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의 도가 이미 사라지자 양(楊)ㆍ묵(墨)과 노(老)ㆍ불(佛)이 제멋대로 날뛰어 천하 사람들을 모두 그들의 권내(圈內)로 끌어들여 돌이킬 줄을 몰랐다.
[주D-006]《제경경물략 (帝京景物略)》 : 책명으로 명 (明) 나라 유동(劉侗)ㆍ우혁정 (于奕正)이 편저하였다. 당시 북경 (北京)의 경물 (景物)을 기록한 것으로, 이 중에 천주당 (天主堂)과 이마두총 (利瑪竇冢)의 2조 (條)가 들어 있다. 전 8권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3 - 석전류 3 | ||||
서학(西學) | ||||
사교(邪敎)의 배척에 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53)
구세주(救世主) 탄생 1천 8백 46년 5월 초8일.
장정부(莊廷敷)의 지구도(地球圖)를 상고해보면 “남극(南極) 아랫 부분에 새로 남묵리가소지(南墨利加少地) 등을 그리고 모두 제 5대주(五大州)라고 하였다.
일찍이 불랑서(佛(日+郞)西) 해군이 대랑산(大浪山)에서 멀리 바라보니 육지가 보이므로 찾아가 보니 오직 아득히 펼쳐진 벌판 뿐이었다. 밤이 되자 하늘에는 성화(星火)가 가득하였고 대낮에는 사람이라고는 없고 단지 한 곳에 앵무새만 보이므로 이곳을 앵무지(鸚鵡地)라 이름 붙였다 한다.” 하였다.
이로 보아도 불랑서라는 나라가 과연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러나 낭(郞)자의 왼쪽 곁에 특별히 날일[日]자를 붙인 것이 이상하다. 날일자를 붙인 것은 아마도 입 구[口]자의 착오가 아닌가 모르겠다. 이것은 영길국(咭國)을 영길(英吉) 두 자의 곁에 입 구[口]자를 붙여서 영길(咭)로 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낭서(啷西)라 쓸 것을 착오로 낭서((日+郞)西)라고 썼거나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옮겨 쓰면서 잘못된 것이리라.
이제 그 문서를 살펴보니 한자(漢字)로 썼고 또 문장도 익숙한 솜씨여서 중국에서 널리 쓰이는 공문(公文)과 유사한 점이 있으니, 저들 중에 반드시 한문과 한자를 익힌 자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저들의 말대로 과연 기해년(1839) 8월 초순에 서양인 나백다록(羅伯多祿)ㆍ정아각백(鄭牙各伯)ㆍ범세형(范世亨) 등 세 사람을 엄중히 조사하여 사형시킨 일이 있다. 그런데, 이제 저들의 문서에 쓰인 날짜가 모두 맞으니 어떻게 9만여 리나 떨어져 있는 외국의 일을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일까.
반드시 중국 연경(燕京)의 천주당(天主堂)과 오문(澳門)을 통해서 알았을 것이다.
기해년에서 병오년까지는 8년의 간격이 있는데, 이렇게 뒤늦게 알고 찾아와 따지는 것은 그 나라가 뱃길로 몇 년이 걸려야 비로소 중국에 도달하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문서의 뜻을 살펴보건대, 무한한 복선(伏線)이 깔려 있어서, 평범하게 표류된 자들의 행위가 아니니 뒷날의 문제가 없을지 어찌 알겠는가. 임진년의 왜란과 병자년 청란(淸亂)이 미리 그 내침의 조짐이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덮어두고 살피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표류선(漂流船)을 보통 황당선(荒唐船)이라 하여 족히 염려할 게 없다 하지만 이미 그러한 사건이 있었고 또 그에 대한 실제의 항의 문서가 있으니 어찌 마음에 경계함이 없을 수 있겠으며, 기(杞) 나라 사람의 염려와 칠실(漆室)의 근심이 없겠는가.
