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 九 回. 음성양쇠(陰盛陽衰).... 음양이 전도되다. >
황금빛이 도는 한 줄기 빛이 검자루를 둘러싸고 반 바퀴를 돌더니, 이내 되돌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금령은 다시 양계령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양계령의 위치에서 검자루에 단단히 묶여 있던 붉은 비단 수건은 갈가리 찢겨 조각조각 분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추오상은 상대가 갑자기 살수(煞手)를 쓰지는 않을 것이라 짐작했기에, 금령이 손을 떠나 자신을 향해 날아올 때 거의 눈꺼풀 하나조차 깜짝하지 않았다. 신형 또한 미동도 하지 않았으니 정력(定力)이 과연 대단했다. 그러나 상황이 이리되니 그 역시 내심 크게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강호무림에서 일찍이 신기한 기예로 회전 표법(?法)을 펼치는 자를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암기는 대개 꼬리 부분에 얇은 회전 바퀴가 장착되어 있어, 그 바퀴가 회전하는 힘을 빌려 암기를 갔다 되돌아오게 만드는 법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양 씨 성을 가진 낭자가 날린 것은 사람 주먹만 한 크기의 금령이거늘, 어찌 이것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만든단 말인가?
게다가 금령에는 칼날이 없거늘, 또 어찌 검자루 부분의 비단 수건을 단숨에 마디마디 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을 겪고 나니, 추오상이 내심 경악하고 기이하게 여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양계령은 금령을 거두어들인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본 낭자가 너를 대신해 검을 봉했던 비단 수건을 끊어주었으니, 어서 검을 뽑아라!”
추오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추 모는 방금 말했듯이, 결코 약속을 경솔히 깨뜨리지 않는다.”
양계령의 눈망울이 번뜩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 낭자가 다음번에 손을 쓰면, “탈명금령”은 필시 네 인후를 향해 날아갈 것이다. 그때는 네가 검을 뽑으려 해도 이미 때가 늦을 것이다.”
추오상이 말했다.
“칠칠사십구 일의 봉검 약조가 다 차지 않았으니, 이 추 모는 절대로 약속을 어기고 검을 움직이지 않는다.”
양계령은 단숨에 안색이 차갑게 굳어지며 매섭게 호통쳤다.
“참으로 어조가 대단하구나, 본 낭자가 한 번 시험해 보겠다...”
말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두 손목이 이미 치켜 올라갔다.
이때 문득 문밖에서 시녀 하나의 목소리가 외쳤다.
“낭자께 아뢴다! 어떤 소(蕭) 씨 성을 가진 낭자가 방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이 한마디 보고에 양계령의 두 손목이 문득 아래로 뚝 떨어졌고, 고운 몸을 풍차처럼 급히 한 바퀴 돌리더니 이내 문가로 다가가 날쌔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문밖에는 소월매가 서 있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탈혼금령(奪魂金鈴)”의 소리를 듣자마자 방가(芳駕)께서 오신 줄 알았더니, 과연 틀림없구나.”
말을 마치고는 제멋대로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방문을 닫아걸더니, 도리어 창문을 활짝 밀어 열었다.
양계령의 두 줄기 눈빛은 마치 예리한 검과 같아서 소월매의 얼굴을 연신 훑어 내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누구인가?”
소월매가 가볍게 읍하는 자태로 인사를 건네며 웃으며 대답했다.
“이 누이는 소월매라 한다.”
양계령이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 낭자는 너를 알지 못한다. 묻겠는데, 네가 이 방에 들어온 것은 저 추 씨 성을 가진 자를 찾기 위함인가, 아니면 본 낭자를 찾기 위함인가?”
소월매는 웃음기를 싹 거두고 말투를 한 번 가라앉히며 말했다.
“자연히 방가, 바로 당신을 찾기 위함이다.”
양계령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냉소했다.
“본 낭자를 찾다니, 무슨 일이 있는가?”
소월매가 말했다.
“이 누이는 추 부궁주와 칠칠사십구 일 동안 검을 봉하기로 약조한 바가 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계령이 말을 가로챘다.
“흥, 원래 너였구나!”
소월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확히 이 누이다. 그리하여 특별히 와서 한마디 일러두려 하는데, 방가께서는 추오상에게 약속을 깨고 검을 움직이라 그리 다그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어가자, 눈동자 속에서 저 깊고 푸른 정광(精光)이 서서히 떠올랐다. 양계령은 저도 모르게 내심暗暗이 멈칫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비로소 물었다.
“네가 방에 들어온 것이 오직 본 낭자에게 이런 말들을 전하기 위함이었단 말인가?”
소월매가 말했다.
“방가께서는 이 누이가 기회를 틈타 싸움을 걸려는 의도로 오해하지 말라. 다만, 이 누이가 이미 추 부궁주와 검을 봉하기로 약조를 맺은 이상! 그가 약속을 지키는 날 동안은 이 누이가 전력을 다해 그의 안전을 도모해야 마땅하다.”
양계령이 아름다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참으로 호기가 대단하구나...”
말투를 한 번 꺾으며 이어 말했다.
“만약 본 낭자가 정녕 저 추 씨 성을 가진 자를 죽이려 든다면, 아무래도 네가 온전히 지켜내기란 어려울 것이다.”
소월매는 방에 들어온 이래로 분홍빛 뺨에 단 한 번도 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이때 역시 여전히 지극히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가께서 진정으로 추 부궁주를 사지에 몰아넣으려 하시는가?”
양계령이 말했다.
“그것은 본 낭자의 일이니, 구태여 물을 필요 없다.”
소월매의 안색이 저도 모르게 가라앉으며 말했다.
“수년 동안 양가의 “탈명금령”이 줄곧 강호를 횡행했으니, 방가께서 이토록 매서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 누이가 이미 큰소리를 쳤으니, 추 부궁주의 안전을 수호하기 위해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야 하겠다. 방가께서는 먼저 이 누이에게 초식을 펼쳐보아도 좋다.”
양계령이 신형을 한 번 떨더니, 소월매에게 등을 돌린 채 한 글자 한 글자 마치 금석을 두드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 낭자는 가모(家母)의 명을 받들어 강호를 행도하고 있으니, 결코 이름 없는 피라미들과는 초식을 겨루지 않는다. 네 성명을 대라.”
소월매가 말했다.
“이 누이는 성은 소 씨이고 이름은 월매라 하니, 방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미 말한 바 있다.”
양계령이 말했다.
“그 세 글자는 무게가 부족하다.”
소월매(蕭月梅)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방가께서는 몸을 돌려 한 번 살펴보시는 게 어떠하겠는가?”
양계령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가, 내심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지켜보니 소월매는 왼손 바닥을 뒤집어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펼쳤고,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오직 단 하나의 손가락만을 위로 세우고 있었는데, 두 줄기 눈빛에서 사람의 심백을 뒤흔드는 위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양계령은 내심 놀란 와중에도 이내 마음을 다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원래 “지장쌍절(指掌雙絶)”의 후인이었구나, 어쩐지 장담하는 어조가 이토록 크다 했다.”
추오상 역시 그 소리를 듣고 내심 깜짝 놀라며 속으로 헤아렸다.
‘“지장쌍절”의 후인이 나와 우리 추문(秋門) 사이에 무슨 깊은 원한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는 일찍이 “지장쌍절”이 당년에 무림을 호령하던 일은 들은 적이 있었으나, 양가의 “탈명금령”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 마음속에 은근히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려는 염두가 생겨 두 사람의 동태를 주시했다.
소월매는 두 백옥 같은 손목으로 각각 “매화장(梅花掌)”과 “일지한(一指寒)”의 기수식을 선보였고, 눈앞에서 이미 상대를 위압하는 효과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 이에 저도 모르게 눈 속의 차가운 눈빛을 거두어들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 씨와 양 씨 두 가문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으니, 조만간 서로의 무예를 절차탁마하는 날이 오긴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와 이 경지에서는 적절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 누이는 방가께서 즉시 떠나시는 편이 가장 좋다고 권하는 바다.”
양계령(楊桂玲)의 신색이 엄숙해지며 방금 전의 오만한 기색은 이미 사라졌으나, 그렇다고 두려워하거나 위축된 태도 역시 보이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하여 지금은 손을 쓰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인가?”
소월매가 말했다.
“지금 손을 쓰는 것은 명분이 없는 싸움이라 할 수 있으니, 소 씨와 양 씨 두 가문의 명성에 흠이 갈 뿐이다.”
양계령이 냉소하며 말했다.
“네 어조를 들어보니, 명백히 싸움을 두려워하는구나.”
소월매의 안색이 문득 가라앉으며 말했다.
“방가께서 기어이 그리 말씀하시니, 이 누이가 가르침을 받겠다.”
양계령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 낭자가 이번에 금릉에 온 것은 바로 이름난 인물들과 초식을 겨루기 위함이니, 자연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본 낭자를 상대로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른손목이 문득 치켜 올라갔다.
바로 이때, 한 줄기 인영이 창문을 뚫고 들어왔는데, 그 속도가 흡사 하늘가에서 유성이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빨랐다.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소월매의 외조모인 “매화선자(梅花仙子)” 유예향이었다. 소월매는 지독한 고질병을 앓아 무공을 상실한 상태였기에, 그저 빈 초식을 내보이며 사람을 겁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저 “금령이”가 기어이 한 번 시험해 보려 드니, 유예향으로서는 부득이하게 직접 나서서 그녀를 보살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월매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한발 먼저 창문을 밀어 열어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양계령은 치켜들었던 두 백옥 같은 손목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늙은이! 너는 누구인가?”
