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一 回. 진회풍운(秦淮風雲)....진회에 풍운이 일다.

작성자겨울나그네|작성시간26.06.07|조회수214 목록 댓글 25


                                 중국무협장편소설(中國武俠長篇小說)

                         원 제 : 한매오상(寒梅傲霜) + 續 비천팔조(飛天八爪)    작 가 : 와룡생(臥龍生)

                                 한매오상(寒梅傲霜) 또는 자룡기(紫龍旗) 또는 양자강(楊子江)의 혈투(血鬪)



                                      차 례  제 1 권

                               第 一 回. 진회풍운(秦淮風雲)....진회에 풍운이 일다.
                               第 二 回. 호상이용(互相利用)....서로 이용하다
                               第 三 回. 적우난분(敵友難分)....적과 친구를 구분하기 어렵다.
                               第 四 回. 음험독랄(陰險毒辣)....음흉스럽다.
                               第 五 回. 이간아사(爾奸我詐)....서로 속이고 속이다.
                               第 六 回. 의운중중(疑雲重重)....의심이 첩첩이 쌓이다.
                               第 七 回. 각유소도(各有所圖)....각자 원하는 바가 있다.
                               第 八 回. 암반교역(暗盤交易)....암거래.
                               第 九 回. 음성양쇠(陰盛陽衰).... 음양이 전도되다.
                               第 十 回. 험조부측(險遭不測)....하마터면 불행한 일을 당할 뻔하다.




                             < 第 一 回. 진회풍운(秦淮風雲)....진회에 풍운이 일다. >



신시와 유시가 교차할 때가 되면, 강 위에는 화려한 등불이 가득 피어나고 유람선 안에서는 악기 소리와 노래가 시작된다. 부귀영화에 취하는 황홀한 밤이 이 금릉성의 진회하 기슭에 내리기 시작한다.

진회하의 강물은 그리 맑지 않고 양안의 풍경도 수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진회하의 풍류 섞인 미담과 염문은 장강 남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과연 밤이 인간 세상에 내릴 때마다 진회하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당연히 그 긴 밤 동안 쾌락을 쫓는 왕손공자나 거상 같은 부류들은 햇빛 아래 드러난 진회하의 더러운 모습을 전혀 본 적이 없다. 진회하의 유람선은 모두 물 위의 부드러운 고향(온유향)이지만, 여기에도 등급이 나뉘어 이른바 금방(金舫), 은방(銀舫), 채방(彩舫)이라 불린다. 당연히 이 세 가지 유람선에 타는 미인들의 미모와 예능 실력에도 차이가 있다.

고루에서 서쪽으로 향해 낚시골목(조어항)을 지나면 진회하 나루터에 이른다. 길고 짧고 크고 작은 유람선들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선 모습은 마치 십 리에 걸친 물 위의 요새 같다. 그중에는 길이가 대략 이십여 장에 달하는 유람선이 한 척 있는데, 중앙에는 누각이 세워져 있다. 저녁 바람이 매미 날개처럼 얇은 누각의 휘장을 가볍게 흔들자, 여성 악사 무리가 악기를 불고, 두드리고, 켜고, 퉁기며 〈임강선〉이라는 곡을 합주하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유시 정각, 이 기품 있고 호화로운 유람선의 선두에 열두 개의 팔각 풍등이 불을 밝힌다.

풍등 하나하나에는 ‘금취방(金翠舫)’이라는 세 개의 붉은 글자가 적혀 있다. 이 유람선이 어째서 이렇게 큰 기품을 풍기는가 했더니, 알고 보니 ‘금(金)’ 자 등급의 배였다. 필시 금방 중에서도 으뜸가는 배일 것이다.

열두 개의 팔각 풍등이 불을 밝힌 바로 그 순간, 자수 장식이 놓인 자금색 장삼을 입은 서른다섯 안팎의 남자가 오른손으로 장삼 자락을 걷어 올리며 묵직한 걸음걸이로 누각에서 선상으로 걸어 나온다.

누각 아래는 넓은 객실(화청)인데, 사방이 조각된 창살로 되어 있고 매미 날개처럼 얇은 진홍색 휘장이 드리워져 있다. 한가운데에는 붉은 자단나무 원탁이 반듯하게 놓여 있고, 열두 개의 자단나무 비단 의자가 그 둘레를 에워싸고 있다.

자수 장식의 자금색 장삼을 입은 남자는 객실 입구에 멈춰 서서 큰 소리로 외친다. “이봐라!”

그의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키가 작고 뚱뚱한 쉰 살가량의 남자가 객실에서 급히 뛰어나온다. 먼저 두 손을 내리고 공손히 절을 올린 후 목소리를 낮춰 묻는다. “채 나리! 무슨 분부이십니까?”

채 나리라 불린 사람은 머리 위로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흐릿한 하늘을 바라보며 거만한 태도로 말한다. “서이우! 네가 진회하에서 구른 지가 거의 이십 년인데, 오늘 밤 누가 네 배에서 손님을 대접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겠지. 내가 보아하니 네가 꼭 비상을 먹는 수성 노인처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서이우(徐二牛)는 탁! 소리가 나도록 기름칠을 해 반질반질한 선판 위에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채 나리! 채 나리! 소인이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하늘을 바라보던 채 나리의 두 눈이 선판에 엎드린 서이우를 슬쩍 곁눈질하더니, 목구멍 깊은 곳에서 음 하고 신음을 내고는 느릿느릿하게 말한다. “우선 첫째로... 누각에 있는 저 여성 악사 무리가 내가 보기엔 영 시원치 않구나.”

서이우가 얼른 대답한다. “채 나리께 아룁니다! 저 열두 명의 악사는 열여덟 곳의 금방에 있는 백여 명의 악사 중에서 뽑아낸 이들입니다. 미모와 재주 모두 으뜸이라, 금릉은 물론이고 저 북경 성에 가도 저만 한 이들을 뽑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점은 채 나리께서 안심하셔도 됩니다!”

채 나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한다. “서이우! 두 나리의 성미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그 어른께서 나 채금당이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한다고 책망하신다면, 너는 앞으로 진회하에서 발붙일 생각은 접어야 할 것이다. 음... 그럼 연회 음식은 어찌 되었느냐?...”

서이우가 말한다. “‘경화원(慶和園)’에서 보낸 요리사들입니다. 그들은 두 큰나리의 입맛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채금당(蔡錦堂)이 또 묻는다. “기생들은?”

서이우가 아첨하는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거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열 명의 절세가인들은 모두 금방에서 골라 뽑은 이들로, 하나같이 미모와 재주를 겸비한 데다 모두 아직 몸을 팔지 않은 기생(청관)들입니다. 장강 남북으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성질이 괴팍하고 고집스럽기로 소문난 ‘금룡방’의 매낭자까지 제가 데려왔습니다.”

채금당이 두 눈을 부릅뜨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서이우, 네가 정말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그 매낭자의 성질이 괴팍하고 고집스럽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어찌 그 애를 두 나리 시중을 들게 한단 말이냐?”

그러나 서이우는 이번에는 겁을 먹고 떨지 않으며 오히려 헤헤 웃으며 말한다. “설마 장강 남북으로 이름을 떨치시는 ‘금도 두동둔’ 두 큰나리 앞에서도 그 애가 성질을 부리겠습니까?”

채금당이 다그쳐 묻는다. “네게 확신이 있느냐?”

서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사전에 제가 두 큰나리의 성품을 매낭자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큰나리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오늘 밤 수청을 들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해두었습니다. 그 애가 오겠다고 승낙한 것을 보면, 속으로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이 분명합니다.”

채금당이 중얼거린다. “내심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미모로만 치면 진회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이긴 하지...” 어조를 바꾸어 다시 묻는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그가 비록 모호하게 물었으나 서이우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한다. “채 나리, 걱정 마십시오! 화려한 침방 배 두 척을 일찌감치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늘 밤 두 큰나리께서는 귀한 손님 한 분만 청하셨으니, 수청을 들 기생은 두 명뿐입니다. 나머지 여덟 명은 두 패로 나뉘어 침방 배에서 시중을 들 것입니다.”

채금당이 소매를 흔들며 서이우에게 일어나라는 몸짓을 한 뒤,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서이우! 두 나리께서 오늘 밤 청하신 귀한 손님이 바로 그런 방면을 아주 좋아하시는 분이다. 어쩌면 네가 마련한 침방의 선실이 그리 넓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서이우가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채 나리! 소인이 진회하에서 이십여 년 동안 별의별 손님을 다 모셔보았습니다. 대단한 부류라 해도 기껏해야 ‘두 마리 봉황이 둥지에 들거나(쌍봉입소)’, ‘한 마리 용이 세 개의 여의주를 희롱하는(일룡희삼주)’ 정도입니다. 설마 오늘 밤 귀한 손님께서 남은 아홉 명의 기생을 전부 독차지하시기라도 하겠습니까?”

채금당이 말한다. “그건 모를 일이지! 너도 알다시피 두 나리께서는 비록 유흥을 즐기시나 시끄러운 것은 싫어하신다. 그 어른께서 네 배에 오실 때도 기껏해야 서너 명의 기생이면 족했다. 연회를 베풀 때도 고작 두세 명을 더 보탰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보름 전부터 그 어른께서는 내게 미모와 재주가 뛰어난 기생 열 명을 준비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셨다. 이를 보면 그 손님이 그런 취향을 즐길 뿐만 아니라, 욕심도 아주 많은 모양이다!”

서이우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채금당에게 몸을 밀착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채 나리! 두 큰나리께서 이 이우의 유람선에서 연회를 베푸시는 것이 처음은 아닙니다만, 이번처럼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귀한 손님이십니까?”

채금당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다. “서이우! 네가 어찌하여 근본을 캐내려 드느냐?”

서이우가 얼른 웃는 낯으로 죄송함을 표하며 말한다. “채 나리,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소인의 마음에 먼저 짐작이 있어야 그 귀한 손님을 잘 모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두 큰나리께서 이토록 중히 여기시는 손님이신데, 만에 하나 시중이 소홀하다면 두 큰나리를 소홀히 대접한 죄보다 더 클 것입니다!”

채금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네 말이 맞다! 음... 그 귀한 손님은 나이가 고작 이십대 중반이라더구나...”

서이우가 깜짝 놀라며 말을 자른다. “두 큰나리의 연세와 명망으로 보아,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채금당이 손을 내저으며 말한다. “말참견하지 마라...”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간다. “그 귀한 손님의 이름은 추오상라 한다. 생김새는 아주 수려하지만, 그 표정과 분위기가 이름처럼 차가워 사람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가 신시 정각에 처소에 도착했다. 내가 친히 차를 올렸고 그가 두 나리와 인사를 나눌 때 나도 곁에서 시립해 있었는데, 무려 반 시진 동안 그가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서이우가 오 하고 나지막이 외마디 비명을 지를 뿐, 말을 잇지 못한다.

