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後期 德山地域 驪州李氏家의 學問的 性格
- 西洋學問에 대한 對應을 중심으로 -
- 곽 호 제 (충남대) -
<목 차>
1. 머리말
2. 驪州李氏의 家系와 德山
1) 驪州李氏의 家系
2) 驪州李氏와 德山
3. ≪物譜≫의 분석과 성격
1) ≪物譜≫ 작성의 동기
2) ≪物譜≫의 분석과 성격
4. 天主敎에 대한 대응
1) 星湖 李瀷의 西學觀
2) 李家煥의 天主敎 信奉
3) 李森煥의 斥邪論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후기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탈피하려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성리학적 질서에서 야기된 조선사회의 모순들이 兩亂 이후 확연하게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이 모순을 극복하려는 대응이 각 분야별로 강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외형적으로는 조선후기의 사회가 더욱 혼란하게 되는 요인으로 인식되지만, 내면적으로는 역사의 발전적 방향으로의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성리학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노력은 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영역을 형성하였고, 성호 이익은 이러한 점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星湖 李瀷이 갖는 조선후기의 사상사적 위치는 재론할 여지가 없지만, 이익의 성호학파의 宗匠으로서 갖는 학풍은 近畿南人이라 일컬어지는 문인들에 계승되어 각 분야에서 새로운 학문적 분야를 전개하게 된다. 그러한 배경에는 17세기 이후 서인과 남인 사이의 붕당적 갈등에서 남인들이 재야세력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그 결과 서울에서 가까운 기호지역에 정착한 남인들이 정치적 재기를 기다리거나 포기한 상태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內浦地域1)은 조선후기에서 근현대시대에 이르는 동안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던 곳이다. 그것은 내포지역이 水路를 이용해 수도에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지리적 접근성과, 非山非野의 지형이 갖는 경제적 효용성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德山地域2)은 內浦의 중심인 伽倻山 동쪽에 위치한 고을로서, 조선 초기부터 유력성씨들이 입향하여 세거해 온 곳이었다. 성호 이익이 속한 驪州李氏는 붕당이 극심했던 17세기 후반 덕산 장천리에 입향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거하고 있다.
茶山 丁若鏞은 성호 이익으로부터 학문을 계승한 여주이씨의 인물에 대하여 “貞山 李秉休는 易經과 三禮, 萬頃 李孟休는 經濟와 實用, 惠? 李用休는 文字學, 長川 이철환은 博物學, 木齋 李森煥은 禮學, 剡村 李九煥은 經濟實用之學을 계승하였다”고 하였다3).
본고에서는 덕산지역에 정착했던 여주이씨의 인물들이 남긴 학문적 성과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近代指向的 성향으로서 서양학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 또는 대응한 분야를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따라서 ≪物譜≫를 중심으로 하는 이철환의 박물학과, 천주교의 신앙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가환,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척사론을 전개한 이삼환의 활동을 추적하여 학문적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성호 이익의 실학적 학풍이 문중내에서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확인함으로써, 지금까지 연구가 축적되어온 성호학파의 학문적 성격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포지역의 실학적 학풍의 대명사로 일컬어진 秋史 金正喜의 실사구시적 학풍 이외에, 어떤 또 다른 성향의 학풍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2. 驪州李氏의 家系와 德山
(1) 驪州李氏의 家系
조선 후기 星湖 李瀷을 중심으로 실학적 학풍을 형성했던 驪州李氏는 이미 조선 전기부터 累代에 걸쳐 과거에 합격하였고 관직에 나아갔다. 성종 때 大司憲을 지낸 11대 李繼孫(1423~1484, 호:龜軒, 시호:敬憲公)4)을 비롯하여 이계손의 5대손 李尙毅(1560~1624)는 여흥부원군에 피봉되었고 좌찬성을 역임하였다5). 이상의의 아들 志完(1575~1617, 호:斗峯)은 資憲大夫에 올랐고, 志定(1588~1650)은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志安(1601~1657)은 成川都護府使를 지낸 이후 맏아들 夏鎭(1628~1682)의 貴顯으로 吏曹參判 藝文館提學 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 星湖 李瀷은 志安의 손자이고, 李家煥은 志安의 4대손이며, 淸潭 李重煥은 志定의 4대손이다.
세조 때 현관을 지낸 李繼孫 이후 여주이씨의 정계 진출은 이상의와 그의 아들 5형제가 활동하였던 17세기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7세기의 중앙 정계는 서인과 남인간에 붕당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당시 여주이씨는 남인의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李夏鎭이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어 이듬해에 유배지에서 죽으면서6) 여주이씨는 중앙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원래 이하진은 1666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이후 관직생활을 하면서 眉? 許穆과 함께 淸南의 입장에서 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西人과 許積을 중심으로 한 濁南에 대항하였다7). 1680년 경신환국으로 李夏鎭은 大司諫에서 진주목사로 좌천되었고8), 다시 老論에 대항하다가 운산으로 유배된 것이다.
