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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38.11.10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파샤 사망

작성자최두환|작성시간10.12.27|조회수614 목록 댓글 0

1938.11.10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파샤 사망

 

 

1938년 11월10일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이스탄불에서 작고했다. 향년 57세. 파샤는 오스만투르크제국에서 군대 지휘관이나고급 관료를 존경의 뜻으로 불렀던 칭호다. 무스타파 케말은 제1차 세계대전 중 군사령관으로 다르다넬스 해협과 동부 국경의 방위를 맡은 바 있다. 그러나 터키 사람들은 케말을 파샤라고 부르기보다 아타튀르크라고 부른다. 아타튀르크는 ‘터키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런 관행이 되풀이되다 보니, 아타튀르크가 마치 케말의 성(姓)처럼 돼 버렸다. 성이 국부(國父)다!그럴 만도 하다. 터키 사람들에게 무스타파 케말은 중국 사람들에게 쑨원(孫文)과 마오쩌둥(毛澤東)을 합쳐놓은 것 같은 인물이다. 쑨원처럼, 케말은 오랜 세월 조국을 옥죄던 군주제를 뒤집어 엎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마오쩌둥처럼, 케말은 종이 호랑이가 된 조국을 짓밟던 외세를 몰아냈다. 무스타파 케말이 이끈 터키 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진 속에서 진행되었다. 독일ㆍ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패전국이 된 오스만투르크를 유럽 열강들은 분할하고자 했고, 전승국의 일원이 된 그리스는 연합국 열강의 비호아래 오스만제국의 심장부인 소아시아를 침공했다. 케말은 그리스와의 전쟁을 총지휘해 승리로 이끈 뒤, 1922년 10월 공화제를 선언했다.

케말이 이끄는 공화국 터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술탄칼리프제의 폐지였다. 술탄칼리프제란 세속 권력의 일인자인 술탄이 종교 권력의 수장인 칼리프를 겸하는 정교일치제도다. 터키는 혁명 직후 칼리프제와 술탄제를 차례로 폐지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정교분리 원칙, 곧 세속주의 원칙을 확립했다. 세속주의에 대한 케말의 신념은 확고했고, 그 덕분에 터키는 이슬람국가로서는 드물게 정치가 종교의 입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다.

/한국일보

 

 

 

케말 파샤

그의 본명은 ‘무스타파.’ 10대에 케말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어 ‘무스타파 케말’이 되었고, 30대 중반에는 ‘케말 파샤’로 불렸다. 그리고 말년에는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얻어 ‘케말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었다. 그처럼 이름이 바뀔 때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변방에 살던 서민에서 패기만만한 혁명가로, 제국의 수호자로, 그리고 새로운 나라와 체제의 건설자로 변해갔다. 그런 그의 인생은 곧 터키 민족의 현대사를 반영하고 있었다. 아니, 언제부턴가 역사가 그의 인생을 반영해 나갔다.

 

 

죽어가는 제국

오스만 제국은 15세기와 16세기에 지속적으로 국력을 키우고 영토를 확장하며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15세기 중반에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16세기 중반에는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유럽 국가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중동에서도 이란을 제외한 영역에서 지배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술레이만 1세 이후 좀처럼 영명한 군주가 나오지 않는 가운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거치며 새로운 힘을 얻은 유럽은 점점 오스만과의 대결구도에서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 1683년에 두 차례나 빈을 공략하다가 실패한 일이 분기점이 되어, 이후 이백여 년 동안 제국은 차차 쇠퇴해 간다.

 

17세기 말에 헝가리를 상실하고, 18세기에는 흑해 연안을 러시아에게 잃었다. 이렇게 되자 오스만에서도 뭔가 개혁이 필요하다는 움직임이 있었고, 셀림 3세, 마흐무드 2세, 압둘 메지드 등 개혁지향적 술탄들이 앞장서서 서구식 부국강병을 추진했다.


 

탄지마트’라 불린 개혁 정책은 서구의 과학기술을 수입할 뿐 아니라 정치를 이슬람교의 영향에서 독립시키고, 술탄의 전제권을 제한해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는 일도 모색했다. 이는 1876년 12월, 이슬람국가 최초의 헌법 제정으로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쇠약해진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쉽게 서구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1829년에는 영국과 러시아의 후원을 받은 독립전쟁에 승리한 그리스가 독립했으며, 1853-1856년의 크림전쟁은 세력 균형을 염두에 둔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등이 편들어준 덕분에 가까스로 러시아를 물리쳤지만, 1877-1878년의 6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는 참패하여 아시아에서는 카프카스를, 유럽에서는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는 사이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의 경제 침략도 진행되어, 19세기 말에는 핵심 산업과 자원의 주권을 대부분 상실하고 재정 파탄의 위기까지 맞는다.

