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가 세워지기까지는 사실 오랜 배경준비 기간이 필요하였는데,
이 준비 기간에 비축한 힘은 당시 사회의 요청에 힘입어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우는 원동력이 된다.
선교사의 도움 없이 교회를 창설한 사건은 기적이라기보다는, 18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요청이었으니,
이 점을 알려면 교회 창설 배경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는 대내적 요소와 대외적 요소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배경으로는 조선의 대내적 요소를 주목할 수 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문화와 사상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의 남송에서 발생하여 조선 왕조에서 완성시킨 개신유학(改新儒學)인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비판이 움터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실학 사상이 대두되었다.
실학 사상은 유교 경전을 해석함에 주희(朱熹)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데 반대하고,
공자나 맹자 단계의 원초 유학(原初儒學)으로 돌아가려는 학문 경향을 말한다.
당시 실학자들은 성리학에 회의를 품고 이에 대체될 수 있는 새로운 사상 체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실학자들은 중국의 유교 철학을 깊이 연구하는 과정에서 원초 유학에는 천(天),
또는 상제(上帝)에 대한 관념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실학 사상이 가지고 있었던 성리학에 대한 비판의 분위기와 그들이 원초 유학으로써 이해했던 상제 등에 대한 관념은 유일신 사상인 천주교 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이와 같은 문화적 변동 과정에서 새로운 사상에 대한 지적 요청은 한층 강화되었다.
이 요청을 충족하기 위해서 당시의 지식인들은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책자를 구입하여 중국의 사상을 검토하였다.
그들이 검토한 서적 가운데에는 각종 천주교 서적이 있었다.
이 한문 서학서(漢文西學書)들도 원초 유학에 입각하여 보유역불론(補儒易佛論)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남인계 지식인들은 당시의 서학서에서 원초 유학이라는 공통 요소를 발견했고
상대적으로 쉽게 서학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창설될 수 있었던 대내적 배경에는 문화적 분위기와 함께 사회 변동상도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 왕조는 불평등한 신분제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국가이다.
당시 사회는 양반과 양인(良人), 그리고 노비와 같은 신분에 따른 여러 가지 차별을 당연시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회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로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와 같은 신분 제도가 급격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당대 많은 사람이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고 있었으며,
그 평등을 보장해 주는 새로운 이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함을 주창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교회 창설의 두 번째 배경으로는 대외적 요인으로 천주교회의 동양 선교를 들 수 있다.
서양에서 종교개혁을 체험한 천주교는 자신의 쇄신을 다지는 한편 동양과 신대륙에 대한 선교를 시도하였다.
특히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 단체들은 일본과 중국 선교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1592~ 1598년)이 발생하여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하여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가운데 몇몇이 일본에서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으며,
일본의 박해 과정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입교와 순교는 한국사와는 무관하게 전개된 일본 교회사의 한 부분일 뿐,
한국 교회 창설과 직접 연결될 수는 없었다.
한편 중국에 진출한 선교사들은 각종 천주교 서적을 한문으로 간행하였는데,
이 한문 서학서(西學書)가 조선에 전래되면서 한국 교회 창설에 직접 계기로 작용한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지은 마테오 리치(Mateo Ricci, 利瑪竇, 1552~1610년)였다.
그리고 판토하(Pantoja, 龐迪我, 1571~1618년)의 「칠극」(七克)과 같은 책도 비교적 널리 읽혔다.
중국에 온 선교사들은 포교에 앞서 중국의 말과 풍습을 깊이 연구하고,
중국의 문화를 존중하며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대표 종교인 유교를 연구하였고,
그 결과 천주교 신앙은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를 보유론(補儒論)이라 한다.
「천주실의」는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천주교 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의 관계를 밝히고, 중국 지식인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알리는 데에 큰 구실을 하였다.
그 밖에 17세기에 들어와서 여러 선교사가 천주교 신앙을 소개하는 많은 종류의 책을 저술하였다.
당시 조선과 중국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 왕조 조정에서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사신 편을 통해서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문 서학서(漢文西學書)들이 조선에 전래되었는데,
조선의 지식인들은 거의 150년 넘게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그 내용을 검토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천주교 서적에 대한 비판도 있었으나,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지식인들도 점차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천주교를 새로운 인생 철학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아 천주교를 새롭고 참다운 종교로 믿고 실천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중국에 전파된 천주교를 통하여 또한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 서학서를 읽고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이 땅에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세워지게 된 외적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는 당시 조선 사회가 직면해 있던 대내외적 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창설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교회는 수용 초기부터 신앙에 대한 주체적 인식의 양상을 드러내며 크게 발전해 나간다.
조선 후기 사회의 이러한 실학적 분위기는 지식인들이 천주교 신앙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으나,
1791년에 일어난 조상 제사 문제로 상당수의 유교 지식인들이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면서 그 한계를 드러내는데,
실학 사상은 천주교를 수용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지만,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에는 큰 역할을 하기가 어려웠다.
교회 창설 직후부터 몇몇 신자들은 천주교를 반(反)유교적 신조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유학의 한 갈래이던 실학 사상보다는 당시 사회 변동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면서 확산되어 갔다.
사실 천주교 신앙은 창설 직후부터 민중 종교 운동의 특성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