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로마 6,12-16; 루카 12,39-48 /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2025.10.22
계절이 갈마들어 어느 덧 가을입니다. 곧 단풍철이 다가오고 이어 낙엽이 떨어지겠지요. 이곳 횡성 초원에서는 계곡에 피어난 버섯을 따러 온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벼들이 고개 숙인 들판에서 열린 배, 사과, 감, 밤 같은 과일들이 사람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 주는 계절입니다. 단풍과 낙엽은 날씨가 건조해짐에 따라 나무가 겨울을 나기 위한 지혜의 산물입니다. 추운 겨울 동안 부족할 최소한의 수분만으로 살아남기 위해 진화된 자연의 섭리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인생에 적용되는 하느님의 섭리를 일러 주셨습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이루어질 지 모릅니다. 하지만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재림에 대비하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재림은 성령의 현존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살아가는 인생은 언제나 죄와 선행, 악과 선의 대립 속에서 이루어지는 긴장의 연속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굴복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로마 6,12-13) 우리네 현실에서 죄는 늘 달콤합니다. 그리고 편리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선과 의로움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쓰디씁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려는 우리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지구상 모든 물질이 중력의 지배 하에 있습니다. 그러니 은총이 아니고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본성이 노아의 홍수 이래로 중력과도 같은 죄의 지배 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없고 세상의 죄악이 판을 치고 있는 것도 다 죄의 중력 때문입니다. 오로지 기도하는 사람들만이 이 중력의 지배를 뚫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기도로 말미암은 은총의 부력 덕분입니다. 그만큼 기도의 힘이 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슬기로운 집사는 주인이 갑자기 돌아왔을 때, 충실하게 일하고 있을 것이다.”(루카 12,41) 우리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되려면, 기도하는 삶에 충실하고 애덕을 실천하는 일에 슬기로워야 합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응답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1984년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앞두고 3년여에 걸쳐서 치열하게 준비했던 사목회의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대변했던 각기 150명의 대의원들이 전국 13개 교구에서 뽑혀서 한국판 공의회를 열었더랬습니다. 1984년에 12개 분야에 걸친 의안을 상정했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주재한 폐막식에서 승인했으며 그 해 말에는 한국 천주교 주교단이 만장일치로 공포한 바 있습니다. 그야말로 민족 복음화에 있어서 소중한 준비였고 매우 슬기로운 통찰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난 40년 동안 사장되어 왔습니다. 후임 주교단은 이 의안집을 깡그리 무시하고 방치해 오다가 최근에 다시 인쇄해서 내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무려 8만원입니다. 아무런 가필도 없고 편집도 없이 그저 원본을 인쇄만 해서 내어 놓는 가격치고는 너무 비싸지요? 일반 신자들이 사서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갑질스러운 가격 책정입니다. 아마도 충실하기도 싫고 슬기롭지도 않은 결정인가 봅니다. 그나저나 새로 의안집을 내기로 결정하신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수원교구장 주교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끝으로 이 의안집을 통과시키던 폐막식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의 결론을 인용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오늘 우리의 시대는 미증유의 속도와 변천의 심각성으로 인해 전혀 새로운 과제를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제 이 땅의 교회 현존 제3세기에 여러분이 들어서 먼저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 나의 이번 한국 사목 방문의 주제인 삶의 ‘증거’, 회개를 통한 ‘화해’, 그리고 사랑의 ‘나눔’이라는 세 항성(恒星)으로 방위를 찾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 땅에 빛을” 가져오고 무엇보다도 “이 땅의 빛”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순교 성인께서 여러분을 그 길에서 인도해 주시고 바다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이 사랑하는 모든 이를 “찬비와 영예와 권능을 영원무궁토록 받으실”(묵시 5,13) 당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이끌어 주시기를 빕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찬미예수!”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복음화 제3세기를 위한 준비만 해 놓고 40년을 허송했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45-46)
교우 여러분!
이제 준비한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가격이 좀 비싸기는 하지만 다른 것들을 아끼더라도 용기를 내어 전국 사목회의 의안집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루카 12,47)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