 

 

1683년, 빈 공략에 실패하는 오스만군의 모습. <출처: wikipedia>

 

 

술탄이 주도했던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도 있었다. 이슬람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세력의 강력한 반발로 일부 개혁적 술탄은 강제퇴위를 당했으며, 1876년의 헌법에도 투르크족의 우위를 강조하고 술탄의 비상대권을 강화하는 등의 수정이 가해졌다. 이 비상대권을 무기로 수구적인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개혁의 선봉장이던 미드하트 파샤 수상을 비롯한 여러 개혁주의자들을 국외추방, 감금했다. 그리고 아예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 옛 전제정치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한때의 영광도, 개혁의 열기도 간 데 없이, 유럽의 영토를 대부분 잃은 데다 이집트와 아라비아, 쿠르드 등 여러 민족들의 분리독립 운동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거인이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고위 지배층에게 희망을 걸 수 없으며, 아래로부터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인식이 번져 나갔다. 그런 인식에 따라 1889년에 비밀리에 이루어진 조직이 ‘청년투르크(터키)당’이었다. 약 20년 만에 정권을 장악하게 될 이 단체에 케말 파샤가 있었다.

 

 

살로니카의 애국 소년


무스타파 케말은 1881년에 지금은 그리스 영토인 살로니카에서 태어났다. 무스타파는 갈색머리에 흰 피부,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그가 그리스나 알바니아계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투르크계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리 이름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아버지 알리 리자 에펜디는 군인이었는데, 퇴역 후 세관원을 거쳐 목재상을 하다가 무스타파가 일곱 살 때 죽었다.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님은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군인을 동경했던 무스타파는 몰래 군사중등학교에 입학해 버렸다. 그 학교의 수학 교사에게서 ‘완전함’이라는 뜻의 케말이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하는데, 1860년대에 신오스만협회라는 비밀 개혁조직을 만들었던 시인, 나미크 케말에게서 따왔다는 말도 있다.

 

 

1908년, 이스탄불 시가를 행진하는 청년투르크 당. <출처: Wikipedia>

 

 

소년 케말은 애국심이 강했다. 물론 이 때의 애국이란 오스만 제국에 대한 것이었다. 1897년에 크레타가 반란을 일으키자. 나이를 속이고 자원입대했다가 돌려보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서구 사상에도 심취했으며, 제국이 빈사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관생도 시절에도 몰래 반체제 신문을 발행하다가 발각되어 징계를 받았고,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임관한 후에는 바탄 베 휘리예트(조국과 자유)라는 청년장교들의 비밀조직에 가담해 활동했다. 바탄 베 휘리예트 멤버들은 곧 청년투르크 당으로 들어갔고, 제국의 각지에서 벌어지던 분리독립 운동을 진압하면서 일정한 세력과 명성을 얻었다. 압둘 하미드 2세는 이들을 박해했으나 청년투르크 당의 중심인물인 이스마엘 엔베르 등은 서유럽과 투르크의 산악지대를 오가며 1876년 헌법의 부활과 의회의 재설치를 집요히 요구했다. 결국 1908년 6월, 마케도니아에 집결한 청년투르크 당의 군대가 이스탄불로 진격하자 압둘 하미드 2세도 백기를 들었다. 그리고 헌정이 재개됨과 함께 정치범의 석방과 강압적인 종교 전통의 철폐 등이 잇달았다. 이듬해에 압둘 하미드 2세가 그런 개혁을 싫어하는 보수파와 함께 다시 헌정을 중단시키려 음모를 꾸미자, 청년투르크 당은 다시 한 번 이스탄불로 진격하여 압둘 하미드 2세를 퇴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메메드 5세를 술탄 자리에 앉혔다.