채금당이 다시 말한다. “두 나리께서도 그를 대할 때 예의를 극진히 갖추시니, 너는 각별히 조심해서 모셔야 할 것이다.”

서이우가 대답한다.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채금당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말한다. “시간이 다 되었구나, 나는 마차를 맞으러 가야겠다. 기억해라! 두 나리와 귀한 손님이 배에 오르자마자 유람선을 강 한가운데로 저어 가라. ‘경화원’의 음식 배는 좀 멀리 떨어뜨려 놓아 기름 연기 냄새가 객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해라. 잠시 후에 하인 네 명이 올라올 테니, 요리는 그들에게 올리게 해라. 알겠느냐?”

서이우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소인,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채금당이 장삼 자락을 걷어 올리며 배를 떠나 뭍으로 오르려 한다.

그때 서이우가 갑자기 또 부른다. “채 나리, 잠시 걸음을 멈추어 주십시오!”

채금당이 널다리를 밟으려던 발을 다시 거두고 돌아서서 묻는다. “또 무슨 일이냐?”

서이우가 몇 걸음 바삐 다가가 아첨하는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채 나리! 제가 이미 나리의 옛 정인인 하향 낭자에게 준비를 시켜두었습니다. 두 큰나리와 그 추씨 성을 가진 귀한 손님이 침방 배에 오르시기만 하면, 하향 낭자가 바로...”

채금당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호되게 꾸짖는다. “누가 네 마음대로 하향이에게 말을 전하라 하더냐?”

서이우는 아부하려다 도리어 본전도 못 찾을 줄은 몰랐기에, 얼른 웃는 낯으로 죄송해하며 말한다. “소인이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다! 소인이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다! 그럼 소인이 다른 절색 청관을 골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금당이 차가운 얼굴로 냉정하게 말한다. “네가 아주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나. 오늘 밤 두 나리와 그 추씨 성을 가진 귀한 손님은 열에 아홉은 이 진회하에서 묵어가실 것이다. 내가 두 나리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총관 신분인데, 어찌 이런 때에 유흥을 즐기겠느냐. 다행히 너를 안 지 여러 해가 되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네가 딴마음을 품은 줄 알았을 것이다!”

서이우는 예외 없이 굽실거리며 연신 뒤로 물러섰고, 매서운 추위에 매미가 움츠러들듯 기가 죽어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다.

채금당은 널다리를 건너 천천히 나루터로 걸어 올라간다. 그가 걸음을 멈춘 뒤 매서운 눈빛으로 좌우를 살피자, 즉시 풍채가 당당하고 늠름한 체구의 대장부 한 명이 그에게 다가온다.

채금당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다. “호여괴! 나루터의 배치는 끝났느냐?”

호여괴(胡如槐)라 불린 대장부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모두 채 나리의 뜻대로 배치해 두었습니다.”




채금당이 또 물었다. “눈에 거슬리거나 의심스러운 인물을 발견한 것은 없느냐?”

호여괴가 말했다. “보름 전 소인이 채 나리의 지시를 받은 후부터 이 진회하 기슭에 촘촘히 눈을 깔아두었습니다. 이곳을 드나드는 이들은 그저 난봉꾼 자제들이나 지나가는 상인들뿐이라, 낯설거나 의심스러운 자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채금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되었다!”

호여괴가 한 걸음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채 나리! 소인이 참견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대체 누가 감히 호랑이 코털을 건드리려 한단 말입니까?”

채금당이 말했다. “네가 묻지 않아도 내 말해주려 했다. 이번에 두 나리와 추오상이 지극히 은밀하고도 중대한 대사를 논할 것이다. 내 비록 대화의 내용까지는 모르나, 이 일이 무림 전체의 대국은 물론 수많은 사람의 생사존망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소문이 새어 나간다면,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무리가 찾아와 깽판을 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다. 물론 찾아오는 자들이 대단치 않을 수도 있겠으나, 유람선에 있는 이들이 손톱만큼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손님에게 우리 금릉 두 가문이 얕보이지 않을 것 아니냐. 이것이 네게 중책을 맡겨 엄밀히 배치하게 한 첫 번째 의도다...”

호여괴가 참지 못하고 말을 잘라 물었다. “그럼 두 번째 의도도 있습니까?”

채금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시진 전에야 두 나리의 밀령을 받았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오른편을 한번 슬쩍 살피고는 목소리를 더 낮추어 이어갔다. “만약 협상이 결렬된다면, 절대로 추오상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호여괴가 깜짝 놀라며 급히 물었다. “신호는 무엇으로 합니까?”

채금당이 말했다. “내가 두 나리의 암시를 받으면 바로 ‘여의연환탄’을 날려 유람선 한가운데에 있는 저 팔각 풍등 두 개를 꺼뜨릴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희는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호여괴가 대답했다. “소인, 알겠습니다.”

채금당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물러가거라! 잠시 후 마차가 나루터에 멈추면 흔적을 잘 감추어, 우리 쪽에 매복이 있다는 것을 추오상이 알아채지 못하게 해라.”

호여괴가 말했다. “채 나리, 걱정 마십시오. 소인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채금당은 다시 자수 장식의 장삼 자락을 걷어 올리며 천천히 낚시골목(조어항)을 향해 걸어갔다.

채금당이 앞으로 한 차례 화살이 날아갈 만한 거리만큼 걸어갔을 때, 다가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앞뒤로 날렵한 복장을 한 장사 여덟 명씩이 건장한 준마를 타고 호위하고 있었고, 그 중간에 네 마리의 노새가 끄는 쌍두마차 한 대가 낚시골목의 평평한 청석판 길을 따라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채금당은 길가로 몸을 피했다가 마차가 지나갈 때 가볍게 뛰어올라 마부석에 올라탔다. 그의 이 가볍고도 날렵한 동작으로 보아, 그의 몸놀림이 상당히 비범함을 알 수 있었다.

열여섯 명의 호위무사와 마차가 나루터에 멈추자, 채금당은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두 손으로 마차 휘장을 걷어 올렸다.

마차에서 즉시 쉰 살 안팎에 관자놀이가 희끗희끗하고 위풍당당한 풍채를 지닌 노인이 뛰어내렸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금당아! 연회는 모두 준비되었느냐?”

채금당이 공손히 말했다. “두 나리께 아룁니다,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노인이 바로 금릉의 명문가 출신인 ‘금도’ 두동둔이었다.

두동둔(杜桐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마차 안을 향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추 세형, 마차에서 내리시지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차에서 풍채가 빼어나고 잘생긴 소년이 걸어 내려왔다. 거동이 침착하고 표정이 냉막한 것을 보니, 그가 분명 오늘 밤의 귀한 손님인 추오상일 것이다.

이때 다른 마차 한 대도 뒤따라 나루터에 멈추었고, 차 안에서 용모가 수려한 동자 네 명이 걸어 나왔다.

두동둔이 말했다. “금당아! 내가 추 공자와 술을 마시며 즐기려 하니 이런 거창한 격식은 필요 없다. 저 호위무사들을 돌려보내거라!”

채금당이 말했다. “성 안의 길이 좁고 사람과 수레로 붐벼 호위무사들은 그저 추 공자의 길을 열어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소인이 즉시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추오상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절하며 공손히 말했다. “추 공자, 배에 오르십시오.”

추오상은 채금당에게 답례도 하지 않은 채, 차갑게 두동둔에게 손짓을 해 보이며 말했다. “두 나리께서 먼저 드시지요.”

두동둔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좋소! 좋소! 이 늙은이가 앞장서리다!”

말을 마치고는 널다리를 밟으며 금취방으로 걸어 올라갔다. 이때 누각 위의 여성 악사 무리는 이미 ‘영가빈(귀한 손님을 맞이함)’이라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추오상(秋傲霜)은 두동둔이 선두에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묵직한 걸음걸이로 금취방(金翠舫)에 발을 디뎠다.

두 사람은 객실로 들어가 주객의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

선미 쪽의 녹색 휘장이 천천히 올라가자, 날씬하거나 풍만한, 붉고 푸른 옷을 입은 고운 기생들이 각자 자신의 기명을 밝히며 꽃 사이를 드나드는 나비처럼 하나둘 사뿐히 잔치 자리로 다가왔다.

미모를 논하든 자태를 말하든, 이 열 명의 기생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매낭자만큼은 다른 아홉 명처럼 얼굴에 화사한 웃음을 띠지 않았다. 그렇다고 입술을 삐죽거리거나 얼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귀하고 고상한 자태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당당한 기세를 풍길 뿐이었다.

바로 이 남다른 분위기 덕분에 추오상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에게 몇 번 더 머물렀다.

두동둔이 이를 눈치채고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매낭자! 자네가 복이 터졌군. 어서 추 공자 곁에 앉지 않고 뭐 하느냐.”

매낭자가 추오상을 슬쩍 바라보고는 옷자락을 여며 절을 올린 뒤, 그의 곁에 단정하게 내려앉았다.

동시에 진귀한 요리와 좋은 술도 홍목 탁자 위에 차례로 차려졌다.

열 명의 기생 중에서 다소 냉막한 매낭자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아홉 명은 모두 산전수전을 다 겪어 손님 대접하는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었다. 술을 따르고 안주를 집어주니 잔치 자리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사방에 드리운 진홍색 휘장이 바람에 펄럭였고, 유람선은 이미 천천히 강 한가운데로 나아가고 있었다.

술이 세 차례 돌자 추오상이 먼저 말을 꺼냈다. “두 나리, 조카가 큰 은혜를 입어 부르심을 받고 특이하게도 천 리 밖에서 급히 달려왔습니다.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두동둔이 연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급할 것 없소! 급할 것 없소! 세형께서 먼 길을 오시느라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셨을 텐데, 우선은 풍류를 즐기시고 정사는 이따가 천천히 얘기해도 늦지 않소.”

추오상이 말했다. “조카, 명을 따르겠습니다.”

매낭자는 추오상의 오른편에 앉아 그에게 술을 한 차례 권한 것을 빼고는 내내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추오상의 왼편에 앉은 은취라는 기생이 그에게 이것저것 캐묻고 어깨를 기대며, 탁자 밑으로 가냘픈 손가락으로 콕콕 꼬집는 등 추오상과 아주 살갑게 굴었다. 추오상은 비록 웃음기는 적었으나 지나치게 딱딱하게 굴지도 않았는데, 그의 소소한 손짓들로 보아 확실히 타고난 바람둥이 기질이 있었다.