또 《청일통지(淸一統志)》와 《청삼통(淸三通)》ㆍ《명사(明史)》 등의 서적을 상고해 보아도 대불랑서국(大佛(日+郞)西國)은 없으니, 이 나라가 어느 지방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나라가 대서양(大西洋)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청일통지》와《명사》에는 불랑기(佛狼機)라는 나라가 있는데 혹시 이 나라가 국호를 바꾼 것일지도 모른다.
《곤여외기(坤輿外記)》에 “불랑찰(佛郞察)은 구라파주 이서파니아(以西把尼亞)의 동북에 있다.” 하고, 또 불람제아(拂覽第亞)라는 나라도 실려 있다. 곤여도(坤輿圖)에는 불란기(佛蘭機)라는 나라가 있으니, 요컨대 대서양과 구라파 중의 한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후일 다시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용인(龍仁) 김재준(金在俊)의 아들 재복(再福)이 중국에서 온 신부 유방제(劉方濟)를 따라 갔다가 금년 즉 병오년에 돌아왔는데 이름을 고쳐 대건(大建)이라 하였다. 그는 경강(京江)의 용산(龍山)에 살면서 장사치를 시켜 이익이 두 배로 남을 물건만 바꾸고 팔게 하여 일일이 효험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서 포도청에 체포되어 형(刑)을 받았다 하였다.
정미년(1847) 7월에 대불랑서의 큰 배 2척과 중간 배 15척이 호남(湖南) 만경현(萬頃縣) 해포(海浦)에 와서 정박하고는, 수군 제독의 배라고 하면서 지난 해에 와서 안수이(安愁爾)ㆍ사사당(沙斯當)ㆍ모랑(慕郞) 세 사람이 처형된 이유를 물은 데 대한 답서를 받으러 왔다고 하였다.
만경 현감(萬頃縣監)ㆍ고부 군수(古阜郡守)ㆍ군산 첨사(群山僉使)가 사정을 물어보기 위해 배에 오르니, 단지 15인만 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고 나머지는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배 위에는 관원이라고 일컫는 자 수십 명이 늘어 앉았는데, 많은 사람이 무기를 들고 호위하여 매우 엄숙하였다.
그들의 말이,
“우리들은 우리 원수(元帥)의 명을 받들고 작년에 우리가 보낸 문서의 회답을 받으러 왔다. 서둘러 회답을 가져오지 않으면 응당 우리 원수에게 보고하여 며칠 안으로 내도(來到)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우리측과 문답한 내용은 이러하다.
“원수(元帥)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광동(廣東)에 있다.”
“광동은 여기서 몇 리나 되는가?”
“수로(水路)로 3천 리이다.”
“당신네 나라는 이곳에서 몇 리나 되는가?”
“이곳에서 수로로 2만 리이다.”
그 배에 실은 것은 모두 대포와 화약ㆍ연환(鉛丸)이었고, 기타 비단과 잡화가 가득하였으나 배 밑에 깊이 감춰두고 보지 못하게 하였다.
“배 안에는 몇 명이 있는가?”
“7백 명이 있다.”
하였는데, 그 기세가 매우 사나웠으며, 사람들은 푸른 눈동자에 머리는 노란 색이었고 의관은 이상하고 야릇하였다.
또,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지금 식량이 떨어져 기사(飢死) 직전에 있으니, 양곡과 물고기ㆍ채소 등을 많이 가져다 주어야 살 수 있다.” 하기에,
“식량과 반찬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상관의 지휘에 달려 있으니 내가 어찌 마음대로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고 대답하자, 저들이 말하기를,
“상관은 같은 동료이라 의리상 형제와 같으니 하급 관리가 어찌 품고(稟告)한 후에야 하는가. 만일 즉시 식량과 반찬을 보내주지 않으면 죽음이 박두했으므로 우리들은 귀국의 민가를 약탈해서 먹을 것이다.”
