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편. 촛불과 독백
지축(地軸)의 그늘이 어둠을 더해 가면 만물은 고요히 잠이 든다. 그리고 적막(寂寞)한 밤이 정숙(靜肅)하게 흐르면 천근 무게의 암흑(暗黑)도 오히려 가볍게 자꾸 깊어만 가는 밤을 촛불 아래서 지킨다.
푸르고 잔잔한 바다를 연상시키는 어둠은 허다한 간악(奸惡)과 잡음이 묵인(黙認)되는 발간 대낮에 비할 바 아니지만 머리 위에서 화살처럼 내려 쏘던 전등이 깜박하는 순간 일초의 여유 없이 새까만 암흑을 지우니 현기증(眩氣症)이 나는 것 같다. 한 방안 꽉 차고 속속들이 어두운 암흑 속에서 정적(情迹)이 가로 세로의 선을 맞대 잇는다.
“원, 투, 쓰리”(하나, 둘, 셋)
암흑 속에서의 외침이다. 아이들은 전기불이 꺼질 때마다 셈을 한다. 아마 요술쟁이의 새까만 보자기에서 하얀 계란이 나오는 그런 기적을 바라는 구령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한 기적도 한두 번이지 이젠 모르겠다는 듯 암흑 그대로 둔 채 전기는 오지 않는다.
이럴 때면 더듬어 촛동강에 불을 부치곤 촛불과 마주 앉아 꼬박 졸리는 밤을 다스린다. 그런다고 어떠한 원칙론도 방법론도 수립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이렇다할 재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자기의 마음의 재력에 전 생활을 의지하려고 촛불과 함께 용누(溶淚)의 시름을 한다.
제멋대로 꺼졌던 전기불이 또 무엇이 미련인지 희미한 촛불이 무색해 하도록 내려 쏜다. 나도 덩달아 촛불을 무시한다.
「가-스」섞인 입김으로 확 불어 버린다. 꺼지면서 한줄기 하얀 연기를 서릴 뿐 한마디 반항 없이 그 자리에 서서 무시를 당하면서도 꿋꿋이 참는 그 인내력에 나는 다시금 암흑 속에서 구출해 주던 때의 촛불을 기억하고 소중하게 옆으로 밀쳐놓는다.
깜박! 또 말 못할 암흑이다. 소위 문명의 세례, 인위적인 조작물 그 전기는 조아린 가슴을 울리고 웃기는 연기 중의 배우처럼 왔다 갔다 재주를 마구 부린다.
다시 성냥 가지에 불을 그어서 그렇게 업신여기던 촛동강에 불을 붙인다. 이 때도 나의 경솔한 행동을 성자처럼 관용해주는 도량(度量)을 베푸니 촛불 앞에는 경거(輕擧)할 수 없는 위엄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전기에는 놀림을 받으면서 촛불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임의적인 행동을 했다. 오-직 밝힘을 위하여 육체마저 태우는 촛불을……. 애타는 촛불의 가장자리엔 무슨 색깔인지 분간키 어려운 암흑의 순초병(巡哨兵)이 둘러싸고 있다가 촛불만 꺼지면 덮어씌우려고 들썩이는 것도 같고 영원히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암흑이 촛불 꺼지기를 재촉하는 것만 같다.
전기대용으로만 쓰이는 촛불이지만 감때사나운 계모의 버림인 듯 그렇게 괄시하던 나를 저주의 눈짓마저 하지 않는 그 진실성에 한없는 교훈을 받는다.
오늘도 꼭 어제 밤과 같이 밤마다 잊지 않고 찾아드는 촛불 주변의 허무감이 본성적으로 쾌활치 못한 나를 한층 더 우울하게 해놓고는 창 밖 암흑 속으로 사라져 버리곤 한다. 허무기(虛無氣)가 스치고 지나가면 촛불은 필요 이상으로 심각해진 나를 자꾸 위축(萎縮)시킨다.
삶이란 가슴에 고동치는 혈맥의 움직임도, 수직적(垂直的)인 사실(史實), 횡적(橫的)인 실존(實存) 그마저 부인해 버리고 한 점의「컴마」로 또는「제로」이하의 심연(深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때면 나는 부질없이 마음이 분주해지고 초조함을 삭이지 못한다. 쓸모없는 삶이란 고역이라고만 느낀다. 촛불의 진실만도 못한 생활감정, 심혼(心魂)의 공허(空虛)와 현실의 허무(虛無)가 나의 뒤에서 나보다 재빠르게 촛불 앞에 내닿고 천장(千丈)의 절벽(絶壁) 같은 절망(絶望)을 준다.
‘일체(一切)의 것을 등져 버릴까?’
기실은 꼭 세속을 싫어할 궁극의 결론도 없으면서 알뜰한 삶을 아주 헐값에 팔아 버리려 한다.
이 때도 틈틈이 스며드는 방 바람에 촛불은 생동하며 태풍도 이겨낼 듯 나부낀다. 촛불의 용약(勇躍)한 자세를 보고 나도 얼른 공허(空虛)와 허무감(虛無感)을 내쫓아 버리고 좀더 진실하고 쾌활하게 살아보자고 다시금 계획을 세운다.
흥정해 보려던 삶을 이렇게 물려 놓고는 촛불의 생동하는 광채와 머리털이 그을리도록 가까운 정을 맺는다.
영(靈)과 현실의 대치(對峙)에서 분열(分裂)되었다는 남군(南君)도, 창작을 통해서 진실한 정열을 표백(表白)해 보겠다는 金君도, 수차의 고시에 낙방하고도 절망치 않는다는 朴君도, 단념해야 할 미련이면 언제나 단념 할 수 있다는 S도, 모두가 촛불의 진실을 생활의 사표(師表)로 살아 온 것이 아닐까!
높은 온도의 물체는 열과 빛을 함께 내뿜지만 촛불은 열을 대신하여 진실을 뿜어 준다. 온 천지를 뒤덮은 암흑일지라도 촛불은 그 일부분을 상처 내듯이 밝혀 준다. 그러다가 촛불이 사명을 다하고 꺼지면 암흑은 지체 없이 그 비었던 자리를 꽉 메운다.
말없이 꺼져버린 촛불이지만 인생의 의미를 암시해 주는 것 같다. “사는 동안 참되게 살다가 종극(終極)엔 대자연의 품속에 폭 쌓이는 것이라고⋯”
새로 불붙은 초는 타들어 가는 육체가 애달픈지 촛농이 한줄기 눈물처럼 주르륵 흐른다. 그러면서도 타고난 숙명을 저버리지 않는다.
몸가짐이 수척한 초이지만 구부러질 수는 없다. 연약하면서도 강직(强直)한 기백(氣魄)이 있다. 불꽃이 생동하는 자세도 약하기 한이 없다. 한없이 약하면서도 책상머리에 선 촛불은 곧잘 정신의 혁명을 일으켜 준다. 때로는 새로운 그 무엇을 제시해 주는 심우(心友)와도 같이 항상 나를 암흑(暗黑) 그 속에서 구출(救出)해 준다.
1956년 1월
한국상업은행 기관지 天一에 실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