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식별
1열왕 11,4-13; 마르 7,24-30 / 연중 제5주간 목요일; 2026.2.12
오늘 독서에서는 솔로몬이 그동안 누려온 영화에 도취하는 바람에 지혜의 눈이 멀어져서 우상숭배의 풍습을 허용하고 말았던 치명적인 과오를 일깨워줍니다.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를 하느님께 청했던 그가 그 지혜를 신하들과는 나누지 않은 과오라 할 것이며, 따라서 백성들 사이에서도 공정과 정의의 열매가 고루 나누어지도록 하지 못한 무능의 소치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의 힘을 받아서는 솔로몬 임금 혼자서만 차지하고 신하들과는 나누기를 꺼려한 잘못의 당연한 결과이며, 그 지혜를 사회적 공정과 정의라는 열매로 열리게 해서 백성들과 나누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애시당초 의도조차 하지 못한 무능함의 결과입니다. 지도자의 식별 능력이 그 해당 공동체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는 주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북쪽 해안에 위치한 이 티로 지역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도 않아서 우상숭배가 창궐하던 땅이었는데, 걸어서 며칠씩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이 지역을 가신 걸 보면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을 알리시려고 의도적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더러운 영에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는 그 여인의 청을 일단 사양하셨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딸의 상태가 어떤가 하고 보시려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마귀 들림은 영적 간섭 현상을 통해 주변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 어머니는 흔들림 없이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고 간청해 왔으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딸에게 들어온 마귀를 말씀 한 마디로 간단히 쫓아내 주셨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자기 딸의 치유 사례를 들어 이웃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관한 소문을 내게 될 것이고, 나중에 예수님께 몰려든 티로 지역 사람들은 그 결과로 오게 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렇듯 우상숭배에 찌들어 마귀에 들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는 영적인 식별과 구마 행위 선택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존과 구원 그리고 성취와 도움 등 온갖 선의 행로를 밟아 나가기 위해서는 선택과 식별이 필수적입니다. 이 능력을 함양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가 어머니와 교사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와 한창 자랄 나이의 어린이에게는 무엇을 먹어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지 어머니가 분별해주어야 합니다. 이 무렵 길러진 입맛이 한평생 가지요. 신체적인 차원의 선택에 익숙해지고 나면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선택을 해야 하는데 이를 도와주는 존재가 각급 단위의 교사들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런지 분별하는 눈은 이때 길러지지요. 어린 존재에게 어머니의 역할이 절대적이듯이, 성장기 인간에게는 좋은 교사를 만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1960년대 가톨릭교회와 인류에게는 요한 23세가 그 두 가지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신자들은 물론 인류에게도 어머니요 교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향으로 1961년에 회칙 ‘어머니요 교사’를 반포하여 가톨릭 신자들을 포함한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발표했습니다. 그 지향의 흐름에 따라서 공의회도 소집되어 현대의 성령강림사건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릴 수 있었습니다. 공의회의 교회쇄신 여정에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황도 교회의 향도요 인류의 길잡이로서 무엇을 희망해야 하고 어떤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지를 감지하여 식별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느라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우리가 간직해야 할 희망을 권유하는 메시지라면,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우리가 피해야 할 위험에 대한 메시지라 볼 수 있습니다.
삶의 기간 동안 내내, 그리고 삶의 여러 차원에서 모두 이토록 선택하고 식별하며 분별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개인들도 필요하지만, 지도자들에게는 필수적입니다. 우리 교회가 사회적이고도 영적인 식별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께로부터 받아서, 남과 북의 온 겨레에게 좋은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화 제3천년기를 준비하던 아시아 교회의 주교들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함께 역사상 중요한 선택과 식별 작업을 진행하였으니, 그 결과물이 교황 교서로 반포된 문헌 ‘아시아 교회’입니다.
이들 아시아 교회의 지도자들은 장차 아시아 대륙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세 차원의 대화가 필요하며 이 대화적 선교야말로 아시아 교회가 살아가야 할 새로운 존재양식이라고 식별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는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입니다. 아시아 대륙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극심한 빈곤의 현실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이래 아시아에 불어 닥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센 바람으로 아시아 각국은 서구식 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편입되어 식민지적 종속상태로 전락했던 쓰라린 경험을 했으며, 20세기 후반 이래로는 국경 없는 세계화의 거센 바람으로 빈부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중이고, 이제는 ‘소외 없는 세계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선택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이 서구 열강은 물론 자국 정부와 엘리트들로부터도 수동적이고 일방적으로 억눌려야 했던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 새로운 선택에 있어서는 주체적이고도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고, 이 점에서 ‘아시아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 대화야말로 제도적인 의미에서 세례를 베풀어서 신자들을 늘리려는 노력보다 앞서야 하는 선교 활동의 본령이요 복음화 과업의 일차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아시아 종교와의 대화’입니다. 아시아 대륙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종교적 전통의 영향으로 소박하면서도 절대적인 하늘의 뜻에 순명하는 종교적 심성을 간직한 이들이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적 전통에 영향을 받고 있는 이들은 빈곤 극복에 무관심하고 무능한 전통 엘리트들과는 달리 빈곤 극복에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서구적 가치에 기울어 세속화되어 버린 현대 엘리트들과도 달리 자신들의 영적 정체성을 희구합니다. 따라서 아시아 종교와의 대화는 종교간 대화로 그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주체적이고도 능동적으로 빈곤 극복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관념주의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종교간 교세 경쟁의 늪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목표를 제쳐놓고 이루어지는 종교간 대화는 관념적인 논쟁만 유발할 뿐입니다.
세 번째는 아시아 문화와의 대화입니다. 문화는 종교적 영감에 바탕 하면서도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존재양식을 나타냅니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서구의 사유양식과 달리 아시아의 사유양식은 직관적이고 종합적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기 위해서도 이론보다는 실천이 앞서야 하고,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야 합니다. 이는 바로 복음화 역사 2천년만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잘 담겨있는 ‘예수의 선교’를 본격적으로 계승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아인들에게 익숙하고도 자연스러운 문화적 감수성으로 만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발전을 앞서 이룩한 우리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화의 발전 단계에까지 이룩하고자,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을 만나서 대화하려고 할 경우에 명심해야 할 원칙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로 갈릴래아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다니시던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교도 지역인 시로 페니키아로 찾아가셔서 가나안 여인을 만나시고, 그녀의 마귀 들린 딸을 고쳐 달라는 애원을 들으시고도 그녀의 분명한 믿음이 발동되기까지는 밀당을 하시며 기다리셨던 예수님의 처신을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이 처신 속에 복음화를 위한 선택과 식별의 지혜가 녹아 들어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솔로몬의 지혜가 가져다 준 번영의 상황에서 그 지혜를 나누지 않고 독차지함으로 말미암아 우상숭배 풍조가 만연하여 왕국 분열과 쇠락 그리고 멸망으로 국운이 기울어졌다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한류 현상의 대유행과 함께 한국교회에 대한 보편교회의 기대와 여망의 본질을 잘 식별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류는 복음화되어야 하고 한국교회는 아시아 복음화 여정의 향도(嚮導)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