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는 우리군에 공군이 창설된 바로 다음 해였으며, 우리공군으로서는 전투에 임할 변변한 전투기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공군이 보유한 항공기는 L-4, L-5 연락기와 전쟁 발발 직전에 캐나다를 통해 구입한 T-6 텍산 훈련기 10대가 전부였다(텍산에 대한 내용은 P-51 1화에서도 잠깐 되었다).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의 숫자도 턱없이 부족했던 데다가(그나마 개전 직후 북한군 공격기에 의해 다수의 L-4, L-5 연락기들이 지상에서 격파 당했다), 이것들은 제대로 된 전투기나 공격기가 아니었으므로 밀려오는 적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L-4, L-5 연락기에는 동승한 인원이 폭탄을 가지고 있다가 적 지상군이 보이면 손으로 던졌는데 명중률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또 사람이 손으로 던질만한 무게의 폭탄이다 보니 그 위력도 대단치 않았다. 또 지상에 피해를 주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적군 머리위에 던지기도 했다(보통은 이런 L-4, L-5 연락기들은 공격 자체를 위해 임무에 나섰다기보다는 정찰이나 연락 등의 임무를 나갔다가 적군을 발견하면 폭탄을 떨어트리는 식으로 임무를 진행했다.). 수류탄은 지연신관에 의해 4, 5초가 지나면 터져버리므로 보통은 적군 머리위에서 터져버리고 말았다. 적군들은 머리위의 폭발음 때문에 놀라서 잠시 진격을 멈추기는 하였으나 수류탄에 의해 실질적인 피해는 거의 입지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출격하고 있는 L-4 연락기 부대. 사진이 약간 희미하지만 동체 측면에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다. 미군에게 공여받은 뒤 미국 국적마크 위에 다시 태극그림을 덧칠하다 보니 우리 군과는 상관없던 줄무늬가 그대로 남아있다. 참고로 이 줄무늬는 최근에 태극기의 궤를 표현한 3줄 줄무늬로 변경되었다.]
T-6는 경공격이나 무장훈련등도 할 수 있도록 개발된 항공기이다 보니 사정이 그나마 조금 나았다. 이 항공기는 날개 밑에 전용 폭탄 탑재소(Bomb Rack)가 있어서 소형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T-6의 수량도 부족한데다가 장착 가능한 폭탄의 수량도 턱없이 부족하여 제대로 된 공격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우리 공군의 T-6 텍산. 미국이 전투기를 판매하거나 원조해주지 않으려 하자 우리 정부는 캐나다를 통해 훈련기이지만 약간의 무장탑재능력도 갖춘 이 항공기 10대를 도입하였다. 도입 당시 건국기라는 명칭을 부여하였으며, 각각의 기체에는 별도의 이름이 붙어 있다. 사진은 건국기 7호기인 국민호다(글씨 읽는 방향이 우에서 좌측). 초기도입당시에는 태극무늬 옆에 줄무늬가 없으나 이후 다른 우리공군 항공기들과 마찬가지로 줄무늬가 추가된다.]
우리 군이 제대로 된 전투기가 없어 고생하고 있던 이때, 한국 상공에서는 최초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자 미군은 자국민을 철수시키기 위하여 수송기 및 이들을 호위할 전투기를 파견하였다. 파견된 전투기들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극동공군 소속의 F-82 트윈무스탕과 F-80 슈팅스타로, F-82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장거리 비행임무에 적합하였으며 F-80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이라 볼 수 있는 제트전투기였다.
미군은 아직 정확한 정황이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군에게 정치적인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공격받기 전까지는 선제공격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초계중이던 F-82와 마주친 북한군 소속의 Yak-9 전투기 1기가 F-82에게 기총소사를 한 뒤 도망치는 일이 발생하였고, 미군 수뇌부는 방침을 바꿔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북한군 항공기를 목격하는 데로 격추시키도록 명령을 내렸다.
