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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문명의 맥박, 역사의 숨결

작성자이기우|작성시간25.11.29|조회수138 목록 댓글 0

“만군의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리라”

이사 25,6-10; 마태 15,29-37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2025.12.3.

 

  오늘은 가톨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선교를 개척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입니다. 그가 활약한 15세기 유럽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를 열어 문명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5세기 말에 스페인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여 향후 이 대륙이 서구화, 산업화, 복음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이 무렵에 대서양을 건너서 서진했던 스페인과 달리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건너서 동진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스페인 출신이었지만 동진하던 포르투갈이 개척한 항로를 이용했습니다. 바로 동양 선교를 위한 역사적 선택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의 이 항로를 따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인도에 복음을 전했고, 이어서 일본과 중국에까지 선교하러 나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본시는 유럽의 서양 문명보다 훨씬 앞섰던 동양 문명과 복음 진리가 비로소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동서양으로 갈라져 있던 문명의 맥을 살리게 되는 선구적 시도였습니다. 인체의 생명력이 숨결과 맥박으로 살아있게 되듯이, 그의 선택과 모험은 동과 서로 단절되었던 인류 문명의 맥박을 뛰게 만들었고 동서양을 잇는 역사의 숨결을 살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발을 내딛었던 아시아 대륙에는 고도의 정신문화를 지탱해온 문명이 유럽의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내려오고 있었기에 아메리카 선교와는 질적으로 다른 궤적을 보였습니다. 노예무역으로 점철된 아프리카 선교 그리고 무역 상인과 군인들이 앞장선 아메리카 선교와 달리, 아시아 선교에는 학자 선교사들이 앞장섰기 때문에 그러했던 이유도 있습니다. 아무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아시아 선교 개척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보다 더 무게감 있는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애초에 아시아의 서쪽 끝에서 태어난 복음이 동진하지 못하고 처음에 서진했다가 복음화의 방향이 1천5백 년 만에 동진하여 아시아로 회귀하게 만든 계기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시편 18,50)하고 바치는 입당송에서처럼 하느님의 이름이 민족들 사이에서 드높여지기까지는 매우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고 문화와 문화가 만나는 복음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물꼬를 트는 역할은 선교사의 몫입니다. 유다교의 한 신흥종파로 주저앉을 수도 있었던 그리스도교를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로 토착화시킨 선교의 공이 사도 바오로에게 돌아가야 한다면, 서양화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교를 아시아 문화권에로 향하게 한 선교의 공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 후 그의 뒤를 잇는 무수한 선교사들에 의해서 서양식 그리스도교를 동양식으로 토착화시키려던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일방적인 정복과 학살로 점철된 아메리카 대륙 복음화 과정과는 달리, 아시아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문화 충돌로 말미암아 잔인하고도 끔찍한 박해가 오랫 동안 벌어졌고 이를 이겨내고 인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조선에 각각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자리는 가톨릭교회가 ‘견고한 성읍’(이사 26,1)처럼 자리를 잡았다는 점에서 단연 한국을 꼽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향후 아시아 대륙에 본격적으로 복음화와 토착화 과업이 이룩되어야 할 사명과 소명을 한국 가톨릭 교회에게 기대하는 시선이 교황청에 두드러집니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본격적인 한류가 아시아에 퍼져 나가는 셈이 될 것입니다. 사회적 매력이 넘치고 영적 향기가 풍기는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소프트 파워로서의 복음이 비로소 뿌리내리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한자문화권 안에서만 보면, 서구화 및 산업화를 수반한 복음화는 민주화와 토착화의 과제를 남기고 있습니다.  