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의 시작, 기록 권력
『동물농장』 (조지오웰, 민음사)
약속의 붕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고결한 구호 아래, 인간 농장주를 몰아낸 동물들의 혁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혁명의 주역이었던 돼지들이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군림하며 기존의 압제자보다 더 타락해갑니다.
사회사업가로서 이 정치 풍자 우화는 ‘약속이 어떻게 권력으로 변질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취약한 존재들이 어떻게 조직적으로 침묵 당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더 나은 삶을 약속했던 말들이 어느덧 딱딱한 규칙이 되고, 그 규칙이 다시 당사자를 통제하는 도구가 되어버리는 과정은 우리 현장에서도 낯설지 않게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동물농장의 최초 일곱 계명>
무엇이든 두 발로 걷는 자는 적이다.
무엇이든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자는 친구다.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돼지들이 교묘하게 바꿔놓은 계명>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 어떤 동물도 ‘시트가 깔린’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 어떤 동물도 ‘이유 없이’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폭력이 되는 순간
사회사업 현장은 늘 선의에서 출발합니다. 『동물농장』의 동물들 역시 굶주림과 매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정당한 분노와 희망에서 혁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돼지들이 농장의 대표가 되어 동물을 지배했던 인간처럼 두 발로 서서 술을 마시는 마지막 장면의 오싹함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제도, 조직,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설계된 ‘질서’가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침묵과 복종을 요구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돼지들이 구사하는 교묘한 논리와 전문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보고서, 회의록, 심지어 상담 속 대화에까지 담긴 권위적이거나 전문적인 말들과 닮아 있습니다. 선의로 설계된 구조가 당사자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순간, 사회사업은 지원이 아닌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뒤바뀔 위험이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을 돕겠다는 사회사업이, 그 당사자를 자기 삶에서 소외시켜 버릴 수도 있습니다.
당사자의 ‘목소리 상실’과 침묵의 두 얼굴
『동물농장』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돼지들의 악행 그 자체가 아닙니다. 다른 동물들이 더 이상 질문하기를 포기하는 순간입니다. 토론은 사라지고 회의는 형식적인 박수만 남습니다. 이 장면은 당사자의 욕구가 제도 속에서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서선희·유은주·김옥연의 질적 연구는 무료 급식 서비스를 이용하는 어르신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침묵에 빠진 밥’으로 개념화했습니다. 어르신들은 맛과 양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공짜로 먹는 주제에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스스로 입을 닫습니다. 이는 『동물농장』의 돼지들이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인간 존스가 돌아온다’며 동물들에게 부채감을 심어주어 입을 막았던 전략과 닮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침묵’을 구분합니다. 당사자의 침묵은 권력 구조에 의해 강요된 ‘억압된 침묵’인 반면, 사회사업가의 침묵은 당사자의 목소리가 나오길 기다리는 ‘경청의 기술’입니다. 만약 사회사업가가 먼저 묻지 않는다면 경로식당의 식사는, 적어도 사회사업에서는 돌봄이 아니라 ‘길들이기’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지가 아니라, 질문할 권리의 박탈
『동물농장』의 피지배 동물들에게는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책임이 없을까요? 그들은 글자를 배우지 못했고, 돼지들이 써 붙인 계명이 조금씩 수정될 때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물 개개인의 ‘무지’를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돼지들은 정보를 독점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생존을 위한 노동(풍차 건설)에 매몰되어 성찰할 여력을 박탈당했습니다. 이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은 그 누구도 농장 운영 규칙에 조금도 관여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규칙은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질문하지 않는 규칙은 언제든 권력자의 언어로 다시 쓰입니다. 당사자가 자신을 위한 제도나 서비스를 자기 언어로 해석하고 말하지 못할 때, 당사자는 보호받는 대상에만 머물며 자기 일의 주체적 결정에서 멀어집니다. 대리 결정이 일상이 되고 참여가 형식이 되는 순간, 혁명으로 얻은 자유는 다시 새로운 억압으로 돌아갑니다.