[일본의 한 기지에서 이륙준비 중인 F-82G. 탑승한 조종사들에게 가족이 손을 흔들고 있다(물론 연출된 사진으로, 저렇게 민간인이 기지 내에 함부로 들어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F-82G는 장거리 비행능력을 살려 일본기지에서 직접 이륙하여 한반도 상공을 초계하였다. 본래 야간전투용으로 개발된 전투기이지만 한국전 초반에는 주로 미군 수송기들에 대한 주간에 장거리 호위임무를 맡는데 쓰였다. F-82G 뒤편에 대기 중인 제트 전투기가 F-80 슈팅스타다.]
개전 이후 이틀이 지난 6월 27, 한반도 상공에서 첫 공중전이 벌어졌다. 이날 북한군의 전투기 5대가(자료에 따라 Yak-9 편대, 혹은 Yak-9 이외에 Yak-11, La-7등의 전투기가 섞인 편대라 함) 김포 비행장에 나타났다. 이때 초계중이던 F-82G 5대중 모란(C. Moran)이 조종하던 F-82G가 Yak-9이 발사한 총탄에 수직꼬리날개에 몇 발의 총탄을 맞았고 곧 모란은 급히 회피하였다. 모란의 동료인 허드슨(W.G. Hudson)이 급선회하여 북한군 전투기에 접근, 짧게 기관총을 끊어 쏴 이를 공격했다. 총탄을 얻어맞은 Yak-9은 곧 오른쪽으로 급하게 기체를 기울이며 선회하였으나 허드슨은 이를 계속 추격, 결국 Yak-9은 오른쪽 날개에 불이 붙으며 추락했다. 이것이 한국 상공에서 벌어진 첫 공중전으로, 모란, 허드슨 및 그 동료기들은 2대의 북한군 전투기(La-7으로 추정, 당시에는 급박하게 전황이 돌아가던 상황이라 북한군 전투기를 정확히 식별하기 어려웠던 듯하다)를 격추시켰다. 남은 2대의 북한군 전투기는 도주하였으며 미군의 수송기는 F-82G의 엄호 덕에 무사하게 위험지역을 벗어났다.
[허드슨이 조종하던 F-82G의 건 카메라에 찍힌 북한군의 Yak 전투기. 소련이 북한에 원조해 주었던 Yak-9으로 추정된다. 이 Yak-9은 곧 허드슨에 의해 격추당했다.]
[F-82G가 Yak-9 편대를 내쫓은지 얼마 안되어 북한군은 다시 IL-10 공격기들을 김포에 보냈다. 그러나 호위기조차 붙어 있지 않던 이 IL-10은 대기중이던 F-80 전투기들에게 격추당했다. 사진은 이때 격추당한 북한군의 IL-10 공격기]
이렇게 무스탕(비록 트윈 무스탕이지만)이 활약하는 동안 우리 정부와 군도 미국에게 전투기를 원조해줄 것을 계속 요청했다. 본래 미군은 6.25전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군이 강력한 무장을 갖추면 북한 등을 도발할 위험이 있다며 전투기 판매 및 원조를 거부했다(한국군이 T-6를 미국이 아니라 캐나다를 통해 구매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고 나자 우리군에 전투기를 주지 않을 이유는 없어졌으며, 바우트-1(Bout-1)이라는 이름으로 전투기 및 군사고문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이 내용에 대해서는 공군웹진에 장우룡 작가님이 연재하고 계신 만화, <그대에게/BOUT-1>에 잘 묘사되어 있다. 필자도 재미있게 보고 있다.)
