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 十六 回. 용희지미(龍姬之迷)....용희에 매혹되다. >
하화련(夏火蓮)이 말했다.
"노 언니, 수고해 줘! 손을 너무 무겁게 쓰지는 말고, 그가 잠시 반항 능력을 잃을 정도면 돼."
강추로(江秋露)가 말했다.
"이 누이가 알아서 하겠네..."
어조를 한 차례 가다듬고, 장검을 왼손으로 옮겨 쥔 뒤 주성한을 향해 말을 이었다.
"성씨가 주가 아니었거나, 네가 추 부궁주님과 상의할 일이 없었다면 난 오늘 절대 너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눈을 감아라!"
주성한(江秋露)은 정말로 눈을 감았다.
강추로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가 주성한과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주성한은 두 팔을 평평하게 뻗은 채, 두 눈을 꼭 감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강추로는 몸을 살짝 날려 주성한의 왼쪽에 착지하더니, 손가락을 치켜들어 그의 왼팔에 있는 '곡지' 혈을 점해 갔다. 보기에는 그녀의 동작이 매우 느리고 힘도 약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이 주성한의 왼팔에 닿으려던 찰나, 갑자기 다섯 손가락을 쫙 펼치며 점혈을 손톱으로 움켜쥐는 초식으로 바꾸었다. 이어 몸을 오른쪽으로 반쯤 회전하며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세워 주성한의 등 한가운데를 향해 움켜쥐어 갔다.
동시에 왼손의 손목을 낮추어 검을 누르니, 검끝이 마치 영사가 혀를 내밀 듯 주성한의 인후를 향해 치켜 올라갔다.
초식을 바꾸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아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화련이 큰 소리로 외쳤다.
"노 언니..."
하용미와 맹채옥 역시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주성한도 강추로가 느닷없이 앞에서는 검을 쓰고 뒤에서는 손톱으로 움켜쥐는 살수를 펼쳐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경황 중에 두 눈을 부릅뜨며 나직하게 일갈했다.
"정말 독랄한 계집이구나!"
지금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기에, 다급한 와중에 전력을 다해 명문 혈에 진기를 운용하여 등 뒤를 보호했다. 동시에 오른손의 접선(접이식 부채)으로 인후를 꿰뚫을 듯 다가오는 장검을 세차게 막아냈다.
팍! 찌익...
앞에서 치켜 올라오던 장검은 주성한의 강철 부채에 막혔으나, 그의 등 뒤 옷은 강추로에게 단숨에 찢겨 나갔고 등 줄기에는 피가 낭자한 다섯 줄기의 깊은 상처가 생겼다.
이는 강추로가 현재 공력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해 힘이 부족했던 데다가, 주성한이 대처를 잘하여 허둥대지 않고 오직 명문만을 전력으로 보호했기 때문에 다행히 피육의 상처만 입은 것이었다.
주성한은 등 줄기가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마음속에 분노가 극에 달해 부채를 강하게 밀쳐내며 몸을 튕겨 나갔다.
하화련이 말했다.
"노 언니!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돼."
강추로는 기습에 성공하지 못하자 마음속으로 은근히 서늘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방금 가한 한 번의 움켜쥠이 주성한의 내장에 타격을 주었기를 바라며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화련이는 비켜라! 이 누이가 오늘 이 오만한 자를 처단하겠다."
강추로가 늦게 들어와 윗자리를 차지한 것에 대해 비록 하, 호, 맹 세 시녀가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추오상이 이틀에 한 번꼴로 강추로를 불러 시침을 들게 하니 무척 총애를 받는 듯했다.
따라서 그녀의 말을 감히 과하게 거역하지 못했다. 하화련은 얼른 하용미와 맹채옥 두 사람에게 눈짓을 보냈고, 세 사람은 한쪽으로 물러섰다. 은근히 강추로의 웃음거리를 구경하려는 마음도 다소 섞여 있었다.
주성한이 강포로 온 것은 강추로를 죽일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첫째로 황해어(黃解語)의 말이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은 아니었고, 둘째로 추오상의 총첩을 죽여 물과 기름 같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강추로가 가명을 쓰고 추오상의 검희가 된 것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님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진상을 밝히고 추오상과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한 터였다.
하지만 방금 던진 농담 한마디가 강추로의 살기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만약 스스로가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면 아마 벌써 대나무 숲에 시체로 누워 있었을 것이다.
강추로 역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았다. 현재 그녀의 무공은 비록 절반밖에 회복되지 않았으나, 상대의 내장이 조금이라도 다쳤다면 자신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만약 정 안 되면 팔을 들어 한 번 신호했을 때 다른 세 시녀가 떼 지어 달려들 테니, 주성한 역시 대처하기 어려울 터였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용기가 백배했다. 왼손의 장검을 허공으로 던졌다가 오른손으로 받아 쥐며 무겁게 말했다.
"성씨가 주가 된 자여, 너는 걸어갈 천당 길을 두고, 문도 없는 지옥을 스스로 찾아왔구나."
주성한이 말했다.
"사람은 호랑이를 해할 마음이 없으나, 호랑이가 사람을 해할 뜻을 품었으니 낭자의 제삿날이 다가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날려 전진하며, 손에 쥔 부채를 촤악 펼쳐 도검처럼 가로로 베며 강추로의 허리춤을 쓸어 갔다.
강추로는 무공을 알아보는 전문가였기에, 그 부채가 강철로 살을 만들고 상어 가죽으로 면을 댔으며, 부채 살의 형태가 붓대 같아 그 속에 분명 기관 암기가 숨겨져 있음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검을 휘둘러 상대의 부채를 깎아내려 했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주성한의 부채는 터럭만큼도 손상을 입지 않았으나, 강추로의 장검은 손에서 벗어나 날아가 버렸고 그녀는 허둥지둥 몇 걸음이나 연속으로 물러섰다.
주성한은 강추로가 이미 내력을 추오상에게 쏟아부은 줄은 모르고 그녀를 너무 높게 평가하여, 암중에 구 할의 내력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주성한은 살심이 일자 멈출 수가 없었다. 촤악 하며 부채를 접더니 판관필의 초식을 펼쳐 기세를 몰아 앞으로 도약하며 강추로의 왼쪽 태양혈을 찔러 갔다. 이곳을 찔리면 필시 두개골이 관통되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었다.
강추로는 몇 걸음 물러서서 아직 발꿈치도 채 딛지 못했기에, 이 치명적인 일격을 절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夏)、하(何)、맹(孟) 세 시녀는 비록 강추로의 웃음거리를 볼 심산이었으나, 그녀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목숨을 잃는다면 부궁주에게 어떻게 보고 한단 말인가?
하화련이 얼른 크게 외쳤다.
"공격해!"
스윽! 스윽! 스윽!
세 자루의 검이 동시에 출격하여 각각 주성한의 요해처를 겨누었다. 상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초식을 거두게 함으로써, 강추로의 머리가 뚫려 목숨을 잃을 위기를 구하려는 목적이었다.
갑자기 콰!앙 하는 파공음과 함께 주성한이 몇 걸음 연속으로 물러섰다. 알고 보니 하, 호, 맹 세 시녀가 연합 공세를 펼치던 그 찰나, 번쩍이며 빛나는 또 다른 단검 한 자루가 홀연히 나타나 주성한의 부채를 가로막은 것이었다.
주성한이 몸을 가라앉히고 확고히 선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는 바로 자신이 찾아오려던 추오상이었다.
추오상은 심연처럼 깊고 태산처럼 묵직한 기세로 오연히 서 있었고, 검은 이미 검집 안에 들어가 있어 마치 검을 움직인 적조차 없는 듯했다.
주성한은 부채를 거두어 품에 넣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추 형, 내 등 뒤를 보시오. 만약 저 노 낭자가 돌연히 손을 써서 내가 방비하지 못한 틈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감히 추 형의 총첩에게 이토록 모진 손속을 펼쳤겠소?"
추오상은 힐끗 보고는 주성한이 치명적인 부위에 상처를 입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비록 목숨을 잃을 화는 면했으나 참으로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하화련은 시선을 강추로에게 향했다. 다소 꺼리는 기색이 있었으나, 사실 이는 짐짓 지어낸 몸짓이었다.
추오상이 나직하게 일갈했다.
" 어서 말해라!"
이에 하화련이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주성한이 갑자기 나타난 일부터 강추로가 기습적으로 살수를 뻗은 일까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추오상의 짙은 눈썹이 수시로 꿈틀거렸다. 하용미와 맹채옥 두 사람은 성품이 비교적 순했기에, 속으로 저 강추로를 위해 식은땀을 흘렸다.
추오상의 기색으로 보아 틀림없이 강추로에게 크게 문책을 내릴 듯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추오상은 하화련의 서술을 다 듣고 난 뒤, 그저 담담하게 손을 한번 휘두르며 말했다.
"네 시녀는 먼저 초막으로 돌아가 있거라. 본 부궁주는 주 소협과 이야기를 나누겠다."
이러한 결과는 하(夏), 하(何), 맹 (孟)세 시녀를 의아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주성한 역시 마음속으로 은근히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오직 강추로 한 사람만이 전혀 뜻밖이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네 시녀가 멀어진 뒤, 추오상은 천천히 주성한의 앞으로 걸어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주 형은 어찌하여 소제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줄 알았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황해어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추오상은 크게 한 번 멍해지더니 말했다.
"그녀가? 그녀는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그것까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 자네와 나의 동지 약속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소제를 찾아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주성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이야기가 길다..."
이어 그는 방금 안평객잔에서 황해어가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마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과 같았다. 주성한은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에 이기고 지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추오상은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한참을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들어 물었다.
"선친의 유품 몇 가지가 주 형에게 필시 매우 중요한 모양이군. 그렇지 않다면 성씨가 황 가인 그 여자가 어찌 감히 그것을 빌미로 협박을 하겠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실로 상당히 중요하다. 특히 영존께서 당년에 친히 조제하셨던 그 한 토막의 용연오묵이 그렇다."
추오상의 눈빛이 차가운 번개처럼 주성한의 얼굴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 가치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그 남은 한 토막의 용연오묵이 있으면, 위독하신 노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추오상이 주성한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다급하게 말했다.
"주 형! 그것이 무슨 말인가?"
어조가 날카롭고 매서워 그 기색이 무척이나 사람을 겁먹게 했다.
주성한은 일단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에 더는 득실을 따지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가부께서 괴질에 걸리시어 침상을 전전하신 지 이미 일 년이 넘었다..."
추오상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영존은 당대의 의성으로 수많은 사람을 살리셨는데, 설마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신단 말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일 년 동안 내가 운남, 귀주, 사천, 호남을 두루 돌아다니며 병을 고칠 약재는 모두 구했으나, 오직 단 한 가지 약인(약의 효능을 이끄는 물질)이 부족하다. 그것이 바로 영존께서 당년에 쓰고 남기신 그 한 토막의 먹이다."
추오상이 말했다.
"어찌하여 진작 말하지 않았는가?"
주성한이 완곡하게 말했다.
"설령 진작 말했다 한들, 추 형이 시간을 내어 고향으로 한 번 돌아가 주었을지는 미지수이지 않은가."
추오상은 염려하는 기색을 띠며 말했다.
"병세는 끌면 끌수록 악화되는 법인데, 주 형 자네는..."
주성한이 깊숙이 읍을 하며 말을 이었다.
"추 형이 약조를 지켜 동짓날에 그 남은 먹을 나에게 건네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가부의 병환은 아마 내년 봄까지는..."
추오상이 말했다.
"소제가 조만간 고향집으로 한 번 돌아가기로 결정하겠다. 주 형도 함께 가도 좋다."
주성한은 기쁜 나머지 미칠 것 같았으나, 너무 기쁜 나머지 도리어 말문이 막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은 믿지 못하겠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이 소식이 너무 갑작스레 찾아와 나로서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추오상이 말했다.
"소제가 조금 안배를 해둘 테니, 며칠 내로 주 형과 함께 길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한 차례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그 황해어는 무슨 연유로 주 형에게 강추로를 죽여달라고 요구한 것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그녀의 목적은 추 형의 마음을 얻는 것이기에, 당연히 추 형이 다른 여자에게 점유당하는 것을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 소제가 명성이 형편없는 여자를 신형 검희로 거두어들인 것에 대해 주 형은 조금도 기이하게 생각지 않는가?"
주성한이 대답했다.
"내가 감히 함부로 추측할 수 없다."
추오상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나타나며 말했다.
"주 형이 그리 말하니 너무 처세술에 능한 듯하군. 소제가 이미 주 형에게 약조를 한 이상, 그 어떤 상황이라도 소제를 번복하게 만들 수는 없다."
주성한이 말했다.
"추 형이 오해를 했다.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에는 모두 기연이 있고, 남녀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더욱 기묘한 법이다. 강 낭자가 몸을 의탁해 온 것을 나는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추오상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주 형이 하는 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온 진심이라면, 그것은 틀렸다."
주성한이 말했다.
"어째서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소제와 저 강추로는 이미 몸을 섞은 인연이 있다. 하지만 소제가 그녀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주성한이 크게 의아해하며 말했다.
"추 형이 여색을 가까이하고도 검술과 공력이 모두 예전보다 훨씬 강해지지 않았는가!"
추오상이 말했다.
"그녀가 자신의 전신 내력을 전부 소제의 몸 안으로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주 형은 이해하겠는가?"
주성한은 더욱 의아해졌다. 만인미 강추로는 평생 동안 얼마나 많은 남자의 원양을 취했는지 모를 일인데, 그것을 도리어 추오상의 몸에 고스란히 쏟아부었다니 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추오상은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주 형! 이 일은 잠시 덮어두기로 하자. 주 형의 마음속 의혹은 여후에 자연히 하나씩 풀릴 것이다. 소제와 저 강추로에게는 아직 열한 달의 악연이 남아 있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당초 여관에 있을 때 소제는 어렴풋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주 형과 저 황해어는 과거에 꽤 자주 왕래가 있었고, 게다가 매우 잘 아는 사이인 듯한데 맞지 않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틀렸다! 나는 안평객잔에서 비로소 그녀를 알게 되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황해어의 신세에 대해 주 형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대략은 알고 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녀가 정말로 황산노인의 딸이 맞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당연히 아니다."
추오상이 아,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신분은 위장된 것이군."
주성한이 말했다.
"그렇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어떠한가?"
주성한이 말했다.
"필시 변장을 했을 것이다."
추오상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추궁하듯 물었다.
"주 형! 그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주성한은 문득 두 눈썹을 치켜올린 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은 모르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주 형이 일찍이 그녀에게 비밀을 지켜주겠노라 약조를 하여, 차마 말하기 곤란한 모양이군."
주성한이 말했다.
"아니다."
추오상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것 참 기이하군? 혹시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만약 추 형이 나에게 조만간 시간을 내어 고향집으로 한 번 돌아가 주겠다고 약조하지 않았다면 내 기꺼이 솔직하게 말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말해버린다면 나의 사람됨이 비열함에 가까워지게 된다."
추오상이 말했다.
"원래 그러했군!"
주성한이 말했다.
"만약 추 형이 그 남은 먹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면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황해어의 진짜 신분을 말했을 것이다. 그것은 정황상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추오상이 갑자기 하하하 크게 웃기 시작했다.
주성한은 크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추 형은 어찌하여 웃는 것인가?"
추오상은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
"주 형은 저리도 정대당당한 대장부가 되려 하면서, 도리어 소제를 비열한 소인배로 만들려 하는군."
주성한이 말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소제가 만약 그 남은 먹을 빌미로 협박을 한다면, 소제가 어찌 비열한 소인배가 되지 않겠는가."
주성한이 포권을 하며 읍을 했다.
"추 형의 사람됨이 강직하고 대쪽 같으니 내 진심으로 감복할 따름이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은 태도가 온화하고 말씨가 다정하지만, 소제는 늘 차가운 얼굴에 차가운 말투뿐이다. 금릉성 안의 무림 인물들이 주 형에게는 극히 좋은 인상을 품으면서도 소제에게는 매우 악평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주성한이 말했다.
"추 형은 내가 한 말이 모두 아첨하는 말이라 생각하는가?"
추오상이 말했다.
