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의 역사관은 어디까지나 서구에 의한 세세동점기 사관(史觀)의 연장선이며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한 역사 입니다. 현재의 역사에서 말하는 세계 최고의 정복 국가 였던 몽고(蒙古)!
과연 이들이 황인종 몽골리안 이었을까요? 서구가 세계를 지배했다는 역사왜곡의 연장선의 일환으로 몽고(蒙古)를 내세워 이를 각색하여 황인종으로 덧칠하여 먼 훗날 결론적으로 세계를 지배한 민족은 백인 이었다는 논리를 내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이를 왜곡한 역사가 현재 세계의 역사관 입니다. 몽고는 서구인 이었으며 황인종과 거리가 먼 민족 입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연행기사 문견잡기(聞見雜記) [잡기(雜記)]
몽고인은 청인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 아주 추운 때라도 단지 수레 위에 장막을 치고 길에서 자며 아침에는 눈을 털고 일어난다. 배가 고프면 다만 낙타의 고기를 먹을 뿐이고 또 개와 한그릇에 먹는다. 강한(强悍)하고 추악(醜惡)하기가 이와 같기 때문에 청인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천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꾸짖고 욕할 때, 그를 몽고 사람에게 비교하면 반드시 불끈 성을 내고 큰 욕이라고 하니, 몽고인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중략)
대비달자(大鼻韃子)는 곧 아라사[鄂羅斯]인데,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나라가 사막(沙漠) 바깥 지극히 먼 땅에 있다. 그들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健壯)하여 상모가 극히 흉한(凶悍) 영악(獰惡)하다. 눈은 푸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 그리고 모두 몇 사람을 합한 것같이 힘이 세다. 사람이 있어도 오줌을 누며 부녀자를 피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데 입으로 연기를 뿜지 않고 코로 내보낸다. 모두 코가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대비달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인들은 극히 두려워하여 방수(防守)하기를 극히 엄하게 한다. 출입할 때에는 갑군(甲軍)이 반드시 따라다니나 오히려 제재하지 못한다.
위의 기록 연행기사 문견잡기(聞見雜記)의 기록을 보면 몽고인인 청나라 사람과 다른 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나라 사람과 대조적으로 아주 다른 사항인 푸른눈과 붉은 수염(원문:眼碧髥紫)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몽고인은 백인이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위의 기록을 보면 "대비달자(大鼻韃子)는 곧 아라사[鄂羅斯]" 즉 오늘날의 러시아를 말하는 기록인데 이들 역시 푸른눈과 붉은 수염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은
몽고의 별종 즉 몽고에서 갈라져 나간 민족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역사적인 사실인 몽고=황인종 이라는 허구성을 말하는 기록 입니다. 즉 오늘날의 몽고인은 몽고인이 아니라는 기록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기록을 보면,
烏 孫 於 西 域 諸 戎 其 形 最 異 。今 之 胡 人 ,靑 眼 赤 髭 鬢 ,狀 類 彌 猴 者 ,本 其 種 也 。其 國 謂 王 曰 昆 彌 ,亦 曰 昆 莫 。
오손은 서역의 여러 융(戎 : 오랑캐) 중에서 그 형상이 가장 기이(奇異)하다. 지금의 호인(오랑캐 사람)이다. 청안(靑眼 : 푸른 눈동자)과 콧수염(髭)과 구 렛 나루(鬢)가 붉은 색이며, 형상(용모)이 원숭이(獼猴 : 미후) 종류와 같은데, 본시 그런 종족이다. 그 나라의 왕을 이르기를, “昆 彌(곤 미)”라 하는데, 또 “곤 막”이라 한다.-통전(通典)
계산기정(薊山紀程) 제3권 관사에 머물다[留館] ○ 계해년(1803, 순조 3) 12월[25일-29일] 27일(무자)
몽고관(蒙古館)
몽고인은 본래 견융(犬戎)이었었는데, 부락(部落)이 매우 강성(强盛)하므로 황제가 그들과 혼인을 맺게 되었고, 그 번왕(番王)으로서 황성(皇城)에 거주하는 자는 관사가 한 채뿐이 아니었다. 그중 한 채는 옥하관과 거리가 멀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과는 언어가 더욱 통하지 않았다.
그들이 입은 갖옷은 지저분하고 그들 얼굴에는 사나운 기가 흘렀으며, 그들은 광대뼈가 넓은 것이 청 나라 사람과는 달랐다. 그리고 그들은 추위도 겁내지 않고 옷을 벗어서 이를 잡는데 잡으면 곧 씹어먹는다고 한다.
성호사설 제11권 인사문(人事門) 북적(北狄)
중고시대에 북적(北狄)에는 흉노(凶奴)와 동호(東胡) 두 종족이 있었다. 흉노의 서쪽에는 월지(月支) 등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탕창(宕昌)ㆍ당항(黨項)은 곧 삼묘(三苗)의 후예(後裔)이며, 동호의 동쪽은 곧 말갈(靺鞨)ㆍ실위(室韋) 등 여러 나라였다. 흉노의 후예가 회흘(回紇)ㆍ혁련(赫連)이 되고 그 별부(別部)는 돌궐(突厥)과 철륵(鐵勒)이 되었다. 돌궐의 별부(別部)는 또 사타(沙陀)가 되고, 철륵의 별부는 설연타(薛延陀)가 되었다. 동호의 후예가 오환(烏桓)과 거란(契丹)이 되고, 그 지속(支屬)이 선비(鮮卑)가 되었는데, 선비의 종족이 매우 번성하여, 토곡혼(吐谷渾)은 요동 선비(遼東鮮卑), 우문(宇文)은 요동 새외 선비(遼東塞外鮮卑), 독발(禿髮)은 서선비(西鮮卑), 걸복(乞伏 서진(西秦) 선열왕(宣烈王))은 농서 선비(隴西鮮卑), 탁발(拓跋)은 별부 선비가 되었다. 토번(吐蕃)은 토곡혼의 서남쪽에 있으니, 이는 흉노의 별부인 듯하다. 이상은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보인다. 《삼재도회(三才圖會)》에는 “북호(北胡)의 종락(種落 같은 종족이 모여 사는 부락)이 잡다하여, 하(夏) 나라 때에는 훈육(獯鬻), 주(周) 나라 때에는 험윤(玁狁), 진(秦) 나라와 한(漢) 나라 때에는 흉노, 당(唐) 나라 때에는 돌궐(突厥), 송(宋) 나라 때에는 거란이라 하였다. 한 나라 때부터 흉노가 강성하였고, 흉노가 미약해지자 오환이 일어났는데, 한말(漢末)에는 선비가 오환을 멸하였다. 후위(後魏) 때에는 유유(蠕蠕)가 강성하였고, 유유가 멸망하자 돌궐이 일어났는데, 이정(李靖)이 돌궐을 멸하였다. 오대(五代)와 송 나라 때에는 거란이 다시 강성해졌고, 그 작은 별부를 몽고(蒙古)라 하였는데, 뒤에 몽고가 강성하여 중국에 들어와서 임금이 되기까지 하였다.” 하였는데, 그 설이 《통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흉노 이외에 다시 동호ㆍ거란ㆍ오환 등이 근동(近東)에 있으니, 이는 분명히 동호의 후예인데, 어찌 거란을 흉노라고 지적해서야 되겠는가?
