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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金門)에 통적(通籍)에 대하여

작성자천상희|작성시간11.12.23|조회수270 목록 댓글 0

동문선 제32권  표전(表箋)  하표(賀表)  이제현(李齊賢)

건원(乾元)을 체(體)하옵신 당저(當苧)께옵서 만세(萬世)의 국조(國祚)를 여시옵고, 장자(長子)를 세워 황통(皇統)을 잇게 하사 백왕(百王)의 성전(盛典)을 이어 행하시오니, 덕음(德音)이 오로지 입혀지매 상서가 크게 나타나나이다. 운운. 건괘(乾卦)의 건(健)으로 임어(臨御)하시고 이괘(离卦)의 밝음으로 계술(繼述)하시어, 스승을 존중하시는 예(禮)가 진작 영문(令聞)에 드러나고, 군국(軍國)을 감무(監撫)하시는 권능(權能)이 진실로 여망(輿望)에 흡족하였사오니, 이는 대개 종묘와 사직[宗社]이 복을 드리우고 하늘과 사람[天人]이 꾀를 합하여, 신충(宸衷)에 복을 열고 방본(邦本)을 굳게 하심이로소이다. 이제 사랑을 넓히는 도리를 미루어 다시 호생(好生)의 인(仁)를 반포하옵시니, 사해(四海)가 모두 기뻐하며 삼한(三韓)이 더욱 경축하는 바로소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臣)이 일찍 금문(金門)의 통적(通籍)으로 은혜를 입사와 오래 동금(銅禁)의 시강(侍講)을 외람되이 하였사온대 해[日]를 받들고 물오리[鳧]같이 추창하여 가회(嘉會)에 참석하지 못함이 한(恨)이오나, 풍성(風聲)을 듣잡고 제비처럼 하례하옴은 진실로 범류(凡流)보다 곱절이나 되옵나이다.

 

익재난고 제8권  표(表)  황태자의 봉책(封冊)을 축하하는 표

 

기거(起居)
옛날에 경연(京輦)에서 모시면서 행위(行葦)의 은혜에 참여하여 젖었었는데 이제 바닷가의 번국(藩國)을 지키니, 원컨대 반도(蟠桃)의 수(壽)를 바칩니다.

하표(賀表)
건원(乾元)을 본받아 당저(當宁 천자가 재위(在位)함을 가리킨다)하여 만세(萬世)의 큰 계책을 열었고, 큰아들을 세워 조묘(祧廟)를 잇게 하니 백왕(百王)의 성대한 법전을 계술하였습니다. 덕음(德音)을 널리 입히매 서응(瑞應)이 매우 드러났습니다.
…… 건건(乾健 천자를 가리킨다)으로 간략하게 임하고 잘 계승할 이명(离明)을 얻었습니다. 스승을 높이고 중히 여기는 예를 엄하게 하여 일찍부터 영문(令聞)이 드러났고, 국정을 감독하고 군사를 어루만지는 권한을 위임하니 진실로 여망(輿望)에 맞습니다. 이는 대개 종사(宗社)에 복이 드리워 천인(天人)이 꾀를 함께 하여, 임금의 마음을 계우(啓祐)하고 나라의 근본을 굳고 편안케 한 것입니다. 인하여 널리 사랑하는 도리를 미루어 다시 살리기 좋아하는 인을 베푸니, 온 사해가 기뻐하지 아니함이 없는데 더욱 삼한(三韓)의 경행(慶幸)이 됩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일찍이 금문(金門)에 통적(通籍)함을 입었고 오래도록 동금(銅禁)에서 시서(侍書 윗사람을 모시고 글을 강하는 것)하였었는데, 천자를 받들어 조회하면서 아름다운 연회에 참여치 못함이 한스럽고, 축하하는 소문만 들으니 정성이 평소의 배나 됩니다.


위의 글을 현재의 사관에서 해석을 해보면 고려의 임금이 이제현을 통해 소위 원(元)의 천자에게 올리는 글 입니다. 그러나 위의 글을 세심히 분석하여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위의 글은 이제현 이라는 문신(文臣)을 통한 고려 임금의 글이 아닙니다.

