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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것일 뿐 -척 스미스 목사

작성자지저스월드|작성시간21.09.14|조회수28 목록 댓글 0

완전한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것일 뿐

(Not Perfect, Just Forgiven)

Chuck Smith

 

아브라함의 믿음

 

하나님은 밤하늘을 가득 메운 영롱한 별빛 아래로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신 후 "아브라함아, 너는 이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가 만일 그 수를 셀 수 있다면 네 자손도 그와 같을 것이다" 말씀하셨다. 이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다. 이것은 이 땅의 믿는 모든 사람들의 믿음의 표상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둘로 쪼개어 놓은 짐승의 제물 사이로 지나가심으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공고히 하시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앞에 닥칠 장래의 일에 대한 계시를 주셨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최고로 고조 되었을 때에는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나온 조카 롯이 바벨론 연합군에게 사로잡혀 갔을 때, 집에서 기른 가신 318명을 데리고 가서 연합군을 쳐서 파하고, 사로잡힌 롯과 빼앗긴 재물과 친족들을 찾아 왔다.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믿음의 열정으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제사장 살렘 왕 멜기세덱의 축복 속에서 포도주와 떡을 떼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굳건한 믿음 속에서 살아갔던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표본으로 만들고자 들어 쓰셨을지라도, 그는 한결같은 온전한 믿음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서 믿음이 사라졌던 때가 있었음을 성경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창세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방인의 왕 앞에서 자기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자기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도 거짓말했던 사건이다. 그 거짓말로 인해 고향과 가족을 등지고 오직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을 따라 수천리 먼 길을 택했던 사라는 블레셋 왕의 첩이 되어야 하는 기막힌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세 분의 천사로 현현하신 하나님께 식사를 대접을 했을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성 사람들의 패역함을 알리시며, 그 성을 멸하실 것을 말했을 때, 아브라함은 소돔성 사람들을 중보하여 그들 속에 의인 열명이 있다면 소돔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얻어내었던 그 다음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사람은 영웅이 아닌 실패자

사람들은 누군가를 마음속에서 영웅으로 만들고, 그 만들어진 영웅을 숭배하고자 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 또한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 갈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승리했던 무용담이나 용맹한 사건들을 크게 부각시키며, 그의 연약한 면이나 실패의 순간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경우, 자신들이 힘써 만들어 낸 영웅의 이미지가 손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역사에 위대한 선지자나 믿음의 종이라도 그들의 잘못과 수치를 한치의 숨김없이 다 드러내어 그들도 다 연약한 사람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셨던 아브라함이라도 그가 철저하게 실패했던 부끄러운 일들을 가감감없이 기록하셨다.

 

만약 성경 속의 이야기들이 그저 전설에 불과한 것이라면, 아브라함은 후세 사람들로 그를 숭배하도록 영웅화한 것에 불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20장에 기록한 씻을 수 없는 수치스런 일을 리얼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 중 특히 오늘의 사건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던 위대한 사람들 모세, 여호수아, 요셉, 다윗, 다니엘, 바울 등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모두 실족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사람들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성경은 사람이 영웅이 되고, 그를 숭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성경에는 오직 한 분의 영웅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 한 분의 영웅이 바로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 실족했던 이야기 속에도 여전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실패담을 우리에게 가감없이 전해 준다. 하나님은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서 우리가 피조물인 사람들을 삶의 표본으로 삼거나 그들을 우상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이 모든 시험을 이기셨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은 완전한 사람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심을 우리에게 확증하고 있다.

 

거듭된 실패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아브라함의 실패는 삶의 경험이 부족했던 젊은 제자가 저지른 실패가 아니다. 또 이것은 아브라함의 생애 초반부에 일어났던 일도 아니고, 그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지 수십 년이 지난, 그의 생애가 끝날 무렵에 일어난 사건이다.

 

인생의 경륜으로 볼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당연히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블레셋 왕 아비멜렉 앞에 섰을 때 그는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랑하는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여 아비멜렉의 첩이 되게 하였다. 이런 일은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행하지 않는 아주 악한 행위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더구나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이 사건은 처음이 아니고 25년 전 애굽왕 바로 앞에서도 행하였던 동일한 수법이다. 물론 그때는 부름 받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을 받지 않았을 때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이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의인이란 믿음의 칭호를 받고 하늘의 별과 같이 수많은 믿음의 후손의 조상이 될 언약을 받은 특별한 성도였음에도 그는 비참하게 실패했던 것이다.

