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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압둘 하미드 2세

작성자최두환|작성시간10.12.27|조회수1,166 목록 댓글 1

요약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제34대 술탄(재위 1876.8.31∼1909.4.27). 제국의 내정에 개입하는 서구 열강에 맞서 범이슬람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근대적 개혁을 목표로 했던 탄지마트(Tanzimat) 운동을 중지하고,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으며, 의회를 폐쇄한뒤 전제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전제 정치로 인해 서구 열강들의 침략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영토의 상실과 재정 파탄으로 제국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결국 1908년 군대를 동원한 청년 투르크당에 의해 폐위되었다.
원어명 Abd?lhamid II
국적 오스만투르크제국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터키 이스탄불
본문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술탄 압둘마지드(Abd?lmecid)가 시르케시 출신의 후궁에게서 얻은 왕자로 이스탄불에서 출생했다. 압둘 하미드 2세는 유년시절 목공예와 건축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스스로 가구나 궁중 건축물을 고안하기도 했다. 현재 이스탄불의 베일러베이 궁(Beylerbeyi Palace), 일디즈 궁(Yıldız Palace) 등이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오페라에 관심을 보였으며, 수 많은 고전 오페라 작품들을 터키어로 초역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오페라를 작곡해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형 무라드 5세가 1876년 8월 31일 정신과 질환으로 폐위된 뒤 오스만투르크제국의 헌법 제정을 약속하고 즉위하였다. 1876년 12월 23일 그는 마드하트 파샤가 기초한 헌법에 술탄의 거부권을 추가하여 오스만투르크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헌법을 공포하였다. 집권 초기에 압둘 하미드 2세는 증가하던 서구 열강의 개입을 막고자 애썼으며, 특히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에 적극 대응하였다. 1877년 러시아와의 전쟁 끝에 패전한 압둘 하미드 2세는 제국의 내정에 개입하는 서구 세력을 완전히 차단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1877년 의회를 해산했으며, 1878년 2월에는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켰다. 그 이후 압둘 하미드 2세는 비밀경찰, 전신, 검열 등을 통해 30여년 간 전제정치()를 하였다.

1881년 프랑스에 의해 튀니지가 점령당하고, 1882년 이집트영국세력권 하에 들어가자 압둘 하미드 2세는 독일에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은 그 대가로 바드다드 철도 부설권을 비롯한 각종 이권을 얻었다. 이에 더해 1894년에는 아르메니아, 크레타 등지에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통치에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를 진압하던 중 1897년 그리스-투르크 전쟁(Greco-Turkish War)이 발발하자 이를 기회로 서구 열강들이 개입하게 되었다.

압둘 하미드 2세는 제국의 분열을 막고, 서구의 제국주의에 대응하고자 범이슬람주의를 주창했다. 전세계 무슬림에 의해 조성된 기금을 통한 헤자즈 철도(Hejaz Railway) 건설은 그의 정책과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도 압둘 하미드 2세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으며, 특히 교육 부문에 관심을 기울였다. 18개의 전문학교 설립, 이스탄불 대학 설립, 사관학교의 증설 등이 그 성과였다. 또한 사법부의 개혁을 단행했으며, 철도와 전신 체계를 확대, 발전시켰다.
 
그러나 압둘 하미드 2세의 자주·개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칸 반도를 비롯한 영토 각지에서 전제정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이를 이용한 서구의 개입도 계속 증가했다. 특히 대()러시아 전쟁에 의한 루마니아의 독립 승인 등으로 인한 영토의 상실과, 증대하는 차관의 이자 지불을 위한 오스만 국제채무관리국 설치 등 재정 파탄이 제국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결국 압둘 하미드 2세는 1908년, 루메리의 군대를 중심으로 혁명에 성공한 통일·진보위원회(청년 투르크 당, Young Turks)의 압력으로 헌법의 부활을 승인했다. 그는 이듬해 4월 13일, 반혁명을 주도했으나 실패해 살로니카(Salonica)에 유폐되었고, 그의 술탄 위는 1909년 4월 27일 메흐메드 5세(Mehmed V: 재위 1909~1918)에게 이양되었다.
  
압둘 하미드 2세는 살로니카가 그리스에 복속된 1912년 이스탄불로 돌아왔으며, 여생을 베일러베이 궁(Beylerbeyi Palace)에서 자서전을 집필, 목공계 등으로 보냈으며, 1918년 2월 10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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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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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화무십일홍 | 작성시간 18.06.24 압둘 하미드(Abdul Hamid)는 "아버지 달은 태양의 어머니 머리에서" 로 해석되었기에, 이 사람의 정체성은 태어난 이스탄불(Istanbul)에서 증명되는 데 이스탄불은 "이 제 시작하는 머리족의 광명"이 됨에 고대 이란은 고조선의 제후가 된 것이 틀림 없는 것으로, 광명, 달은 고조선의 정체성인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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