은취(銀翠)가 지나치게 여우짓을 한 탓인지, 매낭자에게 질투심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녀도 짐짓 말을 붙이며 추오상에게 물었다. “추 공자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매낭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자 추오상도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그가 그녀를 잠시 응시하다가 짧게 답했다. “개봉이오!”

매낭자가 약간 놀라며 말했다. “아! 정말 먼 곳이군요!”

추오상이 말했다. “그리 가깝지는 않소.”



매낭자가 또 물었다. “추 공자의 집이 개봉에 있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집이 아닌 곳이 없소.”

매낭자가 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알아채기 힘든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나방 눈썹을 한 가닥 치켜세우며 말했다. “참으로 활달하십니다!”

추오상이 반대로 물었다. “낭자의 성이 매 씨요?”

매낭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기방의 처지인데 어찌 진짜 이름과 성이 있겠습니까!”

추오상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낭자의 집은 이곳 진회하에 있소?”

매낭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소쩍새야 귀가에 대고 울지 마라’ 하였으니, 공자께서는 묻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추오상은 내심 깜짝 놀랐다. 이 이름난 기생은 재학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기지도 대단했다. 당나라 시 중에 ‘이러나저러나 돌아갈 집이 없는데, 소쩍새야 귀가에 대고 울지 마라’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그녀는 집이 없다는 말을 직접 하지 않고 시 한 구절을 인용해 암시했으니, 참으로 영리하기 그지없었다.

속으로 상대의 재치에 감탄한 추오상은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를 띠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고 보니 낭자 역시 발길 닿는 곳마다 집이 아닌 곳이 없구려.”

매낭자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몸은 공자처럼 자유자재한 몸이 아니니, 어찌 발길 닿는 곳마다 집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두동둔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대수겠소? 추 공자가 많은 재물을 내어 청혼하기만 하면, 이제 두 사람은 발길 닿는 곳마다 집이 있는 셈이 될 것이오. 이 늙은이가 기꺼이 나서서 중매를 서 주리다!”

추오상이 하하 하고 웃었으나 소리만 들릴 뿐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러고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운 뒤, 다시 고개를 돌려 은취와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은취가 수시로 킥킥거리며 교태 섞인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매낭자는 어울리지 못하고 쓸쓸한 기색으로 눈앞의 술잔과 젓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두동둔은 그야말로 나이는 들었어도 마음은 청춘이었다. 자신이 건드리지 않는 은취와 매낭자 두 사람을 빼고는, 나머지 여덟 명의 기생과 마음껏 희롱하며 즐겼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기방의 술자리였고, 연회는 꼬박 한 시진 동안 이어졌다.

두동둔이 갑자기 술잔을 밀치고 일어서며 크게 외쳤다. “이우는 어디 있느냐?”

서이우가 휘장을 걷고 들어와 먼저 바닥에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린 뒤, 일어서서 공손히 물었다. “두 나리, 무슨 분부이십니까?”

두동둔이 말했다. “기생들을 데리고 가서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갈아입힌 뒤 부름을 기다리게 해라. 그리고 술상을 새로 차려오너라. 이 늙은이가 추 공자와 독대하여 몇 잔 더 마실 것이다.”

서이우가 연신 대답했다. “예! 예!”

이윽고 고운 기생 열 명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매낭자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 탁자 밑으로 추오상의 손목을 한번 지그시 쥐었다. 그녀처럼 냉막하고 단정한 성품을 지닌 이가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추오상은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술상과 그릇이 치워지고 새로운 요리가 올라오자, 두동둔이 한 청의동자에게 당부했다. “실외로 나가 부름을 대기해라. 사방을 철저히 경계하여, 그 누구도 객실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네 명의 청의동자가 녜녜 하며 물러갔다.

두동둔(杜桐屯)이 친히 추오상에게 술을 가득 따라주고는 잔을 들며 말했다. “자! 이 한 잔은 세형께서 ‘경천궁’의 부궁주 직책을 맡으신 것을 축하하는 잔이오. 세형께서는 이제 무림에서 한 사람 아래요, 만인 위의 자리에 오르셨소.”

추오상이 잔의 술을 비운 뒤 물었다. “무엇을 일컬어 만인 위라 하십니까?”

두동둔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경천궁’이 무림의 대업을 좌지우지하니, 크고 작은 문파를 막론하고 감히 누가 받들지 않겠소? 세형께서는 현재 ‘경천궁’의 궁주이자 ‘창랑검객’인 단비우의 지시만을 받으니, 어찌 한 사람 아래요 만인 위의 자리가 아니겠소?”

추오상이 말했다. “조카는 감히 그런 오만한 생각을 품지 못합니다!”

두동둔이 찬탄했다. “참으로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구려...”

어조를 약간 멈추더니,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해옥환 낭자가 세형을 모시는 데 부족함은 없었소?”

추오상이 말했다. “그 해 낭자는 이름을 ‘해어화’로 바꾸어야 할 듯합니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주더군요.”

두동둔이 말했다. “이 늙은이가 들으니, 세형께서 단비우의 친시를 통과하여 그의 부관이 되셨다기에 줄곧 세형과 연락을 취하고 싶었소. 다만 연락을 취할 인선을 고르느라 꽤 고심한 끝에 겨우 해 낭자를 찾아내었소...”

추오상이 말했다. “해 낭자도 결국 임무를 완수해 냈습니다.”

두동둔이 안색을 엄숙히 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이 늙은이는 줄곧 걱정이 많았소. 만에 하나 단비우가 해 낭자가 세형에게 접근한 의도를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아니겠소. 내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세형의 앞날에도 누를 끼치게 되었을 것이오.”

추오상이 몸을 바르게 고쳐 잡으며 엄숙하게 말했다. “두 나리! 조카를 은밀히 불러내신 데에는 필시 무슨 가르침이 있으실 텐데, 이제는 명확히 말씀해 주셔도 될 듯합니다.”

두동둔이 말했다. “이 늙은이가 먼저 한 가지만 묻겠소. 세형께서는 이 늙은이가 선친과 생전에 오랜 고교(故交)였다는 사실을 믿으시오?”

추오상이 잠시 부침을 겪다 말했다. “선친께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 조카의 나이 고작 다섯 살이었고, 열 살 때는 홀어머니마저 여뵜습니다. 그리하여 조카는 선친의 과거 지인들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허나 두 나리의 처소에 선친의 묵보가 남아 있고, 조카의 처소에도 선친의 유묵이 약간 남아 있는데 필체가 동일하며 상하의 낙관이 찍혀 있었습니다. 두 나리와 선친께서 오랜 고교이셨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두동둔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세형께서 의심하지 않으시니 이 늙은이도 마음이 놓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미소를 싹 거두고 목소리를 바짝 낮추어 이어갔다. “선친께서는 한 자루 차가운 쇠로 주조한 필(筆) 하나로 무림에 명성을 떨치셨고,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 서법으로 강호를 호령하셨소. 그리하여 무림인들 중에 ‘철필성수’ 추일장 대협과 왕래한 자가 비단 이 늙은이 한 사람만은 아니었소. 그러나...”

두동둔이 갑자기 술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가며 말을 뚝 끊었다.

추오상이 말했다. “두 나리, 어찌하여 말을 잇지 않으십니까?”

두동둔이 술잔을 내려놓더니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대략 이십 년 전에 무림에 혼세마왕이 한 명 나타났었소. 이름하여 ‘비조괴객’이라 불렸는데, 이 마두가 살해한 사람이 무수했소. 세형께서도 들어본 적이 있소?”

추오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마두는 이미 여러 해 동안 자취를 감춘 듯하던데요?”

두동둔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천천히 말했다. “선친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후로, 그 혼세마왕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소.”

추오상이 그 말을 듣고 멍해지더니, 두 눈썹을 찌푸리며 급히 말했다. “두 나리의 어조를 보아하니, 설마 그 혼세마왕이 선친과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두동둔이 일어나 객실 밖을 한참 살피고, 다시 창문 곳곳을 순시한 뒤에야 자리로 돌아와 목소리를 나지막이 낮추었다. “세형, 이것은 천지가 개벽할 비밀이오. 무림의 수천만 사람 중에 이 비밀을 아는 자는 오직 이 늙은이 하나뿐이오. 그 ‘비조괴객’이 실은 바로 선친의 화신(化身)이었소.”

추오상이 번쩍 잔을 밀치고 일어서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친께서 비록 무림에 공을 세우지는 못하셨으나, 해를 끼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신 지 십여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무림인들의 앙모를 받고 계십니다. ‘비조괴객’은 악명이 자자하여 인간과 신령이 모두 분노하는 자입니다. 두 나리! 오늘 만약 명백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신다면, 설령 당신이 진짜로 선친의 옛 동무라 해도 조카가 무례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동둔이 탈문하듯 외쳤다. “과연 효성이 지극한 추 씨 가문의 후손이구려! 앉으시오! 앉으시오! 이 늙은이가 자초지종을 서서히 말해 주겠소.”

추오상이 분한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앉았으나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두 나리! 즉시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두동둔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추 세형! 배가 강 한가운데에 있으니 당신도 떠나지 못하고, 이 늙은이도 몸을 빼지 못하오. 이 늙은이가 그 내막을 다 말하고 나면, 자연히 당신에게 증거를 건네주리다.”

추오상이 냉랭하게 말했다. “조카, 조용히 기다리겠습니다.”




두동둔이 말했다. “선친께서는 당시에 무예를 깊이 닦으셨을 뿐만 아니라, 서예를 유독 사랑하셨소. 안진경, 전종, 조맹부, 유공권 등 여러 대가의 진수를 터득하여 백 가지 서체를 다 잘 쓰셨고 붓끝에서 용과 뱀이 꿈틀거리는 듯했으나,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셨소. 언제나 비석의 탁본을 찾고 명가들을 두루 방문하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셨소. 하루는 황산 오도봉 아래를 지나다가 비를 만나 산기슭의 초가집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그 초가집에는 쉰 살가량의 노인이 살고 있었소. 옷은 누더기였고 몰골은 초췌했소. 방 안에도 낡고 짓이겨진 돗자리 한 장과 깨진 솥, 깨진 사발 몇 개가 전부였소. 하지만 아주 정갈한 책상이 하나 있었고, 책상 위의 문방사우는 무척 고풍스러웠소. 황토 흙벽에는 글씨와 도장이 가득 걸려 있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소. 선친의 말씀에 따르면, 그 노인의 서법은 백가의 장점을 융합하고 백가의 단점을 버려 독자적인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더군. 그야말로 철을 베고 은을 깎아낸 듯 붓의 힘이 종이 뒷면까지 뚫고 나갈 기세였소. 선친께서는 당시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하려 하셨소...”

