는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소월매가 말했다. “또 있으니 다시 잘 생각해 보십시오.”
추오상이 말했다. “이러한 때와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더는 다른 경구를 생각지 못하겠다. 처자가 조금 힌트를 주는 것이 어떠하냐?”
소월매가 요염하게 웃으며 상체를 일으키니 비단 이불이 미끄러져 내려 그녀의 눈부시게 하얀 가슴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재빨리 비단 이불을 끌어당겨 어깨까지 감싸 안았고, 가지런한 은치를 드러내며 또 한 번 웃었다. “맨날 경구만 생각지 마시고 좋은 문장도 좀 떠올려 보십시오.”
비록 스치듯 지나간 짧은 순간이었으나 추오상은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침상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아름답고 고운 가사는 필시 처자의 몸 위에 적혀 있을 터인데, 내가 어찌 번거롭게 머리를 굴려 생각하겠느냐?”
소월매가 갑자기 비단 이불을 걷어젖혔다. 멀리 떨어져 있던 붉은 촛불이 이 작은 바람에 힘없이 꺼져버렸다.
달빛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침상 위로 내리쬐었다. 달빛도 하얗고 소월매의 알몸은 한층 더 희었다.
추오상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줄곧 손에 쥐고 있던 ‘사절검’을 마침내 내려놓았다. 지금 이 순간 저 검은 그에게 더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월매의 안색으로 보아 그녀가 분명히 하나의 달콤한 함정을 파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수단은 참으로 절묘했으니, 만약 그녀가 노골적으로 알몸을 드러냈다면 아마 추오상에게 혐오감을 주었을 터였다.
이제 추오상은 마침내 이 함정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소월매는 어찌하여 이토록 처신한 것이었을까?
눈부시게 붉은 아침 햇살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추오상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소월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가슴싸개가 여전히 구리거울을 덮고 있었기에, 그는 거울을 통해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백옥처럼 고결하게 드러난 그녀의 뒷모습과 비단 의자 옆으로 삐져나온 둥그스름하고 매끄러운 다리 한쪽을 볼 수 있었다.
추오상의 심경은 지극히 평온했다. 그는 한 시진 전에 일어났던 정경들을 어떻게든 떠올리려 애썼으나 기억이 무척이나 모호했다.
그는 또한 그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커다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으나, 마치 높은 봉우리에서 만장 심연의 계곡으로 떨어지는 그 찰나에 생겨나는 듯한 붕 떠오르는 기분만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 기분이 과연 기묘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확언할 수 없었으나, 다시금 시도해보고 싶다는 갈망을 품었다. 한 번이 아니라 영원히 끝없이 시도하고픈 마음이었다. 그가 갑자기 또 다른 옛사람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의 정욕의 바다는 참으로 채우기 어렵구나.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소월매가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 더 자지 않고 깨어났습니까?”
그 어조에는 어쩐지 염려가 담겨 있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냉막했다. 한마디로 지난밤에 보여주었던 그 교태로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추오상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매끄럽게 드러난 등줄기에서 시선을 거둔 그는 침상 앞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처자의 안색을 보니 혹 후회하고 있는 듯하구나.”
소월매가 말했다. “후회하는 쪽은 아마 당신일 것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정반대다. 게다가 내게는 후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내가 자원한 일이며, 처자가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고 암중에 약물을 쓴 것도 아닌데, 내가 대체 무엇을 빌미로 후회한단 말이냐?”
소월매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찌할 계획이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마침 처자에게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소월매가 말했다. “당연히 평생을 함께 곁에서 지내야겠지요.”
추오상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이나 득의양양함에서 나온 웃음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웃는 자조(自我解嘲)의 웃음이었다.
추오상은 소리 내지 않고 웃었으나,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소월매는 이를 알아차리고 물었다. “어찌하여 웃으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처자가 참으로 천진하다 여겨 웃었다.”
소월매가 다소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말을 바꾸자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추오상이 말했다. “처자가 방금 평생을 함께 지내자고 한 그 말 자체는 진심일지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월매가 말했다. “어찌하여 불가능합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처자가 밤중에 이불 자락의 여풍(餘風)만으로 촛불을 꺼뜨리던 공력으로 보아, 그 내력의 강함은 족히 일류 고수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미 폐인이 되었다. 처자가 비록 한때 나를 좋게 보아주었을지언정 그것이 어찌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겠느냐. 평생을 함께하자는 것은 그저 어리석은 이의 잠꼬대에 불과할 뿐이다.”
