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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상담사례 2]

작성자요나짱|작성시간21.09.01|조회수31 목록 댓글 0

[동성애 상담사례 2]

"금욕생활로 가능한가요?"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올해 신학대학 대학원 과정을 졸업한 사십이 훨씬 넘은 전도사입니다. 목사님에 대해서는 인터넷 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목사님께서 그런 사역을 하시는 것에 대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한국의 상황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목사님의 용기와 솔직하심에 다시 한번 더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목사님, 저는 신학교를 졸업한 전도사지만, 아직 독신이고 앞으로 독신으로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다소 표현이 부적절하더라도 너그럽게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동성애적인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어렸을 때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령 어린 시절에 어른들의 성기를 보면 좀 설레고 흥분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학교 시절에 동네 형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동성애였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다른 곳에서 다녔기 때문에 그런 현상도 없어졌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중학교 때의 그런 경험의 영향 탓인지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제가 그 당시 성적인 억압을 강하게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오히려 고등학교 시절에 성적인 관심이 없었고 학창시절에 흔히 하게 된다는 자위행위는 고등학교시절에는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면서 신앙에 눈이 떠가면서 성적으로 너무 억압한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욕구들을 자제했습니다. 물론 이때도 동성애적인 성향이 있지만 스스로는 내심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성적 욕망들을 죽이고 살아왔습니다.다행히 신학을 시작하면서 그런 관심들은 더더욱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물어도 자신 있게 나는 독신으로 평생 혼자 살 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여기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제가 서른 중반 나이에 집에서도 주위에서도 결혼 이야기를 자꾸 하여서, 그때 약 일년 가량을 하나님께 나의 이런 성향들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변화도 없었고 기도하기가 귀찮아져서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내가 이런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었을텐데, 이런 성향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동성과의 성관계는 극히 조심하고 독신으로 평생 복음을 위해서 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에 제가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유영모, 이세종, 이현필 같은 한국적 토착 영성가들의 금욕적인 삶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그래서 이후로 금욕적 삶이 결혼의 삶보다 한 단계 차원이 높은 삶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어느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이라고 공언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동성애적 성향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희미하게 남아서 순간순간 불쑥불쑥 솟아오르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방법의 욕구 분출도 하지 않고 금욕적인 삶을 지향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제가 지금까지 지켜왔고 유지해 왔던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습니까? 지금이라도 달리 생각해야 되는지요? 제가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만 억지로 버텨 온 것은 아닌지요? 그리고 그것은 어떤 유혹이 올 때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허약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제가 오늘 동성애자 사이트에 들어갔습니다. 비록 몇 시간 동안이었지만 사이트에서 보여지는 남자들의 벗은 몸들이 나를 강하게 사로잡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성적 흥분을 느꼈다는 말이죠.

 

그동안 그렇게 금욕적인 생활을 해 왔건만 이렇게 일시에 무너질 수 있는가 생각하며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유혹에 항상 노출되어 있구나라는 생각과 나의 의지라는 것도 앞으로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외로움과 고독에 직면할 때는 아무런 방패가 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저에 대하여 목사님께 조언을 받고 싶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상담자 답변]

"거짓 없는 진리의 자유 속으로"

샬롬 전도사님의 이메일 잘 받았습니다. 많이 힘드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육체의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을 갖고 계심에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며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존재로부터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몇 가지 질문에 대하여는 이미 형제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는 형제가 알고 있는 것처럼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고, 또 절제하며 투쟁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투쟁은 형제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이 있었기에 주 앞에 나아가는 형제의 믿음과 소망이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와 같은 육체적 소욕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죄의 사람들 때문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능히 세상을 지배하는 하늘의 악한 영들과 그 더러움으로부터 능히 이길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오신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의 죄의 짊을 대신 지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하신 영광의 모습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려 오신 것입니다. 동성애가 무엇 때문이냐는 논쟁은 소모적이고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것이 운명이라도 어쩔 수 없고 천성적이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죄된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사슬이며 올무일 뿐입니다. 동성애 행위를 하든지 안하든지 죄의 차이는 오십보 백보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 땅의 모든 인간에게 나타난 죄성을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죄인이라 하였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죄를 스스로 벗지 못합니다. 그것은 천형과 같은 올무이며 사슬입니다. 그것을 해결하신 분이 주님이며 우리는 그 죄의 사슬에서 벗어난 자유인이며 복음의 사람들입니다. 다만 아직까지 우리의 육신이 세상에 남아 있어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키지 못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은 옛 풍속에 이끌려 또 다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그러한 죄의 문제로부터, 넉넉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성취하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동성애는 분명히 죄이지만, 동성애자만이 죄인은 아닙니다. 이 땅에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믿음의 조상도 죄인으로 출발하였고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도 죄인으로 출발하였으며, 사도들도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며, 죄의 형벌인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려 속죄의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동성애자라고 해서 너무 억울해 할 것도 없으며 슬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 죄의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도록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로마서를 쓰게 된 원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동성애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리와 질서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만 아니면 어떤 죄를 지어도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죄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죄는 그 어떤 모양이든지 하나님이 미워하시며 원래 거룩한 형상대로 지음받음 인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싸움은 혈육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는 영들에 속한 것이라 한 것입니다.