원(元) 나라 이후로는 몽고가 가장 강성하여 북막(北漠)을 겸병(兼倂)하였으므로 사적(沙磧 사막)에서 요동 지경까지를 모두 몽고라고 하였다.
진(晉) 나라 때의 오호(五胡) 가운데에도 저(氐 전연(前燕))는 바로 서융(西戎)이고, 갈(羯 후조(後趙))은 바로 흉노의 별부이다.
한국고전 번역원의 주석에 의하면 "오손국(烏孫國)은 한(漢) 나라 서역국(西域國)의 이름인데, 그 종족은 돌궐족(突厥族)이라고도 함."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의 오손족은 흉노족의 후예입니다. 역사상의 오손족은 위의 문견잡기의 기록인 몽고인 관련 기록처럼 푸른눈과 붉은 수염의 형상을 한 민족 입니다. 즉 흉노족과 흉노족의 후예인 오손족은 백인(白人) 민족 이라는 기록 입니다. 계산기정의 기록에 의하면 몽고족은 본래 견융(犬戎)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혜상(林惠祥)의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하(下)권에 의하면,"견융(犬戎),곤이(昆夷),북융(北戎)등은 역사가에 의해 흉노(匈奴)임이 증명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임하필기(林下筆記)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아라사국(俄羅斯國)의 기록을 보면 "아라사국(俄羅斯國 러시아)은 북쪽 맨 끝에 위치해 있는데, 한(漢)나라 때의 견곤(堅昆) 부족과 정령(丁令) 부족이었고, 당(唐)나라 때의 힐알사(黠戛斯) 부족 또는 골리간(骨利幹) 부족이었으며, 원(元)나라 때의 아라사(阿羅思) 및 길리길사(吉利吉斯) 등의 부족이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러시아 민족은 견곤(堅昆) 부족과 정령(丁令) 부족이라 불리기도 했고 철륵(鐵勒)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성호사설에서 인용한 통전(通典)의 기록에 의하면 철륵,정령등의 부족은 흉노족의 후예 입니다. 그러므로 러시아 민족은 흉노족의 후예가 되는 것 입니다. 이러한 러시아 민족을 역사에서는 몽고에서 갈라져 나간 민족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산기정에서는 몽고인과 청나라 사람은 외형적으로 아주 다르다고 기록하고 있고,연행기사 문견잡기(聞見雜記)의 기록에서의 몽고인은 구체적으로 오늘날 서구 백인의 특징인 푸른눈과 붉은 수염의 외모의 형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누대에 걸친 혼혈의 결과치 만으로 치부할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통전(通典)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부터 수 천년전인 한(漢) 나라 시대의 서역국인 오손국(烏孫國)의 사람들은 푸른눈과 붉은 수염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오손족은 흉노족에서 갈라져 나간 민족 입니다. 그런데 근대의 역사에서 흉노족의 후예이며 서구 백인의 특징을 하고 있는 러시아 민족이 몽고에서 갈라져 나간 민족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행기사 문견잡기(聞見雜記)의 기록에서의 몽고인이 오늘날 서구 백인의 특징인 푸른눈과 붉은 수염의 외모의 형상을 지닌것을 지극히 당연하며 오늘날의 몽고인이 황인종 이라는 사실은 왜곡으로 가득찬 허구의 기록임을 알수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옛 기록에서 흉노족의 실체는 백인(白人) 민족 이었으며 또한 러시아 민족의 조상은 흉노족이며,
이러한 러시아 민족이 몽고에서 갈라져 나간 민족 이므로 몽고족은 당연히 흉노족의 후예이며 백인 민족 입니다. 역사에서는 위의 몽고족을 일컬어 달단(韃靼)이라 부르기도 하며 달자(韃子) 혹은 달달인(達達人)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이 달단을 서구에서는 타타르라 부릅니다. 한국고전 번역원의 주석을 보면,"달자(韃子)는 몽고족(蒙古族)의 한 갈래이다. 원(元) 나라가 망한 뒤 몽고족의 일부가 북쪽으로 옮아가 흥안령(興安嶺) 서쪽과 남쪽 지방에서 북원국(北元國)을 세워 달단(韃靼)이라 불린 데에서 나온 말인데, 후에 몽고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록으로 살펴보면 역사적 사실은 한국고전 번역원의 주석과 다릅니다. 한국 고전번역원의 주석에서는 "북원국(北元國)을 세워 달단(韃靼)이라 불린 데에서 나온 말인데, 후에 몽고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즉 명(明)나라때 달단(韃靼)이라 불렸다고 말하지만 고려의 학자인 동국이상국전집 제34권 교서(敎書)ㆍ마제(麻制)ㆍ관고(官誥) 상장군 겸호부상서(上將軍兼戶部尙書)
박문비(朴文備)에 대한 관고 의 기록을 보면
운운. 직위는 상장(上將)에 올랐고, 위엄은 금군(禁軍)을 거느렸다. 나의 호위가 되어 경비를 엄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울타리가 되어 곧 외방의 침략을 막았으니, 만일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모관 모는, 용이 서린 듯한 호걸의 담략이요, 매가 노려 보는 듯한 날랜 기상인데, 벼슬길에 오르고부터 일찍이 중궁의 시위를 떠나지 않았다. 진작 경륜의 뜻을 품었으니, 어찌 무용(武勇)의 신하가 되리라 하였으랴. 나가서 탐라(耽羅)의 옛나라를 지키게 하였더니 황패(黃覇)와 같은 가장 좋은 치적을 나타내지 않았던가. 그대가 당시에 끼친 혜택이 있기에 다시 고을의 역도들을 효유하게 한 것인데, 그 행차가 다다르자 역적들의 소음이 끊어져 버렸으며, 장군의 직무에 보임되어서는 일대를 뒤덮는 공을 세우려 하였다. 군사를 독려하여 변방을 지키매 완악한 오랑캐가 감히 국경을 엿보지 못하였고, 원수를 따라 오랑캐를 치매 거센 적이 더불어 항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3년에 걸쳐 1백여 번이나 고전을 치렀는데, 이윽고 대장에 올리는 명을 받았고, 여러 번 출정하는 병권을 잡았다. 혹은 달단(韃靼)을 회유하여 빨리 그 소굴로 돌아가게 하였고, 혹은 동여진(東女眞)과 화친하여 가르치는 바에 복종하게 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북원국 그 이전인 고려때에도 몽고를 일컬어 달단이라 불렀음을 알수 있는 기록 입니다. 명(明)나라때 달단(韃靼)이라 불렸다는 사실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연행기사 문견잡기(聞見雜記) 하 의 기록을 보면,
"몽고(蒙古)는 곧 원(元) 나라의 유종(遺種)으로 예전의 달단(韃靼 타타르)이다. 동쪽은 흑룡강(黑龍江)으로부터 서쪽은 바다에 이르고 북은 장성(長城) 밖을 따라 영고탑(寧古塔) 근처에 이르는 사이가 모두 그들의 소굴이다."
문종실록 즉위년 경오(1450, 경태 1) 8월 29일(경자)
안숭선(安崇善)은 말하기를,
“달달인(達達人) 중에서도 어찌 호걸(豪傑)이 없겠습니까? 원(元)나라 세조(世祖)는 천하를 통일했으므로 세상에서 모두 성인(聖人)으로 일컫게 되고, 또 그 신하에 탈탈태사(脫脫太師) 같은이가 있었습니다."
