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승정원일기 > 고종 9년 임신(1872, 동치 11) > 12월4일 (갑인) 맑음
"........낭서 이시(李施)에게 평해군(平海君)을 추증하였는데, 안원대군(安原大君)의 적장자이다. 학생 이보하(李輔夏)에게 동해군(東海君)을 추증하였는데, 안원대군의 적중자이다. 동돈(同敦) 이문(李文)에게 곤산군(崑山君)을 추증하였는데, 안원대군의 적장손이다. 만호(萬戶) 이희무(李希武)에게 윤산군(崙山君)을 추증하고, 학생 이철(李哲)에게 양평군(陽平君)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안원대군의 적중손이다. 증 참의 이수(李秀)에게 동양군(潼陽君)을 추증하였는데, 안원대군의 적장증손이다. 진사 이춘흥(李春興)에게 동남군(潼南君)을 추증하고, 단련사(團鍊使) 이부기(李富琦)에게 요성군(遼城君)을 추증하고, 학생 이덕봉(李德奉)에게 요양군(遼陽君)을 추증하고, 이승(李承)에게 요평군(遼平君)을 추증하고, 중랑장(中郞將) 이상좌(李上佐)에게 요해군(遼海君)을 추증하고, 학생 이응좌(李應佐)에게 요천군(遼川君)을 추증하고, 이경좌(李敬佐)에게 요릉군(遼陵君)을 추증하고, 이인보(李仁輔)에게 요흥군(遼興君)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안원대군의 적중증손이다.
낭장 이환(李環)에게 동원군(東原君)을 추증하였는데, 안풍대군(安豐大君)의 적장자이다. 증 통훈대부 이서(李瑞)에게 동흥군(東興君)을 추증하였는데, 안풍대군의 적중자이다. 부정 이철(李哲)에게 낙평군(洛平君)을 추증하였는데, 안풍대군의 적장손이다. 증 통정대부 이원매(李元梅)에게 하평군(河平君)을 추증하였는데, 안풍대군의 적중손이다. 이상은 종정경을 예겸하게 하였다. 판윤 이득환(李得桓)에게 순녕군(順寧君)을 추증하고 지종정경을 예겸하게 하였는데, 안풍대군의 적장증손이다. 증 가선대부 이순공(李順恭)에게 신녕군(信寧君)을 추증하였는데, 안풍대군의 적중증손이다.
통정대부 이백(李栢)에게 동회군(東淮君)을 추증하였는데, 안창대군(安昌大君)의 적장자이다. 이상은 종정경을 예겸하게 하였다. 증 찬성 이주(李柱)에게 동하군(東河君)을 추증하고 지종정경을 예겸하게 하였는데, 안창대군의 적중자이다. 가선대부 이현(李賢)에게 밀계군(密溪君)을 추증하였는데, 안창대군의 적장손이다. 동지 밀직 이서인(李舒仁)에게 전순군(全順君)을 추증하고, 이서라(李舒羅)에게 전해군(全海君)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안창대군의 적중손이다. 족교위(族校尉) 이천(李天)에게 전선군(全善君)을 추증하였는데, 안창대군의 적장증손이다. 부총판(副摠判) 이보림(李寶林)에게 완흥군(完興君)을 추증하였다. 이상은 종정경을 예겸하게 하였다. 전서 이청(李靑)에게 완창군(完昌君)을 추증하고 지종정경을 예겸하게 하였는데, 이상은 안창대군의 적중증손이다.
증 가선대부 이대가(李大嘉)에게 서릉군(西陵君)을 추증하였는데, 안흥대군(安興大君)의 적장자이다. 주부 이반(李班)에게 서춘군(西春君)을 추증하고, 학생 이말흘(李末屹)에게 서녕군(西寧君)을 추증하고, 이천기(李天杞)에게 서청군(西淸君)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안흥대군의 적중자이다............"
위의 기록은 봉군(封君)에 대한 기록인데 봉군제도는 옛날의 봉건제도에 기인된 제도인데 보통 지명(地名)을 붙여 씁니다. 봉군할때 붙이는 지명은 보통 본관이나 연고가 있는 지명을 붙입니다.
위의 기록은 조선 후기 1800년대 후기 고종조때의 기록으로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의 강역 상황을 알수 있는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참으로 놀라운 기록들이 나옵니다.