[F-51 조종석에 앉아 있는 딘 헤스 소령. 헬멧에는 UN군임을 상징하는 표시가 붙어 있다. 사진 오른편에 어렴풋이 한국군임을 뜻하는 K가 적혀 있는 F-51D의 꼬리부분이 보인다. 딘 헤스는 본래 목사였으나 진주만 공습 이후 미 공군에 입대하여 P-47 전투기를 조종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예비역 신분이 되었으나 1948년 다시 소집되어 일본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바우트-1 프로젝트에서 미국 군사고문단과 초기의 우리 공군 조종사들을 이끌었다. 그는 1950년 12월 무렵, 중국의 개입에 의해 서울이 위험해지자 상부에 요청하여 수송기 15대를 편성하여 1,000여명의 아이들을 안전한 제주도로 후송하기도 했다. 휴전된 이후 <Battle Hymn(전장의 찬송가)>라는 자서전을 내기도 했으며, 그의 일대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미군은 한국군이 F-80 같은 제트전투기를 우리 군이 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 일단은 유지운용이 더 쉬운 프로펠러 전투기를 제공하려 하였으나 F-82G는 장거리 전투기여서 우리군 실정에 맞지 않고 (당장 적 지상군이 몰려오는 상황이었으므로 지상공격기가 필요했다. F-82도 지상공격능력이 뒤처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F-82G는 장거리 호위 및 야간전투에 거의 특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F-51D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47년 즈음 미 공군이 창설되면서(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이전까지는 미 육군소속의 항공대였다. 거의 독립된 조직으로 취급되긴 했지만..) P-51D에서 F-51D로 이름이 바뀐 무스탕은, 1950년이면 거의 구식취급을 받고 있던 상황이라 미공군은 이미 제대로 운용을 하고 있지 않던 상황이었다(다만 미국의 주방위군은 700여대 가량의 많은 수의 F-51D를 운용하고 있었으므로 미국 내에서 F-51이 사라졌던 것은 아니었다).
미군은 일본에 배치되어 있던 10대의 F-51D를 우리 군에게 인도하였으며, 우리군은 일본에서 이를 직접 몰고 대구로 와서 작전을 시작하였다. F-51D는 다른 미군 전투기들에 비해서는 조종이 쉬운 편이었으나, 사실 전투기급 항공기를 처음 접한 우리 군에게는 이 전투기가 결코 몰기 쉬운 전투기는 아니었다. 종전에 운용하던 L-4/5 연락기나 T-6에 비해 훨씬 강력한 엔진의 반동 때문에 우리 조종사들 입장에서는 기체가 크게 옆으로 쏠렸기에 이착륙이 쉽지 않았다.
한편 제트전투기에 비해 더 느린 속도에서도 안정적으로 날 수 있는 F-51D는 상대적으로 지상공격용으로 적합하였기에, 미국도 주방위군 소속의 F-51D를 한반도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부대는 제트 전투기인 F-80을 운용하다가 왕복엔진 전투기인 F-51D로 기종이 전환된 부대가 있었을 정도였다(전투기 부대가 제트에서 왕복엔진기로 기종을 바꾼 매우 드문 사례가 아닐까 싶다). 한때는 이렇게 미군이 F-51D를 다시 장비하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 공군 입장에서 이것이 위협이 되기도 하였는데, 우리 군의 바우트-1을 해체하고 F-51D 기체들은 미군에 편입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 정부, 우리 공군 수뇌부 및 바우트-1을 담당하고 있던 헤스 소령 등이 반발하였으며 미군은 입장을 바꿔 우리군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하였다(단, 미군 군사고문단은 희망자만 바우트-1에 남으라는 지시가 있었고, 헤스 소령과 마이크 벨로윈 대위, 그리고 13명의 정비사만이 바우트-1에 남았다. 남은 군사 고문단은 미군 소속 부대로 복귀하였다).
F-51D를 장비한 우리 공군은 밀려오는 지상군을 상대로 계속 지상공격을 가했다. 물론 미군 역시 보유한 각종 전투기 및 폭격기로 쉴새없이 적 지상군에 대해서 폭격을 가하였으나 워낙에 아군측 지상군이 열세였던 상황이어서 계속 전선은 뒤로 밀려만 나갔다. 게다가 바우트원 부대는 낙동강 전투에서 2명의 조종사를 더 잃게 됨에 따라 결국 대구기지에 주둔해 있던 우리 공군의 F-51D 부대는 사천 비행장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일단 전선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 주둔함으로써 적 지상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한편, 이곳에서 우리 공군의 기량을 더 높이기 위해 훈련을 반복시키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러한 와중에도 헤스 소령 및 같은 군사고문단 소속의 마이크 벨로윈 대위가 직접 F-51D를 몰고 우리 공군 조종사들을 지휘하면서 낙동강 근처의 아군 지상군을 돕기 위해 계속 작전에 임하였다.