위의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달단이라는 명칭은 몽고족이라는 명칭보다도 오래된 민족명이며,몽고라 불리기 이전에 달단으로 불렸다는 알수 있는 기록 이며,위의 한국 고전 번역원의 주석처럼
"북원국(北元國)을 세워 달단(韃靼)이라 불린 데에서 나온 말인데, 후에 몽고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는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인 겁니다. 연행기사 문견잡기(聞見雜記) 하 의 기록을 보면 몽고=원(元)=달단(韃靼)이라는 등식이 성립 됩니다.
또한 몽고,원(元)은 예전의 달단(韃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문종실록에서는 원세조인 쿠빌라이와 그 신하인 탈탈태사(脫脫太師)를 달달인(達達人=달단(韃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옛날의 기록에서는 북원국 그 이전에 몽고는
달단이라 불렸습니다. 한국 고전 번역원의 주석에서는 달자(韃子)는 몽고족(蒙古族)의 한 갈래이다 라고 주장하지만 옛날의 기록을 보면 몽고족을 달단(韃靼)이며 달자(韃子)이며 달달인(達達人)으로 불렸으므로 달자가 몽고족의 한 갈래라는
주장은 그 이치에도 맞지 않는 억지 주장에 불과 합니다. 이러한 달단(韃靼)이며 달자(韃子)이며 달달인(達達人)이었던 몽고족이 조선의 역사에는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몽고족의 근원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15권 지리고(地理考) 15 산수(山水) 3 경계 바깥의 산수
○ 흑수(黑水)
흑룡강(黑龍江)은 흑룡강성(黑龍江城)의 동쪽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고, 완수(完水)라고도 한다. 또 실건하(室建河)라고도 하고,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객이객(喀爾喀) 북쪽 경계의 긍특산(肯特山)에서 나오는데, 그 지방 토착인들은 오란하(敖嬾河)라고 한다. 여러 개의 작은 물을 모아서 동북쪽으로 흘러 이포초성(泥布楚城)의 남쪽을 지나 내지(內地)로 들어와 흘러 아극살성(雅克薩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흑룡강성을 감돈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과 합류한다. 《북사(北史)》 오락후국열전(烏洛侯國列傳)을 보면, “오락후국의 서북쪽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難水)와 합류한다.” 하였고, 《구당서》 실위열전(室韋列傳)을 보면, “대산(大山)의 북쪽에 대실위부락(大室韋部落)이 있으며, 그 부락의 곁에는 실건하가 있다. 이 물의 근원은 돌궐(突厥)의 동북쪽 경계인 구륜박(俱倫泊)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나하(那河), 홀한하(忽汗河)와 합류하고,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의 북쪽과 북흑수말갈(北黑水靺鞨)의 남쪽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금사》 지리지를 보면, “조주(肇州) 시흥현(始興縣)에 흑룡강이 있다.” 하였고, 《원사》 태조기(太祖紀)를 보면, “1년에 황제가 알난하의 근원지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흑룡강은 개원성(開原城)에서 북쪽으로 25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북산(北山)에서 나오는데, 흑수말갈이 예전에 이곳에 거주하였다.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흑수라는 명칭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시작되었으며, 흑룡강이란 이름은 《금사》에서 나온다. 그 상원(上源)은 《북사》에 나오는 완수이며, 《구당서》에 나오는 실건하이다. 지금의 오란하가 정원(正源)인데, 오란하는 바로 《원사》에 나오는 알난하(斡難河)가 음이 변한 것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록을 보면, 원나라 태조인 징기스칸이 알난하(斡難河)의 근원지에서 황제위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알난하(斡難河)가 해동역사를 저술한 그 당대에는 오란하(敖嬾河)이었으며,그 이전 시대에는
실건하(室建河),완수(完水),흑룡강(黑龍江)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몽고족의 발원지는 흑룡강 일대이었음을 알수 있는 기록 입니다. 그런데 위의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록을 상세히 살펴보면 "아극살성(雅克薩城)"
이라는 명칭이 나옵니다. 이와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보면,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외집권58 필기류,난실담총(筆記類,蘭室譚叢)
淸國徵我兵。助攻車漢賊。車漢者羅禪也。按羅禪卽鄂羅斯地。在極北。秦漢之間。服屬㐫奴。在漢爲堅昆,丁零。在唐爲點戛斯.......骨利幹等國。元時阿羅思及吉利吉思.......淸順治初。其衆曰羅刹。竊據黑龍江雅克薩之地。築城居之。......."
(청나라에서 조선병력을 징발해서 차한공격을 돕게 했다. 차한이라는 것은 라선이다.살펴보건데,라선은 즉 악라사이다.진나라 한나라 연간에 (차한은)흉노에 복속되었고,한나라때 견곤,정령이다. 당나라때 힐알사 이다.
골리간등의 나라가 있다. 원나라때 아라사,길리길사였다. 청나라 순치초에 그 무리들을 나찰이라 일컬었다. 흑룡강 아극살의 땅에서 성곽을 지어 노략질하며 살았다.)
처음에 언급한 기록에서처럼 아라사[鄂羅斯]라 불린 러시아 민족은 몽고족에서 갈라져나간 민족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록을 보면,몽고족의 발원지는 흑룡강 일대이고,러시아 민족의
주 거주 지역 또한 "아극살성(雅克薩城)"이 있는 흑룡강 일대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아라사[鄂羅斯]라 불린 러시아 민족이 몽고족에서 갈라져나간 민족이라고 기록은 진실한 사실의 기록임을 알수 있습니다.
현재의 역사에서의 오늘날의 흑룡강은 옛날의 흑룡강이 아닙니다. 이와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보면,
심전고(心田稿)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거등만록(車燈漫錄)》
"효람(曉嵐) 기윤(紀昀)이 일찍이 황하의 물 근원을 가서 찾아보고 하원기(河源記)를 지어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곤륜(崑崙)은 곧 지금의 화전(和闐 신강성에 있는 땅 이름)의 남쪽 산인데 황하의 물이 여기서 나온다. 원 세조(元世祖)가 도십(都什)을 보내어 찾았으나 겨우 성수하(星宿河 운남성에 있음)에 이르러 그치었다. 그런데, 지금은 곧바로 발원처(發源處)에 이르러 그 땅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 장건(張騫)이 이른 데는 서역 36국인데, 무릇 그 범위가 2만 리로서 지금은 전부 중국의 군현에 들어 신강(新彊)이라 부른다. 면적의 크기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다. 서쪽은 동궐(突厥)을 지나가고 서남쪽은 토번(吐蕃)에서도 2, 3천 리를 더 나아간다. 신독(身毒)은 곧 인도(印度)이며, 현도(懸度)는 피산(皮山)에 있어 판도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감숙(甘肅)은 오래 전부터 내지(內地)이고, 약수(弱水), 흑수(黑水)는 함께 감숙 내지에 있다."