"소제에게 결코 그런 뜻은 없다..."
어조를 약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소제가 더는 그 황해어의 진짜 신분을 묻지 않으면 될 일이다."
주성한이 말했다.
"내가 여후에 필시 고할 것이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녀가 아직 고루 앞의 안평객잔에 머물고 있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객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뒤 안채를 향해 걸어갔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은 소제의 옷이라도 빌려 갈아입겠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 강가로 가면 금전표의 어린 형제들을 찾을 수 있으니 그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된다. 강포진에도 필시 기성복을 살 만한 곳이 있을 것이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소제는 이만 작별하겠다."
말을 마치고 포권을 해 보인 뒤 나루터를 향해 걸어갔다.
주성한이 따라붙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으며 물었다.
"추 형은 강을 건너려는 것인가?"
추오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극히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가서 황해어를 처단하겠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투도 담담하여, 마치 닭 한 마리를 잡으러 가는 듯했다.
주성한은 도리어 크게 놀라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다급하게 물었다.
"추 형은 어찌하여 그녀를 죽이려 하는가?"
추오상이 말했다.
"그녀가 강추로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일단 그녀의 음모가 성공한다면 소제는 영영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된다. 주 형도 소제가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사람임을 잘 알 것이다."
주성한이 말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그녀는 강추로가 이름을 노추강으로 바꾼 비밀을 알고 있다. 이것 역시 그녀가 죽어야 할 이유다."
주성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리 되니 내가 도리어 가로막기가 난감하군."
추오상이 말했다.
"설마 주 형에게 소제를 만류할 만한 정당한 이유라도 있는가? 만약 있다면 소제가 그녀를 죽이려는 생각을 거두겠다."
주성한이 말했다.
"추 형이 지금 가서 그녀를 죽인다면, 이는 내가 그녀를 밀고한 것과 다름없다."
주성한이 말했다.
"주 형은 욕을 먹을까 두려운가?"
주성한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나, 단지 양심에 가책이 되어 마음이 편치 않을 뿐이다."
추오상이 냉소를 지었다.
"헤헤! 주 형은 미처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주성한이 엄숙하고 바른 표정으로 말했다.
"추 형의 가르침을 청한다."
추오상은 한 자 한 자 금석을 두드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영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소제에게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다그쳤고, 광명정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저 황해어의 진짜 신분은 말하지 못하겠다 했다. 또 본인의 양심이 편하기 위해 소제더러 저 황해어를 죽이러 가지 말라 하는군. 주 형! 자네는 단 한 번이라도 처지를 바꾸어 남을 위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주성한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과연 너무 이기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정대당당한 사내대장부가 되려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위독하신 가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심기를 소모하며 수단을 부리려 했다."
추오상의 신색이 한결 부드러워지며 말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백 가지 선행 중에서 효가 으뜸이다."
주성한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부께서는 신비로운 의술로 수많은 사람을 살리셨으나, 정작 본인이 중병에 걸리셨을 때는 아무도 그분을 구하지 못했다."
추오상은 몸을 돌리며 탄식하듯 말했다.
"주 형! 방금 소제의 말이 너무 과했다."
주성한이 격앙되어 말했다.
"추 형의 말이 맞다. 내가 실로 너무 이기적이었으니 처지를 바꾸어 추 형의 입장을 생각해야 했다. 가서 그녀를 죽여라! 그녀는 일찍이 추 형의 검희로 있다가 훗날 죽은 체 가장하고 천궁을 탈출했던 은여우의 딸, 해옥환이다."
추오상은 한 차례 멍해지며 말했다.
"그녀였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그렇다. 그녀의 말로는 천방지축으로 추 형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지만, 내가 헤아려 보기에는 그녀의 목적이 단지 여기에만 있지 않고 아마 다른 도모가 있을 것이다."
추오상이 한결 평온해진 어조로 말했다.
"만약 그녀가 해옥환이라면 소제는 도리어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다."
주성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째서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이 안의 정황은 몇 마디 말로 다 할 수 없다. 주 형은 어디에 거처를 두고 있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금릉성 안이 극히 복잡하여 나는 객잔에 묵지 않고 잠시 민가에 머물고 있다."
추오상이 말했다.
"어디로 가면 주 형을 찾을 수 있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어떤 사공에게든 기별을 남겨두면 나 역시 약조대로 도달할 것이다."
추오상이 포권을 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자네와 나, 이만 헤어지자. 주 형은 소제의 소식을 기다려 달라."
주성한 역시 포권을 하며 말했다.
"나는 조용히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다."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떠나갔다.
추오상은 그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무한한 아쉬움이 남는 듯, 한참 동안 몸을 돌려 초막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강추로가 가볍게 그의 곁으로 다가와 나직하게 말했다.
"성씨가 주가 된 자가 이미 내 바닥을 다 알아차렸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가 아는 것은 오히려 그리 중요치 않으나, 다른 한 사람이 알게 된 것은 조금 번거롭다."
강추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또 누가 안단 말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너의 그 아버지가 다른 언니 말이다."
강추로가 탈고하듯 말했다.
"해옥환(解玉歡)?"
추오상이 말했다.
"그녀가 주성한을 부추겨 너를 죽이러 오게 한 것이다. 성씨가 주가 된 자는 응하는 척하면서 나에게 알리려 했으나, 정작 네가 그에게 벼락같이 살수를 뻗을 줄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강추로! 너는 참으로 독하구나."
강추로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뼛속까지 증오하는 것을 안다. 마음껏 욕해라! 나 역시 개의치 않으며 당신의 용서를 구걸할 생각도 없다. 따져보니 나에게도 기껏해야 살날이 열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그때가 되면 내가 꼭 너를 죽일 거라 확신하는가?"
강추로(江秋露)가 말했다.
"당신은 나를 뼛속까지 증오하는데, 어찌 나를 살려두겠는가?"
추오상이 말했다.
"사람은 초목이 아닌데 어찌 감정이 없겠는가. 지금 우리는 겨우 한 달 남짓 함께 지냈을 뿐이다. 우리가 일 년을 함께 지내고 나면, 나 역시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
강추로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꿀 남자가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에게 전신 무공을 이루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추오상이 그녀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맞다! 그때가 되면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말을 한 차례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하지만, 너 역시 순순히 나에게 죽어주지는 않겠지."
강추로가 말했다.
"그 누구도 죽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내 무공이 당신을 이길 수 없으니, 별수 가 있겠는가?"
추오상이 말했다.
"강추로! 너는 순순히 굴복할 만한 여자가 아니다. 네 신색이 이토록 태연한 것을 보니, 필시 마음속으로 이미 어떤 계책을 세워둔 모양이군."
강추로가 말했다.
"추 부궁주님! 되도록 쓸데없는 의심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지내는 융화로운 분위기를 해칠 뿐이다."
추오상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다! 이 일은 더는 논하지 않겠다."
강추로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이야기하겠는가?"
추오상이 말했다.
"너의 그 아버지가 다른 언니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강추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해옥환을 말하는가?"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무척 침착하구나."
강추로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내가 두려워할 만한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그녀는 네가 성명을 바꾸고 내 곁에서 검희로 지내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게다가 너를 살해할 염두까지 내었는데, 너는 조금도 두렵지 않단 말인가?"
강추로가 말했다.
"추 부궁주님! 내가 하나 물어보겠다. 당신은 진정으로 내 목숨을 걱정하고 있는 것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평심하게 말하자면, 절반은 내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는 것이다."
강추로가 아,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가 도리어 당신을 오해했군. 나는 당신이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생각하는 줄 알았다..."
갑자기 어조를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은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다. 나에게 대처할 방도가 있다."
추오상이 말했다.
"혹시 너 역시 사람을 구해서 암중에 그녀를 해치려는 것인가?"
강추로가 말했다.
"나는 그녀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추오상이 말했다.
"주성한이 나에게 황해어의 부탁을 받고 너를 죽이러 왔다고 말했을 때, 나는 즉시 강을 건너가 그 천한 계집을 단칼에 두 동강 내어 영원히 후환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강추로가 말했다.
"어찌하여 또 생각을 바꾸었는가?"
추오상이 말했다.
"간단하다. 내가 죽이려 했던 것은 황해어였기 때문이다. 주성한이 황해어의 정체가 바로 해옥환이라 알려주었을 때, 나는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아졌다. 그녀는 네 언니이지 않은가. 우리의 계약 안에는 내가 너를 대신해 네 언니를 제거해 주어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강추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불행히도 내가 정말 해옥환의 독수에 당한다면, 당신 역시 곤란해지는 것 아닌가?"
추오상이 말했다.
"세상사란 가끔은 운명에 맡겨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강추로가 말했다.
"다행히 당신의 운수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어찌 그리 확언하는가?"
강추로가 말했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일을 무척 치밀하게 처리한다 생각하지만, 아무리 치밀해도 한 가지 실수는 있기 마련이다. 허나 나는 결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부궁주님! 어제 온 밤을 새우고 돌아오지 않으셨으니 필시 무척 피로할 터, 초막으로 들어가도 좋다. 하화련 그들 세 사람이 진작 잠자리를 채비해 두었다."
추오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는 강을 건너려는가?"
강추로가 말했다.
"당연하다. 주성한이 강을 건너왔으니 그의 행적이 필시 해옥환의 눈에 밟혔을 것이다. 지금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해옥환이 크게 의심할 테니, 나의 행동이 빨라야 한다."
추오상이 말했다.
"행동이라는 그 두 글자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
강추로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지금 강가로 걸어가서, 다시 강가에서 나룻배를 타고 금릉으로 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행동이다."
추오상이 말했다.
"검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것 역시 행동이다. 너는 어찌하여 내가 해옥환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명확히 말해주지 못하는가?"
강추로가 말했다.
"방금 내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나에게 방도가 있다고. 그것이 무슨 방도인지에 대해서는 더는 추궁하지 말아 달라."
말을 마친 뒤, 고개를 돌려 강가 나루터를 향해 걸어갔다.
추오상이 한 번 소리쳐 불렀다.
"추로! 돌아오너라!"
강추로가 가다가 다시 돌아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추 부궁주님, 무슨 지시라도 있는가?"
추오상이 말했다.
"만약 네가 해옥환을 사지에 몰아넣으려 한다면, 내가 너에게 충고 한마디를 건네겠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추로가 말을 가로챘다.
"추 부궁주님! 마음을 푹 놓아도 좋다. 나라는 사람은 그리 극단적인 길을 걷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비록 나를 죽이려 했을지언정 나는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다. 이해관계를 떠나서, 그녀는 어찌 되었든 나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가 아닌가!"
추오상은 문득 강추로라는 여자의 성품이 무척이나 깊고 음험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자신과 아버지가 다른 언니인 해옥환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조금의 놀라움도, 조금의 분노도 보이지 않고 신색이 줄곧 가라앉아 있었다.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대처할 방도를 진작에 세워두었던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추오상의 마음속에 은근히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일 년의 기한이 찬 뒤에 검을 휘둘러 강추로를 죽임으로써 마음속 원한을 씻어내겠다던 자신의 염원은, 어쩌면 이루어지기 매우 어려울지도 몰랐다.
앞으로 남은 열한 달 동안 수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더구나 이 여자는 이토록 교활하기 그지없으니, 아무래도 자신이 기회를 보아 거짓 웃음을 지으며 상대와 잘 주선해야만 비로소 승산을 굳힐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 차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추로! 네가 금릉에 가서 무엇을 하려는지 나 역시 더는 묻지 않겠다. 허나 오늘 밤 돌아오는 것은 잊지 말아라."
강추로가 깔깔거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추 부궁주님! 염려 마라! 이런 일에는 내 기억력이 가장 좋으니 잊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 몸을 요리조리 흔들며 강가 나루터를 향해 걸어갔다.
추오상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추로의 신형이 대나무 숲 사이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초막으로 향했다.
강추로는 대나무 숲을 뚫고 지나,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억새풀 고개를 넘어갔다. 발걸음이 안상하고 태도가 자약하여, 마치 어디에 낚싯대를 드리울지 찾는 강가의 한가로운 나그네와 같았다.
돌연,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슈욱 하고 울리더니, 붉은 옷을 입고 복면을 한 미인 한 명이 그녀의 앞에 나타나 앞길을 가로막았다.
푸른 하늘 아래, 밝은 대낮에 누군가 나타나 길을 막을 줄은 강추로 역시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척 침착하게 천천히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상대방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은 머리 뒤로 긴 머리칼을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고, 붉은 사천으로 두 눈 아래를 가려 얼굴의 태반을 감추고 있었다. 오직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만이 강추로의 몸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장검이 들려 있었는데, 검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이미 기세를 모으고 대기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강추로는 상대를 잠시 살피더니, 이내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보시오 낭자,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가?"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바로 사람들이 만인미(萬人迷)라 부르는 강추로인가?"
강추로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낭자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 이 소매의 이름은 노추강(路秋江)이며, 천궁의..."
그녀는 원래 경천궁(擎天?)의 명성을 빌려 상대를 겁주려 했다.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이 나직하게 일갈했다.
"닥쳐라!"
강추로의 가슴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얼굴에는 전혀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여전히 침착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낭자의 말투는 어찌 이리도 상대를 몰아붙이는가."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추로, 짐짓 태연한 척하지 마라. 머리는 숨기고 꼬리는 드러내는 식의 얄팍한 짓으로 네 진짜 정체를 부정하려 들지 마라."
강추로가 말했다.
"낭자야말로 천으로 얼굴을 가렸으니 머리도 숨기고 꼬리도 숨긴 격이다. 도둑이 강도를 나무라지 못하는 법이니, 우리 둘 다 오십보백보인 셈이다."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말했다.
"잔말 말고 입 다물어라. 이 할미가 오늘 이곳에서 검을 빼 들고 기다린 것은, 바로 너 같은 화냥년의 목숨줄을 끊어놓기 위함이다."
강추로가 말했다.
"생사는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법이다. 만약 내 제삿날이 당도했다면, 설령 낭자의 장검이 내 목을 베지 않는다 해도 내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져 죽었을 터..."
갑자기 어조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허나 이 소매가 하나 묻겠다. 원한에는 원인이 있고 빚에는 주인이 있는 법인데, 낭자가 검을 들고 목숨을 거두려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말했다.
"잔사설은 필요 없다. 이 할미는 맨손인 자를 베지 않으니, 네 녀석의 무기를 꺼내라!"
강추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소매는 명분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만약 낭자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않는다면, 이 소매는 그리 쉽게 검을 뽑지 않을 것이다."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말했다.
"좋다. 네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 있기에 감히 이토록 오만한 소리를 내뱉는지 내 친히 보아주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날려 강추로의 우측으로 파고들더니, 손목을 떨치며 장검을 찔러왔다.
강추로가 명분 없는 싸움은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온전히 상대를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이미 상대의 공력이 매우 높고 검법 또한 만만치 않음을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현재의 공력으로는 절대 상대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았기에 일부러 시간을 끌려 했으나, 뜻밖에도 상대는 그 계책에 말려들지 않았고 더는 군더더기 말을 섞지 않은 채 느닷없이 검을 찔러온 것이다.
다급한 와중에 강추로는 경솔하게 검을 뽑아 초식을 맞받지 못하고, 오직 영민한 신법에 의지해 몸을 반쯤 회전하며 전광석화처럼 뒤로 급히 신형을 피했다.
그녀의 현재 공력은 비록 절반밖에 회복되지 않았으나, 적을 피하는 경공만큼은 왕년과 다름없이 무척이나 빨랐다.
그러나 뜻밖에도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추로가 입고 있던 비단치마의 절반이 상대의 장검에 잘려 나가며 그 속에 입은 도홍색 비단 바지가 드러나고 말았다.
상대의 검법이 이토록 예리하고 빠를 줄은 강추로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은 첫 초식에 기선을 제압하자 기세가 더욱 당당해져 냉소를 지었다.
"만약 이래도 검을 뽑아 맞서지 않는다면, 이 할미의 두 번째 검이 나갈 때는 네 목과 몸이 분리될 것이다."
말과 동시에 장검으로 가볍게 반원을 그리며 손목을 낮추어 검을 누르더니, 강추로의 허리춤을 향해 횡으로 쓸어갔다.