[지상에서 프로펠러를 돌리며 이륙준비를 하고 있는 우리 공군의 F-51D.]
이후 바우트-1 부대는 진해기지로 주둔지를 옮겼다가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아군측 지상군이 다시 북진하기 시작하자 더 북쪽인 영등포 비행장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이후 다시 평양으로 주둔지를 옮겼다(<그대에게/BOUT-1에 묘사된 ‘신념의 조인’이란 글씨를 썼던 곳이 바로 이 영등포 및 평양기지에서였다).
전장상황이 크게 호전되어 통일까지도 바라보던 1950년 12월 경, 바우트-1 부대는 대전으로 내려와 다시 전력을 가다듬었다. 이때 미군 소속 F-51D 부대 일부가 F-80으로 기종 전환을 함에 따라 남은 F-51D는 우리 군에 공여되었으며, 이제 우리군은 더 많은 전투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기가 늘어났어도 이를 조종할 숙련된 조종사들이 없었으므로 우리 공군은 새로이 제주 비행장에 조종사 양성을 위한 비행학교를 열었다. 문제는 이 무렵 중국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UN측 지상군이 다시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우리 공군은 최소한 우리 육군의 지원은 스스로의 손으로 하기를 원했기에,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기를 원했다(이전 까지는 미 공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출격했다). 1951년 8월 무렵 미 군사고문단은 한국 공군을 평가한 후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으며, 이제 우리 공군은 스스로 작전을 짜서 작전을 임할 수 있었다.
[편대 비행중인 우리 공군의 F-51D 편대. 태극무늬와 함께 수직꼬리날게에 크게 쓰여 있는 K가 보인다.]
이 무렵 사천에 있던 부대는 제 1 전투비행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비행단 아래에는 바우트-1부대 출신인 김영환 대령의 지휘아래 실제 전투에 참가하기 위한 제 10 전투비행전대가 새로이 창설되었으며 약 10여기의 F-51D로 구성되었다(남은 F-51D는 훈련 및 정비, 예비기 등을 위하여 남겨졌다).
[우리 공군의 조종사들이 사천기지에서 지상교육을 받고 있다. 비록 전쟁 통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으나 사기는 높았다고 한다. 뒤편에 보이는 항공기들은 L-4 연락기로 이 무렵에는 훈련용으로도 쓰였다. 휴전을 앞둔 1953년에 촬영된 사진.]
제 10 전투비행전대는 지리산 일대에 북한군 패잔병이 주축이 된 무장공비 소탕임무에 투입되었다. 당시 무장공비 소탕임무를 맡던 지상부대는 우리 소속의 경찰부대였기에 지상군과 원할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한국군이 제격이었다(사실 전쟁 초반에 우리 측 지상군과 미국측 공군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잘못된 곳을 폭격하거나 심지어 우리 군을 오폭하는 사고가 적지 않았다).
[이륙중인 F-51D. 기수에 신념의 조인이란 문구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딘 헤스 소령 전용기인 듯하다(이 문구는 딘 헤스 소령의 기체에만 적혀있었다). 사진속의 F-51D 날개 밑에는 5인치 로켓과 500파운드 폭탄이 탑재되어 있다. 1951년 여의도에서 촬영된 사진. ]
이후 UN군 소속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공군이 F-80으로 기종개편을 함에 따라 이들이 보유하고 있던 F-51D를 추가로 인도받았으며, 우리군은 이제 18기 가량의 F-51D를 보유하게 되었다. 제 10 전투전대는 이후 사천에서 강릉으로 옮겨 동부전선의 우리 육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대한 공군 제 10 전투전대. K-18은 강릉기지를 뜻한다. 가운데 있는 마크는 현재도 제 10전투비행단이 사용 중이다(비행단이 더 규모가 크며, 보통 비행단 하나가 하나의 기지를 사용한다. 육군의 사단 정도의 위치라고 보면 된다. 비행전대는 비행단보다 규모가 더 작아서 육군으로 치면 대대정도의 규모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비행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독립된 지위를 갖기도 한다(다만 비행장의 운용 등에 대한 인력은 비행단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쟁은 계속되어 1952년 1월이 되었다. 이 무렵 북한군은 중국으로부터 보급물자를 받아 각 전선에 보내었는데, 이러한 보급로는 UN 연합군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연합군은 주로 교량을 폭격하여 보급로들을 끊었는데, 평양 동쪽 10km 지점에 위치한, 남강을 가로지르는 승호리 철교만은 폭격이 쉽지 않았다.