위의 기록을 보면 흑수(黑水)가 감숙성 지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말하는 흑수(黑水)는 흑룡강(黑龍江)을 말합니다. 위의 해동역사(海東繹史)가 인용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기록에 의하면 흑룡강(黑龍江)의 옛이름은
흑수(黑水)라 기록하고 있으며,청(淸)나라의 학자인 효람(曉嵐) 기윤(紀昀)은 흑수(黑水=흑룡강(黑龍江)가 감숙성 지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백과에 의하면 현재의 역사에서 흑룡강은 "최상류부의 오논강은 몽골고원 북부에서
발원하여 야블로노이 산맥에서 발원하는 실카강과 합류하며 이어서 우안에서 아르군강을 합쳐 블라고베셴스크 부근에서 좌완으로 부터 재야강이 합류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역사에서의 흑룡강은 감숙성 지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역사에서 감숙성에는 흑룡강이 없습니다. 또한 현재의 역사에서 흑룡강이 있는 지역은 감숙성 지역이 아닌 전혀 엉뚱한 지역인 극동지역에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심각한 역사왜곡의 결과물 입니다. 옛날의 역사에서는 감숙성 지역에
흑룡강이 있었으며 러시아 민족이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역사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살았던 감숙성 흑룡강 일대에 아주 특이한 자연 환경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 권지12 잡저(雜著) 자집고이의(子集考異議)
" 唐太宗用兵。至骨利幹。置堅昆都督府。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
(당 태종이 군사를 부려 골리간에 이르러 견곤에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
다산시문집 제11권 논(論) 온성론(穩城論)
《당서(唐書)》 회흘전(回紇傳)에 이런 말이 있다.
"몽고(蒙古)의 사막(沙漠) 북쪽에 골리간(骨利幹)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해가 지고 나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해서 고기가 익을 때쯤이면 해가 뜬다." 여기에서는 시기를 말하지 않았으나 이때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의 전후(前後)였을 것이다. 북쪽 끝의 지역에는 여름날이 이렇게 긴데, 온성의 여름날이 탐라보다 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고의 북극(北極)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時期)는 춘분 전과 추분 후로 이때에는 순전히 낮만 계속된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6권 경사강의(經史講義) 53 ○ 강목(綱目) 7 [당 태종(唐太宗)]
"양고기가 겨우 익자마자 하늘이 벌써 밝아졌다고 한 것은, 북극(北極)이 지평으로부터의 고도(高度)가 60도(度) 이상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3개월이 낮이고 3개월이 밤이 되는 나라가 나오며, 다시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반년이 낮이 되고 반년이 밤이 되는 나라가 나온다. 아침에 밭을 갈아 저녁에 수확한다는 말이 《주비산경(周髀算經)》에 나오고, 낮과 밤이 반대된다는 말이 《역서(曆書)》에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이치를 확실히 증거할 수 있는데, 선유(先儒)들이 여전히 그것을 믿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골리간(骨利幹)의 사신이 당 나라에는 밤이 40각(刻)이라는 말을 듣고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하며 비웃었으니, 이것은 이른바 피차간에 처지가 달라 상대방을 서로 비웃은 것이리라."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던 지역을 알수 있는 단서가 위의 기록에 있는데 아주 핵심적인 단서 입니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의 기록인 "흑룡강의 위에 근거해 살고 있다.(窃據黑龍江上)"의 기록과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인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의 기록 입니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의 저자는 성해응(成海應)으로 조선의 정조때의 인물이고,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저자는 이형상(李衡祥)으로 조선의 숙종때의 인물 입니다. 그 당대의 상황과 과거의 역사사료를 근거로 기록을 남긴 것인데,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흑룡강의 상류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기록했고,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사는 곳은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의 기록처럼 "백야(白夜)"현상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즉,역사상의 흑룡강 지역은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곳 입니다. 네이버 지식을 보면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스웨덴 지역등등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당 태종이 골리간(骨利幹)에 이르러 견곤도독부(堅昆都督府)를 설치했던 지역이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이며 흑룡강의 상류지역인 러시아 민족이 사는 지역이었던 겁니다. 다시말해서 러시아 민족이 과거에 살았던 지역의 전제조건은 감숙성 흑룡강 상류지역이며,그 지역은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
입니다. 상식적으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은 북극권 입니다. 백야현상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문헌은 "신당서(新唐書)"입니다.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처럼 당나라때 당 태종이 골리간 지역에 이르러 견곤도독부를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고문헌에서 이 지역의 백야현상에 대해 비유하여 시문(詩文)등에서 주로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을 표현하는 기록이 참으로 많습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 "해가 넘어가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하여 다 익을 때쯤이면 해가 다시 뜬다."는 기록을 생각해 보면, 고기를 삶아 익힐때 까지 불과 몇 시간 정도에 불과 한데 벌써 해가 뜬다는 기록으로 그 만큼 밤이 짧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처럼 골리간 지역은 그 밤도 어둡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다산시문집의 기록에서도 골리간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가 되면 순전히 낮만 계속되는 시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다산시문집의 기록에서는 북쪽의 골리간(骨利幹)지역이 완연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조대왕의 저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도 백야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홍재전서에서도 백야현상 관련 기록인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일부 인용했고,당나라에 온 골리간(骨利幹)의 사신이 "당 나라에는 밤이 40각(刻)이라는 말을 듣고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하며 비웃었으니,"라는 기록은 골리간 지역에 백야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비웃었던 겁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문헌적으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통해 흑룡강 골리간(骨利幹)지역의 백야현상을 알게 되었겠지만, 구체적으로 알수 있었던 계기는 조선과 청(淸)에 의한 "나선정벌"입니다. "성호사설"에서 나선정벌에 대한 기록인 "차한일기"를 기록했는데,그 기록의 일부를 보면,"효종(孝宗) 9년에 중국(中國 청(淸) 나라)이 우리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도와 차한(車漢)을 치라 하였으니, 차한은 나선(羅禪)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혜산첨사(惠山僉使) 신류(申瀏)를 북우후(北虞候)에 이배(移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가게 하였다.그리고 조선 군대의 이동경로를
보면, "무술년 봄 3월 1일에는 두만강(豆滿江)을.......19일에 영고탑(靈古塔)에 당도하였다......... 6월 5일에 배를 출발하여 10일에 흑룡강에 도착하였다.........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하였다." 이 기록의 달과 날짜를 기점으로 러시아에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6∼7월 이므로 고문헌의 기록들이 음력에 의한 기록일지라도 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그 지역의 백야현상을 생생히 목격했고,"신당서(新唐書)"라는 고문헌등과 목격한 기록등을