강추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상대가 펼친 검세의 기포로 보아, 이미 마음속에 단단히 살기를 품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검기가 사람을 윽박지를 뿐만 아니라 힘 또한 온전히 실려 있어, 설령 지금 급히 검을 뽑아 막아낸다 하더라도 이 일격에 담긴 날카로움과 예리함을 온전히 저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바로 그 찰나, 느닷없이 인형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챙강 하는 맑은 파공음과 함께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의 장검이 갑작스러운 강한 경력에 가로막혔고, 그녀의 신형 또한 중심을 잃고 뒤로 몇 걸음 연속으로 물러섰다.
강추로는 본래 두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려 했으나, 뜻밖의 상황에 몸을 돌려보니 기쁨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한 준미한 소년이 옥수림풍의 기개로 당당히 서서 형형한 눈빛으로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준미한 소년은 바로 주성한이었다.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은 방금 전의 한 초식으로 이미 상대의 역량을 가늠했는지, 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을 검집에 도로 넣고 포권을 하며 물었다.
"이보시오, 귀한 성명이 어찌 되시는가?"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의 검법은 그야말로 예리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그의 접선(부채) 일격에 막혀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는 천천히 부채를 소매 안으로 집어넣고 역시 포권을 해 보이며 말했다.
"이 사람은 강주의 주성한이라 하오. 방금 낭자에게 결례를 범했으니 부디 노여워 마시오."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묻겠는데, 주 소협은 이 낭자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아무런 친분도 없는 사이요."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말했다.
"아무런 친분도 없다면서 어찌하여 이 흐린 물에 발을 담그려 하는가."
주성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을 그리 거칠게 할 것은 없소. 길을 가다 불의를 보고 칼을 뽑아 돕는 것은 장부의 의로운 행위이니, 이 사람은 스스로 그릇된 일을 했다 생각지 않소."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코웃음을 쳤다.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군!"
주성한이 말했다.
"낭자는 이 사람이 거짓을 고한다 생각하는가?"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말했다.
"소협이 어찌 이 싸움이 불의한 싸움인 줄 안단 말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낭자는 검을 손에 쥐고 있으나 저 낭자는 검을 검집에서조차 빼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공평한 싸움이라 하겠소?"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추로와 주성한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우리 여후에 다시 만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하고 튕겨 올리며 강가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신법은 기이할 정도로 빨랐으나 주성한은 그보다 더 빨랐다.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려 붉은 옷의 미인의 앞길을 가로막았고, 소매에서 부채를 꺼내 촤악 펼치며 앞길을 차단했다.
"낭자,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말했다.
"무엇이냐? 아직도 시비를 걸 셈이냐?"
주성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하나 묻고자 하오. 낭자는 저 여인이 도대체 누구인지는 알고 손을 댄 것이오?"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말했다.
"당연히 알고 있다."
주성한이 말했다.
"낭자가 미처 모르는 모양인데, 저 여인은 경천궁 부궁주 추오상 휘하의 사대 검희 중 으뜸이오. 지금 경천궁은 무림의 맹주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길을 막고 그녀를 죽이려 드는 것은 도리어 경천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고 그 위풍을 짓밟으려는 도발이 되지 않겠소?"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아,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리 말하니, 자네는 지금 경천궁의 편을 들며 그 위세를 드높여 주려는 모양이군?"
주성한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낭자는 진정 좋고 나쁨을 분간하지 못하는구려. 솔직히 말해, 이 사람은 지금 낭자의 안위를 걱정하여 만류하는 것이오!"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이 냉소를 지었다.
"쓸데없는 참견이다."
말을 마치고 우측으로 다섯 걸음 비껴서더니, 두 다리에 탄력을 주어 앞으로 길을 뚫고 달아나려 했다.
주성한은 더는 그녀를 가로막을 의도가 없는 듯했으나, 돌연 대나무 숲 사이에서 또 다른 인형 하나가 살같이 튀어나왔다. 그 신법의 빠르기가 마치 하늘 위에서 내리꽂히며 먹이를 낚아채는 솔개와 같았다.
그 인형은 붉은 옷의 미인의 앞에 착지하더니, 신형을 한 바퀴 회전하며 차갑게 일갈했다.
"게 게 서라!"
그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은 이미 머리 위로 파공음이 울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신형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름 아닌 경천궁의 부궁주 추오상이었기 때문이다.
추오상이 어찌 이리 갑작스레 당도했는지 주성한 역시 크게 의아해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저 편 억새풀 고개 위에 이미 검을 손에 쥔 네 명의 미인이 서 있었는데, 바로 추오상의 수하인 사대 검희들이었다.
그제야 주성한은 모든 정황을 깨달았다. 자신이 이 붉은 옷의 복면 미인과 말을 섞는 사이에, 강추로가 얼른 돌아가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추오상은 단검을 뽑지 않은 채 포권을 가볍게 해 보이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낭자는 무슨 연유로 길을 가로막고 본 부궁주 휘하의 검희를 살해하려 했는가?"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천천히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저 멀리 서 있던 하화련이 돌연 몸을 날려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의 퇴로를 차단하며 크게 외쳤다.
"부궁주님! 이 천한 계집이 도망치려 합니다."
추오상 역시 상대방의 기도를 간파하고는 휙 하니 손을 품 안에 넣어, 정광이 번쩍이는 사절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그가 검을 미처 휘르기도 전에,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은 이미 몸을 활처럼 굽히더니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도도히 흐르는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찰나의 순간에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강추로는 스스로 수중 무공이 출중하다 자부했기에 신형을 날려 강가로 다가갔다. 당장 물속으로 뛰어들어 추격하려는 기세였다.
주성한이 두 팔을 벌려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낭자,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 때는 용서하는 법이오. 또한 옛말에 궁지에 몰린 도적은 쫓지 말라 했으니, 낭자가 굳이 힘을 들여 쫓아갈 필요는 없을 듯하오."
강추로는 시선을 상대의 얼굴에 던져 한 바퀴 훑어보더니 냉소를 지었다.
"주성한, 좋은 사람 역할도 본인이 하고 나쁜 사람 역할도 본인이 하니, 당신은 도대체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 것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낭자! 방금 전 암중에 손을 써서 나를 사지에 몰아넣으려 했던 네 행태를 생각하면, 이 사람은 마땅히 모른 척 방관하여 네가 저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의 예리한 검법에 당하게 두었어야 했소. 허나 이 사람은 추 부궁주님의 체면을 보아 이리 출면하여 가로막은 것이오. 그러니 이 빚은 낭자가 굳이 마음에 둘 필요 없소. 이 사람은 낭자를 위해 손을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강추로가 아,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리 말하니, 우리의 추 부궁주님께서 당신의 그 정을 알아주셔야겠군."
추오상은 자연히 주성한의 심의를 알아차렸기에, 이쪽으로 걸어와 손을 한 번 휘두르며 말했다.
"노 시녀! 말씨가 무례하니 저리 물러서 있거라..."
말을 한 차례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주성한에게 포권을 해 보이며 이었다.
"부하 검희를 구해준 공이 크니, 소제가 이리 감사의 인사를 전하겠소."
주성한 역시 포권으로 화답하며 말했다.
"별말씀을..."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강 낭자의 행적이 이미 수많은 이들에게 노출된 듯하오. 그녀를 죽이려는 동기 또한 다른 속셈이 있을지 모르니, 추 형께서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좋겠소."
이 말에 추오상의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그가 비록 주성한에게 자신과 강추로 사이의 비밀을 털어놓기는 했으나 그리 상세히 말하지는 않았는데, 주성한이 건넨 말의 함의는 분명 모든 내막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에 한 차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 형께서 마음을 써주시니 소제는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오. 이리 된 이상, 앞으로 소제가 저 노 시녀를 한 걸음도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단단히 단속하겠소."
주성한이 말했다.
"그리하는 것이 가장 좋겠소. 그럼 이 사람은 이만 작별하겠소."
추오상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주 형,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상대의 앞으로 걸어가 목소리를 더 한층 낮추며 말을 이었다.
"주 형은 방금 저 낭자와 한 초식을 섞어보았으니, 혹 저 낭자의 출처를 알아차리지는 못했소?"
주성한이 말했다.
"검법이 그야말로 예리하기 이를 데 없고 내력 또한 만만치 않아, 이 사람 역시 전력을 다한 뒤에야 겨우 그 한 검을 봉쇄할 수 있었소. 만약 싸움이 길어졌다면 이 사람 역시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오."
추오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이것 참 기이하군. 강호에 이토록 검술이 고초한 젊은 여인이 또 존재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소."
말을 한 차례 멈추었다가 이었다.
"주 형은 혹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용모를 유심히 보았소?"
주성한이 말했다.
"이 사람이 방금 추 형과 작별한 뒤, 우연히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행적이 궤비한 것을 발견했소. 그리하여 암중에 잠복해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으나 단지 뒷모습만 보았을 뿐, 그 아름다운 용모를 직접 목도하지는 못했소."
추오상이 말했다.
"필시 낯익은 인물일 터요. 그렇지 않다면 굳이 사천으로 얼굴을 가려 자신의 용모를 은폐할 이유가 없지 않소..."
강추로가 말을 거들었다.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수중 무공은 대단히 출중하여 거의 나와 상하를 다툴 만했다. 이토록 수성에 능한 고수를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주성한이 추오상에게 눈짓을 보냈다. 사사로이 추오상과 밀담을 나누고 싶은 정황이 있는 듯했다.
추오상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강가 나루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비록 사대 검희에게 뒤를 따르지 말라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네 사람 모두 기색을 살피고는 영리하게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두 사람이 한참을 걸어가니, 저 편의 사대 검희들과는 이미 오십 장 넘게 거리가 벌어졌다.
그제야 추오상은 강가의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성한 역시 그의 곁에 마주 앉기를 기다려 나직하게 물었다.
"주 형, 소제에게 전할 말이라도 있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추 형은 이 사람의 사람됨에 대해 도대체 어찌 평가하시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의 그 질문은 소제를 참으로 난감하게 만드는군."
주성한이 말했다.
"이것은 본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질문이오. 이 사람이 처음 추 형과 어울릴 때는 과연 목적을 품고 있었소. 허나 지금 이 순간, 이 사람은 진심으로 추 형의 처지를 염려하고 있소."
추오상이 말했다.
"고맙소!"
주성한이 말했다.
"추 형은 결코 이 사람이 짐짓 은혜를 베푸는 척 날조하는 것이라 생각지 마시오..."
갑자기 목소리를 크게 낮추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저 붉은 옷을 입은 낭자가 비록 강추로를 죽이려 했으나, 실상 그녀의 목적은 추 형을 겨냥한 것일지도 모르오."
추오상이 말했다.
"설령 그녀가 뜻을 이루어 강추로를 죽인다 한들, 그것이 소제와 무슨 상관이 있겠소?"
비록 마음에 없는 빈말이었으나, 추오상으로서는 가장 거대한 비밀을 상대에게 철저히 숨겨야만 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목숨이 걸린 중차대한 대사였기에 결코 경솔히 누설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성한이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미처 잘못 추측한 모양이오."
추오상이 말했다.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출현한 뒤로, 소제의 마음속에 도리어 또 하나의 은근한 우려가 생겨났소."
주성한이 말했다.
"설마 추 형께서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을 염두에 두신단 말이오?"
추오상이 말했다.
"말을 그리 쉽게 할 것은 아니오.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검법이 고초하고 수성 또한 만만치 않소. 강호에서 수로와 육로의 무공이 모두 이토록 강성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오. 그녀의 출현은 필시 또 다른 문파나 다른 세력이 소제를 곤란하게 만들려 한다는 증좌요."
주성한이 말했다.
"추 형만 허락한다면 이 사람이 약간의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데 어떠하오?"
추오상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신색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 형의 도모는..."
주성한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장강의 일패인 금전표(金戰彪)는 수로에서 수십 년을 구르며 수많은 사람을 겪었고 견문이 넓고 지식이 많소. 이 사람이 가서 그에게 수소문해 본다면, 어쩌면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내력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오."
추오상이 포권을 해 보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주 형에게 수고를 끼치겠소."
말을 마치고 몸을 날려 나루터로 향했다. 추오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이내 원래 있던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때 하화련, 하용미, 맹채옥 세 사람은 이미 초막으로 돌아갔고, 오직 강추로 혼자만이 억새풀 고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추오상이 걸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마중을 나가며 나직하게 말했다.
"추 부궁주님! 우리의 처지가 이미 풍전등화와 같아졌다."
추오상이 말했다.
"네가 너무 과장하는 것이 아니냐?"
강추로가 말했다.
"방금 전에는 주성한이 곁에 있었기에 내가 차마 밝히 말하지 못했다. 허나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누구인지는 내가 진작에 알아차렸다."
추오상이 아, 소리를 내며 눈썹을 연신 실룩거리더니 말했다.
"네가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누구인지 안단 말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름을 입 밖에 내면 당신 역시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추오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진작에 낯익은 인물일 줄 알았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라! 그녀가 누구냐?"
강추로가 말했다.
"추오상, 이 일은 내 목숨뿐만 아니라 당신의 목숨과도 직결된 일이며, 당연히 우리 둘의 거대한 계획과도 얽혀 있다. 그러니 내가 고한 뒤에 당신은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추오상의 신형은 이미 극도로 인내심을 잃은 듯 보였고, 말투 또한 다급하게 변해갔다.
"강추로! 아녀자처럼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어서 말해라."
강추로가 말했다.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바로 귀궁의 단 궁주께서 금릉으로 파견하여 총지휘를 맡기신 용희, 심유향이다."
추오상의 신색이 단숨에 흙빛으로 변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내심 역시 거대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눈썹을 높이 치켜세우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경악하여 소리쳤다.
"그녀였단 말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지금 당대의 무림을 둘러보아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 속을 제집 드나들듯 자약하게 오갈 수 있는 무림 인물이 적지 않으나 여인은 오직 둘뿐이다. 하나는 나 만인미 강추로요, 다른 하나는 바로 심유향이다. 그녀의 명성은 내가 진작에 전해 들었다. 허나 무림에서 귀궁의 궁주 단비우를 포함하더라도, 심유향이 이토록 수성에 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터이다."
그 찰나의 순간, 추오상의 안색은 경악에서 점차 엄숙함으로 굳어졌다. 한참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일이 결코 단순치 않구나. 그녀가 무슨 연유로 너를 이토록 사지에 몰아넣으려 한단 말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미혹하게 만드는 점이요, 또한 염려스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추오상이 다시 한 차례 생각을 정리하더니 물었다.
"강추로! 너는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단연코 용희라 단정할 수 있는가?"
강추로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녀를 대면한 적이 없다. 당신이 나에게 그녀가 금릉에 당도했다고 일러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그녀가 경천궁 단 궁주 곁의 팔대 검희 중 으뜸인 용희가 된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허나 나는 방금 전 그녀가 물속으로 투신하던 신법과 파도를 가르고 물살을 뚫고 가던 역량에서 단번에 그녀의 바닥을 알아차렸다. 심유향이 틀림없으니 절대 오진이 아니다."
추오상이 중얼거렸다.
"과연 그러했군. 그러니 저 주성한조차 그녀의 검법이 고초하여 맞서 싸우기 난감하다 평했던 것이로구나..."
강추로가 버들가지 같은 눈썹을 한 차례 치켜세우며 말했다.
"가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절대 무모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최소한 우리는 먼저 그녀의 동기부터 명확히 파악한 뒤에야 비로소 대처할 방도를 구상할 수 있다."
추오상이 말했다.
"강추로! 이 추 씨 성을 가진 자가 아무런 성품도 깊이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지 마라. 내가 그토록 형편없지는 않다."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이 지금 가려는 것이 심유향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란 말이냐?"
추오상이 말했다.
"그녀를 찾으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무공을 휘두르지도 않을 것이고, 그녀에게 이 일을 입 밖에 내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곁가지로 슬쩍 찌르는 방식을 써서 그녀의 반응을 탐색할 뿐이다."
강추로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추오상, 내가 보기에는 그 한 수의 바둑은 별로 신통치 않은 묘수다."
강추로가 이어 말했다.
