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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India)

작성자최두환|작성시간11.08.11|조회수922 목록 댓글 1

 

인도[India, ]

남부 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1857년 무굴제국이 멸망한 후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편입되었다. 1947년 8월 15일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힌두권인 인도와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이 각각 영국연방의 자치령으로 독립하였고, 1950년 자치령의 지위에서 벗어났다.

위치

남부아시아

경위도

동경 77° 00", 북위 20° 00"

면적(㎢)

3287590

해안선(Km)

7000

시간대

IST (UTC+5:30)

수도

뉴델리

종족구성

인도아리아족 (72%), 드라비디아족 (25%), 몽고족 및 기타 (3%)

공용어

힌두어(40%)외 14개 공용어, 영어(상용어)

종교

힌두교 (80.5%), 이슬람교 (13.4%), 그리스도교 (2.3%)

건국일

1947년 08월 15일

국가원수/국무총리

프라티바 파틸(Pratibha Patil) 대통령(2007.7 취임)

국제전화

+91

정체

연방공화제

통화

루피(Rupee, Re)

인터넷도메인

.in

홈페이지

http://india.gov.in

인구

1,147,995,898 (2008년 )

평균수명

69.25 (2008년 )

1인당 GDP($)

1,030 (2009년 )

수출규모($)

1,508 (2007년 )

수입규모($)

2,302 (2007년 )

인구밀도

349 (2008년 )


인도 국기

인도 국기 more


정식명칭은 인도공화국(Republic of India)이며, 힌디어()로는 바라트(Bharat)라고 한다. 서쪽으로 파키스탄, 북동쪽으로 중국·네팔·부탄, 동쪽으로 방글라데시·미얀마와 국경을 접한다. 1914년 맥마흔(McMahon) 선언에 따라 영국령인 인도와 중국의 국경이 히말라야 산맥 분수령에 설정된 이후 중국과 국경분쟁이 이어졌고 1962년 전쟁까지 치렀다. 파키스탄과는 독립 당시부터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싼 영토분쟁을 벌여왔다. 아시아 문명의 원천으로 불교가 발상한 곳이며, 천축()이란 이름으로 예부터 알려진 곳이다. 국명은 산스크리트어()로 된 인더스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국토면적은 세계 7위이며, 인구는 세계 2위이다. 행정구역은 28개주(state)와 7개 연합주(union territory)로 되어 있다.
 

1. 자연

1) 지형(북부고산지)

카슈미르계곡

인도의 지형은 히말라야산맥이 중심이 되는 북부고산지, 인더스강과 갠지스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도 대평원, 인도양 방향으로 삼각형모양의 반도처럼 돌출된 고원지대 등 3개의 특징적인 지역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해안과 도서를 별도로 구분하면 4개의 지형구가 된다.

북부고산지는 크게는 히말라야 산맥이라고 지칭하나, 북동부에는 히말라야 중심부의 산맥이 있으며, 북으로는 파미르 고원의 남쪽에 위치한 힌두쿠시산맥, 캐라코럼산맥과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의 슬라이만 산맥과 연결되어 있어 인도를 다른 지역으로부터 봉쇄하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은 파키스탄에서 미얀마 국경에 걸쳐 전체길이 2,400km, 너비 약 20km에 이른다. 대()히말라야 ·소()히말라야 ·시왈리크 등 3개의 습곡축()이 나란히 달린다. 대빙하만년설로 뒤덮인 대히말라야산맥에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8,848m), 칸첸충카(8586m)를 비롯하여 8,000m 내외의 고봉이 인도 쪽에만 14개봉이 있다. 히말라야 산맥은 신생대 제3기에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의 충돌에 의한 대규모 습곡으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변성된 퇴적물을 주변에 갖는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히말라야산맥은 선캄브리아대()에서 에오세()에 이르는 각 시기의 암석이 강하게 압축되어 변성된 것으로 이루어졌으며, 봉우리는 약 5,000m, 계곡은 1,000m 정도의 높이를 이룬다. 히말라야산맥의 남쪽에 있는 시왈리크산맥은 남쪽을 향해 급경사를 이루며 마이오세에서 플라이오세에 이르는 히말라야 조산운동()에 의해 융기, 그후 히말라야의 하천에 의한 침식과 운반으로 퇴적된 지층으로 이루어졌다.

2) 지형(대평원·고원)

인도 대평원은 동쪽의 갠지스 강과 서쪽의 인더스 강 주변에 펼쳐진 평야지대이며, 이를 힌두스탄 평원(Hindustan plain)이라고도 부른다. 길이 3,200km, 폭 약 240~480km에 이르는 거대한 평야인데, 하천에 의해 형성된 두터운 충적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갠지스강 하구에서 1,600km 떨어진 상류의 해발고도 150m 정도이고, 1,800km가 떨어진 상류 또한 해발고도 270m에 불과한 매우저평한 대지를 이룬다. 인도 대평원의 서쪽을 흐르는 인더스 강주변의 평야지역과 데칸고원 사이에는 타르 사막이 나타나는데, 오늘날에는 인더스강 유역의 대부분의 지역이 파키스탄에 속한다.

인도대륙의 북중부에서 남부에 걸친 고원지대에는 빈드야 산맥과 사트푸라 산맥이 인도대평원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남쪽으로는  데칸고원이 펼쳐진다. 일반적으로 데칸고원(데칸의 의미는 남쪽을 뜻함)은 인도대륙의 반도부 전체를 뜻하기도 하고, 반도부의 북부와 중부만을 의미하고 남부의 타밀지역과 분리하기도 한다.

데칸고원은 선캠브리아기의 암석을 중심으로 하는 안정된 육괴를 기반으로 중생대 육성층이 그 위를 덮고 다시 그 위를 중생대 백악기 이후에 분출된 현무암이 덮고 있는 용암대지를 이룬다. 데칸고원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경동지형을 이루고 면적이 약 160만㎢에 달하며, 잔구, 산정평탄면(), 연속되는 고원, 그리고 준평원 중에 협곡과 넓은 하곡 등이 전개된다. 이 고원의 북서부를 북동에서 남서로 달리는 아라발리산지는 가장 오래된 습곡산지이다.

데칸고원은 동쪽과 서쪽 양끝에는 해안을 따라 동갓츠(ghats) 산맥과 서갓츠산맥이 나란히 달린다. 서갓츠산맥은 고원의 서단에서 남북으로 달리면서, 아라비아해() 사면과 벵골만() 사면의 분수계()를 이룬다. 고원의 모든 하천은 여기에서 발원하여 고원상을 흘러 벵골만으로 유입하는 것이 많다. 동갓츠산맥은 서갓츠산맥과는 달라 모든 하천에 의해 분단되어 있다. 데칸고원은 곤드와나 대륙의 일부가 남아 있는 것으로서, 오래된 지층으로 구성되어 지하자원도 풍부하다. 북서부는 넓은 용암대지로 풍화토양은 목화 재배에 적당하다.

3) 지형(해안·섬)

인도의 두드러진 대지형, 북부고산지와 인도 대평원 지역을 제외하면 인도대륙의 해안과 도서()가 남는다. 인도반도의 서안(西)은 일반적으로 넓은 평야가 없다. 다만 북단에 카티아와르반도가 돌출하여 쿠치만()과 캄베이만()을 만들고, 후자의 연안에 구자라트 평야를 전개시킨다. 동안()에는 고다바리·크리슈나·코베리 등의 모든 하천유역에 넓은 평야가 발달되었다.

인도대륙의 동남부에는 다른 해안보다 넓은 해안평원이 나타나는데 일명 타밀평원이라고 하며, 이 곳에는 인도의 역사시대 초기에 유입해온 드라비다족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도서)도 동과 서로 나눌 수 있다. 아민디비섬(래카다이브섬)·미니코이 등 아라비아해의 도서는 오랜 지괴()가 침강할 때의 잔존물이 핵()이 되어 훗날 산호초가 형성된 것이다. 벵골만의 안다만제도·니코바르제도는 해발 750m 높이로 융기한 제3기층의 습곡축()으로 형성되어 있다.

4) 토양

인도의 토양은 대부분이 라테라이트(laterite)화가 되어 있지만 충적토, 적색토, 포트졸토 등 다음과 같이 6개의 토양군으로 분류된다.

첫번째로 충적토양은 대하천의 퇴적작용으로 점토와 이토()로 이루어진 최적층인데 힌두스탄 평원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두번째는 용암토양으로 흑토 또는 면화토라고 불린다. 식물의 영양분이 풍부하고 보수력이 좋으며 목화 재배에 적당하다. 용암성 흑색점토와 용암성 흑색 롬층으로 나누어진다. 전자에는 실트가 65∼80%, 후자에는 30∼40% 포함되어 있다.
 
세번째는 고대암석의 풍화토양을 들 수 있다. 용암토양을 제외한 반도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다공질()이기 때문에 보수력은 적다. 적색롬토양 ·적색사질토양 ·라테라이트토양으로 나누어진다. 적색롬토양은 흙덩이가 많은 구조로, 부서지기 쉽고 영양분이 적다. 적색사질토양은 삼림의 생장을 억제하지만 한발에 견디는 작물에는 적당하다. 라테라이트토양화강암 가수분해에 의해서 전형적으로 발달하였고 건조되면 암석처럼 굳어진다.
 
네번째는 산지토양으로 주로 히말라야 산지토양이며, 한랭습윤한 겨울과 온난한 여름이 있는 삼림지대의 포졸 토양과 기타의 산지토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섯번째로는 인도의 건조지역에 분포하는 토양으로 사질의 사막토가 있다. 인도 북서부의 건조·반건조한, 풍화로 발달된 토양으로 사질과 역질이 주성분이며, 식물 영양분이 적다. 모래의 함량은 동부에서 46%, 서부에서는 95%에 달한다. 
 
마지막으로 해안지역에는 해성토양이 있는데, 조류조석에 의한 형성된 것으로 해안평야의 충적토양과 혼재되어 나타난다.

5) 기후

인도는 위도로 볼 때 기후가 아열대에서 온대에 위치하지만, 히말라야산맥이 장벽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열대몬순(계절풍)기후를 나타낸다. 몬순(계절풍)은 태양이 북반구로 북상하고, 또한 남반구로 남하함에 따라 겨울과 여름의 두 계절이 나타나고, 남서와 북동의 바람이 교대하는 것으로서 인도양을 항해하던 아라비아인이 명명한 것이라 전해진다.

인도의 계절은 계절풍의 변화를 바탕으로 3월에서 5월에 이르는 건조혹서기와 6월에서 10월 상순에 걸친 습윤고온기, 그리고 10월에서 2월에 이르는 건조한랭기 등의 삼계로 되어 있다. 최고기온은 하지와 우계 직전에 나타난다. 해안 가까이 있는 캘커타에서는 낮에도 그늘의 기온이 40℃를 넘는 경우가 가끔 있으며, 갠지스강 중류지역에서는 43℃ 정도로 오르는 것은 보통이다. 밤에도 실내는 더우므로 사람들은 마당이나 길 가에서 노숙을 많이 한다.
 
남부 인도는 원래 상하의 지방이나, 북부 인도의 겨울은 기온이 내려가 한국의 초가을과 같으며 하늘은 맑게 개어 순례의 계절이 된다.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월 하순부터 시작되는 건기는 겨울이 되며, 인도 북부에서는 곳에 따라 영하로 내려가고 강수량이 적고 건조한 것이 특색이다. 특히 가장 추운 1월에는 육지에서 바다로 바람이 불어 건조하면서도 청명하다. 
 
3월부터는 남서계절풍이 불기시작하는 고온기가 시작하여 기온이 급상승하고 강우가 없으며 상대습도는 급감하고 열풍이 불 때도 있다. 5월 말에는 인도 북서부에 저기압이 형성되고, 6월 중순에 걸쳐 인도양에서 온 습한 구름에 의해 만들어진 많은 강우를 동반하는 여름의 몬순이 시작된다. 우기가 끝나는 10월에는 각종 축제가 열리기 시작한다.