위의 기록에서 "동돈(同敦) 이문(李文)에게 곤산군(崑山君)을 추증하였다."는데 곤산(崑山)이란 지명은 고전번역원의 기록을 검색하여 보아도 현재의 조선 역사와 관련이 없는 지명이며 한반도와 관련이 없는 지명 입니다. 그러나 경세유표 제12권의 기록을 보면 곤산(崑山)은 대륙의
소주(蘇州)지역 입니다. 또 "만호(萬戶) 이희무(李希武)에게 윤산군(崙山君)을 추증"했다는데 고전번역원 전체의 기록을 검색하여 보아도 현재의 조선 역사에 없는 지명이며 본인도 어디를 말하는 지명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다만 대륙의 곤륜산과 관계된 지명으로 생각됩니다. 또
"증 참의 이수(李秀)에게 동양군(潼陽君)을 추증하였다."는데 동문선 제10권의 기록을 보면 "배로 목양 동양역에 이르다."라는 기록으로 유추해서 경세유표 12권의 기록을 보면 동양 지역은 대륙의 해주(海州) 지역으로 나옵니다. 이 또한 한반도와 관련이 없는 지명 입니다.
또 "진사 이춘흥(李春興)에게 동남군(潼南君)을 추증하다."라는데 동남((潼南)이라는 지명은 대륙의 중경(重慶)지역의 지명 입니다. 이 또한 한반도와 관련이 없는 지명 입니다.
"단련사(團鍊使) 이부기(李富琦)에게 요성군(遼城君)을 추증하고, 학생 이덕봉(李德奉)에게 요양군(遼陽君)을 추증하고, 이승(李承)에게 요평군(遼平君)을 추증하고, 중랑장(中郞將) 이상좌(李上佐)에게 요해군(遼海君)을 추증하고, 학생 이응좌(李應佐)에게 요천군(遼川君)을 추증하고, 이경좌(李敬佐)에게 요릉군(遼陵君)을 추증하고, 이인보(李仁輔)에게 요흥군(遼興君)을 추증하였는데" 위의 기록에서 요성(遼城)은 대륙의 요동성을 의미하는 지명이며,요양 또한 대륙의 요동지역 지명이며 요해((遼海) 또한 대륙의 요동지역과 관련된 지명이며,
요천(遼川)은 고구려의 "고현묘지명"에 드장하는 것을 보아 대륙의 요동 지역과 관련된 지명이며, 요평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만랑(漫浪) 황호의 시문집인 "만랑집(漫浪集)"의 기록을 보면,청석령(靑石嶺)이란 시(詩)에 요평이 있는것을 보아 대륙의 요동지역과 관련된 지역임을
알수 있습니다. 또 "주부 이반(李班)에게 서춘군(西春君)을 추증하고, 학생 이말흘(李末屹)에게 서녕군(西寧君)을 추증하고, 이천기(李天杞)에게 서청군(西淸君)을 추증하였는데"의 기록에서 서춘(西春)은 현재의 조선역사에 봉군(封君)에 대한 지명(地名)인데 어느 지역을 말하는지
는 알수 없으며 현재의 대륙의 남경과 산동성 지역에 있는 지명이며 서녕(西寧) 또한 조선역사에 봉군(封君)에 대한 지명(地名)인데 어느 지역을 말하는지는 알수 없으며 현재의 대륙의 감숙성에 있는 지명이며 서청(西淸) 또한 현재의 조선역사에 봉군(封君)에 대한 지명(地名)인데 어느 지역을 말하는지는 알수 없으며 현재의 대륙의 천진(天津)에 있는 지명 입니다. 위에서 말한바 처럼 봉군제도는 옛날의 봉건제도에 기인된 제도인데 보통 지명(地名)을 붙여쓰며 그 지명은 보통 본관이나 연고가 있는 지명을 붙입니다.
현재 우리가 배우는 조선의 역사에서 조선은 한반도 만을 강역으로 하는 역사 입니다. 그리고 조선은 명(明)이나 청(淸)에 제후국으로 세월을 다 보낸 역사 입니다. 그런데 조선의 왕족,공신에게 적용되는 봉군(封君)에 관련된 지명들은 현재의 대륙에 있는 지명들로
그 지명들의 많은 수가 조선의 봉군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봉군명은 절대로 남의 강역에 있는 지명을 붙일수가 없습니다. 위의 고종실록은 1872년의 기록 입니다. 즉 이 당대까지만 해도 조선은 대륙에 있었으며 적어도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 그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은
대륙의 주인이었던 것이며 을사조약 그 이후로 조선은 한반도 조선이 되어 갔으며 이 때부터 문서상으로 한반도 조선이 되었다고 보여 집니다. 위의 고종실록은 1872년의 기록과 관련이 있는 문헌은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5권 벽려신지(薜荔新志)의 기록 입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5권 벽려신지(薜荔新志)의 기록을 보면,조선의 옛날 관청(官廳)의 명칭을 언급하고 있는데,그 명칭들이 하나같이 대다수가 현재의 대륙에 있는 지명들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이와 관련된 문헌인
고종실록 34년 정유(1897, 광무 1) 9월8일 (갑오, 양력 10월 3일)의 기록을 보면 "북쪽으로는 야인(野人)과 여진(女眞) 등의 지역까지 모두 통일 국가가 되어 온전한 형국을 이루었으니, 이 정도의 지역으로도 충분히 제국(帝國)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옛날 삼대(三代)의 제도는 천자(天子)의 기봉(畿封)이 1천 리에 불과하였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영토는 남쪽과 북쪽 끝까지 3600여 리를 통괄하고 있으니, 요 임금과 순 임금보다 몇 배 이상이 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북으로 여진,야인이 있는 곳은 소위 청(淸)의 강역 입니다. 