"심유향이 경천궁 단 궁주의 곁에서 고귀한 용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그녀의 검법이 예리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기지와 심계가 깊기 때문이다. 그 계집의 두 눈은 보통 매서운 것이 아니다. 방금 전 내가 그녀의 눈빛을 대면했을 때 이미 느낀 바가 있다. 당신이 그녀와 마주한다면, 그녀가 당신의 마음을 단번에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이니 그리되면 참으로 곤란해진다."
추오상이 말했다.
"강추로! 네가 심유향을 너무 과장하여 묘사하는 것이 아니냐? 너무 신비화하고 있구나."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않을 줄 알았다."
추오상이 말했다.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심유향에게 딱히 기이한 구석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강추로가 말했다.
"그녀가 당신들 쪽 사람이기에 당신이 그녀를 방비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지도 않았던 탓이다. 지금 당장 가서 그녀를 대면해 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단번에 깨달을 것이다. 허나, 그때가 되면 당신의 속내 역시 이미 그녀에게 간파당한 뒤일 터이다."
추오상은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그렇구나! 어제 밤에 그녀가 나에게 진회하로 가서 시랑호표 네 형제를 처단하라 일렀을 때, 뜻밖에도 사전에 소식이 누설되어 있었지..."
말을 한 차례 멈추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것 참 기이한 일이로다. 그녀는 단 궁주께서 전적으로 신임하는 인물이고, 게다가 금릉에서는 단 궁주를 대신해 호령을 내리는 신분으로 좌진하고 있다. 내 추오상은 경천궁의 부궁주인데, 그녀가 어찌하여 도리어 나를 대적하려 한단 말이냐?"
강추로의 눈빛이 번쩍 빛나며 말했다.
"추오상! 당신이 거기까지 말하니 나 역시 어렴풋이 깨닫는 바가 있다."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무엇을 생각해 내었느냐?"
강추로가 말했다.
"추오상! 말하기 전에 사전에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우리는 지금 생사를 함께하고 진퇴를 같이하는 사이니, 당신은 반드시 내 말을 전적으로 믿어야만 한다."
추오상이 말했다.
" 말을 돌릴 필요 없다. 네 말은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강추로가 유유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불만이 천만 가지나 쌓여 있음을 안다. 허나 우리 두 사람의 현재 운명은 이미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혀 있으니, 내가 하는 말을 당신은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된다."
추오상이 인내심을 잃은 듯 말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네 말은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어서 말해라."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이 일찍이 나에게 단비우의 친신들이 아직 금릉에 잠복해 있다고 일러준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금릉성 안에서 행한 모든 처신이 이미 그자들의 눈에 밟혔을 터인데, 설마 단비우가 당신에게 경계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겠는가."
추오상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네 말대로라면, 단 궁주께서는 이미 나 추오상이 반역의 마음을 품었다 단정 짓고, 용희를 파견한 목적이 바로 나를 처단하기 위함이란 말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정황이 아마 그 정도로 나쁘지는 않을 터이나, 우리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단비우가 용희를 파견한 의도는 당신을 제압하려는 생각이었을 터이나, 여후에 당신의 공력이 크게 진전하고 검법이 일취월장한 것을 발견하자 잠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암중에 손을 쓴 것이다. 그녀가 방금 전 억새풀 고개 앞에 잠복하여 나를 사지에 몰아넣으려 했던 수법으로 보아, 어쩌면 우리가 합벽쌍수(몸을 합쳐 함께 수련함)하여 당신 체내의 음양 두 기운을 조화롭게 다스리는 비밀까지도 이미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을지 모른다."
추오상이 말했다.
"얼핏 듣기에는 실로 위언송청(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허황한 말을 함) 같으나, 차분히 따져보니 나름대로 도리가 있구나..."
어조를 무겁게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강추로! 이 순간부터 너는 나와 한 걸음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 네 목숨이 곧 이 추 씨 성을 가진 자의 목숨줄과 같기 때문이다."
강추로가 한 차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애석하게도 자네와 나 사이에 정과 사랑이 없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심유향이 도리어 내가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 될 뻔했다."
추오상은 다소 노수성노(부끄러움이 변해 화가 됨)의 기색이 있었으나, 애써 화를 터뜨리지 않은 채 손을 한번 휘두르며 말했다.
"가자, 우리 둘이 금릉으로 한 번 걸음을 옮겨보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날려 강가 나루터로 향했고, 강추로는 유유히 한숨을 내쉬며 무척이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자, 강추로가 물었다.
"추 부궁주님! 어제 온 밤을 새우고 돌아오지 않으셨는데, 어디를 다녀오셨는가?"
추오상이 말했다.
"저 백화궁의 궁주 염군도와 강포진에서 밤을 새워가며 밀담을 나누었다."
강추로는 한 차례 멍해지더니 말했다.
"그것은 참으로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난 일이다..."
어조를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추오상이 말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든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한 차례 문답을 나누는 사이에 두 사람은 이미 나루터에 당도했다.
이때 마침 나룻배 한 척이 전안을 떠나 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추오상이 막 강추로와 함께 배에 오르려던 찰나, 저 멀리서 주성한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신호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에 추오상은 얼른 내딛던 한쪽 다리를 도로 거두어들였다.
주성한이 비장하게 달려와 그들의 앞에 서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추 형, 우리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눕시다."
추오상이 고개를 끄덕였고, 세 사람은 선창에서 멀리 벗어나 상류를 향해 걷다가 한 대나무 숲 안으로 들어섰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이 혹 무슨 소식이라도 알아낸 것인가?"
주성한은 대답을 하는 대신 시선을 강추로에게 슬쩍 던졌다.
강추로가 말했다.
"필시 내가 자리를 피해주길 바라는 모양이군. 내 마침 이 대나무 숲 밖을 한 바퀴 순시하며 혹 엿듣는 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오겠다."
말을 마치고는 추오상의 동의를 구하기도 전에 재빨리 대나무 숲을 빠져나갔다.
주성한이 말했다.
"추 형! 이 사람이 고의로 위언송청을 하는 것이 아니오. 추 형의 경천궁 내 지위가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조짐이 보이오."
추오상의 내심이 은근히 멍해졌다. 명백하게도 강추로의 판단이 맞았던 것이다. 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과연 용희 심유향이었고, 주성한 역시 지금 그 소식을 탐지해 온 터였다. 그러나 추오상은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주 형! 그것이 무슨 말이오?"
주성한이 말했다.
"방금 전 그 복면을 한 붉은 옷의 여인은 귀궁의 용희 심유향이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이 얻어온 소식이 확실한 것이오?"
주성한이 말했다.
"김전표가 이 사람에게 일러주기를, 무림에서 파도를 뚫고 물살을 쫓을 수 있는 여인은 오직 둘뿐이라 하더이다. 하나는 '만인미' 강추로요, 다른 하나가 바로 심유향이라 하오. 김 노선배는 심유향이 진작에 귀궁에서 용희의 존귀한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소. 다만..."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김 노선배 역시 심유향이 현재 금릉에 당도해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소."
추오상이 짐짓 분노한 체하며 말했다.
"당치 않은 소리! 만약 용희가 맞다면, 어찌 내 곁의 검희를 행자하려 들었겠소."
주성한이 말했다.
"추 형! 이 사람이 직언을 올리는 것을 용서하시오. 이 일은 차라리 믿을지언정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더욱이 방비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오."
추오상이 말했다.
"무엇을 방비한단 말이오?"
주성한이 말했다.
"당연히 단비우를 방범해야 하오. 그가 결코 호랑이를 키워 화를 자초할 리는 없지 않소."
추오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양호유환(호랑이를 키워 화를 자초함)? 그것이 무슨 말이오?"
주성한이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의 자구 선택이 다소 부적절했을지도 모르오. 허나 이 사람의 판단으로는, 만약 저 단 궁주가 추 형의 금릉에서의 행적을 한 번 전해 듣게 된다면, 추 형이 이미 이심을 품었음을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요."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 역시 소제가 이심을 품은 것으로 보이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 그 누가 출인두지(남보다 뛰어남)하고 싶지 않겠소. 추 형이 비록 그러한 마음을 품었다 한들, 그것을 크게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오."
추오상의 얼굴에 갑자기 득의만만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는데, 마치 자신의 속내를 깊이 알아준 것에 대단히 만족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도리어 다른 도모를 품고 있었다. 이 주성한이라는 자는 눈빛이 예리하고 재智가 출중한 데다가 민심까지 깊이 얻고 있으니, 여후에 자신이 무림을 칭패하려 할 때 이 주 씨 성을 가진 자가 필시 거대한 강적이 될 터였다. 마음속에 생각이 얽히자 얼굴 위의 신색 역시 갑작스레 굳어졌다.
주성한은 눈빛이 번개 같아 즉시 추오상의 심의를 통찰하고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성미가 급하고 말이 직설적이라 미처 적절치 못하게 고했을 수 있으니, 추 형께서 부디 노여워 마시기를 바랄 뿐이오!"
추오상은 그저 한 차례 미소를 지으며 이를 넘겨버렸다.
주성한이 다시 말했다.
"추 형, 또 다른 차청이 있으시다면 부디 마음 놓고 분부해 주십시오. 이 사람은 마땅히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이 너무 객기하시는구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인형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들어 말을 가로막았다. 뜻밖에도 그 사람은 강추로였다.
추오상의 신색이 단숨에 굳어지며 재빨리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토록 신색이 창황한 것이냐?"
강추로가 손을 한 번 내저으며 말했다.
"와서 직접 보아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대나무 숲 밖으로 몸을 날렸다.
추오상의 시선이 날카롭게 주성한에게 한 차례 던져졌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려 대나무 숲을 종출했고, 강추로의 뒤를 바짝 쫓아 한 걸음도 지체 없이 따랐다.
대나무 숲에서 일 전(화살 하나가 날아갈 만한 거리) 정도 떨어진 곳에 너비가 석 자 남짓한 작은 개울이 있었는데, 늦가을이라 물이 말라 겨우 물방울만 뚝뚝 떨어지는 형세였다.
강추로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두 사람이 바라보니, 풀숲 사이에 한 여인이 쓰러져 누워 있었다.
추오상이 물었다.
"이 여인이 죽은 것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이미 기절(숨이 끊어짐)했다. 추 부궁주님께서 이 여인이 누구인지 직접 확인해 보아라."
추오상이 풀숲을 헤치고 들여다보더니 자신도 모르게 크게 멍해졌고, 주성한 역시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알고 보니 이 여인은 온통 붉은 옷을 입고 사천으로 얼굴을 가렸으며, 손에 쥔 장검은 아직 검집에 넣지도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온몸의 의복이 흠뻑 젖어 있었는데, 그 차림새가 방금 전의 그 붉은 옷의 미인과 실로 똑같았다.
마치 눈앞의 이 사자가 방금 전의 그 붉은 옷의 복면 미인인 듯했고, 온몸의 의복이 흠뻑 젖은 것 또한 강물에 뛰어들었던 확실한 좌증(증거)이었다. 설마 이 사자가 정말로 귀고귀한 용희의 자리에 있는 심유향이란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추오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굽혀, 죽은 여인의 복면 사천을 걷어내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의 손이 막 닿으려던 찰나, 여인의 손에 쥐여 있던 장검이 돌연 그의 인후를 향해 살같이 찔러왔다.
그 기세의 빠르기가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아 도저히 피할 재간이 없었다. 하물며 추오상으로서는 상대가 사기를 치며 죽은 척(사사)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터였다. 추오상이 한 차례 경악하는 사이, 예리한 검끝은 이미 그의 인후에서 채 한 치도 되지 않는 곳까지 육박했다.
주성한이 철완으로 추오상의 우익(오른팔)을 움켜잡고 맹렬하게 뒤로 잡아끌며, 오른손의 부채를 날려 재빨리 그 붉은 옷의 여인을 타격했다.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오직 하나의 염두가 번개처럼 그의 뇌리를 스쳤으니, 그것은 바로 '추오상이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침고(위중한 고질병)를 앓고 계신 노부(늙은 아버님)를 구할 방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그가 급작스럽게 손을 쓴 유일한 원인이었다.
추오상은 주성한이 맹렬하게 잡아끄는 힘에 의지하는 동시에, 자신 역시 임기응변의 신법을 전개했다. 신형을 뒤로 활처럼 젖히며 두 발로 땅을 힘차게 걷어차니, 몸이 이미 여덟 자 넘게 종출해 있었다.
그의 응변이 아무리 빨랐다 한들, 예리한 검끝은 결국 그의 인후를 스쳐 지나가며 한 줄기 혈흔을 남겼다. 흐르는 핏자국으로 보아 다행히 후관(기도)까지 끊어지지는 않은 듯했다.
죽은 척했던 붉은 옷의 여인은 번개처럼 내지른 그 일격에 온 정신을 집중했기에, 다른 곳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듯 보였다.
바로 그 눈 깜짝할 사이에 주성한의 오른손 부채가 이미 그녀의 왼팔 곡지혈을 격타했다.
여인은 신형을 한 바퀴 굴리며 수많은 물보라를 튀기더니, 이내 개울 건너편으로 굴러갔다.
주성한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그림자처럼 바짝 따라붙었다. 부채를 촤악 펼치더니 마치 강철도처럼 횡으로 내지르며, 붉은 옷의 여인의 경항(목덜미)을 향해 베어 갔다. 그 경력이 대단히 위맹하고 절륜했다.
붉은 옷의 여인 역시 그 부채에 담긴 위력을 알아차린 듯했다. 게다가 왼팔의 혈도까지 제압당했으니 도저히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는, 도리어 피하지도 않은 채 검을 횡으로 맹렬히 쓸어 주성한의 두 발을 베어 가려 했다.
주성한은 본래 그 붉은 옷의 여인을 사지에 몰아넣을 의도가 없었다. 손에 쥔 부채의 초식이 비록 험악해 보였으나 그 안에는 무궁한 변화가 내포되어 있었다. 부채가 그녀의 목덜미에 닿기 직전, 돌연 초식을 거두더니 베어 가던 세를 바꾸어 내리쳤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여인의 왼쪽 어깨 촌관혈을 톡 치니, 이로써 상대의 주요 혈도 하나를 더 봉쇄하게 되었다. 이제 그 붉은 옷의 여인은 반신 마비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주성한이 붉은 옷의 여인의 촌관혈을 봉쇄하는 그 찰나, 상대의 장검은 이미 그의 발밑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예견했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두 발을 가볍게 벌리며 큰 대(大) 자 모양으로 허공에 솟구쳤다. 장검은 그대로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고, 주성한은 오른손의 접힌 부채를 돌연 아래로 침하시키며 나직하게 일갈했다.
"놓아라!"
챙강 하는 맑은 파공음과 함께 여인의 손에 쥐여 있던 장검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장검은 반공에서 한 바퀴 선회를 하더니, 검끝을 아래로 한 채 개울물의 사석(모래와 돌) 사이에 꽂혔다.
주성한이 펼친 이 몇 초식은 그야말로 신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신법과 초식이 모두 정잠하고 절륜하여, 추오상은 눈을 고정하고 바라보며 미동조차 하지 못했고 강추로 역시 감히 손을 쓸 여지가 전혀 없었다.
붉은 옷의 여인은 손에 쥔 장검이 이탈해 날아가 버리자, 마치 집게발을 잃은 게(실호지해)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 주성한이 오른발을 들어 그녀의 오른손목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지그시 밟으니, 그녀는 이제 완전히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주성한이 몸을 돌려 물었다.
"추 형, 상처는 어떠시오!"
그는 입으로 이리 물으면서도, 추오상을 향해 서로만 알아볼 수 있는 회심의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은 방금 전 그 복면을 한 붉은 옷의 미인이 용희 심유향일 것이라 추단했었다. 만약 이 죽은 척했던 붉은 옷의 여인이 정말로 그 사람이라면, 주성한으로서도 자연히 고기(꺼림칙하게 여김)하는 바가 생겨 함부로 처분하기 곤란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내심은 이미 눈앞의 이 붉은 옷의 여인이 심유향일 리 없다고 단정 짓고 있었다. 수패 김전표의 서술에 따르면, 심유향의 검법이 결코 이토록 형편없는 지경에 머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단정적인 생각이 있었으나 주성한은 경솔하게 붉은 옷의 여인의 복면 사천을 걷어내지 않았다. 사사를 가장해 추오상을 척살하려 한 것은 참으로 용심이 극에 달한 정황이었다. 이 여인은 필시 추오상과 대단히 깊은 연원이나 구갈(얽힌 원한)이 있을 터였기에, 그는 우선 눈빛으로 추오상의 심의를 수소문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주성한의 연소노성(나이는 젊으나 처신이 노련함)한 면모였다.