두동둔이 조리 있고 정연하게 말하니 도무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추오상은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두동둔이 말을 멈추자 참지 못하고 말을 잘라 물었다. “그 노인이 승낙했습니까?”

두동둔이 이어 말했다. “당시 그 노인은 단칼에 거절했소. 선친께서는 당연히 단념하려 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 않으셨소. 나중에 그 노인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소. ‘네가 기어코 내 서법을 배우겠다면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겠으나, 너는 후회하지 마라.’라고 말이오.”

추오상이 해괴하고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노인의 말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두동둔이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만약 선친께서 당시에 그 노인의 말에 담긴 함의를 깨달으셨다면, 이후의 악과를 심지는 않으셨을 것이오.”

추오상이 중얼거렸다. “악과라니요? 이 무슨...”

두동둔이 손을 흔들어 말참견하지 말라는 몸짓을 한 뒤, 다시 차분하게 서술했다. “알고 보니 그 노인의 서법은 일종의 마공(魔功)이었소. 공력이 온전히 오른편 손목에 집중되기 때문에, 철을 베고 은을 깎아낸 듯한 노련하고 힘 있는 필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오. 선친께서는 그 노인을 따라 한 달 동안 서법을 연습하여 그 진수를 완벽히 터득하셨소. 하지만 마공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친의 기혈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소. 평소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다가도 보름달이 뜨는 밤이 되면, 선친께서는 오장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점차 이성을 잃고 미쳐버리셨소. 마공을 펼쳐 그 강철 같은 손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우두머리(머리통)를 움켜쥐어 부수지 않으면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았던 것이오.

그때만큼은 더 이상 ‘철필성수’ 추일장이 아니라, 무림의 살성인 ‘비조괴객’으로 변하셨소. 그렇게 5년 동안 그분은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 진귀한 유묵을 적지 않게 남기셨으나, 동시에 예순 명이나 되는 무고한 이들이 그분의 마수 아래 목숨을 잃게 만들었소.”

추오상이 중얼거렸다.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군요!”

두동둔이 물었다. “선친께서 십육 년 전 보름달이 뜨던 밤, 황산 오도봉 아래에서 스스로 천령개를 부수고 돌아가시지 않았소?”

추오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두동둔이 말했다. “이것이 이 늙은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요. 선친께서 처음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을 때는 대개 심신을 상실한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라, 사후에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셨소. 나중에는 신지가 더 이상 흐려지지 않았소. 하지만 기혈 내에 잠재된 마공이 그분으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몰아붙였소. 선친께서도 점차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으셨소. 범행을 저지를 때 비록 역용을 하고 변장을 하셨으나, 시간이 오래 흐르면 본래 면목이 남에게 간파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었소. 자신의 악명이 널리 퍼지는 거야 작은 일이지만, 그로 인해 당신이 무림인들에게 침뱉음을 당하는 것은 그분이 원치 않는 바였소. 그리하여 그분은 멀리 황산으로 가셔서 그 충동질하는 마력을 온 힘을 다해 억누르려 시도하셨으나, 불행히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소. 선친께서는 더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해, 결국 천령개를 부수고 남은 생을 마감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추오상은 줄곧 격앙되어 있었으나, 두동둔의 설명을 다 듣고 나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가 냉랭하게 물었다. “부탁이오나 두 나리께서는 어찌하여 이 일의 내막을 이토록 자세히 알고 계십니까?”

두동둔은 소매 주머니에서 뽕나무 종이로 만든 봉투를 하나 꺼내 추오상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이것은 선친께서 황산으로 떠나시기 전에 이 늙은이에게 보낸 장편의 편지라오. 그분의 친필이 맞는지 한번 보시오.”

추오상이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살펴보니, 과연 부친의 친필이 맞았다. 편지에는 ‘비조괴객’으로 화하여 흉행을 저지른 일이 고스란히 털어놓아져 있었는데, 방금 두동둔이 말한 내용과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편지를 다 읽은 추오상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그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두동둔은 그의 손에서 부드럽게 편지를 도로 가져가 봉투에 넣고는 다시 소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추오상이 길게 한숨을 내쉰 뒤에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두 나리께서 조카를 이곳으로 부르신 것이 바로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까?”

두동둔이??(괴휼)하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오!”

추오상이 어리둥절해했다. “또 다른 중대한 일이 있습니까?”

두동둔이 목소리를 나지막이 낮추었다. “귀궁의 궁주이신 단비우의 외아들 단계 역시 선친의 손에 죽었소. 수년 동안 단비우는 범인을 잡아 복수하겠다는 일념을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소. 일단 일이 탄로나면 선친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 원한과 복수가 추 세형의 몸으로 쏠리게 될까 두렵소.”

추오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남의 자식을 죽인 자가 그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천리가 명백히 순환하는 인과응보입니다. 선친께서 이성을 잃고 미쳐서 흉행을 저지르셨으니, 조카가 아비의 죄를 대신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두동둔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추 세형은 과연 호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려. 안타깝게도 세형의 목숨은 하나뿐이오!”

추오상이 말했다. “두 나리,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동둔이 말했다. “선친께서 예순 명의 인명에 달하는 피비린내 나는 빚을 지셨는데, 세형이 단비우 한 사람에게만 아들을 죽인 원한을 갚게 해준다면, 이는 나머지 쉰아홉 건의 살인 사건에 얽힌 원수들에게 너무 불공평한 일이 아니겠소?”

추오상이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주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것은...”

두동둔이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게다가 선친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것은 오직 추 씨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소. 세형이 자원하여 아비의 죄를 대신 받겠다는 것은 인의를 중히 여겨서이나, 이는 선친의 염원을 저버리는 것이니 효도에 어긋나오. 인의와 효도를 비교하자면 자연히 효도가 무거운 법이니, 두 가지 해로운 일 중 가벼운 것을 택해야 마땅하오. 추 세형은 부디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처신해야 할 것이오!”

추오상이 말했다. “말씀은 비록 그러하나...”

두동둔이 다급히 말을 빼앗아 말했다. “선친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것으로 이미 무고한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치른 셈이오. 추 세형이 또다시 죽으러 가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가치 없는 일이오!”

추오상이 잠시 숙고해 보니 두동둔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깊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두 나리의 고견은 어떠하십니까?”

두동둔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늙은이는 당연히 당신이 만수무강하고 무림에 이름을 날려 추 씨 가문의 명예를 빛내기를 바라오!”

추오상이 말했다. “만약 어느 날 단 궁주께서 진상을 알아차리신다면...”

두동둔이 말을 받았다. “세형! 이 늙은이는 선친과 생전에 막역한 지교였소. 황산으로 떠나기 전 이 늙은이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명백히 사후의 일을 탁고한 것이오. 이 늙은이가 오늘 당연히 세형을 위해 힘닿는 데까지 도울 것이오.”

추오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카가 예전 사정을 알지 못했을 때는 그저 단 궁주의 수하에서 힘을 다해 이름을 날릴 생각만 했으나, 이제는...”

두동둔이 말을 가로챘다. “세형! 단비우가 ‘창랑검객’이라 불리는 것은 확실히 예사롭지 않아 또래 무리 중 으뜸이라 할 만하오. 이 늙은이가 거드름을 피우는 것은 아니나, 이 늙은이의 ‘파풍도법’ 역시 무림에 적수가 없소. 안타깝게도 단비우의 저 ‘창랑검’이 워낙 예리하여 이 늙은이의 ‘자금도’가 다소 뒤처지오. 그리하여 병장기에서 그에게 한 수 접어주고 들어가는 것이오...”

그가 어조를 멈추더니 목소리를 바짝 낮추어 이어갔다. “세형, 이 늙은이는 나이가 들어 무림을 패권할 야심이 없소. 세형은 바야흐로 한창 나이이니 모름지기 이름을 날리려 힘써야 하오. 이 늙은이는 고인의 자식이 무림을 제패할 수 있도록 기꺼이 힘을 보태고 싶소. 마침 눈앞에 아주 좋은 기회가 하나 있소...”

추오상이 말했다. “두 나리, 말씀하십시오!”

두동둔이 말했다. “장인이 일을 잘하려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연장을 날카롭게 해야 하는 법이오. 단비우에게 만약 무쇠를 진흙처럼 베고 금석을 자를 수 있는 저 ‘창랑검’이 없다면, 그의 그 정묘한 검법도 펼칠 도리가 없소. 현재 세형이 단비우의 좌우를 수행하며 그의 부관으로 있으니, 만약 지모를 발휘하여 그의 저 ‘창랑검’을 훔쳐낸다면...”

추오상이 놀라며 말했다. “그것은 좀도둑이나 다름없는 짓 아닙니까. 두 나리, 이는 그리 마땅치 않은 듯합니다.”

두동둔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추 세형이 이토록 강직할 줄은 몰랐구려. 만약 세형이 검을 훔치는 짓을 비열하게 여겨 차마 하지 못하겠다면, 해옥환에게 손을 쓰도록 시키고 세형은 그저 어둠 속에서 은밀히 비호해 주기만 하면 될 것이오.”

추오상은 마음속으로 짐짓 동요했으나, 겉으로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며 말했다. “이것이 두 나리께서 조카를 은밀히 이곳으로 불러 상의하고자 하신 대사였습니까?”

두동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늙은이는 매사 추 세형만을 생각하고 있소!”

추오상이 두 손을 모아 포권을 하며 말했다. “두 나리께 감사드립니다...”

그가 어조를 멈추었다가 이어 말했다. “만약 단비우의 저 ‘창랑검’이 그의 손을 떠난다면, 두 나리의 ‘자금도’가 무림을 패권할 수 있겠군요?”

두동둔이 웃으며 말했다. “세형! 당신도 있지 않소!”

추오상이 말했다. “조카의 몇 가지 서툰 검법으로 어찌 두 나리의 적수가 되겠습니까.”



두동둔이 손을 한 번 내저으며 말했다. “추 세형! 일절 그런 한담은 잠시 접어두고, 이 늙은이의 생각은 다 나왔으니 당신은 어찌 여기시오?”

추오상이 얼굴에 약간 난처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두 나리, 자칫 손에 넣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두동둔이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너무 속이 깊다고 탓하지 마시오. 해옥환이 보내온 쪽지에 이르기를, 세형과 저 단비우가 무척 가깝게 지낸다고 하던데 말이오?”

추오상은 가슴속으로 크게 흠칫 놀랐다. 알고 보니 해옥환은 자신의 곁에 온 이후로도 여전히 두동둔과 은밀히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다. 보아하니 두동둔은 고인의 자식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경천궁’의 부궁주 자리에 있는 신분을 이용해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심을 채우려는 것뿐이었다.

