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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문화의창설

초기의 신앙 공동체(1784-1801년)

작성자paolo lee|작성시간09.02.05|조회수13 목록 댓글 0

초기의 신앙 공동체(1784-1801년)

 

교회 창설 직후 복음 선교에 앞장선 인물로는 이승훈, 이벽, 권일신이 있다.

권일신의 제자인 이존창(李存昌, 1752~1801년)은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전주에서는 유항검(柳恒儉, 1756~1801년)이 신앙을 전파해 갔다.

이 밖에도 많은 신자들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기쁘게 실천하면서 교회 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힘을 바쳤다.


이렇게 출발한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창설 직후부터 탄압에 직면하게 된다.

1785년 봄, 형조(刑曹)의 관리들은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적 모임을 하고 있던 신자들을 검거하였으나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이 양반인지라 방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형조는 양반의 범죄를 다스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함께 체포된 신자 가운데 중인 출신인 김범우는 고문을 하고 유배를 보냈다.

귀양을 살던 김범우는 고문받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이러한 탄압에도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오히려 조직을 다져 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1786년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설정하기까지 하였다.

가성직 제도는 성품성사를 받지 아니한 신자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업무까지 수행하던 비합법적 제도를 말한다.

 이를 가성무집행 제도(假聖務執行制度)라 하기도 한다.

 

고해성사와 견진성사 그리고 미사 집전은 성직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미처 알지 못한 당시 신자들은 미사와 고해성사 등을 집전하였다.

이 가성직 제도 아래에서 이승훈은 교회의 으뜸가는 지도자가 되었고, 모두 10여 명의 신자가 신부로 추대되었다.

 가성직 제도는 교회법으로는 올바른 일이 아니나, 교회 조직을 갖추어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선교를 강화해 보려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가성직 제도는 1789년경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가면서 가성직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게 되었고

이에 관해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다.

1790년에 도착한 답변에서 북경 주교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조선에 선교사 파견을 약속하는 한편,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선교사를 맞이하는 기쁨과 조상 제사 문제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우려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장자(長子)에 대한 제사 상속권 강화를 기반으로 하여

양반 사족들이 본격적으로 사대 봉사(四代奉祀)를 하게 된 시기는 17세기 이후다.

조상 제사는 당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던 효심의 자연스런 표현으로,

사대 봉사는 양반 신분의 상징이다.

 사족들은 사대 봉사를 통해서 팔촌친(八寸親) 공동체를 형성하여 변동하는 사회에 대처해 가고 있었다.

이렇듯 조상 제사는 양반 가문의 사회적 결속과 존립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 때문에 조상 제사 금지는 양반 사족 출신 신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조상 제사 포기는 양반으로서 명망과 특권을 버리고,

가문을 존립시키는 사회적 기반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앞서서 양반 문중의 박해가 심각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때 사대봉사를 하던 양반층 신도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새롭게 터득한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자신이 원래 속한 유교 문화로 재편입해 가면서 초기 교회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양반들도 탈락하였다.

따라서 1790년대 이후에는 교회를 이끄는 지도급 신자들도 바뀌었다.

 양반층 신자들이 탈락한 반면, 양반으로서 특권을 포기하고

조상 제사를 거부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킨 사람들과 중인 이하의 인물들이 교회를 지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상 제사를 거부한 윤지충(尹持忠, 1759~1791년)과 권상연(權尙然, 1750~1791년)은 1791년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우리 교회사에서 첫 순교자들로 기록되었다.

그들의 순교로 양반층 신자들이 빠른 속도로 탈락해 나가면서

1791년의 박해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양반 지식층이 주도하던 종교에서 민중들의 종교 운동으로 그 성격이 전환되어 갔다.


한편 북경의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794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파견하였다.

중국인 성직자로서 조선에 파견된 그는 조선의 신생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였다.

그의 노력과 신자들의 전교 활동으로 조선 교회는 크게 발전하면서 신자 수가 1만여 명에 이르게 된다. 이때 신자들은 주로 경기와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전교 활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한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이때에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했던

윤유일(尹有一, 1760~1795년), 최인길(崔仁吉, 1764~1795년), 지황(池璜, 1766~1795년)과 같은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강완숙(姜完淑, 1760~1801년)을 비롯한 신자들의 보호로 주문모 신부는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들어온 이후 일부 지역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소규모의 탄압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탄압 가운데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신앙을 증언하는 신자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그리고 신자들은 명도회(明道會)와 같은 신심 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자선 활동을 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鍾, 1760`~1801년)이다.

 

그는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순수한 한글로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천주교 교리를 요약하여 제시해 준 정약종은 1801년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조직적으로는 차츰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최창현(崔昌顯, 1754~1801년)은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회 조직과 발전에 초석을 놓았으며,

강완숙과 윤점혜(尹占惠, 1776~1801년)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여성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당시 교회에서 ‘여회장'(女會長)으로 불렸다.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서 활동하던 정산필(鄭山弼, ?~1801년)이나 ‘김승정'의 경우처럼 지방에서도 ‘회장'을 임명하였다.

이 회장들은 주문모 신부가 교회 조직을 정비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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