추오상 역시 주성한이 보낸 눈짓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으나, 곧바로 자신의 심의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목에 난 검상 자국을 만지며 말했다.
"그저 피상(가벼운 피부 상처)일 뿐이오."
이것이 바로 추오상의 심기심침(속내를 깊이 숨김)한 면모였다.
만약 이 붉은 옷의 여인이 진짜로 용희 심유향이라면, 그녀의 복면 사천을 벗겨내는 것은 곧 자신과 경천궁 궁주 단비우 사이의 본격적인 투쟁의 서막을 열어젖히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현재 추오상의 공력으로 보아 그가 결코 함구(두려워함)하지는 않겠지만, 시기적으로 따져볼 때 지금은 다소 상점(이른 감이 있음)했다. 추오상은 결코 자신의 야심을 명랑화(명백히 드러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속내를 따지는 심안으로 치면 여인인 강추로가 자연히 가장 으뜸이겠지만, 거대한 기모(거시적인 계책)를 내다보는 눈은 다소 떨어졌다. 그녀는 몸을 날려 개울을 건너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무슨 연유로 추 부궁주님을 행자하려 들었느냐!"
말과 동시에 휙 하니 손을 뻗어 그 붉은 옷의 여인의 얼굴에 덮인 사천을 움켜잡으려 했다.
추오상이 재빨리 소리쳐 만류했다.
"노 시녀, 무례하게 굴지 마라!"
그가 강추로를 부르는 칭호에 이리 여지를 남긴 것은, 명백하게도 저 붉은 옷의 여인에게 강추로의 진짜 신분을 노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정황 속에서도 그의 심계는 단 한 차례도 느슨해지는 법이 없었다.
강추로 역시 추오상의 심의를 알아차린 듯, 짐짓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한쪽으로 물러섰다.
추오상은 땅에 누워 미동조차 하지 못하는 붉은 옷의 여인을 한참 동안 타량(살펴봄)하더니 이내 냉소를 지었다.
"낭자가 천으로 얼굴을 가린 것을 보니 필시 용모가 추루하여 감히 사람을 대면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려. 이 추 아무개는 평생 추녀를 대면하는 것을 가장 기피하니, 이 방책으로 나 역시 낭자의 복면 사천을 굳이 찢어발기지는 않겠소..."
어조를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허나 이 추 아무개가 낭자에게 한 마디 묻고자 하오. 사사를 가장해 기회를 노려 검을 움직였으니 그 용심이 극히 험악하구려. 도대체 이 추 아무개와 낭자 사이에 무슨 깊은 원한과 대단한 혐오가 있기에 이리 구는 것이오?"
그 붉은 옷의 복면 여인은 웅얼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대답을 거부했다. 이미 마음을 모질게 먹고 자신의 운명을 처분하겠다는 태도였다.
추오상이 고개를 돌려 주성한에게 번개 같은 눈길을 한 차례 던졌으나, 후자는 그저 미간을 슬쩍 찌푸릴 뿐 아무런 의견도 표시하지 않았다.
추오상이 다시 말했다.
"낭자는 벙어리요? 아니면 목소리가 황소 울음소리 같아 입을 열면 사람들의 치소를 사고 귀를 막게 만들까 두려운 것이오?"
붉은 옷의 여인은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강추로는 이미 인내심을 잃었다. 자연히 그녀 역시 눈앞의 이 붉은 옷의 여인이 결코 심유향이 아님을 요정(확신)했기에 말을 거들었다.
"추 부궁주님, 차라리 이 적인을 첩신(이 몸)에게 넘겨 박문(추궁)하게 하심이 어떠하오."
추오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노 시녀는 저리 물러서 있거라. 이 부궁주 앞에서 네가 감히 함부로 말을 섞지 마라!"
그때 붉은 옷의 여인이 손에 쥐었던 장검(이미 날아간 상태였으나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대신해 눈빛으로 매섭게 쏘아붙이며 나직하게 일갈했다.
"주성한! 네가 명문 출신이라 들었고 평소 스스로를 정파 인사라 자허(자부)하더니, 뜻밖에도 도를 돕고 악을 기르는 조주위학(나쁜 사람을 도와 나쁜 짓을 함)의 행태를 보이며 저 간험한 인물인 추오상과 랑패위간(나쁜 사람끼리 한패가 됨)이 되어 사사로이 정을 통할 줄은 몰랐구나. 이 몸이 똑똑히 기억해 둘 터이니, 우리 여후에 다시 만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튕겨 일으키더니, 불과 몇 차례 제종(신형을 날림)을 거듭하더니 이내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주성한은 신색이 단숨에 변하며 한참 동안 경악을 금치 못하다가, 이내 발을 한번 구르며 외쳤다.
"과연 그녀였구나!"
추오상 역시 신형이 멍해지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가 들을수록 대단히 낯익다 했는데,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주성한이 말했다.
"추 형이 설마 잊으신 것이오? 그녀는 추 형에게 연신 원수를 갚겠다며 찾아들던 동월매가 아니오!"
추오상이 중얼거렸다.
"그녀였단 말이오. 그리 말하니, 무림에서 파도를 뚫고 물살을 가르는 수성에 능한 자가 이제 세 번째로 출현한 셈이구려."
강추로가 말을 받았다.
"그녀는 결코 아까 나를 사지에 몰아넣으려 했던 그 붉은 옷의 여인이 아니다."
추오상이 물었다.
"어찌 그리 단정하는 것이냐?"
강추로가 말했다.
"두 사람의 검법이 명백하게 다르다. 아까 그 여인의 검법은 기이하고 궤절(괴이함)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 힘 또한 위맹했으나, 이 동 씨 성을 가진 계집의 검법은 단지 빠를 뿐(속도)이었다."
추오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 말하니, 두 사건 사이에 아무런 연루도 없단 말이오?"
강추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런 관계도 없을 터이다. 전자는 나를 겨냥한 것이요, 후자는 당신을 겨냥한 것이니."
추오상이 말했다.
"아무런 연루가 없다면서, 어찌하여 의식과 차림새가 이토록 완전히 똑같단 말이오? 설마 이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란 말이오?"
강추로가 말했다.
"어쩌면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주성한이 말을 받았다.
"낭자께서는 우연이라 하셨으나, 이 사람은 차마 동조하기 어렵구려. 이 안에는 필시 무슨 내막(문장)이 숨겨져 있을 것이오."
추오상이 탐수(탐색)하는 어조로 물었다.
"주 형의 혜안으로 보시기에 이 일은..."
주성한이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의구심이 드는 구석은 있으나, 물증도 심증도 뚜렷하지 않으니 이 사람이 어찌 감히 망단(함부로 단정함)하겠소?"
추오상이 한참 동안 침음하더니 말했다.
"이 일은 잠시 심력을 낭비해가며猜疑(추측하고 의심함)할 필요는 없을 듯하오..."
말을 한 차례 멈추었다가 이었다.
"주 형이 방금 이리 관여하신 것은, 참으로 손해가 적지 않다 할 수 있소."
주성한이 수려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추 형의 그 말씀은 도대체 어찌하여 하시는 말씀이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은 평소 인화(사람들의 인심)를 깊이 얻으셨소. 처신이 방정하고 흉회가 뢰락(마음이 너르고 활달함)하여 소래로 무림인들의 추허(추대하고 칭찬함)를 받아오지 않았소. 이번에 저 동월매가 이 일을 널리 선양(유포)하고, 심지어 제멋대로 과장하여 말을 보탠다면, 주 형께서 오랫동안 재배(쌓아 올림)해 오신 영명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소."
주성한이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이 처세함에 있어 훼예(비방과 명예)를 개의치 않고, 오직 문심(마음에 물어봄)하여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것으로 족하오. 저 동월매 낭자가 이 일을 어찌 선양하든, 또한 금릉성 안의 무림 인물들이 이 사람을 향한 태도를 어찌 바꾸든, 이 사람은 결코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오."
추오상이 말했다.
"주 형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소제는 더더욱 흠패(공경하고 감탄함)할 따름이오. 주 형처럼 초진탈속(속세를 벗어나 고결함)한 영년준소(젊고 뛰어난 인재)라면, 소제 역시 진심으로 교분을 맺고 싶은데 혹 고판(지위가 높은 사람과 사귐)이 아닌지 모르겠소."
주성한이 포권을 해 보이며 말했다.
"과찬이시오..."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이었다.
"추 형께서는 혹 이 사람이 고명조예(명예를 아부하여 낚음)의 빈말을 한다 생각하실지 모르나, 사실이 과연 그러하오. 이 사람이 이번에 강호를 행도함에 있어 아무런 야심도 목적도 품지 않았기 때문이오."
추오상이 말했다.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오직 인자로서의 효도를 다하려는 것뿐이겠구려..."
말을 한 차례 멈추고 포권을 해 보이며 이었다.
"주 형의 귀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하게 만들었소. 우리 이쯤에서 작별하도록 하십시다. 고거(고향 집)로 돌아갈 기일을 온전히 계산해 두면, 소제가 스스로 김전표를 찾아가겠소."
주성한이 말했다.
"이 사람은 조용히 유시(지시)를 기다리겠소."
포권을 한 번 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가버렸다.
추오상은 주성한의 뒷모습을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은 채 응시했다. 마치 정신을 온통 빼앗긴 듯한 기색이었다. 반면 강추로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러한 추오상의 신색을 주시하고 있었으니, 마음속으로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주성한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려, 강추로가 그제야 물었다.
"추 부궁주께서는 진심으로 주성한과 친구가 되고 싶으신 건가?"
추오상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여전히 시선을 전방에 고정하고 중얼거렸다.
"벗을 사귐에 있어 어찌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있겠느냐?"
강추로가 말했다.
"짐짓 우호적인 척 기색을 꾸며 상대를 불안하게 만드는 자가 있고, 어떤 자는 우정으로 롱락(교묘하게 부림)하여 상대를 이용하려 들며, 또 어떤 자는 폐부(속마음)를 완전히 통하여 마음을 얽어매는 자가 있으니, 그사이의 차별이 실로 지대하다."
추오상이 물었다.
"그렇다면 너와 나의 사귐은 어디에 해당하느냐?"
강추로가 말했다.
"상호 이용하며 각자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관계, 즉 이른바 이해를 공유하는 사이다."
추오상이 냉소를 지었다.
"상호 이용이라, 참으로 좋은 말이구나!"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이 저 주성한과 교분을 트려 하는 것 역시, 혹 이용하려는 심산을 품고 있는 것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무림에 몸을 담은 이상, 적이 아니라면 곧 벗일 뿐이며 중용의 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성한과 벗이 되는 것은 해가 없고, 그와 적이 되는 것은 불지(지혜롭지 못함)한 처사다. 지주(지혜의 구슬)가 명랑한 자라면 마땅히 취舍(취하고 버림)를 알 터이다."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은 그의 저 접선(부채)에 담긴 오묘한 초식과 위맹한 공력을 목도하고서 비로소 그러한 염두를 내신 것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틀렸다!"
강추로가 물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주성한은 재智가 출중하여, 도리어 심기(흉계)가 없는 모습이 심기가 있는 자보다 훨씬 더 가공(두려움)할 만하다."
강추로가 한 차례 멍해지더니 말했다.
"당신의 그 말씀은 너무도 깊어, 나는 이 안의 현오(깊은 진리)를 참으로 참투(깨달음)하지 못하겠구나."
추오상은 차가운 코웃음을 칠 뿐 더는 말을 섞지 않았고, 화제를 돌려 물었다.
"너의 현재 공력은 얼마나 회복되었느냐?"
강추로가 말했다.
"대략 왕년의 오 성 정도다. 만약 온전히 회복하려 든다면 최소한 석 달의 시간은 더 소요될 터이다."
추오상이 물었다.
"내부(오장육부)로 독을 항거하는 공력은 어떠하냐?"
강추로의 눈빛이 번쩍 빛나더니 눈썹을 휙 치켜세우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이 말을 묻는 의도가 무엇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반문할 필요 없다. 그저 내 질문에 답하기만 하거라."
강추로가 말했다.
"기독(기이한 독)이 아니라면 설령 복중에 흘러들지라도 능히 항거할 수 있고, 독기가 혈맥으로 스며들지 못하게 저지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사전에 스스로 경각(경계함)하고 있어야 하며, 사후에도 너무 오랜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거면 됐다. 이 순간부터 너는 언제 어느 때든 타인이 네게 하독(독을 씀)하려 드는 것을 스스로 조심하거라..."
손을 한 번 휘두르며 이었다.
"가자, 우리 강을 건너 금릉성 안으로 들어가 용희 심유향을 배방(방문)해 보자꾸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먼저 한 걸음 앞서 강가 나루터로 향했고, 강추로의 미간에는 한 차례 경악과 당혹의 기색이 스쳤으나 더는 구차하게 캐묻지 않은 채 두 발을 놀려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 ※ ※
심유향은 일찍이 추오상에게 고하기를, 절대 주동적으로 자신이 머무는 거정(처소)으로 찾아오지 말라 정계(신신당부)했었다. 그러나 추오상은 도리어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걸음을 옮겼으니, 명백하게도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단단히 도모가 서 있었고 당도하면 내놓을 번듯한 설사(변명)가 준비되어 있었던 터였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추오상과 강추로 두 사람은 즉시 시녀 무리에 의해 대청 안으로 연인(안내)되었다.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가볍게 울리는 패옥 소리(환패정당)가 들려왔고, 심유향이 이미 수많은 시녀에게 옹위된 채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막 문턱을 들어서자마자 추오상을 향해 몸을 굽혀 복(여인의 절)을 하였으니, 그 태도가 대단히 공근(공순하고 정중함)했다.
추오상 역시 감히 토대(거만하게 행동함)하지 못하고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답례를 올렸다.
강추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몸을 굽힌 채 꼿꼿이 서서, 추오상이 자신을 심유향에게 인견(소개)해 주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심유향이 상좌에 좌정하자, 추오상이 얼른 강추로에게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노 시녀, 어서 용희 님을 배견하거라."
강추로 또한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고 삼궤구고(三拜九叩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의 대례를 올렸다.
심유향(沈留香)이 손을 한 번 비껴 보이며 그녀에게 일어서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감히 자리에 앉으라 명하지는 않았고, 그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를 연신 탐색하듯 훑어보았다.
한참 동안 주시하던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추오상에게 물었다.
"이 자가 부궁주께서 최근에 보충한 검희, 노추강(路秋江)입니까?"
추오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그러하오. 내가 일부로 그녀를 데리고 와 낭자에게 배견하게 한 것이오."
심유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물이 참으로 체면(體面 :반듯하고 아름다움)하구려. 미목이 유판(流盼:눈빛이 맑고 아름답게 움직임)하고 고행(回顧 :돌아보는 태도)이 생자(生姿:아름다운 자태가 넘침)하니, 부궁주께서 참으로 염복(艶福)이 많으십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가 농을 하시는구려."
심류향(沈留香)은 시녀에게 손짓을 해 보이며 말했다. "이 노희(路姬)를 옆방으로 안내해 차를 대접해라..."
말을 잠시 멈추고, 강추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소홀히 대접하더라도 탓하지 마시오!"
이것은 가히 특별한 대우라 할 수 있었으니, 심류향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저 겸손한 표현일 뿐이었다.
강추로는 다행히 나아가고 물러설 때를 아는 처지라 얼른 대답했다. "첩신(소녀)에게 하사해 주시니 감사드리며, 여기서 절을 올립니다."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이어 추오상에게도 예를 표한 뒤, 앞장서는 시녀를 따라 대청을 물러갔다.