유예향(兪蘂香)이 흰 눈썹을 치켜세우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노신은 “매화선자” 유예향이라 한다.”
양계령이 두 눈을 부릅뜨고 냉소했다.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라 할 만하구나...”
말투를 한 번 멈추더니 이어 말했다.
“네가 네 외손녀와 연수하여 본 낭자를 상대하려는 것인가?”
그녀의 오만한 말과 미친 태도에, 곁에서 싸움을 관망하던 추오상과 하용미, 맹채옥 두 시녀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유예향은 더더욱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매서운 목소리로 호통쳤다.
“미천한 계집년이 어찌 이토록 창광하게 구는가! 그러지 않으면 이 노신이 손을 써서 무정하게 다스릴 것이다!”
양계령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늙은이는 상황을 똑똑히 파악해라. 본 낭자는 소월매 낭자와 한 번 만나 양 씨와 소 씨 두 가문의武功 절학을 인도(印證)하려는 것이니, 너는 저쪽으로 비켜서라.”
유예향은 뒷머리에 하얗게 세어 땋은 머리비녀가 분노로 끊임없이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기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월매는 한 손으로는 친가의 ‘매화장(梅花掌)을 익혔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소가의 독문무공인 ‘일지한’을 익혀 몸에 ‘지장쌍절’이라는 두 가지 경세무공을 품고 있다. 너 같은 젖비린내 나는 노란 주둥이의 어린 계집년 따위는 그녀와 초식을 겨룰 자격조차 없다. 네가 만약 살날이 지겨워졌다면, 이 노신의 이 몇 초식 ‘매화장’만으로도 대접하기에 충분하다. 미천한 계집년아, 덤벼라!”
매화선자 유예향은 매화장을 연구하고 창시하여 무림에 명성을 떨쳤고, 한 쌍의 육장(肉掌)으로 흑백양도의 영웅호걸을 얼마나 많이 꺾었는지 모를 분이었으니, 단지 그 많은 나이를 차치하고라도 이토록 당당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 결코 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계령의 얼굴에는 도리어 추호의 두려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냉랭하게 말했다.
“본 낭자는 약자를 기만하고 노인을 능멸했다는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어서 비켜서라. 그러지 않으면 본 낭자가 먼저 네 한쪽 팔을 부러뜨릴 것이다.”
유예향은 그만 발끈하여 미친 듯이 분노하며 매서운 목소리로 호통쳤다.
“참으로 생사를 모르는 미천한 계집년이구나, 장을 받아라...”
‘장(掌)’ 자가 채 입술 끝에서 다 굴러가기도 전에 신형이 이미 폭발하듯 전진했고, 두 장을 문득 치켜들며 휙휙 연달아 두 장을 내뻗었다.
곁에 서 있던 추오상의 눈에는 마치 한 그루의 매화나무에서 갑자기 꽃잎이 분분히 떨어지듯, 무수한 장의 형태가 두 줄기 예리하고 강경한 장풍을 머금은 채 양계령의 신형을 향해 휘감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지켜보니 유예향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당년보다 더욱 위풍당당했다.
양계령은 당황하지 않고 그 두 줄기 장풍이 몸에 들이닥치기 직전을 기다렸다가, 돌연 신형을 반쯤 굽히며 두 손목을 문득 위로 치켜 올렸다. ‘깡’ 하는 단 한 번의 파공음과 함께 두 사람은 부딪치자마자 즉시 갈라졌고, 그 강인한 두 줄기 장풍은 이내 무형으로 화해 사라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여기에는 자연히 저 매화선자 유예향도 포함되어 있었다.
양계령이 냉소하며 말했다.
“너의 그 성명한 지 오랜 ‘매화장’은 아무래도 본 낭자와 초식을 겨루기에는 격이 부족한 듯싶구나. 안타깝게도 네가 ‘일지한’을 펼치지 못하니, 역시 소 낭자더러 그녀의 그 ‘지장쌍절’의 재간을 선보이게 해라!”
유예향은 눈앞의 이 어조가 오만한 노란 주둥이의 어린 계집년을 대함에 방심하지 않았기에, 한 번 손을 쓰자마자 매화장의 살초인 ‘매오한상(梅傲寒霜)’을 펼쳤으나 도리어 호리만큼의 공효도 거두지 못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내심 경악하는 와중에도 급히 마음을 다잡고 신광을 모아, 오른손 바닥으로 가볍게 ‘매압군방(梅壓群芳)’의 초식을 펼쳐 냈다.
양계령은 그것을 눈에 담으며 저도 모르게 한 차례 냉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냉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유예향이 돌연 왼손 바닥을 뒤집으며 번개처럼 변화가 기이하고 오묘하기 그지없는 ‘매화삼도(梅花三度)’를 펼쳐 냈다.
즉시 세 줄기의 장풍이 세 군데의 서로 다른 방향에서 양계령의 신형을 향해 집중적으로 휘감아 들어갔다.
양계령이 비록 나이가 젊고 신태가 광오했으나 영락없이 안목이 있는 전문가였기에, 내심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몸을 가라앉히고 기운을 토해 소리를 질렀다. 금령을 흔들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두 손목을 문득 위로 치켜들자, 두 개의 금령이 맹렬히 손을 떠나 날아가며 유예향을 습격했다.
그 두 개의 금령은 하나는 ‘천령(天靈)’을 향해 달렸고 하나는 ‘선기(琁璣)’를 노리며 번개처럼 빨라, 흡사 만균의 기세를 머금은 듯했다.
소월매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양계령의 내력을 단숨에 알아맞힐 수 있었으니, 자연히 유예향 역시 이 한 쌍의 금령이 지닌 위력을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금령이 손을 떠나 날아오는 것을 보며 내심 암암리에 경련했고, 급히 초식을 거두고 기세를 가라앉히며 신형을 한 번 꺾었다. 허리를 틀어 맹렬히 회전하며 여덟 자 남짓 미끄러져 나가고서야 겨우 아슬아슬하게 피해 낼 수 있었다.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금령은 다시금 양계령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양계령의 미색이 지극히 염려한 분홍빛 뺨 위로 돌연 한 줄기 냉혹한 기색이 나타났고, 두 줄기 눈빛 역시 사람을 찌르는 예리한 칼날 같았으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이, 이번 한...”
‘초(招)’ 자가 아직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푸른 빛 한 줄기가 번뜩이며 순식간에 도달하더니 양계령의 면전에 한 명의 남삼(藍衫) 소년이 뚝 섰다.
원래 접선(折扇)을 온종일 손에서 놓지 않던 주성한이었다.
양계령이 아름다운 눈을 부릅뜨고 매섭게 꾸짖었다.
“주 씨 성을 가진 자여, 너 역시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니 필시 저 늙은이와 한패인 모양이구나?”
주성한은 신정이 약간 멍해졌다가 이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낭자는 어찌하여 이 사람을 알아보는가?”
양계령이 냉소하며 말했다.
“일대의 의성(醫聖) 주소천(朱嘯天)의 후인을 본 낭자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게다가 요 이틀 동안 네가 쓸데없는 참견을 많이 하여 이미 금릉성 안의 풍운인물이 되었으니...”
말투를 한 번 가라앉히며 이어 말했다.
“네가 만약 본 낭자의 일에 참견하려 든다면, 스스로 멋쩍은 꼴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이 한바탕 말이 비록 이상할 정도로 듣기 거북했으나, 양계령이 주성한에 대해서는 제법 분수를 지키며 상대의 목숨을 앗아가겠다는 등의 허풍을 경솔하게 내뱉지 않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주성한은 이 몇 마디 말에 노여워하지 않고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참견을 하더라도 나름의 분촌이 있으니, 낭자께서는 부디 오해하지 말라...”
말투를 한 번 멈추더니 이어 말했다.
“묻겠는데 낭자, 어찌하여 매화선자와 손을 쓰며 싸우게 된 것인가?”
양계령이 손을 들어 소월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몸을 던져 제 외손녀를 비호하려 들었다.”
주성한이 말했다.
“낭자는 어찌하여 소 낭자와 손을 쓰려 했는가?”
양계령이 말했다.
“그녀가 추오상을 비호하려 했기 때문이다.”
주성한(朱星寒)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 낭자는 추 형을 찾으러 온 것이었구나, 무슨 까닭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양계령이 탁자 위에 놓인 그 고백(告白)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직접 보아라!”
주성한은 두동돈의 명의로 적힌 그 고백을 읽고는 내심 저도 모르게 생각이 움직였으나, 표정에는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미소를 살짝 지으며 말했다.
“낭자는 저 황금 일천 냥의 무거운 상금을 탐내는 것인가?”
양계령이 두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우스운 소리 마라! 본 낭자는 가재가 만관이거늘, 금은보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주성한이 일부러 눈썹 끝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것참 기이하구나! 상금을 탐하는 게 아니라면서, 어찌 추 형을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가?”
양계령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너는 똑똑히 들어라! 또한 본 낭자 역시 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절검’이 어느 정도까지 대단한지 견식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주성한이 눈동자를 한 번 굴리며 말했다.
