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왕 대축일 (2019. 11. 24)
콜로새서 1.12-20
형제 여러분,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
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기를 빕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
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
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
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
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루카복음 23. 35ᄂ-43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
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
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
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
님과 함께 매달인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
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
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
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신부님 강론 말씀
오늘은 전례력으로, ‘다해’를 마무리하는 주일로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축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전능하신 하느님 아
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왕으로서 영광을 받으시고 세말에 심판하러 재림
하시시라는 것을 신앙으로 믿고, 또 그분의 왕국은 끝이 없으리라고 고백합
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경축하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
의 생애중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요, 가장 무력한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습
니다. 예수님은 다른 두 죄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로마 군사들은 가
시관을 그분의 머리에 씌우고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
원해 보아라” 하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위에는 ‘유다인들의 왕, 나
자렛 사람 예수’ 즉, 라틴어 ‘Iesus Nazarenus Rex Iudeorum'의 약어인
'I.N.R.I'라는 명패가 붙여졌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명이, 스
스로 ‘유다인들의 왕’이라고 한 사실 때문이라고 그 죄명패가 십자가에 붙어
있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한 그 예수가 바로 그들
의 왕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입니다. 유다인들은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데 역사는 그를 ‘유다인
의 왕 예수’라고 부르고 있으니까요.
‘그리스도 왕’은 이 세상의 왕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왕이 아니라, 오늘 복음
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왕이십니다. 그래서 ‘왕이신 그리스
도’는 화려한 금관을 쓰고 높은 어좌에 앉아 영광을 누리는 분이 아니라, 십
자가 위에서 온갖 모욕과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왕으로서의 영광보다는 이렇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신앙고백하는 날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2독서에서 바오
로 사도는 만물의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만물이 하느님과 화해
를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하느님과 단
절된 세상이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도록 하느님의 아들께서 직접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그들의 죄를 대신 기워갚으심으로써 온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
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하느님의 계획은 바로 이것이었고, 세상 창조때부터 진행되었던 하느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된 곳이 바로 십
자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임금이신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되
는 장소요, 달리 이야기하면 하느님의 나라이며 거기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자 만군의 임금으로 드러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왕권은 하느님의 계
획에 따라, 우리 모두를 위해 철저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모습으로 드러
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우리는 십자가에 기꺼이 매달리신 예
수님이야 말로 만군의 임금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높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셨음에 감사드리며, 우리도 그분처럼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왕(王)이라는 한자를 보면 맨 위에 획은 하늘을 나타내고, 중간 획은 사람을
나타내며, 맨 아래 획은 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왕(王)이란 하늘과 사람과
땅을 이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王)이란 글자를 잘 살펴보면, 맨 위에
획 하늘과 맨 아래 획 땅을 이어주는 것은 그 가운데에 있는 십자가(+)입니
다. 그래서 하늘인 하느님과 땅인 세상을 이어주는 왕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
신 예수님이십니다. 참다운 왕은 십자가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제사로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도 십
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그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 길을 따라 간다는 뜻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셨
듯이,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고 살기 위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통과 어
려움을 짊어지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아서, 다시 한번 우리를 위해 목숨
을 바치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참된 임금이심을 고백하도록 합시다. 또한 그 분 덕택에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보게 되었고, 세상이 예수님께
서 전해 주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짐을 알게되었음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에게 봉사하
는 삶으로 ‘그리스도의 왕직’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