평양 근처 대동강의 교량은 모두 끊어버리려던 UN군은 이 승호리 철교만은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북한군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철교이다 보니 철저히 방어해 놓았었기 때문이다. 본래 승호리에 있던 철교는 훨씬 이전에 UN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상황이었으나, 북한군은 200m 옆에 새로운 철교를 건설했다. 북한군은 이 철교 주변에 모래자루를 많이 쌓아놔서 폭탄, 로켓 등이 지근거리에서 터져도 충분히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근처에는 다수의 대공포를 배치하여 UN군 전폭기들이 진입하기 쉽지 않게 하였다.
[UN군 정찰기가 찍어온 승호리 철교의 모습. 아래쪽 철교는 이미 파괴되었으나 그 위에 새로운 철교가 들어섰다.]
미군은 50차례 정도 폭격을 가하였으며, 대공포의 사거리로부터 벗어난 높은 고도에서 폭격하기 위해 B-29 폭격기를 동원하기도 하였으나 이 승호리의 새 철교의 파괴에는 실패하고 도리어 대공포에 의해 전폭기의 피해만 늘어갔다.
이후 미군 수뇌부는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게 된 우리 공군에게 승호리 철교에 대한 폭격을 요청해왔다(우리 공군은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는 지시나 명령이 아닌 협조요청이었다). 우리 공군은 1월 12일 500파운드 폭탄 2발과 로켓으로 무장한 F-51D 5대를 강릉에서 출격 시켰다. 그러나 북한군의 강력한 대공포화 탓에 교각을 정확히 조준하기 어려웠으며 (다리를 공격할 때는 상판 부분만 공격하면 적이 쉽게 복구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교각부분을 공격해야 다리가 확실히 주저 앉아버린다). 5기 모두 교각에 폭탄을 명중시키는데 실패 했다. 이후 재돌입 하여 로켓으로 교각을 공격하였으나 로켓의 위력만으로는 교각을 파괴시키기 어려웠다.
같은 날 다시 3기로 구성된 공격편대가 승호리를 공격하였으나 이번에도 실패하였다.
우리 군은 이날 저녁, 작전회의를 하면서 승호리 철교를 확실히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였다.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훨씬 낮은 고도로 진입하여 교각을 더 정확히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통상적인 공격방식은 고도 8000피트(2400미터)에서 진입한 다음 급강하를 시작, 고도 3000피트(900미터)에서 폭탄을 투하하고 이탈하는 것이었으나, 새로 짠 전술은 4000피트(1200미터)에서 진입하여 1500피트(450미터)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매우 위험한 전술이었다. 적 교각에 바싹 다가가서 폭탄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그 만큼 더 적 대공포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폭탄이 폭발하면서 발생하는 파편에 의해 폭탄을 떨어뜨린 공격기 본인이나, 혹은 뒤 이어 진입하는 동료기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우리 공군은 첫 공격을 한 뒤 3일이 지난 1월 15일, 다시 공격에 나섰다. 우리군 소속 F-51D 6대가 3대씩 편대를 이루었으며, 1편대가 공격에 실패할 경우 2편대가 재차 공격하는 식으로 작전을 진행하기로 했다. 승호리 철교 상공에 진입한 F-51D는 예정대로 이전 보다 훨씬 낮은 고도로 진입, 폭탄을 투하하였다. 당연히 북한군의 대공포화가 쏟아졌음에도 F-51D 편대는 손실 없이 폭탄을 투하한 뒤 이탈하였다. F-51D들은 이탈한 뒤 다시 전과 확인을 위하여 승호리 철교에 접근하였으며, 2개의 교각이 파괴되어 철교가 주저앉았다.