심류향은 안색을 바로잡고 말했다. "부궁주께서는 첩신의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저 노 처자는 눈빛이 바르지 못하고 눈썹에 요염한 기색을 머금고 있어, 아름다움은 넘치나 정숙함은 부족합니다. 부궁주께서 처음에 선발하실 때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이 말은 매우 무거웠으니, 분명히 가르치려 드는 기색이 있었다.
추오상의 마음이 미미하게 움직였으나, 그의 얼굴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부드럽고 세심한 어조로 말했다. "심 낭자가 말한 것은 모두 노희의 단점일 뿐, 노희의 장점은 발견하지 못했군."
심류향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말했다. "부궁주께서는 그녀의 검법이 나쁘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노희의 검법은 특별할 것이 없고, 그저 검희(劍姬)의 기준에 딱 맞을 뿐이다."
심류향이 말했다. "그렇다면 또 어떤 특출난 장점이 있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이 여인은 매우 심계(꾀)가 깊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 추모는 가슴에 감춘 책략이 없고 게다가 경험도 얕아, 강호를 행하다 보면 손해를 보기 쉽다. 노희를 곁에 두고 언제든 깨우쳐 주게 한다면, 추모에게 매우 유익할 것이다."
심류향이 말했다. "그 장점을 취하는 것이 바로 사람을 쓰는 도리이군요. 첩신이 방금 실언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추오상이 웃으며 말했다. "낭자께서는 이리 과하게 예를 차릴 필요 없다. 이른바 알지 못하면 탓하지 않는 법이니, 낭자가 틀린 것은 아니다."
심류향은 안색을 바로잡고 말했다. "부궁주께서 낮에 이곳에 오신 것을 보니,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추오상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낭자는 과연 얼음과 눈처럼 총명하여 한 번에 맞히는군. 마침 한 가지 중대한 일이 있어 낭자와 상의하고자 한다."
심류향이 두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단 궁주께서 낭자를 금릉으로 보내신 것은 매우 중용하신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낭자 역시 책임이 무거움을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 경천궁이 무림에서 누리는 위망은 매우 심각한 시험에 직면해 있다."
심류향이 말했다. "부궁주, 당신의 안색이 무거운 것을 보니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는 이 추모의 사희(四姬) 중 우두머리인 춘희(春姬) 해옥환을 아직 기억하는가?"
심류향이 말했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해 처자는 영민하고 총명하며 검법이 초군(超群)했으나, 안타깝게도 복이 없어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지요."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 이 추모가 알기로는 그 해옥환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지 않았다."
심류향이 훌쩍 놀라며 말했다. "정녕 그런 일이 있습니까? 부궁주께서는 이 말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죽은 자는 그 실종된 시녀였고, 단지 해옥환의 모습으로 역용(易容)했을 뿐이다!"
심류향이 말했다. "그 말은 확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시 내당호법이 거듭 시신을 검험했는데 어찌 착오가 있겠습니까?"
추오상이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니 변론할 필요 없다. 그 해옥환은 지금 금릉 성안에 있다."
심류향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급히 말했다. "부궁주, 이 말이 천진만확(확실)한 것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이 추모가 목숨을 걸고 담보하겠다. 게다가 이 안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으니, 그 해옥환이 뜻밖에도 저 '은여우(銀狐)'의 딸이다. 본궁이 검희를 모집할 때 문파의 편견을 두지 않았거늘, 해옥환은 이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아 이미 궁의 규칙을 범했고, 또 죽음을 가장해 도망친 중죄를 범했다. 세 가지 죄가 한꺼번에 터졌으니, 죽음 외에는 죄를 벗을 방법이 없다."
심류향이 한참을 침吟하다가 다시 물었다. "부궁주, 그 해옥환은 어디에 있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고루 앞의 '승평객잔'에 있다. 다만 그녀는 현재 황해어(黃解語)라는 가명을 쓰고 있으니, 낭자가 황(黃) 자를 맨 뒤로 옮겨 몇 번 더 읽어보면 이 세 글자가 해옥환이라는 이름과 해음(諧音, 발음이 통함)을 이룸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것이다. 그녀는 역용에 능하여 지금은 이미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심류향이 말했다. "이것은 좀 이상하군요. 이름을 바꾸고 얼굴을 바꾸었는데, 어떻게 그녀가 해옥환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추오상이 불쾌한 안색으로 말했다. "낭자의 그 말은 이 추모가 듣기에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군."
심류향이 말했다. "첩신이 실언한 바가 있다면 부궁주께서 아끼지 말고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검희가 되면 모두 오른팔에 주사(朱砂)로 글자를 문신해 표식을 삼으니, 낭자가 어찌 조사해 보지 않는가?"
심류향이 말했다. "그렇다면 부궁주께 수고를 좀..."
추오상이 손을 치켜들며 말했다. "낭자는 이 추모에게 가서 저 해옥환을 처단하라는 것인가?"
심류향이 말했다. "첩신이 바로 부궁주의 대가를 번거롭게 해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가 단 궁주를 대신해 호령을 내리니 이 추모가 마땅히 따라야겠으나, 이 일만큼은 추모가 명을 거역하겠노라. 설령 단 궁주 본인이 여기 있더라도 추모는 똑같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심류향이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부궁주의 이번 거동은 참으로 첩신이 백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추오상이 말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심류향이 말했다. "첩신은 그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이 일이 일어났을 때 이 추모는 궁에 없었다. 지금 그 안의 폐단을 말해본들 참과 거짓을 분변하기 어려우니, 만약 추모가 가서 해옥환을 처단한다면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겠는가? 단 궁주와 시신을 검험한 호법은 말할 것도 없고, 낭자조차도 이 일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그러니 낭자가 친히 가야만 이 추모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다."
심류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이 이치에 맞군요. 부궁주께서 방금 책략이 전혀 없다고 겸손해하셨는데..."
추오상이 말을 받아 말했다. "이것은 모두 저 노희의 공치사니, 추모가 마침 그녀의 장점을 쓴 셈이다."
심류향이 말했다. " 그렇다면 이 일은 부궁주의 뜻에 따라 첩신이 친히 가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는 행동하기 전에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록 곁의 심복이라 할지라도 예외로 두지 마라."
심류향이 말했다. "부궁주께서는 첩신의 좌우에 배반하여 딴마음을 품은 자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는 결코 이 추모가 위언송청(공포심을 조장함)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 추모가 진회하 강변으로 가서 저 승냥이와 이리, 호랑이와 표범 사형제를 처단하려 했을 때, 상대가 이미 함정을 미리 파놓았으니, 이것은 과연 누구에 의해 누설된 것이겠는가?"
심류향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아마 단지 우연일지도 모른다."
추오상이 말했다. "심 낭자! 명성이 낭자한 '은여우(銀狐)'가 뜻밖에도 경천궁에서 귀한 손님 대접을 받고, 단 궁주의 유시 또한 그녀가 금릉으로 가져왔다. 이로 보아 그 음탕한 계집이 본궁 내부와 이미 깊이 통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해옥환은 바로 그녀의 딸이다. 낭자는 이 일을 신중히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허사로 돌아갈 뿐이다."
그의 말속에 담긴 행간의 뜻은 이미 명백히 드러나 있었다.
심류향(沈留香)은 그의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잠시 침吟하다가 말했다. "부궁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첩신은 도리어 조금 망설여집니다. 차라리 먼저 단 궁주께 여쭈어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는가?"
심류향이 말했다. "첩신은 저 해옥환 모녀와 단 궁주 사이에 무슨 특수한 관계라도 있을까 봐 마음으로 꺼려지는 것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만약 낭자의 추측이 맞다면, 경천궁의 앞날은 참으로 가련하군."
심류향이 두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경천궁은 줄곧 무림의 지도자를 자처해 왔고, 이 추모 역시 경천궁의 부궁주라는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궁주가 무림인들이 침을 뱉는 음란한 모녀와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앞날이 어찌 가련하지 않겠는가."
심류향이 안색을 어둡게 하며 말했다. "부궁주, 당신의 언사는 이미 명백히 단 궁주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가 먼저 단 궁주께 불경한 생각을 품었기에, 이 추모는 그저 남의 말을 주워섬겼을 뿐이다!"
이 말에 심류향은 분해서 안색이 창백해졌으나, 차마 화를 내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심류향은 긴 숨을 내쉬며 말했다. "첩신이 참으로 그런 생각을 품지 말아야 했습니다. 단 궁주께서는 당대 최고의 검호이신데, 어찌 저 남부끄럽고 음란한 모녀와 특수한 관계가 있겠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이 추모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심류향이 말했다. "부궁주께서 일깨워 주신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첩신이 큰 잘못을 저지를 뻔했습니다..."
말을 잠시 멈추고 말을 이었다. "첩신이 즉시 가서 해옥환을 처단할 테니, 부궁주의 귀한 걸음을 더는 오래 붙잡아 두지 않겠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정사가 급하니 그리해야지. 다만 낭자는 먼저 그녀의 오른팔을 검사하여 본궁의 주사 표식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고한 사람을 잘못 죽이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심류향이 말했다. "첩신이 자당 유의하겠습니다."
추오상이 일어서며 말했다. "이만 작별하겠소."
포권을 해 보이고는 대청을 걸어 나갔다.
저편에서 강추로는 추오상이 떠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이미 옆방에서 급히 달려 나와 있었다.
심류향은 그를 대문 앞까지 배웅하고서야 돌아갔다.
대문을 나서자, 추오상은 강추로의 하얀 손목을 잡고 후다닥 외진 곳으로 달려갔다.
강추로가 말했다. "무슨 일로 이리 긴장하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차를 마셨는가?"
강추로가 말했다. "마셨습니다. 당신이 방금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내력으로 찻물을 뱃속 한구석에 밀어 넣고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추오상이 하얀 비단 손수건을 꺼내 강추로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빨리 찻물을 이 손수건에 뱉어내라."
강추로가 몸을 돌려 찻물을 뱉어냈다.
추오상이 젖어 축축해진 손수건을 받아 들고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차에 독은 없다."
강추로가 말했다. "원래 용희(龍姬)가 내 차에 독을 넣었을까 봐 걱정하신 것입니까? 그녀가 설령 내가 죽기를 바란다 해도 이런 어리석은 방법은 쓰지 않을 것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심류향은 과연 총명이 과인하군..."
냉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난제를 하나 던져주었으니, 한참 동안 골머리를 앓아도 모자랄 것이다."
강추로가 말했다. "무슨 난제를 던지셨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네 씨다른 언니 역시 금릉에 와 있다는 것을 아는가?"
강추로가 말했다. "풍문으로 조금 들었으나, 만나본 적은 없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내가 심류향에게 당장 가서 해옥환을 죽이라고 했다."
강추로가 휙 두 눈썹을 치켜세우며 경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추오상이 말했다. "안심해라! 네 씨다른 언니는 정녕 죽지 않을 것이다."
강추로가 말했다. "듣기로는 그녀가 결코 심류향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텐데요."
추오상이 말했다. "심류향이 그녀를 죽이지 못할 테니까."
강추로가 말했다. "그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네 어머니와 언니가 경천궁 단 궁주와 특수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강추로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알기로 단비우는 검중의 호걸이자 인중의 용입니다. 설령 천성이 풍류를 좋아한다 한들 그 지경에 이르지는..."
추오상이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너는 더 말하지 마라. 나는 이미 철증을 쥐고 있다."
강추로가 중얼거렸다. "이것은 참으로 기괴한 일이군요."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먼저 강포로 돌아가라. 나는 금릉 성안에서 처리할 일이 더 있다."
강추로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즉시 떠나지는 않고, 눈길을 조금도 떼지 않은 채 추오상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추오상은 그녀의 기색이 기이함을 눈치채고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더 할 말이 있는가?"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을 찾아온 것이 잘못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무슨 뜻인가?"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의 은원과 얽힌 갈등이 너무 많고, 연루된 관계 또한 몹시 복잡합니다. 이래서는 나의 대계를 망쳐놓을 가능성이 큽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후회하는가?"
강추로가 말했다. "과연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안타깝게도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강추로가 말했다. " 늦었지요. 그러니 그저 원래 정한 계획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요..."
말을 잠시 멈추고 말을 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무슨 특별한 느낌이 없었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어느 방면을 말하는가?"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의 내력, 그리고 검술 말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내력은 자연히 예전보다 훨씬 강勁해졌으나, 검법에 있어서는 도리어 어딘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강추로가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크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탄식이 나온다."
강추로가 아연해하며 말했다. "그것참 기이하군요. 내력이 크게 치솟았는데 어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단 말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어쩌면 내가 방금 부적절하게 형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뜻이 아니다."
강추로가 말했다. "추오상! 당신은 그야말로 나를 헷갈리게 만드는군요!"
추오상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내가 간략하게 비유를 들어보겠다. 길 맞은편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치자. 내가 검을 뽑아 휘두르며 겨우 일 분(一分, 10%)의 힘만 쓰고, 그저 검끝으로 버드나무 껍질만 긁으려 했다. 그러나 검을 휘두른 뒤에는 나도 모르게 힘이 일 분에서 삼 분으로 더해져, 예리한 검이 지나간 자리에 그 버드나무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강추로가 말했다. "손에 실리는 힘이 늘 마음속으로 정한 범위를 넘어선다는 말씀이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 어떤 때는 기세를 모으기 시작하자마자 손에 쥔 검이 떨리는 경향이 있으니, 마치 검이 주인보다 더 조급해하는 듯하여 내가 제어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강추로가 말했다. "사람들 말로는 검은 경령(輕靈, 가볍고 기민함)함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더군요."
추오상이 말했다. "그런 말이 있고 또 지극히 정확한 도리다. 뜻밖에도 네가 그것을 아는구나."
강추로가 말했다.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이 경령이라는 두 글자가 무슨 뜻인지 묻고자 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이것은 도리어 내가 대답하기 어렵구나. 경령이라는 두 글자의 해석은 아마 매우 많을 것이다."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의 해석을 듣고 싶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경(輕)이란 신법이 경쾌하고 보법이 지체되지 않으며, 초식은 기묘하고 변화가 많아야 함을 뜻한다..."
강추로가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이것은 모두 검을 익히는 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정확한 법도이니, 이 한 글자는 아주 잘 해석하셨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 령(靈) 자는 아마도 검을 익히는 자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영기(靈氣)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강추로가 기쁜 기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말을 잠시 멈추고 말을 이었다. "부질없이 초군(超群)한 검법 세트만 가지고 있을 뿐 영기가 없다면, 그 사람은 그저 검사(劍士)라 불릴 만할 뿐입니다. 걸출한 검법과 심오한 내력, 거기에 지닌 영기까지 더해져야만 비로소 어검대강(御劍大家)이라 불릴 자격이 생기지요. 하지만 검을 익히는 사람은 많아도 영기를 지닌 자는 봉모린각(鳳毛麟角)처럼 드무니, 참으로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추오상은 강추로가 이렇듯 커다란 도리를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한층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이어 마음속으로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가 대뜸 말했다. "설마 그 종잡을 수 없으면서도 내가 검을 제어하기 어렵게 만드는 괴이한 일이, 바로 그 영기의 영향이란 말인가?"
강추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사기(邪氣)가 부린 짓입니다."
추오상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기?"
강추로가 말했다. "검을 익히는 자가 영기를 얻는다면 반드시 검중의 호걸이 될 것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사기를 얻는다면 반드시 검중의 마두(魔頭)가 되겠군."
강추로가 말했다. "이른바 영기라는 것은 비록 태산이 눈앞에서 무너지고 만 군사가 곁에 늘어서더라도, 오직 검 한 자루만 손에 쥐고 있다면 털끝만큼도 동요하지 않는 법입니다. 일단 검을 움직여 초식을 내뻗으면 반드시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눈 깜짝할 사이에 적의 목을 취하지요. 검이 만인적(萬人敵)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추오상의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이 순간만큼은 뜻밖에 강추로를 좋은 스승이자 유익한 벗으로 여기며 얼른 물었다. "만약 사기를 얻는다면 어찌 되는가?"