통해서 백야현상에 관련된 기록들을 남긴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현상이 있었던 곳이 감숙성 흑룡강 일대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감숙성 일대는 이런 자연현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오늘날의 감숙성은 옛날의 감숙성이
아니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실제적인 역사에서 진실한 역사의 감숙성은 오늘날의 코카사스 산맥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의 흑해 연안 지역이 감숙성 지역 이었던 것입니다. 코카사스 산맥 일대 그 지역이 옛날의 진정한 몽고=달단의 주 거주
지역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몽고 지역은 옛날의 몽고지역이 아닌 역사적으로 조작된 지역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에 있었던 몽고와 조선과의 관련된 다른 기록을 보면,
태조 1권 총서 69번째기사
“북계(北界)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세조 26권, 7년(1461 신사 / 명 천순(天順) 5년) 11월 9일(을사) 1번째기사
거듭 생각하건대, 의주·강계 등의 진(鎭)은 위로는 중국 조정과 접해 있고, 옆으로는 달자(達子)의 경계와 이웃해 있는데, 생각이 이에 이르면 어느덧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성종 12년 신축(1481, 성화 17) 10월 17일(무오) 남원군 양성지가 중국이 개주에 위를 설치한다는 것에 대해 상언하다
서민(庶民)은 남녀가 농사에 부지런하고 사대부(士大夫)는 문무(文武)가 내외의 일에 이바지하여 집집마다 봉군(封君)의 즐거움이 있고 대대로 사대(事大)의 체제가 있으며, 따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소중화(小中華)하고 부르면서 3천 9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황진(黃溍)은 벼슬살이할 만한 나라라고 하였고, 황엄(黃儼) 또한 천당(天堂)이라 하였으며, 원(元)나라의 세조(世祖)는 우리로 하여금 구속(舊俗)을 그대로 따르게 하였고, 명(明)나라의 고황제(高皇帝)는 우리 스스로의 성교(聲敎)를 허가하였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성교(聲敎)를 가지게 한 것은 언어가 중국과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습속도 역시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元)나라 말기에 홍군(紅軍) 20만 명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왔을 때 우리가 대병으로써 쳐부수고 군대의 명성을 크게 떨친 사실이 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이며, 또 명나라가 금릉(金陵)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우리 나라가 북원(北元)과 국경을 접한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입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초류(草類)
○ 조선의 인삼은, 조선의 북쪽 달단(韃靼)의 남쪽 경계 지점에 큰 산이 있어서 이름을 백두산(白頭山)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인삼이 최상품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61권 본조(本朝)의 비어고(備禦考) 1 왜적(倭賊)을 막은 데 대한 시말(始末) 1
길주는 올량합 및 달단(韃靼)과의 경계 지역으로, 왕성에서의 거리가 30일 정도 가야 하는 곳이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태조실록에서는 태조때 조선의 북방지역이 달단(韃靼)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세조실록에서는 의주·강계 등의 진(鎭)이 옆으로 달자(達子)의 경계와 이웃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성종실록에서는 우리 나라가 북원(北元)과 국경을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조선의 북쪽 달단(韃靼)의 남쪽 경계 지점에 큰 산이 있어서 이름을 백두산(白頭山)이라 기록하고 있고,조선의 길주지역이 달단(韃靼)과의 경계 지역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역사가 얼마나 조작,왜곡되었으며,또한 한반도 조선의 그 허구성을 깨닫게 되는 기록 입니다. 위에서 고증한 사실을 토대로 보면 몽고 민족의 주 거주지역은 감숙성 흑룡강 일대로 오늘날의 카프카스 산맥과 흑해 연안 일대 입니다. 그 일대는 러시아 민족이 몽고 민족과 더불어 살았으며 그 지역에서는 백야현상 이라는 특이한 자연 환경을 가진 지역 입니다. 이러한 지역에서 과거 몽고 민족은 달단,달자,으로 불리다가 징기스칸때 몽고라 칭하다가 원(元)으로 변천되고 북원(北元)때는 다시 그들의 원래 이름인 달단,달자가 되었습니다. 위의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진정한 역사에서의 조선의 북쪽 지역은 오늘날의 카프카스 산맥 일대 였다는 기록인 것입니다.
이러한 몽고족과 조선은 지극히 가까운 지역에 위치 하였다는 기록은 한반도 조선의 그 허구성을 알게 되는 기록인 것입니다. 오늘날에 배우는 역사에서 조선의 북쪽은 달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역사 입니다. 그러나 옛날의 기록에서는
조선의 북쪽 경계가 달단=북원과 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서세동점기 사관의 결과물이자 역사왜곡의 그 잔재로서 그 엄청난 모순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황단한 모순이 드러나는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조선과 달단과의 지리적인 상황에 맞춰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보면,
동사강목 제15하 신해년 공민왕 20년
9월 안우경ㆍ이순 등을 보내어 북원(北元)의 오로산성(五老山城 올랄산성(兀剌山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원(元)의 추밀부사(樞密府使) 합랄불화(哈剌不花)가 오로산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안우경을 서경 도만호(西京都萬戶), 이순을 안주 상만호(安州上萬戶)로 삼아 가서 치게 해서 이기고 합랄불화를 사로잡았다. 당시 응창(應昌 원 순제(元順帝)가 머물러 있다 죽은 곳)이 이미 깨뜨려졌기 때문에 원의 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里達臘 순제의 태자)이 도망하여 사막(沙漠)의 북쪽에서 나라를 세웠으니 이것이 북원(北元)이다. 잔원(殘元)의 남은 족속들이 요심(遼瀋) 일대의 곳곳에 몰래 웅거하고 있으면서 사자를 보내어 통신(通信)하기도 하고 혹은 오가며 고려(高麗)의 동북 변방 지역을 침략한 사실은 상세히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제1편 마자인정기(馬訾軔征紀) ○ 을묘년(1855, 철종 6) 11월[1일-16일] 8일(정묘)
《개국방략(開國方略)》을 상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천총(天聰) 9년(1635, 인조 13) 9월 계축에 패륵(貝勒) 다이곤(多爾袞) 등이 차하르[察哈爾] 부락 백성들에게 항복을 받고 역대의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노획했다.
옥새를 원조(元朝)의 궁중에 감추어 두었으니, 순제(順帝) 때 와서 도성을 버리고 옥새만 가지고 사막(沙漠) 지방에 들어갔다가 뒤에 응창부(應昌府)에서 죽고 옥새는 잃어버렸다.
동사강목 제10하 신사년 고종 8년
소(小)와 대(大)가 적대(敵對)가 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때 몽고는 막북(漠北 고비 사막(沙漠)의 북쪽 땅, 외몽고(外蒙古))에서 일어나 여러 나라를 멸하고 완안(完顔 금나라의 전신인 완안부(完顔部)를 말함)을 강압하여 문득 중국의 반을 차지하자 동진(東眞)도 항복하여 요심(遼瀋 요양(遼陽)ㆍ심양(瀋陽)) 일대가 또한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원나라가 패망하여 도망간 지역이 사막의 북쪽(漠北)지역 임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동사강목의 기록을 보면, 이 사막의 북쪽지역은 원래 몽고의 발원지역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사강목의 기록에 대해 한국 고전번역원에서는 막북(漠北)지역을 고비사막=내몽고 지역으로 주석을 달았지만 위에서 고증한 사실을 토대로 보면 잘못된 주석임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고증한 사실과 아래에서 언급할 "성호사설"의 기록을 보면 잘못된 주석임을 알수 있을 겁니다. 위에서 몽고=달단의 지역은 코카사스 산맥과 흑해연안 일대라 고증하였습니다. 코카사스 산맥 그 일대 그 주변에도 사막이 존재합니다. 그 주변에 있는 국가인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사막,이란의 사막,이라크의 사막,
시리아의 사막등이 있습니다. 몽고의 발원지 이자 최후의 피난처는 막북(漠北)지역으로서 사막지대는 오늘날의 중동지역에 있었던 국가들의 사막이었으며,그들의 피난처는 이들 나라들의 북쪽지역인 코카사스 산맥 일대 이었던 것입니다.
조선과 달단=몽고에 연계된 사막과의 관련 기록을 보면,
중종실록 59권 22년 의 기록을 보면,
"신이 또 보면 평안도(平安道)와 영안도(永安道) 지방은 사막(沙漠) 지대와 접하였기 때문에 인물(人物)이 쇠잔한데도 오히려 이엄(耳掩)을 만든 털과 몸을 따스하게 하는 모물(毛物)을 수없이 구색하여 끝없이 징렴(徵斂)하고 있습니다."