“낭자는 이 사람이 방자한 말을 몇 마디 하는 것을 들을 용의가 있는가?”
양계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말해 보아라! 다만 네가 본 낭자의 성미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주성한은 그녀의 매서운 언행을 웃음으로 넘겨버리고는, 이내 숙연한 안색과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보천(保川) 팔괘평(八卦坪)의 양가보(楊家堡)에는 본래 세 가지 절예(三?)가 있으니, 가문의 낭자들이 저마다 절색(?色)인 것이 그 첫째다...”
양계령이 말을 가로챘다.
“네 말재주가 아주 영리하구나. 일러두는데, 본 낭자는 그런 수작에 넘어가지 않는다.”
말투는 비록 차가웠으나 눈 속에는 도리어 요염한 기색이 서렸으니, 주성한의 찬사 어린 말이 어쨌든 그녀의 마음에 매우 흡족했던 모양이었다.
주성한이 또 말했다.
“양가보의 낭자들은 결코 시집을 가지 않고 사내들을 오직 데릴사위로 맞아들이며, 모든 주권이 여방(女方)의 손에 있어 자녀들이 모두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것이 그 둘째 절예다.”
양계령의 안색이 다시금 가라앉으며 말했다.
“너 주 씨 성을 가진 자가 아는 것이 제법 많구나.”
주성한이 미소를 살짝 지으며 말했다.
“이 세 번째 절예라 하면, 마땅히 귀보의 독문무공인 ‘금령(金鈴)’을 꼽아야 할 터인데, 참으로 비범하게 대단하여 사람들이 보면 저마다 두려워한다고 들었다!”
양계령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득의양양한 기색이 흘러넘치며 말했다.
“그런 세 가지 절예가 있으니 어찌하겠다는 말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그런 세 가지 절예가 있으니 낭자가 자호(自豪)하기에 충분하다, 다만...”
말투를 한 번 멈추더니 이어 말했다.
“옥에도 티가 있는 법이다...”
양계령의 얼굴에 가득했던 득의양양한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매섭게 호통쳤다.
“주 씨 성을 가진 자여, 말을 흐리지 마라!”
주성한이 말했다.
“이 사람이 상세히 고할 터이니, 아울러 자리에 계신 낭자들께서도 너그러이 혜량해 달라...”
말투를 약간 가라앉히며 바른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낭자들은 누구나 고집이 있기 마련인데, 귀보의 낭자들은 세 가지 절예를 믿는 구석이 있으니 더더욱 교만하고 창광해지기 쉽다. 그리하여 행사가 비교적 임의롭고 경솔해지는 법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계령이 광오하게 호통쳤다.
“닥쳐라!”
주성한이 두 주먹을 모아 쥐며 말했다.
“이 사람이 스스로 방자함을 인정하고 사전에 이미 죄를 청한 바 있다.”
양계령은 두 아름다운 눈을 부릅뜨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본 낭자의 행사가 임의롭고 경솔하다고 하니, 그 말은 똑똑히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주성한이 손가락을 굽혀 손에 쥔 그 황표지 고백을 가볍게 두 번 튕기며 말했다.
“지금 이 일만 보더라도 낭자의 행위가 조금은 임의롭고 경솔하지 않은가?”
양계령이 말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해 보아라.”
주성한이 말했다.
“이 사람이 두동돈이 써 붙인 고백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반박해 보겠다...”
손을 들어 추오상을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추 형은 엄연한 ‘경천궁(擎天宮)’의 부궁주다. 설령 그 궁에서 불궤를 도모하여 무림을 위태롭게 하려는 거동이 있다 한들, 죄괴화수(罪魁禍首)는 마땅히 단飛宇(單飛宇) 궁주여야 할 터다. 그러니 저 무림의 거물이라는 네 글자는 어찌해도 추 형의 몸에 떨어질 수가 없다.”
양계령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계속 말해 보아라!”
주성한이 또 말했다.
“이른바 ‘사람을 위압하는 권세를 지닌 사절검’이라는 말은 더더욱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이자 과장된 수사다. 사절검은 검중의 보물이 아닐뿐더러, 추 형의 검법은 금릉성 안에서 단 한 번도 선보인 적이 없다. 묻겠는데, 두동돈은 대체 무엇을 근거로 ‘사람을 위압한다’는 평어를 썼단 말인가?”
양계령의 신색이 한결 부드러워지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뿐인가?”
주성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동돈은 이 고백에서 자신을 ‘나이가 많고 몸이 쇠약하다’고 칭했는데, 이는 명백한 위선이다. 이 사람이 알기로, 저 늙고 쇠약하다는 자는 수시로 진회하에 나타나 기생들과 노닥거리곤 한다. 또한 ‘문을 닫고 은거하여 빛을 감춘다’고 했는데, 낭자에게 묻겠다. 두동돈이 과거에 대체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기에 문을 닫고 반성한단 말인가? 그 노인의 ‘금도’ 한 자루가 제법 무게가 있고 심계 또한 깊은 편이긴 하나, 도리어 문묵(文墨)의 소양은 조금 떨어지는 듯싶다. 이 ‘도회(韜晦)’라는 두 글자는 쓰임이 심히 부당하나, 도리어 교묘하게도 그의 심병을 들추어냈다.”
양계령이 두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렇다면, 두동돈이 이토록 획책한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주성한이 한 글자 한 글자 마치 금석을 두드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취지는 바로 차도살인(借刀殺人)에 있으니, 낭자 역시 그 칼날 중 하나다. 그리하여 이 사람이 대담하게 낭자의 행사가 조금은 임의롭고 경솔하다고 말한 것이다.”
양계령이 안색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본 낭자는 네가 말한 차도살인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주성한이 말했다.
“두동돈과 추 형 사이에 무슨 혐극이 있는지 이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추 형이 금릉에 온 이래로, 두동돈은 이미 몇 차례나 함정을 파서 추 형을 사지에 몰아넣으려 했으나 모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일을 아는 자는 비단 이 사람뿐만이 아니다. 그리하여 두동돈이 이 마지막 절초를 부린 것이다. 무림인들 중에 재물을 탐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지 몰라도, 이를 빌미로 명성을 떨치고 입신하려는 자는 널려 있다. 이리되면 추 형은 단 한 순간도 평안할 수가 없다. 만약 추 형이 진정으로 살해당한다면 그에게는 큰 우환을 제거하는 셈이니 황금 천 냥이 아깝겠는가? 반대로 추 형이 자신의 생명을 수호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사람을 죽이게 된다면,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어 피비린내 나는 업보의 빚이 쌓여갈 터다. 그리하여 결국 무림의 거물이라는 네 글자가 굳어지게 될 테니, 두동돈으로서는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이 한바탕 말은 비단 양계령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유예향과 추오상 두 사람조차 조금은 미혹되게 만들었다. 이해관계로 따지자면 주성한은 마땅히 수수방관해야 했으나, 도리어 몸을 던져 나와 세 치 혀로 효험을 보며 한 차례 간과(干戈)를 해소해 주었으니, 그에게는 뚜렷한 이익이 없었다. 반대로 필시 화를 자초하는 꼴이었는데, 유예향이 느끼기에 추오상이 냉정하게 관망하는 상황에서 주성한의 손에 든 접선 한 자루로는 단연코 양계령의 손에 든 저 ‘탈명금령’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 안의 일곱 사람 중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열두 줄기의 눈빛이 다시금 주성한의 몸으로 집중되었다.
돌연 문밖에서 둔탁하게 호통치는 소리가 전해졌다.
“무림의 거물 추오상은 나와서 답하라.”
주성한이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양 낭자! 두 번째 무리가 벌써 도착했으니, 오늘 이 객잔 안에서 필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모양이다.”
추오상은 신정이 침착했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이 추 모가 나가서 보겠다.”
양계령이 고운 팔을 쓱 펼치며 말했다.
“멈추어라! 너는 설마 약속을 깨고 검을 움직이려는 것인가?”
추오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추 모는 설령 몸이 부서지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약속을 어길 염두는 없다.”
양계령이 말했다.
“예리한 검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설마 네 그 한 쌍의 육장으로만 상대하겠다는 말인가?”
추오상이 말했다.
“이 추 모가 비록 장법의 공력은 부족하나, 도리어 손가락으로 검을 대신해 볼까 한다.”
양계령이 말했다.
“손가락으로 검을 대신해 보아야 겨우 삼 분의 공력밖에는 발휘하지 못할 터다. 그래 가지고는 길목을 막아서는 화적 떼 하나도 당해 내기 어려울 터인데, 무슨 수로 문을 두드려 소란을 피우는 자들과 교봉하겠단 말인가?”
하용미와 맹채옥이 동시에 외쳤다.
“낭자께서 마음 쓰실 필요 없다. 우리들은 검희의 신분으로서 마땅히 추 부궁주의 안전을 수호할 줄 안다.”
양계령이 싸늘하게 꾸짖었다.
“닥쳐라! 본 낭자는 너희 주군과 말하고 있으니, 말참견하지 마라.”
두 시녀는 분노를 얼굴에 띤 채 당장이라도 움직일 듯 굴었다.
추오상은 급히 두 시녀에게 제지하는 눈빛을 던진 후 말했다.
“그렇다면 이 추 모더러 방 안에서 욕설을 고스란히 들으며, 거북이처럼 움츠러든 채 나가지 말라는 말인가?”