소월매가 말했다. “옷을 입고 침상에서 일어나십시오!”
추오상이 말했다. “내 잠시만 더 누워 있고 싶구나. 이번 생에 이토록 온화하고 아늑한 맛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터이니 말이다.”
소월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옷을 걸치고 일어나라 했는데, 들리지 않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혹 처자가 나를 쫓아내려는 것이냐?”
소월매가 말했다. “더 묻지 마십시오.”
설령 소월매가 정말로 자신을 쫓아낸다 한들 그는 상대방을 원망할 마음이 없었다. 하물며 그녀가 아직 확실한 뜻을 밝힌 것도 아니었다.
추오상은 과연 더는 묻지 않고 즉시 의복을 챙겨 입은 뒤 침상을 벗어났다.
소월매는 줄곧 추오상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마치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었다.
추오상이 막 가죽신을 신고 바닥에 제대로 발을 딛고 서자, 그녀가 즉시 입을 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드십시오.”
추오상이 몸을 굽혀 ‘사절검’을 들어 올렸다. 그는 검집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내게 검을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하려는 것이냐?”
소월매가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한사코 마음이 높고 오만하여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겨왔거늘, 어찌하여 단 한 번에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정욕의 관문을 깨뜨리지 못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느냐!”
소월매가 말했다. “바닥에 있는 화로가 보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보인다.”
소월매가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와 그릇이 아니라 생철(무쇠)로 주조된 것으로, 무게가 사백여 근에 달하고 두께 또한 세 치나 됩니다. 이제 당신은 그 ‘사절검’의 날카로운 예기를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추오상의 심장이 순간 크게 요동쳤다. 그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설마 지난밤의 그 정이 온통 환각이었단 말이냐?”
소월매가 냉소하며 말했다. “당신도 참 너무 빨리 잊으시는군요! 내 옷은 아직 채 입지도 않았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처자와 정을 통했단 말이냐?”
소월매가 말했다. “몸을 섞은 지가 거의 한 시진 이상이 되었거늘, 어찌 아직도 의구심을 품으십니까?”
추오상이 중얼거렸다. “이것 참 기이한 일이구나! 스승님께서는 누차 당부하시기를, 여색을 가까이하여 원양(元陽)을 쏟아내면 고생스레 익힌 어검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 하셨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 두껍고 무거운 무쇠 화로를 검을 휘둘러 벨 수 있단 말이냐?”
소월매가 말했다. “한번 시험해 보면 알 일 아닙니까.”
추오상이 번개처럼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 찰나, 그 자신도 모르게 손목에 공력이 운집되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광희(狂喜)가 몰아쳤다. 자신의 평생 공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신형을 낮추며 검을 휘둘러 그 무쇠 화로를 내리쳤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화로가 단번에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좌우로 수 자씩 튕겨 나갔다.
추오상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설마 스승님의 말씀이 거짓이었단 말인가?”
소월매가 말했다. “당신의 스승께서 거짓을 고한 것은 아닙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처자가 나와 몸을 섞었다고 한 말이 거짓이더냐?”
소월매가 말했다. “그 또한 거짓이 아닙니다.”
추오상이 한참 동안 얼을 빼고 서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대체...”
소월매가 말을 받았다. “밤사이에 당신은 내가 이불 자락의 바람으로 촛불을 끄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닭 한 마리조차 잡을 힘이 없는 가련한 처지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것이 대체 무슨 까닭이냐?”
소월매가 말했다. “당신은 혹 음양을 수련하는 이들의 채보(採補)라는 설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대략 들어 알고 있다.”
소월매가 말했다. “당신이 비록 원양을 쏟아내었으나 아무런 해가 없는 것은, 내가 몸을 섞던 그 순간 나의 모든 내력을 당신의 기혈(氣穴) 속으로 남김없이 주입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손상을 입기는커녕 오히려 공력이 비약적으로 증폭되었습니다.”
추오상이 경악하며 외쳤다. “처자가 어찌하여 그런 짓을 행한 것이냐?”