후에 실학의 대가로 성장한 성호 이익은 부친의 유배지인 운산에서 태어나 두 살이 되던 이듬해에 부친을 여의고, 先塋이 있는 안산 첨성리로 돌아와 모친 안동권씨 슬하에서 자라면서 둘째 형 李潛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하진의 둘째 아들 李潛도 1675년 16세의 나이로 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부친 이하진이 죽은 이후 순탄치 않은 생활이 지속되었다. 숙종 말년 세자책봉을 둘러싸고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李潛은 후일에 景宗이 된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상소9)를 올린 것이 獄死로 전개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10).
이하진과 가까운 여주이씨 문중에서 志定의 후손 淸潭 李重煥과 志安의 손자 星湖 李瀷을 비롯하여 중앙의 정치무대보다는 실학과 문학에서 대가들이 나오게 된 것도 이에 연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11).
李夏鎭의 부친 李志安은 4형제를 두었다12). 4형제로부터 증손대에 이르기까지 後嗣가 없어 상호간에 養子로 후사를 삼는 경우가 많았다. 4형제 중에서 夏鎭이 다시 5형제를 두었고 殷鎭이 아들 1명을 두었을 뿐, 周鎭과 明鎭은 아들이 없어 하진의 아들 5형제(瀣, 潛, ?, 沈, 瀷) 중 ?와 沈으로 각각 後嗣를 삼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에는 하진의 아들 5형제 중 瀷만이 孟休13)를 아들로 두었을 뿐, 瀣와 潛이 後嗣가 없어 沈의 세 아들(廣休, 用休, 秉休) 중 廣休와 秉休로 後嗣를 삼았고, 또한 秉休도 廣休의 아들 森煥으로 後嗣를 삼게 되었다.
李夏鎭의 子姪들은 대개 40세를 전후하여 일찍 세상을 떴고, 李瀷만이 83세를 살았다. 따라서 이익은 그가 주로 거주하던 안산의 첨성리에 그의 族姪과 族孫을 데려다 놓고 양육과 교육을 전담해야만 했었다. 이익의 영향하에서 성장한 그의 족질과 족손들은 자연히 이익의 학풍을 계승할 수 있었다.
(2) 驪州李氏와 德山
숙종대에 李夏鎭이 유배지에서 죽고 이잠이 獄死한 이후, 여주이씨는 정계활동이 거의 중단된 채 생업과 학문에 전력하면서 재야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驪州李氏의 세거지는 크게 세 곳으로 확인되고 있다. 경기도 안산, 강원도 원주, 그리고 內浦의 德山 지역이다. 특히 많은 세대가 서울의 皇華坊(지금의 貞洞)과14)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안산지역에 거주하면서 중앙의 관직에 진출하였거나, 또는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에는 세거지로 내려와서 다시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의 정치무대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李夏鎭의 후손의 일부가 새로운 생활터전을 찾아 안산에서 덕산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들의 덕산지역 정착은 李夏鎭이 이미 덕산지역에 정착해 있던 龍仁李氏와15) 혼인하면서 계기가 되었다. 李夏鎭은 龍仁李氏 李後山16)의 딸과 安東權氏 權大後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이하진의 아들 5명 중 瀣와 潛은 용인이씨의 소생이고, ?, 沈 그리고 瀷은 안동권씨의 소생이다. 이들 중 덕산에 정착한 사람은 용인이씨의 소생인 瀣와 潛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李夏鎭의 아우로 楊根郡守를 지낸 李明鎭과 그의 자손들도 龍仁李氏 李甲俊의17) 사위가 되어 妻鄕인 덕산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와 비슷한 시기에 李瀣가 禮山縣監을 역임한 것도 여주이씨가 덕산지역에 거주하는 계기의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李夏鎭의 자손들은 德山 長川里18)에서 세거하면서19) 안산에 살고 있던 성호 이익에게 가서 학문을 익히게 되었고, 이들이 후일 성호 이익을 계승하여 실학적 학풍을 이루게 되었다.
3. ≪物譜≫의 분석과 실용성
(1) ≪物譜≫ 작성의 동기
星湖 李瀷은 그의 족질과 족손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미쳤음을 이미 언급한 바이고,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그의 영향은 族孫 이철환과 李載威에게 이어져 ≪物譜≫라고 이름지어진 어휘집을 짓게 된다.
李瀷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은 燕行使들에 의해 중국에서 수용된 서양문물과 천주교로 인해 비롯되었다. 이익은 이미 서양과학을 연구함에 “기계와 수학에 관한 법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더욱 정교하니 비록 聖人의 지혜를 가졌다 하더라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니 있다. 후대 사람이 그것을 계승하여 연구한다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더욱 정밀해질 것이다.”20)라는 연구 태도를 가지고, 그가 평소에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썼던 기록을 모은 것이 ≪星湖僿說≫에 수록되어 있다.