 

케말은 이 때 28세의 나이로 이스탄불 진공 병력의 총지휘를 맡아 멋지게 성공했다. 그만큼 혁명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새 정부에서 그의 입지는 불안했는데, 최고실권자인 엔베르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전장으로 나가 발칸 반도에서의 반란 진압에 힘쓰며 중앙 정치와는 거리를 둬야만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참전하는 일도 케말은 끝까지 반대했으나 결국 엔베르 등의 뜻대로 참전하게 된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토록 반대하던 이 전쟁 덕분에, 케말은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갈리폴리의 영웅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케말 파샤. <출처: Wikipedia>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케말은 제5군의 제19사단을 지휘하게 되었고, 이 병력은 1915년 초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겔리볼루) 반도로 향했다. 당시 연합군은 고립된 채 싸우고 있던 러시아에 보급로를 뚫고, 한편으로 오스만의 수도 이스탄불을 점령하기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영국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 주도한 이 계획은, 2월부터 3월까지,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대규모 함포사격으로 갈리폴리의 오스만군을 초토화하려는 공세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스만군은 완강히 저항했으며, 기뢰도 효과를 보아 영국과 프랑스의 군함들이 다수 격침되며 함포사격만으로 오스만군을 제압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다음은 상륙작전이었다. 이안 해밀턴이 이끄는 영국군과 프랑스군 7만 명이 4월 25일에 갈리폴리에 상륙했으나,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 …진격을 바라지 않는다. 그 자리를 지키다 죽어라! 전우들을 위해 싸우다 죽어 다오!”하며 스스로도 일선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운 케말의 장렬한 독전, 그리고 기민한 전술이 연합군 지휘부의 안이한 대응과 맞물려 결국 오스만군에게 승리를 가져왔다. 연합군은 10월까지 반도에서 버티며 계속 공격을 시도했지만 끝내 25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퇴각해야 했다. 오스만군도 비슷한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처절한 전투에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세계 최강이라는 영국군을 보기 좋게 물리쳤다. 갈리폴리 전투는 풍전등화의 투르크를 구했을 뿐 아니라, 수백년 동안 서구 열강에게 패배만 거듭해 온 이 나라에 실로 오랜만에 값진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놀라운 승리를 거둔 주역, 케말에게는 지도자를 의미하는 ‘파샤’ 칭호가 자연히 따라붙게 된다.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케말 파샤는 갈리폴리 전투 이후에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혼자 힘으로 전쟁 전체의 승패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1918년 10월에 투르크는 항복했고, 엔베르 등 정부 수뇌들은 외국으로 달아나 버렸다. 1920년 8월에 맺어진 세브르 조약에서 투르크는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 반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일약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의 영토조차 불안했다. 연합국은 옛 투르크 영토를 나눠가지고는 투르크의 국정에 개입하며 장차 아나톨리아까지 차지하려는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또한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가, 서쪽에서는 그리스가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1919년 5월, 마침내 그리스가 적대행위를 개시하자, 케말 파샤는 북부 흑해 연안의 삼순으로 가서 “국내질서를 회복하지 못하고, 외국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할 줄 모르는 현 정부를 불신임한다…. 이제 우리는 제국의 허울을 벗고, 터키 민족국가를 수립하여, 국난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나중에 삼순에 도착한 5월 19일을 자신의 생일로 삼을 만큼 이 결의를 두고두고 기념했다. 실로 그것은 케말 본인에게는 학생 시절부터의 이상을 비로소 만천하에 표명하며, 군인이라기보다 정치인,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터키로서도 투르크계 황실이 여러 민족 위에 군림하는 이슬람 제국이 아닌 근대 터키 공화국으로 거듭나는 계기였다.

 

당황한 이스탄불 정부는 케말을 직위해제했다. 그는 “군인은 언제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며 순순히 군복을 벗었으나, 동시에 그것은 이제부터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지지세력을 모아 “아나톨리아-루멜리아 권리옹호동맹”을 결성했으며, 이스탄불에서도 점차 케말과 그의 주장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면서 새 의회가 구성되어 케말의 청사진을 실현할 준비를 했다. 이를 우려한 영국이 개입하면서 의회는 강제 해산되었으나, 케말은 아나톨리아 내륙의 앙고라(나중에 앙카라로 이름이 바뀐다)에서 새로운 의회를 구성했다. 이스탄불의 술탄은 이 의회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케말과 그의 동료들을 파문하여 “신앙의 적”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앙고라의 새 정부를 향한 국민적 지지는 갈수록 높아졌다. 케말이 동쪽에서 아르메니아의 침공을 물리치고 다시 서쪽에서 그리스를 물리치자, 그런 지지는 절정에 달했다. 이교도에 맞서 이슬람교를 수호한 영웅에게 주어지는 “가지”라는 칭호를 새로 얻은 케말 파샤는 사실상 최고실권자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여섯 개의 화살