 

더구나 애굽에서의 실패 후, 하나님은 2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아브라함과 동행하면서 놀라운 일들을 체험케 하셨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할례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언약을 맺으셨다.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애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수없이 체험하였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애굽에서 행했던 수치스러운 일을 또다시 되풀이 한 것인지 우리는 도저히이해할 수 없다.

 

꿈틀 거리는 본성

그러나 알고 보면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죄의 속성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25년 동안 그 마음속에서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 마음 속에는 항상 죄의 본성이 꿈틀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죄들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충분히 다스릴 수 있게 되었지. 다른 것은 몰라도 다시는 그와 같은 부끄러운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나는 하나님께서 인정한 믿음의 사람이니까 충분한 능력이 있어!"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의 의지를 실행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계셨지만, 불행히도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25년이 지난 후에 아브라함에게 동일한 상황을 세팅해 놓으신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이 보잘 것 없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아울러 자신의 육신 속에 숨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죄의 속성들을 볼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라 누가 이를 알리요'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나의 마음을 모르오니 하나님이시여 내 마음을 살피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간구하였다.

 

우리는 종종 영적으로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된다. '내가 옛사람을 확실히 정복하였고 나의 본성과 육신을 언제든지 다스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어떤 시험이 닥쳐와도 끄떡하지 않을 것이다' 호언장담한다.

 

예수께서 사도로 부르신 베드로도 나는 죽을지언정 절대로 주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어떤 흉악한 것이 들어 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유혹에 빠지게 한다.

 

분명한 것은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는지, 또 우리의 육신 속에 어떤 더러운 것들이 꿈틀대고 있는 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신앙적으로 큰 실패를 경험하고 난 후, 죄책감 속에서 절망하며 '하나님, 내가 또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믿음생활 속에서 이것만은 정복한 줄로 알았는데, 어찌 또 이런 일을 또 저지른 것인지, 저는 정말 인간도 아닙니다.' 라고 울부짖는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문제의 근원은 그가 첫 번째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마무리를 철저히 해두지 않았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죄를 주께 온전히 고백하고 철저히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죄의 뿌리가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그 마음에 남아 있는 죄의 뿌리를 알게 하시고자 또 한 번 시험을 주신 것이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셔서 아브라함으로 하여 죄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본성을 사로잡는 죄의 습관을 마음에서 철저하게 뿌리 뽑아야 한다는 믿음의 각오를 갖게 해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고 그들을 시험하사 그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스스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을 모두 알고 계시므로, 자기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시험을 통해 깨우치신다.

 

실패의 프로그램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시험을 주시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새삼스럽게 우리들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의 육신적 단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속에 어떤 것이 있는가를 스스로 깨닫게 될 때, 스스로 자신의 육신이나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저지른 동일한 실수를 25년이 지난 후에 다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성경에 기록한 것도 결국은 믿음의 후손 된 우리를 위한 것이다.

 

혹시 여러분은 스스로 실패할 것을 자기 속에 프로그램화해서 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것은 심리학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종종 '나는 정말 그것만은 해낼 수 없어! 그 부분이 바로 나의 부족한 약점이기 때문에 나는 도저히 그 일을 당해낼 수 없어!' 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는 스스로 어떤 일이 닥치기도 전에 실패를 프로그램화하였기 때문에 싸워 보기도 전에 스스로 지고 마는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수상스키를 배울 때의 일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수상 스키라는 것을 신고 모터보트 뒤에 매달리어 가면서 방금 보트가 만들어 낸 파도를 타고 넘어야 하는데 마음속으로는 '나는 저 파도를 결코 넘지 못하지... 나는 파도가 밀려오기도 전에 넘어지고 말거야!' 생각했었다. 내 마음이 그러니 안 넘어질 재간이 있겠는가? 내 스스로 실패를 프로그램화했기 때문에 넘어져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사전 각본대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상스키를 여러 번 타면서 보트가 달리며 만들어 내는 파도를 즐기며 '첫 파도는 그냥 헤쳐 버리고, 두 번째 큰 파도가 오면 멋진 점프를 해야지!' 생각하면서 보트가 만들어 내는 파도를 향해 돌진한다. 그러면서 요리조리 물결을 타고 넘으며 점프도 하고, 여러 가지 멋진 모험을 하게 된다. 이는 '나는 저 파도를 넘지 못할 거야!'라는 내 의식에 저장된 프로그램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신앙의 심리학화이다.