하였다. 말이 매우 거칠고 사나우므로 문정관(問情官)이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며칠 동안 장계를 올려서 일곱여덟 차례나 시끄럽게 오갔으니 그 위급하게 된 형세를 알 수 있다. 그 후 들으니 조정에서 그들에게 식량을 줄 것을 허락하였다 한다.
저들이 또 말하기를,
“우리들의 큰 배가 육지에 정박할 때 파괴되어 못쓰게 되었으니, 귀국의 큰 배 2척을 빌려주면 배값은 우리가 광동(廣東)에 가서 갚아주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육지에 내려서 해변에 막사(幕舍)를 짓는데 막사의 높이는 8길 남짓했으며 비단 장막으로 막았고, 막사의 수는 10여 개인데 한 막사에 수십 명이 들어갔다. 장막 밖에는 무기를 든 군사를 많이 풀어서 자위(自衛)하고 한편에는 대장간을 지어 놓고 무기를 만들고 한편에서는 화약을 만들고 포통(砲筒) 아래에는 다시 창 칼을 꽂아서 한 무기를 두 가지로 사용하였다.
그 큰 배는 길이가 46장(丈)에 높이가 4~5장이고 구리판으로 배를 둘렀으며, 뱃전에는 화살을 막는 장벽을 만들어 놓았으며, 이의 입구는 마치 성가퀴 같은데 여기에 포구(砲口)가 주발 만한 대포를 배치해 놓았다.
그들의 행동이 극히 수상해서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모르겠으나, 이 배가 와서 정박한 뒤에 전하는 말로는 하늘에서 갑자기 격렬한 천둥과 벼락을 쳐서 삽시간에 배에 타고 있던 오랑캐들을 죽였다고 하는데 이 말은 잘못 전해진 말이다. 대체로 호남(湖南)의 바닷가 사람들이 이 일로 놀라고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어수선하여 안정되지 못한 데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는 비록 전해 들은 것을 대략 기록한 것이기는 하지만, 호남 감사의 장계를 보고 온 자가 전해준 것이다. 우선 소식이 있기를 기다려서 차례대로 계속해서 기록하고 싶으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에 있으니 무슨 길로 소식을 듣겠는가. 다만 스스로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사건의 실마리를 살펴보면, 지난해에 받지 않겠다는 문서를 억지로 던져두며 내년에 다시 회답을 받으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간 것은 장차 난을 일으킬 조짐이었고, 이제 많은 배에 무기를 싣고 와서 육지에 내려 막사를 치고 무기를 만들며 화약을 만드는 것은, 자기들의 힘이 세다는 것과 오래 머무르겠다는 뜻을 보이려는 것이다.
저들도 사람이니 어찌 지난 번에 이미 우리가 문서를 받지 않으려 한 것은 생각지 않고 이제 우리가 즐겨 회답하리라고 생각하겠는가. 더구나, 만리 길을 와서 전한 문서를 그때에 즉시 회답을 받지 않고 해가 지난 뒤에 회답을 받는 것은,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양식을 청하고 배를 빌려달라는 것과 이치에 맞지 않는 허다한 말은 그 뜻이 양식과 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를 한번 시험해보려는 것이니, 만일 그들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위협하고 해독을 끼치기 위한 핑계를 만들려는 간사한 꾀이다.
전초적인 행동이 이미 지난해 문서를 던지고 갔을 때에 나타났는데, 조정에서는 장차 어떻게 조치할지 자못 근심스럽다. 내가 그 뒤에 전하는 말을 들으니 조정에서 한참 뒤에 그들이 청하는 양식을 주었더니 물리치고 받지 않으면서 “어찌 너희 나라에서 주기를 기다려서 먹겠는가.” 하고는 한 통의 봉서(封書)를 꺼내어 만경 현감(萬頃縣監)에게 주며 조정에 올리라고 하였다. 현감이 처음에 거부하고 받지 않다가 협박하므로 부득이 받아서 감영에 올렸다. 감사가 함부로 문서를 받았다고 하여 파면하고 그 글을 돌려보내기를 청하니, 조정에서는 일이 이미 날짜가 지났다고 해서 대죄거행(帶罪擧行)하게 하였다.