소월매가 말했다. “오직 무림의 지존이 될 만한 기재를 만들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추오상이 비명을 지르듯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으나, 너무도 격동한 나머지 뒤이어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소월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방금 당신과 내가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이제 단 한 가닥의 내력도 남아 있지 않으니, 당신의 보호가 없다면 결코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추오상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화장대 앞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그녀의 가녀린 몸을 부둥켜안으며 격정 가득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처자는 부디 안심하거라! 우리 두 사람, 이번 생에 결코 헤어지지 않고 삶과 죽음을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소월매가 물었다. “정말인가요?” 말을 마치며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추오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두 손을 풀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눈앞에 마주한 여인은 완전히 낯선 타인이었을 뿐,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소월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참 동안 얼을 빼고 서 있다가 간신히 중얼거렸다. “당신... 당신은... 소 처자가 아니란 말이냐?”
그녀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성은 강(江)이요, 이름은 추로(秋露)라 합니다. 혹은 무림에서 나를 ‘만인미(万人迷)’라 부르기도 하지요. 어쨌든, 나는 소월매가 아닙니다.”
추오상은 여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마주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밤에 보았던 것보다 오히려 훨씬 더 선명하고 적나라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단 한 자락의 정욕도 일지 않았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 그렇다면, 소 처자는 어디로 간 것이냐?”
스스로를 강추로라 밝힌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이곳에 발을 들인 적조차 없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역용술로 변장하여 소 처자의 행세를 하며 나를 속인 것이냐?”
강추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추오상이 나직하게 호통쳤다. “믿을 수 없다!”
강추로가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이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추오상이 말했다. “이 일을 명명백백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은 소 처자를 본 적이 있겠지요. 그녀의 안색이 나보다 빼어나다 할 순 없을 터입니다. 더구나 이 매끄럽고 하얀 살결만큼은 세상 천지에 나를 따라올 여인이 없으니, 그리하여 내 별호가 ‘만인미’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내게도 자지명철은 있습니다. 비록 내가 천하 중생을 다 홀릴 수 있을지언정, 당신 추오상만큼은 마음대로 흔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당신은 이미 마음을 바친 정인(情人)이 따로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나로서도 소월매의 형상으로 변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나에게도 일종의 굴욕이자 가당치 않은 양보였습니다.”
추오상이 음침하게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내가 소 처자에게 정을 품은 것은 오직 내 마음속 깊은 곳에만 숨겨두었기에 소 처자 자신도 알지 못하거늘, 당신이 어찌 안단 말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그저께 밤 강 위의 배 안에서, 당신은 주(朱)씨 성을 가진 한 소년에게 그 절절한 심경을 토로하지 않았습니까? 마침 내가 그 말을 엿들었지요. 이것이야말로 당신과 나에게 기연(奇緣)이 닿은 것 아니겠습니까!”
추오상이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경악하며 말했다. “그날 밤 선현(배의 난간)에 매달려 있던 자가 바로 당신이었더란 말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정확히 맞히셨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금전표는 수중의 패왕이라 불리는 자다. 나는 당신이 그의 추격을 그리 쉽게 따돌렸으리라 믿지 않는다.”
강추로가 냉소하며 말했다. “수중의 패왕이라는 자리가 겨우 그자에게 돌아갈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설마 당신이란 말이냐?”
강추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연히 나도 아닙니다. 바로 ‘일간신조(一杆神釣)’ 강상추(江上秋) 어른이시지요.”
추오상이 문득 멍해지더니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과연 그랬구나! 당신이 바로 그 노어옹의 불효막심한 딸이었단 말이냐.”
강추로는 이내 의복을 챙겨 입기 시작하며 말했다. “그것은 내 집안일이니 굳이 캐묻지 마시고, 이제는 당신과 나 사이의 약조를 이야기해야 할 시간입니다.”
추오상이 한 자락 멍해지며 말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약조가 있단 말이냐?”
강추로가 냉소하며 말했다. “당신이 방금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와 평생을 함께하며 영원히 헤어지지 않겠노라고. 어찌 이리 금방 잊으시는지요?”
추오상이 말했다. “그것은 소 처자를 향해 내뱉은 말이다. 당신이 역용을 하고 이름을 사칭하여 나를 속였으니, 당연히 그 말은 무효다.”