민주화는 복음적 가치를 사회제도에 반영시키는 일이요, 토착화는 이 가치를 사람들의 의식과 사회문화에 뿌리내리는 일입니다. 북한에서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고 그나마 일본과 중국에서 복음화는 서구화 및 산업화를 가져왔으나 민주화와 토착화는 아직 멀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민주화를 지나 토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봅니다. 아시아 복음화의 과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 복음화를 대한민국 내부에서 성숙시켜야 하고, 그 다음 한반도의 북녘과 만주를 위시한 중국과 중앙 아시아 그리고 일본 열도에까지 민주화와 토착화를 위한 복음화의 씨앗이 퍼져 나가야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까마득히 멀어 보이는 길이지만, 이 선교 과업에서야말로 하느님께서 일꾼을 보내시도록 우리가 준비하고 청해야 할 바입니다. 분명히 북녘이나 중국과 중앙 아시아, 그리고 일본 안에서도 당신이 쓰실 일꾼들을 준비시키고 계실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를 보아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보아도 그러하며, 마테오 리치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조선 사회의 신분차별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최고선 진리에 어긋나기에 죽음으로써 저항했고, 조선의 국가 제도와 공권력이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공동선 진리와 반대로 억압하고 있었으므로 무려 백 년 동안이나 이에 저항했던 역사가, 그것도 비폭력 수단만을 통해서 평화적으로 저항했던 기적 같은 역사가 한겨레 5천 년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중국 및 일본에도 같은 복음이 더 먼저 전해졌으나, 서구 문물이 도입되면서 제국주의적 침략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있었어도 이 같은 가치 중심의 저항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조선에서만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화가 단지 서양 문물을 도입시키는 마중물이 되고 만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 가톨릭은 서양 문물이 아니라 복음 진리가 내포한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를 두고 갈등을 빚고 박해까지 초래했으나 끝내 그 가치를 관철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반석 위에 지은 집’(마태 7,25)과도 같고, 조선조 5백 년 역사 중 최대의 사건이요 백 년의 박해를 견디어 내고 끝내 그 가치를 실현시킴으로써 한겨레의 문명을 2백 년 앞당겼다는 점에서는 기적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겨레의 정신적 역량 속에 민족 복음화는 물론 아시아의 복음화, 인류의 복음화를 위한 밀알로 쓰시려는 하느님의 섭리가 엿보입니다. 그에 대한 뚜렷한 징표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며 선도하고 있는 한류 현상인데, 특히 그 안에 문화적인 형식 안에 담고 있는 선한 가치관입니다. 이것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쳐온 미국 문화의 영향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20세기의 절반 가량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 군국주의 문화의 영향일까요?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혹시 조선조 5백 년 동안 상국으로 행세하던 중국 문화의 영향일까요? 어림 없습니다.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그렇게 행사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 하던 이 선한 가치관에 담긴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힘은 멀리는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던 단군 시대 이래로 홍익인간에 뿌리를 두어 온 한민족이 기묘한 섭리와 엄청난 희생으로 교회를 세웠으며, 이렇게 해서 천주교가 들여온 그리스도 신앙 진리로 싹이 난 복음의 영향력입니다. 이 힘이 한류로 발휘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뚜렷한 징표입니다. 이미 퍼지고 있는 한류가 지닌 이 선한 영향력이 장차 복음화의 밀알이 되고 바탕이 되어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베푸실 잔치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들으러 모인 군중이 사흘 동안 굶게 되자, 빵 일곱 개와 물고기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공통 열쇠말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음식을 함께 먹는 일, 즉 잔치입니다. 사실 칠흙 같이 어두웠던 당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선교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증거했던 복음화의 전망이 바로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베푸실 ‘메시아의 잔치’였습니다.