그 첫 번째 조치는 제정분리였다. 투르크의 술탄은 예부터 최고종교지도자인 칼리프를 겸하며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케말은 칼리프제는 유지하되 종교적 권한만 갖도록 하고, 정치적 지배자인 술탄은 폐지한다는 개혁안을 1922년 10월에 통과시켰다. 1923년에는 “아나톨리아-루멜리아 권리옹호동맹”을 인민당으로 개편해 집권당을 삼고, 앙카라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10월 29일에 의회의 선거를 거쳐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런 근대 서구적인 공화정부체제는 케말이 신생 터키의 대원칙으로 삼아 추진한 “여섯 개의 화살”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 두 번째 화살은 민족주의로, 케말은 수백년 동안 오스만 제국이 보인 진부함과 지리멸렬함을 극복하여 활기찬 근대국가로 나아가려면 갈리폴리 전투나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나타난 민족주의적 정열을 중심으로 국민이 총화단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터키민족사와 터키민족문화를 국가적 규모로 연구하고 널리 보급했을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성을 갖도록 하고(케말 자신도 1934년에 아타튀르크, 즉 “터키의 아버지”라는 성을 만들어 썼다), 그리스 영토 내의 터키계 주민과 터키 영토 내의 그리스계 주민을 대규모로 맞교환하는 등 “민족국가 터키”를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이슬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벗고 근대적, 서구적인 국가와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법률의 국교 조항을 폐지하고, 이슬람교도 국민과 비이슬람교도 국민 사이의 차별을 금지했으며, 여성에게도 교육을 실시하고, 남성과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인정했다. 1928년에는 아랍 문자를 빌려 쓰던 터키 문자를 폐지하고 로마자를 대신 쓰게 했으며, 이슬람교의 공휴일인 금요일 대신 일요일을 공휴일로 삼았다. 다섯 번째는 낙후된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 국가가 경제를 선도하고 관리한다는 것, 그리고 여섯 번째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감안해 이 모든 과정을 “혁명적으로 실행한다”, 다시 말해 다소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진취적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1928년, 새로 도입한 로마자를 써 보이는 케말 대통령.
<출처: Wikipedia>

 

 

‘국부다운 국부’로 남다


이처럼 “혁명적으로” 신생국 터키를 근대화하는 과정에는 강압적 수단도 많이 쓰여졌다. 옛 체제에 향수를 느끼는 구 왕실과 고위성직자들은 끊임없는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차례차례 숙청되었다. 언론은 검열되었으며 반정부적인 언론사는 가차없이 폐간되었다. 정당은 한동안 집권 인민당 하나만 인정하다가 1930년에 자유공화당을 창당토록 했지만, 이 정당이 의외로 바람을 일으키자 99일 만에 해산시켜 버렸다. 또한 “단일민족”임을 강조하는 터키공화국이었으나 소수민족은 아직도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독립의 열망이 높던 쿠르드족은 1925년에 반란을 일으켜 한때 일부 지역을 장악했으나, 케말이 보낸 군대에게 진압되었다. 케말은 그들의 지도자들을 공개 처형하여 소란해진 민심을 공포감으로 억제하려고 했다. 공개처형은 이 밖에도 반정부 인사들을 처리할 때 종종 쓰였다. 그래도 히틀러스탈린 체제에서와 같은 대규모 학살은 케말의 생전에 일어나지 않았으나, 술탄 정부 말기와 공화국 수립기에 벌어진 ‘아르메니아 대학살’에는 케말도 연관되어 있었다는 주장이 일부 나오고 있다.

 

아타튀르크의 개인적 삶도 평화롭지 못했다. 젊은 시절 화려한 여성편력을 가졌던 그는 42세가 되던 1923년에야 라티페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부분 일에 중독되어 보내고, 약간의 여가 시간은 술에 빠져 지내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1925년에 이혼해 버린다. 케말은 이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고, 13명의 자녀를 입양하여 가족 분위기를 조금 냈지만 기본적으로는 술과 담배에 의존하여 정치활동에서의 스트레스를 달랬다. 그런 습관 때문에 그의 건강도 빠르게 나빠지고, 결국 1938년 11월 10일, 57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된다.