위의 글은 고려의 학자이자 고려의 문신(文臣)이었던 이제현의 글 입니다. 즉 이제현이 고려의 임금에게 올리는 글 입니다. 위의 글에서 "금문(金門)의 통적(通籍)" 이라는 글을 한국고전번역원에서의 해석은 "고려왕이 원실(元室)에 입찬(入贊)하여 원 나라의 사위가 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참으로 참된 고증이 없는 현재의 사관에 매우 충실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금문(金門)이라는 말은 금마문(金馬門)의 약칭 입니다. 옛날 한대(漢代)때에 궁궐에 금마문(金馬門)이 있었는데 한대(漢代)때에 금마문(金馬門)으로 선비들을 뽑아

학사(學士)로 하여금 금마문에서 대조(待詔)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였으며 이곳에서 일하는 학사,학자들인 한림학사(翰林學士)의 별칭으로 금문객(金門客)이라 하였습니다. 즉 금문의 참된 의미는 조정의 내직(內職)으로 임금과 가까운 곳을 의미하며

임금의 명령,정책등을 수행하는 임금의 비서실 기능이었던 한림학사들의 모임 이었던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학자들인 한림학사들의 모임이므로 동금(銅禁) 즉 동궁(東宮)에서 황태자등을 모시고 학문을 강의하는 역할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글을 보면,

 

동문선 제34권  표전(表箋)  동궁에게 올리는 직사관을 사례하는 표[上東宮謝直史館表]  박호(朴浩)

"제함(綈函 비단함)으로 총명(寵命)을 내리시어 주사(紬史)의 영직(榮職)을 맡으오니, 특이한 천은(天恩)을 입사와 송구한 마음이 깊을 따름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모(某)가 양반의 먼 후예(後裔)로 초야(草野)에서 태어나서, 다행히 문(文)을 숭상하는 시대를 만나 좌도(左道 사도(邪道))의 행실을 하지 않고, 학생들과 섞여 놀아 진작 연치를 차렸고, 글로써 재주를 바쳐 문득 수석(首席)을 차지하였습니다. 이윽고 금문(金門)에 부(賦)를 아뢰어 자전(紫殿)의 고선(考選)을 받게 되자 외람되게도 갑람(甲覽)을 차지했고, 요행히도 병과(丙科)에 참예하여, 뱁새[鷦]같은 짧은 걸음으로 영광스럽게 원로(鴛鷺)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나이다............"

 

동국이상국집 부록  백운소설(白雲小說)

 

"........한 번 붓을 들고 금문(金門)ㆍ옥당(玉堂)에 앉아서 왕언(王言)을 대신하고 고초(稿草)를 검토하며 비칙(批勅)ㆍ훈령(訓令)ㆍ황모(皇謨)ㆍ제고(帝誥)의 글을 지어 사방에 선포하여 평생의 뜻을 푼 뒤에야 말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대수롭지 않은 녹을 구하여 처자를 살릴 꾀를 하는 자의 유이기를 바랐겠는가.........."

 

다산시문집 제16권  묘지명(墓誌銘)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옹산(翁山) 윤공(尹公)의 묘지명 

 

공의 전원(田園)이 모두 남방에 있어 천리 밖에서 식량을 공급하니 늘 넉넉하지 못하였다. 과거에 오른 뒤에는 집안 형편이 더욱 영락(零落)하여져 한 해를 계획할 수 없었으되 공이 금문(金門)에 통적(通籍)한 것 때문에 끝내 뉘우치는 빛이 없었다. 그런데 풍등 석화(風燈石火)처럼 손가락을 퉁기듯 변하여 꺼져버리니 슬프도다.

 

위의 백운소설의 기록을 보면 금문과 옥당의 역할은 "왕언(王言)을 대신하고 고초(稿草)를 검토하며 비칙(批勅)ㆍ훈령(訓令)ㆍ황모(皇謨)ㆍ제고(帝誥)의 글을 짓는것"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금문,옥당은 임금의 비서실의 기능으로 임금의 정책,명령등을 받들어 수행하는 기관인

것입니다. 또 위의 기록인 동문선 제34권 박호의 글을 보면 " 금문(金門)에 부(賦)를 아뢰어 자전(紫殿)의 고선(考選)을 받게 되자 외람되게도 갑람(甲覽)을 차지" 했다고 했습니다. 즉 이 글의 저자인 박호가 금문에 자격시험을 보아서 갑람 즉 1등을 하여 정식으로 한림학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산시문집의 기록을 보면 정다산의 친구인 윤서유는 과거에 오른후 집안 형편이 더욱 쇠락하여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다산시문집의 기록을 보면,정다산의 친구인 윤서유는 "금문(金門)에 통적(通籍)한" 사람 입니다. 즉 임금의 명령,정책을

