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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 추적해보기

Re:중국인의 살갗은 희다는데

작성자최두환|작성시간16.01.01|조회수310 목록 댓글 0

마테오 리치의 기록 <중국견문록>의 기간은 1583~1610년으로 27년간이니, 그 기간에는 만력의 란, 즉 임진왜란(1592~1598)이 포함된 시기이다.

그러므로 <중국견문록>에는 임진왜란 관계의 글이 매우 구체적으로, 또는 실감나는 내용이 실려 있어야 마땅하다. 과연 그러한 사실이 있을까?


광동성 은행이 있다는 곳에서 "1592년 음력 신년, 40일 금식기간"[p. 325]이 있다.

"중국에는 형부에는 안찰사라 불리우는 관직이 있다."[p. 333]

"1593년 11월 5일 프란체스코 데 페트리스 신부가 세상을 떠났다."[p. 338]


이 글을 보면 분명 임진왜란 기간 안에 들어 있는 글임에도 중국대륙 남부의 군사사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분명 있을 법도 한데 말이다.


"1595년 5월 병부시랑 석공진(石拱辰)이 퇴직할 해에 이르러 조정으로부터 작위나 호 같은 것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광서성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로서 각계의 존중을 받는 인물이었다. 바로 이때 일본이 군대를 일으켜 고려를 공격하였고, 고려는 중국의 속국으로 중국과 이웃해 있어 매년 공물을 바치는데, 조정에서는 8만의 정예병사를 파병하여 침략당한 고려를 돕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군대지휘관과 함께 주도면밀한 계획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에 석공진은 궁으로 불려 들어가 군새 요직을 맡게 되었다. 그의 지위는 총독보다 높았다."[p. 344]


이 석공진(石拱辰)은 석성(石星)이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공신(拱宸)으로 나온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및 <재조번방지>에서 명군의 참전 인원을 보면, 1592년에 료동지방군 1825명이었고, 1593년에는 5만1500명이었다. 그리고 1597년에는 정유재란이라고 하여 중국군이 지원온 것은 14만2700명이었다. 그리고 1594년과 1595년에는 왜적과 전투가 없었다. 그렇다면 중국군 8만 명의 지원은 부정확하며, 1597년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석성은 당시 병부상서였으며, 그는 동명(東明) 사람이다. 광서성과 광동성의 군사를 인솔하여 조선에 투입한 장수는 진린(陳璘)인데, 진린이란 말은 없고 병부상서 석공진이 유명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웠으니, 기록의 진실을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진린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를 타고 조선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에 신뢰성이 떨어진다. 아무리 읽어봐도 <중국견문록>은 천주교 선교활동을 담은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더구나 마테오 리치는 중국 동부 지역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임진왜란에 관한 구체적인, 더 실감나는 기록이 있어야 옳다. 왜냐하면 <명사> 조선전에서 보다시피 풍신수길을 붙잡기 위하여 현상금을 걸었을 때에 역시 중국 동부 해안 지역에다 내걸었기 때문에 이것을 보지 못했다거나, 몰랐다고 한다면 그 기록은 거짓이라고 단정짓지 않을 수 없다. 이 <중국견문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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