그 오랑캐들이 또 부안 현감(扶安縣監)을 시켜 봉서를 올려 회답을 받게 하니, 부안 현감이,
“이 일로 앞서 만경 현감이 파직되었는데 내가 어찌 감히 따르겠는가.”
하고 굳게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자, 그쪽 장군이 호통을 치며 죽이겠다고 위협하므로 부안 원이 두려워서 글을 받아 사유를 갖춰 적어서 감영으로 보냈고 감사도 또한 이러한 뜻과 아울러 봉서(封書)를 조정에 올렸다. 봉서 중에 화상(畫像) 3건이 있었는데 숨기고 내놓지 않았고 글의 내용도 숨겼다 한다.
조정에서 정원(政院)에 명하여 회답을 보내니 저들이 답서를 받고는 큰 배 2척을 남겨서 병기와 잡물을 실어 문정관(問情官)에게 맡기고, 나머지 배는 일시에 떠나면서 내년에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그 배를 남겨둔 것이 다시 오겠다는 뜻이나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이 해변에 있을 때에 자주 광동(廣東)을 왕복하였는데, 왕복에는 14일이 걸리니 7일이면 광동에 도착할 수 있다 한다. 또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에게 들으니 여자를 많이 약탈해 갔다 한다.
지난해에 중국에서 광동성(廣東省) 전체를 낭서인(朗西人)에게 주어 지금은 저들의 관할이 되었다 한다.
남겨 둔 배 가운데 하나는 섬에 교착시켜서 움직이지 않게 해놓았는데 이는 일을 중요한 시점에 일으켜 이를 타고 넘어오기 위해서 그런 것이고, 하나는 바닷가에 놓아 두었는데 이는 병기(兵器)가 소실되면 이를 가지고 트집잡으려는 계책이다. 우선 내년을 기다려서 다시 기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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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호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4.18 악당 반작비랄다(般雀比剌多)는 로마제국 당시 유대총독을 지냈던 본디빌라도 [ Pontios Pilatos , Pontius Pilatus ]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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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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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호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4.19 그럼 조선사료에 나타난 것이 거짓일까요? 아시아에 유리하게 적힌것은 다 맞고 아시아에 불리하게 적힌것은 거짓인가요? 본문의 내용은 분명히 조선인 이경근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적혀있는 내용입니다.
고구려 유리왕 19년은 분명히 AD1 년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치하에 이스탄불이 점령되었을때 아랍인들이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에 있는 예수의 벽화를
훼손시켰습니다. 예수나 성모마리아의 얼굴을 모두 훼손시켰죠. 그전에는 이스탄불은 분명히 기독교 문명권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용숙님이 샤먼제국에도 중국 진시왕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황제라고 고증해놓았습니다. -
작성자이호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4.19 문화라는 것이 어느 한 민족에 의해 오랜 세월동안 문화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이민족간에 서로 교역하며, 전쟁으로 명멸하면서 주고받으며 문화를 발전시킨겁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태동했고 그뒤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BC336년) 황제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하였습니다.
이것이 현재 지나족들이 주장하는 진시황의 중국 통일과 일치하는데 박용숙님은 현 지나족의 진시황의 역사는 오류 투성임을 밝혀내셨죠 -
답댓글 작성자이호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4.19 이후 로마제국이 형성됐고 BC92년 경에 로마제국과(사산조)페르시아가 처음 접촉했는데 이후 7세기동안 서로 대치하며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합니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AD307년에 새로 로마제국에서 분리되어 나온 제국이고요. 이때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이 페르시아와 로마제국을 침략했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 왕조를 멸망시킨 후, 비잔틴 제국령이었던 시리아, 이집트,북아프리카 영토를 점령하여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고대 그리스와 비잔틴 제국의 과학기술이 이슬람 문화에 영향을 주어 이슬람제국에서 과학이 발전하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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