 

 

케말이 숨을 거둔 이스탄불의 돌마바체 궁. <출처: Wikipedia>

 

 

아타튀르크는 분명 독재자였으나, 그런 독재는 빈사 상태에 이르렀던 나라가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많다. 많은 ‘국부’들에게 으레 따르는 부정부패와 친인척 문제, 개인의 신격화와 대량학살 등 비난의 여지도 없었다. 군인 출신이고 강력한 민족주의자였으나, 집권한 후에는 그리스를 비롯한 여러 이웃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지향했다. 아직도 그의 이름은 터키 곳곳에 남아 있으며, 국민의 애정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시신을 실은 배가 이스탄불을 떠나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널 때, 전 유럽의 선박들이 일제히 기적을 울려 조의를 표했다고 한다. 서구인에게는 한때 경멸의 대상일 뿐이던 한 나라 지도자의 마지막 길에 주어진 그러한 예우, 그것이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대변해 주지 않을까.

 

 

 

 

케말 아타튀르크 [ Kemal Atat?rk ] 아타튀르크,케말 파샤

1881 그리스 살로니카~1938. 11. 10 이스탄불.

터키의 군인·개혁가·정치가이며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투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로 알려진 그는 터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 3국동맹(영국·프랑스·러시아의 동맹)에 대항해 터키의 해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그의 투쟁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신생국이 그들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도록 자극했다(→ 터키사).

 

초기생애와 경력

무스타파는 1881년 오스만 제국하에 있던 그리스 살로니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터키 가계(家系)는 미미했다. 어머니는 쥐베이데 하님이었고 아버지는 정부의 말단관리인 알리 리자였다. 초등학교 재학중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그녀의 형제와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 후에 살로니카로 돌아온 무스타파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오스만 군대의 장교가 되기 위해 군사중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그와 똑같은 이름(무스타파)을 지니고 그의 수학적 재능을 칭찬해주던 한 교사가 그에게 무스타파 케말(성숙과 완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중등학교를 마치고 그는 모나스티르(지금의 마케도니아 비톨라)에 있는 군사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터키인들에 대한 마케도니아 그리스도교 무정부주의자들의 계속적인 공격을 적의를 품고 지켜보았으며 그의 동료 생도들처럼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1899년 그는 이스탄불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으며 거기에서 정치에 열렬한 관심을 기울였다. 1902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참모대학으로 진학했는데 이곳에서도 정치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계속되었다. 육군대위로 대학을 마친 그는 다마스쿠스의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이곳에서 몇몇 동료와 함께 '조국과 자유'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나 별다른 진전은 보지 못했다. 살로니카로 돌아온 그는 대다수의 동료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비밀조직인 '통일진보위원회'에 가입했는데 이 조직은 전군(全軍)에 혁명활동을 퍼뜨렸으며, 1908년의 헌법선포를 유발했다. 그후의 몇 년 간 그는 모든 시간과 정력을 바쳐 직무에 충실했다. 1911년 이탈리아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트리폴리를 공격하자 그는 동료장교들과 서둘러 현지에 도착했으며 토착민들로 부대를 구성해 적에 대한 성공적인 게릴라 습격을 감행했다. 같은 해에 그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1912년의 발칸 전쟁 때에 그는 갈리폴리 반도의 방어 책임을 맡았는데 그 임무는 이 중요한 지역의 전략적 형세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1913년 대사관 무관으로 소피아에 부임한 그는 그곳에 체재하는 동안 서구인들의 취향과 예술에 관한 규범과 상류 사회에서의 남녀 관계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는 뒷날 터키의 사회생활을 개혁할 때 이때의 지식을 잘 활용했다. 소피아 주재시에 그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차나칼레의 19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갈리폴리에서 영국군을 2번이나 격퇴했으며 터키 언론으로부터 '이스탄불의 구세주'라는 칭호를 얻었고 대령으로 진급했다. 1916년 동부전선에 근무하면서 그는 남하하던 러시아군의 전진을 막아냈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1918년 팔레스타인에 있던 제7육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가 임무를 맡았을 때는 영국과의 전쟁은 이미 거의 끝나 있었고 적군은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북진하고 있었으며 또 아랍 게릴라들은 터키군에게 공격을 전개하고 있었다. 제7육군 전군이 포로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는 알레포 북쪽으로 병력을 후퇴했다. 무드로스의 휴전 이후에 터키에 주둔하던 독일군 장교와 사령관들이 본국으로 철수하자 그는 동남전선에 있던 모든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휴전조항의 실시에서 영국과 의견 대립을 보이자 그는 육군부(部)로 전보되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그는 3국동맹의 함대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다. 휴전조항은 강경했으나 3국동맹 국가들의 비밀합의에 의해 오스만 제국 영토가 분할되었다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더구나 이스탄불과 기타 지역에 있던 소수민족들이 이 기회를 이용해 투르크족에 대항하는 조직을 구성하려 했다. 터키의 국민들은 평정(平定)의 수단을 강구했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권리방어를 위한 연합'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활동