양계령이 말했다.
“본 낭자가 너를 찾아온 첫 번째 사람임을 잊지 마라. 그러니 자연히 뒤늦게 온 자들이 도리어 위로 올라서는 꼴을 눈두고 볼 수 없다. 너는 그저 방 안에 가만히 머물러라. 바깥의 자들은 본 낭자가 가서 처분할 것이다.”
추오상 역시 뼈속까지 오만함이 박힌 인물이었기에 막 변백하려는데, 문득 주성한이 그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이 보였다.
단飛宇는 밀함에서 추오상더러 주성한과 적이 되지 말라 당부했었고, 게다가 두 사람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 가지 거래를 체결한 상태였기에, 추오상은 이때 주성한의 암시를 받아들이고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
양계령은 이때 이미 방문을 열고 문가에 버티고 섰다. 그녀의 몸 사잇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정원에 용모가 험악하고 체격이 다부진 거구의 사내 넷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마다 기괴한 병기를 손에 쥔 채, 여덟 줄기 눈빛을 일제히 문가에 선 양계령에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양계령은 냉정한 눈길로 쓱 훑으며 말했다.
“방금 여기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운 자가 누구인가?”
가장 앞에 서 있던 검은 얼굴의 대한이 말했다.
“우리 형제들은 무림의 거물 추오상을 찾으러 왔으니, 그더러 나와서 답하라 해라.”
양계령이 말했다.
“성명을 대라.”
검은 얼굴의 대한이 말했다.
“우리들은 장강사괴(長江四怪)라 한다.”
양계령이 말했다.
“너희들은 ‘금도’ 두동돈의 고백을 보고 찾아온 것인가?”
네 사람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렇다.”
양계령이 말했다.
“가서 두동돈의 목을 베어 오너라. 본 낭자가 황금 이천 냥을 상으로 내릴 터이니, 그자야말로 진정한 무림의 거물이다.”
네 사람이 하하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되면 개가 개를 물어 털만 날리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하하...”
양계령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지며 매섭게 호통쳤다.
“섬(蟬), 견(娟), 교(嬌), 아(娥) 네 시녀는 명을 들어라!”
회랑에 서 있던 네 시녀가 즉시 일제히 외쳤다.
“시녀들 대기한다!”
양계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괴의 한쪽 팔을 각각 부러뜨려 가벼운 징벌을 보여라.”
그녀가 몸을 돌리기 무섭게, 방 밖에서 이내 연달아 처참한 비명이 전해졌다. 사괴는 부상을 입은 채 달아났고, 청석판이 깔린 화단 길 위로 붉은 혈흔이 흘러내렸다.
양계령이 손을 한 번 저으며 말했다.
“세 분은 이만 가보셔도 좋다. 추오상의 봉검 약조가 다 차기 전까지는, 그 누구든 그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린다면 본 낭자가 손가락 하나를 잘라 배상할 터이니, 소 낭자는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소월매는 내심 암암리에 놀랐으나, 표정에는 도리어 평온하게 말했다.
“수고하셨다.”
말을 마치고는 유예향을 부축하여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주성한 역시 양계령과 추오상 두 사람에게 두 주먹을 모아 쥐며 인사를 건네고는, 긴밀히 그들의 뒤를 따라 추오상이 거처하던 그 상방을 걸어 나왔다.
회랑에 이르자, 유예향이 고개를 돌려 주성한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 방 안으로 들어와 함께 이야기하십시다.”
주성한은 고개를 끄덕여 뜻을 같이하고는, 그들을 따라 소월매가 임시로 머무는 규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유예향이 주성한을 가만히 한 번 바라보며 말했다.
“공자가 금릉에 온 것에는 대체 어떤 목적이 있는가?”
주성한이 웃으며 말했다.
“현재 금릉성 안에 발을 붙인 자치고 저마다 목적을 품지 않은 자가 없다. 다만 그 누구도 진짜 목적을 입 밖에 내어 말하려 하지 않으니, 선배께서도 구태여 물으실 필요가 없다.”
유예향이 말했다.
“공자가 방금 전 월매더러 잠시 금릉을 떠나라고 재촉한 언행으로 보아, 공자는 분명 음흉한 속내를 품고 있는 듯싶다. 그러면서도 도리어 공자가 직접 나서서 이 노신의 체면을 세워주며 싸움을 말려주었으니, 이 노신은 참으로 공자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주성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배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참으로 과분하다. 이 사람이 어찌 체면을 세워주었다는 말을 당하겠는가? 하물며 선배의 장법 공력은 심불가측(深不可測)하거늘, 저 양계령 낭자가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지 않았는가!”
유예향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저 찬사 어린 말을 듣기 좋아하나, 유독 이 노신은 그렇지 않다.
그 어린 계집년의 한 쌍 ‘탈명금령’은 실로 기괴하고 비밀스럽기 그지없었다. 만약 공자가 제때 나서주지 않았다면, 이 노신이 비록 그 계집년의 한 쌍 금령 아래 목숨을 잃지는 않았을지언정, 멋쩍은 꼴을 당하는 것만큼은 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주성한은 일부러 놀라는 기색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인가?”
소월매가 말참견을 하며 말했다.
“공자께서 만약 월매의 외조모가 패색을 드러내기 직전인 것을 보지 않으셨다면, 절대로 직접 나서서 참견하지 않으셨을 터다. 강약이 이토록 분명하거늘, 공자께서도 월매 외조모의 면면을 구태여 과하게 고려해 주실 필요는 없다.”
주성한이 숙연한 안색과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선자의 매화장으로 논하자면, 이 사람이 이미 몸소 겪어 보았으니 참으로 천변만화하고 위맹하기 이를 데 없어, 저 양 낭자보다 공력이 어찌 몇 배나 더 깊지 않겠는가. 다만...”
말투를 한 번 멈추더니 이어 말했다.
“저 양 낭자의 ‘금령칠보탈혼초(金鈴七步奪魂招)’는 도리어 기괴하고 비밀스러운 장기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선자의 그 당당하고 정대(正大)한 매화장이 도리어 펼쳐지기 어려운 형세가 되었던 것이다.”
유예향이 손을 한 번 저으며 말했다.
“더는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을 필요 없다. 이 노신도 내심 짐작하는 바가 있으니...”
말투를 한 번 가라앉히며 이어 말했다.
“이 노신이 묻고자 하는 것은, 공자가 어찌하여 과거의 원한을 마음에 두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주성한이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과거의 원한이라니, 어디에 그런 것이 있단 말인가?”
유예향이 말했다.
“어제 이 노신이 연달아 독수(?招)를 내뻗으며 공자를 사지에 몰아넣으려 했거늘, 이것이 과거의 원한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선자께서 분명히 여지를 남겨두셨으니, 그러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이미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겨 나갔을 것이다.”
유예향이 말했다.
“이 노신은 결코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오직 월매의 마음이 약해 너를 구했을 뿐이다.”
주성한이 말했다.
“설령 소 낭자가 선자의 장세를 가로막지 않았다 한들, 선자께서 이 사람을 정녕 사지에 몰아넣기까지야 하셨겠는가?”
유예향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것 역시 네 운수에 달린 일이었을 터다.”
소월매는 아무래도 그녀의 외조모가 더는 강한 체하는 말을 얹는 것을 원치 않는 모양이었기에, 급히 소리쳐 불렀다.
“외조모! 양인(?)께서는...”
유예향이 그녀를 한 번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투를 한 번 완화하며 말했다.
“공자, 저 양 씨 성을 가진 어린 계집년의 내의(來意)가 어떠해 보이는가?”
주성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하기 아주 어렵다...”
말투를 약간 가라앉히며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말했다.
“다만, 양가보가 최근 몇 년 동안 행해온 일들에 대해서는 선자께서도 필시 들으신 바가 있을 터이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예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가 도리어 제법 노련하구나. 저 어린 계집년이 금릉에 온 것이 분명히 불궤를 도모하기 위함임을 뻔히 알면서도, 도리어 직접 입 밖에 내어 말하려 하지 않으니, 저 계집년의 눈밖에 날까 두려운 것인가?”
주성한이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혀 더듬거렸다.
“이것이...”
소월매가 두 눈썹 끝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공자, 보아하니 월매의 외조모는 필시 이 객잔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모양이다.”
주성한은 그 말을 듣고 내심 어느 정도 기쁜 마음이 들었으니, 양계령이 도리어 그를 위해 아주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사로운 마음 한편으로는 은근히 부끄러운 감정 또한 일어났는데, 그가 유예향과 소월매의 안위를 걱정하여 떠나기를 재촉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함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소월매는 두 눈으로 주성한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분명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성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낭자께서 부디 심사숙고하시길 바라며, 이 사람은 더는 말을 얹기가 곤란하다.”
소월매가 고운 눈썹을 한 번 치켜뜨며 말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이 사람이 전에 낭자더러 잠시 금릉을 떠나라고 극력 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거늘,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권하는 것은 ‘남의 위기를 틈탄다’는 혐의를 기피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소월매가 고개를 연신 저으며 말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인가. 공자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주성한이 두 주먹을 모아 쥐며 인사를 건넸다.
“역시 낭자께서 스스로 주견을 세우시는 편이 좋겠다!”