두동둔이 또 물었다. “설마 세형에게 무슨 고충이라도 있소?”

추오상은 속생각을 감추고 천천히 말했다. “해 낭자가 고한 바는 과연 사실입니다. 하지만 단비우가 이토록 거대한 세력을 떨치며 무림을 평정한 것은 비단 무공에만 기댄 것이 아니니, 그 사람의 기지와 재략 역시 결코 소홀히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움직임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조카의 금릉행이 비록 두 나리의 은밀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 하나, 겉으로는 금릉 무림인들의 동태를 살피라는 명을 받고 온 것이니 아직 수일간 더 머무르며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두동둔이 얼른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세형도 이 늙은이의 검을 훔치자는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오?”

추오상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일이 겉잡을 수 없이 굳어지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도리어 반문했다. “두 나리! 조카가 맹세라도 하여 마음을 증명해 보여야 하겠습니까?”

두동둔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무슨 말이오! 자! 마십시다! 마십시다...”

바로 이때 한 동자가 객실 밖에서 큰 소리로 아뢰었다. “두 나리께 아룁니다! 채 총관이 배를 몰고 와 뵙기를 청합니다.”

두동둔은 미간을 슬쩍 찌푸리더니 추오상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세형은 잠시 앉아 계시오! 이 늙은이가 가보고 오겠소!” 말을 마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객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채금당이 타고 온 노를 젓는 빠른 배는 마침 금취방 선두 오른편에 멈춰 서 있었다. 채금당은 배 위에서 두동둔이 객실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아뢰었다. “강 대감 댁의 하인이 뵙기를 청합니다.”

두동둔은 심기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어찌하여 이 늙은이가 손님을 대접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채금당이 대답했다. “소인이 그리 말하였으나, 찾아온 자가 말하기를 제 상전이 고할 중대한 일이 있다 하였습니다.”

두동둔이 말했다. “그 하인을 배 위로 데려오너라.”

채금당이 목소리를 바짝 낮추며 말했다. “두 나리! 그것은 부당합니다. 추 소협의 행방은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야 합니다.”

두동둔이 소매를 뿌리치며 말했다. “ 좋다! 이 늙은이가 뭍으로 나가 그 하인을 만나보마!”

말을 마치고는 다시 객실 문 앞의 휘장을 걷어 올리며 추오상에게 말했다. “추 세형! 이 늙은이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을 양해해 주시오, 금방 다녀오리다.”

추오상이 포권을 해 보이며 말했다. “두 나리, 편히 다녀오십시오!”

두동둔이 다시 큰 소리로 분부했다. “이우야, 은취와 매낭자 두 기생을 불러 자리에 서서 추 공자를 시중들게 해라.”

그러고는 배 위에서 빠른 배로 뛰어내렸고, 사공이 노를 저어 급히 강가로 향했다.

두동둔과 채금당 두 사람은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당연히 그곳에 기다리고 있는 강 대감 댁의 하인 따위는 없었다. 금릉에서 두 씨 가문과 왕래하는 이들 중에는 애초에 강 씨 성을 가진 자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채금당이 사정을 자세히 고하기도 전에, 두동둔이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금당아! 대체 무슨 대단한 일이 터졌기에 술자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이 난리냐?”

채금당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두 나리! 사태가 좋지 않게 돌아가는 듯합니다!”

두동둔이 재촉했다. “어서 말해라!”

채금당이 말했다. “유극안이 방금 급히 돌아왔습니다.”

두동둔이 두 눈썹을 찌푸리며 얼른 물었다. “무슨 소식을 가져왔더냐?”

채금당이 말했다. “추오상은 지난달 이십오일에 개봉성을 떠났고, 유극안은 이십칠일 밤에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십오일, 이십육일, 이십칠일 사흘 동안 해옥환이 본래 그와 세 차례 연락을 취해야 마땅했으나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고 합니다. 유극안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전력을 다해 돌아와 보고한 것입니다.”

두동둔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물었다. “유극안 그 자는 어디 있느냐?”

채금당이 대답했다. “그가 개봉에서 반년 가까이 지체했기에 추오상과 얼굴을 마주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소인이 우선 처소로 돌려보냈습니다.”

두동둔이 중얼거렸다. “이 일이 다소 기이하구나?”

채금당이 말했다. “두 나리! 그 어른께서도 각별히 경계하셔야 합니다! 추 씨 가문의 새파란 녀석에게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두동둔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헤! 이 늙은이가 평생 사냥을 해왔거늘, 어찌 새에게 눈을 쪼이겠느냐...” 어조를 잠시 멈추더니 다시 물었다. “금당아! 네가 배치해 둔 것은 어찌 되었느냐?”

채금당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남쪽 갈대숲 속에 빠른 배 세 척을 숨겨두었고, 그 위에는 사수 서른 명이 대기 중입니다. 뭍에는 총 세 겹으로 매복을 깔아두었으니, 그가 물속으로 숨는 술법이라도 쓰지 않는 한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두동둔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모든 것은 내 신호에 따르되, 절대로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채금당이 말했다.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두동둔은 다시 빠른 배에 올라 사공에게 자신을 금취방으로 데려다주라 분부했다. 채금당은 그대로 강가에 남았다.

두동둔이 객실로 돌아왔을 때, 추오상은 매낭자, 은취 등과 주사위를 던지고 술잔을 부딪치며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그의 부친이 생전에 악행을 저지르고 사람을 죽였다는 소리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두동둔은 먼저 추오상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다시 매낭자와 은취 두 사람을 물러가게 했다.

추오상이 몸을 바르게 고쳐 잡으며 말했다. “두 나리! 만약 요긴한 일이 있으시다면 오늘 밤 자리는 이만 물리는 게 좋겠습니다.”

두동둔이 목소리를 나지막이 낮추어 말했다. “본래 세형께서도 쉬셔야 마땅하오. 다만 요긴한 정사가 있어 부득이하게 세형을 한동안 더 성가시게 해야겠소.”

추오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두 나리의 안색을 보아하니, 무슨 중대한 일이 터진 듯합니다?”

두동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어조를 바꾸어 그가 다시 물었다. “세형께서 금릉에 오실 때 혹 수행원을 대동하셨소?”

추오상이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조카는 본래 홀로 다니는 것에 익숙합니다!”

두동둔이 말했다. “그거 참 좋지 않구려! 금릉성 안에서 이미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림 인물들이 여러 무리 발견되었소.”

추오상이 말했다. “그 무림 인물들이 나타난 것이 설마 우리와 연관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두동둔이 말했다. “연관이 깊소. 자! 세형, 해 낭자가 입궁하게 된 경위에 대해 내게 들려주시겠소?”



추오상이 말했다. “‘경천궁’의 규칙에 따르면 궁주는 여덟 명의 검희를, 부궁주는 네 명의 검희를 거느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카는 부궁주로서 공개적으로 검희 선발을 진행했습니다.”

두동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점은 이 늙은이도 알고 있소. 내 그 기회를 틈타 해 낭자를 보내 응시하게 했던 것이오. 어... 당시 응시하러 온 무림의 가인들은 얼마나 되었소?”

추오상이 잠시 생각에 잠기다 말했다. “스무 명 남짓 되었습니다.”

두동둔이 또 물었다. “용모를 보고 뽑았소? 아니면武功(무공)으로 판가름을 냈소?”

추오상이 말했다. “미모와 재주를 모두 중하게 보았습니다.”

두동둔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해 낭자는 미모와 재주 두 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했던 모양이구려?”

추오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선발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조카 역시 그녀가 두 나리께서 보내어 제게 접근시킨 인물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동둔이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겉으로 드러난 파탄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어조를 바꾸어 그가 다시 물었다. “네 명의 검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은 세형에게 있었소? 아니면 단비우에게 있었소?”

추오상이 말했다. “검희의 결정권은 온전히 조카에게 있었습니다. 다만 경천궁에 입궁하기 전에 단 궁주께서 친히 면접을 보셨습니다.”

두동둔이 물었다. “무공을 시험하는 면접이었소?”

추오상이 말했다. “이번에 단 궁주께서는 선발된 네 명의 검희에게 그저 몇 마디 말을 건네셨을 뿐입니다.”

두동둔이 말했다. “그 대화를 나눌 때, 해옥환이 어떤 파탄을 드러내지는 않았겠지?”

추오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화를 나눌 때 조카 역시 곁에 있었습니다. 해 낭자는 절대로 파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두동둔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 해 낭자가 입궁하여 세형의 좌우를 수행한 이후로 이 늙은이와 단 하루도 연락이 끊긴 적이 없었소. 내가 개봉성 내에 사람을 붙여 장기 체류하게 했기 때문이오. 하지만 세형께서 지난달 이십오일에 경천궁을 떠나신 후로, 사흘 연속 해 낭자는 내가 배치해 둔 사람과 연락을 취하지 않았소. 아무래도 세형께서 경천궁을 떠나자마자 궁 내에 큰 변고가 일어난 듯싶소.”

추오상이 놀라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두동둔이 말했다. “개봉성에 배치했던 나의 전령이 이미 밤을 도와 급히 돌아왔으니, 이는 천진만확한 사실이오.”

추오상이 엄숙한 기색으로 말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본다면, 해 낭자의 연락이 끊긴 것은 필시 신분이 단 궁주에게 탄로 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릉성 내에 나타난 여러 무리의 무림 인물들은 ‘경천궁’에서 조카를 추적하기 위해 보낸 자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성내에서 신원 미상의 무림 인물들을 발견했다는 말은 두동둔이 임의로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목적은 추오상이 금릉에 올 때 다른 흉계를 품고 왔는지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추오상의 표정을 보니 전혀 음험한 구석이 없었으므로, 설령 해옥환이 정말로 위험에 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추오상의 의도는 아님이 분명했다. 하지만 두동둔은 방금 자신이 지어낸 말을 이제 와서 번복하기가 곤란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두동둔이 그제야 중얼거렸다. “정말 그렇다면 이 늙은이의 죄가 너무나 크구려. 현재 상황이 불분명하니 세형의 생각은 어떠하오...”

추오상이 얼른 말을 받았다. “성으로 돌아가 한 놈을 붙잡아 자백을 받아내야겠습니다!”

두동둔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좋지 않소! 좋지 않소...” 당연히 그는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성으로 돌아가 본들 ‘경천궁’에 속한 인물은 단 반 명도 마주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추오상이 물었다. “두 나리의 고견은 어떠하십니까?”

두동둔이 말했다. “세형은 예정된 일정대로 기거를 평소처럼 유지하며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편이 낫겠소.”