 

형제는 이미 그 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을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 아직 형제가 육신의 옷을 완전히 벗어 버리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된 특권은 유효하며 지금은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죄의 속성을 벗어버리고 거룩한 성령으로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졌을 뿐입니다. 독신에 관하여 질문을 하셨습니다만, 독신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바울은 종말의 때를 사는 사람들에게 나와 같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다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주의 명령이 아니라 복음의 사명을 받은 사도 바울의 권고였습니다. 그러나 형제가 독신으로 살고자 하는 것은 주를 사모하는 헌신 때문이 아니라 벗어버리지 못한 형제의 육체적 소욕과 그에 속한 부담감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성을 좋아할 수도 없고 아직 동성애적인 성향을 이겨낼 수도 없기 때문에, 복음 사역자로서 양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형제는 후일 복음 사역자로서 사람에게 대하는 다른 얼굴과 하나님 앞에 죄의 모습을 가진 이중인격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믿음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성취하게 된다면 당신의 영과 혼과 육은 한 점도 부끄러움 없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은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가를 살펴서 그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형제가 동성애의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내를 맞아 부러울 것이 없는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고 당신은 많은 사람들을 주 앞에 인도할 수 있는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형제가 동성애를 짊어지고 독신으로 살아간다면 평생을 죄의식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이제 할 일은 자신의 육신의 문제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모두 못 박으시고 새롭게 태어난 의의 자녀로서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세상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법이 있듯이 의의 백성도 의의 백성이 살아가는 법이 있는데 그 모든 삶의 방법과 성취의 소망에 관한 것이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그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신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이겨야 하는 숙제는 아직 남아 있는데, 그것이 사실 쉽지 않은 문제로서 크리스천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문제를 다 알고 계시며 해결의 열쇠를 성경에 기록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육신의 노예의 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이 살아 있기 때문이며 아직 그 마음에 세상과 벗하고자 하는 욕망과 욕정이 살아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의 지식을 더하여 그 능력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스스로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형제에게 한 가지 권고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동성애를 숨기려 하지도 말고 덮으려고도 하지 마십시요. 당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며 당신의 인내는 결국 마음에 깊은 골을 만들고 또 다른 우울증을 유발하고 은밀한 죄를 짓게 할 뿐입니다. 차라리 당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그 문제를 주 앞에서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록된 말씀에 순종을 하도록 하십시요.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와 영들에 관하여 또한 죄의 문제와 의의 실현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실체에 대하여 깊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솔직히 말하여 우리가 신학교를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 역시 신학을 하면서도 죄의 문제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더욱 은밀한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자 하는 형제의 믿음을 책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는 지금 의를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고 힘에 겹도록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형제의 이러한 노력으로는 짊어진 짐을 벗어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형제의 모습을 그대로 주 앞에 내려놓고 주를 만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바디메오와 같이 더러운 옷을 내어버리고 주를 따를 결심을 하여야 할 것이며 나사로와 같이 당신의 욕심을 모두 사망 가운데 내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혹시 형제의 믿음이 위선이 있는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독신생활에 대하여 물으셨는데, 내가 지금 독신으로 사는 것은 아직 죄의 문제가 남아 있음도 아니며, 또한 과거의 아픈 죄의 기억 때문도 아닙니다. 오로지 나를 섭리하신 주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만약 주께서 지금이라도 나의 결혼을 축복하셔서 한 여인을 내게 이끌어 오신다면 나는 주의 뜻을 따를 것이며 나의 인생은 부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소망은 이보다 더 큰 사명을 갖고 있어서, 그 뜻이 주 안에서 성취되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또한 내 육체에 나를 시험하는 것이 아직도 있느냐고 하셨는데 그것은 이미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답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설혹 그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죄의 속성을 가진 육체 속에 거하므로 그의 생각과 마음에 따라 육체의 속성은 역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서 많은 사역자들 중에 범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를 엄하게 책망하시며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내 육신도 모든 사람들과 같이 죄의 속성 속에 있어 유혹에 노출되어 있으나 내 마음 판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능히 나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은혜의 말씀 밖을 넘어서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해결 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반문하겠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더 이상 동성애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적인 유혹이 있느냐 없느냐와는 다른 신앙적 문제입니다. 이 땅의 인간이 육신적 유혹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어불성설입니다. 바울도 내 안의 죄가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는도다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의 유혹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 능력은 성령의 열매로 얻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존경한다고 말한 유영모, 이세종, 이현필 같은 한국적 토착 영성가들에 대하여 나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이 어떻게 금욕적인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하지만, 나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능력으로 모든 죄를 넉넉히 이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금욕적인 생활과 거룩한 절제의 생활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네 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리라 하셨고 네 눈이 범죄하거든 뽑아 버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범죄의 금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여 네게 범죄하는 손을 짤라 버렸고 또 범죄하는 눈을 뽑았으니 네게는 범죄할 손과 눈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가령 누가 도둑질을 하다가 교도소에 들어갔다고 하십시다. 그럼 그는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언제 도둑이 아닐까요?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입니다. 또 어떤 성중독자가 범죄하다가 전자발찌를 차고 자신의 집에 격리되었다고 하십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성적 중독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환경적으로 봉쇄된 것뿐입니다. 아직 그의 머릿속에는 죄의 프로그램이 설치된 컴퓨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죄의 바이러스로부터 해방되려면 죄로부터 완전히 포맷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나는 욕구를 극복하기 위해 수도원이나 산 속에서 금욕생활을 한다고 그가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 전도사님께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동성애를 비롯한 모든 죄들이 마음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이길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디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꺼리김 없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 조금도 거짓된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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