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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서 말하는 황제국 고려

작성자천상희|작성시간11.11.24|조회수321 목록 댓글 0

(다음의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의 글을 참조 인용 하였습니다.)

 

세종 23년 신유(1441,정통 6)  윤 11월9일 (임신)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하의 도(道)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두 가지가 있을 뿐이옵니다. 옳은 것이 이기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그른 것이 이기면 나라가 어지러워지오니, 다스려지는 것과 도(道)를 같이 하면 나라가 일어나지 아니함이 없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일을 같이 하면 이와 반대가 되는 것이니, 국가의 흥망과 세도(世道)의 오르내림은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달려 있을 뿐이옵니다. 삼대(三代)의 융성한 시대에는 본디 이단(異端)이 없었고, 사도(斯道)가 해가 중천에 있는 것처럼 밝아서 국가가 항상 다스려지고 오래 태평하였사온데, 주(周) 나라가 쇠하게 되매 양주(楊朱)·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가득 찼었으나, 그때에는 맹자와 같은 성인(聖人)이 있어서 말로 깨우쳐서 이를 물리쳤습니다. 진(秦)·한(漢)으로 내려오면서 이단이 사방에서 일어나, 다스려진 때는 항상 적고 어지러운 때는 항상 많았습니다. 불교(佛敎)는 이치로는 근사하오나, 그 해(害)는 더욱 심하옴은 선유(先儒)들이 일찍이 논평하였고, 그 요망 허탄하고 허무(虛無)하여, 인류를 멸절(滅絶)하고 생민의 해충(害蟲)이 되는 것을 전하께서 밝게 보시고 묵묵히 인식하시는 바이오니, 어찌 신 등의 밝게 분변함을 기다리오리까.
우리 동방(東方)의 이미 지나간 자취로써 증험하옵건대, 신라의 말기에 불교를 신앙하여 절을 많이 창건하므로 민가(民家)와 비교하면 절이 더 많이 있었더니, 그 뒤가 좋지 못하였으며, 고려는 신라의 뒤를 이어 술사(術士)들이 말을 올리기를, ‘아무 곳에 절을 창건한다면, 나라에 유익하고 백성이 편안하다.’고 하면, 즉시 절을 세워서 토지와 종을 거기에 귀속시키니, 말류(末流)의 폐단은 왕궁(王宮) 안에까지 절을 두고 중을 맞아 들였으며, 사대부의 집에서도 사사로이 절을 창건하여 원당(願堂)이라고 일컫고, 중을 존경하며 좋은 이름을 더하여 왕사(王師)·국사(國師)를 봉하고도 오히려 지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에 왕실(王室)의 자제와 진신(搢紳)의 자손들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큰 절에 머물면서 거처와 의식(衣食)을 왕후(王侯)에 비기며, 사치가 극도에 이르러 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는다면 중이 되기를 원하고, 인과보응(因果報應)의 말이 성행(盛行)하여, 국가에서 해마다 대회(大會)를 베풀고, 만승천자(萬乘天子)로서 지존(至尊)의 자리를 스스로 가볍게 하여, 이마를 조아리며 밑에서 절하며 높은 이와 낮은 이가 지위를 바꾸니, 그 밑에서는 따라서 집집마다 절을 창건하고 불상(佛像)을 만들고 그려서, 설회 요복(說會要福)이라고 말하여, 농부(農夫)와 직녀(織女)가 고생으로 모은 재물을 부처에게 공양(供養)하고 중에게 밥먹이는 비용으로 다 들어가오니, 생산은 적고 쓰임은 많아서 백성이 생활이 곤궁하고 창고가 비어서 다시 할 수 없었는데, 어지러움이 극하면 반드시 다스려지므로, 좋은 운수가 돌아와서 태조 강헌 대왕께옵서 운(運)에 응하여 개국(開國)하사, 맨 먼저 이 폐단을 개혁하였습니다.

 

○壬申/司憲府上疏曰:
臣等竊謂天下之道二, 是與非而已矣。 是者勝則治, 非者勝則亂。 與治同道則罔不興, 與亂同事則反是。 國家之興衰、世道之升降, 不越乎是與非而已。 三代盛時, 本無異端, 斯道如日中天, 國家常治久安, 及之衰, 之言盈天下。 時則有若孟子之聖, 辭而闢之。 以降, 異端四起, 治日常少, 亂日常多。 佛氏之敎, 彌近理而其害尤甚, 先儒蓋嘗論之。 其妖誕虛無, 滅絶人類, 爲國家生民之蟊賊, 殿下所洞觀而默識也, 奚待臣等之明辨哉? 以吾東方旣往之迹驗之, 在新羅之季, 崇信佛氏, 多創塔廟, 比較民屋, 佛寺居多, 而不能善後。 高麗新羅之後, 術士獻言, 於某地, 創置僧寺, 則可以利國安民, 隨卽營建, 屬其田民, 末流之弊, 至於王宮之內, 置寺邀僧; 士大夫之家, 私創寺宇, 稱爲願堂, 崇敬緇徒, 加之美號, 封爲王師國師, 猶恐未至。 於是王室子弟、縉紳子孫, 髡髮爲僧, 得住大刹, 居處衣食, 擬諸王侯, 窮奢極侈, 靡所不爲。 當世之人, 父母生子, 願爲之僧。 因果之說盛行, 國家歲設大會, 萬乘自輕至尊, 稽顙下拜, 尊卑易位。 其下化之, 家家創建僧寺, 塑畫佛像, 說會要福爲辭。 農夫織女辛苦所儲, 皆歸於供佛飯僧之費, 遊惰日增, 生寡用衆, 民生窮蹙, 倉廩虛竭, 無復可爲。 亂極當治, 天道好還, 太祖康獻大王應運開國, 首革此弊。

 

고전에서 고려가 황제국임을 밝힌 문헌은 주로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 입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 고려가 황제국이었다는 증거의 기록들이 거의 전무 합니다. 그러나 위의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고려는 완연한 황제국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고려가)만승천자(萬乘天子)로서 지존(至尊)의 자리를 스스로 가볍게 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萬乘自輕至尊" 만승(萬乘)만이 기록하고 있는데 만승은 "만대의 병거(兵車)"라는 뜻으로 천자(天子)의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말해서 만승천자(萬乘天子)라고도 말합니다. 또한 천자의 신하인 제후는 천승(千乘)이라 합니다. 고려가 다른 나라에 조공을 바치다 세월을 보내는 나라 였다면 고려에 대해 천승(千乘)이라 기록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려를 만승(萬乘)의 나라 즉 만승천자(萬乘天子)의 나라로 기록한 사실을 보면 황제국 고려가 제후국 고려로 격하되어 역사가 엄청나게 왜곡되었음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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