소월매는 그녀의 외조모를 가만히 한 번 바라보고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월매의 외조모는 잠시 이 객잔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다만 금릉을 아주 떠날지 말지에 대해서는 다시 정세를 살펴본 뒤에 결정할 터인데, 한 가지 공자에게 탁부(託付)하고 싶은 일이 있다.”
주성한이 말했다.
“낭자께서는 얼마든지 분부해 달라.”
소월매가 말했다.
“저 양 낭자가 추오상을 찾아온 것은 상금을 탐한 것도 아니고, 기회를 틈타 명성을 떨치려는 것도 아니니, 필시 따로 목적이 있을 터다. 공자께서 부디 주의를 기울여 살펴봐 달라.”
주성한이 말했다.
“이 사람이 유념하겠다.”
소월매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말투 또한 아련하게 늘어뜨린 채 말했다.
“월매의 목숨은 저 한 토막 ‘용연오묵(龍涎烏墨)’에 기탁되어 있으니,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공자께서 능히...”
주성한은 내심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만약 말을 단정 지어 버렸다가 훗날 번복하기 어려워질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얼른 말을 가로채며 대답했다.
“이 사람이 마땅히 미약한 힘이나마 전력을 다해보겠다.”
소월매가 말했다.
“공자께서는 부디 월매의 절을 받아달라.”
말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고개를 숙여 절을 올렸다.
주성한은 연신 감당할 수 없다 말하며 급히 몸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피할 수 없었다.
유예향이 말했다.
“주 공자는 명문 세가 출신이니, 마땅히 군자의 약속은 한 번 뱉으면 무겁다는 것을 알 터다. 이 노신이 여기서 먼저 감사의 뜻을 표하겠다.”
주성한이 급히 답례를 올렸으나, 마음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아주 단단한 매듭이 하나 묶여버린 느낌이었다. 훗날 이 매듭을 풀려 들면 필시 커다란 번거로움을 겪어야 할 터였다.
소월매가 손을 한 번 저으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이만 돌아가 보아라. 잠시 후 월매가 가게를 떠날 때는 다시 작별 인사를 고하지 않겠다.”
주성한이 주먹을 모아 쥐며 말했다.
“두 분 모두 진중하시라.”
말을 마치고는 방문을 열고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화단 길 위의 혈흔은 이미 객잔 점소이에 의해 깨끗이 씻겨 나가 있었고, 회랑에 서 있던 네 시녀 역시 이미 간 곳이 없었다. 그러나 주성한의 내심은 이상할 정도로 명백했으니, 객잔 속에 숨겨진 살기(殺機)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겨 자신이 거처하는 상방으로 향하며, 금릉에 연달아 출현한 무림의 여걸들을 꼽아보니 도리어 십여 명에 달했다. 이는 참으로 반상(反常)적인 현상이었다. 무림에 두각을 나타내는 가인(嬌娥)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처럼 음성양쇠(陰盛陽衰)의 국면을 이룬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기에, 이는 주성한으로 하여금 정세가 극히 단순하지 않음을 은근히 느끼게 만들었다.
그는 일부러 자기 방을 지나쳐 들어가지 않고, 일직선으로 추오상이 묵고 있는 상방 앞까지 걸어갔다.
고개를 돌려 슬쩍 들여다본 그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원래 방문 위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하나 덧걸려 있었던 것이다. 설마...
그는 더는 지켜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여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방문을 밀어 열고 들어섰을 때, 내심 다시금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방 안에 그가 절대로 생각지 못한 인물이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바로 진회하 위의 ‘금취방(金翠舫)’ 주인인 서이우(徐二牛)였다.
서이우는 주성한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즉시 급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 소협, 먼저 방문을 닫아걸어 주십시오.”
주성한은 반대편 손으로 방문을 끌어당겨 닫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존경하는 분께서는 대체 어떻게 들어오신 것인가?”
서이우가 말했다.
“일이 급박하여 부득이하게 창문을 넘어 들어왔으니, 소협께서는 부디 너그러이 혜량해 주십시오.”
서이우의 신색을 지켜보니, 결코 남을 위협하기 위해 헛소리를 늘어놓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주성한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서이우가 먼저 주성한의 면전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 낭자가 살해당했습니다.”
주성한은 내심 저도 모르게 쾅 하고 충격을 받았고, 맑은 두 눈을 부릅뜨며 급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지금 무어라 말했느냐?”
서이우가 말했다.
“이 사람이 동 낭자와 약조가 있어 한참 동안 방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회음(回音)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 사람이 시험 삼아 방문을 밀어 보았더니, 도리어 방문이 손길을 따라 스르륵 열렸고, 동 낭자가 이미 침상(?榻) 위에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상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성한이 손을 한 번 저으며 말했다.
“가자! 이 사람을 데리고 가서 직접 확인해 보아야겠다.”
서이우가 손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
“소협께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십시오.”
주성한이 멈칫하며 말했다.
“어찌 된 일인가?”
서이우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 스스로 ‘냉검열장(冷劍熱掌)’ 동림수(?林修) 선배님과 안면을 트고 지내기에는 격이 부족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 선배님께서 무심코 이 이우의 목숨을 한 번 구해 주신 이래로, 도리어 동 선배님을 모시고 몇 년 동안 강호를 다녔으며, 그분의 과분한 총애를 받아 지기(知己)로 여겨졌거늘, 뜻밖에도 후에 추일장(秋日長)에게 살해당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주성한이 두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 낭자가 이미 살해당했거늘, 네가 어찌 이리 한가하고 한량 같은 소리를 늘어놓고 있단 말이냐...”
서이우가 손을 한 번 저으며 말했다.
“소협께서는 부디 이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말투를 약간 가라앉히며 이어 말했다.
"동 선배가 살해당하던 해에 동 낭자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더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자연히 이 고아를 기르는 중책이 이 사람의 어깨에 떨어졌다. 이 사람이 비록 무공에 약간 발은 담갔으나 밑바탕이 너무 형편없었다. 그리하여 백방으로 주선해 동 낭자를 화산 '구성궁'으로 보내 검술을 배우게 했다..."
주성한이 말을 받으며 물었다. "그게 언제쯤의 일인가?"
서이우가 말했다. "7년 전이다. 그때 동 낭자는 이미 열두 살이었다. 7년 동안 무예를 이뤄 올해 삼월에 화산을 떠나 여기 금릉으로 와서 이 사람을 찾아왔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진짜 동월매 낭자가 아닐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주성한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망연자실하게 말했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군."
서이우가 말했다. "동 낭자는 어릴 때 거의 이 사람의 손에 자랐고, 아홉 살부터 열두 살까지 또 이 사람과 3년을 함께 살았다. 이 사람은 동 낭자의 왼쪽 손목에 주사반점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금 전 이 사람이 방에 들어가 동 낭자가 살해당한 것을 발견하고, 급히 손목 맥박을 짚어보았으나 왼쪽 손목에 반점이 없었다. 그제야 이 여인이 동 낭자가 아님을 알았다."
주성한이 말했다. "생김새는 어떠한가?"
서이우가 말했다. "속담에 여자는 자라면서 열여덟 번 변한다고 했다. 비록 헤어진 지 여러 해가 지났으나 예전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주성한이 말했다. "그렇다면 동 낭자를 사칭한 자가 동 낭자의 외모와 극히 닮았다는 말인가?"
서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매우 흡사하다. 이 사람이 조금 전 죽은 자의 왼쪽 손목에 반점이 없는 것을 발견한 후, 그 얼굴을 검사해보았으나 인피면구 같은 것은 없었고 역용 약물을 사용한 흔적도 없었다."
주성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가졌던 단검은..."
서이우가 말을 받았다. "틀림없이 동 선배의 유품이다. 그러나 지금 그 검이 사라지고 없다."
주성한이 손을 한번 휘저으며 말했다. "가세! 우리가 가서 확인해보세."
서이우가 연방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협! 나와 그대는 안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주성한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서이우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여인의 검법과 내공은 이 사람도 이미 겪어보았다. 비록 고수의 반열에 든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역시 중상급은 되었다. 지금 구들에 가로누워 있는데, 입에서 피를 뿜지도 않았고 눈을 부릅뜨지도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이에 일격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가 매우 고강하고도 기이한 수법을 펼쳤다. 이 사람은 이미 살 만큼 살았으나, 소협은 나이도 젊고 전도가 양양하다..."
주성한의 안색이 가라앉으며 말을 받았다. "그대는 살인자가 우리에게도 똑같은 짓을 할까 봐 두려운 것인가?"
서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이 여인은 동 선배의 후손을 사칭했으니, 분명 딴 속셈이 있었을 것이고 죽어도 싼 자다. 우리가 그녀가 죽은 일 때문에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주성한은 가려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져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묻겠는데, 동 낭자의 검은 줄곧 동 낭자의 손에 있었는가?"
서이우가 말했다. "동 낭자가 '구성궁'으로 검술을 배우러 갈 때 이미 가지고 갔다."
주성한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손에 있던 검은 어디서 얻은 것인가?"
서이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알 길이 없다."
주성한이 중얼거렸다. "동 낭자가 '구성궁'에서 7년 동안 검을 배웠으니 반드시 성취가 있었을 것이다. 이름을 사칭한 자가 동 낭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았다면, 동 선배가 남긴 검을 얻을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의 검법은 이 사람도 이미 보았는데, 추오상의 검격 한 번을 당해내지 못했으니 무공이 뛰어난 구석이 전혀 없었다. 이것참 이상하군?..."
