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인정? 인간의 본성은 폭력과 야만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민음사)
문명이 사라진 사회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문명이 사라진 사회에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묻는 소설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영국에서 피난을 떠나던 소년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합니다. 생존한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사회적 규범과 권위가 완전히 사라진 세계에 남겨진 여섯 살에서 열두 살 사이 십여 명의 소년들.
처음에는 순수하고 협력적일 것만 같았던 아이들 사이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리더십과 권력, 공포와 폭력이 빠르게 등장합니다. 소규모 집단으로 나뉘고, 집단 간 혼란과 갈등이 커지며, 결국 물리적 충돌로 이어집니다. 사회적 통제가 사라졌을 때 인간이 보이는 충동적 행동은 독자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줍니다.
이 소설은 문명과 규칙이 사라진 세계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쉽게 폭력적이고 권력 중심적인 존재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사회적 억제와 질서가 사라질 때 폭력적 야만으로 되돌아가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작품 전반을 관통합니다.
국가 권력이 사라진 곳은 약육강식의 정글인가
“국가 권력이 사라진 곳은 약육강식의 정글인가?”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홉스의 사회계약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와 같은 존재이며, 고립된 개인은 생존을 보장받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은 자기 권리 일부를 국가에 위임하고, 국가는 그 대가로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게 사회계약의 핵심입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법과 제도가 사라진 사회는 곧 정글이 됩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폭력이 질서를 대신하는 세계입니다. 『파리대왕』의 무인도는 이러한 홉스의 자연 상태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회사업 현장에서만큼은) 또 다른 문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면서, 오히려 주체성과 연대성이 약화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정책과 제도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대신하면서, 개인은 사회 속에서 더욱 고립되고, 고립될수록 국가는 더 필요해지는 역설적 순환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파리대왕』은 홉스를 증명하는가
겉으로 보면 『파리대왕』은 홉스를 증명하는 작품처럼 보입니다. 국가도, 법도, 제도도 사라진 섬에서 아이들은 빠르게 폭력과 지배, 희생양 만들기로 치닫습니다. 이는 ‘국가 권력이 닿지 않는 곳은 정글’이라는 진단과 정확히 겹칩니다.
그러나 소설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다른 해석의 여지도 보입니다. 이 아이들이 정말 순수한 존재들이었을까. 소설의 배경은 알 수 없는 적과 싸우는 전쟁 중인 영국이며, 아이들은 핵전쟁을 피해 탈출하던 중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미 권위주의와 군사주의와 위계질서를 내면화한 아이들이 적절한 통제가 사라졌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그린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무인도에 남겨진 아이들은 협력의 기술을 배우지 못한 채 경쟁과 지배의 언어만 익힌 존재들이었을지 모릅니다. 민주적 규칙을 상징하는 ‘소라’는 있었지만, 그 규칙을 존중하게 만드는 신뢰와 책임 관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자연’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폭력적 문명을 이미 등에 지고 무인도에 도착한 셈입니다. 따라서 『파리대왕』은 ‘국가가 없으면 인간은 야만적’이라기보다, 관계와 상호부조를 학습하지 못한 인간은 국가가 사라질 때 가장 먼저 폭력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와닿았습니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을 지나치게 낙관했는가
『만물은 서로 돕는다』 저자 크로포트킨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살았던 러시아 학자입니다. 그는 사회학이나 역사학, 지리학에 능통했습니다. 동물학도 그의 연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크로포트킨은 동식물과 오랜 인간 사회에서 이어져 온 협력하는 모습을 통해 만물은 적자생존이 아니라 상호부조의 삶의 방식으로 진화 발전해 왔다는 것을 이론으로 정리했습니다. 인간은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이라는 ‘사회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했습니다. 『사회복지사의 독서노트』 (김세진, 2014, 푸른복지)
이 지점에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다시 떠올립니다. 크로포트킨이 말한 상호부조는 ‘인간은 본래 착하다’는 도덕적 선언이 아닙니다. 상호부조는 본능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성취입니다. 협력은 저절로 발생하지 않으며, 조건과 환경, 관계망 속에서 강화되거나 약화됩니다.
크로포트킨은 동물 세계와 인간 사회의 긴 역사를 통해, 개별적으로 강한 존재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상호부조를 통해 군집을 이룬 종이 진화해 왔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상호부조가 억압되거나 파괴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습니다. 국가 권력, 경쟁 중심 제도, 위계 조직은 대체로 이런 능력을 마비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이렇게 보면 『파리대왕』의 세계는 크로포트킨의 반례라기보다, 상호부조가 자랄 토양을 잃어버린 사회의 극단적 축소판에 가깝습니다. 결국 쟁점은 ‘국가냐 자연이냐’가 아니라, 인간을 어떤 존재로 가정하느냐에 있습니다.