인도는 전체적으로 건조한 지역에 속하여 강수량이 적어 물이 부족한 곳이 많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논농사가 어렵지만 대하천 주변지역에는 물이 풍부하여 벼농사 재배지역이 형성되었다. 강수량의 변동과 우기 시작시기 등은 인도 농업의 풍흉을 좌우한다. 인도 북동부 메갈라야주체라푼지는 연강수량 1만mm가 넘는 세계 제1의 다우지역이다.
 
여름의 몬순이 인도 각지 연강수량의 대부분을 내리게 한다. 4,000mm 이상 되는 곳은 아삼지방과 서고츠 산맥 서쪽 사면이며, 2,000mm 이상은 벵골 평야이고, 갠지스강 중류에서는 1,000mm, 델리 부근에서는 600mm로 감소한다. 라자스탄에서는 200mm 이하로 되어 타르 사막을 이룬다. 다만 마드라스 부근과 같은 반도 남동부는 벵골만을 건너오는 겨울몬순이 비를 가져와 1,000mm 이상이 된다.

6) 동물

인도큰들소

인도의 동물은 약 7만 6000여 종이 기록되어 있으며, 별로 알려지지 않은 무척추동물과 많이 알려진 척추동물로 나뉜다. 어류는 1,650종에 이르고 뱀 종류도 400종이나 되며, 이 중에서 코브라 등의 11종은 독사이다. 조류는 풍부하여 세계의 14%에 달하고, 공작은 옛날부터 애육()되었으며, 지금은 국조()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포유동물()로는 긴팔원숭이·곰·여우·표범·코끼리·사자·호랑이 등 46종이 있다. 그러나 삼림의 파괴와 수백 년에 이르는 자유수렵의 결과 치타 등 몇 종은 멸종되었으며, 현재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47개의 보호구역과 23㎢에서 1,550㎢에 이르는 국립공원이 설치되었고, 사자는 인도의 국민수()로 지정되어 있다.

7) 식물

인도의 식물은 전국적으로 약 3만 종에 이르는데 열대 기원의 식물로부터 극 기원에 이르기까지, 사막선인장에서 열대의 정글에 가까운 상록수림까지 다양하다. 미얀마·중국 종()과 유사하고, 오스트레일리아·동아프리카 등 환인도양() 지역과도 어느 정도 친근성을 가진다.

그러나 삼림면적은 국토 총면적의 17%에 지나지 않고, 그 지역적 분포도 넓지 못하다. 안다만제도·니코바르제도에서는 도서의 약 80%, 방글라데시 동부의 트리푸라주()에서는 63%가 삼림지대이나 인도대평원에는 거의 삼림이 없다. 그러나 각주()의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삼림자원은 경제적으로 중요하다.

식생구는 습윤열대림·건조열대림·열대림·온대림으로 나뉜다. 인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삼림인 습윤열대림에 속하는 열대낙엽수림은 사과나무·티크·자단·백단 등 경제성이 큰 수종이며, 그 밖에 삼각주의 해안, 하구부()에는 조석()의 영향으로 맹그로브의 삼림이 발달해 있다. 건조열대림은 연강수량 1,000mm 이하 지역에 분포하는데 건조상록수림·건조낙엽수림·열대유자관목림 등으로 임상이 바뀌며 아라발리산맥의 서부에는 불모의 사막이 전개된다.

열대림으로는 떡갈나무·밤나무·너도밤나무·소나무 등이 있고 히말라야 산기슭에는 야생의 올리브가 무성하다. 온대림으로는 목련·월계수·석남 등의 고유종을 비롯하여 유칼리·키나 등의 외래종도 무성하나 대체로 활엽상록수와 침엽수의 혼합림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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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민

목욕하는 힌두교 순례자들

현재의 인도인은 인종적으로는 북방의 아리안족()과 남방의 드라비다족()이 주류를 이룬다. 아리안족은 인도게르만족의 분파로서, 키가 크고 피부는 백색에 가까우며 코가 높고 눈이 깊숙한 용모로 유럽인에 가깝다. 드라비다족은 키가 중간 정도이며 피부색은 검은 편이고 비교적 편평한 용모가 많다.
드라비다족은 옛날에는 인도 전역에 분포했으나, BC 1500년경부터 아리안족이 이란고원 방면에서 인더스강 유역과 갠지스강 유역으로 거주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인도반도 남부로 남하하게 되었다. 북방에 남아 있던 드라비다족은 아리안족과 혼혈되거나, 그 사회에 동화되었다. 산간 지역에는 드라비다족보다 더 오래 전부터 거주한 오스트로아시아계의 종족과 티베트미얀마계의 종족이 인종의 섬을 만들며 산재한다.

1) 언어

1951년의 조사에 의하면 인도에는 방언까지 합하여 700가지에 달하는 언어가 사용되었다고 하나, 인구의 약 90%는 아리안계의 9개 방언, 드라비다계의 4개 방언을 쓰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리안계의 중심은 전 인구의 45%가 사용하는 힌디어로서, 헌법은 인도의 장래 표준어로 채택하였다. 힌디어는 델리 부근에서 우타르프라데시주()를 중심으로 사용된다. 갠지스강 중류부의 비하르주에서는 비하르어가, 하류부의 서벵골주에서는 벵골어가 사용된다.

벵골어는 전인구의 8%가 사용하나, 방글라데시에서도 사용하기 때문에 그 인구를 합하면 힌디어에 버금가는 세력을 갖는다. 시성() 타고르도 벵골인이며 벵골인은 벵골어를 가장 진화된 언어라고 주장한다. 그 밖에 아삼주의 아삼어(약 2%), 오리사주의 오리아어(4%)가 있으며,인도 북서부에는 펀자브주()의 펀자브어(3%), 라자스탄주()의 라자스탄어, 구자라트주()의 구자라트어(5%), 마하라슈트라주()의 마라티어(9%) 등이 쓰이는데 모두 아리안족의 고어()인 산스크리트에서 분화된 방언이다. 드라비다계()도 안드라프라데시주 방면의 텔루구어(8%), 마드라스 부근 타밀나두주()의 타밀어(7%), 카르나타카주의 카나다어(4%), 케랄라주의 말라얄람어(4%) 등으로 나누어진다.

아리안어계와 드라비다어계는 문법이 다른 이종()의 언어로, 각각의 방언은 그들의 문자를 갖는다. 인도의 주()는 각 지방의 언어에 의해 구획된 언어주()이며, 각 지방은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자랑으로 삼는다. 힌디어의 표준어화에 대하여 남부의 드라비다어계 여러 주에서 격렬한 반대가 있어, 현재도 영어가 공용어로서 병용되며 지식계급의 공통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밖에 헌법에서 공인된 주 언어가 17개이다.  

2) 종교

힌두교 제례모습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갖는 많은 지역이 하나의 인도문화권을 구성하고, 광대한 국가로 통일된 것은 주로 종교의 힘에 의한 것이다. 인도 민중의 대다수는 힌두교를 믿는다. 힌두교는 원래 아리안족의 원시종교인 브라만교에서 발달하였다. 사제계급()으로서 브라만이 많은 자연신()을 숭배하였으나 그 후 점차 철학적으로 정리되었다.

BC 6∼BC 5세기 도시국가시대에 이르러 많은 사상이 생겨나서 불타에 의한 불교, 마하비라에 의한 자이나교 등이 브라만교에 대한 종교개혁으로서 전도되었다. 이들 신흥종교는 한때 인도를 풍미하였고, 불교는 아시아 각지에 퍼져 지금에 이른다. 그러나 그 후 이슬람교가 들어와서 불교를 배격하여 오래된 브라만교는 민간의 신앙과 결합하여 대중들이 믿게 되었다. 브라만은 여러 신 중에서 비슈누를 최고신으로 하는 비슈누파(), 시바를 신으로 하는 시바파, 둘가 여신을 신앙하는 샤리티파 등 다수의 종파로 나뉘어 있으나 이것들을 총괄하여 힌두교라고 한다.

이로 인하여 한편으로 깊은 철학을 가진 힌두교는 종교생활에서도 난행()과 고행(), 엄격한 계율을 갖는 것에서부터 성()의 숭배로 신()에의 접근을 모색하려는 것 등 여러 갈래이며, 인도 민중의 모든 계층을 포괄한다. 힌두교도는 국민의 82.6%를 차지하며 전국의 여러 곳에 성지와 사원이 있고, 농한기에는 마을 도사()를 따라 순례길에 나선다. 인종적·언어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힌두교도로 귀일()함으로써, 인도의 정신적 풍토가 조성된다고 할 수 있다. 외래의 종교 중에는 이란에서 인도로 이주한 사람들이 신봉하는 배화교()가 있다. 인도반도 아라비아해 연안의 남단에 가까운 코친에는 유대교도의 거주구()가 있다.

외래 종교 중에서는 이슬람교가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지는데, 10세기경부터 이슬람교도군()이 델리 지방을 점거,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고 무력으로 힌두교도를 개종시켰으나 하층의 카스트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로 응했다. 이슬람교는 힌두교와는 달리 알라의 신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가 알라의 예언자인 일신교()로서 다신교인 힌두교처럼 이교()에 대한 관용성이 없다. 그래서 때때로 양 교도간에 충돌이 일어났는데, 인도가 독립할 무렵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였다.

인도 쪽에 남아 있는 이슬람교도는 인구조사 결과 전인구의 11%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조사에 응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20%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도의 헌법에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대통령도 이슬람교도 중에서 선임되지만, 지방에서는 때때로 양 교도간에 유혈참사를 일으킨다.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시크교는 이슬람교의 박해에 대항해서 일어난 힌두교의 개혁파로서, 무장단결하고 순교()정신이 강하다. 신도는 전인구의 약 2%이다. 2002년 2월에는 이슬람교도들이 힌두교도들을 태우고 가던 열차를 습격, 방화함으로써 최악의 종교분쟁이 일어났으며, 이후 서로간의 공격으로 인하여 4월 말까지 850여 명이 사망하였다.  

유럽인의 내항() 이래 로마 카톨릭교, 프로테스탄트가 전도되었으며, 영국 식민지시대에 각 도시에 그리스도교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스도교도는 전인구의 약 2.4% 정도이다. 인도전통의 자이나교도는 약 0.5%, 불교도는 약 0.7%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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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

1) 인더스문명의 성립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하는 인더스 문명과 함께 시작하였다.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은 드라비다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사이에  발전하였던 문명으로, 이집트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조금 늦게 발달하였다. 인더스 문명은 단순히 인더스강 주변지역이 아니라 가하하크라 강 유역까지 포함하는 폭과 길이가 모두 1,000km가 넘는 매우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서 발달하였다.