서이우가 말을 받았다. "이 사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온 것은 오직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다."
주성한이 말했다. "무슨 일인가?"
서이우가 말했다. "소협이 하루 이틀 안에는 아직 금릉을 떠나지 않을 터이니, 번거롭겠지만 그 단검의 행방을 대신 주의해서 살펴주시오."
주성한이 말했다. "그대는 어디로 가려는가?"
서이우가 말했다. "화산 '구성궁'으로 한 걸음 옮겨 동 낭자의 행방을 알아볼 생각이다."
주성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화산행은 전혀 필요 없다."
서이우가 말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동 낭자가 만약 '구성궁'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름을 사칭한 자가 하늘을 찌르는 능력이 있다 해도 동 낭자의 그 검을 얻을 방법이 없다. 죽었든 살았든 동 낭자는 이미 '구성궁'에 없다!"
서이우가 말했다. "이 사람은 그래도 '구성궁'에 한 번 가서 동 낭자가 궁을 떠난 날짜를 알아봐야겠다."
주성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리 하시오!"
서이우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마음 써주시오! 마음 써주시오!" 말을 마치고 창문을 통해 날아갔다.
주성한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가 이내 방문을 열고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동월매가 머물던 상방 문 앞에는 이미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분명 차를 나르고 물을 긷는 파장 노파가 이 홀로 온 여손님이 목숨을 잃은 것을 발견한 모양이다.
주성한은 문 앞으로 비집고 들어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죽은 자는 이미 머리부터 얼굴까지 이불 한 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당연히 방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들추고 자세히 보기 불편했기에, 군중 속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으나 낯설고 눈에 띄는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
갑자기 주성한은 누군가 자신의 옷소매를 잡아끄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이가 대략 열네댓 살 되어 보이는 어린 계집아이가 머리에 꽃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주성한은 어딘가 낯이 익었으나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막 물어보려는데, 그 계집아이가 이미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 소협! 저는 양 낭자 곁의 시비 소선이다."
주성한은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상대가 차림새를 바꾸었기 때문에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역시 나지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소선(小蟬)이 말했다. "우리 낭자께서 고루 앞 '아관주루'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특히 소종을 보내 소협을 모셔오라 하셨다."
주성한은 약간 멈칫했으나 이내 빠르게 대답했다. "모신다는 말은 과분하다! 길을 인도해주게."
소선이 말했다. "동행하는 것은 불편하니, 먼저 가 계시면 소종이 뒤따라가겠다."
주성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쪽 별채를 걸어 나왔다.
점포 안에서 주성한은 카운터에 '아관주루'로 가는 길을 물어본 뒤 가게를 나섰다.
'아관주루(雅觀酒樓)'와 객잔 사이는 불과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몇 걸음 걸어가지 않아 도착했다.
주성한이 막 계단을 오르자마자 한 시비가 영접하러 나왔다. 그녀는 시끄러운 점포 안을 지나 사방이 병풍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자리로 그를 인도한 뒤, 공손하게 말했다. "소협, 들어가시오."
병풍 안의 네모난 탁자 위에는 술과 안주가 가득 차려져 있었으나, 오직 양쪽 끝에만 술잔과 젓가락이 마련되어 있었다. 양계령이 오른쪽에 앉아 있다가 주성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을 살짝 일으키며 부드러운 손을 내밀어 말했다. "소협, 앉으시오."
주성한은 차려진 형세를 보고 이 술자리가 자신을 위해 마련된 것임을 알았다. 사양하지 않고 포권을 하며 말했다. "낯가죽 두껍게 신세를 지겠다." 그러고는 양계령의 맞은편에 앉았다.
술잔에는 이미 좋은 술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양계령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시오! 한 잔 올리겠다."
주성한은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 선(蟬)、연(娟)、교(嬌)、아(娥) 네 명의 시비는 아무도 곁에서 시중들지 않았고, 양계령이 친히 술병을 잡아 비어 있는 두 잔에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차갑게 한 번 웃으며 말했다. "소협, 계령이 방자한 말을 한마디 하더라도 용서하시오. 금릉을 둘러보아도 오직 소협만이 제법 기개가 있을 뿐, 다른 인물들은 이 몸이 한 번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 그래서 약소하게나마 술과 안주를 마련해 소협을 대령으로 청한 것이다..."
주성한이 연방 말했다. "과분하다! 과분하다..."
양계령이 하얀 손목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 "소협은 내 말을 마저 들으시오..." 어조를 잠시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술을 마시면 자연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게 되는 법이다. 이른바 '마음을 터놓는다' 함은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함에 다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계령은 스스로 이를 행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데, 소협도 그리할 수 있겠는가?"
주성한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것참...?"
양계령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만약 소협에게 남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만한 일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떠나시오. 이 몸의 술과 안주는 속마음을 속이는 사람에게 대접하지 않는다. 만약 소협이 술이 묽고 안주가 보잘것없다 여기지 않고 자리를 지켜주어 마음을 터놓는다면, 그때는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성한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흠칫 놀랐다. 한참이 지나서야 머뭇거리며 말했다. "낭자가 그렇게 말하니 이 사람을 진퇴양난에 빠뜨리는군. 머무는 것이 좋을지, 떠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소. 이것참..."
양계령이 말을 받았다. "한 가지 소협이 안심해도 좋을 점이 있다. 비록 소협의 마음속에는 우리 양가보의 낭자들이 모두 교만하고 방자하게 보일지 몰라도, 나름대로 분수는 알고 있어서 묻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 함부로 묻지 않는다. 설령 물어야 할 말이라 하더라도 소협이 밝히기 곤란한 이유를 댄다면, 이 몸도 절대 억지로 강요하지 않겠다."
주성한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낭자의 말솜씨가 날카롭고 기세가 당당하니, 이 사람에게 전조의 유명한 '홍문의 연회'를 생각나게 하는군..."
양계령이 빠르게 말했다. "소협은 옛일에 비유해 비꼬실 필요 없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술이 세 차례 돌고 난 뒤에나 시작될 터이니, 소협에게는 아직 고심할 시간이 있다. 오시오! 두 번째 잔을 올리겠다." 말을 마치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주성한 역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단숨에 마셨다.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주성한이 얼른 빈 잔을 채우고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잔은 이 사람이 답례로 올리는 것이니, 받으시오..."
양계령이 하얀 손목을 흔들며 말했다. "소협, 잘 생각했는가? 당신이 올리든 내가 올리든 이것이 벌써 세 번째 도는 술이다."
주성한이 웃으며 말했다. "낭자의 말은 이미 지극히 분명하게 밝혀졌다. 질문에는 분수가 있고 답변 또한 억지로 요구하지 않는다 하니, 이 사람이 여기 머물러 가르침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야말로 너무나 인정을 모르는 짓이 아니겠는가?"
양계령의 차갑고 예쁘장한 얼굴에 뜻밖에도 요염한 기색이 한 자락 스치며 가볍게 웃었다. "그 말은 참 듣기 좋군. 오시오, 건배합시다." 고개를 젖히며 잔을 깨끗이 비웠다.
주성한은 속으로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양계령을 보니 제법 사내다운 호기가 있어 보였는데, 대개 사내의 풍모를 지닌 낭자들과는 엮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양계령은 주성한이 잔의 술을 다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술잔이 탁자에 닿자마자 갑자기 얼굴의 요염한 기색을 거두고 엄숙하게 말했다. "서주부에 팔괘평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리고 팔괘평에 양가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 양가보의 삼절을 알아보고, 그것을 듣는 사람의 귀에 쏙쏙 들어오게 말해준 사람은 오직 소협 한 분뿐이다. 이것으로 보아 소협은 견문이 넓을 뿐만 아니라 재학 또한 겸비했음이 분명하다."
주성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낭자, 과찬이시오!"
양계령이 차갑게 말했다. "이 몸은 원래 남 비위 맞추는 소리는 할 줄 모른다. 게다가 소협의 그 접부채가 이 몸의 손에 든 금방울 한 쌍보다 나으리라는 법도 없으니, 당신 환심을 살 필요도 없다."
주성한은 속으로 은근히 씁쓸했으나, 상대의 이러한 화법이 본성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았기에 성질을 죽이고 웃으며 말했다. "낭자는 알고 보니 한 번 칭찬하고 한 번 욕하는군."
양계령이 말했다. "소협이 사람을 억울하게 만드는군. 무림 사람치고 다른 이에게 '협' 자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협'이라는 이름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로운 풍모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됨, 가문, 무공, 기품이 모두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야 비로소 자격이 생긴다. 소협이 여기 온 이래로 이 몸이 줄곧 '소협'이라 부르고 있으니, 비록 내가 교만하고 방자할지언정 소협 앞에서는 감히 과하게 날뛰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칭찬이든 욕이든 모두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주성한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감사를 표하겠소."
양계령이 하얀 손목을 한 번 흔들며 말했다. "그런 상투적인 인사는 필요 없다..." 말을 잠시 멈추고 이어갔다. "이 몸이 방금 말했듯이 소협은 견문이 넓고 재학이 있다. 하지만 이 몸이 시험을 한 번 해보고 싶다. 우선 견문이 넓다는 점에 대해 말해보자면..."