이스탄불에는 터키의 장래에 대해 2가지 안이 떠돌았다. 즉 황제와 그의 지지자들은 터키를 영국의 보호 아래 두려고 생각했으며, 터키의 몇몇 저명한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터키를 미국의 위임통치령 아래 두기 위한 선전을 퍼뜨리고 있었다(→ 윌슨의 14개 조항). 2가지 모두 오스만 제국의 통일된 구조를 유지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케말은 자국의 경계 안에 사는 독립된 투르크 민족을 오랫동안 구상하고 있었으며 터키가 새로운 투쟁에 임한다면 이 안이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행동 방침을 결정하기 전에 그는 술탄과 그의 대신들을 비롯한 국내외의 많은 고위자들과 만나 대담을 나누었다. 그 다음 그는 그의 동료들과 토의했는데 지휘관이던 그들 모두는 휴전조항에 의해 오스만의 군대가 해체되는 것에 쓰라린 환멸을 느꼈으며, 아나톨리아에서의 독립전쟁이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절호의 기회가 곧 다가왔다. 3국동맹국들은 터키 정부에 압력을 넣어서 동부의 주(州)들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폭동에 대비하도록 했다. 술탄은 케말을 에르주룸의 제3육군 감독관으로 임명했으며 그에게 군 당국자와 문관들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1919년 5월 15일 그가 에르주룸으로 떠나기 직전에 그리스는 이즈미르를 점령했다. 술탄을 비밀리에 알현한 후 케말은 많은 참모 장교들을 수행하고 이스탄불을 떠나 5월 19일 삼순에 도착했다. 아마시아에서 지역 군단 지휘관의 동의를 얻어 발행한 그의 6월 22일자 비밀회람에서 그는 국가가 처한 위기를 설명했다. 즉 이스탄불의 정부가 얼마나 나약하게 점령군에 굴복했으며 어떻게 해서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 해방을 위한 민족의 투쟁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첨가하기를 그러한 투쟁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것을 민족 자체의 결정으로 하기 위해 각 주에서 3명의 대표자가 참가한 민족의회가 시바스에서 개최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터키군의 해체에 관한 휴전조항을 무시하고 모든 단위 지휘관들에게 병력을 강화할 것을 명령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군 당국자와 문관들에게 이후로는 그로부터 명령을 받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의 요구는 군을 소멸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었으므로 군부에 의해 열정적으로 수행되었다. 군은 아나톨리아의 모든 우편·전신·통신을 장악했으며 그의 명령에 저항하려 했던 문관관료들을 순응시켰다.

 

시바스로 가는 길에 방문했던 모든 마을과 도시에서 그는 지도적인 시민들을 만나 독립을 위한 민족적 투쟁에 대해 그의 견해를 설명했다. 그는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호의적인 집회 속에 시바스에 도착했으며 시의 명사들과 요담을 마친 후에, 3국동맹으로부터 그의 즉각적인 이스탄불 귀환을 요구받고 있던 술탄 정부의 모든 명령을 무시하고 에르주룸으로 향했다. 에르주룸에서는 7월 23일 '동부 아나톨리아의 권리 방어를 위한 연합'에 의해 의회가 소집될 예정이었다. 한편 에르주룸의 군과 문관 당국자들은 그를 체포해서 이스탄불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이 이행되지 는 않았지만 그는 그가 시작한 민족적 투쟁의 지도자로서 좀더 자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군에서의 직위를 사임했다. 그는 단순한 대표자로 의회에 참가해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의회는 그의 제안에 따라 국민협정을 수용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맹세로서 조국의 분할불가와 민족적 운동의 성공적인 완수를 명(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9명으로 상임위원회가 구성되고 그는 의장에 지명되었다. 9월 4일 시바스에서 민족의회가 개최되었는데 그는 또다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의회는 에르주룸 의회에 취해진 모든 결정들을 채용했으며 미국의 위임통치 아래 터키를 두려 했던 안을 결정적으로 기각시켰다. 아나톨리아에 새로운 국가를 창설하자는 제안을 물리치고 그는 권리 방어를 위한 연합의 모든 지부(支部)를 통합해 '아나톨리아와 루멜리아의 권리방어를 위한 연합'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이 수용되어 정당의 초기 형태가 조직되었다. 페리드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내각과 그 이후 계속된 오스만 정부는 국민운동을 반역으로 간주했으며 케말의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근대 터키의 창설과 개혁에서의 역할