유적지들은 지점마다 멀리 산재해 있는데 하라파와 모헨조다로(Mohenzodaro)간의 거리만 600km정도 떨어져 있다.  또한 모헨조다로의 동쪽 40km의 코트디지 유적과 델리의 서쪽 270km의 칼리방간 유적이 발굴되어, 인더스문명 직전의 문화가 밝혀졌다. 칼리방간과 암리의 유적은 하라파(Harappa)보다 앞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트디지 유적에서는 인더스문명에 속하는 4층의 밑에 12층에 이르는 코트디지문화의 층이 있으며, 견고한 요새를 가진 작은 도시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발굴된 어느 유적에서도 철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인더스 문명은 청동기 문명으로 보고 있다.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모헨조다로나 하라파의 유적은 BC 2500년경의 것으로 정교한 도시계획을 가진 도시문명의 흔적을 보여준다. 양자는 모두 동일한 도시계획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첫째 시가지에서 약간 높은 곳에 성채가 있으며 이곳에는 주로 제단과 공공시설이 있고 낮은 쪽에 일반시민들의 주거지역이 집중되어 있는 구조를 보이고, 둘째 도로는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조성되어 있고, 셋째는 매우 정교한 배수시설을 가지고 있으며, 넷째 집들은 견고한 구운벽돌을 재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 도시에는 지배자를 위한 시설이나 신관들이 사용하는 소욕장과 일반시민들이 사용하는 대욕장이 나눠져 있는 목욕시설이 발달해 있고 곡물창고, 상, 하수도 시설등의 공공시설를 가지고 있다. 주택 외에 상점·식당도 있었으나, 하라파나 모헨조다로에는 신전이나 왕궁으로 볼 수 있는 대건축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라파의 대규모 식량창고와 모헨조다로의 대형 목욕탕은 당시의 도시의 규모가 상당하였고,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인더스 문명의 유물인 채도, 금은 세공품, 구리, 청동제식기 등의 분포로 미루어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멀리 나일강 유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가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인장처럼 생긴 유물은 동일한 모양의 유물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도 많이 발견되거 이를 뒷밭침하고 있으며, 인장에 등장하는 악어, 코뿔소, 물소 등의 동물로 미루어 보아 오늘날보다는 습하고 숲이 우거진 환경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들이 목화를 옷감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최초의 목화재배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신앙생활을 위한 성채가 마련되어 있고, 여러동물이 그려져 있어 자연물 숭배의 흔적도 보인다. 그런데 시바신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삼면신(여신상)이 발견되었으며, 수많은 동물에 둘러싸여 요가의 자세를 취하는 수행자의 모습이 인장이나 돌 위에 새겨놓은 그림에 나타나는 바, 오늘날의 인더스인의 신앙인 힌두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런데,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던 인더스 문명은 그 갑작스런 멸망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몰락의 원인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게 추측된다. 천재지변인 홍수로 인해 강이 범람하면서 붕괴하였을 것이라는 설, 고생물학적 연구에 따르면 과도한 경작과 삼림파괴로 인한 환경의 변화로 붕괴하였다는 설, 이후에 이 지역에 들어온 아리아족과 같은 외적의 침입을 받아 멸당했다는 설등이 있다.

2) 아리아인의 침입과 베다시대

인더스 문명의 멸망 이후에는 이주해 온 아리아인들에 의해 베다시대(Vedic Age)가 열린다. 카스피해와 남 러시아 늪지대에 살던 유목민 아리아족은 민족적 이동을 거듭하면서 BC 1,500년 경에 인도 북부의 펀잡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당시 이미 인도에 살고 있던 드라비다 족과 같은 선주민들과 충돌하게 된다.

전차와 철기문화를 가진 아리아족이 인도의 북서부를 차지하면서 베다시대가 시작되고 청동기 문화를 가진 선주민들은 인도남부로 밀려났다. BC1,500년에서 BC600년 까지의 베다시대는 인더스와 펀잡지역에서 델리까지 확장해나가는 BC 1,000년까지의 전기베다시대와, 동진을 계속하여 선주민의 문화와 융합이 일어나는 후기베다시대로 구분된다. 베다는 종교문헌으로 주요 부분인 신에 대한 찬가와 기도문 뿐만 아니라 철학, 문학, 사회생활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기베다 시대(BC1,500~1,000)에는 소의 숭배사상은 나타나지 않으나 인도 사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인 카스트제도가 등장하는 시기이다. 가부장적 사회였던 아리아인들의 사회는 정복민과 피정복민의 구분이 생기고, 종교의식을 관장하는 사제집단인 브라만,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계급과 군인집단인 크샤트리아, 농- 공-상업을 담당하는 바이샤 계급으로 계급적 분화가 일어나면서 카스트제도의 초기모습이 나타난다.  

후기베다시대(BC1,000~600) 는 인도의 철학적 관심, 종교적 열망 등과 관련된 사상적 기저가 제시되어 있는 우파니샤드(Upanisad)로 대표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윤회, 업(Karma), 법(Dharma), 브라만(우주의 본체), 아트만(인간의 영혼)과 같이 이후의 인도종교철학에서의 주요한 개념들이 형성되며,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카스트제도가 확립되었다. 특히 우파니샤드는 종교적 제의중심의 종교보다 인간이 자아성찰에 의해 해탈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의 종교철학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BC 6~5세기에 불교의 출현으로 꽃을 피우게 되었는데, 브라만의 제의중심적 전통 또는 종교와 사상의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베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크샤트리아들에 의해 선호되었다. 베다시대에는 유목민이었던 아리아인들이 농업적으로 정착하였고, 후기베다시대부터는 여러개의 소왕국들이 나타났고 전쟁이 빈번하였다.

3) 도시국가에서 왕권국가로

BC 6~5세기경 베다시대의 말기가 되면 브라만(Brahman)중심의 부족사회에 변화가 나타난다.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의 확고했던 지배력이 약화되는 반면, 전쟁을 통해 힘을 축적한  크사트리야(Kshatriya)심의 제식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왕권을 바탕으로 하는 왕권국가들을 만든다. 또한 활발한 상업활동을 통해 사회, 경제, 사상적 변화가 일어난다.

한편으로 붓다가 태어난 카필라와 같은 부족중심의 도시국가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마가다(Maghada), 코살라(Kosala)와 같은 군주가 중심이 된 강력한 왕권국가들이 등장하고, 다른 한편으로 브라만 중심의 베다에 근원을 둔 종교나 사상에서 벗어나 불교와 같은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여 사문이라 부르는 신흥 사상가 내지 신흥 종교집단들이 등장하게 된다. 마가다 국의 수도였던 라자그리하(Rajagrha)와 같은 왕권국가의 도시들은 다양한 사상과 수행자들의 집합처가 되고 새로운 철학과 사상이 풍요롭게 발전하여 인도의 사상적 황금기가 된다.

BC 5세기 경이 되면 마가다나 코살라와 같은 왕권국가들은 정복전쟁을 통하여 인도 전체의 통일국가를 지향하게 된다. 갠지즈평원의 높은 농업적 생산력, 갠지즈 강의 편리한 수운을 이용한 교역을 통해 급성장한 마가다국은 빔비사라(Bimbisara) 왕 때부터 팽창정책을 폈고 유럽의 그리스인들의 기록에도 강력한 국가로 등장한다.

그러나 4세기 중엽 이후 난다(Nanda) 왕조에 의해 멸망되며, BC 327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침입을 받아 인더스 유역의 작은 왕국들이 복속된다. BC 322년 알렉산더가 죽자 혼란한 틈을 타서 찬드라 굽타 모리야는 북서 인도를 지배하던 알렉산더의 군대를 격파하여 펀잡지방을 차지하고, 난다를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 마우리야 왕조를 창설하였다.

4) 마우리아왕조와 불교

BC 4세기 난다왕의 부하장수였던 찬드라 굽타(Chandragupta)는 반란을 일으켜 왕을 살해하고 난다왕조(Nanda dynasty)를 멸망시킴으로써 마우리아 왕조(BC 317∼BC 180)를 탄생시킨다. 북서 인도를 지배하던 알렉산더의 군대를 격파하여 펀잡지방을 차지하고, 난다(Nanda)왕조를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 왕조가 탄생한다.


[마우리아왕조의 영역]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북서 인도를 평정, 동부 영역을 지배하던 셀레우코스가 남하하였으나 찬드라굽타의 대군에 눌려, 500마리의 코끼리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전그리스령을 넘겨주고 돌아갔다.

찬드라굽타는 북쪽으로는 히말라야산맥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벵갈만에 이르고 서쪽으는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인더스강과 갠지스 강을 잇는 북인도 대부분을 차지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각 부처는 정비된 행정체제를 갖추었고 보명 60만, 기병 3만, 코끼리 9천마리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아소카 왕(BC 269~232) 때는 수많은 정복전쟁을 벌여 마침내 남인도의 칼링가 왕국을 정복함으로써 타밀지방을 제외한 전 인도에 걸친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을 이루었다. 이 시기가 마우리아 왕조의 최전성기였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완성되었다.

그는 왕위계승과 정복전쟁에서 수많은 살생을 한 것에 대해 회의를 느껴 불교에 귀의하면서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고 불교의 해외전파에도 앞장섰다. 그가 인도의 이상적인 군주인 전륜성왕()으로 불리울만큼 불교의 법에 의한 정치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것은, 희생물에 의해 제사를 중시하는 브라만 세력들을 약화시키고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가 전파한 불교는 동남아시아의 소승불교의 기원이 되었으며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5) 쿠샨왕조와 힌두교의 성립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찬드라굽타(마우리아왕조 창시자)의 손자인 아쇼카(Ashoka)왕은 최초도 남인도 일부를 제외하고 불교를 인도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실행한 왕으로 불교의 해외 전파에 큰 공헌을 한 왕이다. 그러나 아쇼카왕 사후 50년이 지나 마우리야 왕조는 BC 185년에 브라만 계급 출신의 푸쉬야미트라(Pushamitra)에 의해 멸망된다.

이후 인도는 BC 2세기에서 AD 3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여러 왕조가 난립하는 혼란기를 겪는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는 아쇼카 사후에 널리 퍼진 불교가 융성함과 동시에 브라만 중심의 브라만교가 민중적 요소를 흡수하면서 인도 특유의 힌두교가 성립되고, 쿠샨왕조에 의해 동서문화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 동서 문화융합이 일어났다.

북인도의 서북지역은 박트리아(Bactria), 샤카(Sakya)가 연속하여 지배하였으며 이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인 쿠샨 족이 박트리아를 정복한 뒤 인도의 간다라 지역을 지배하였다. 쿠샨왕조의 카드페세스 2세 때는 인더스 강하구에서 힌두쿠쉬 산맥 지역까지 차지함으로써 홍해와 지중해 세계, 인도 세계가 연결되는 거대한 해상 및 육상 통상로를 확보하여 동서간의 교류가 촉진되었다.

쿠샨왕조의 왕들은 인도, 이란, 중국, 로마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호칭들을 사용하였는데 이들의 포용적 성격을 잘 보여주며, 동서문화의 융합의 결과로써 그리스 로마 계통의 미술과 인도의 불교미술이 혼합된  간다라 미술이 나타난다. 이 시기 불교는 왕족과 상공업자의 지원을 받아 대승불교로 발전해 나갔으며, 카스트제도에 따른 4개 계급의 종교적 의무와 생활규범들을 규정한 <마누법전>이 브라만에 의해 편집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브라만이 중심이 되는 브라만교의 전유물이었던 베다성전에서 볼 수 없었던 시바신이나 비슈누신이 나타나고, 갠지스 강이나 히말라야 산의 신격화가 일어나고, 서사시로 된 대중적인 종교문헌인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가 등장하면서, 민간신앙과의 결합을 통하여 힌두교가 성립되었다.

6) 힌두문화의 굽타왕조

쿠샨(Kushan)왕조가 쇠퇴하면서 북동 인도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기자, AD 3세기 중엽 찬드라 굽타 1세는 오늘날의 비하르 주에 해당하는 마가다 지역에서 굽타왕조를 건설하였다. 찬드라 굽타 1세는 13개의 군소왕국을 굴복시켜 북인도의 광범위한 지역을 병합하였는데, 정복지역의 왕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여 통치하였다. 그의 아들 사무드라 굽타도 갠지스 강 상류와 그 이남지역까지 정복하였으며, 3대왕인 찬드라 굽타 2세는 정략혼인을 통하여 동맹체제를 만들면서 영토확장을 계속하여 전인도를 거의 통일, 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특히 서인도의 항구들을 차지함으로써 지중해 무역까지 참여하는 등 유럽지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굽타(Gupta)시대에는 도시가 번창하고 부유한 시민들의 생활은 사치스럽고 우아했다. 굽타시대(320년부터 550년경까지)는 힌두의 르레상스 시대라고 할 만큼 힌두교와 힌두문화가 매우 중시되었다. 굽타시대의 여러 왕들과 지방 영주들은 대부분 힌두교의 신인 비쉬뉴의 신자였지만, 북인도에서는 주로 비슈누 신을 숭배하고 남인도에서는 주로 시바 신을 숭배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적인 고유문화를 찾는 복고적 기운이 나타나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가운데 힌두교, 불교 등의 종교와 관련된 작품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문학작품들도 등장하였으며 이들 작품은 브라만 계층에서만 사용되던 산스크리트어로 만들어졌다. 역사적 사실과 전설을 담은 <푸르나>가 등장하고 희곡, 시, 전기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나타났으며, 힌두사원과 비슈누 신을 비롯한 힌두교 신들의 부조와 이들을 모시는 건축물들이 점차로 증가하고 규모가 커졌다.