같은 날 오후 철교를 확실히 마무리 짓기 위해 다시 한 번 F-51D 편대가 출격하였으며, 이 3번째 공격에 의해 승호리 철교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우리 공군에 의해 파괴된 승호리 철교. 3차례의 공격 끝에 복구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열흘 뒤, 우리 공군은 미 공군 단장회의에 참석하여 미군 정찰기가 찍어온 복구불능 상태가 되어버린 승호리 철교의 사진과 함께 작전 경과를 보고하였다.
이후에도 우리 공군은 계속 다양한 작전에 임하였으며 1952년 8월 29일 실시된 미군의 3차 평양 폭격작전에 동참하여 우수한 전과를 올리는 등,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우리 공군은 전력 확충에 힘쓴바, 휴전이 될 무렵에는 약 80여기의 F-51D를 보유하게 되었다(각종 지원기를 포함하면 전체 110대의 항공기 보유). 이후 휴전이 끝난 지 2년 뒤인 1955년부터 제트전투기인 F-86의 도입이 시작되었고, F-51D는 점차 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F-51D는 56년 중반 무렵부터 조종사 훈련용으로 전환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완전히 퇴역했다.
[몇 대의 F-51D는 현재 용산 전쟁기념 박물관이나 공군사관학교의 야외전시장 같은 곳에 전시중이다. 기수에 신념의 조인이 적혀 있으나 이 기체는 헤스 소령이 몰던 기체는 아닌 듯하다(헤스 소령의 기체 번호는 18번이었다). 아마 야외전시를 위해 F-51D를 새로 도색하면서 이 문구를 적어 넣은 듯하다. 사진은 2009년 서울 에어쇼 당시 전시된 F-51D.]
군대에서 흔히 주변 사람 말을 잘 못 알아듣고 일처리가 답답한 사람보고 고문관이라고 한다. 이 고문관이란 말은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군사 고문관에서 나온 말이었다. 군사 고문관들은 우리나라 사정에 밝지 않은데다가, 우리말을 몰라 서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문관은 답답한 사람이란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답답한 사람을 ‘고문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6.25 당시 미 공군 역시 T-6 텍산을 일선에서 운용 중이었다. 다만 T-6의 임무는 공격이 아닌 전방항공통제용이었다. 이 T-6에는 후방석에 항공통제 장교가 탑승, 적 지상군을 관측하고 그 동향을 아군 공격기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때로는 지상군과 교신해가며 목표를 새로이 찾거나, 심지어 지상의 야포부대에게 포격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특히 T-6는 아군기들에게 좀 더 눈으로 쉽게 목표물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연막로켓탄을 쏘기도 했다(이렇게 연막로켓으로 아군에게 공격목표를 알려주는 것은 현재도 사용 중인 방식이다). 미 공군은 이러한 T-6를 모스키토라 불렀다. 전쟁 초기에는 미 공군이 단독으로 모스키토 임무를 수행하거나 우리군과 협동으로 작전을 하기도 하였으나 이후에는 우리 공군이 독자적으로 모스키토를 운용하였다.
우리 공군이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게 된 뒤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리산 일대의 무장공비 토벌 작전에 임하였다. 무장공비는 이 근방에 있던 가야산에도 숨어있었는데, 문제는 이 가야산에 바로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가 있다는 점이다.
1951년 12월 18일, 미군 소속 모스키토의 인도아래 우리 공군 소속 F-51D 4기가 무장공비 토벌을 위해 가야산 일대로 출격하였다. F-51D는 500파운드 폭탄 2개와 로켓 6발을 탑재하고 있었으며, 다만 1번기는 폭탄 대신 네이팜탄(불이 잘 꺼지지 않는 네이팜을 넣어둔 소이탄)을 탑재하고 있었다.