≪星湖僿說≫에는 3,057건의 기사를 天地門(221), 萬物門(326), 人事門(1,091), 經史門(1,041), 詩文門(378)의 5個門으로 大別하여 구분하였다. 그러나 ≪星湖僿說≫의 전체 기사 가운데 自然科學에 관련된 기사는 天地門과 萬物門에 547건이고, 그 중에서 西洋學問에 관련된 기사는 60건이다21).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이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을 볼 때, ≪星湖僿說≫에 나타난 李瀷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은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익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族孫이었던 李철煥(1722-1789, 자:吉甫, 호:例軒 또는 蕓圃)에게 이어졌고, 다시 이철환의 아들 李載威(1754-1826)에게까지 이어졌다.
≪物譜≫는 성호 이익에게 수학한 이철환이 초고한 것을 1802년 이철환의 아들 李載威가 체계화한 物名에 대한 어휘자료집이다21). 단권의 필사본으로 권두에 李載威가 쓴 ?物譜序?가 있고, 이어 語彙目錄이 실려 있고, 권말에 李基慶이 쓴 ?物譜跋?이 있다.
?物譜跋?에는 李基慶이 14~5세 때 이 책을 스승 이철환으로부터 받아 다시 필사하여 보관하였음을 밝혔다. 그후 40여년이 지난 후 이기경이 湖西에서 이재위를 만났을 때 이재위가 편찬한 책을 보게 되었는데, 편차가 달랐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物譜≫는 이철환의 초고본의 편차를 이재위가 새롭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기경은 物名이 비록 理學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물명을 모르면 이치를 알 수 없기에 이것부터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철환의 학문에는 性理와 名物이 兼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2).
?物譜序?에 따르면 ≪物譜≫를 편찬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로 공자의 말씀을 들어 조수?초목의 아름을 알아야 함을 밝히고, 천지만물 중에서 사람이 가장 고귀하므로 만물의 품성은 인류의 과학적인 분석에 의하여 그들의 일상생활에 이롭게 됨을 강조하였다23). 그리고 이어서 物名에 대한 학식이 밝지 못하므로 민생에 유익한 자료를 오히려 惡利用할 우려가 있음을 말하였다24). 또한 衣食이 민생에 가장 중요하며, 冠婚喪祭의 禮에 대한 名物에 익숙하지 못한다면 이는 곧 헛된 예식의 條例만 남을 따름임을 말하였다25). 그러므로≪物譜≫가 家學인 禮學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철환이 ≪物譜≫를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민생에 가장 중요한 물명에 너무 소홀함을 딱하게 여겨 物名을 보는 대로 적어 놓았는데26), 이것이 체계가 없어 그 아들 이재위가 다시 분류 정리하여 ≪物譜≫로 엮은 것이라고 하였다.
(2) ≪物譜≫의 분석과 성격
≪物譜≫의 내용은 上?下 2篇 8部 49類로 분류되어 있으며, 물명 2,468항목(한자물명 1,469항, 국어물명 999항)을 수록하고 있다. 물명을 기록한 체제는 먼저 한자 물명을 쓰고, 일부의 물명에 한글 물명을 썼다.
≪物譜≫에 나타난 물명을 항목별로 분류한 것이 다음의 표이다.
