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됨으로써 우리나라 교회는 북경교구의 관할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교구가 설정된 것은 조선인 신자들의 꾸준한 청원과 파리 외방 전교회의 응답에 따른 결과였다.
조선인 신자들의 청원을 받은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고자 했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소속된 브뤼기에르(Brugui럕e, 1792~1835년) 주교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그는 조선교구 제1대 교구장이 되어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으나
새로운 사목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뜻을 이은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1835년 이후 조선에 입국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이들은 신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으며 조선 교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 신자들의 숫자가 늘어 갔으며, 그들의 신앙도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839년 다시 박해를 일으키어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년) 주교를 비롯한
3인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체포·처형하였다. 이때 순교한 신자들로는 유진길(劉進吉, 1791~1839년) 등을 들 수 있다.
정하상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 신앙을 변호한 것도 바로 이 박해에서였으며,
그 또한 이때 순교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는 조정의 천주교 탄압이 국내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국제 문제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 들어온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최양업(崔良業, 1821~1861년) 등을 선발하여 중국의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그 후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로 수품되어 국내에 돌아와 활동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몇몇 신자와 함께 선교사를 맞이할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고자 노력하다가 체포되어 1846년에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를 전후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최양업도 사제가 되어 귀국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산간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면서 교우들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또한 교리 내용을 쉽게 알려 주기 위하여
「사향가」(思鄕歌)를 비롯한 천주교 가사를 지어 부르게 하였는데,
이러한 천주교 가사는 신자들의 묵상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 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죽었다.
이처럼 선교사들과 조선인 성직자 그리고 신자들의 노력으로 교회는 발전되어 갔다.
교회 초기부터 186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신자 수는 다음 <표 1>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표 1> 박해 시대의 교회 현황
연도 | 신자 수 | 외국인 선교사 | 조선인 신부 |
1789 | 1,000 | 0 | 0 |
1790 | 4,000 | 0 | 0 |
1796 | 10,000 | 1 | 0 |
1859 | 16,700 | 8 | 1 |
1865 | 23,000 | 16 | 0 |
1860년대 초의 교회는 거듭된 박해에도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에 고종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천주교가 성행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대원군은 정권을 장악한 직후 왕실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국가 체제를 한층 강화하고자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사상을 정비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지방 유림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철폐하기에 앞서, 이단으로 지목되던 천주교부터 척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순결성을 먼저 과시하면서, 사족(士族)들을 위압하려 한 듯하다.
대원군은 1866년부터 1874년 그가 하야할 때까지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대원군 집권기에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기간은 1866년 이후 3년 동안이었다.
이 박해 과정에서 조선에서 선교하던 12명의 프랑스인 가운데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년) 주교, 다블뤼(Daveluy, 安, 1818~1866년) 주교를 비롯하여 아홉 명의 선교사가 순교하였다.
이에 1866년 프랑스 해군은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도발하여 강화도를 침략하고 약탈을 감행하였다.
또한 1868년에는 흥선 대원군의 생부(生父)인 남연군(南延君) 묘를 파묘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는 박해를 피해서 중국에 피신해 있던 페롱(Fe쳑on, 1827~1903년) 신부가 개입되었다.
이 도굴 미수 사건의 여파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혹독하게 전개되어,
충청도 해미에서는 많은 신자를 생매장 학살하기까지 하였다.
1866년에 시작되어 3년여에 걸쳐 집중적으로 진행된 이 박해 과정에서
남종삼(南鍾三, 1817~1866년), 홍봉주(洪鳳周, ?~1866년) 등 많은 신자가 신앙을 증언하고자 순교하였다.
또 제너럴 셔먼 호(號) 사건을 빌미로 삼아 1871년 미국 해병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외세와 결탁된 것으로 간주되던 천주교는 또다시 탄압을 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사에 기록된 큰 박해로는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를 들 수 있다.
이렇게 100여 년 동안 이어진 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사람 가운데
오늘날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대략 1,800여 명에 이른다.
물론 이들 외에도 무명의 순교자들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사람의 숫자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지금 파악하고 있는 이 숫자 외에도 더 많은 순교자가 있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순교자들 가운데 1839년의 박해와 184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 이하 79명은
1925년 로마에서 복자로 선포되었다.
또한 186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이들 가운데 24명도 1968년 로마에서 시복되었다.
이들 103명의 복자들은 1984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로써 세계 교회는 103명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한국 순교자를 확실히 기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