한편 굽타왕조 시대(320~550)에는 힌두문화가 다양한 외래문화와 섞이면서 문학, 예술, 과학, 종교 등 다방면의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인도적인 민족적 색체가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힌두문화는 국내에 그치지 않고 해외의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 등지에까지 급속하게 전파되었다. 3세기 이후 로마와의 무역이 점차 쇠퇴하면서 인도상인들은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에 힘을 쏟았으며 중국까지 항해하였다.

이 시기에 불교는 힌두교의 발전으로 대비되었지만 인도전역에 걸쳐서 불상, 사원들이 지어졌는데 아잔타 석굴과 같은 걸작을 남겼다. 그리고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배우는 날란다 사원이나 무역으로 번창하여 불교, 힌두교, 기타 종교의 사원이 즐비하였던 왈라비와 같은 곳은 종교관련 학술연구의 중심이었다. 당시의 왕들은 힌두교의 신을 숭배하면서도 불교사원에 대한 적극적인 희사도 이루어져 불교와 힌두교는 공존하였다.

5세기 경에는 훈족의 침입으로 굽타왕조는 쇠퇴의 길을 걸어 6세기 경에는 마가다 지방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북인도는  7~8세기에는 갠지스 강 유역의 마우카리 왕조, 델리 북쪽의 푸수파부티 왕조, 수라스트라 지방의 마이트라카 왕조, 데칸북부의 와타타카 왕조, 동인도와 벵갈을 지배한 팔라 왕조 등 여러 지방 왕조가 등장하였다.

남인도의 경우도 통일왕조를 이룬 팔라와 왕조를 비롯하여 찰루끼야 왕조, 라슈쿠라쿠타 왕조 등 여러 왕조가 차례로 번성하였다. 특히 남인도의 타밀지방은 독자적인 힌두문화를 발전시켰다. 이 지방의 팔라와 왕조는 시바신을 숭배하는 힌두교와 산스크리트 어를 권장하였는데 해안에 인접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동남아시아와의 교류를 통하여 동남아시아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7) 이슬람왕조의 도래

이슬람 세력의 급속한 성장으로 이슬람교의 전파가 인도에 다다른 것은 7세기 무렵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슬람의 침입과 이슬람왕조의 성립은 11세기 이후의 일이다. 아프가니스탄에 근거를 둔 가즈나 왕조(Ghaznavid dynasty)가 펀잡을 비롯한 북인도와 아라비아해 연안까지 원정을 하여 약탈과 파괴를 하더니, 가즈니 왕조를 멸망시킨 터어키계의 구르 왕조(Ghur dynasty)가 다시 펀잡과 갠지즈 평원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구르왕조의 시하붓딘은 인도 깊숙히 침입하여 1192년에 힌두 연합군을 패배시킴으로써 인도의 무슬림 지배가 시작되었다. 10세기말 작은 도시로 만들어진 델리는 무굴제국이 세워지고 300년(1526~1857) 동안 인도 무슬림 왕국의 수도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 초의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노예왕조(1206~1298)가 탄생하였는데, 인도를 정복한 구르왕조의 시하붓딘의 부하였던 아이박은 시하붓딘이 세상을 떠난 후, 왕조의 분열로 독자적인 왕조를 세운 것이다. 그가 노예출신이어서 노예왕조라고도 하고 델리의 술탄왕조(1206~1298)라고도 하였으며 통치방식은 이슬람 전제군주제였다.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여 이슬람 사원을 세우고 힌두인들에게는 인두세를 매겼다 . 이 시기에는 서아시아(중동)적 요소가 유입되어 종교, 예술 등에 영향을 주었는데, 힌두교를 완전히 변화시키지는 못하였지만 힌두교인을 무슬림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후에는 노예왕조의 혼란을 틈타 왕권경쟁에서 승리한 킬지파가 세운 킬지왕조(1290-1320)를 비롯하여, 투크라크 왕조(1320~1423), 세여드 왕조(1414~1451), 로디왕조(1451~1526)으로 여러 이슬람 왕조가 이어졌다. 한편 북부인도의 이러한 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남부인도에는 위자야나가라 왕조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이슬람 세력이 남인도로 팽창하는 것을 막았다.

8) 이슬람 무굴제국

후마윤 묘

1526년에 몽고제국 티무르의 5대손이며 아프가니스탄의 토호세력이었던 바부르(무굴제국의 1대 황제:1482.2.15 ~ 1530.12.26) 는 대포와 같은 화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전쟁기법으로 인도를 침략하여 아그라를 수도로 하고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제국의 3대손 악바르(1542.10.15 ~ 1605) 는 종전의 이슬람 지배자와 다르게 힌두에게 종교적 관용과 화해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힌두인들에게 부과된 인두세를 철폐하였다. 왕위에 오를 때는 남인도의 위자야나가라왕조나 북인도의 무슬림 왕국에 비해 열세였지만, 자신이 힌도교를 믿는 라지푸트 제왕조의 공주와 결혼하는 일련의 개혁정치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군사력을 바탕으로 데칸고원의 남쪽을 제외한 인도대륙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악바르의 사후 왕위를 계승한 4대 황제 자항기르(Jahangir)는 악바르의 유업을 계승하여 영토확장 정책을 계속하였다. 그는 페르시아 귀족출신의 누르자한(Nur Jahan)과 결혼함으로써 페르시아 풍의 예술과 문화가 성행하여 인도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1608년에 영국상인들에게 수라트(Surat)에 동인도 회사의 설립을 허락함으로써 영국세력의 인도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자항기르의 아들인 샤자한(Shah Ja han: 1592.1.5 ~ 1666.1.22)은 반란을 거듭하다 결국 왕위에 올라 영토확장에 착수하여 악바르 시대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타지마할을 비롯하여 델리성, 자마 마스지도, 아그라 성(Agra fort)등 무갈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건설하였다.

샤자한의 아들인 아우랑제브(1618.11.3~1707.3.3)는 아버지를 유폐하고 왕위에 오른 뒤 힌두사원을 파괴하고 힌두교도들에게 인두세를 부활시키는 등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영토확장 정책을 폈다. 그러나 과도한 영토확장정책과 이슬람화 정책은 국력을 소진시키고 힌두교도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무굴제국에 반대하고 힌두전통이 강한 데칸의 마하슈트라 지역의 마라타 족이 쉬와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엄청난 희생을 유발시켜 국가재정의 고갈을 가져왔다. 이러한 무굴제국에 저항하는 세력은 라지푸트족, 마라타족, 그리고 시크교도 들까지 늘어나고 왕권경쟁으로 내분을 겪으면서 무굴제국은 아우랑제브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9) 인도 전역의 식민지화

1526년 성립된 무굴제국은 인도 최초의 민족항쟁이었던 세포이의 항쟁(1857~1859)을 계기로 1857년 멸망하고 인도 전역이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편입된다. 이미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시대에 영국은 1600년 동인도회사를 처음으로 열고 차례로 무역공관을 세운뒤 1686년 무력으로 후글리를 점령하여 인도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으나 큰 패배를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영국은 사과 사절단을 보내어 다시 무역허가를 받아 콜카타(캘커타), 뭄바이(봄베이) 등에 거점을 두고 인도에 진출하였으며, 무굴제국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인도의 식민지화 계획을 조금씩 추진해 나갔다.

프랑스 또한 1664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인도에 진출하고 있었다. 1742년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에서 전쟁을 벌이자 인도에 있던 양국의 동인도회사 간에도 충돌이 발생하여 몇 차례의 전쟁이 발생했다. 영국은 벵갈을 차지하기 위해 1757년  플랏시 전투에서 프랑스에 승리함으로써 프랑스 세력을 인도에서 몰아내었다.

18세기에는 무굴제국의 쇠퇴로 많은 토후 세력들이 등장하여 여러 곳에서 인도전체의 지배를 노리는 영국과 충돌하였지만, 영국의 분열정책으로 대부분 영국세력에 병합되었다. 19세기 중반 영국은 인도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며 영국우월주의 아래에 완전한 식민지 작업에 착수하였지만 영국의 지배가 노골화될 수록 반영항쟁은 격해졌다. 1857년의 벵갈에서 시작하여 전 인도로 번진 세포이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종교적 자유의 보장과 함께 비인격적인 식민지 정책은 부분적으로 완화되었다. 이때부터 동인도회사의 통치권은 회수되었고 영국정부에 의한 인도의 직접통치가 이루어졌다.  

10) 인도의 독립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서양사상에 자극을 받은 인도의 지식인들은 각종 종교적, 사회적 개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885년에 창립된 인도국민회의는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초기에는 영국정부에 건의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1905년 커즌(George Nathaniel Curzon, 1859.1.11 ~ 1925.3.20) 총독의 반동정책으로 민족주의 운동은 급진적으로 변해갔다. 그가 민족의식이 높고 반영운동의 중심지인 벵갈지방의 분할안을 내놓자, 인도인들은 영국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하는 등 반영운동을 전개하였다.

20년 이상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던 인도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1869.10.2~1948.1.30)는 1920년대 초 인도국가의회당(Indian National Congerss Party)을 영국 식민정치에 대항하는 대중적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면서 더욱 강경한 식민정책을 실시하였다. 강력한 인도인 억압정책을 담은 로울타트법이 1919년에 책정되자, 간디는 불복종운동과 전국파업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시민 불복종 운동의 실패후 국민회의의 전면에서 퇴진한 간디는 영국군의 인도철수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연방제를 골격으로 하는 인도의 독립과 권력이양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반영운동을 주도하던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간의 합의가 실패로 끝나고 대규모 무력충돌이 일어나자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리독립하였다. 즉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의 반목이 영국으로 하여금 인도를 분열하게 하여 이슬람교인이 대부분인 동서파키스탄이 탄생하였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영국연방 중에서 주권국가가 되었고 초대총리는 네루 Pandit Jawaharlal Nehru(1889.11.14 ~ 1964.5.27 ) 가 되었다. 인도는 1950년 1월 26일 새로운 헌법을 공포한 후에 영국연방 안에서 공화국이 되었다. 독립 이후 간디와 네루의 의회당은 네루의 영향력 아래 인도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는 네루의 딸(인디라 간디)과 손자(라지브 간디)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인도를 통치하였다. 총리인 네루는 그가 사망한 1964년까지 인도를 통치하였다. 이후 샤스트리(Shastri)에게 권력이 넘어갔다가 1966년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이양되었다.

11) 인디라 간디~소냐 간디

네루의 무남독녀 인디라 간디 (1917. 11.19 ~ 1984.10.31)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인도를 통치하였다. 1975년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에 둘러싸이게 된 간디 여사는 국가의 위기 상황을 선포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그녀의 정책을 국민들이 따라주기 바라며 1977년 선거를 실시하였으나 데자이(Desai)가 이끄는 5개 야당의 혼합인 자나타당 (Janata Party)이 승리하였다.