사회사업 핵심 방법, 묻기
사회사업 실천에서 ‘묻기’는 단순한 대화 기법이 아닙니다. 이는 권력의 방향을 당사자에게로 돌려놓는 정치적 행위입니다. 작은 일조차 당사자에게 물음으로써, 우리는 당사자를 서비스의 수혜자가 아닌 자기 삶의 주인으로 다시 세우게 됩니다.
사회사업가에게 ‘침묵’이 기술인 이유는 그 빈자리를 당사자의 언어로 채우기 위함입니다. 사회사업가는 당사자의 침묵을 ‘만족’으로 오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 말하지 못하게 되었는가’를 끊임없이 묻습니다. 쉬운 말로 묻고, 반복해서 확인하며, 선택지를 설명합니다. 이 과정은 사회사업가가 쥔 결정권을 당사자에게 반납하는 실천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신 결정해 주는 친절’과 구분되는 진짜 전문성입니다.
『동물농장』의 돼지들이 아무도 모르게 농장 벽에 써 놓았던 동물들을 위한 계명을 수정했듯, 기록은 권력을 가진 자의 전유물이기 쉽습니다.
‘사회사업가는 객관성을 가장하여 당사자를 재단하는 기록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가치 편향성을 인정하고 당사자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려 애쓰는 정직한 목격자가 될 것인가.’
현장에서는 매 순간 이를 선택합니다. 기록은 사실의 나열이 아닙니다. 사회사업은 실천가가 이상으로 삶은 삶을 향하여 당사자를 안내하는 가치 지향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회사업가의 기록은 가치 편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불완전함을 공개하고 검토 받는 일이 사회사업 기록의 안전장치입니다.
객관성과 중립성을 ‘가장하는’ 기록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한계를 인정한 기록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인가. 사회사업 기록 윤리는 전자보다 후자에 가깝습니다. 기록이 객관적 사실의 작성이라기보다 자기 실천 가치에 따른 해석임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어떤 관점과 가치를 바탕으로 당사자를 이해하고 있는지 드러내는 게 오히려 더 정직한 태도입니다. 이는 기록을 ‘주관적 독백’ 정도로 만들자는 제안이 아닙니다. 사회사업가는 애초에 완벽한 중립적 시선을 갖지 못하는 ‘목격자’임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불완전함을 공개하고 검토하여 보완하자는 '안전장치'를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회사업가의 모든 실천은 이미 가치 편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사업 글쓰기』 ‘사회사업 기록,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환상’ (김세진)
맺음말
『동물농장』을 사회사업의 고전으로 다시 읽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질문하지 않는 공동체는 규칙은 유지할지언정 그 안의 ‘삶’은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회사업 핵심 기술로써 ‘묻기’는 권력의 흐름을 다시 당사자의 목소리로 되돌리기 위한 전문직 행위입니다.
돼지 스퀼러는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벽면의 계명을 수정합니다. 다음 날 동물들은 바뀐 글자를 보며 자기 기억을 의심합니다. ‘분명히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사회사업 현장에서 ‘기록 권력’도 이와 비슷하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공유하지 않으면 당사자는 자신이 어떤 상태로 기록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회사업가가 기록하는 문장이 당사자의 실제 삶보다 더 확실한 ‘진실’이 됩니다. ‘어르신은 고집이 세다’라고 기록하는 순간, 어르신의 ‘자기 의견 제안’은 순식간에 ‘저항 요소’로 변해버립니다. 나아가 당사자의 욕구는 점차 ‘성과 지표’에 맞춰 다듬어지고, 결국 당사자조차 처음에 스스로 무엇을 원했는지 잊어버린 채 복지기관이 설계한 프로그램에 순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회사업가는 밤마다 사다리에 올라가 벽면의 계명을 고쳐 쓰는 스퀼러인가, 아니면 그 사다리를 붙잡아 세우고 당사자와 함께 기록을 읽어 내려가는 동행자인가. 사회사업 기록은 당사자의 목소리를 수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를 보존하고 맥락을 해석하는 기술이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