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는 완옹중(完翁仲) 베트남에선 이옹중(李翁仲) | ||||||||||||||||||||||||
| 제주인 1687년에 베트남 표류 중국 선박타고 무사귀환 '이신' 이옹중이라 불려…완옹중과 동일인물로 추정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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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아스바에서 유래
300여년전 「남환박물(南宦搏物)」에, '제주에서 안남국(安南國)까지의 거리는 정남서(正南西)로 1만 7000여리라고 했다. 일찍이 최치원(崔致遠, 557~ ?)은 안남국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어떤 이는 머리를 풀어 흩뜨리고, 몸에는 문신을 새긴다. 또 어떤 이는 가슴을 뚫기도 하고, 이(齒)를 파내기도 한다…표범의 가죽으로 몸을 싸서 거북의 껍질로 형체를 가리며, 물솜을 두들겨서 겉옷을 만들고 대껍질을 엮어서 날개를 만든다"고 했다. 또 "아이를 낳아 기를 때는 남편과 아내가 번갈아 가며 보살피고, 자라난 뒤에는 아비와 자식이 주도권을 겨룬다"고 한다. 풍속은 "누에를 기르는 일이 없고, 다만 여러 가지 무늬를 놓은 좁은 베를 짜며, 기장이 짧은 얼룩무늬 옷을 많이 입는다. 더러는 꿰매지 않고 입기도 하고 더러는 낱알이 아닌 것도 먹고, 죽어서 초상을 치러도 상복을 입지 아니하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도 중매가 없고, 싸우는 데는 칼을 쓰며 병들어도 약을 쓸 줄 모른다"고 했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도 "안남(安南)은 옛 교지(交趾)로서 날씨가 따뜻하여 서리와 눈을 보지 못한다. 남녀가 다 이빨을 물들이며, 남자는 정수리에 삭발한다. 토산물로는 철도목(鐵刀木), 빈랑, 야자주(椰子酒), 육계(肉桂) 등이 나고, 본디 형제의 나라였는데 자손들이 다투어 교지와 동경(東京), 두 나라로 나뉘었다"고 했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안남국에 다녀온 완벽(完璧)이라는 선비의 이야기가 있다. 그 선비는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사람으로, 장사하는 왜인을 따라 세 번이나 베트남을 다녀왔다. 일본에서 안남까지는 3만 7000리, 사쓰마(薩摩)에서 배를 타고 주야로 5~60일 거리이고, 그곳은 따뜻하여 논에 곡식을 심는 데에 철이 없다. 한 쪽에서 곡식을 심고 한쪽에서는 곡식을 거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항상 빈랑을 먹고 목이 마르면, 사탕수수를 씹는다. 그들은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120세 된 사람도 있고, 머리털은 희었다가 다시 누렇게 된다고 한다.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에, 제주 조천관 주민 고상영이라는 사람이 안남국에 표류한 내용이 전해온다. 이 이야기는「지영록(知瀛錄)」에 <김대황(金大璜) 표해일록>이라는 제하로 실려 있다. 1687년 9월초 3일 조천관 주민 17세 고상영은 해남 대둔사에 가서 그곳 승려에게 글을 배우려고 제주진무(鎭撫) 김대황과 같이 진상마 3필을 실은 진상선을 탔다. 배가 추자도를 지나자마자 표류하여 망망대해에서 29일 만에 안남국에 이르렀다가 운이 좋아 중국 상인의 선박을 타고 1688년 12월16일 제주에 돌아올 수 있었다. 14세기 후반에 편찬된 베트남의 「영남척괴열전」에는 '옹중(翁仲)'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교지국(베트남)에 이신(李身)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장대하여 그의 키가 2장(丈) 3척(尺)이나 되었다. 그는 날래고 사나웠는데 살인죄를 저질러 사형이 언도되었다. 웅왕은 그를 애석히 여겨 차마 죽이지를 못했다. 안양왕때 진시황이 베트남을 침략하려 하자 안양왕은 이신(李身)을 진시황에게 바쳤다. 진시황은 이신을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여 무관(武官)에 임명했다. 마침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이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임조(臨?)를 지키게 했다. 그러자 북방의 흉노는 감히 변방을 침범하지 못했다. 진시황은 이신을 제후로 삼아 베트남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 후 흉노가 빈번히 변방을 침범하자 진시황은 이신을 불러오게 했으나 이신은 갈 뜻이 없어서 마을의 구석진 곳에 숨었다. 안양왕은 중국의 사신들에게 책망을 듣고 이신을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자 중국 사신들에게 이신은 설사병이 나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진나라에 이신의 시신을 보내라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신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안양왕은 이신의 시신에 수은을 발라 진나라에 보냈다. 진시황은 탄식을 한 후 구리를 녹여 이신의 동상을 만들어 이름을 '옹중(翁仲)이라고 하여 함양궁 사마문(司馬門) 밖에 세웠다. 그리고 동상의 배 속에 수십 명의 사람을 넣어 매번 사방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몰래 동상을 흔들거리게 했다. 이의 소문이 나면서 이신이 살아있는 줄 안 흉노는 감히 변방을 침범하지 못했다. 베트남에서는 이신을 가리켜 '이옹중'이라고 한다. 중국과 한국의 옹중에 관한 이야기로는 '완옹중(完翁仲)' 대한 이야기가 있다. 특히 이익(李瀷, 1681~1763)의 "완옹중(完翁仲)은 안남(安南) 사람으로 키는 2장 3척이나 되고 기품은 단정하면서 씩씩하여 보통 사람과 아주 달랐다...진시황이 완옹중에게 병권을 맡겨 임조를 지키게 했고, 죽은 후에는 동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말은 사서(史書)에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사실로 미루어, 완옹중은 성씨만 다른 베트남에서 전해오는 이옹중과 동일 인물임을 알 수가 있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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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현상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5.12 安都의 남쪽이라 해서 安南이라 부른 것은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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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차재철 작성시간 11.05.13 외모 설명 중 남자는 정수리에 삭발한다. 사진에서의 모자. 머리카락은 희였다가 다시 누렇게 된다. // 공통점을 나타내는군요. 일전 방글라데시 방문시 나이든 할아버지들의 특징이 머리가 노란색으로 변한것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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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현상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5.13 안도 즉 불림 =동로마의 남쪽에 있는 것이 교지 =베트남 , 아라비아 반도가 제주라는 가정하에 풀어보면 安都城의 남쪽지방을 안남이라고 한것인데요. 교지는 현 방글라데시와 관련이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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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현상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5.24 安都는 평안도를 말하는 것은 아닐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