 

 

  메시아의 잔치는 “모든 민족을 음식과 술로 배불리 먹이는 잔치”(이사 25,6)이며, 심지어 더 나아가서는 “죽음이나 슬픔이나 수치도 없애 버린 잔치”(이사 25,8)입니다. 고대인의 소박한 언어로 묘사된 이 메시아 잔치상은 인류 문명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이 ‘메시아 잔치상’은,  풍요로우면서도 그 풍요로움을 고르게 누릴 수 있을 만큼 분배정의가 실현된 경제 현실이며, 슬픔이나 수치가 사라질 정도로 삶의 질이 향상된 사회 현실인가 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사라진 영적 현실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든가 ‘삶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라든가 적어도 ‘공포의 대상’이라고 여겨온 세속적 죽음관을 십자가 죽음으로써 극복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써, 또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써 당신 죽음을 받아들이셨고, 또 이로써 죽음을 넘으셨습니다. 인류가 인생의 끝, 죄의 벌,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온 죽음을 그분은 사랑과 믿음으로 쳐부수셨습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인 것이고, 우리는 그 부활을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으로 믿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라야 우리는 그분의 삶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분은 공생활을 하시던 평소에도 부활한 삶을 사셨다는 깨달음이 그제서야 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살아 생전에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리라.”(요한 11,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은 또 그분의 삶을 죽어 부활한 삶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때는 물론이요 죽기 전에도 이미 죽어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까지 설명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 복음이 오늘 독서와 맺고 있는 관련성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분이 군중을 먹인 것은 배를 채우는 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인간다운 삶이었으며, 믿음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기 직전에도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 말 못하는 이들 등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도와 주시려고 안간힘을 다하셨고, 다른 상황에서도 아들이 일찍 죽어 슬퍼하는 과부라든가 아들이 죽을 병에 걸려 발을 동동 구르는 왕실 관리라든가 간음의 혐의를 받고 사람들 앞에 끌려 나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여인이라든가 한 마디로 정신적 고통으로 아파하는 이들을 위로하시느라 노심초사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삶, 이러한 믿음의 삶이 살아서도 그에 필요한 노고와 희생 덕분에 죽어야 했던 삶이요, 사실은 바로 그 덕분에 그 의로운 희생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부활한 삶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에서 일어난 빵의 기적 사건을 바탕으로 세워진 성체성사의 목표가 이런 삶에 있습니다. 세속적인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킨 삶,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희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삶이 성체성사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영성체를 할 때 ‘아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온갖 생명체들을 먹여 살리십니다. 그리고 생명체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축복을 받은 사람-생명체는 이렇듯 생명체들을 기르시는 하느님을 본받아야 하며 닮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굶주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고르게, 누구나 배고프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래서 분배정의가 세워진 경제질서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가 내다본 세상은 바람직하고 또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인 삶은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 인간다움이란, 나의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노력에 그치지 않고 배고픈 사람이 없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그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수반되기 마련이 나의 손해라든가 희생을 아까워하지 말고 기꺼이 하느님께 바쳐드리려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가 희망을 걸었던 메시아 시대는 오늘 여기서 이룩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기르시고자 하시는 그 역할을 본받으려는 바로 우리 자신에 의해서 그 희망이 실현되어 갈 때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육신의 배고픔이나 질병과 장애로 고통받는 이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일곱 바구니’(마태 15,37)가 아니겠습니까? 특히 이 일곱 바구니들이 상징하는 칠성사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죽음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그분과 함께 죽음을 쳐 없애고 부활하게 됨으로써 죽음 없는 세상에 참여하게 해 주는 기회요, 소외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해 주는 기회입니다. 이 대림시기에 죽음을 영원히 없애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지향하는 믿음으로 성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사에 참여한 그 은총으로 지금 굶주리거나 노동의 고통으로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연대할 수 있으며, 이 모든 이들이 잔치에서처럼 함께 기쁘게 살아가는 세상을 이룩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하느님 말씀과 시대의 징표에 깨어 있으십시오. 오늘이 구원의 날이라는 의식으로, 또 내가 살아가고 일하는 자리가 새 하늘을 여는 새 땅이라는 의식으로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복음화의 전망이 열리는 제3천년기에 하느님께서 아시아 민족들을 위하여 마련하실 메시아 잔치에서 손님이 되기보다 주역이 되십시오. 그것이 역사의 숨결을 따라 사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요, 문명의 맥을 뛰게 하는 희망의 길입니다. 아시아 민족들의 현실을 관찰한 요한 바오로 2세와 아시아 주교들이 마련한 교서 ‘아시아 교회’에 의하면, 아시아 민족들은 가난과 억압 그리고 착취로 인해 굶주림도 심하지만, 종교적 영성의 풍요와 문화적 감수성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태의연한 정신 문화 탓으로 진리에 대한 영적인 갈망도 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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