1979년 데자이 정부는 붕괴하였다. 이후 싱(Singh)이 임시정부를 형성하였으나 권력은 다시 1980년 1월 간디 여사에게 이양되었다. 1984년 10월 간디 여사는 암살되었으며 그녀의 아들 라지브 간디가 국민의회당에 의해 그녀의 자리를 계승받았다. 그의 정부는 1989년 부패혐의에 의해 붕괴되었으며 셰크하르(Shekhar)에게 정권이 이양되었다.

1989년 야당의 연합인 자나타달(Janata Dal)은 라지브 간디 (1944.8.20 ~ 1991.5.21) 의 국민의회당에 승리를 거두었다. 1991년 5월27일 라지브 간디는 타밀나두 지역에서 선거운동을 하다가 암살당하였다. 이는 스리랑카의 타밀 극렬주의자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다시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한 국민의회당이 213석의 의석을 차지하였으며 라오(Rao)의 지도력 아래 다시 권력을 잡았다.

라우는 30년 만에 간디나 네루 가계의 출신이 아닌 첫번째 국민의회당 출신 총리가 되었으며 5년의 임기를 모두 채웠다. 이 시기는 인도가 경제적으로 점차 자유화되고 개혁하는 과정이었으며 세계로 인도의 경제를 개방하는 시기였다. 인도의 국내정치는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는데 각 계급, 종교, 민족 단체들의 지역적, 정치적인 소규모 정당들이 난립하였다.

라우가 이끄는 정부의 임기 마지막해인 1996년 봄 몇 가지 정치적 부패 스캔들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역사상 국민회의당에 의해 치러진 최악의 선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연정체제가 성립되었으나 1998년의 선거를 통하여 국민회의당은 참패하면서 BJP(Bharatiyu Jauapa Party) 중심의 연정이 이루어져 바지파이(Vajpayee) 총리가 등장하였다.

1998년의 선거에서 참패한 국민회의당은 피살된 인디라 간디의 며느리이며 라지브 간디 총리의 아내인 소냐 간디를 당수로 내세웠다.  2004년 5월의 선거에서 국민회의당 중심의 연합정당이 승리를 거두면서 소냐 간디(1946.12.9. ~) 는 재차 당수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연정을 이룬 만모한 싱(Manmohan Singh) 을 총리로 지명하며 인도의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할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인도는 싱 총리의 주도하에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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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치

인디라 간디 동상

인도 출범의 기본이 된 법률은 1947년 8월 15일에 발효된 인도독립법이다. 이 법은 새로운 인도의 탄생, 입법부로서의 헌법제정과 의회기능을 확정하였고, 중앙과 주 쌍방의 상호관계와 각각의 기능에 관해서는 1935년의 법을 적용한다는 것, 인도군()에 대한 영국의 통수권의 소멸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1947년 8월 15일(독립기념일)을 기해서 행정권은 J.네루를 총리로 하는 인도 국민회의파() 내각에 이양되고, 입법권은 헌법제정회의에 위임되었다.

사법권은 1949년 9월 신헌법의 공포와 함께 인도 최고재판소에 이관되었다. 임기 5년의 행정수반인 대통령은 의회가 간접선거로 선출하는 의례적인 국가원수이다. 국회는 양원제하원을 인민원(), 상원을 왕후원()이라 한다. 하원은 보통선거에 의하고, 상원은 각 주의회의 의원에 의한 간접선거와 대통령의 지명에 의한다. 의회의 신임을 얻은 총리는 대통령에 의해서 임명되나 정치적 실권은 총리에게 있다. 각 주의회는 단원() 혹은 양원제()이고, 지방의회에서 신임을 얻은 각 주 총리는 지사가 임명한다. 지방자치제도는 도시에서는 선출된 시장()과 그의 소속하에 시의회의 위원회와, 정부파견의 이사관()으로 운영된다.
 
 인도 독립의 핵이 된 국민회의파는 독립 후에도 절대 다수의 지지를 얻어, 역대 총리·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네루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INC: Indian National Congress)는 민족주의 정당으로써 국민의 광범위한 지리를 받았는데 그것은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까지 민주적으로 잘 운영되었기때문이었다. 1966년 초대 총리인 J.네루가 급서하자, 그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총리에 취임하였고, 그 이래 11년 동안 권좌에 있으면서 인도사회주의의 추진을 도모했다. 그러나 당과 정부를 더욱 권위적으로 이끌면서 정치적으로 고립을 가져왔고 자신과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사당화하는 문제점을 노출되었다. 이로 인해 1977년 3월의 총선거에서 인민당()이 압승하여 새 총리로 인민당의 데사이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정치불안으로 붕괴되고 1980년 선거에서 간디가 재집권했으나 1984년 시크교도인 경호원에게 피살, 장남인 라지브 간디가 총리가 되었다.

라지브는 1984년 12월 조기총선을 실시하여 압승했으나 1989년 11월 실시된 총선거에서 참패하여 사임하고 야당연합세력인 민족전선의 라나타 달당의 싱 총재가 1989년 12월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종교분쟁과 계급갈등으로 인해 국민전선이 붕괴되어 1990년 11월 싱의 뒤를 이어 찬드라 세카르가 새 총리가 되었다. 이처럼 INC가 쇠퇴하는 틈을 타서 1980년대 중반부터 종교를 이용해 정치적 기반을 확장해가는 정당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힌두민족주의 정당인 인도국민당(BJP: Bharatiyu Jauapa Party)으로 1996년 총선거에서 정권을 잡기도 하였으나 13일만에 무너졌다. 1997년 대선에서 부통령 키르체릴 라만 나라야난이 선거인단 투표에서 제10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97년 11월 연정에 참여중이던 "드라비다진보전선(DMK)"이 1991년 전총리겸 국민회의당 당수 라지브 간디의 암살과 관련된 반란단체를 지원했다는 보고서가 나오자 국민회의당은 DMK가 포함된 연립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연정 지지를 철회하였다.

1998년 2월 선거에서 BJP 다시 182석의 국회의석을 차지하였으나 다수의석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1998년 3월 20일 대통령은 BJP가 이끄는 연합정부의 바지파이(Vajpayee)를 총리로 취임시켰다. 5월 12일과 13일 총리 바지파이는 몇차례의 지하핵실험을 실시하였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인도의 1994년의 핵확산금지조약에 따라 경제재제를 가하였다.
 
그런데 1998년의 선거에서 참패한 국민회의당은 소냐간디를 만장일치로 선출하였다.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네루가문의 일원이 되었으며 시어머니인 인디라 간디가 피살되고 이후 총리직을 승계한 남편 라지브마저 폭탄테러로 숨진 아픈 가족사를 지닌 인물이었다.  1998년 11월의 지방선거에서 국민회의당은 압승을 거두었고, 2004년 5월에는 국민회의당이 구성한 연합정당이 선거에 승리하였다.
 
선거에서 승리한 후 다시 만장일치로 당수로 재선출된 소냐는 기독교인 최초, 두번째의 여성 총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경제학자 출신의 만모한 싱(Manmohan Singh)을 총리로 지명하였다. 해외투자자들은 좌파 정당과의 연정을 통해 소냐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당이 집권에 성공하자 경제개혁을 늦출 것이라고 예측해지만, 재무장관을 지낸 경력을 지닌 싱(Manmohan Singh)의 등장으로 인도의 정치는 안정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인도의 경제성장과 개혁에 더 초점을 두게 되었다.   
 
 
 

1) 외교 ·군사


독립 후의 인도 외교는 총리 네루의 이상주의와 함께 평화외교를 축으로 전개되었다. 그 특징은 첫째 국제정치의 무대에 자주적으로 직면한 점이다. 1949년 12월에는 같은 해 10월에 수립된 중공을 신속하게 승인하였다. 둘째는 대국과의 군사동맹을 거부한 점이다. 예를 들면, SEATO(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동남아시아 조약기구)를 예리하게 비판하고는 이를 거부했다. 셋째는 반식민주의를 분명히 한 점이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서의 네루의 역할이 이에 집약되어 있다. 이러한 네루의 외교방침은 일반적으로 비동맹정책()이라 불리며, 국제평화의 유지와 추진에 하나의 역사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1959년 이래 중국·인도국경분쟁에서 인도 외교의 위신은 급속히 저하되었다. 1962년 10월에는 동부 인도의 맥마흔라인에서 인도와 중국 양국의 대규모적인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이것을 정점으로 하여 인도 외교는 종래의 비동맹노선에서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중공에 대립하는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1971년 3월 총리 간디는 미국 대통령 닉슨의 방중 발표에 의해 미국의 대 중공정책의 전환이 분명해지고, 중공과의 대립으로 미국의 지지를 얻기 어렵게 되자 소련과 일종의 안보조약이라고 할 수 있는 ‘평화·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고, 한때 소련으로 기울었다.

인도는 이와 같은 소련의 지지를 배경으로, 같은 해 12월 파키스탄이 동파키스탄의 자치확대 요구를 둘러싸고 내전상태에 들어간 것을 틈타 파키스탄과 개전하여, 다카를 점령하고 동파키스탄을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으로 독립시켰다. 인도·파키스탄 관계는 1971년의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후 인도 우위의 상태로 안정기에 들어갔고, 1976년에는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대사의 교환 및 무역·교통이 재개되었다. 인도와 중공관계도 1973년 이후 개선되었고, 1976년 4월에 대사 교환에 합의했다. 1978년 3월에는 중국의 대외우호협회 회장인 왕빙난[]이 인도를 방문하고 국경분쟁을 교섭으로 해결할 것에 합의했다.

1988년 12월에 총리 라지브가 파키스탄을 방문하여 핵시설불공격 협정에 조인하였고, 1991년 1월에는 중국의 총리 리펑이 인도를 방문했다. 1992년 6월에는 총리 라오가 일본을 방문했고, 7월에는 인도 국방장관이 중국을 방문하여 국경문제의 평화적 해결뿐 아니라 경제·문화 교류의 확대에 합의했다. 양국사이의 관계는 이후 급속하게 가까워지면서 2003년 6월에는 바지파이 인도 총리가 중국을 방문하여 티베트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였으며,  같은해 11월에는 중국과 인도 합동 해군훈련이 실시되었다. 2005년에는 중국의 윈자바오 총리가 인도를 전격 방문하면서 양국간 무역을 2010년까지 300억달러 하는 협상을 맺었다.

인도 외교의 기본노선은 비동맹주의와 균형주의이다. 미국과 영국의 군사원조는 1971년의 제3차 인도·파키스탄전쟁 이후 중지되었고, 주로 소련 원조로 장비의 근대화를 도모했다. 1974년 5월, 평화 이용의 지하핵실험을 하였고, 세계에서 6번째의 핵보유국이 되었다. 1990년 들어 정부의 이슬람교도 시위 무력진압과 파키스탄 이슬람교도들의 월경행진, 파키스탄의 핵무기개발설 등으로 인해 이 지역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97년 1월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부탄네팔과 경제협력을 도모하기 위한 소규모의 지역포럼을 결성하기로 협의하였다. 1998년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였고 동년 5월 3차례의 지하핵실험에 이어 사정거리 50㎞의 단거리미사일"트리슐"의 실험발사에 성공하였으며, 현재 30∼35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병역은 지원병제이며, 2001년 기준 병력은 정규군 127만 3000명, 중앙경찰군 12만 명, 국경경비대 12만 명이다. 국방예산은 156억 달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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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

푸슈카르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일찍 농업이 발달한 지역의 하나로, 지금도 70%에 가까운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촌에는 고대의 촌락공동체적 유제()가 아직도 남아 있고, 자급자족의 소농경영()이 많다. 영국의 식민지경영으로 토지소유제가 상당히 변용()되었고, 화폐경제의 침투, 가내공업의 쇠퇴, 황마(목화 등 상품작물의 경작 등으로 점차 변모하고 있으나 아직도 아시아적 영세농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이 식민지 경영의 과정에서 인도 현지에 황마와 면(綿) 등의 방직업을 비롯한 각종 경공업을 일으켰다. 또 병기산업·차량공업 등 중화학공업도 제1·2차 세계대전에 걸쳐 인도 민족자본의 참가와 대두를 허용하였다. 인도의 독립에 즈음해서 이들 민족자본은 영국계 기업을 인계받아 급성장한 것도 많다. 최근 구매력면에서 세계 다섯번째의 경제대국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소프트웨어를 수출하는 국가이다.

