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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문화의창설

박해의 원인

작성자paolo lee|작성시간09.02.05|조회수8 목록 댓글 0

한국 천주교회가 세워진 이후 100여 년 동안은 박해 시대라고 할 만큼 교회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물론 박해와 박해 사이에는 일종의 휴지기도 있었지만, 박해를 강행하는 정부의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 조선 왕조의 정부에서 단행한 천주교 박해의 원인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박해의 원인을 정치와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왕조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받들던 사회다.

당시 성리학은 정치 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구실까지 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사상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것은 집권층의 주요 임무였다.

그런데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던 당시에는 성리학이 여러 방면에 걸쳐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는 집권층의 정치 사상과 통치 능력이 부인되고 있다는 말도 되는데,

당시 집권층은 이런 현상에 위기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천주교 신앙이 들어오면서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각종 사회 원리를 부인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펴 나가고 있었다.


천주교에서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부인하였으며,

당시 사회 풍습과는 달리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천주교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조상에 대한 제사마저 일종의 미신 행위로 간주하며 조상 제사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였다.

 

 이는 조상 제사로 상징되던 일체의 구제도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여,

 당시의 집권자들은 천주교가 성행하면 양반들이 존중하는 유교가 무너지고, 양반의 권위도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당시의 집권층에서는 전통 가치를 보존하고 양반의 정치적 권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또한 신자들은 하느님을 왕보다 더 높임으로써 가장 높은 존재로 여기던 왕의 지위를 하느님 아래에 놓았다.

그리고 양반층의 공통된 의견이며 왕의 명령인 실정법에서 천주교를 금지하고 있는데도

이 법을 어기며 계속해서 신앙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심법이 양반 사대부의 법보다 더 존귀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종교와 양심을 국가의 권위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아 온 동양 문화의 전통에 젖은 집권층에서는

신자들의 이러한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집권층은 천주교인들이 왕과 양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교회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한편 부패한 관리들은 교회 탄압을 가중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니,

이들은 천주교인들을 체포한 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정식 명령을 받지 않고서도 관리들은 천주교인들에게 사사로이 박해를 가하였다.

또한 박해 시대 신자들은 집안의 형제 친척과 이웃들한테서도 박해를 당하였다.

당시 신자들은 일종의 정치범이며 사회 풍속을 혼란시킨 풍속 사범, 이질적인 사상을 가진 사상범으로 처벌되었다.

연좌제 적용을 받고 있던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그를 심하게 탄압함으로써

자신과 가문을 지키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천주교 박해는 조선 왕조의 독특한 정치 문화와 가족 제도 때문에 더욱 심화되어 갔다.


박해가 진행되자 신자들은 관원의 눈을 피해서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부패한 관리의 탄압에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산속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들은 틈을 타서 민중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때로는 도적이 되어 관리들과 토호들을 괴롭혔다.

그런데 박해를 피하려고 숨어 사는 천주교 신자들도 이들처럼 비밀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비쳤으며,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민중 봉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하였다.

이 때문에 집권층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도둑 떼와 같이 여겨 천주교를 탄압하게 되었다.

당시의 불안정한 사회상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한편 박해가 일어난 데에는 당시 교회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동양에 천주교가 선교되던 초기와는 달리,

교회는 18세기에 들어와서 동양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너무도 인색하였다.

그리하여 동양의 미풍양속에 속하는 조상 제사마저 미신으로 여겼다.

교회 당국의 이와 같은 생각은 동양의 기존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으로까지 해석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발이 천주교 박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조상 제사의 금지는 박해의 빌미가 되었고 당시 교회 지도층의 편협한 태도에서도 박해의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교회는 1930년대에 이르러 조상 제사에 관한 문제를 다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조상 제사가 지닌 부모에 대한 효성만을 올바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인들은 조상 제사를 떳떳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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