『파리대왕』이 사회사업가에게 던지는 질문
“국가 권력이 닿지 않는 곳은 정글인가?” 이 질문은 사회사업가에게 다시 이렇게 다가옵니다.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상호부조가 자랄 공간은 어디에 남아 있는가?”
『파리대왕』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협력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가, 갈등을 조정하는 관계의 기술을 연습할 기회를 주고 있는가, 공동의 삶을 꾸려볼 작은 실천의 장을 남겨두고 있는가. 이 조건이 없다면, 국가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왜곡된 사회가 남긴 폭력의 잔재일 가능성이 큽니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가정하느냐? 그 본성을 선이나 악이나 그 무엇으로 타고났든지 때때로 이웃을 만들고 인정을 경험할 기회가 두루 주어진다면, 선한 마음으로 그럭저럭 어울려 살아갈 거라 믿습니다.
관계 중심 복지국가를 향하여
크로포트킨의 인간 이해는 복지국가를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인간 본성이 상호부조와 연대에 있다면, 복지국가 역시 이를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대합니다. 핵심은 복지국가의 존재가 아니라, 복지국가가 ‘개인과 가족, 공동체의 관계를 어떻게 다루는가’입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을 책임지는 국가 제도는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사이의 인정과 나눔, 관계와 소통을 약화시키거나 대체한다면, 복지는 인간다움을 빈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계를 자원봉사자와 대상자, 후원자와 대상자, 서비스 공급자와 수요자로 구분하는 순간, 복지는 ‘관계’가 아니라 ‘거래’가 됩니다.
사회사업 관점에서 지향해야 할 복지국가는 개인과 가족, 공동체를 대신해 주는 국가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과 관계를 생동하게 하는 국가입니다. 복지정책은 가족 관계를 더 좋게 만들고, 이웃 간의 신뢰와 협력을 두텁게 하며, 공동체가 스스로 문제를 풀어갈 힘을 키우는 방향으로 작동할 때, 사회사업가로서 이상으로 삼는 ‘이웃이 있고 인정이 흐르는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관계 중심 복지국가’란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가 무엇을 대신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고, 국가의 지원으로 무엇을 지키고 생동하게 할지를 묻는 관점입니다. 사회사업가는 이 관점의 틀 안에서 복지국가의 의미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습니다.
맺음말
『파리대왕』 속 아이들에게는 민주적 규칙을 상징하는 소라도 있었고, 구조의 희망을 뜻하는 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믿고 갈등을 조정하며 함께 살아본 경험은 없었습니다. 규칙은 있었지만 관계가 부족했고, 공동의 목표는 있었지만 그것을 함께 지켜본 기억이 쌓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아이들이 상호협력을 배우고, 타인과 더불어 문제를 풀어본 경험이 있었다면, 그 무인도에서 삶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 지금 우리 사회에 이렇게 적용해 봅니다. 국가가 삶의 많은 부분을 대신해 주는 사회는 분명 안락해 보입니다. 위험은 제도로 관리되고, 어려움은 서비스로 해결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점 서로에게 기대지 않게 되고, 함께 결정하고 책임지는 경험을 잃어갈 수 있습니다. 상호협력의 경험이 줄어든 사회는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며, 타인과 힘을 합칠 기회를 쉽게 떠올리지 못할 겁니다.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국가가 무엇을 대신해 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가능하게 하느냐에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살아 움직이도록 돕고, 가족과 이웃, 공동체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는 국가라면, 그것은 상호협력을 약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북돋는 조건일 수 있습니다.
『파리대왕』은 인간 본성이 폭력과 야만이라는 결론을 단정하기보다, 관계를 배우지 못한 사회가 어떤 파국으로 향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대신해 주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함께 해볼 기회를 남겨두고 있는가. 이것이 이 고전에서 건져 올린 사회사업 실마리입니다. 상호협력의 경험을 일상 속에서 회복하는 일, 그 작은 장을 만들어 가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사회사업이 붙들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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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세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2.16 2022년 12월 21일 함께 읽었던 <파리대왕>
그때 읽으며 메모하고, 함께 모여 나누며 메모했던 내용을 이제야 정리했습니다.
https://cafe.daum.net/coolwelfare/OeKy/331 -
작성자김세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2.16 본문에는 담지 않았으나, 결국 사회사업가의 실천 핵심은 '이웃 동아리'와 '주민모임' 같은 집단사회사업에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놀게 해주세요. 다가오는 겨울, 기를 써서라도,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놀게 해주세요.
놀아야 민주주의(규칙)를 배우고, 상호부조를 배우고, 협력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