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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와 산동은 遼東들판안에

작성자현상태|작성시간13.03.25|조회수290 목록 댓글 0

 

1)(성화)15년, 호부상서 진굉에게 섬서를 總制하게 하였다. 여름, 적이 遼東淸河堡에 들어와서 密雲으로 이르렀다가 서쪽으로 돌아와 偏頭關을 노략질 했다. 가을, 다시 기병 5천으로 遼東長安堡를 침범하였는데, 부총병 류상이 막고, 적의 수급 51을 베자, 적이 이에 퇴각하였다. - 명사 권327 열전215 외국8 달단

[十五年以戶部尚書秦紘總制陝西。夏,敵入遼東清河堡,至密雲,旋西掠偏頭關。秋,復以五千騎犯遼東長安堡,副總兵劉祥禦之,斬首五十一級,敵乃退。- 明史 卷三百二十七 列傳第二百十五 外國八 韃靼]

 

2)장안보 : 부의 동남 50리에 있다. 부의 동쪽 120에 또 제천보가 있는데 모두 둘레가 2리가 되지 않는다. 또 만류보가 있는데, 부 동쪽 140리에 있으며 둘레가 2리가 조금 넘는다. 위 3보는 모두 대동후위둔군이 戍守한다. - 독사방여기요 산서6 대동부

[長安堡 府東南五十裏。府東百二十裏又有諸泉堡。俱周不及二裏。又漫流堡,在府東百四十裏,周二裏有奇。已上三堡俱大同後衛屯軍戍守。- 讀史方輿紀要 山西六 大同府 ]

 

1)의 명사에서 長安堡를 遼東이라고 하였다. 2)의 장안보는 산서 대동부의 堡로 되어있다. 따라서 산서 대동부가 바로 료동 인 것을 알 수 있다. 

 

3)료동 도지휘사사, 元이 遼陽등에 설치한 행중서성으로 료양로에서  다스렸다. 홍무4년 7월, 定遼都衛를 두었다. 6년 6월 료양부와 현을 두고, 8년 10월에 도위를 료동 도지휘사사로 고치고. 정료중위에서 다스리게 하였으며, 25衛와 2州를 다스린다. 10년, 府縣을 모두 폐했다. 동으로는 압록강, 서로는 산해관에, 남으로는 려순 해구, 북으로는 개원에 이른다. 해도에서 산동포정사까지 2천 150리이며, 남경과는 1400리, 경사와는 1700리 떨어져 있다. - 명사 권41 지리2 산동 료동 도위지휘사사

[ 遼東都指揮使司 元置遼陽等處行中書省,治遼陽路。洪武四年七月置定遼都衞。六年六月置遼陽府、縣。八年十月改都衞為遼東都指揮使司。治定遼中衞,領衞二十五,州二。十年,府縣俱罷。東至鴨綠江,西至山海關,南至旅順海口,北至開原。由海道至山東布政司,二千一百五十里。距南京一千四百里,京師一千七百里。- 明史 卷四十一 地理二 山東 遼東都指揮使司 ]

 

3)에 산동의 지리에 료동 도지휘사사가 포함되므로 적어도 산서와 산동의 일부는 료동지역이 된다. 

이런 지역에 달단이 쳐들어왔단다. [인용글 1)에서 달단이 침입한 시기는 성화 15년(1479)이다.]

달단은 북원으로 명에게 축출되어 막북에 있었다. 따라서 현재의 산서 산동과 하북의 북쪽이 막북이 될 수 없으며이 달단 또한 현 내몽골과 몽골에 있지 않았다. 이들은 현재의 카자흐스탄 서쪽과 우즈베키스탄의 서북쪽인 카라쿰/키질의 북쪽과 키르키즈 초원에 있던 자들이다. 이곳에  Aral sea : 咸海/遼海가 있으므로 그 동쪽의 遼東에 산서 산동 하북이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료동이란 현 료하의 동쪽이라는 말이 아니라 료하를 끼고 있는 지역들의 동쪽을 뜻하는 것이며 료하는 볼가강과 아무다리야를 아우르는 강으로 이 두 큰강의 동쪽이 곧 료동벌판이며 그 지역 안의 큰 산과 여러 하천을 기준으로 산서와 산동 하북 하남 섬서 등지를 나눈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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