주성한이 두 손을 연방 흔들며 말했다. "낭자, 시험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이 사람이 밑천을 드러내고 망신당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나, 만약 낭자가 이 사람이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고 오해한다면 그것은 크게 낭패가 아니겠소!"
양계령이 말했다. "소협은 미리 물러설 생각을 마시오. 양가보의 삼절이 이미 소협의 한마디에 꿰뚫렸으니, 천하의 일에 대해 소협이 모르는 바가 적을 것이다. 만약 사양한다면 우리는 이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다고 할 수 없다."
주성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낭자가 이 사람을 너무 무겁게 보아주니, 이 사람에게는 복이 아니라 화가 될까 두렵군!"
양계령이 말했다. "소협은 너무 겸손하다..." 어조를 멈추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소협에게 묻겠는데, 그 황해어라는 낭자는 어떤 내력을 가진 자인가?"
주성한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 그 황 낭자의 내력에 대해 참으로 알고는 있으나, 일찍이 그녀에게 비밀을 지켜주기로 약속했소. 그러니 이 사람이 밝히기는 곤란하군."
양계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도리가 있는 말이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신용을 지키는 것이 제일이다. 이 몸은 더 추궁하지 않겠다..." 어조를 다시 한번 가다듬더니, 이내 쇠와 옥을 두드리는 듯한 또렷한 어조로 한 자 한 자 받아쳤다. "그렇다면 강호의 관상쟁이 황대선은 어떤 내력을 가진 자인가?"
주성한이 고개를 연방 저으며 말했다. "정말 속이지 않고 말하건대, 이 사람은 황대선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소."
양계령(楊桂玲)이 냉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 "소협이 비록 견문이 넓다고는 하나, 이 몸에 비하면 아직 조금 모자란 듯싶다. 당신은 모르나 나는 알고 있다."
주성한이 놀라며 말했다. "진정인가?"
양계령이 오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런가! 소협은 믿기지 않는가?"
주성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의아해서 그렇소. 만약 그 강호의 관상쟁이가 대단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면, 어찌 낭자가 이토록 관심을 두겠소?"
양계령이 말했다. "소협은 결코 그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주성한이 말했다. "낭자..."
양계령이 하얀 손목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가로챘다. "묻지 마시오! 오늘 이 몸이 소협을 청해 술잔을 나누며 마음을 터놓는 것은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 아니라 서로 아는 바를 교환하고자 함이다. 소협이 모르는 일이라도 이 몸이 아는 바는 절대 숨김없이 다 털어놓겠다."
주성한(朱星寒)이 말했다. "이 사람이 귀를 기울여 듣겠소."
양계령은 새끼손가락에 술을 적셔 탁자 위에 '염(閻)' 자를 쓰고는 점을 하나 찍으며 말했다. "소협은 알겠는가?"
주성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얼굴색 또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자로군!"
양계령이 손바닥을 가볍게 한 번 휘두르자 탁자 위의 글씨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소협은 어찌 이리 크게 놀라는가?"
주성한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 마두는 사도의 우두머리요. 일단 그가 금릉에 몸을 두었다면 조만간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치게 될 것이오."
양계령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소협의 그 말은 상황을 잘못 짚었다. 설령 그 마두가 없다 한들, 당신과 내가 어차피 한바탕 큰 풍파를 일으키지 않겠는가?"
주성한은 자신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마두가 왔다면 분명 무리를 지어 움직였을 텐데, 어찌하여 그의 수하에 있는 여제자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양계령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협은 지조가 청고하여 풍류 세계의 일은 묻지 않으니, 자연히 내막을 모를 수밖에 없다. 그 마두의 여제자들 태반은 지금 진회하로 흘러 들어 가 금릉의 명기들이 되어 있다!"
주성한은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는 진정 견문이 넓구려. 이 사람이 도저히 따를 수 없음을 자탄할 뿐이오."
양계령이 말했다. "상투적인 말은 그만두고, 이야기하다 보니 이제 이 몸의 차례가 된 듯싶다. 소협은 이 몸이 무슨 일로 금릉에 왔는지 알고 있는가?"
주성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감히 마음대로 짐작하지 못하겠소."
양계령이 말했다. "이 몸은 당신에게 숨길 생각이 없다. 금릉에 온 것은 오직 추오상을 우리 양가보의 사위로 맞이하기 위함이다."
낭랑하고 힘 있는 어조였으며 조금의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러나 주성한은 자신도 모르게 멍해지고 말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 사람의 예상 밖이구려."
양계령이 말했다. "이 몸이 보기에 추오상은 외모가 준수한 것 외에는 아무런 장점이 없다."
주성한이 물었다. "사정이 그러한데 낭자는 어찌하여 굳이...?"
양계령이 말을 받았다. "소협도 우리 양가보가 여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다만 지금 권력을 쥔 분은 가모이시니, 이 몸은 자연히 어머니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주성한이 말했다. "모친의 뜻이라는 말인가?"
양계령이 말했다. "그렇다. 가모께서 말씀하시기를, 추오상이 이 몸과 짝이 될 가장 좋은 인선이라 하셨다."
주성한이 말했다. "직언을 용서하시오. 이 사람이 보기에 이 혼사가 성공할 희망은 극히 희박하오."
양계령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어째서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사절검’을 쓰는 자는 무엇보다 여색을 멀리해야 하거늘..."
양계령이 말을 가로챘다. "그 점은 소협이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양가보가 세워진 이래로 그에 속한 사위치고 제 발로 들어오지 않은 자가 없으니, 설마 그 추오상이라 하여 예외가 되겠는가."
양계령이 이 일로 더는 논쟁하고 싶지 않아 하자, 주성한이 즉시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먼저 낭자에게 축하를 올리겠소..." 어조를 잠시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추오상이 묵고 있는 상방을 지나치다 보니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소. 낭자는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는가?"
양계령이 말했다. "두 명의 검희를 대동하고 머리를 식히러 자금산으로 갔다. 보아하니 소협이 그에게 관심이 무척 많은 듯싶다!"
주성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저 스치듯 물어보았을 뿐이오."
양계령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묻겠는데, 소협은 그 ‘경천궁’ 궁주 단비우와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는가?"
주성한이 고개를 연방 저으며 말했다.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단비우에 대해서는 이 사람도 그저 이름만 들었을 뿐이오!"
양계령이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진정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이 사람은 결코 낭자를 속이지 않소."
양계령이 중얼거렸다. "이것참 이상하군!..." 어조를 멈추고 말을 이어갔다. "소협은 기억하는가? 그날 당신이 추오상과 무공을 겨루려 할 때, 갑자기 ‘은여우’가 단비우의 친필 명령서를 가져와 두 사람에게 겨루기를 잠시 멈추라고 호통쳤던 일을 말이오."
주성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사람도 기억하고 있소."
양계령이 말했다. "소협은 그 종이에 적힌 명령서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는지 아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이 사람은 모르오."
양계령이 말했다. "그 명령서에는 두 가지 일이 적혀 있었다. 첫째는 두동돈을 신속히 죽일 것, 둘째는 성이 주 씨인 당신과 적이 되지 말 것."
주성한이 가볍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정말 속이지 않고 말하건대, 추오상이 단비우에게 답장을 써서 그의 곁에 있는 검희 하화련을 통해 궁으로 보낸 적이 있소. 이 사람이 여관까지 미행하여 훈향을 사용한 뒤 그 답장을 읽어보았는데, 확실히 이 사람에 대한 언급이 있었소. 그러나 이 사람은 단비우의 이러한 거동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소."
양계령이 말했다. "소협이 또 모른단 말인가?"
주성한이 웃으며 말했다. "분명 낭자는 알고 있을 듯싶구려."
양계령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 몸 역시 모른다."
주성한이 말했다. "이 사람도 한 가지 여쭐 일이 있소."
양계령은 이 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마음을 터놓는 사이니, 그리 조심스러워할 필요 없다!"
주성한이 말했다. "낭자는 일찍이 ‘냉검열장’ 동림수 동 대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양계령이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 대협이라는 칭호는 대체 누가 붙여준 것인가?"
주성한은 말속에 뼈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짐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동 대협은 평생 악한 짓을 저지른 적이 없기에 모두가 그렇게 부르오."
양계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왜 그러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동 대협은 예전에 살해당했고 뒤에 딸 하나를 남겼는데, 이름이 월매라 하오..."
양계령이 말을 참견했다. "월매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어디 한둘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현재로서는 오직 두 사람뿐이오..." 어조를 멈추고 이어갔다. "동 낭자 역시 그 객잔에 묵고 있소. 며칠 전 밤에 추오상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는데, 듣자하니 동 대협이 추오상의 선친인 추일장의 손에 죽었다고 하오. 그리하여 동 낭자가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 했던 것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조금 전 그 동 낭자가 살해당했소."
양계령이 놀라며 물었다. "바로 그 객잔 안에서 말인가?"
주성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양계령이 물었다. "누가 죽였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그것은 알 수 없소. 죽은 자는 입에서 피를 흘리지도 않았고 눈을 부릅뜨지도 않은 채 침상에 가로누워 있었소. 마치 불시에 살해당한 듯하여 반항하거나 도망칠 틈조차 없었던 모양이오."