(臣又觀, 平安、永安, 地濱沙漠, 人物凋殘, 猶以掩耳之毛; 溫身之物, 求索如林; 徵斂無極.)
계산기정(薊山紀程) 제5권 부록(附錄) 도리(道里)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 요동 벌판을 들어선 뒤부터 오가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고 모래가 먼지처럼 가늘어, 바람이 살짝 불어도 곧 휘날려 흡사 연기나 안개 같고, 이따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산해관 안은 더욱 심하여, 수레바퀴가 닿는 곳에는 마치 잿가루를 키로 부친 듯 자욱하고, 사람의 의복ㆍ모자ㆍ얼굴에 붙으면 털어도 떨어지지 않으며, 입안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그래서 비록 열 벌 바른 상자일지라도 모두 스며든다. 또 시장 점포나 인가에 둔 기물과 수레 안의 자리는 닭꼬리비[鷄尾箒]로 끊임없이 털어 버려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한 치 남짓 쌓인다. 도성의 큰 거리는 매양 물을 뿌려 적셔 주고 있다.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해봉집(海峯集) 권지(券之)2 칠언사운(七言四韻) 안변가학루운(安邊駕鶴樓韻)
"鶴城形勝畫樓中。六月登臨暑氣空。欹枕任他西下日。披襟嬴得北來風。沙川截野水聲小。鐵嶺界天山勢雄。回首秦京自此近。莫言疆土接羌戎)
"鐵嶺界天山勢雄.回首秦京自此近.莫言疆土接羌戎"의 구절을 보면,
鐵 嶺 界 天 山 勢 雄 : 철 령과 이웃한(界)【또는 지경의】천산의 기세는 뛰어났다.
回 首 秦 京 自 此 近 : 머리를 돌려(바라)보니 진(秦)나라 왕도(서울)가 가깝다.
莫 言 疆 土 接 羌 戎 : 말없는(조용한, 고요한) 강토(강역)는 강융(羌戎)과 접하였다.
해봉집(海峯集) 권지(券之)2 칠언사운(七言四韻) 송김안변(送金安邊)
鐵嶺橫天限一隅。麗時爲界卽通衢。北連沙塞三千里。南擁函秦百二都。
또, 철 령은 좌우 하늘을 경계로 한 모퉁이다. 고려 때의 지경으로 곧 갈림길이다(衢). 북쪽으로 사막변경(요새) 3,000리가 이어져 있다. 남쪽으론 진의 함 관 102개 도회지를 끌어안고 있다.
위에서 고증한 사실을 토대로 보면,몽고=달단은 코카사스 산맥일대와 흑해연안 지역에 있었고,조선과 국경이 접해있었습니다. 또한 몽고=달단이 도망간 지역은 막북(漠北)지역이며 이 지역에 사막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위의 기록을 보면,중종실록에서는 조선의 서북방면인 평안도,영안도(함경도)가 사막지대에 접해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의 기록에서는 압록가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사막지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조선의 선조,광해군,
인조때의 문신(文臣)이자 학자인 홍명원(洪命元)의 해봉집(海峯集)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철령(鐵嶺)지역이 천산(天山)과 이웃해 있고,조선의 서북 변방지역이 진(秦)나라 왕도(秦京)과 가깝고,또한 강역이 서융족인 강융(羌戎)과 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의 북쪽으로 사막변경 3,000리가 이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기록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 기록을 지금의 한반도 관점에서 보면 그 어느 하나라도 만족하는 조건 자체가 전무 합니다. 한마디로 한반도 조선 자체의 그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기록 입니다. 다시말해서 조선의 진정한 서북방면의 경계이자 국경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지역 이었던 것입니다. 더욱더 포괄적이며 구체적으로 이러한 달단 지역의 주변에 어떤 나라들이 있었나? 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청장관전서 제61권 앙엽기 8(盎葉記八) 구국(狗國)
《심사(心史)》정사초(鄭思肖)가 지었다. 에도, 회회(回回) 회골(回鶻)) ㆍ협탑리(挾塔利) ㆍ구국(狗國) 등이 달단(韃靼) 서북을 공격하여 많은 이득을 보았다는 말이 있다.
(원문: 心史。鄭思肖撰。回回,挾㙮利,狗國等。出攻韃西北。甚得利。)
위의 기록을 보면 청장관전서에서 송(宋)나라 정사초(鄭思肖)의 저작인 "심사(心史)"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는데 기록을 보면 회회(回回) 회골(回鶻)) ㆍ협탑리(挾塔利) ㆍ구국(狗國) 등이 달단(韃靼) 서북을 공격하여 많은 이득을 보았다는
기록인데,여기서 회회(回回)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회회(回回)를 한국 고전번역원에서 회골(回鶻)로 주석을 달았는데 이는 잘못된 주석 입니다. 왜냐하면 원문에서는 분명히 회회(回回)라는 기록만 있지,
회골(回鶻)이라는 주석이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보면,
순암선생문집 제17권 잡저(雜著) 천학고(天學考)의 기록을 보면,
"살펴보건대, 회흘은 당(唐) 나라에서 말하던 회흘이 아니고 바로 후세에 회회(回回)라고 불리우던 것이다. 서역의 나라들은 별도로 천신(天神)을 높여서 섬겼는데, 지금의 이른바 회부(回部)가 이것으로서, 한 나라의 이름이 아니다. 지봉(芝峯)도 말하기를, ‘회흘은 당 나라 때의 회흘이 아니고 곧 옛날의 대식국(大食國)이다.’ 하였다."