강추로가 말했다. "가슴속에 늘 살기가 도사리고 있어 사람 목숨을 풀 자르듯 보며, 사람의 목을 베는 것이 여전히 주머니 속 물건을 꺼내듯 쉽고, 검이 나갈 때 선악과 충간을 가리지 않습니다. 영기를 얻은 자와는 크게 판이하지만, 여전히 만인적이 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강추로! 너는 이미 내가 얻은 것이 한 덩이의 사기라고 단정하는 것인가?"
강추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추오상이 수려한 눈썹을 연신 치켜세우며 말했다. "어찌 그리된 것인가?"
강추로가 말했다. "죽림소사에서 당신과 처음으로 쌍수를 행했을 때, 나는 당신의 혈액 내에 진즉에 사마(邪魔)의 성질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당신 자신은 아마 전혀 느끼지 못했겠지요."
추오상이 말했다. "살과 피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설마 내 부모가 저 사마의 인물이란 말인가?"
강추로가 말했다. "그것은... 제가 감히 단정할 수 없군요. 당신이 사용하는 '사절검(四?劍)' 자체가 본래 사악한 물건인 데다가, 내가 사악한 법문으로 당신에게 내력을 주입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신의 신체 내에 한 줄기 사기가 응결된 것이지요. 당신의 검 역시 만인적이 된 것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이리 말하니 나는 기어이 검중의 마두가 되어야 하겠군?"
강추로가 말했다. "검중의 마두든 검중의 호걸이든, 당신은 결국 무림의 지존이 될 것입니다."
추오상은 검협 같은 눈썹을 깊이 찌푸린 채 침묵에 잠겼다. 그의 안색을 보니 끝없는 고뇌가 있는 듯했다.
강추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회하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설령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네 말이 맞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하지만 방금 네가 나눈 대화를 듣고 나니, 나는 이미 전처럼 네가 밉지 않구나."
강추로가 말했다.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무엇을 상관하는가?"
강추로가 말했다. "당신은 방금 심류향의 앞에서 분명 단비우를 모욕하는 말을 꺼냈을 것입니다."
추오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강추로가 말했다. "그러므로 당신은 즉시 태도를 표명해야 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나더러 공공연히 경천궁을 배반하라는 말인가?"
강추로가 말했다. "만약 당신이 정당한 방법으로 부궁주의 직무를 힘써 사양한다면, 그것은 배반이라 할 수 없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무림의 사람은 친구가 아니면 적이다."
강추로가 말했다. "저는 당신 또한 단비우의 손에 든 저 창랑보검(滄浪寶劍)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최근 나는 고향으로 한 번 돌아갈 생각이다. 만약 용희 심류향이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기회를 보아 태도를 표명하겠다."
강추로가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상관하는 일입니다. 현재 저는 공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게다가 제 목숨은 당신과 숨결이 이어져 있으니, 아무래도 잠시 금릉을 떠나는 편이 상책입니다."
추오상이 손을 한번 휘저으며 말했다. "너는 먼저 강을 건너가라! 내가 돌아온 뒤에 너와 다시 길게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걸어갔다.
추오상은 느긋하게 걸어 어느새 고루에 이르렀다. 보니 사람들의 행차가 날실과 씨실처럼 얽혀 있어 무척이나 번화했다.
문득 추오상의 눈길이 반짝였다. 뜻밖에 맞은편에서 그에게 익숙한 사람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푸른 베 두루마기를 입고, 바닥이 얇은 쾌화를 신었으며,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쓰고 고개를 숙인 채 급히 길을 걷고 있었다.
밀짚모자를 아주 낮게 눌러써서 도무지 그의 용모와 생김새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추오상은 상대방이 손에 쥐고 있는 저 장검을 보고 그의 신분을 알아보았다.
검집은 금칠을 한 반룡(盤龍) 문양에 경천궁의 궁휘 표식까지 박혀 있으니, 저 자는 바로 용희 심류향이 아니던가? 다만 눈앞의 그녀는 이미 남장(易?而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추오상은 고의로 길을 가로막고 가볍게 기침을 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들자, 차가운 눈빛과 곧게 뻗은 콧날, 붉은 입술에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 모습이 비록 여인 같기는 했으나, 추오상이 방금 확신했던 용희 심류향은 아니었다.
추오상은 자신도 모르게 어안이 벙벙해져 얼른 포권을 해 보이며 미안한 빛으로 웃었다. "죄송하오!"
그 사람은 모호하게 한마디 대꾸하고는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추오상은 문득 가슴이 크게 요동쳐 서둘러 몸을 돌렸고, 그 사람의 뒤를 밟아 멀찍이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길을 가면서도 이따금 몸을 숨겼으니, 마치 그 사람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고루를 지난 뒤 곧장 성 서쪽을 향해 달렸다.
추오상은 속으로 은밀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알기로 금릉 성 서쪽 한서문 안에는 청량산이 있고, 산 중턱에는 청량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 안에는 기거하며 글을 읽는 선비들이 적지 않았으니, 혹 저 사람도 절에 묵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추오상의 마음속 생각이 풍차처럼 수천수만 번을 도는 사이,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꽤 많은 길을 걸었다.
번화한 저잣거리가 멀어지며 점차 청량산에 가까워졌다.
그 푸른 옷을 입은 자는 과연 청량산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아, 추오상의 미행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푸른 옷을 입은 자는 산 중턱에 올라 청량사를 지나치고도 들어가지 않은 채, 계속해서 산꼭대기를 향해 걸어갔다.
추오상은 크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산꼭대기에 또 비밀스러운 거처가 있단 말인가.
산에는 예덕나무가 많아 추오상의 행적을 은폐하기에 딱 좋았다.
차 한 잔을 마실 만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눈앞에 정자각 하나가 나타났다.
옛 청량대 터에 후대 사람이 정자를 하나 지었으니, 이름하여 취미정(翠微亭)이라 했다.
저 푸른 옷을 입은 자는 취미정 안으로 들어가더니 머리에 쓴 밀짚모자를 벗고, 한 줄기 띠처럼 흐르는 큰 강을 마주한 채 정일품(凝神)하여 바라보았다. 그 신형은 바람 한 점 없는 듯 미동조차 없었다.
추오상이 이곳까지 따라와 드디어 몸을 드러내며 취미정 밖에 멈추어 섰으니, 푸른 옷을 입은 자와는 대략 열 걸음 정도의 거리였다.
푸른 옷을 입은 자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을 법한데도 고개를 돌려 살피지 않았다.
추오상은 잠시 묵묵히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겨 정자 안으로 들어서며 가볍게 기침을 했다.
푸른 옷을 입은 자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나, 차가운 어조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추 부궁주께서 이곳까지 따라오셨으니, 무슨 가르침이 있으십니까?"
상대방은 입을 열자마자 자신의 명호를 불렀고, 게다가 목소리가 가늘고 뾰족하여 몹시 여인 같았다. 추오상은 사람을 결코 잘못 보지 않았음을 한층 더 확신하며 마침내 마음이 놓였다.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나직하게 말했다. "소 낭자! 우리 참으로 오랜만이오."
푸른 옷을 입은 자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 듯 서서히 몸을 돌렸다. 과연 추오상이 마음속 깊이 흠모하고 그리워하던 소월매였다.
소월매(蕭月梅)의 눈빛은 이때에 이르러 방금 고루 앞에서 추오상과 마주쳤을 때처럼 차갑지 않았다. 가볍게 추오상의 얼굴을 한 차례 훑어보며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참으로 고명한 안목을 지니셨군요."
추오상은 눈길을 돌려 소월매가 손에 쥐고 있는 장검을 슬쩍 흘겨보며 말했다. "소 낭자께서는 지법과 장법 두 가지 절예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쓰지 않고, 도리어 장검을 바꾸어 쓰기 시작하셨구려."
그의 말에 담긴 속뜻은 이미 명백히 드러나 있었다.
얼음과 눈처럼 총명한 소월매가 어찌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미소를 살짝 지으며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뻔히 알면서 묻고 계십니다."
추오상이 두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소월매가 장검을 가로로 치켜들고 절반쯤 뽑아내더니, 슉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검집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방금 추 부궁주께서 고루 앞에서 돌연 몸을 가로막아 길을 막은 것도 바로 이 검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는 참으로 귀신같이 알아맞히시는구려. 감탄했소! 감탄했소!"
소월매가 말했다. "이 장검은 귀궁의 용희 심류향이 사용하는 병기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지금은 도리어 낭자의 손에 들어와 있구려."
소월매가 말했다. "맞습니다, 이미 월매의 손에 들어왔지요. 하지만 월매는 이것을 사사로이 차지할 마음이 없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움직여 장검을 휙 던졌다.
추오상이 손을 뻗어 받아 내며 말했다. "소 낭자! 설마 심류향이 이미 낭자의 손에 죽은 것이오?"
소월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녀는 여전히 펄펄하게 살아 있으니, 추 부궁주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사람이 죽지 않았는데 병기가 낭자의 손에 들어왔으니, 어찌 기괴한 일이 아니겠소?"
소월매가 말했다. "훔치는 방법을 쓴다면 이 장검을 손에 넣지 못하겠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의 그 말은 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구려! 병기는 목숨을 지키는 물건인데, 어찌 낭자가 쉽게 얻을 수 있었단 말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 심류향에게 물어보신다면 월매가 허언을 장담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께서 허풍을 떨지 않았으리라 믿소. 다만 이 사람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으니, 낭자가 검을 훔친 목적이 어디에 있소?"
소월매가 말했다. "이 검은 추 부궁주를 위해 훔친 것입니다."
추오상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어안이 벙벙해졌다.
소월매가 다시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장검을 뽑아 한번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추오상이 손목을 떨치자 슉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이 뽑혀 나왔다.
햇빛에 비친 검신에는 오직 한 줄기 새파란(湛藍) 빛이 감돌았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실마리를 알아차리셨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일품의 명검이구려."
소월매가 말했다. "다시 잘 보십시오."
추오상이 뚫어지게 보다가 말했다. "낭자께서 어찌 명쾌하게 알려주지 않으시오?"
소월매가 말했다. "그 새파란 빛은 청상(?霜)이라 불리는 약물에서 발하는 것인데, 비소보다 백 배는 더 독하여 피를 보면 숨이 끊어지고 신선이라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추오상은 안색이 크게 변해 멍해지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 검신에 극독이 담겨 있단 말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 어찌 한번 시험해 보지 않으십니까?"
추오상이 손목을 내려 검을 누르고 신형을 번개처럼 회전시키니, 후욱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 사방으로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새파란 광망이 한 바퀴 번쩍였다.
소월매가 웃으며 찬탄했다. "좋은 검법입니다! 진정 회오리바람처럼 빨라 눈을 붙여둘 겨를이 없군요."
그러나 추오상은 그녀의 찬사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땅바닥에 시선을 모았다.
장검이 지나간 자리마다 풀과 나무가 예외 없이 뿌리째 잘려 나가 있었다.
원래는 푸르고 싱그러웠던 풀밭이, 단지 눈 깜짝할 사이에 장검이 스쳐 지나간 그 일대의 초목이 모조리 시들어 죽어버렸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 월매가 일부러 놀라게 하려고 지어낸 말이 아니지요?"
추오상이 중얼거렸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독검이구려!"
슉!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을 검집으로 돌려보냈다.
소월매가 말했다. "월매가 알기로 경천궁은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정대(正大)한 문파이며 궁규가 극히 엄격하여, 문인이 병기에 어떠한 독물이라도 묻히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법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소."
소월매가 말했다. "게다가 저 용희 심류향은 검에 독을 묻히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의 말 속에 분명 행간의 뜻이 있으니, 어찌 더 명백히 말해 주지 않으시오?"
소월매가 말했다. "말을 꺼내도 추 부궁주께서 믿지 않으실까 두렵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이 사람은 명문가 출신의 규수께서 결코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지 않으리라 굳게 믿소!"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 과찬하셨습니다..."
말을 잠시 멈추고 말을 이었다. "이 검에 독을 묻히는 일은 '은여우'가 심류향을 대신해 해준 것입니다."
추오상이 두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언제 일어난 일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대략 반 시진(한 시간) 전의 일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가 방금 나를 위해 검을 훔쳤다고 하셨는데, 그 말은 무슨 뜻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심류향이 장검에 독을 묻힌 이유가 바로 당신을 상대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추오상은 속으로 은밀히 놀랐으나, 얼굴에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말했다. "소 낭자, 이 사람이 방금 낭자의 말을 절대적으로 의심치 않는다고 했소. 하지만 도리어 의구심이 생기는 것 또한 어쩔 수 없구려. 심류향은 단 궁주 곁에 있는 팔대검희의 우두머리인데, 뜻밖에 외인과 연계하여 경천궁의 부궁주를 모해하려 하다니, 이것은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지 않소."
소월매가 말했다. "검이라는 증거가 있어도 믿지 않으시니, 검도 없이 빈말만 했다면 당신은 더욱 믿지 않았겠군요."
추오상이 말했다. "이 사람은 낭자가 검을 훔친 그 절조(絶招)에 대해 묻고 싶소."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 방금 말씀하셨듯, 월매는 지법과 장법 두 가지 절예를 갖추고 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소! 매화장(梅花掌)과 일지한(一指寒)이지요."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일지한의 공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마침 낭자에게 가르침을 청하려던 참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이리 겸손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을 잠시 멈추고 말을 이었다. "이른바 일지한이라는 것은 어느 한 손가락만 오로지 익히는 것이 아니라, 양손의 열 손가락을 모두 익히는 것입니다. 적을 맞이할 때 어떤 초식을 쓰느냐에 따라 그에 맞는 손가락을 내뻗는데, 그중에서도 강지(硬指)와 유지(柔指)로 나뉩니다. 강지를 내뻗으면 돌벽이 뚫리고, 유지를 쓰면 주머니 속 물건을 꺼내듯 가져올 수 있지요..."
추오상이 아 하고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낭자께서 익히신 유지가 대개 강호 상에서 말하는 공공묘수(空空妙手, 소매치기 기술) 같은 것이구려?"
소월매가 말했다. "공공묘수는 오로지 타인의 돈주머니를 훔치는 기술이지만, 월매가 익힌 유지는 상대방의 몸에 지닌 병기나 독을 바른 암기를 훔치는 데 쓰입니다. 그 쓰임이 다르지요!"
추오상이 말했다. "참으로 고수라 할 만하구려! 감탄했소, 감탄했소..."
말을 잠시 멈추고 말을 이었다. "낭자께서 비록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물건을 가져오는 지공을 익혔다 해도, 기회를 보아 손을 썼어야 했을 터요. 그렇다면 낭자는 심류향과 '은여우'의 대화를 들으신 것이오?"
소월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월매가 어둠 속에서 그녀들이 대화하는 것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실 만한 시간 동안 들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심류향이 무슨 까닭으로 독검을 준비해 이 사람을 상대하려 했는지도 들으셨소?"
소월매가 말했다. "이미 십중팔구는 알고 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말해 줄 수 있겠소?"
소월매가 말했다. "월매가 바로 이 일로 추 부궁주를 이곳으로 유인했으니, 자당 하나하나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추오상이 취미정 안의 돌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손짓을 했다. "낭자도 앉아서 이야기하십시다."
소월매 역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추오상은 그녀가 묵묵히 말이 없는 것을 보고 가볍게 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 사람, 귀를 기울여 경청하겠소."
소월매가 말했다. "세상에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는 법이니, 추 부궁주께서도 이 도리를 아실 줄 믿습니다."
추오상은 신형이 미미하게 굳어지며 말했다. "설마 낭자에게 무슨 조건이라도 있단 말씀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맞습니다. 월매가 추 부궁주께 물건 하나를 청하고자 합니다."
추오상이 미소를 살짝 지으며 말했다. "대개 또 단비우의 저 창랑보검을 달라는 것이겠구려."
소월매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 창랑보검은 월매의 눈에는 그저 한 토막의 고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또 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소월매는 안색을 숙연히 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돌아가신 부친께서 남겨주신 한 토막의 용연오묵(龍涎烏墨)을 청하고자 합니다."
추오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얼굴에는 아무런 내색 없이 말했다. "그 부러진 먹 한 토막은 결코 귀중한 물건이 아니오. 기껏해야 선인께서 남겨주신 수많은 유품 중 하나일 뿐이라 후손들이 우러러보고 기리는 데나 쓰일 것이오. 이토록 보잘것없는 물건을 낭자께서 어찌 이리 신중하게 구하려 하시오?"