추오상이 말했다. “예정된 일정대로라면 오늘 밤은 이 진회하 위에서 묵어가야 합니다.”

두동둔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세형은 매낭자가 마음에 드시오? 아니면 은취가 마음에 드시오? 물고기와 곰 발바닥을 한 솥에 넣고 끓이듯 두 사람을 모두 거두어도 나쁠 건 없지 않겠소!”

두동둔의 짐작으로는, 추오상이 검희들을 모집해 곁에 두고 수종 들게 한 것을 보니 비록 호색한까지는 아닐지라도 풍류를 아는 자임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술과 미색을 모두 동원해 진회하에서 추오상을 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검희를 두는 것은 ‘경천궁’의 규칙일 뿐이었다. 만약 추오상이 그녀들을 범하려 했다면 네 명의 검희는 당연히 명을 받아 수청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추오상이 몸을 깨끗이 지키려 한다면 궁의 규칙상 강제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추오상은 비록 네 명의 검희를 곁에 두었으나, 단 한 번도 남녀 간의 은밀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회하에 오기 전에도 그는 그저 ‘주인의 뜻에 따른다’는 본분을 지키며 두동둔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지켜볼 뿐이었고, 애초에 풍류를 즐길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방금 매낭자가 탁자 밑에서 슬며시 자신의 손목을 쥔 것에는 필시 깊은 사연이 있는 듯했다. 이에 그는 속내를 감춘 채 완곡하게 말했다. “저 매낭자가 보기엔 나쁘지 않은 듯하나, 조카가 감히 두 나리 앞에서 지나치게 방종하게 굴 수는 없습니다!”

두동둔이 웃으며 말했다. “세형이 어찌 그리 얽매이시오. 인생을 살아가며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하는 법이오. 침방 배는 이미 잘 준비해 두었소. 이 물 위에서 미색을 탐하며 꿈길에 드는 것은 또 다른 묘미가 있지 않소! 자! 마지막으로 한 잔 더 비우고 우리는 이만 일어납시다!”

추오상이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운 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동둔의 분부에 따라 정교하게 치장된 두 척의 침방 배가 이미 좌우로 금취방에 몸을 대고 있었다.

두동둔이 나지막이 말했다. “세형! 저 매낭자는 진회하에 온 이후로 몸을 옥처럼 깨끗이 지켰을 뿐만 아니라, 손님을 맞는 일도 드물었소. 필시 세형의 수려하고 호탕한 풍채가 저 가인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니 어서 가보시오! 아무런 걱정 말고 편안히 주무시오. 강 위와 뭍에 모두 경계병을 깔아두었으니 오늘 밤의 가인과의 경사를 방해할 자는 절대 없을 것이오.”

추오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두 손을 모아 포권을 한 뒤, 금취방 오른편에 대어 놓은 정교한 침방 배로 훌쩍 뛰어올랐다.

노를 잡은 사공 여인은 지시를 기다리기도 전에 침방 배를 저어 금취방에서 멀어졌다.

열두세 살가량의 어린 시녀가 다가와 얌전하게 절을 올리며 말했다. “강바람이 차가우니 상공께서는 선실 안으로 드시지요.”

추오상이 휘장을 걷고 선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선실 안은 그리 넓지 않았으나 무척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침상에는 비단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침상 한가운데에는 용과 봉황이 수놓인 비단 이불과 원앙 베개 한 쌍이 놓여 있었다. 한 가구 위에는 붉은 초 한 쌍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매낭자는 이미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 고개를 가슴 깊이 숙이고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막 신방에 들어온 새색시 같은 모습이었다.

방금 선두에서 맞이했던 어린 시녀가 네 가지 색의 과일과 술 한 호리병, 술잔 두 개가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가구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뒤, 소리 없이 물러나며 선실 문을 닫았다.

그제야 매낭자가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추 공자! 이 몸이 공자의 의복을 갈아입혀 드려야 하겠습니까?”

추오상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낭자! 방금 잔치 자리에서 탁자 밑으로 내 손을 은밀히 쥔 것은 대체 무슨 의도였소?”

매낭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 몸은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양을 떨며 다투는 짓에 익숙지 않습니다. 공자께서 은취의 미색에 홀려 이 몸을 잊으실까 두려워 은밀히 기색을 보인 것인데, 다행히 공자께서 알아차려 주셨군요!”

추오상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낭자의 본심이 아닐 텐데?”

매낭자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낭자가 기방의 처지인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오.”

매낭자가 신색을 바로 고치며 말했다. “비록 기방의 인물은 아니나, 불행히도??(풍진)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방금 잔치 자리에서 두 큰나리께서 말씀하시기를, 저를 위해 몸값을 치르고 속량해 주겠다 하셨습니다. 공자처럼 인품이 빼어난 분을 뵈었으니, 어찌 이 몸이 은밀히 눈길을 보내어 이 몸을 구원해 줄 속량의 기회를 단단히 붙잡으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추오상이 중얼거렸다. “과연 그랬구려...”

하지만 그의 마음속으로는 남몰래 딴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 매낭자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각별히 경계해야겠구나.’

매낭자가 또 부끄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이 몸이 비록 풍진에 몰락했으나 여전히 정조를 깨끗이 지켜, 몸과 피부, 머리카락 한 가닥도 더럽혀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공자께서 버리지 않으신다면, 부디 이 몸이 공자의 의복을 갈아입혀 드리게 해주십시오...”

매낭자가 바로 여기까지만 말했을 때, 갑자기 선실 안에서 어린 시녀가 문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상공! 두 씨 댁의 채 총관이 뵙기를 청합니다.”

매낭자가 다급히 말을 빼앗아 외쳤다. “가서 대답해라. 추 상공께서는 이미 편안히 잠드셨으니, 볼일이 있다면 내일 다시 오라고...”

추오상이 얼른 손을 흔들어 그녀를 만류하며 말했다. “아니오! 내가 나가서 그를 만나보겠소. 어쩌면 요긴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오.”

매낭자가 고개를 떨구며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공자께서는 반드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오늘 밤은 이 몸의 평생 화복이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반드시 돌아오겠소!” 서둘러 말을 마치고는 휘장을 걷고 선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채금당이 타고 온 노를 젓는 빠른 배는 침방 배에 바짝 대지 않고 약 석 장쯤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추오상이 모습을 나타낸 뒤에야 채금당은 사공에게 배를 저어 오도록 분부했고,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추 공자께서는 이쪽으로 건너오십시오. 고할 중대한 일이 있습니다.”

추오상이 발끝으로 가볍게 도약하여 빠른 배 위로 내려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채금당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배를 젓는 사공이 배를 저어 침방 배에서 열 장쯤 멀어진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개봉에서 온 젊은 여인 세 명이 공자를 즉시 면담해야 할 중대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추오상이 자신도 모르게 멍해지며 급히 물었다. “이름을 밝히더냐?”

채금당이 말했다. “우두머리 격인 한 명은 성이 하 씨라 자칭했고, 나머지 두 명은 성씨를 알지 못합니다.”

추오상은 가슴속으로 크게 흠칫 놀랐다. 성이 하 씨라면, 필시 네 가지 꽃으로 이름을 나열한 네 명의 검희 중 ‘난희’ 하화련일 것이다. 그렇다면 단비우가 자신을 추적하기 위해 그녀들 세 사람을 보냈단 말인가?

잠시 멍해 있던 추오상이 그제야 물었다. “그녀들은 어디 있느냐?”

채금당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강가에 있습니다.”

추오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이하구나? 그녀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채금당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녀들이 먼저 두 나리의 저택으로 찾아왔기에, 내관이 그녀들을 이쪽으로 인도해 준 것입니다.”

추오상이 말했다. “두 나리께서도 알고 계시느냐?”

채금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나리께서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 어른께서 추 공자께 기회를 보아 기민하게 행동하라 당부하셨습니다...” 말을 이으며 그는 목소리를 바짝 낮추었다. “뭍에는 이미 겹겹이 경계가 깔려 있으니, 추 공자께서 수신호만 한 번 주신다면...”

추오상이 손을 한 번 내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사공에게 배를 빨리 저어 강가로 가자고 해라.”

채금당이 손을 휘두르자, 빠른 배는 즉시 강가를 향해 화살처럼 질주해 갔다.

배가 뭍에 닿기 전, 추오상은 남몰래 속으로 따져보았다. ‘만약 해옥환의 신분이 탄로 나 나까지 연루되었고, 단비우가 사람을 보내 나를 추적하려 한 것이라면 궁 내에 있는 사대호법을 파견했을 것이다. 설령 검희들을 출동시켰다 해도, 단비우 곁에 있는 용, 봉, 운, 하, 풍, 화, 빙, 설 여덟 검희가 내 곁에 있는 네 검희보다 검술이 훨씬 고명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신뢰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배는 이미 진회하 기슭에 멈추어 섰다.

추오상이 훌쩍 배에서 내리니, 과연 그 세 명의 젊은 여인은 바로 자신의 곁에 있던 ‘난희(蘭姬)’ 하화련(夏火蓮), ‘국희(菊姬)’ 하용미(何蓉媚), ‘죽희(竹姬)’ 맹채옥(孟采玉)이었다.

‘난희’ 하화련은 추오상이 상륙하는 것을 보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몸을 굽혀 절을 올린 뒤, 나지막이 말했다. “부궁주께 아룁니다! ‘매희’ 해옥환이 부궁주께서 궁을 떠나신 지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갑자기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기에, 특별히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추오상이 안색을 살피고 말씨를 헤아려 보니, 하화련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단비우의 명을 받아 말을 지어내어 허위로 보고하는 것이라 해도, 표정 사이에 약간의 파탄은 흘러나오기 마련이었다. 이 때문에 추오상은 다소 마음을 놓았다.

그는 일부러 얼굴을 굳히고 차갑게 꾸짖었다. “겨우 검희 한 명이 죽은 일을 가지고, 너희가 무리를 지어 소식을 전하러 온단 말이냐?”

하화련이 말했다. “부궁주께 아룁니다! 저희는 궁주의 명을 받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환 낭자가 자결한 행동이 너무나 돌연했기에, 궁주께서 부궁주께 은밀히 그 내막을 조사하라 당부하셨습니다. 동시에 저희에게 부궁주의 좌우를 수행하며 보살피라 명하셨습니다.”

이쯤 되자 추오상이 졸이던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단비우가 자신을 급히 궁으로 불러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에게 아직 의심을 품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던 추오상이 다시 물었다. “너희가 어찌 본 부궁주가 두 씨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느냐?”

하화련이 대답했다. “궁을 떠날 때, 궁주께서 미리 일러두시기를 금릉에 들어서기만 하면 누군가 와서 부궁주께서 머무실 곳을 인도해 줄 것이라 하셨습니다. 과연 인도해 주는 자가 있었으나, 그 내막을 소녀들은 감히 함부로 짐작하지 못합니다.”