위의 기록은 "동사강목"의 저자인 안정복의 기록인데,자신의 기록과 더불어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의 기록을 기록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회흘은 당(唐) 나라에서 말하던 회흘이 아니고 바로 후세에 회회(回回)라고 불리우던
것이다."라는 기록의 의미는 당(唐)나라 당시의 회흘(回紇) 또는 회골(回鶻)로 불려진 민족은 "성호사설"에서 인용한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의 기록처럼 회흘(回紇),돌궐족은 고대의 흉노족(匈奴族)의 후예를 의미하므로 후세의 회회(回回)가
될수 없다는 겁니다. 현재의 역사에서는 이 회흘(回紇) 또는 회골(回鶻)로 불린 민족의 후예를 위구르(uighur)민족이라 말하고 있고, 이슬람교가 대륙에서 회교(回敎)나 회회교(回回敎)로 불리게 된 것은 회흘(回紇), 회골(回鶻)이라 불리던 위구르가 믿던 종교로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지만,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학설이고,조선시대에 그 당대에 살았던 "동사강목"의 저자인 안정복과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은 현재의 학설과는 다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학설에서는 회흘(回紇) 또는 회골(回鶻)로 불린 위구르 민족이 믿던 종교였기 때문에 회교나 회회교로 불려졌다고 하지만,위의 기록처럼 안정복이 인용한 지봉유설에서 말하는 회흘(回紇)의 의미는 당나라때의 회흘(回紇)민족과
오늘날의 위구르 민족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옛날의 대식국(大食國)을 의미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대식국은 오늘날의 아라비아를 의미합니다. 역사상의 기록인 "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회회인에 관한 기록은
한결같이 옛날의 대식국을 의미하는 기록이지 회흘이라 불린 위구르인을 의미하는 기록이 아닙니다. 위구르인은 당나라때 회흘,회골로 불리었다가 몽고,원나라 시대때에는 "외오아(畏吾兒)"로 불렸습니다. 그러므로 조선,명,청의 시대의
회부(回部)의 의미는 "이슬람교 발생지의 나라(대식국)를 기점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그 주변국가들"을 의미하는 기록인 겁니다.물론 위구르인들도 11세기부터 이슬람화가 시작되어 15세기에 와서는 이슬람교를 거의 다가 믿게 되었지만,
역대의 사서에서 나오는 회회인 또는 회부의 의미는 옛날의 대식국(아라비아)과 그 주변국가들을 의미하는 기록이므로 회부,회회인의 정확한 개념면에서의 위구르인은 이 회부,회회인의 부속적인 부차적인 측면으로서는 인정되나,
"동사강목"의 저자인 안정복의 기록과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의 기록처럼 정확한 개념적인 차원에서의 회부,회회인으로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회부,회회인의 정확한 개념이 "이슬람교 발생지의 나라와 이슬람교를 믿는 그
주변국가들" 입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 달단(韃靼) 서북을 공격하여 많은 이득을 본 나라중에 회회(回回)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국(狗國)에 대한 한국 고전번역원의 주석을 보면,"원래는 서융(西戎)이 세운 고국(古國)의 하나를
가리키나, 다른 나라에 대한 욕으로도 쓰인다."라고 말합니다. 즉 달단(韃靼)의 주변에 있었던 나라는 회회(回回),구국(狗國)이라는 서융(西戎) 민족이 살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 다음의 기록을 보면,
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여국(女國)
옛날부터 서쪽에 여국(女國)이 있다고 한다. 《직방외기(職方外紀)》에 보면, 다만 “달단(韃靼)의 서쪽에 옛날의 여국이 있었다. 그 나라 풍속에는 봄철에 남자 한 사람만이 그곳에 오는 것을 허용하였고 아들을 낳으면 죽여 버렸는데 지금은 다른 나라에 병합하고 그 명칭만 남아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가장 근사하다.(중략) 그 여국은 북호(北胡)의 서쪽으로서 아세아(亞細亞)와 구라파(歐羅巴) 중앙에 끼여 있을 것이니, 생각건대 본래 여자가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풍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는데, 용성국(龍城國)이라고도 한다. 그 나라 임금 함달파(含達婆)가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버려야 한다.” 하니, 그 아내가 비단으로 싸서 궤 속에 넣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며 축원하기를, “어디든 인연 있는 곳에 닿아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어라.” 하였다. 진한(辰韓) 아진포에 이르렀을 때 한 노파가 열어보니, 어린애가 들어 있었다. 거두어 길렀더니, 장성하자 풍채가 뛰어나고 밝으며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姓氏)를 모르는데, 처음 왔을 때에 까치가 날아와 울었으니, 까치 작(鵲) 자에서 새조(鳥) 자를 떼어 버리고 석(昔) 자로 성을 삼는 것이 좋으며, 또 궤를 풀고 나왔으니, 벗고 풀었다는 뜻으로 탈해(脫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임금이 그의 훌륭함을 듣고 그를 사위로 삼았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5권 식화지(食貨志) 전화(錢貨)
○ 신라국(新羅國)의 돈에는 문양이 없다. 《전등록(傳燈錄)》에 이르기를,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 성을 쌓으면서 신라의 승(僧) 김대비(金大悲)에게 돈 2만 냥을 받고는, 육조대사(六祖大師)의 머리를 가지고 해동(海東)으로 가서 공양하게 하였다.” 하였다. 《상동》
위의 기록인 성호사설의 기록을 보면 직방외기(職方外紀)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기록에서는 여국(女國)은 달단(韃靼)의 서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호사설에는 직방외기의 기록을 토대로 여국은
"북호(北胡)의 서쪽으로서 아세아(亞細亞)와 구라파(歐羅巴) 중앙에 끼여 있을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사실은 직방외기의 기록을 인용한 성호사설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여국(女國)이)북호(北胡=달단=몽고)의 서쪽
이므로 아시아와 또 유럽 지역을 뜻하는 구라파(歐羅巴) 중앙에 끼여 있다고 말했을가요? 현재의 사학에서도 아시아와 유럽지역을 경계로 하는 지역은 코카사스 산맥 일대 입니다. 성호사설이 지어진 그 당대에만 해도 몽고=달단이 있었던
지역이 유럽 지역 접경에 있었다는 역사 인식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주장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다시말해서 성호사설의 기록을 통해서 알수 있는 사실은 몽고=달단이 유럽 지역 접경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고대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흑해 근처에 궁시(弓矢)와 기마(騎馬)에 뛰어난 용맹무쌍의 여인군단"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호사설에서 인용한 직방외기의 기록인 달단의 서쪽에 여국(女國)이 있었다.는 기록과 성호사설에서 (여국(女國)이)북호(北胡=달단=몽고)의 서쪽이므로 아시아와 또 유럽 지역을 뜻하는 구라파(歐羅巴) 중앙에 끼여 있다는 기록과 위에서 고증한 몽고=달단이 있었던 지역과 비교하여 보면 완전한 일치점이
드러 납니다. 즉 몽고=달단은 코카사스 산맥일대와 흑해연안 지역에 있었고 그 서쪽에 옛날의 여국이 있었다는 사실과 몽고=달단이 있었던 지역은 조선의 서북쪽의 국경이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여국에 대해 단순히 신화,전설로만 치부 할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5권 식화지(食貨志) 전화(錢貨)의 기록을 보면, (고대의) 여러 나라가 모두 금과 은으로 돈을 만드는데, 모두 문양이 없어서 구분할 수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나라들 가운데 여국(女國)이 존재하기 때문 입니다. 여기서의 여국은 여진족(女眞族)으로 인식할수 있으나 신라 시대의 여진족은 말갈족으로 불려졌으므로 여진족은 아닙니다. 또한 위의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록을 보면 신라국의 돈에 대한 기록을 말하고 있는데 위의 기록에서 분류되어 있는 기록을 보면 신라국과 동옥저를 대다수의 서역국가와 함께 분류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상당히 의문이 갑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의 기록을 보면,여기서는 삼국사(三國史)와 삼국유사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신라의 임금이었던 석탈해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임금인 함달파(含達婆)가 여국왕
(女國王)의 딸을 왕비로 삼아 낳은 아들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후한서 동옥저전에서는 동옥저에 여국(女國)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여국에 관한 기록이 단편적으로 나오는데,또 위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달단=몽고가 코카사스 산맥과 흑해연안에 있었으므로,직방외기에서는 달단의 서쪽에 여국이 있으므로,여국(女國)은 흑해 연안지역에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즉 역사에서 나오는 여국(女國)은 동옥저에 있었으며 그 지역은 서융(西戎)지역과 유럽지역이 교차하는 흑해연안 지역에 있었고 그 지역의 어딘가에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있었으며 또한 신라,동옥저 지역 또한 서융(西戎)지역에 있었으므로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록에서는 당연히 서역국가와 신라,동옥저,여국을 같이 분류하였던 것입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왜 신라를 서역국가와 함께 분류했는지 이해가 갈 것입니다. 이를 보면,
연경제전집(硏經薺全集) 속집(續集) 책(冊) 16 동국지리변(東國地理辯) 월성변(月城辯)
月城。今慶州也。一稱鷄林。陳壽史云。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辰王治月支國。月支國者。考之圖經。卽慶州也。豈月城之故號歟。然月支者。漢西方胡種也。
(월성은 지금의 경주이다. 일칭 계림이다.진수의 삼국지에서 말하기를 한(韓)은 3종류가 있는데 일왈 마한이요,이왈 진한이요,삼왈 변한이다. 진한(辰韓)이라는 것은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진왕이 월지국을 다스렸다. 월지국을
도경을 통해 상고하여 보면 즉 지금의 경주이다. (월지국이)월성의 고호(옛이름)가 되었다. 월지라는 것은 한나라때 서방의 오랑캐이다.)