 

우리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의 인생에도 자기의식 속에 스스로 입력해 놓은 실패의 프로그램들이 있다. '나는 도저히 해낼 수 없어! 나는 그것을 이겨낼 힘이 없어!' 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실패를 자초한다. 스스로 실패를 프로그램화 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바로 육체의 두려움으로 인해 실패의 프로그램을 마음 깊은 곳에 저장해 두었다. '어디를 가든지 내 아내를 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녀를 누이라고 말해야지, 그러면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이야!' 이렇게 스스로 실패의 무덤을 팠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으로 택한 아브라함의 잘못된 의식을 바로잡아 주셔야 했던 것이다.

 

신앙의 아이러니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영생의 복을 보장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건히 믿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내 영혼 평안해' 라고 소리 높여 노래한다. 그럼에도 당장 코앞에 어떤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절대 믿음을 갖지 못하고 전전긍긍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영생을 약속하셨음은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삶의 평안은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만들어 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 영생의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고 믿지만 오늘 눈앞에 일어난 하루의 고난들은 하나님께서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이와 같이 믿는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상실을 경험하는 때가 종종 있다. 자신의 방법대로 살고자 할 때 믿음이 약해져서 육신의 방법에 의존하게 되고, 결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할 때에야 자신의 능력이 없음을 깨닫는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지혜로 살아갔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은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는 우선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려고 한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스스로 행하는 육신적 행동을 막지 않으시고 실패의 골목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그것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실패를 통하여 우리가 스스로 살아 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연속된 실패를 통하여 그 인생을 바꾸어 가신다.

 

다시 일어나 걸어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커다란 은혜를 보았다. 그것은 바로 택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스스로 육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고, 그가 지은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가 스스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오직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아주 간단히 바꿔 놓으실 수가 있다. 우리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어마어마한 문제들도 하나님은 아주 쉽게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우리는 불가능할지 모르나 하나님으로서는 참으로 쉬운 일이며,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인생의 잡다한 일들을 해주시고자 기다리고 계신다.

 

사실 우리는 그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고 우리에게 닥친 그 시련을 감수해야 마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들의 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과 실패를 보시면서 미소를 짓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실족하여 넘어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의 손길로 붙잡아 일으키시고는 만신창이가 된 더러운 먼지를 털어 주시며 "자, 나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 걸어라."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믿는 나에게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허락하신 것은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요, 내 인생의 모든 길에서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앞에 흠 없이 서게 하실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서 연약함을 허락하신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일일이 들춰내 보여주실 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인생의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게 하실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스스로가 연약한 인간됨을 알고 주 앞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스스로 자백해야만 한다. '하나님, 저는 연약합니다.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나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나를 도와주세요'라고 청해야 한다.

 

완전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완전한 나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나의 죄인 됨과 연약함과 부족함을 모두 알고 계신다. 의심하는 믿음을 갖고 계신 것도 아시며, 교만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 싶은 것도 알고 계신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사모하는 것도 잘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이러한 육체의 모순을 가진 나를 부르신 것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인된 길로 인도하여 그의 이름으로 영광을 받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추천하신 믿음의 조상 아브함이 완벽한 사람이 못됐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은가? 만일 아브라함이 완벽한 사람이었다면 나 같은 사람은 벌써 오래 전에 두 손 들고 포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다. 용서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잊지 말자 "Not Perfect, Just Forgiven"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쓰러질 때 우리를 받아 주시고, 붙잡아 주시며, 지탱해 주시는 크고 영원하신 팔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우리가 오늘도 기도하여 구하오니 자신의 꾀만 믿고 행동하다가 복잡한 문제 속으로 얽혀 들어가 꼼짝없이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 저 불쌍한 영혼들을 도와주소서.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속에 갖고 계시는 계획들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와 함께 나누실 것을 미리 계획하셨으니, 설혹 사탄이 저들을 실족케 하여 넘어졌을지라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음을 깨닫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척 스미스 창세기 20장 강해설교에서

(다음호계속 / 자료 도서출판 건생)

 

 

필자 : Chuck Smith (Calvary Chapel Fellowship)

미국 Calvary Chapel 개척자│Calvary Chapel Bible College 설립자

1960년대 예수운동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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