1) 농업


인도는 전국토 면적의 약 절반이 경지로 이용되며 삼림면적은 1/5을 차지한다. 우기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데, 변동하는 우기 시기나 강수량에 의해 농업생산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인도의 농업은 몬순의 도박이라 하기도 한다. 국토가 넓고 강우의 시기가 일정치 않기 때문에 작물의 파종기와 수확기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남서몬순이 시작되는 5월에서 7월에 걸쳐 파종을 하고 9∼11월에 수확하는 쌀·사탕수수·땅콩·목화·옥수수 등 여름작물과 10∼11월에 파종해서 2∼5월에 수확하는 밀·콩·유지작물·감자 등 겨울작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특히 쌀은 주요한 주식인데 우기에 수확하는 바리히와 건기에 수확하는 쌀리 등 많은 종류의 벼의 품종들이 일찍부터 재배되어왔으며 이로 인해 벼재배의 기원지로 추정되어 왔다. 그리고 몬순을 이용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소가 더욱 중요시되고 쇠고기를 먹지 않은 관습을 가지게 되었다.
 
독립 이후 다모다르 하곡개발계획(DVC)과 같은 대규모적인 관개개발과, 1960년대 중반 이후 우물물을 이용한 관개의 보급으로, 관개면적은 1950년대의 2배로 늘어나 총 작부면적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관개면적 중 용수로와 우물에 의한 것이 각각 40%이고, 나머지는 저수지 등에 의한 것이다. 특히 북서부 인도의 펀자브주·하리아나주에서는 용수로와 모터가 부착된 우물에 의한 관개가 발달하였다. 인도의 경지면적은 세계3위에 이르나 생산성이 낮고 농가의 약 70%가 경지면적 2ha 미만의 영세농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밀·참깨·목화·사탕수수·옥수수 등이며 이들의 생산량은 계속 증가되어 왔다. 특히 쌀·밀·땅콩·황마·사탕수수·잎담배 등은 세계 생산량 순위에서 1~5위를 차지하는 것들이다. 차·담배·생고무·카르다 몸(향료의 일종) 등의 플랜테이션 작물은 인도경제에서 중요한 수출품목이다. 현재는 식량자급이 거의 달성되었으며, 쌀과 밀을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쌀과 밀의 증산은 주로 펀자브주·하리아나주 및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녹색혁명’, 즉 개량품종의 도입과 비료주기에 의한 단위면적당 수확량의 비약적인 증대와 1965년 식량공사의 설립, 농산물가격위원회의 설치에 의한 쌀·밀을 중심으로 한 가격유지정책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농업생산성이 매우 낮았으나 녹색혁명의 중심지역은 선진국 수준으로 높아졌다. 대형 트랙터콤바인을 사용하는 대규모의 기업화된 농장경영이 다수 출현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 북동부와 데칸고원 북동부의 정글에는 미개 민족들이 거주하여 원시적인 화전농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앗삼주와 데칸고원 남서부 등지에서는 영국인이 개발한 차·커피 등의 작물들이 플란테이션 형태로 대규모 재배된다. 1952년 이래 정부가 추진한 촌락사회 개발계획은 농업생산의 증대, 농촌의 보건·위생·주택·교육의 개선, 소규모 촌락공업의 진흥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약 60만 개의 촌락에서 실시되었다. 한편 제4차계획기간 이후, 녹색혁명에서 제외된 농업 노동자나 영세민, 또는 후진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소농민 개발기구, 한계농민·농업노동자계획, 한발상습지역계획, 부족민 개발계획, 산악지역 개발계획 등도 실시되었다. 인구의 50% 이상이 기본적 생활을 충족하지 못하는 빈곤농가이며, 2003년 현재 노동인구의 6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2005년 현재 농업이 차지하는 GDP 비중은 약 19.9%이다.

2) 광공업·에너지산업


인도의 철광·망간 매장량은 세계적이며, 그 밖에 크롬광, 석탄 형석, 마그네사이트, 내화점토(), 보크사이트, 운모() 등의 풍부한 광상()이 있다. 석탄은 철도의 발달과 함께 생산이 급속히 신장되었고, 철강업·화력발전용으로 공급이 증가하였다. 철광석은 55% 이상 고품위의 것이 많다.

인도는 에너지 수요의 65%를 석탄 등의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으며, 부족한 에너지는 주로 중동산 석유로 충당한다. 인도의 에너지 산업은 공공부분에 속하는데, 원유와 천연가스의 개발 및 생산을 국영회사가 담당하고 있다. 석탄의 추정 매장량은 1995년 현재 1920억t에 달하며 실제 채탄 가능한 석탄량은 780억t 이다.

채굴 가능한 원유의 추정매장량은 약 61억 배럴에 달하며, 봄베이(뭄바이) 앞바다에서 주로 생산된다. 천연가스는 주로 서부 해안의 탑타와 트리푸라에서 산출되는데 그 매장량은 8,580㎥에 이른다. 1999년 현재 인도의 연간 전력생산능력은 4545억 6100만kWh에 이르는데, 총발전능력 중 수력발전이 17.77%, 핵발전 2.52%, 화력발전 79.41%, 기타 0.3%를 차지한다. 그러나 인도 정부는 환경 및 경제적 이유에서 수력과 화력의 비율을 장기적으로 40:60으로 유지할 계획이다.

공업은 독립 당시는 목화·황마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재공업에 치우쳤으나 1950년대 후반에는 철강·알루미늄·기계, 1960년대 이후에는 화학·석유화학·전기기계 등의 생산재·중간재() 생산부문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인도는 독립 이후 농업부문의 근대화와 더불어 국가 주도의 기간산업 및 중공업() 육성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현재 대부분의 중공업은 국영기업이나 공기업의 형태로 운영되는데 비해, 소비재부문은 민간부문으로 운영되고 있다. 제조업부문에서 비교적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는 부문은 제지·인쇄업과 화학, 비철금속, 전기·전자부문 등이다. 화학공업비철금속산업이 원유 및 광물의 생산 증대에 힘입어 비교적 고속성장을 나타내고 있으며, 전기·전자부문도 정부의 기술개발투자가 가시적 성과를 보임으로써 빠른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인도의 공업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는 에너지 자원의 부족, 특히 전력의 부족과 수송체계의 미발달, 설비 노후화로 인한 가동률 저하 등을 지적할 수 있다.
 

3) 무역

인도는 독립 전까지는 원료수출, 제품수입의 전형적인 식민지형 무역이었으나 독립 후의 계속된 5개년계획으로 공업화가 진행되어 원료수출국에서 점차로 제품수출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제2차 5개년계획기간 이후, 공업개발을 위한 기계설비의 수입격증과 식량수입 증가 등으로 무역수지의 적자폭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이후 공업투자의 저하, 식량생산의 증대로 수입이 감소되고 적자폭이 축소되었으며, 1972∼1973년에는 흑자를 기록하였는데 석유위기를 맞아 다시 큰 적자폭으로 전환되었다. 매년 무역 규모가 늘고 있지만 자급자족형 경제구조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전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미하며, 1980년대 중반 이후 세계교역량 비중이 크게 낮아졌다. 주요 수출품은 보석,의료,면사·면포,해산물,금속제품 등이었다. 주요 수입품은 원면·석유·화학비료 등의 기초생필품과 철강·비철금속 등을 비롯한 가공수출용 중간재나 자본재가 주종을 이룬다. 곡물의 수입규모는 해에 따라 변동폭이 매우 크다.
 
1991년 경제개혁이후 2000년대부터 인도는 연평균 6%대의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중국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높은 성장율을 보였다. 경제개혁이후에도 인도의 무역품목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수출에서는 엔지니어링제품, 섬유제품, 귀금속의 순으로 비중이 높고, 수입에서는 석유 및 윤활유, 자본재, 전자제품의 순으로 비중이 높다. 그런데 인도의 주요핵심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IT산업이나 자동차 산업의 경우 여전히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경제개혁 이후 무역자유화정책으로 전통적인 인도의 최대 무역상대국이었던 러시아의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고, 미국, 홍콩, 영국, 아랍에미리트, 벨기에, 스위스, 독일, 일본  등 새로운 파트너가 등장하였으며 미국의 비중이 가장 높다. 인도의 수출과 수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무역규모가 커지고 있다.

 

4) 교통 ·통신

부다가야 도로


인도에서 철도가 최초로 부설된 것은 1853년으로 꽤 오랜 역사를 가진다. 또한 1.676m의 광궤()로부터 0.6m의 협궤()에 이르는 4종류의 궤도폭이 있는데 총연장의 50%가 광궤, 40%가 중궤(:궤폭 1m)이다. 1960년대 이후 전화()가 진척되고 증기기관차에서 전기기관차 또는 디젤기관차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화차 부족에 의한 석탄수송의 지연이 공업생산의 중요한 장애가 되고 있다. 1998년 현재 철도 총연장은 6만 2915km이고 1만 2307km가 전철화되었으며, 인도전체 화물물동량의 60%를 담당한다.  

도로수송에서는 아직도 우마차() 등이 이용되고 있으나 화물자동차수송량이 급속히 늘어 전육상 수송량의 약 35%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인도의 도로는 세계에서 세번째로 넓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는데, 1996년 현재 332만km의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포장률은 45.6%이다. 여객운송의 약 60%는 도로교통을 이용한다. 2000년에 개통한 뭄바이-푸네간 고속도로를 비롯하여 델리-노이다 간의 유료고속도로가 있다. 인도의 남과 북, 동과 서를 연결하는 총연장 7,300km에 이르는 고속도로가 구간별로 개통되고 있다.  

인도의 주요 무역항으로는 캘커타·마드라스·비샤카파트남·코친·봄베이(뭄바이) 등이 있는데, 특히 뭄바이는 외국 무역량의 25%를 취급하고 있다. 인도에는 3개의 국영선박회사와 수개의 회사가 315척(GRT 1000톤 이상)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다. 2000년 이들의 선박 총선복량(船)은 662만t(GRT)에 달하는데, 이 중 1/3은 비료수출과 철강수입에 사용되는 벌크선이며 25%는 유조선이다. 컨테이너 선박 수는 극히 적은 편이다.

주요 대형조선소가 봄베이·비샤카파트남·캘커타 등지에 있으며 모두 국유이다. 항공사업은 국내선과 인접국노선은 인도국내항공이, 그 밖의 국제선은 인도항공이 독점하고 있는데, 다같이 국영기업이다.

국제공항은 봄베이(산타쿠르즈) ·캘커타(덤덤) ·델리(인디라간디) ·마드라스(메남바캄) 등지에 개설되어 있다. 우편·전신전화는 철도에 다음가는 국영사업으로 전화회선수는 1994년 현재 800만 회선이다. 주로 도시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방송사업은 1927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국영 AlR(All India Radio)가 독점하여 라디오는 AM 153, FM 91, 단파 62개 채널이 있고, 힌디어·영어 방송 외에 각 주()의 언어로 방송하고 있다. 텔레비전은 1959년 9월부터 델리에서 시험방영을 시작했으나 일반화된 것은 1965년 8월부터이다.

5) 경제성장

1991년 인도는 전통적인 네루식의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버리고 경제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이후 인도의 산업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의 인도의 공업을 보면, 음식료와 섬유산업의 사업체 비중이 가장 높고, 고용 역시 가장 많다.  그리고 화학 및 화학제품, 정유제품 제조업이 높은 비중을 나타낸다.