연경제전집(硏經薺全集)의 기록을 보면,경주(慶州)의 옛 이름은 월성(月城)이며 월성(月城)의 옛이름은 월지(月支=月支國)이었으며 이 월지국은 옛날 한(漢)나라때 서방의 오랑캐 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 아닐수 없습니다. 한(漢)나라와 관련된 서역(西域)국가 중에 월지국은 역사에서 무척이나 많이 등장하는 국가 입니다. 현재의 역사에서는 한(漢)나라와 관련된 서역(西域)국가 중에 월지국과 조선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월지국은 별개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정조,순조,헌종 때의 학자인 성해응(成海應)은 조선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월지국은 옛날 한(漢)나라때 서방(西方)의 오랑캐이며,신라의 경주,월성과 관련된 명칭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학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 도경을 통해 상고하여(考之圖經) "조선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월지국은 옛날 한(漢)나라때 서방(西方)의 오랑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조선 후기 정조,순조,헌종 때의 학자인 성해응(成海應)이 그의 저작인 연경제전집(硏經薺全集)을 저작할 그 당대에만 해도 오늘날의 역사관과 판이하게 다른 역사관과 역사 지도(地圖)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기록 인 것입니다.
이제서야 왜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신라를 서역국가와 함께 분류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즉 신라,동옥저,여국은 서역에 존재하였던 국가였으며 여기에 신라는 더 나아가 현재의 지나 대륙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고 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보면,
포저집 제28권 교서(敎書) 8수(八首) 경상 감사 윤방(尹昉)에게 내린 교서
왕은 이르노라. 내가 생각건대, 관찰사의 직책은 한 방면(方面)을 제압하고 정령(政令)을 선포하는 것으로서 교화가 행해지느냐의 여부와 백성이 행복해지느냐의 여부가 여기에 매어 있으니, 그 임무가 어찌 중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방면 중에서도 서북(西北 관서(關西)와 관북(關北))과 양남(兩南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의 경우는 지역적으로 서융(西戎) 및 남만(南蠻)과 인접하고 있다.
포저집은 조선 인조·효종 때의 학자이며 우·좌의정을 역임한 포저 조익(趙翼)의 저작 입니다. 포저집에서는 조선 임금의 교서를 기록하고 있는데 임금의 교서를 살펴보면 조선의 서북과 관북이 서융(西戎)과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인 심사(心史)의 기록을 통해 달단의 주변에 회회(回回),구국(狗國)이라는 서융(西戎) 민족이 살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위의 기록에서 살펴 본 것을 통해 보면 달단은 조선과 국경이 접해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의 서북쪽 국경에는 푸른 눈에 붉은 수염을 가진 몽고=달단과 회회(回回),구국(狗國)이라는 서융(西戎) 민족이 존재 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신라는 서역국가인 월지국을 지배한 진한(辰韓)
이라는 것을 알수 있고,또 서역의 나라로 불린 여국(女國)은 동옥저에 있었던 나라이므로 동옥저 역시 서역에 속한 나라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저집에서 조선의 서북방면에 서융(西戎)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역사의 진실된 기록이며 진정한 역사의 기록인 것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사실은 역사에서 "신라가 서역국가인 월지국을 지배한 진한(辰韓)"이라는 사실을 왜 감추었나? 입니다. 현재의 역사에서 신라와 신라의 서역 지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역사 입니다.
또한 감춰진 사실은 여국(女國)은 서역에 있었으며 동옥저에 속한 나라 이므로 동옥저 또한 서역에 속한 나라인데 이 또한 왜 서역국과 관련이 없는 역사를 만들었나? 입니다. 이들 국가는 서역에 속한 나라였기 때문에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5권 식화지(食貨志) 전화(錢貨)의 기록에서 다른 서역국과 같이 묶어서 분류를 했던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김상일 박사의 "한철학"의 글을 보면,육당 최남선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최남선은 세계의 인류를 세 부류로 나누고 황인으로 부르는 몽고계,백인으로 부르는 코카사계 흑인으로 부르는 아프리카계가 그것이라 했다. 그 가운데 특히 황인종인 몽고계는 지금부터 1만년전 까지 심장지대인 파미르 고원을 중심한중앙 아시아를 중심하여
그 사방의 계곡 혹은 냇가에 각각 무리지어 살았다고 한다.(한철학 60쪽)"
"불함 문화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화일뿐 아니라 그 발달계통으로 볼 때에 가장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문화라는 것이다. 불함문화의 영역은 카스피해와 흑해부근인데 조선과 그 자매관계에 있는 일본 및 동부지나는 물론이요,
면악을 위시하여 구바,고보우,구보우,등의 산악이 있는 유구를 남극으로 하여 장백산의 만주,몽고,중앙 아시아의 서쪽으로 그 연결은 명백하게 찾을수 있어서 적어도 발칸산의 발칸반도까지는 그 분포 범위로 상정할수 있다.(한철학 61쪽)"
"최남선은 말하기를 이 불함문화는 아득한 옛날부터 일관되게 전승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문화 계통임이 분명하다면서 그 분포
지역이 아시아 북방지대를 차지하여 세계 최대의 문화권을 이룩했다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문화의 정통이요,
또 전형적인 것은 실로 조선 문화라는 것이다.(한철학 62쪽)"
육당 최남선은 대륙조선의 그 실체를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봅니다. 최남선의 저작인 "불함문화론"은 1928년도 나온 책인데 그 당대에만
해도 중동의 고대 문명의 유적 발굴과 연구가 본격화 되기 그 이전의 시기인데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서는 파미르 고원과 중동의 중앙
아시아 지역과 유럽지역의 발칸지역등이 조선의 문명 강역이며 그 문명의 주인은 조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남선은 대륙 조선을
알고 있는 사람이며 또한 지금까지 대륙조선에 대한 연구 결과치가 점점 더 최남선의 불함문화론과 일치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조선! 대륙조선! 수 많은 의문과 의혹이 듭니다. 더 많은 고증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진 역사를 다시 조명하면 할수록 참으로 놀라운 사실들이 전개됩니다. 한국의 역사 과연 그 진실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문리가 맞지 않는 글이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기시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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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태수 작성시간 10.07.30 글 잘읽었습니다. 몽고는 볼가강과 우랄강 유역이 그 발원지임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몽고인은 붉은 수염을 가진 러시아 사람입니다. 고대 서양인들이 생각하기를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발원지는 볼가강으로 보았는데, 볼가강에서 카스피해로 흘러들어가 다시 땅으로 솟아 흐르는 것이 이라크의 두 강으로 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은 마치 약수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류수로 흐르다가 나온 것이 약수이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