수행한 사람으로 고려시대에 비유하면 한림학사 였습니다. 이러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위의 백운소설의 기록을 보면 (금문,옥당에서 일하는 학림학사들은) "어찌 구구하게 대수롭지 않은 녹을 구하여 처자를 살릴 꾀를 하는

자의 유이기를 바랐겠는가."라며 학림학사들의 청빈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청빈하고 고고한 삶을 살아온 이유는 금문에 통적한 즉 임금의 올바른 정책,명령을 위하여 자신의 사명감으로 일한 그 이유로 인해 사심이 없어 집안 형편이 더욱 쇠락하여졌어도

뉘우치는 빛이 없었다는 기록이 위의 기록인 것입니다. 즉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나 "금문(金門)에 통적(通籍)한 사람"은 임금의 정책,명령에 관계된 학자이며 관료이므로 청빈한 삶이 하나의 의무이자 관행이었다고 보여 집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 처럼  "금문(金門)에 통적(通籍)한 사람"은 임금의 정책,명령에 관계된 학자이며 관료인데 위의 익재난고,동문선 32권의 기록에서 "금문(金門)에 통적(通籍)한 사람"을 두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의 해석인 "고려왕이 원실(元室)에 입찬(入贊)하여 원 나라의 사위가 되었다."는 말도 되지도 않는 해석 입니다. 이 해석은 지나치게 현재의 사관에 충실한 해석 입니다. 왜 현재의 사관에 충실한 해석이 될수 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위의 익재난고,동문선 32권의 기록에서 "당저(當宁 천자가 재위(在位)함을 가리킨다)"와 "건건(乾健 천자를 가리킨다)",

"바닷가의 번국(藩國)을 지키니"라는 글로 인해 현재의 사관에서 보면 당연히 천자는 원나라를 의하므로 문맥상 "금문(金門)에 통적(通籍)한 사람"은 고려 임금 입니다. 그러나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제현이 활동하던 그 당대는 소위 원(元)나라때 입니다.

현재의 서관에서 보더라도 원나라의 조정이 어떠하였다고 하더라도 고려임금은 일국의 왕입니다. 일국의 왕이 한림학사가 되어 "금문(金門)에 통적(通籍)"하여 천자의 천자의 정책,명령에 관계된 학자이며 관료일수는 없습니다.

즉 위의 이제현의 글은 고려의 임금에게 올리는 글 인것입니다. 즉 그 당대의 천자는 고려 임금이었다는 것입니다. 위의 익재난고,동문선 32권의 기록에서 "당저(當宁 천자가 재위(在位)함을 가리킨다)"와 "건건(乾健 천자를 가리킨다)"은 고려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며,

고려사절요에서 이제현은 김해군(金海君)이라는 봉작을 받은 사람 이므로 위의 기록에서 "바닷가의 번국(藩國)을 지키니"의 글에서  번국(藩國)은 이제현의 영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보면,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임인 11년(1362), 원 지정 22년

 

○ 봄 정월에 구묘(九廟)의 가주(假主)를 복주향교(福州鄕校)에 봉안하였다.

 

고려사절요 제34권  공양왕 1(恭讓王一)  경오 2년(1390), 대명(大明) 홍무 23년

 

○ 왕이 조계종(曹溪宗)의 중 찬영(粲英)을 맞이하여 스승을 삼고자 하니, 대사헌 성석린(成石璘)과 좌상시 윤소종(尹紹宗) 등이 대궐문에 엎드려 이를 간하고, 또 연장(聯章)하여 소를 올리기를,(중략)

지금 전하께서는 중흥하셨으니, 바야흐로 법을 만들고 모범을 보여서, 성스럽고 신령한 자손들이 억만세토록 따르게 해야 할 것이온데, 이제 다시 오랑캐의 실패한 점을 물려받아 이에 불교를 스승으로 삼으려 합니다. 국가를 가진 자는 정사를 세울 때에 그 명분에 따라서 마땅히 실적을 구해야 합니다. 이른바 사(師)란 것은 그 도를 본받는 것이온데, 석씨(釋氏)는 신하와 자식으로서 임금과 아버지를 배반하고 도망하여 산림으로 들어가서 적멸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만약 그 법을 본받는다면 반드시 삼한의 백성들을 중으로 만들고, 반드시 구묘(九廟)의 제사를 끊어지게 해야만 그 명분에 맞을 것입니다.