소월매가 말했다. "그 부러진 먹은 월매에게 참으로 무척 중요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이 사람은 도리어 그 부러진 먹이 낭자에게 도대체 어찌 중요한지 듣고 싶구려."
소월매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 깊은 사색에 잠기더니 말했다. "저 강호의 관상쟁이 황대선이 월매에게 불치병이 있어 이 때문에 무공을 상실할 것이라 말했던 것을, 추 부궁주께서도 분명 들으셨을 줄 압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들었소. 하지만 그 황대선은 사후에 자신이 잘못 보았음을 자인하지 않았소."
소월매가 말했다. "그가 처음에 말한 것이 도리어 실정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가 정녕 무공을 완전히 잃었단 말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오직 매일 자시(子時)와 오시(午時) 두 시진 동안만 정상적이고, 나머지 열 시진은 보통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황대선이 먼저 말한 것도 틀렸다고 할 수 없고, 나중에 말한 것 역시 자연히 맞습니다."
추오상이 하늘의 빛을 살피며 말했다. "지금 보니 이미 미시(未時)에 접어들었으니, 낭자는 이미 보통 사람과 같아진 것이 아니오?"
소월매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검을 훔칠 당시에는 제 무공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이것이 설마 저 부러진 먹 한 토막과도 관계가 있단 말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월매가 걸린 불치병은 그저 무공을 잃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만이겠으나, 월매의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습니다. 치료하지 않는다면 내년 봄이 오기 전에 살아남지 못합니다."
추오상의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그녀의 조우가 뜻밖에 주성한의 부친과 같았으니, 진정 기이한 일이 겹친 셈이었다.
마음속 생각이 풍차처럼 수천수만 번을 도는 사이,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낭자는 설마 그 부러진 먹을 병을 치료할 약인(藥引, 약의 효능을 돕는 보조 약재)으로 쓰려는 것이오?"
소월매의 눈빛이 반짝였다. "추 부궁주는 참으로 절?으로 총명한 분이시군요."
추오상이 말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칠층 탑을 쌓는 것보다 나은 법이오. 설령 낭자가 알아낸 비밀을 말해주지 않는다 해도, 이 사람은 낭자의 병세를 들은 이상 그 부러진 먹 한 토막을 신속히 받들어 올렸을 것이오. 하지만..."
그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추었다. 마치 다음에 이어질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소월매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 한참 동안 뒷말이 없자, 자신도 모르게 두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 만약 곤란한 처지가 있으시다면 명백히 말씀해 주십시오. 모든 일은 억지로 강요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는 주성한이라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당대 의성 주소풍의 아들이군요."
추오상이 위연히 탄식하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을 살려낸 당대의 의성께서도 불치병에 걸리셨소."
소월매가 깜짝 놀라 탄성을 지르며 안색을 미미하게 바꾸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 의성께서도 병을 치료할 약인으로 용연오묵이 필요하다고 하셨소. 게다가 이 사람은 이미 주성한에게 조만간 옛 거처로 돌아가 오로지 그 부러진 먹을 가져다주겠노라 약조했소.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약조를 가벼이 어길 수는 없는 법이니, 이 때문에 이 사람이 몹시 난처해하는 중이오."
소월매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후 하고 탄식을 내쉬며 말했다. "월매가 한발 늦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군요..."
그러더니 문득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월매가 비록 그 부러진 먹을 주시겠다는 허락은 받지 못했으나 마음은 무척 위안이 됩니다. 추 부궁주께서 신의를 지키기 위해 월매를 실망하게 하신 까닭이니까요."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를 위해서라면 이 사람은 차라리 신의를 잃은 자가 되고 싶구려."
소월매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절대 그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 부러진 먹을 주성한에게 주면 그의 효심을 이룰 뿐만 아니라 주 어르신의 목숨까지 구하게 되지요. 월매 한 사람 때문에 다른 두 사람을 실망하게 만든다면, 월매의 마음이 어찌 편하겠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는 비록 여인의 몸이나 대장부의 기개가 있으니, 이 사람을 감복하게 만드는구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 이제 당신과 관련된 정사를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이 사람이 조건을 들어주지 못했는데, 어찌 낭자가 알아낸 비밀을 말해달라 하겠소."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 도리어 이리 진지하게 구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을 잠시 멈추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처음에 입궁했을 때, 창랑검객 단비우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보았소. 당시에는 늘어진 발(垂?) 하나가 가로막고 있어, 단지 그 사람임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을 뿐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월매가 그녀들의 대화 속에서 추측건대, 단비우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설령 살아있다 해도 틀림없이 자유를 상실했을 것이며, 현재 경천궁은 은여우의 손에 장악되어 있는 듯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정녕 그런 일이 있단 말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용희 심류향 역시 은여우와 한패거리란 말씀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어찌 한패거리일 뿐이겠습니까? 그녀는 은여우를 몹시 경외하는 듯 보였습니다."
추오상이 중얼거렸다. "이리 말하니 그녀들이 이 사람을 허수아비로 만들려 하는구려."
소월매가 말했다. "그녀들은 강추로라는 이름의 여인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월매가 알기로 그녀는 사악하고 방탕한 여인인데, 추 부궁주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그녀는 현재 가명을 쓰고 내 곁에서 검희 노릇을 하고 있소."
소월매가 몹시 경이롭고 의아해하며 아 하고 탄성을 지르더니 말했다. "심류향이 말하기를, 강추로가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그녀들의 계획에 커다란 방해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당신의 몸에 한 줄기 사마의 공력이 깃들어 있어 오직 청상의 극독을 써야만 없앨 수 있다고 하더군요. 당신에게 무공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녀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고, 오직 당신이라는 사람만 존재한다면 쓸모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안의 내막은 참으로 사람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더군요."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가 방금 이 검에 극독이 묻어 있어 피를 보면 숨이 끊어지고 신선도 구하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소?"
소월매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 말은 저 은여우가 한 말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만약 이 검으로 이 사람을 상대하여 뜻을 이룬다면, 이 사람은 제명에 죽지 못할 터요."
소월매가 말했다. "저 은여우의 말로는, 당신이 사마의 공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청상의 독이 당신의 목숨을 해치지는 못하고, 오직 그 사마의 공력만 없앨 수 있다고 했습니다. 추 부궁주께서는 정말로 그러한 사마의 공력을 지니고 계십니까?"
추오상이 모호하게 얼버무리며 말했다. "이 사람이 사용하는 사절검 자체가 본래 사악한 물건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소문에 추 부궁주의 공력이 한 달 사이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게 정진했다던데, 거기에는 필시 내막이 있겠군요."
추오상은 대답을 피한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심류향 역시 이 사람의 검법을 목격한 적이 있소. 그녀가 설령 이 독을 바른 보검을 쥐고 있다 한들, 반드시 이 사람의 머리털 한 올이라도 상하게 하지는 못할 터인데 말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심류향 역시 은여우에게 그 점을 언급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은여우가 무어라 하더오?"
소월매가 말했다. "은여우는 자신에게 묘책이 있다고 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묘책이 어디에 있소?"
소월매가 말했다. "은여우가 심류향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기에 월매는 똑똑히 듣지 못했습니다. 월매는 바로 그 기회를 틈타 심류향이 탁자 위에 놓아둔 장검을 훔쳐낸 것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는 혹 황해어를 보았소?"
소월매가 말했다. "심류향이 저 은여우와 밀담을 나눌 때, 황해어는 행랑채 아래에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추오상이 포권을 해 보이며 말했다. "낭자, 고맙소..."
말을 잠시 멈추고 말을 이었다. "구구 중양이 지금부터 며칠이나 남았소?"
소월매가 미미하게 아연해하며 말했다. "아직 이십여 일 남았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는 혹 서주에 한 번 다녀올 생각이 있으시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 무슨 심부름이라도 시키실 일이 있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구구 중양에 높은 곳에 오르니, 이 사람은 낭자와 그날 진초(辰初, 오전 7시경) 무렵 서주 경내에 있는 운룡산 방학정(放鶴亭)에서 만나고 싶소. 낭자께서 혹 왕림해 주실 수 있겠소?"
소월매가 탄식했다. "인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이미 내년 중양까지 살지 못할 터인데, 추 부궁주께서 이렇듯 고아한 흥취를 내시니 월매 역시 자당 기꺼이 동행하겠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 고맙소. 그날 이 사람이 반드시 먼저 방학정 앞에 도착하여 낭자의 귀한 걸음을 고대하고 있겠소."
포권을 해 보이고는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소월매가 문득 다시 소리쳐 불렀다. "추 부궁주, 잠시 걸음을 멈추십시오."
추오상이 몸을 돌려 물었다. "낭자, 또 무슨 당부하실 말씀이 있소?"
소월매가 말했다. "그 장검은 추 부궁주께서 어찌 처분할 생각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의 생각은 어떠하오?"
소월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국외자가 참견할 일이 아닙니다."
추오상이 갑자기 손을 들어 휙 던지니, 극독이 묻은 그 장검은 이내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어찌 이 물건을 던져버리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는 이 사람이 독검을 손에 쥐고 가서 저 심류향을 찾아가 죄를 물을 것이라 생각했소?"
소월매가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는 또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모르는 척하며 자연의 순리에 맡길 뿐이오."
소월매가 말했다. "여인의 마음이 가장 독한 법이니, 추 부궁주께서는 그래도 부디 조심하셔야 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의 관해에 고맙소. 이 사람 마땅히 늘 경각심을 가지겠소. 낭자는 그저 구구 중양의 약조를 잊지만 말아 주시오."
소월매가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월매는 제시간에 약조를 지키러 가겠습니다."
추오상이 포권을 해 보이며 말했다. "이만 작별하겠소, 낭자 보중하시오."
소월매가 말했다. "월매는 이만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이 말을 꺼냈을 때, 추오상은 이미 몸을 돌려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추오상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겁게 탄식을 내쉬었으니, 그 표정에는 아쉬움과 슬픔이 가득했다.
추오상은 다시 한번 와룡거(臥龍居)를 찾았다. 그사이 겨우 한 시진이 지났을 뿐이었으나, 그의 심경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시녀는 추오상이 심류향을 만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급히 대청 안으로 맞아들이며 자리를 권하고 차를 올렸다.
추오상은 무심코 좌우를 슥 훑어보고는 나직하게 물었다. "심 낭자는 안에 없는가?"
그 시녀가 공손히 대답했다. "낭자께서 방금 돌아오셔서 방 안에서 의복을 갈아입고 계십니다. 낭자께서는 추 부궁주께서 오실 줄 미리 아시고 소비에게 문앞에서 영접하라 하셨습니다. 지금은 소비가 이미 사람을 보내 낭자께 통보하도록 했습니다."
추오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시녀가 말했다. "소비의 이름은 봉음(鳳吟)이라 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봉음이라? 과연 생김새가 청수하고 말솜씨가 좋구나, 이리 오너라! 상을 주겠다."
그의 말과 행동은 마치 딴사람이 된 듯했다.
소매 주머니 속에서 오 냥짜리 작은 은괴 하나를 꺼내 저 봉음의 손바닥 안에 쏙 쥐여주었다.
손가락 끝으로 은밀히 그녀의 손바닥 가운데를 가볍게 꼬집기까지 했다.
봉음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의아해했으나, 단지 한순간일 뿐 이내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으며 절을 올렸다. "소비, 상을 받사오며 추 부궁주께 감사드립니다."
추오상이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한번 흔들고는 물었다. "너는 올해 몇 살이냐?"
봉음(鳳吟)이 말했다. "소비는 열일곱이 되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저 향음(香吟)이라는 시녀와 동시에 심 낭자를 모시러 왔느냐?"
봉음이 말했다. "향음은 단 궁주께서 하사하신 자이고, 소비는 심 낭자를 따라 입궁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처음 심 낭자를 따르기 시작했을 때는 필시 나이가 아직 어렸을 터인데, 몇 년이나 되었느냐?"
봉음이 말했다. "헤아려 보니 이미 팔 년이 되었습니다. 그때 소비는 겨우 아홉 살이었지요. 하지만 심 낭자께서도 그때는 아직 성년이 아니셨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심 낭자에게 검을 배운 적이 있느냐?"
봉음이 말했다. "대략 일어(一二)는 아오나, 단지 소비의 자질이 너무 떨어져 정진하기 어렵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네 수중 공력(물에서 쓰는 무공) 또한 필시 나쁘지 않겠구나!"
그 봉음이라는 계집아이가 돌연 흠칫 놀라더니, 두 줄기 맑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추오상이 웃으며 말했다. "할 줄 모르는가?"
봉음이 그제야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비가 어찌 수중 공력을 알겠습니까! 그날 낭자를 따라 강을 건너 금릉으로 올 때, 넘실거리는 강물을 보고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습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마땅히 가서 배워두어야겠구나. 강호(江湖)라는 곳은 전부 마른 땅만 있는 것이 아니니, 수중 공력 또한 요긴한 법이다."
봉음이 말했다. "그것을 어디 가서 배웁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보아하니 네가 아주 영리하고 귀여우니, 이 부궁주가 틈을 내어 가르쳐주마."
봉음이 말했다. "부궁주께 감사드립니다."
말을 마치고 다시 한번 절을 올리는데, 그녀의 모습과 나아가고 물러설 때의 태도를 보니 도무지 아랫사람 같지 않았다.
말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푸른 머리를 땋은 시녀 하나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봉음이 얼른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낭자께서 의복을 다 갈아입으셨느냐?"
푸른 머리의 시녀가 말했다. "낭자께서 추 부궁주를 안마당으로 모셔와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기밀 대사를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추오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잠시 기다려라!"
봉음은 본래 대청 밖으로 걸어 나가려다 이 말을 듣고 급히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공손히 물었다. "추 부궁주, 무슨 당부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이 부궁주가 아직 처리해야 할 요긴한 일이 하나 있으니, 네가 심부름을 한 번 다녀왔으면 한다."
봉음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며 얼굴에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심 낭자 곁의 시녀인데, 이 부궁주가 부려 먹을 수 없단 말이냐?"
봉음이 말했다. "추 부궁주께서 뜻을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소비는 경험이 전혀 없어 혹 중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이 심부름은 지극히 쉬운 일이니, 그저 네가 고루 동쪽에 있는 '정양주루'로 가서 사람 한 명을 기다리면 된다."
봉음이 말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그렇다."
봉음이 말했다. "누구를 기다립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이 부궁주 곁에 있는 춘희(春姬) 하화련(夏火蓮)이다. 그녀가 오거든 말해라. 이 부궁주가 심 낭자 처소에 있으니, 너를 따라 이곳으로 와서 명을 기다리라고 말이다."
봉음이 말했다. "소비는 저 하 처자를 본 적이 없어, 그때 가서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하 처자는 온몸에 붉은 옷을 입고 있고, 검집에는 본궁의 궁휘가 박혀 있으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봉음이 말했다. "소비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그런데 저 하 처자가 소비의 말을 믿겠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네가 차고 있는 팔찌에도 궁휘가 새겨져 있으니, 그것을 보여주면 그녀가 너를 믿을 것이다. 반드시 그녀를 기다려야 하니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봉음(鳳吟)이 말했다. "소비 명을 따르겠습니다. 다만 추 부궁주께서 심 낭자께 이야기를 한마디 해주셔야 합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너는 어서 가거라!"
봉음이 절을 한 번 올리고는 대청 밖으로 걸어 나갔다.
추오상은 대청 문앞까지 따라 나가 봉음이 와룡거를 나서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몸을 돌렸다.
그는 하화련과 '정양주루'에서 만나자고 약조한 적이 없었다. 단지 방금 봉음에게 수중 공력을 언급했기에, 그녀가 이 말을 심류향의 귀에 전하지 못하도록 떼어놓았을 뿐이었다.
추오상이 몸을 돌려 저 푸른 머리의 시녀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앞장서서 길을 인도해라."
< 한매오상(寒梅傲霜) 全卷 大尾 >
....본서 완결. 속집 《비천팔조(飛天八爪)》를 기대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