따라서 노동집약적인 음식료와 섬유산업의 비중이 크며, 생산이나 부가가치의 면에서는 화학 및 화학제품과 제철 산업의 비중이 크다. 섬유산업은 인도의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풍부한 면화생산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잘전하였으며 수출의 20% 정도를 차지한다.

자동차산업은 낮은 자동차 보급율과 정부의 수출 장려 정책에 힘입어 급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철강산업은 풍부한 철광석을 기반으로 정부주도로 발전을 거듭해와 인도 중화확공업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철강산업은 현재까지 국제경쟁력이 높고 조강능력은 2004년 3,260만톤으로 세계 8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자산업은 최근 노키아(Nokia)나 삼성과 같은 다국적 기업의 진출로  정보통신 제품생산을 위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 인도의 경제성장의 성장동력은 세계적인 수준을 보유한 IT산업인데, 2000년경의 수출액이 40억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2005년경의 수출액은 239억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인도의 IT산업은 하드웨어기반이나 통신기반없이 소프트웨어 및 IT관련 서비스 부분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수준에까지 발전하였는데, 풍부한 전문인력을 바탕으로 벵갈루루를 중심으로 하여 인도포시스테크놀로지(India Forsyth Technology), 위프로(Wipro), 타타컨설턴시(Tatar Consultancy)와 같은 일류기업들이 활동하고, 아이비엠(IBM), 지이(GE), 시스코(Cisco)와 같은 다국적 글로벌기업들이 투자하고 진출하여 급성장을 하고 있다.

6) 4대 상권도시

인도의 지역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8대 도시를 들면 델리(Delhi), 뭄바이(Mumbai), 첸나이(Chennai), 콜카타(Kolkatta), 벵갈루루(Bangalore), 하이데라바드(Hyderabad), 푸네(Poone), 아마다바드(Ahmadabad)이다. 여기에서 지리적 구분에 의한 4대 도시라고 하면 북부경제권의 델리, 서부경제권의 뭄바이, 동부경제권의 콜카타, 남부 경제권의 첸나이(마드라스)를 든다.

북부상권의 중심도시인 델리는 역사적으로 이슬람교 무굴 제국의 수도(17~18세기)로서 기능했던 곳이다. 1912년 영국의 식민지 시절 수도를 콜카타에서 델리로 옮김으로써 급속히 발전하였다. 정치, 행정, 교육의 중심지로서 크게 올드델리와 뉴델리로 나누어진다. 뉴델리는 1912년 수도 이전과 같이 신도시 건설이 계획되어 1927년 완료되었고 1931년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서부상권의 중심도시인 뭄바이는 1995년 봄베이(Bombay)에서 개칭되었고, 경제수도의 역할을 하며 "인도의 뉴욕"으로 불리우는 인도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최대의 국제 무역항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증권거래소가 있고, 금융, 의약품, 화학산업이 발전하였다.인도 최대기업인 타타그룹(Tata group) 비롯하여 인도 최고기업들의 본사가 있으며 "볼리우드"가 자리잡아 영화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또한 푸네와 더불어 철강 및 자동자 산업 등의 중공업도 발달해 있다.

동부상권의 중심도시인 콜카타(2006년 기준 약 460만명)는 인도에서 델리(1,600만명), 뭄바이(1,280만명)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인도동북부의 관문이며 식민지 시절 수도이기도 하였지만 1911년 수도가 이전한 후 주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지는 않았다. 상공업도시이나 빈곤한 하층 시민의 수가 많고, 지리적으로 방글라데시와 국경이 가까와 난민 유입등의 문제가 있다.  

남인도의 관문인 첸나이는 인도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이며 타밀나두 주의 주도이면서, 뭄바이와 함께 인도영화산업의 중심지이자 교육의 중심지이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IT산업도시 방갈로르, 하이데라바드 등의  이 지역의 도시들과 더불어 남인도 경제발전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여름에 고온다습하지만 겨울에 쾌적하여 일년내내 산업활동이 가능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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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회

인디아게이트

현대 인도의 사상을 말할 때는 마하트마 간디의 간디주의를 우선 내세운다. 간디주의는 인도 국민회의파를 선두로 하는 인도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반식민주의와 인간평등사상을 2대 특징으로 하고 있다. 네루를 비롯한 회의파 지도자의 대부분은 간디주의에 규제되어 있었으며 오늘날의 인도에서도 간디주의를 자칭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볼 수 있다.

독립 후 인도의 교육·연구기관은 자연과학에서 사회과학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특히 자연과학분야에서는 뭄바이(봄베이)의 타타 기초과학연구소나 콜카타(캘커타)의 통계연구소의 활동이 내외의 주목을 끌고 있다. 더욱이 경제학·사회학·국제관계론연구 분야에서는 델리 경제학연구소·델리대학·인도국제문제연구소가 각각 인도의 학계를 리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 뉴델리는 학문연구의 메카를 구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인도 중세사 연구에 공헌하고 있는 델리 근교의 알리가르 무슬림대학도 유명하다. 최근에는 IT산업이 크게 발전하여 세계 주요 소프트웨어 회사들의 소프트웨어 개발센터가 설립되어 있으며 인도는 세계 제2위의 소프트웨어 수출국이 되었다.

1) 촌락 ·도시

버스

인도는 촌락의 국가로서 지방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인구의 74%(1991)가 촌락에서 거주한다. 최근에 교통의 발달에 의해서 촌락과 도시 간 교류가 용이해졌으나, 아직도 양자간에는 문화적·사회적으로 격차가 크고, 촌락민의 생활은 빈곤하며, 전기·수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이 많다. 읍 규모 이상의 도시만 하더라도 3,000개 이상에 달하며,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는 콜카타(캘커타뭄바이(봄베이)·델리·첸나이(마드라스)·벵갈루루·하이데라바드·아마다바드·칸푸르·푸나·나그푸르·러크나우·자이푸르 등 12개에 이른다.
 
최근에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인구의 이동이 많아지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도시와 도시간, 도시와 농촌간의 인구의 이동은 적은 편인데, 그것은 출생지에서 떠나는 일은 사회적 관습이나 언어의 차이로 인해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촌락사회를 유지해온 것은 토지소유관계였는데, 독립 후 1951년에서 1954년에 걸쳐 각주에서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지주적 토지 소유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고, 20만 이상의 소작농에 토지를 분배하여 소작농 보호에 힘썼다.
 
1959년 이후에는 토지소유 면적의 최고 한도를 정하고, 광대한 토지소유를 제한했다. 토지개혁은 촌락사회의 변혁을 의도한 것이 아니었으며 충분히 실시되지 못했기 때문에 촌락사회의 구조에는 큰 변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독립 후의 정치·경제상의 모든 변화는 촌락까지 미쳐 점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2) 카스트제도

아리안족이 인도로 이주하면서 선주() 민족을 정복하고 동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소위 카스트 제도라고 하는 특유한 사회제도가 발달했다. 바라문 또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의 4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각기의 카스트에 속하며 결혼·직업 등은 동일한 카스트 내에서 행해진다.

브라만교 이후의 힌두교 제사()는 브라만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행된다. 크샤트리아는 무사계급으로서 왕족이 여기에서 나왔다. 바이샤는 농목업()·상업·수공업과 기타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 서민계층으로, 후에 각 직종()에 따라 2차 카스트가 생겼다. 카스트의 최하위는 수드라로서 대부분 피정복민으로 구성되었고, 상위 카스트의 노비()로 종사한다.

4성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아우트 카스트라는 불가촉천민()이 생겨, 이들은 거주()·직업 등에 엄격한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간디는 이들을 신()의 자녀들이라는 뜻의 하리잔(Harijan)으로 부르고 상층 계급들에게 이들을 사랑과 관용으로 대할 것을 요청하였다. 동시대 사회운동가인 빔라오 암베드카르는 카스트 제도 폐지를 요구하는 등 좀 더 적극적으로 불가촉천민의 해방 운동을 위해 힘썼다. 독립 후 불가촉천민제는 폐지되었으며 차별 금지를 위한 특별법도 만들어졌다. 정부에서는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장학금제도를 설치하고, 의석의 일부를 할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도 개혁과 사회의식의 변화로 인해 카스트 제도는 점차 해체되어 가는 추세이나 내혼제를 비롯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대도시와는 달리 촌락에서는 차별이 쉽게 없어지지 않고 있다.

3) 교육제도

인도는 빈곤한 생활로 인해서 교육을 받지 못한 15세 이상 인구의 문맹률이 48%(여성은 62.3%, 1995)에 달한다. 이처럼 높은 문맹률은 인도공화국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서 정부는 교육에 힘쓰고 있다. 특히 초등교육의 보급을 위해서 촌락에서는 사원(), 기타 공공건물을 빌려서 공민학교를 개설하였다. 따라서 취학 연령의 아동 문맹률은 급속히 낮아지고 있다. 그러나 교육재정이 부족하여, 교원의 대우가 좋지 못하며 교육내용도 질이 낮다. 초등교육은 무료이나 일부 주에서만 의무교육으로 실시되고 있다. 도시는 촌락에 비해서 발전되어 있으며, 영국의 것을 모방한 특권계급의 학교도 있다.

학교제도는 주에 따라 다르나 초등학교(의무교육)이 4년, 중학교가 4년, 고등학교가 3년으로 되어 있다. 고교생에 대해서는 주교육위원회에서 대학입학자격의 검정시험을 시행하고, 그 성적에 따라서 각 대학의 입학이 승인된다. 독립 후 대학과 대학생이 급증하였고, 정부는 자연계 분야의 육성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급증하는 대학 졸업생에 비해 그들을 수용할 적당한 직장이 증가되지 않아 실업자를 많이 내고 있다.
 
 

4) 여성의 지위

콜카타 거리의 여성

인도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인도사회의 계급적 차별와 여성차별이 만연하는 것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며, 힌두의 가족제도하에서는 매우 낮다. 1961년에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여성의 결혼지참금은 여전히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성의 정조와 헌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힌두교 전통에 따라 남편을 따라 죽는 "사티"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과 여성에 대한 균등한 교육기회의 제공은 여전히 심각한 사회적 과제로 남아있다. 3천년이상 내려온 카스트 제도로 대표되는 힌두교도의 가족제도는 일부일처제이지만, 여성은 결혼 전에는 아버지로부터, 결혼 후에는 남편으로부터, 그리고 남편의 사후에는 아들로 부터 보호받아야 되며, 가사를 비롯한 여성의 의무가 매우 중요시 되었다. 힌두에서는 여성은 재산의 상속권이 없으며, 남자는 상속을 하고 제사를 이어가는 의무를 진다. 전통적으로 남존여비사상이 강한 인도에서는 여성은 남성들의 소유물에 불과하여, 과부들의 재혼은 금지되어 있고 부모님이 죽었을 때 시신조차 만질 수 없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여성의 지위는 법률에 의한 남녀평등의 원칙이 인정되고, 결혼은 여전히 카스트의 기준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다른 카스트간의 결혼도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현대의 인도의 여성은 가정에서 가사를 돌본다는 의식이 강하지만, 하층의 여자는 토목공사나 농업노동 등 남자에 못지않게 일을 한다. 인디라 간디 총리(인도 초대수상 네루의 무남독녀로 1984년 피살) , 소냐 간디(인디라 간디의 며느리로 정치인)를 비롯하여 많은 지식계급의 여성이 정치가·교원·공무원으로 일하고, 여성운동도 활발하다.

