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을 보고 또 보아도 조선은 참으로 신기한 나라라고 본다. 물론 지금의 결론은 한반도와는 무관하고 또한 대륙에서도 그 중앙이 어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시아=조선’에서 지금 꾸준히 접근해가고 있다고 본다.
과연 조선은 나라인가? 맞다면 과연 하나의 조선인가? 수많은 조선인가? 조선이 천자국이었다면 그 제후의 나라는 전부 다 조선인가? 또 다른 국명이 있었는가? 이러한 의문 사항들이 우선 선결되어야만 한다고 본다. 전에 서우성 박사님이 일단 朝鮮諸國를 언급 하였지만 그 제후 들을 통할하는 자는 분명히 천자이어야 한다.
그것은 천자만이 할 수 있고 천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한이기에 그렇다. 그러한 모범으로 삼는 경전은 禮記이다. 왕조시대에서는 지금과 같은 헌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종의 기록에서 조선이 천자이다라는 기록은 없는가? 물론 실록에 보면 皇자를 써서 조선의 왕이 천자이다라고 해석을 내리곤 있고, 또 大明高皇帝니 我皇帝이니하여 이를 명나라의 황제가 아닌 조선의 황제다라고 하여 천자의 위를 내세우지만 딱 조선의 왕이 천자이다. 이러한 표현의 기록은 아직 보질 못했다.
역시 실록의 기록으로 찾아 보았다.
『선위사(宣慰使) 강맹경(姜孟卿)이 보고하기를,
“일본국 사신이 이미 내이포(乃而浦)에 이르렀는데, 휘덕전(輝德殿)에 진향(進香)하는 것과 장경(藏經)을 청하는 것으로 왔습니다.”
하였다. 그 일본 국사의 글에 이르기를,
“일본 정사(正使) 문계(文溪)·정우(正祐)는 재배 돈수(頓首)하고 조선국 예조의 제위(諸位) 합하(閤下)에 장(狀)을 올립니다. 소승(小僧)이 장년 때에 대국(大國)에 와서 놀아 좌우(左右)의 알아주심을 입어 의복과 안마(鞍馬)를 주심이 실로 많았습니다.
풍악(楓岳)의 금선(金仙)의 자취를 등반할 뿐 아니라, 또한 대조(大朝)의 문물(文物) 의관(衣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으니 무슨 다행함이 이보다 지나겠습니까. 이후 28년 동안 마음에 새기어 잊지 않고 자나 깨나 생각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살피시기를 빕니다.
우리 왕이 불행하게도 수년 동안에 부모가 계속하여 훙서(薨逝)하고 게다가 변방이 소요하여 도로가 통하지 못하고, 원의성(源義成)이 비록 형의 뒤를 이어서 위에 올랐으나, 나이 아직 어리어 음신(音信)을 계속하지 못하니 나라 사람들이 만족하지 않으옵니다. 지난해 정묘년 8월에 특히 소승을 택하여 수호(修好)의 명령으로 맡기었는데, 전대(專對)의 재주가 없으므로 유실(遺失)함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전률(戰慄)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정묘년 중추(仲秋)에 우리 왕경(王京)을 하직하고 무진년 4월 초순에 대국지경(大國之境)에 들어오기까지 이미 아홉 달을 지냈으니 역려(逆旅)가 오래다 하겠고, 종자(從者)들의 노고가 가지가지인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니, 어질게 사랑하여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태상황후(太上皇后)께서 지난해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은 들었으나, 두 나라 중간에 큰 물결이 만리나 되어서 그 당시에 서로 위문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밀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소승을 명하여 월우(月宇) 아래에 공경하여 약제(禴祭)를 드리게 하므로 작은 배를 장비하여 토의(土宜) 약간을 실었으니, 흉사(凶事)와 구별하자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조 숙배(大朝肅拜)한 뒤에 날을 가려 두세 사람이 삼가 존묘(尊廟)에 나아가 불경을 풍연(諷演)하여 명복을 빌게 하소서. 이것은 우리 왕의 명령을 소승이 가지고 온 것이니 양찰(亮察)하소서. 태평흥국남선사(太平興國南禪寺)는 우리 나라의 제일 선찰이어서 왕과 신하가 더욱 높이고 공경하는데, 지난번에 화재(火災)로 법보(法寶)가 다 회신(灰燼)이 되었으니 위와 아래가 의귀할 곳을 잃었습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대장경(大藏經) 7천여 권을 얻어 돌아가는 배에 부쳤으면 합니다.
우리 왕의 글 가운데에 이미 자세히 말하였으니, 미리 좌우에게 알리어서 괴이하게 여기시지 말게 하소서. 강남(江南) 출신 두 사람은 조문서(趙文瑞)·시강(柴江)인데 그 벼슬은 모두 정5품입니다. 오래 일본 지경에 나그네로 있었습니다. 선덕(宣德) 연간과 정통(正統) 원년에 한두 번 본방(本邦)에 사신와서 나라 일을 통하였는데, 천자(天子)의 대궐 앞에 친히 용안(龍顔)을 (天子展前 親拜龍顔) 절하여 은택이 심히 두터왔습니다.
또 일본에 오는 것을 조서로 허락하였으므로(詔許又到日域) 우리 왕이 역시 예로 대접합니다. 이에 대국의 풍속을 흠앙(欽仰)하여 나를 따라 내조(來朝)하였으니, 좌우로 만일 한 번 접견하면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열국(列國)이 회동(會同)하는 잔치에 주인이 재물(宰物)을 삶아서 손의 자리를 풍부하게 하기를 명하는 것은 예(禮)이나, 예라는 것은 그 적합함을 따르는 것입니다.