무장공비는 해인사 일대에 참호등을 파고 버티고 있었으며, 이 지역은 폭탄과 로켓, 특히 네이팜탄으로 확실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지시가 있기 전에는 절대로 로켓/폭탄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기관총만으로 무장공비를 공격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결국 F-51D 편대는 기총소사만으로 무장공비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공격했다. 무장공비들은 근처 숲이나 해인사 안쪽으로 몰려들었다. 모스키토는 해인사쪽을 로켓/폭탄으로 공격하라고 지시하였으나 김영환 대령은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기관총만으로 지상공격을 하도록 했다. 이후 F-51D 편대는 해인사 뒤쪽에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다른 무장공비 세력에 폭탄과 로켓을 이용해 공격했다.
귀환 한 뒤 저녁, 모스키토를 담당했던 미군 소속 장교는 김영환 대령에게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 및 팔만대장경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였고, 이 때문에 로켓/폭탄, 특히 네이팜을 이용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하였다. 더불어 지상에서 해인사쪽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무장공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강제로 끌려온 민간인들도 섞여 있을지 모르므로(실제로 그랬다) 함부로 해인사 쪽을 공격할 수 없었다고 설명하였다.
미군 장교는 김영환 대령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김영환 대령의 지시 불이행에 대해 수긍하였으며, 경례로 답하였다고 한다.
1차 대전 당시 각국 공군은 자신의 국적을 나타내는 국적마크를 사용했다. 프랑스와 영국군은 각각 자신들의 국기에 있는 색을 따와서 빨강, 흰색, 파랑으로 구성된 동심원 모양으로 국적마크를 그렸으며. 독일은 자신들의 국가 상징인 철십자 마크를 그렸다(영국군이 프랑스군과 국적마크가 비슷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유니온 잭으로 바꿨다가, 멀리서 보면 유니온 잭이 철십자 마크와 비슷해서 아군에게 오인 사격 당하는 경우가 늘어서 다시 동심원 모양으로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영국의 유니온 잭과 이를 형상화한 영국 공군의 국적 마크]
미국도 이들과 유사한 동심원 모양을 썼으나 이후 동심원 대신 큰 원안에 별이 있고, 그 별 안에 작은 빨간색 원이 들어간 모양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국적 마크인 빨간색 원이 마음에 걸려서 국적마크에 있던 빨간색 원을 빼버렸다(잘못하면 이것 때문에 오인사격 받을 수 있으니...참고로 일본군과 싸우던 영국군도 국적 마크에서 빨간색을 빼버리고 파란색과 흰색으로만 된 국적마크를 사용했다). 이후 일본군의 마크와 확실히 다른 실루엣을 만들기 위해 줄무늬를 그렸으며, 미 공군이 독립하고 나서는 성조기의 줄무늬를 형상화한 줄무늬를 국적마크 옆에 붙였다.
[미 공군의 국적 마크 변천사. 1947년 이후 현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빨간 줄이 추가된 줄무늬가 완성되었다.]
본문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우리나라군도 얼마 전까지는 태극무늬 옆에 미군의 것과 비슷한 줄무늬를 사용해오다가 최근에는 태극기의 궤를 형상화한 줄무늬로 변경하였다.
[2009 에어쇼 당시 야외에 전시된 CH-47. 태극무늬 옆의 줄무늬가 태극기의 궤 모양으로 변경되었다.]
[F-15K 같은 전투기들은 회색 도색에 어울리도록 새로 그려진 국적 마크들은 이렇게 회색으로 되어있다.]
필자 이승진 어려서 부터 항공기에 관심을 갖다가96년 서울 에어쇼를 보고 전투기에 푹 빠졌다. 그 뒤로 항공우주공학과로 대학에 들어갔으며 군 복무를 위해 공군 기체정비병으로 근무하였다. 전역 후 남은 학부과정 및 석사 과정을 거치고 현재는 방위산업 관련 업체에서 근무 중이다. 스타워즈를 배경으로 한 게임 , X-WING을 즐겨서 xwing이라는 아이디로 블로그 활동 중이다. 이승진님의 블로그 주소 http://blog.naver.com/p47d 이글은 공군웹진에 기재된 글을 인용한 글입니다. 일부 사진은 추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