강추로는 의복을 온전히 갖춰 입고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그것이 과연 당신 뜻대로 될지 모르겠군요.”
추오상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린 채 물었다. “내가 먼저 하나 물어보자. 당신은 어찌하여 하필 나를 찾아낸 것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무림의 위대한 기재를 하나 만들어내고 싶었고, 자연히 그 재목이 될 만한 인물을 물색해야 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볼 때 당신은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요. 게다가 마침 당신과 나의 이름 속에는 똑같이 ‘추(秋)’라는 글자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이란 말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그것이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굳이 소 처자의 이름을 사칭한 것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그것은 단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좋다! 당신이 내력을 쏟아부어 나로 하여금 무공을 크게 증폭시켜 준 점에 대해서는, 내 평생토록 그 은혜를 가슴에 새길 것이다...” 말을 이어가던 그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강추로는 여전히 거울을 마주하고 눈썹을 그리고 연지를 바르며 지극히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뒤이어 나올 말을 내 조용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추오상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소 처자의 이름을 사칭하여 나를 기만한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은 말을 너무 엄중하게 하시는군요.”
추오상이 말했다. “당신의 도발과 소행은 소 처자를 대단히 모독하고 능멸한 짓이다.”
강추로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하겠다는 말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나는 당신을 죽일 것이다. 당신은 오직 죽음으로써 소 처자에게 죄를 빌어야 하며,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강추로가 천천히 몸을 돌려 두 눈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처사하는 것이 과연 공평하다 생각하십니까?”
추오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극히 공평하다. 우리 두 사람이 이미 몸을 섞어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나는 당신을 내 정실 아내로 여길 것이다. 당신을 베어 죽인 후에 내 정성을 다해 후하게 장사를 지내 줄 것이며, 또한 이번 생에 다시는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않겠다.”
강추로가 웃으며 말했다. “설령 향후에 소 처자가 자원하여 당신에게 몸을 허락한다 해도, 결코 아내로 맞이하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추오상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결코 그럴 일은 없다! 첫째는 당신에게 지닌 정과 신의를 저버릴 수 없음이요, 둘째는 이미 더러워진 내 이 몸뚱이로는 감히 소 처자의 고결하고 정결한 신체를 범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강추로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여인이 남자를 선택해 평생을 의탁함에 있어, 당신 같은 대장부를 만났다면 과연 마음껏 만족해할 만하군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고개를 저으며 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추오상이 호통치듯 물었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강추로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나는 당신이 천하 무림의 패주가 되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그 후에 당신이 누리게 될 그 찬란한 영광을 함께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추오상이 음산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번 생에 결코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말을 마치며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단검을 천천히 집어 들고는 분노에 찬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강추로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며, 여전히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당신이 내게 차마 손을 대지 못할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추오상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서슬 퍼런 검끝을 그녀의 가녀린 인후(목구멍)에 바짝 들이댔다.
강추로의 안색은 털끝만큼도 변하지 않았고, 그 가냘픈 신체 역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추오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죽은 후에, 당신은 어디에 묻히기를 원하느냐?”
강추로(江秋踞)가 말했다. "정말 나를 죽이려는 건가? 나는 네가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꾸기를 내심 바란다."
추오상(秋傲霜)이 말했다. "공정하게 말해서, 난 의지가 굳센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밤사이에 네게 속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를 죽이겠다는 내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요행을 바라지 마라."
강추로가 말했다. "너는 참 바보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은 면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네 외모가 나쁘지는 않지만, 세상 제일의 미남자라고 할 수는 없다.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지만 너와 같은 자질을 가진 남자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진짜 내 마음을 움직인 건 바로 너의 그 바보 같은 고집이다."
추오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단검을 거두며 분한 듯이 말했다. "내가 어디가 바보 같다는 말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네가 금릉에 왔을 때부터 이야기해 볼까..." 말투를 잠시 가다듬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두동툰의 초청을 받아 진회하에서 연회에 참석한 것, 너무 바보다! 소월매의 봉검 약속을 쉽게 받아들인 것, 너무 바보다! 주 씨 성을 가진 자를 지기(知己)로 여긴 것, 너무 바보다!..."