하화련은 무척 정중하고 틀림없게 대답했다. 단비우는 도처에 눈과 귀를 깔아두어 수하들의 행방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희 신분인 하화련조차 감히 들추어내려 하지 않으니, 당연히 추오상 역시 굳이 꼬치꼬치 캘 이유가 없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좋다! 너희는 우선 객점을 하나 찾아가 투숙하여 쉬고, 내일 정오가 교차할 때 다시 두 씨 저택으로 오너라!”

하화련(夏火蓮)이 한 걸음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궁주께서 저희에게 수시로 부궁주의 좌우를 수행하라 명하셨는데, 어찌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검희들뿐만 아니라 궁주 단비우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은, 부궁주 신분인 추오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숙고하더니 그제야 물었다. “하희! 너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느냐?”

하화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녀도 대략 소문을 들었습니다. 진회하의 봄 경치(기방의 유흥)는 나라 안에서 명성이 자자하다고 들었습니다.”

하화련이 말했다. “연회를 청한 주인 ‘금도’ 두 어른은 강남 무림의 영수 격인 인물이라, 친분을 다지기 위해 그 성의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저 선실 안에 있는 이들도 모두 기생들인데, 너희가 어찌 좌우를 수행하겠느냐?”

하화련이 말했다. “부궁주께서는 풍습에 따라 마음껏 풍류를 즐기십시오. 저희는 선실 밖에서 호위하겠습니다.”

추오상은 그녀들을 떼어놓고 두동둔과 무릎을 맞대어 이야기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틀려버린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너라! 빠른 배에 올라타라. 본 부궁주가 가서 주인에게 작별을 고해야겠다!” 몸을 돌려 빠른 배로 훌쩍 뛰어오르자, 세 검희도 나란히 배에 올라탔다.

채금당이 공손히 물었다. “추 공자께서는 어디로 가고자 하십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총관, 수고스럽겠지만 나를 인도하여 두 나리를 뵙게 해주시오!”

방금 하화련과 추오상이 나눈 대화를 채금당은 이미 태반이나 전해 들은 상태였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묵묵히 사공에게 배를 저어 두동둔이 머무는 침방 배로 가도록 분부했다.

두동둔은 비록 나이는 들었으나 마음만큼은 늙지 않아, 추오상이 매낭자를 남겨두자 자신은 곧장 은취를 불러들였었다. 그러나 미처 운우의 정을 나누기도 전에 채금당의 보고를 받았고, 현재는 의관을 정제한 채 다음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빠른 배가 노를 저어 오는 모습은 진작부터 두동둔의 눈에 들어왔다. 추오상이 침방 배에 발을 디디자마자, 그는 어린 시녀를 시켜 영접하게 했다.

추오상은 세 검희에게 바깥 선실에서 대기하도록 이른 뒤, 홀로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두동둔은 이미 한발 앞서 은취를 물린 상태였다. 그는 추오상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세형!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추오상은 나지막하고 상세한 어조로 세 검희가 가져온 소식을 한 차례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두동둔이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세형! 당신이 보기에 실제 상황은 어떠한 것 같소?”

추오상이 말했다. “속임수가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두동둔이 중얼거렸다. “해 낭자가 어찌하여 갑자기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단 말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일입니다.”

두동둔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세형! 이 늙은이가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물어봄세. 세형은 해 낭자와 정을 통한 적이 있소?”

추오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없습니다! 조카는 아직 무공을 온전히 성취하지 못했거늘, 어찌 감히 여색을 가까이했겠습니까.”

두동둔이 아연실색하며 말했다. “그것참 기이하구려! 해옥환이 내게 보고하기를, 세형과 일찍이 피부를 맞댄 친밀한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세형이 본래 여색을 몹시 밝혀 늘 네 검희를 한 침상에 부르고 함께 유희를 즐긴다고 했단 말이오!”

추오상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두동둔이 한참 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세형은 방금 무공이 미완성이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하셨소. 그런데 오늘 밤 매낭자와 동숙하기로 한 것은, 설마...”

추오상이 얼른 말을 가로채며 해명했다. “그것은 조카가 두 나리의 흥을 깨뜨릴까 염려하여 부득이 매낭자를 불렀던 것뿐입니다. 만약 세 검희가 오지 않았더라도, 조카는 그저 매낭자와 밤새 맑은 담소나 나눌 생각이었습니다.”

두동둔이 말했다. “세형의 어조를 보니, 지금 당장 떠나려는 모양이구려?”

추오상이 말했다. “세 검희를 시급히 안돈시켜야 하고, 조카 역시 상세한 내막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카는 내일 정오 무렵에 나리의 저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두동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 하시오. 다만 세형이 나와 했던 약조만큼은 부디 잊지 말아 주었으면 하오.”

추오상은 엷은 미소로 모호하게 대답을 대신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나리! 매 낭자의 몸값을 대신 치르고 속량해 주시되, 그 비용이 얼마가 들든 내일 정오에 빠짐없이 보태어 갚아드리겠습니다. 조카가 이미 매낭자에게 그리 약속했으니 신의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두동둔이 웃으며 말했다. “세형은 과연 다정한 장사구려. 이 늙은이가 그리 처리하겠소.”

추오상이 다시 목소리를 바짝 낮추며 말했다. “두 나리! 세 검희는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성내에 나타났다던 그 여러 무리의 무림 인물들은 아마 다른 출처가 있을 터이니, 나리께서 사람을 시켜 유심히 살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두동둔이 말했다. “이 늙은이가 명심하겠소.”

추오상은 예를 갖추어 작별을 고한 뒤 선실을 물러나왔다. 그리고 세 검희와 함께 다시 빠른 배에 올랐다. 채금당이 그들을 배웅하여 뭍으로 인도했고, 친히 마차까지 불러주며 그들이 낚시골(낚어항) 방향으로 바퀴를 굴려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연하게도, 두동둔이 따로 분부하지 않았음에도 채금당은 이미 마차 뒤로 사람을 붙여 그들의 뒤를 밟게 한 상태였다.

밤이 깊어 깊은 침묵에 잠긴 석두성 안은 사방이 고요했다.

고루 근처에 있는 ‘안평여점’의 기름종이 등롱만이 아직 불을 밝히고 있었고, 네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추오상은 점포 주인에게 서로 이어진 서쪽 행랑채 상방 두 칸을 요구하여, 세 검희에게 한 방을 같이 쓰도록 이르고 자신은 옆방에 투숙했다.

추오상은 손과 얼굴을 씻고 불을 꺼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문득 문가에서 손가락으로 문을 튕기는 소리가 톡톡 울렸다. 그는 필시 세 검희 중 한 명일 것이라 짐작하며 가볍게 불렀다. “들어오너라!”

안으로 들어온 이는 과연 하화련이었다. 그녀는 이미 세수를 마치고 산뜻하고 가벼운 비취색 저고리와 바지로 갈아입어, 한층 더 화사하고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굽혀 절을 올리며 말했다. “부궁주! 소녀가 오늘 밤 돌연히 들이닥치는 바람에 혹 부궁주의 호방한 흥취를 깨뜨린 것은 아닌지요?”

추오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 무슨 소리냐! 본 부궁주는 그저 주인의 성의에 장단을 맞춰주었을 뿐이다.”

하화련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여로가 적적하실 터인데, 부궁주를 위해 소녀들이 시중을 들어드려야 하겠습니까?”

추오상이 얼른 손을 휘저으며 제지했다. “하희! 내가 궁에 있을 때도 너희에게 이 일만큼은 입에 올리지 말라 엄히 일렀거늘, 벌써 잊었단 말이냐?”

하화련이 애틋한 어조로 말했다. “지난날 부궁주께서는 오직 해희만을 총애하셨기에 소녀들은 감히 총애를 다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해희가 세상을 떠났으니, 소녀들은...”

추오상이 나지막이 꾸짖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본 부궁주는 너희 네 검희를 한결같이 똑같이 대했거늘, 어찌 홀로 해옥환만을 특별히 총애했다는 말이냐?”

하화련이 말했다. “하지만 해희는 생전에 저희에게 방 안에서의 은밀한 정취를 매번 아주 자세하고 생생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추오상이 분연히 말을 가로채며 내뱉었다. “그년이 제멋대로 입을 놀려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니, 진정 죽어도 싼 자로다.”

하화련이 아연해하며 물었다. “부궁주께서는 정말로 해희와 한 번도...”

추오상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본 부궁주가 너희에게 거짓을 고한다고 생각하느냐?”

하화련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일이 무척 기이해집니다. 소녀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부궁주께서 해희의 방에 묵으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추오상이 놀라며 반문했다. “무엇이랏? 네가 친히 본 부궁주가 밤마다 해옥환의 방에 드는 것을 보았단 말이냐?”

하화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당초 해희가 부궁주의 은총을 입었다고 자랑하는 말이 제 몸값을 높이려는 허풍인 줄 알고 남몰래 훔쳐보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부궁주께서 밤마다 해희의 방에서 유숙하시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일은 비단 소녀뿐만 아니라 하희(何姬, 하용미)와 맹희(孟姬, 맹채옥) 역시 여러 번 목격한 바 있습니다!”

추오상은 가슴속으로 거대한 충격을 받고 멍해졌다. 그는 급히 손을 저으며 분부했다. “가서 하용미와 맹채옥을 이리로 불러오너라.”

눈 깜짝할 사이에 ‘국희’ 하용미와 ‘죽희’ 맹채옥이 나란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추오상이 세세하게 심문해 보니, 두 사람의 자백 역시 ‘난희’ 하화련이 말한 바와 털끝만치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추오상이 벼락같이 매서운 목소리로 외쳤다. “밤마다 해옥환의 방에 들어 유숙한 자는 단연코 본 부궁주가 아니다. 필시 다른 자가 있었던 것이다!”

세 검희가 일제히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입을 모아 물었다. “외부인은 궁 안으로 발을 들이기조차 어려운데, 궁 안의 사람 중 대체 누가 이토록 대담무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해희가 자결한 것에도 커다란 의문이 남는구나. 너희는 궁에 있을 때, 어찌하여 본 부궁주에게 너희가 본 바를 고하지 않았더냐?”

하화련이 말했다. “소녀들이 어찌 감히 부궁주와 해희 사이의 은밀한 방 안 사정까지 참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내 평소 주도면밀하게 살피지 못한 탓이로구나. 명심하거라. 궁으로 돌아간 뒤에는 그 누구에게도 이 일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본 부궁주가 반드시 이 일의 내막을 철저히 파헤쳐 물 가르고 돌 가르듯 밝혀낼 것이다.”

