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계년사"(정교(鄭喬:1856∼1925)가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망할 때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책) 권1의 기록을 보면,황제(皇帝)의 죽음에 대해 높임말로 붕어(崩御)라고 말하며 이와 같은 의미로
황제(皇帝)의 죽음에 대해 높임말로 선어(仙馭),안가(晏駕) 라고 하며 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훙서(薨逝),훙거(薨去) 라고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 외에 황제(皇帝)의 죽음에 대해 높임말로 昇遐(승하), 登遐(등하), 上賓(상빈), 崩逝(붕서), 天崩(천붕), 禮陟(예척), 陟方(척방) 등이 황제=천자의 죽음에 대한 높임말 이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 임금의 죽음에 대해 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훙서(薨逝),훙거(薨去)라는 용어와 더불어 선어(仙馭),안가(晏駕),上賓(상빈),승하(昇遐),천붕(天崩)등의 용어가 무수하게 등장 합니다. 조선의 임금들은 천자들이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은은 천자와 제후의 역사가 뒤섞인 역사 입니다.
어떤 혹자는 말하길,조선에서 황제의 죽음에 대해 붕어(崩御),붕서(崩逝)라 하고 제후 왕의 죽음에 대해 天崩(천붕)이라 한것은 "소중화(小中華) 의식이나 모화(慕華) 사상에 따른 것"으로 본다고 합니다. 이는 말도 되지도 않는 말 입니다. 진정으로 소중화,모화사상을 가졌더라면 이른바 유교의 질서 가치관의 그 표본인 예기(禮記)의 기록대로 절대로 순종해야만 합니다.
단종 1년 계유(1453,경태 4) 4월23일 (경술) 안평 대군 이용의 부인 정씨의 졸기 의 기록을 보면,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부인 정씨(鄭氏)가 졸(卒)하니, 쌀·콩 아울러 70석과 종이 1백권과 관곽(棺槨)을 내려 주었다. 정씨는 졸한 병조 판서 정연(鄭淵)의 딸인데, 용이 박대(薄待)하여 서로 보지 아니한 것이 이미 7, 8년이었다. 졸하게 되자 그 염(斂)하고 빈(殯)하는 여러 가지 일을 전혀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그 아들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도 또한 가서 보지 아니하니, 서인(庶人)의 죽음과 다를바가 없었으므로, 보는 자들이 개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후에 이용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불사(佛事)에 지극히 정성을 드리고 지극히 부지런하였으나, 그러나, 세종(世宗)과 소헌 왕후(昭憲王后)와 문종(文宗)이 서로 잇달아 붕어(崩御)하시고, 아들 이우량(李友諒)도 또 따라서 죽고, 이제 또 아내도 죽으니 비로소 불사(佛事)가 사람들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고, 드디어 불사를 일으키지 아니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내가 불사(佛事)에 지극히 정성을 드리고 지극히 부지런하였으나, 그러나, 세종(世宗)과 소헌 왕후(昭憲王后)와 문종(文宗)이 서로 잇달아 붕어(崩御)하시고"의 원문을 보면,(我於佛事, 至精至勤矣。 然世宗、昭憲王后、文宗相繼而崩)
위의 기록을 보면 "세종(世宗)임금과 소헌 왕후(昭憲王后)와 문종(文宗)임금의 죽음에 대해 천붕(天崩)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붕(崩)이라 했습니다. 즉 붕(崩)이란 천자의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천자의 죽음을 말하는 붕어(崩御) 입니다.
제후가 함부로 제후의 죽음에 대해 붕(崩)=붕어(崩御)를 말할수 없습니다. 이는 소중화가 아닌 반역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