추오상이 말을 받았다. "가장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건, 너를 소월매로 착각한 일이겠지."
강추로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틀렸다! 가장 바보 같은 짓은 네가 감히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추오상이 냉소하며 말했다. "너는 분명 잔꾀가 많은 자일 텐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이토록 어리석은 방법을 쓰는구나."
강추로가 두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내가 잔꾀가 많은 자라고 했나?"
추오상이 말했다. "틀림없이 내가 잘못 보지 않았을 것이다."
강추로가 깔깔거리며 교태롭게 웃었다. "너도 마침내 영리한 구석이 생겼구나..." 어조를 가라앉히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잔꾀가 많은 자라면, 어떤 일이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뒷감당도 못 하면서 내 내력을 전부 네 몸에 쏟아부었을 리가 없다."
추오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자신도 모르게 낮은 비명을 질렀다.
강추로가 다시 말했다. "너의 그 오만함으로 볼 때 결코 평생을 함께할 좋은 동반자는 아니다. 하지만 형세가 급박하니 너와 나는 반드시 평생을 함께해야만 한다. 내가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버리면 내 심혈이 물거품이 되고, 네가 나를 죽인다면 그것은 곧 너 자신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
추오상이 말했다. "사람을 겁주려는 소리는 그만둬라. 난 믿지 않는다."
강추로가 말했다. "네가 조금만 냉정하게 깊이 생각해보면, 내가 위협하려고 지어낸 말이 아님을 믿게 될 것이다."
추오상이 나지막이 꾸짖었다. "설마 내 몸에 무슨 짓을 해두고 그것으로 협박하려는 속셈이냐?"
강추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너는 타인의 협박에 쉽게 굴할 자가 아니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강추로가 말했다. "네 기혈 안에는 본래 한 줄기 양강(??)의 기운이 있었다. 내가 주입한 것은 한 줄기 음유(?柔)의 공력이다. 음양이 단숨에 조화를 이루기는 어려우니, 나의 이 살과 피로 된 몸이 네게 여전히 큰 쓸모가 있을 것이다."
추오상은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다가, 한참 뒤에야 오기를 부리며 말했다. "믿지 않는다. 지금 난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한다."
강추로가 말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 되면, 너는 기혈이 무너져서 죽게 될 것이며 결코 살릴 약이 없다."
추오상이 말했다. "결코 살릴 약이 없다면, 네가 살아있다고 한들 손쓸 도리가 없지 않느냐."
강추로가 요염하게 웃었다. "나의 이 몸뚱이가 바로 영단묘약이다..." 어조를 살짝 멈추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하루를 거를 때마다 너와 나는 한 번씩 합체쌍수(合??修)를 해야 한다. 내가 방금 말한 평생 함께한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뜻한다."
추오상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상대방이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
강추로가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일 년 동안은 네게 이 몸뚱이가 필요하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일 년 뒤에는 어쩔 셈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일 년 뒤에는 내가 이미 수많은 남자의 원양(元?)을 흡수해 공력을 회복했을 테니, 그때 네가 나를 죽이려 해도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네가 진심으로 나와 평생 함께하기를 원하게 되기를 바란다."
추오상이 분노하며 말했다. "나 외에도 다른 남자를 찾겠다니, 내가 어찌 너 같은 천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와 평생을 함께하겠느냐? 지금 당장 너를 죽이고 싶다."
강추로가 웃으며 말했다. "너는 원래 그렇게 신경을 쓰는구나! 너에게 숨기지 않겠다. 이전에 나와 합체의 인연을 맺은 남자는 강을 건너는 잉어 떼처럼 많다. 사실 너는 네가 말한 그 천한 여자와 이미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다만 네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추오상이 놀라며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처녀가 아니었단 말이냐?"
강추로가 깔깔거리며 교태롭게 웃었다. "너는 여자에 대해 문외한일 뿐만 아니라 무학의 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구나. 내가 일찍이 수많은 남자의 원양을 흡수해 두지 않았다면, 네 지금의 내력이 이토록 심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추오상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악연이구나!"
강추로가 말했다. "정연(情?)이든 악연이든, 나를 매우 즐겁게 하는구나."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너와 나는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게 되는 건가?"
강추로가 말했다. "당연하다."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더 이상 다른 남자를 찾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