하화련이 물었다. “저희가 당장 궁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추오상이 말했다. “금릉에서 아직 수일간 더 머물러야 할 듯하나, 머잖아 결국은 궁으로 돌아가야 할 터이니 너희는 그저 기억해 두기만 하거라.” 어조를 잠시 멈추더니, 그는 다시 캐물었다. “떠나올 때, 궁주께서 따로 당부하신 다른 일은 없었더냐?”

하화련이 말했다. “궁주님의 어조로 보아, 부궁주께 거는 기대와 신망이 대단히 두터우신 듯 보였습니다. 본래는 풍(風), 화(花), 빙(氷), 설(雪) 네 검희까지 추가로 대동해 보내려 하셨으나, 혹여 부궁주께서 자신을 감시하려는 의도로 오해하실까 염려하여 저희 셋만 보낸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희에게 부궁주의 생활 기거를 정성껏 보살피라고 몇 번이고 당부하셨습니다.”

추오상이 감개무량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토록 두터운 은애를 입었으니, 오직 목숨을 바쳐 보답할 길뿐이로구나...” 어조를 바꾸어 그가 다시 물었다. “해 낭자의 장례는 잘 치러주었느냐?”

하화련이 말했다. “이미 장지를 정해 묻어주었습니다. 궁주께서는 부궁주께서 궁으로 돌아오시는 대로 따로 적당한 인물을 새로 선발하여, 해희의 빈자리를 채우려 하십니다.”

‘국희’ 하용미가 말을 거들었다. “부궁주께 아룁니다! 해희가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던 날, 그녀를 수종 들던 시녀 한 명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추오상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아!”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화련이 다시 보충하여 말했다. “시녀가 사라진 것은 필시 해희가 독을 마신 사건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궁주께서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추적하셨으나 아직 붙잡지 못했습니다. 다만 사후에 따져보건대, 도망친 시녀가 해희에게 강제로 독주를 마시게 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추오상이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물었다. “그 시녀의 나이가 어찌 되느냐?”

하화련이 나머지 두 검희를 바라보았으나, 그녀 역시 이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죽희’ 맹채옥이 나서서 대답했다. “올해 열아홉으로 해희와 동갑내기이며, 궁에 들어온 지는 이미 4년이 되었습니다.”

추오상이 또 물었다. “홍짐새의 독(?酒)은 단 한 모금으로도 기절 초풍할 극독인데, 해희가 그것을 어디서 구했단 말이냐?”

하화련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이 점은 부궁주께서도 혹 모르실 수 있겠습니다. 궁주님 곁의 여덟 검희와 부궁주님 곁의 네 검희는 처음 입궁할 당시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적들의 손에 떨어질 경우 정조를 지키고 자결할 수 있도록, 각자 ‘홍짐(??)’ 한 알씩을 하사받았습니다.”

추오상이 돌연 안색을 싹 바꾸며 말했다. “원래 그러했단 말이냐! 만약 열두 검희 중에 딴마음을 품은 자가 있어, 감히 궁주님이나 본 부궁주를 독살하려 든다면 이보다 더 손쉬운 방책이 어디 있겠느냐?”

세 검희가 황급히 일제히 소리쳤다. “소녀들이 어찌 감히 그런 대역무도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추오상은 속으로 단비우의 이러한 조치가 극히 부당하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단비우는 자신에게 이 일에 대해 일절 언급한 적이 없었으니, 대체 그 속뜻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는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너희가 하사받은 홍짐은 지금도 몸에 지니고 있느냐?”

세 검희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고 지니고 다닙니다.”

추오상이 또 물었다. “궁주께서 친히 내리신 것이냐?”

하화련이 얼른 가로채 대답했다. “저희가 궁주님의 면접을 거쳐 선발이 확정된 후, ‘용희(龍姬)’ 언니를 통해 하사받았습니다.”

추오상의 마음속에는 의혹의 구름이 겹겹이 피어올랐으나, 그는 일부러 농을 던지듯 쾌활하게 말했다. “부디 너희가 그 홍짐을 본 부궁주의 음식이나 술 속에 넣지 않기를 바란다. 본 부궁주는 독주를 마셔 갈증을 채우는 비참한 꼴(??止渴)은 당하고 싶지 않구나!”

세 검희가 동시에 말했다. “소녀들은 결코 그리하지 못합니다.”

추오상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밤이 깊었구나! 너희는 가서 쉬어라! 남은 이야기는 내일 다시 나누자!”

세 검희는 번갈아 절을 올린 뒤 방을 물러나갔다.

추오상은 불을 끄고 옷을 입은 채 침상에 누웠으나, 이리저리 뒤척일 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홍짐에 얽힌 의구심에서부터 해옥환의 자결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치가 서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한 줄기 밤바람이 얼굴을 휙 스치고 지나갔다. 추오상이 번쩍 눈을 떠 보니, 언제 열렸는지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추오상의 이목은 본래 대단히 영민했으나, 방금은 단 한 터럭의 기척도 듣지 못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창밖의 인물은 무공이 필시 보통을 뛰어넘는 절정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그가 가슴이 서늘해져 깜짝 놀란 바로 그 순간, 창밖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번쩍하며 안으로 날아들어 왔는데, 땅에 내려앉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추오상은 급히 몸을 움직이지 않고 누운 채 동태를 살폈다. 그의 손에는 언제 어디서나 왼쪽 옆구리 밑에 바짝 붙여둔, 길이가 한 자 여덟 치에 불과한 단검 ‘사절검(四??)’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상대가 창문을 넘어 들어온 목적이 대체 무엇인지 끝까지 지켜볼 참이었다.

그 검은 그림자는 창문 앞에 잠시 묵묵히 서 있더니, 별안간 몸을 날려 나무 침상을 향해 벼락같이 덮쳐왔다. 그 기세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맹렬하고 빨랐다.

만약 상대가 암살을 하러 온 자라면 통상 발소리를 죽여 가며 침상 앞으로 서서히 다가와 기회를 엿보아 손을 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자는 결코 그런 법도 없이 곧장 몸을 날려 전력으로 덮쳐왔으니, 하마터면 추오상조차 손을 쓰지 못하고 당할 뻔했다. 추오상은 미처 몸을 튕겨 일으킬 시간조차 없어, 옆구리의 사절검(四絶劍)을 뽑아 드는 동시에 번개처럼 침상 밑으로 몸을 굴려 굴러 내렸다.

“카강!”

날카로운 쇠붙이가 부딪치는 굉음과 함께, 추오상의 손에 쥔 단검이 상대의 병장기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동시에 “찌르륵!” 하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리며, 그의 옷자락 앞섶이 상대의 서슬 퍼런 칼날에 베여 길게 찢겨 나갔다.

이 찰나의 접전 속에서 추오상은 상대가 양손에 각각 한 자루씩의 예리한 비수를 쥐고 있음을 즉시 알아차렸다. 신형은 나비처럼 날랬고, 초식은 더없이 괴이하고 음험했다.

추오상이 바닥에 착지하여 미처 중심을 잡기도 전에, 상대는 마치 마귀의 환영처럼 다시 소리 없이 감싸 안듯 밀려들었고, 두 줄기 차가운 검기가 그의 양쪽 옆구리를 곧장 꿰뚫어 올 기세로 압박해 왔다.

추오상의 검법으로 말하자면, 부친의 철필 초식을 기반으로 삼아 변형시킨 것에 더해,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스승 밑에서 무려 10년 동안 친히 전수받은 비장의 무공이었다. 두 가문의 절학 중 장점만을 골라 융합해 만든 그의 ‘선풍검법(旋風劍法)’은 그 서슬 퍼런 날카로움이 천하를 뒤흔들 만하여, 무림에서 검성(劍聖)이라 칭송받는 단비우(單飛宇)조차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절예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단 두 차례의 공방이 오가는 동안 단 한 초식도 반격해 내지 못했으니, 추오상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경악하여 얼어붙은 찰나, 그 두 줄기 서슬 퍼런 살기가 이미 그의 몸을 베어 가르기 직전까지 육박했다.

추오상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부득이하게 ‘선풍검법(旋風劍法)’ 중 가장 맹렬하고 살벌한 초식인 ‘절명광표(絶命狂飄)’를 전개했다.

“카가강! 캉! 캉!...”

연속해서 쇠붙이가 부딪치는 격렬한 격탁음이 귓전을 때렸다. 상대는 그 매서운 기세에 밀려 창가 쪽으로 훌쩍 물러섰고, 추오상 역시 그 틈을 타 신형을 번쩍 탄력 있게 일으켜 세웠다.

그때 홀연히 또 다른 인영 하나가 창문을 통해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들더니, 한 줄기 차가운 검기를 휘두르며 자객의 목덜미를 향해 무섭게 감아쳐 갔다.

추오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이 하화련임을 알아차렸으나, 그녀가 괴한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직감하고 급히 외쳤다. “하희, 물러서라!”

그러나 그의 외침은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먼저 “깡!” 하는 둔탁한 쇠붙이 소리가 울리더니, 연이어 하화련의 가냘픈 “아윽!”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객 역시 다른 무리들과 엉켜 장기전을 벌이는 것을 꺼렸는지, 지체 없이 다시 창문을 뛰어넘어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화련이 부상을 입었기에 추오상 역시 무리하게 자객의 뒤를 쫓을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불씨를 당겨 등잔을 밝힌 뒤, 하화련의 부상 상태를 살폈다.

하화련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가 격투 소리를 듣고 급히 몸을 일으켜 적을 맞이했는지, 몸에 달라붙는 얇은 저고리와 바지 차림이었다. 보니 왼쪽 다리의 바지관이 칼날에 찢겨 나가 있었고, 새하얀 옥 같은 다리 위로 붉은 핏줄기가 길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추오상이 목소리를 낮추어 다정하게 물었다. “하희! 상처가 깊으냐?”

하화련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저 살갗이 조금 베인 경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 자의 초식이 정말 귀신처럼 빠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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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팔영문 | 작성시간 26.06.12 몸이 불편하심에도 좋은 글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기 바라옵고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 작성자영영 | 작성시간 26.06.15 감사합니다~~
  • 작성자강태공 | 작성시간 26.06.16 감사합니다,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 작성자바다사랑 | 작성시간 26.06.17 즐독
  • 작성자서생제갈유 | 작성시간 26.06.18 늙어가면 어쩔수 없다지만, 저도 요즘 전립선에 협착증에, 혈압, 당뇨까지 더해서 매주 병원에 드나드는 것 같습니다. 건강이 최고인데, 조속히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즐겁게 작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늙어가는 마당에 건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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