주성한은 여전히 꾀를 부려 죽은 자가 진짜 동월매가 아니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양계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동 낭자가 감히 추오상을 암살하려 들 정도였다면 무공의 밑바탕이 결코 나쁘지 않았을 텐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해당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같은데..." 한참 뒤에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시신은 어디 있는가?"
주성한이 말했다. "객잔에 그대로 있소. 아마 지금쯤 관가의 검시관이 도착했을 것이오."
양계령이 활연히 일어서며 손을 휘저었다. "가서 확인해보자."
주성한이 막 몸을 일으켜 따르려는데, 갑자기 한 어린 시비가 다급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시비가 양계령의 귀에 대고 한참을 소곤거리자 그녀의 안색이 돌연 바뀌었고, 이내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성한은 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얼른 말했다. "낭자에게 처리할 일이 생긴 듯하니, 이 사람은 이만 물러가겠소."
양계령이 손을 치켜들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저 바깥 점포에 불청객이 하나 찾아왔는데, 기세를 보니 아무래도 당신과 나를 노리고 온 듯싶다."
주성한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급히 물었다. "누구이오?"
양계령이 말했다. "황해어다."
주성한이 말했다. "낭자는 어찌 그녀가 우리를 노리고 온 줄 아는가?"
양계령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당신들이 묵는 그 객잔에서도 술을 마실 수 있고, 이 고루 안팎에 술집이 어디 여기 한 곳뿐이겠는가. 그런데 하필 이 '아관루'로 기어들어 왔으니, 그녀가 무슨 딴속셈을 품은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성한은 양계령이 억지를 부려 쓸데없이 싸움을 일으키고 자신이 그 사이에 끼어 곤란해질까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얼른 웃는 낯으로 말했다. "낭자가 어찌 그런 일로 공연히 화를 내시오, 자! 한 잔 올리겠소!"
주성한이 막 술잔을 들어 올리려 하자, 양계령이 손을 뻗어 대나무 젓가락 한 개로 그가 쥔 술잔을 내리눌렀다. 겉보기에는 가벼워 보였으나 주성한은 술잔을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주성한은 속으로 슬그머니 경악했다. 한낱 여인의 몸으로 이토록 심후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니,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성한 역시 이대로 순순히 굴복할 수는 없었기에, 즉시 오른손 바닥에 공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잔 속의 술이 한 줄기 물화살처럼 뿜어져 올랐고, 주성한은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탁자 위에는 단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여기서 먼저 잔을 비우겠소!"
양계령이 차갑게 한 번 웃으며 말했다. "소협의 내력이 참으로 심후하구려..." 어조를 바꾸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소협이 오해를 한 듯싶다. 이 몸은 소협과 내력을 겨룰 생각이 없다. 단지 한 가지 묻고자 함이니, 당신은 그 황해어와 어떤 특별한 관계인가?"
주성한은 고개를 연방 저으며 말했다. "결코 아무런 관계도 없소. 다만 이 사람이 현재로서는 그녀와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을 뿐이오."
양계령이 다그치듯 물었다. "혹시 무슨 약점이라도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낭자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꼭 틀린 말도 아니오."
양계령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세상에 살다 보면 크든 작든 남에게 말 못 할 사정이 한두 가지는 있는 법이다. 소협이 이토록 솔직하게 말하니 도리어 이 몸의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구려. 사정이 그러하다면 소협의 체면을 보아서 이 몸도 그녀에게 유세를 떨 생각은 없으니, 그녀를 이리로 청해 함께 한잔 나누는 것이 어떠한가?"
주성한은 속으로 은근히 흠칫 놀랐다. 만약 그 황해어가 대면한 자리에서 실없는 소리로 희롱이라도 걸어온다면, 양계령이 또 다른 오해를 품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고개를 크게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좋지 않을 듯싶소만?"
양계령이 아양을 떨듯 웃으며 물었다. "어찌하여 좋지 않다는 것인가?"
주성한이 말했다. "만약 그..."
양계령이 말을 받았다. "소협은 안심하시오. 이 몸이 그녀를 청해 한잔 나누겠다고 한 이상, 그녀와 얼굴을 붉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주성한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낭자는 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소?"
양계령이 말했다. "소협은 어찌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가. 이 몸이 부르는 호칭만 보아도 소협을 만분 경중하고 있음을 알지 않겠는가!"
주성한이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이 사람도 마음이 놓이는구려..." 어조를 잠시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 황 낭자라는 자는 평소 행실이 방탕하고 언행이 극히 불손하오. 이 사람이 그녀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아 어느 정도 참아주고는 있으나, 낭자가 보시기에는 이 사람 역시 그 황 낭자와 한통속으로 보일까 염려스럽소!"
양계령이 아양을 떨듯 웃으며 말했다. "소협은 너무 생각이 깊구려..." 그러고는 어린 시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분부했다. "아아! 저 황 낭자를 이리로 모셔와 함께 한잔 나누자꾸나. 주 소협도 여기 계시니 부디 걸음을 해주십사 전하거라."
아아가 대답하고 방을 나갔다.
주성한이 말했다. "낭자와 그 황해어는 예전에 안면을튼 적이 있는가?"
양계령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없다."
주성한이 말했다. "만약 그 황해어가 와서 함께 마시기를 거절한다면 틀림없이 낭자의 체면이 깎일 터인데, 그때는..."
양계령이 말을 받았다. "소협은 그때 이 몸이 성을 내리라 생각하는구려, 맞지 않는가?"
주성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점을 우려하고 있소."
양계령이 말했다. "소협은 그런 걱정을 하실 필요 없다. 이 몸은 그 황 낭자가 나와 친분을 맺고 싶어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니..." 신형을 바르게 고치며 말을 이었다. "들으시오! 그녀가 이미 오고 있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황해어가 과연 걸어 들어왔다.
양계령은 제법 정중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 "황 낭자, 앉으시오..." 어린 시비에게 손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아아! 황 낭자를 위해 잔과 젓가락을 새로 준비해 오너라, 어서 가거라."
어린 시비가 황급히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황해어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은 뒤 물었다. "양가보의 명성이 과연 헛되지 않구려. 조금 전 객잔에서 낭자가 ‘매화선자’ 유예향을 손쉽게 물리치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크게 감탄했소."
양계령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다!"
황해어가 고개를 돌려 주성한에게 물었다. "상공은 여기 오신 지 얼마나 되었소."
주성한이 말했다. "조금 먼저 왔소."
황해어(黃解語)가 말했다. "그렇다면 동 낭자의 일은...?"
주성한이 얼른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낭자와 양 낭자는 이제 겨우 첫 대면을 한 자리이니 마땅히 술잔을 나누며 즐겨야 하거늘, 어찌 그런 일들을 입에 올리려 하시오."
황해어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공은 진정 동 낭자가 살해당한 일에 마음이 쓰이지 않는단 말이오?"
주성한이 말했다. "무림 사람들은 대개 삶과 죽음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덧없게 여기거늘, 이 사람이 어찌 홀로 슬퍼하고 가련히 여기는 마음을 품겠소."
황해어가 성낸 기색을 거두고 가볍게 웃었다. "참으로 활달하구려..." 어조를 멈추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로 보아 상공은 이미 동 낭자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구려!"
주성한은 가슴이 철렁했으나, 목소리는 지극히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무슨 뜻이오?"
황해어가 말했다. "그 동 낭자는 거짓으로 죽은 척을 한 것이오."
주성한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경이로움을 느꼈고,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리어 양계령이 말을 참견해 물었다. "혹시 황 낭자가 그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인가?"
황해어가 말했다. "사실 동 낭자가 펼친 숨을 멈추는 수법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라 관가의 검시관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식견이 있는 자의 눈은 속이지 못하오..." 어조를 잠시 멈추고 주성한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상공은 그녀가 숨기도록 도와주신 것이오, 아니면 진정 내막을 모르고 계셨던 것이오?"
주성한이 말했다. "이 사람은 동 낭자의 방에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소. 만약 황 낭자의 말이 틀림없다면, 이 사람이 도리어 그녀에게 속은 셈이오."
양계령이 말했다. "동 낭자는 어찌하여 거짓으로 죽은 척을 했단 말인가?"
황해어가 말했다. "낭자가 그 ‘거짓’이라는 글자에서부터 생각을 해보신다면, 그 실마리를 알아채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주성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황 낭자, 당신은 동 낭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황해어가 웃으며 말했다. "아는 바가 많지 않소. 말투를 보아하니 상공께서 분명 내게 무언가 알려주려는 모양이구려."
주성한이 말했다. "동 낭자는 무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배인 ‘냉검열장(冷劍熱掌)의 후손이오. 또한 화산 ‘구성궁(九成宮)에서 7년 동안 검술을 닦았으니 출신이 결코 이름 없는 자가 아닐진대, 어찌 그런 구차하게 죽은 척하는 짓을 벌이겠소."
황해어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잘못 본 것이라면, 훗날 내 눈알을 파내 가도 좋소."
양계령이 차가운 눈길로 주성한을 한번 힐끗 보며 말했다. "황 낭자가 이토록 단정 지어 말하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사실인 모양이다."
주성한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도 더는 논쟁하지 않겠소. 어차피 현재 금릉에 발을 붙이고 있는 무림 무리 중에서 동 낭자가 그리 대단하게 비중 있는 인물은 아니지 않소."
황해어가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상공은 어찌하여 그리 생각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