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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문화의창설

교회창설의과정

작성자paolo lee|작성시간09.02.05|조회수12 목록 댓글 0

교회 창설 과정(1770~1784년)

 

조선 왕조에 한문 천주교 서적이 전래된 이후,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해 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 가운데 대표적 인물은 홍유한(洪儒漢)이었다. 1770년경 천주교 서적을 읽고 감동한 홍유한은,

천주교 교리서에 나타나 있는 대로 날짜를 7일씩 계산하여 일곱째 날을 주일로 삼아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는 금욕 생활과 기도 생활을 실천했을 뿐 아니라, 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날마다 소재(小齋)를 지켰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기꺼이 도왔다. 그는 비록 세례를 받지는 못했지만

 이와 같이 책을 통해 터득한 천주교 신앙을 혼자서 실천해 나갔다.


그 뒤 천주교 교리에 대한 깊은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이 연구를 주도하는 지식인들은 정치적으로는 기호(畿湖) 남인(南人) 계통에 속하고,

학문 전통으로는 성호 학파(星湖學派)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당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년)의 학문을 이어받아 연구하던

권철신(權哲身, 1736~1801년), 정약전(丁若銓, 1758~1816년) 등

일단의 지식인들은 1777년에 이르러 서울 부근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유교 경전을 강학(講學)하고 있었다.

 주어사에서 강학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이벽(李檗, 1754~1786년)도 여기에 합류한다.


그들은 주어사에서 유교 경전을 강학하면서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서적을 참조했고,

서학서에 언급된 내용들도 검토하였다. 이들이 검토하는 서적 가운데는 「천주실의」와 「칠극」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강학의 참여자 가운데 몇몇은 천주교 서적에서 인생에 대한 해답을 얻고 천주교를 신앙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결심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대표적 인물은 이벽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결심이 곧 교회 창설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 창설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전제가 된다.


이벽은 교리를 연구하는 일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천주교에 관한 지식을 좀 더 많이 얻고자 하였다.

마침 그때 이벽의 동료 이승훈(李承薰, 1756~1801년)이 부연사(赴燕使) 일원으로 중국 북경(北京)에 가게 되었다.

이벽은 곧 이승훈을 만나 북경에 가거든 선교사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책들을 구입해 올 것을 부탁하였다.

 이 부탁을 받은 이승훈은 북경에 간 후 선교사를 만나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고 나서 천주교 책들과 성물을 가지고 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가져온 서적의 일부를 이벽에게 넘겨 주었다.

 

이벽은 몇 개월 동안 이 책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승훈과 함께 친척과 친지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벽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 형제들을 찾아가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덕망이 높은 권일신(權日身, 1742~1792년) 등을 입교시키는 한편,

 김범우(金範禹, ?~1786년)를 비롯한 중인(中人)들에게도 전교하였다.


1784년 9월(음력) 이승훈은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여기에서 한국 교회의 출발점이 마련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교회 또는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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