그런데 고종실록에서는 청의 강역까지 통일된 국가로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는 조선은 청의 제후국에 불과 했는데 이 기록을 보면 청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청의 지역까지 통일된 국가라 말하는 것을 참조해서 보면 그 당시 중원 대륙에서 황제는 고종 임금이며 청(淸)은 조대명에 불과하며 만주족은 하나의 권문세족적인 제후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 결론에 대해 위의 고종실록의 또 다른 기록은 구체적인 증거자료를 부연해 주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옛날 삼대(三代)의 제도는 천자(天子)의 기봉(畿封)이 1천 리에 불과하였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영토는 남쪽과 북쪽 끝까지 3600여 리를 통괄하고 있으니, 요 임금과 순 임금보다 몇 배 이상이 된다."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삼대(三代)라 함은 하(夏),은(殷),주(周)를 가리키는 말 입니다. 또 기봉(畿封)이란 말의 의미는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수도(首都=神州) 와 수도의 직할 영지인 적현(赤縣)과 적현의 근방지역인 기현(畿縣)까지의 지역이 경기(京畿)
지역이 되며 이 경기지역을 다른말로 기봉(畿封)이라 말합니다. 즉 위의 기록의 의미는 옛날 삼대(三代)의 천자(天子)의 기봉(畿封) 즉 천자가 직접 통치하는 경기지역의 강역이 1천리라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 위의 기록에서 우리나라의 영토가 3600리라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으로 생각됩니다. 위의 기록의 원문이 제공되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수 없지만 위의 기록을 문맥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순이 되는 번역이 됩니다.
옛날 삼대가 다스렸던 천자의 기봉 즉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경기지역의 강역을 말하면서 우리나라 즉 조선의 전체 강역을 말하는 것은 이치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위의 기록은 댓구적으로 그 의미를 말하고 있으므로 옛날 삼대의 기봉이 1천리 인데 조선의 기봉은 즉 경기도의 강역은 3600리 이며 이는 요,순때 보다 몇배 이상이 된다는 기록인 것입니다. 또 조선이 제후국이라면 천자국의 기봉을 언급하면서 조선과 천자국을 동격으로 언급할수도 없습니다. 또 고종실록 2년 을축(1865, 동치 4) 5월20일 (갑인) 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천리방기 그 주위에 북쪽으로는 대륙의 산서성 지역의 태행산이 있고,남쪽으로는 대륙의 황하와 제수가 있어 조선의 천리방기의 울타리 역할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또 "좌풍익(左馮翊)과 우부풍(右扶風)이 삼보(三輔)의 이사(吏士)에게 덕의(德意)를 펼치고 있다."
는 기록에서 삼보(三輔)의 의미는 즉 한무제때 장안을 중심으로 한 3개의 행정 구획으로 경조(=장안)을 포함하는 동부(東部),좌풍익(북부=대륙 섬서성 지명),우부풍(서부=대륙 섬서성 지명)을 통틀어 일컨는 것입니다.
조선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기에 조선의 주위에 이런 황당한 지명들이 나오는지 이해 할수 없습니다. 위의 기록들은 한반도 조선론의 그 허구성을 극명히 보여 주는 기록들 입니다.
위의 고종실록은 1872년의 기록에서는 지명을 사용하는 봉군명(封君名)들의 상당수가 현재의 한반도에 없고 대륙에 있는 지명들임을 알수 있고 고종실록 34년 정유(1897, 광무 1) 9월8일 (갑오, 양력 10월 3일)의 기록에서는 청은 안중에도 없이 조선이
청의 강역까지 통일된 국가로 말하고 있으며 고종실록 2년 을축(1865, 동치 4) 5월20일 (갑인) 의 기록에서는 조선의 강역에 한반도에 없는 대륙의 산서성 지역의 태행산과 대륙의 황하와 제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같은 시대의 저작인 "임하필기"에서도
조선의 옛날 관청(官廳)의 그 명칭들이 하나같이 대다수가 현재의 대륙에 있는 지명들로 이루어진 기록들을 볼때 1800년대는 물론이요 적어도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 그 이전까지 조선은 대륙의 주인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볼때 청(淸)이며 명(明)은 허구상의 존재들 또는 조선의 권문세족적 제후의 신분에 불과한 존재들임을 알수 있습니다. 또 위의 기록들을 토대로 볼때 적어도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 그 이전까지에 있었던 조선관련 근현대사는 대륙에서 벌어진 사건들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