19세기 이후 사회개혁운동과 종교개혁운동이 진행되면서 여성의 사회참여와 권리신장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나타나 입법화되었지만 여전히 여성차별적 사회적 관행이 유지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최근에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치참여권을 강화하는 주장들이 나타났는데, 논란을 거친 결과 1998년 의회 의석의 3분의 1을 여성에게 할당하는 법안을 의회에 공식 상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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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화

1) 문학

인도는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등의 종교와 관련되어 철학 뿐 아니라 시, 희곡, 설화, 우화 등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풍부한 유산을 가지고 있다. 인도의 고전문학은 베다(veda)시대부터 발달해 왔으며, 배다시대 이후 BC 6세기경부터 불교와 자이나교와 같은 신흥종교가 등장하고 대중적인 힌두교가 출현하면서 문화에서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힌두교의 출현이후 나타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푸라나>와 같은 서사시에는 종교, 예술, 문학의 전반에 걸친 수많은 소재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힌두 문학을 비롯한 현대 인도의 모든 민족문학은 오늘날에도 외국에 소개되지 않은 민족의 보고()로 남아 있다.
 
그런데 산스크리트 설화문학은 <판짜탄트라>와 같은 우화집, 많은 부수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대설화> 등을 비롯하여 풍부한 내용을 자랑하는데, 세계의 모든 민담들이 인도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판짜탄트라>를 부분적으로 번안한 나라야나의 <히토파데샤>는 운문과 산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18세기 유럽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산스크리트어 학습교재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뛰어난 문학적 전통과 감수성은 시인 타고르(Tagore 1861.5.7 ~ 1941.8.7 ) 에게서 잘 나타난다. 그는 1913년에는 시집 ‘기탄잘리(Gitanjali)"로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세계 동포애와 문화교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 음악

인도의 음악은 부족의 음악, 민요, 종교찬가, 북인도의 힌두스탄, 남인도의 카르나타카 등이 포함되어 복잡하고 다양하다. 인도음악은 다양하나 멜로디와 리듬만을 주로 사용하며 서양의 화성이나 대위법은 없는데, 2천년이상동안 드라마, 무용과 혼합되어 종합예술의 한 부분으로 발전해왔다.

힌두스탄 음악이나 카르나타카 음악이 전통을 자랑하고 있으나 근대이후 유럽 음악의 기법으로 민족음악을 편곡하는 것에도 주력하고 있다. 구미의 악단에 새로운 선풍을 불러일으켰던 지휘자 주빈 메타는 조로아스터교도로 뭄바이 출신이다. 미술에서는 전통적인 수법에 새로운 유럽의 기법을 채택하여 뭄바이(봄베이)·콜카타(캘커타) 등의 대도시에서 개인전을 개최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3) 연극·영화

모든 문학과 예술의 형식에서 인도인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연극이다. 이 속에는 시, 음악, 무용 등 다양한 예술형식들과 결합되어 있어 종합예술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인도영화에서 잘 나타난다.

인도의 영화는 최고편수와 최대관객을 자랑한다. 주로 전세계 각국으로 이주한 인도인과 수많은 국내 인도인을 대상으로 하지만 인도영화 총관람객은 연 3억 6천명을 기록하는데 헐리우드 영화의 관람객 1억을 훨씬 웃도는 숫자이다. 2003년 미국이 한해에 600여개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인도는 1,100여개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인도 영화는 주로 과거 봄베이로 불리우던 뭄바이에서 주로 만들었기에 "볼리우드"영화라고 불리는데 전통적인 힌두신화와 사회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서 권선징악, 역경의 극복, 멜로드라마와 같은 주제들이 주로 다룬다. 인도 영화는 세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 영화는 1954년 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봄베이의 명감독 비말로이의 작품 《2에이커의 토지》를 필두로 1955년 쿠와자 아마드 아바스가 제작한 《문나》가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캘커타의 사타지트라이는 《대지의 노래》를 발표하여 벵골지방의 가난한 일가를 생생하게 묘사한 리얼리즘 수법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라지 카푸르는 인도 영화 역사를 함께한 배우 가문 카푸르가의 대부로 국제적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채플린과 비슷한 경향을 가진 희극배우로 《밤의 장막 속에서》가 1957년 체코의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이래 《방랑자》 등의 작품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동시에 감독으로서도 인도영화계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4) 건축

인도는 왕궁, 성곽, 요새와 같은 오래된 건축물도 있지만 고대 인도의 건축유물들은 대부분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그리고 회교에 속하는 종교관련 건축물이다. 인도의 건축물은 정교하고 화려한 조각, 세공, 회화와 같은 시각예술과 결합하여 유럽과는 다른 독특한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대지 위에 굳건히 자리잡은 커다른 탑과 균형잡힌 높이를 가지고 있으며 웃음짓는 신과 나신에 가까운 여인의 모습을 조각하여 세속적 감각적이면서도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초기 건축은 인더스문명이 남긴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의 건축물들로 주로 실용적인 벽돌건물로 지어져 심미적 가치가 없으며, 이후의 왕조시대에는 갠지스 평원의 풍부한 삼림을 이용하여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중요한 건축물은 남아있지 않다. 마우리아 왕조의 유물로서 아쇼카 왕의 석주나 궁전유적 등이 남아있는 정도이다. 후대에 유럽적인 문화요소가 유입되면서 많은 석조건축물들을 남기게 되었다.

인도건축물의 대표적인 것은 석존의 사리를 안치하는데 사용한 불탑(스투파)인데, 아쇼카왕은 인도전역에 스투파를 세웠다. 초기의 스투파는 커다란 반구체의 돔으로서 그 중앙에 작은 방이 있었으며, 이 방에 장식된 상자 속에 석존의 사리를 안치하였으나 점점 장식적인 형태로 발전하여 갔다. BC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르후타 탑, 장식이 고도로 발전된 AD 2세기경의 아마라와티 탑, 피라미드를 연상케하는 나란다의 탑 등 유명한 스투파들이 있다.

그리고 서부데칸을 비롯하여 인도의 많은 지역에서 발견된 인도건축물로써 석굴사원이 발달하였는데, 약 900년에 걸쳐 만들어진 아잔타석굴은 조각과 벽화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6세기 이해 수많은 힌두사원을 남겼는데, 초기 사원의 유형은 신상을 안치한 성소를 비롯하여 예배소, 성소위의 탑과 주위의 탑들이 직사각형으로 배열되는데 고대 그리스의 형태와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으나 후대에는 변형이 일어났다. 이슬람교도의 유입으로 힌두사원은 상당수 파괴되었으나 남인도를 중심으로 남아 있다. 당시 최대규모를 자랑하던 탄자부르의 쉬바사원을 비롯하여 많은 사원들이 있다.

힌두교의 사원들은 대우주의 축소판으로의 소우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등 독특한 기념물들을 남겼다. 인도건축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것은 무굴제국의 건축인데, 둥근돔, 가는 기둥, 아치형 출입구로 특징지워진다.

악바르시대부터 시작된 무굴건축은 파트푸르의 시끄리 시, 아그라성을 비롯하여 샤 자한 통치기의 타지마할, 샤자하나바드로 절정에 이른다. 타지마할은 양끝에 이슬람사원을 지닌 거대한 복합건물로 정교하게 상감을 한 대리석 건물로 세계적인 경이라고 격찬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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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과학기술


인도의 고대과학은 종교문헌인 <베다>에 근거, 제사와 관련하여 나타났으며, 베다의 보조학으로서 천문학수학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최초의 천문학문헌인 <쯔요티샤>에는 366일로 된 5년 주기에 속하는 태양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또한 세밀하게 분류된 시간개념,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는 인과론, 여러종류의 원자설이 발달하여 일찍부터 인도는 천문학과 순수수학뿐만아니라 기하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독보적인 발달의 과정을 보여왔다.
 
AD 400년 경에 만들어진 천문학 서적인 <수르야 싣단타>에는 천문학적 현상의 설명방식으로 그리스의 기하학적 체계에 삼각법의 사인개념을 사용하였으며, 최초의 힌두 대수학자였던 아르야밧타 1세(AD499)의 천문학서적인 <아르야밧티야>는  π의 수치, 평방근, 원의 성질, 사인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또한 브라흐마굽타의 <브라후마스푸타 싣단타>에서 기하학의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브하스카라 2세는 이차방정식의 해법에서 나아가 일반방정식의 해법을 유럽보다 500년이나 앞서서 제시하여 미지수분석에서도 뛰어난 발전을 보였다. 한편 0(zero) 개념의 발견이나, 바라문 수학자들의 분석적 탐구의 결과로 10진법의 발명 등이 아랍을 거쳐 유럽까지 전해져 세계의 과학발전에 공헌한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유명한 수학자인 마하비라차르야(Mahaviracharya)는 AD 850년에 0(zero)의 중대성을 언급했다. 
 
BC 15세기경 브라막굽타(Brahmagupta)는 펠리안(Pellian) 방정식을 푸는 최초의 수학자가 되었으며, 천재수학자인 스리니바스 라마누잔(1887~1920)이 분배함수를 포함하는 정수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인도인의 선천적인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20세기에도 인도의 과학적 전통을 잇는 위대한 과학자들을 배출하였는데, 라만효과(Raman effect)로 불리는 현상을 설명한 라만(C.V. Raman)과, 식물 및 동물의 의식연구와 보스-아인슈타인(Bose-Einstein) 통계학으로 유명한 한 보스(S.N. Bose)는 모두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천채물리학에서 연구되는 스펙트럼의 이해에 아주 중요한 열에 의한 이온화 이론인 사하(Saha) 이론의 창시자인 메그나드 사하, 호일(Hoyl)과 함께 우주의 진화이론에 크게 기여한 자얀트 나리카(Jayant Narlikar)등이 과학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사들이다.
 
2007년 기준 인도는 GNP의 0.83%를 과학기술 개발에 사용하고 있다. 현대 들어서는 이론적인 부분에 큰 발전을 이루어 원자 에너지, 우주 원격측정, 생명공학, 전자학, 정보통신, 해양학 등에서 다양한 분야 연구를 하고 있다. 인도는 위성 시스템을 디자인하고, 제조하며 발사시킬 수 있는 5개국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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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한관계

인도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한국과는 1962년 3월 총영사관계를 수립하였고, 1964년 4월 한·인무역협정과 1974년 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1973년 12월에 대사급 외교관계로 승격하였으며, 1977년 6월에 한·인 공동경제협의회를 창립하여, 제l차 합동회의를 가졌으며, 이후로 2년마다 개최되고 있다.

양국은 과학기술분야 협정(1976), 이중과세 회피 및 탈세방지를 위한 협정(1985), 공업표준화 및 품질관리에 관한 상호협력협약(1989), 항공협정(1992), 공동위원회 설립에 관한 협정(1996), 투자보장협정(1996), 투자촉진협력협정(2003)을 체결하였다.
 
1996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하여 양국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였고 2006년에는 압둘 칼람 인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기존 경제협력관계를 긴밀한 동반자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FTA와 비슷한 성격의 상품교역, 서비스교역, 투자, 경제협력 등 경제관계 전반에 걸친 협력체계인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미 199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이 인도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1996년 현대자동차, 1997년 LG전자, 2000년 삼성엔지니어링, 2003년 두산 중공업이 진출하는 등 2007년 기준 약 250개 업체가 진출하고 있다. 2003년 기준 한국 교민 13명, 체류자 4,961명이다.
 
2005년의 경우는 휴대전화, 자동차부품, 석유및 역청유, 평판압연제품 이 가장 높은 대인도 수출 품목이며, 경질석유, 면사, 아연광, 철광 등이 가장 많은 대인도 수입품목인데, 총수출액 45억 9800만달러이며 총수입액은 21억 1200만 달러로서 무역흑자를 24억 860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http://doopedia.co.kr/m/doopedia/master/master.do?MAS_IDX=101013000896121&_method=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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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화무십일홍 | 작성시간 18.07.23 기원전 268년 아소카 왕이 고대 인도의 '칼링가 왕국' 을 정벌하여, 그 시기(아소카왕의 13번 째 비문)에 수십만의 유민이 발생하고 십수만의 사람이 전쟁으로 사망하게 되어, 인도네시아를 거쳐 멕시코로 진출하게 되는데 그 종족은 루카와 카우족으로 멕시코에 '달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게 되는 종족으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필자가 연구한 것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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