12월 27일 케말은 그의 목적을 위해 더 편리한 장소라고 생각했던 앙카라로 투쟁기지를 옮겼다. 한편 이스탄불의 오스만 하원 총선에서 케말의 지지자들은 압도적 다수로 당선되었으며 하원으로 하여금 민족의 계약에 있던 행동지침들을 원(院) 자체의 결정으로 선포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들은 케말을 군으로부터 해임한 정부의 이전 포고령을 파기하도록 했다. 오스만 제국의 정책에서 이런 변화의 조짐들에 당혹해진 영국은 1920년 3월 16일 공식적으로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하원을 해산했다.

 

케말은 영국 정부의 행동에 격렬히 항의했으나 사실 오스만 수도의 점령 특히 의회의 해산은 그의 목적에 극히 유용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아나톨리아에 민족정부를 수립함에 있어 이스탄불 정부가 그에게 제기하고 있던 법적인 장애물을 제거해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하원의원을 선출한 후 4월 23일 앙카라에서 터키의 대민족의회를 개원하고 그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제안에 의해 국명을 터키로 바꾸고 주권과 행정권이 대민족의회에 의해 대리로 행사될 것임을 규정한 헌법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총리직과 국가 원수직을 떠맡았다. 이로써 터키에서 중세로부터 지속되어 온 이슬람 형식의 정권이 종식되고 프랑스 혁명의 경우처럼 터키는 절대왕정과 칼리프의 통치로부터 민족적 주권에 기반을 둔 정권으로 급작스런 전이를 했다. 이 중요한 변화는 일부 지역에 심각한 폭동을 유발했으나 민족 세력에 의해 곧바로 진압되었다.

 

케말은 이제 당시 점령하에 있던 국토를 되찾는 일에 열중했다. 먼저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과 그루지아인을 격퇴하고 러시아의 중재로 그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터키는 1878년에 잃었던 영토까지 되찾았다. 광범위한 게릴라전 끝에 남부에 있던 프랑스는 터키 영토에서 철수해 시리아로 후퇴했으며 앙카라에 있는 민족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했다. 영국은 앙카라를 전면 무시하고 오스만 정부로 하여금 세브르 조약에 서명하도록 했다. 민족정부가 그러한 조건의 조약을 합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자 그리스군이 점령지역을 확대해 앙카라로부터 50km 지점까지 육박해왔다. 이 엄청난 위기의 시간에 의회는 케말을 특권을 지닌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22년 8월 26일 케말 자신에 의해 계획되고 지시된 총공격으로 그리스군은 패배했으며 2주일 안에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철수해야만 했다. 이 결정적인 승리와 3국동맹국들의 중재에 의해 모든 터키 영토로부터 그리스군의 철수를 규정한 휴전협정이 그리스와 체결되었으며 영국은 차나칼레와 이스탄불을 국민정부에 양도했다. 오스만의 마지막 술탄 바히데딘은 해외로 도주했으며, 케말의 제안에 의해 의회는 터키에서의 오스만 600년 통치를 종결시켰다. 1923년 7월 24일 조인된 로잔 조약은 터키 국경의 보존과 완전한 독립을 규정했으며 오스만에 의해 유럽 제국에 부여되었던 모든 특권이 파기되었다. 이로써 케말은 오랫동안 '유럽의 병자'로 유럽 열강들의 분쟁 대상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대신해, 완전히 독립한 터키 민족국가의 창설이라는 그의 꿈을 실현했다.