대개 불자(佛者)의 도(道)라는 것은 살생을 하지 않는 계(戒)의 제일이 됩니다. 내가 비록 사명(使命)은 욕되게 하였지마는, 본시 사문(沙門)이고, 종자도 혹은 중, 혹은 속인인데, 속인은 가사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군자(君子)는 포주(庖廚)를 멀리 하는 것이니, 새로 우리를 위하여 살생하는 것 같은 것은 일체 금지하고, 부득이하여 쓰려면 오직 산 포와 산 생선이면 가하니, 청하옵건대 먼저 포주에 신칙하여 알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대개 상고(商賈)의 교역(交易)을 업(業)으로 하는 자가 사사로 외국에 올 수가 없기 때문에, 매양 사자가 있으면 따라서 오는 것이 예전부터 그러하옵니다. 이번 이 배 가운데 실은 것은 고객(賈客)이 약간 명이고 토산물이 몇 짐 되옵는데, 모두 왕경(王京)에 들어가서 팔고자 하오나, 지금 농시에 만일 육지로 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나귀로 싣고 말로 운반하고 하여, 민력을 허비할까 염려되오니, 대현(大賢)의 정치하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 또 백성을 수고롭히는 것을 꺼리어 바다 모퉁이에 그쳐 두어서 교역하는 데에 불리하게 하면, 상고하는 사람의 멀리 온 마음을 절망하게 하는 것이니, 역시 대국에서 먼 곳 사람을 회유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오직 배로 행하는 것이 가할까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대국에서는 백성을 쉬게 하는 정사를 얻고, 먼 곳 사람은 교역의 뜻을 이룬다면 일거(一擧)에 두 가지 이익이 있으니 또한 좋지 않습니까. 제공(諸公)은 생각하소서.” 하였다.』〔실록 세종 30년 1448 무진(정통 13년) 4월 27일〕
장문이라 원문은 생략하였다. 위의 기록은 일본 측에서 사신을 보내어 전년에 사망한 세종의 비 소헌왕후의 조문을 못하여 지금이라도 휘덕전에 진향하고 또 장경을 얻으러 왔다는 목적의 글을 예조에 올리는 글이다.
우선 소헌왕후는 조선 세종임금의 왕비 심 씨로 실록에는 1446년 3월 24일 그의 아들인 수양대군의 사가에서 훙(薨)하였다. 1446년이면 세종 28년인데 일본의 사신이 말한 1448년의 지난 해이면 1447년이지만 이는 좀 더 검증을 해야겠지만(일본의 사신이 태상황후가 죽은 해를 몰라서 지난해라 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소헌왕후와 태상황후가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은 중국사와 조선사를 분리할 때에 빚어진 실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생략하고, 우선 짚어 볼 것은 실록의 대부분 기록은 조선의 왕은 그냥 제후로 나온다. 그러니 소헌왕후의 죽음에 대하여 훙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세종 30년의 기록에서는 소헌왕후를 태상황후라하여(일단 이 시기에 조선에서 죽은 왕비는 소헌왕후밖에는 없다. 설령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라 하여도 이미 세종 2년, 1420년 7월 10일에 죽은 뒤이다) 제후의 비가 아닌 천자의 비에 대한 용어를 써고 있으며, 더군다나 조선의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바로 천자의 전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 비를 황후라 한 것인데, 비단 이뿐 만 아니라 열국이 회동하는 잔치라 하였으니 곧 천자의 나라에 여러 제후들이 모여 회합한다는 말이다. 이 때의 임금이 천자였다면 세종(世宗)이 천자인가? 아니면 중국사로 분리된 명의 6대 황제인 영종(英宗) 예황제(睿皇帝)인가? 아니면 동일 인물인가?(최두환 선생님의 자료 참고: 2010.12.16-이미 발표한 자료, 세묘(世廟)와 광묘(光廟)는 누구의 묘호인가?)
그래서 천자의 나라인 조선에 일본도 열국의 반열에 끼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일본이 조선이 한반도에 없을진 대 어찌 현재의 열도에 있을 손가? 그것은 일본의 사신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 후 돌아갈 적에 조선의 토산물을 가져다 그들의 나라에서 팔고자 하는데 육지로 이동하는 것은 농사철이라 인력 징발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배로서 이동하는 것이 가하다고 사신은 청하고 있는 것이다.(역시 사신의 목적 중 하나는 이 무역에 있는 모양이다. 조선 역시 역관들이 이런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있는 조선과 일본은 오직 바다로서만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도 경계가 맟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기록에서는 “대국의 지경에 들어오기까지”라 한 것이다. 과연 땅으로도 올 수 있고 바다로도 올 수 있는 그런 지형을 갖춘 곳은 어디일까? 일본이 매양 토산물로 바치는 물소뿔(犀角)이 나는 곳? 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아라비아해? 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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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허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12.09 아하 이제아 대강의 윤곽이 그려졌습니다. 이 왜놈들의 근거지가 바로 아프리카 북부 쪽이었군요. 그래서 이놈들이 지중해를 건너 조선의 땅으로 왔던 겁니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바로 지중해가 서해인 것이네요 하! 그러므로 레스보스 섬이 서해의 백령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터키, 아르메니아, 그루지야가 조선의 땅이었다는 결론입니다. 지중해를 둘러싸며 벌어진 수많은 전쟁들의 역사가 조선의 역사였네요. 근대까지도 말입니다. 이곳을 영국이 1800년대 초에 장악한 것을 잘 보아야 하겠습니다. 왜놈, 영국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