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물을 마셔라
예레 11,18-20; 요한 7,40-53 / 사순 제4주간 토요일; 2024.3.16
오늘 복음은 초막절 축제에 참석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생명의 물에 관해 군중에게 가르치신 말씀을 듣고 난 그들의 반응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이러했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ㄴ-38). 여기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성경 말씀’에는 즈카르야와 예레미야 예언자의 두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날에는 또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 나와 절반은 동쪽 바다로, 절반은 서쪽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늘 그러할 것이다”(즈카 14,8).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예레 2,13)
그러니까 즈카르야 예언자는 예수님께서 보내실 성령을 암시하는 생수의 강이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와 온 세상 바다로 또 여름이나 겨울 등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흘러나올 것임을 희망적으로 예언한 반면,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백성으로 불리움 받은 유다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게 될 비극적인 상황까지도 내다본 것입니다. 바로 오늘 미사의 복음인 요한복음 7장에서 보도하고 있는 바로 그 상황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을 포함한 유다인 군중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3.35.)이라시던 카파르나움에서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초막절이 열린 예루살렘에서는 목마른 사람을 위한 생명의 물이시라고 당신 자신의 신원을 밝히셨습니다. 이 두 곳에서 보인 유다인 군중의 반응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엄숙하고도 비장하게 당신의 참된 신원을 밝히고자 하셨습니다. 매우 의도적인 처신이었습니다. 물론 ‘생명의 빵’도 ‘생명의 물’도 당신께서 미구에 겪으실 미래 사건 증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후 그 들의 믿음 안에 현존하시게 될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성령께서 믿는 이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실 것이며, 이 이끄심의 길은 공동선을 통해 최고선을 향하는 여정이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중 가운데에서는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 채 갈라져버렸습니다. 개중에는 예수님을 모세가 장차 오리라고 내다본 ‘그 예언자’(신명 18,15.18; 요한 7,40)로서 권위를 인정하는 이들이 있었고 심지어 ‘메시아’(요한 7,41)로까지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자신들이 갈릴래아에 대해 지니고 있던 편견을 근거로 거짓 예언자로 헐뜯는 이들도 있었습니다(요한 7,41ㄷ-42). 당대의 권세와 영향력을 행사하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당시 예루살렘 초막절에 모여 있다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밝히시는 장엄한 선언을 엉겁결에 듣게 된 유다인들은 그분의 신성에 대한 견해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고 갈라졌습니다(요한 7,43). 이렇듯 동시대인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고 박해를 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은 이미 바빌론 유배 이전 기원전 6세기 경에, 그러니까 거의 예수님보다 5백 년 전에 온 예레미야에 의해서 역사 안에 드러났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예수님의 또 다른 예형이 된 셈이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당시에도 왕실 관리들과 이에 빌붙어 있던 궁정 예언자들은 그를 없애 버리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탄원하는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 기도가 오늘 독서의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듯 오늘 말씀의 주제, 즉 생명의 물과 그 배경이 되어 있는 생명의 빵은 예수님의 신원인 신성을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계시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중요한 계시의 진리인 만큼 매우 불행한 박해 상황에서도 엄중하게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의 빵을 먹거나 생명의 물을 마시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예배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성체성사에서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는 종교적인 방법이 그 첫 번째입니다.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가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최고선을 전달하는 길입니다. 그 다음 예언자직과 왕직을 통해 이 최고선이 공동선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사회적 역할로서 사도직 활동을 통해 구현될 수 있고, 이를 세상에서는 정치와 언론이 수행합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사회 활동과 모든 학문 및 출판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와, 그리고 이 가치를 구현하는 행위와 사실들은 중요하고 거룩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거룩함의 기운이 종교의 영역에 갇혀 있거나 머물지 않고 세상에로 퍼져 나가는 경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현실에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첫째, 거룩함의 기운은 종교에서 시작되지만 세상에로 흘러 나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군중 한가운데에서 활약하셨습니다. 특히 유다인들이 많이 모이는 초막절 축제에 가셨는데, 이는 힘을 가진 유다인들이 그분을 예의주시하면서 제거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감행하신 선택입니다. 이처럼 종교와 그 사도직은 전례와 성당에서 시작하되 사회 현실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에게서 오는 거룩함의 기운을 정작 그 기운이 필요한 이들에게 생명의 빵이나 물처럼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정치나 언론 또는 모든 사회활동과 출판 및 학문활동 같은 사회 영역들이 이를 통해 공동선의 가치, 즉 공익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때로는 격려하고 때로는 감시해야 합니다. 그들이 공익성에 충실하다면 거룩한 기운을 나누어 받은 것이기 때문에 격려해야 하는 것이고, 그들이 공익성을 저버리고 있다면 세상에 타락한 기운을 퍼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저항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이 유다인들의 최고선과 공동선에 간여하고 있는 실세들에 대해 시시비비를 마다하지 않으셨고 실사구시적 태도로 그들이 최고선이신 하느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도록 가르치시는 한편으로 그들의 공동선이 부실해지지 않도록 수많은 활동과 기적으로 그들을 보살피셨습니다. 질병이나 장애로 아픈 사람이나 마귀 들린 사람을 돌보아 주셨고, 하느님 나라와 참된 행복의 길에 대해 가르치셨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선을 보호하고 증진시키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분의 복음선포는 최고선의 진리를 선포하는 기반 위에 공동선의 진리를 수호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활동이었습니다. 성당의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고답적인 태도로는 예수님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셋째, 이 과정에서 교회가 행하는 사도직 활동이 마치 인체의 실핏줄처럼 거룩함과 공익성의 균형과 순환의 통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성경과 전례에 충실해야 함은 물론이고 세상의 현실에 대해서도 그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예레미야나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했던 것처럼 세상의 반대와 배척을 받을 수도 있다는 각오도 해야 합니다. 올바로 성경과 전례에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반대와 배척이 일어난다는 것은 역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기운을 전하고 있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늘 바라보며 사는 이유이며 무슨 일을 하거나 십자성호로 시작하고 마치는 까닭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 특히 예수님의 초막절 처신이 던져주고 있는 가장 중요한 시사점은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가 견지해야 할 거룩한 변화의 신비입니다. 이스라엘 방방곡곡에 제자들을 파견하셨던 예수님께서 그들의 성공적인 귀환 보고를 들으시고 기뻐하시면서도 그들의 성과보다는 그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는 당부를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기운을 사도직 활동을 통해서 전하려 할 때 그로 인해 이룩된 성과와 업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그 거룩한 변화의 흐름 속에 머물러야지 결코 그 흐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는 활동에 앞서는 것이며, 세상의 위기에서 그 존재는 더욱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루카 8,15 참조. 복음 환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