 

1922년 그는 이즈미르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의 딸 라티페 하님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의 결혼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오랜 독신 기간에 형성되어온 독립적인 생활습관을 그가 포기하기 어려웠고, 그의 아내도 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1917년에 그는 자신에게 능력과 권한이 있다면 터키의 사회생활을 단번에 바꾸어 놓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 기회가 찾아왔음을 간파하고 개혁 일정에 착수했다. '아나톨리아와 루벨리아의 권리 방어를 위한 연합'을 대체해서 국민당(나중에 공화국민당으로 개칭됨)을 창당했고 그 지도자가 되었다. 로잔 조약의 체결 후 곧이어 실시된 총선에서 이 당은 터키의 유일한 정당으로 정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1923년 10월 29일 그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그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24년 그는 칼리프 제도를 폐지했다. 한편 그의 급격한 개혁방법에 반대하면서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진보에 신념을 두었던 일단의 그의 동료들은 '진보공화당'(Progressive Republican Party)을 발족시켰다. 케말은 그의 개혁 일정을 계속 진행시켜 회교경전의 율법에 기초한 모든 기관들과 수도원, 교단을 폐쇄했다. 그는 "과학은 삶의 가장 믿음직한 안내자다"라고 말했으며 대부분 종교적이었던 전통교육 체제를 폐지하고 현대식의 탈(脫)종교적인 학교들을 설립했다. 오스만의 모든 법 체계가 현대화되었으며 새로운 민법전과 형법전이 채용되었다. 그의 개혁은 시민들의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했다. 종교적 의미를 함축했던 동양식의 의복은 유럽식 의상으로 대체되었으며 댄스, 무도회 및 그밖에 남녀가 함께 즐기는 오락들이 권장되었고 계몽된 계층에서는 유럽식 생활방식을 받아들였다.

 

케말의 개혁이 도전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동부 아나톨리아에서는 세이 사이드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이슬람 경전의 율법을 회복하려 했다. 이즈미르에서는 케말을 암살하려던 예비음모가 발각되었다고 전한다. 또 모자 사용에 반대하여 몇몇 지방에서 반란 기도가 있었다고도 한다. 케말은 이런 운동들의 모든 주도자들을 강력히 처벌하고 진보공화당을 해산시켰으며 이전의 권위주위적 체제로 복귀해 그의 개혁 일정을 밀고 나갔다. 남존여비를 주장했던 구시대의 모든 법률과 전통을 폐기하고 그는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포함한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수립했다(→ 샤리아). 1928년 그는 터키에서 수세기 동안 사용되어왔던 아랍 문자를 대신해 로마자를 도입했으며 터키에 서구의 고전음악과 극장을 대중화하려고 노력했다. 1930년 그는 자유공화당의 창설을 허용함으로써 다당제를 도입하려는 2번째 시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당은 곧 반개혁적인 안(案)과 행위들의 중심이 되었고 진보공화당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그는 또 터키의 언어와 역사 분야에서 대규모 연구일정에 착수했는데 이로써 그는 고래의 종교적 유대를 대신해 사회에 민족적 정서의 유대를 강화하려 했다. 1933년 성(姓)의 사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국회는 그에게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수여했는데 이 이름은 곧 널리 보편화되어 그의 이전의 이름과 칭호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의 외교 정책은 '국내에서의 평화, 세계에서의 평화'라는 그의 표어로 요약된다. 경제에서 민족경제정책을 추구한 그는 외국인의 모든 상회와 기업들을 국유화했다. 터키의 산업화 문제에 있어서 그는 한동안 사적인 국내 자본에 희망을 걸었으나 그것이 불충분함을 깨닫고 국가사회주의를 권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도 중요한 성공을 성취하지 못했으며 한두 가지 외교정책을 제외하면 그의 마지막 5년간은 점진적인 침체에 들어갔다. 그는 마지막 해를 중병으로 보냈으며, 1938년 11월 10일 이스탄불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

 

그는 정치·법률·문화 분야에서 터키에 주요한 개혁을 수행했으나 그 영향은 관료들과 도시의 소수 부유층에 그쳤다. 빈곤층 특히 여전히 중세형의 농업적 질서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농민들은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계속했다. 하지만 식자층에서는 서구식 생활방식에 젖어 구시대의 생활방식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해졌다.

 

M·Akdag 글

 

/네이트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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