 

동문선 제53권  주의(奏議)  상 공양왕 소(上恭讓王疏)  윤회종(尹會宗)


현릉(玄陵 공민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 등이 반역자 신돈(辛肫)의 아들 우(禑)를 세워서 우리 왕씨(王氏)의 전통을 이으니, 아홉 사당의 향화가 끊어진 지가 16년이나 되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 이미 망했던 왕실(王室)이 일어났으니, 전하께서 의당히 깊이 생각하고 밝게 영단을 내리시어 신우(辛禑)의 부자를 종묘(宗廟)에 고하고 저자에서 벤 연후에 구묘(九廟)의 영(靈)께 위로하고 신민(臣民)의 희망에 보답하여 화란(禍亂)의 근원을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동문선 제127권  묘지(墓誌)  철성부원군 이문정공 묘지명 병서 (鐵城府院君李文貞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아버지의 이름은 우(瑀)인데, 재능을 인정받아 회양(淮陽)과 김해의 부사와, 전주와 진주의 목사를 역임하였으며, 이르는 곳마다 인애(仁愛)의 덕을 남겼고 철원군(鐵原君)에 봉하였다..........금상이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공을 등용하려다가 행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봉작을 습작하고 개부(開府)를 설치하게 하여 공경히 대우를 다하였다.(令襲父封開府以致敬。)......"

"높도다 문정공이여 / 巍巍文貞        철성에 개부하였도다 / 開府鐵城.........적에게 교만하게 하여 전복시키니 / 俾驕以覆     9묘의 혼령이 놀라지 않았도다 / 九廟不驚.........."

 

유교의 예기의 기록에서도 알수 있듯이 천자의 사당을 상징하는 칠묘(七廟) 그리고 칠묘(七廟)의 변형인 구묘(九廟)를 소위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다던 고려의 공민왕때도 고려 임금의 사당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현재의 역사와 조선왕조의 고려사에서는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입니다. 심지어 고려 원종(元宗) 이후로 고려 임금들은 묘호(廟號)조차 없는 임금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보면 공민왕때 고려의 종묘사직은 제후의 종묘사직인 오묘(五廟)가 아닌 천자의 사당인 구묘(九廟)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고려의 마지막 왕때인 공양왕 시대는 역사상 명나라때인데 이 때에도 고려는 황제국의 종묘사직인 구묘(九廟)였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즉 고려는 건국해서 망할때까지 황제국의 지위를 가진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동문선 제127권의 기록을 보면,고려의 목은 이색선생의 글에도 고려가 구묘의 국가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문선 127권의 기록은 환단고기(桓檀古記)의 "단군세기"의 저자로 알려진 행촌 이암 선생에 관한 글 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황당한 기록이 있는데 행촌 이암선생의 아버지가 철원군(鐵原君)에 봉작을 받았는데,고려의 임금은 행촌선생이 행촌선생의 아버지의 봉작을 물려받게 하여 개부(開府)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부(開府)의 의미는 책봉된 작위를 자손이 이어받는다는 의미로 천자국이 아니고서는 있을수 없는 기록 입니다.

즉 동문선 127권의 기록에서 구묘(九廟)의 기록과 개부(開府)의 기록과 의미로 볼때 고려는 원(元)나라 그 당시에도 천자국의 지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고려가 천자의 사당인 칠묘(七廟)=구묘(九廟)였다는 기록이 참으로 황당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이제현의 글에서 "금문(金門)에 통적(通籍)"이란 글의 의미와 더불어 한국고전 번역원의 잘못된 해석을 알고나서 위의 고려가 천자의 사당인 칠묘(七廟)=구묘(九廟)였다는 기록은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고려는 건국부터 망할때까지 천자국(天子國)이었으며 소위 금(金),요(遼),송(宋),원(元)때도 고려는 천자국이었으며 금(金),요(遼),송(宋),원(元)의 실체는 고려의 조대명에 불과한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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