上篇 - 天生萬物
|
部名 |
目名 |
國語品名 |
合計 |
漢字品名 |
合計 |
部名 |
目名 |
國語品名 |
合計 |
漢字品名 |
合計 |
|
草木 |
禾穀 |
32 |
315 |
54 |
474 |
蟲魚 |
鱗蟲 |
31 |
71 |
39 |
115 |
|
蔬菜(1) |
24 |
44 |
介蟲 |
20 |
44 | ||||||
|
蔬菜(2) |
26 |
45 |
水族 |
20 |
32 | ||||||
|
蔬菜(3) |
23 |
28 |
蟲? |
走蟲 |
30 |
56 |
53 |
95 | |||
|
木果 |
30 |
24 |
飛蟲 |
26 |
42 | ||||||
|
草果 |
24 |
50 |
鳥獸 |
羽蟲(陸禽) |
30 |
85 |
50 |
131 | |||
|
花卉(1) |
23 |
30 |
羽蟲(水鳥) |
20 |
31 | ||||||
|
花卉(2) |
16 |
22 |
毛蟲(草宿) |
21 |
26 | ||||||
|
藥草(1) |
31 |
52 |
毛蟲(窟居) |
14 |
24 | ||||||
|
藥草(2) |
28 |
40 |
國語物名 : 527, 漢字物名 : 815 | ||||||||
|
雜草 |
25 |
46 | |||||||||
|
雜木 |
33 |
39 | |||||||||
下篇 -人爲萬事
|
部名 |
目名 |
國語品名 |
合計 |
漢字品名 |
合計 |
部名 |
目名 |
國語品名 |
合計 |
漢字品名 |
合計 |
|
身體 |
形體 |
10 |
31 |
16 |
45 |
器械 |
耕農(1) |
23 |
121 |
24 |
151 |
|
氣血 |
21 |
29 |
耕農(2) |
21 |
26 | ||||||
|
人道 |
族姻(僧道附) |
6 |
201 |
16 |
308 |
蠶績(1) |
23 |
26 | |||
|
衣服(官服) |
19 |
30 |
蠶績(2) |
14 |
35 | ||||||
|
衣服(服飾) |
16 |
25 |
工匠 |
23 |
24 | ||||||
|
飮食(米穀) |
30 |
32 |
佃漁 |
17 |
16 | ||||||
|
飮食(魚肉) |
14 |
29 |
器用 |
酒食 |
21 |
118 |
27 |
150 | |||
|
博戱 |
22 |
33 |
服飾 |
16 |
21 | ||||||
|
第宅(椽?) |
12 |
21 |
鼎? |
19 |
24 | ||||||
|
第宅(窓戶) |
16 |
23 |
筐? |
24 |
30 | ||||||
|
舟車(舟橋) |
17 |
27 |
?案 |
21 |
30 | ||||||
|
舟車(車輿) |
12 |
21 |
兵仗 |
17 |
18 | ||||||
|
牛馬 |
22 |
29 |
國語物名 : 471, 漢字物名 : 654 | ||||||||
|
文士 |
4 |
7 | |||||||||
|
商賈 |
6 |
8 | |||||||||
|
雜部 |
5 |
7 | |||||||||
위의 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天生萬物인 상편에서는 草木에 관한 물명 항목의 종류와 數가 전체에서 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러한 비율은 이철환의 초목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이러한 초목에 대한 관심은 조선후기의 일상행활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웠던 의학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 짐작된다. 痲疹이 크게 유행하던 1775년 덕산에서 함께 거주하던 그의 아우 森煥이 ≪痲科彙編≫을 구해 요령을 터득하여 우선 가족에게 시험해 보고, 다음에 마을 사람들에게 적용시킨 것을 확인할 수 있다27).
또한 하편의 人爲萬事에서도 인간생활에 필수적인 語彙를 수록28)한 것으로 보아 그의 관심이 실용적인 생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철환의 관심은 조선후기 사회에 내재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데 큰 목적이 있었다. 그는 평소에는 村夫野老들과 稗官野史나 세상의 하찮은 얘기를 나누는 것29)에서 볼 수 있듯이 평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는 千金을 나누어 주고 의방을 연구하여 질병을 퇴치하는 등, 사회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자신이 몸소 실학을 실천하는 생활을 영위하였다30).
4. 天主敎에 대한 對應
(1) 星湖 李瀷의 西學觀
17세기 이래 西勢東漸과 더불어 천주교가 북경을 통해 조선사회에 수용되어,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의 한계를 인식하고 현실의 개혁을 위한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실학자들에게 활발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실학정신이 유교적 토대위에 자생하면서, 천주교 신앙에 입각하여 기존의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경향까지 표출되었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사상계에서 보수와 혁신의 갈등이 천주교를 매개로 첨예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천주교에 대한 이해와 수용으로부터 초기 교회의 형성에 이르는 과정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들은 성호학파 계열의 인물들이었다.
성호학파의 인물들이 서양학문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성호 이익 자신이었다. 이익은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의 과학이나 천주교 서적에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익의 부친 이하진이 북경에서 구입한 많은 서적들도 이익의 서학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익의 서학관은 서양의 천문?역법?산학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일관되어 있던 것에31) 반해, 천주교에 대한 이해는 시기에 따라 약간씩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다32). 이익의 서학의 이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43세 때인 1724년 3월 鵝峴寓舍에서 愼後聃과 만난 자리에서 ‘천주교의 三魂說(生魂?覺魂?靈魂)이 유교의 心性說과 반드시 다른 것만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33), 천주교의 上帝說에 대하여 유교 경전의 上帝?鬼神說과 암암리에 서로 부합되고 있다고 하였다34). 그러나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판토자의 ≪七克≫을 논평할 때에는 補儒論的 입장과 斥邪的인 입장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35).
(2) 李家煥의 天主敎 信奉
여주이씨로 천주교를 신봉했던 사람은 李家煥(1742-1801, 자:廷藻, 호:錦帶 또는 貞軒)이었다. 이가환은 영조 47년(1771)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정조 1년(1777)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80년 庇仁縣監이 되었으며, 1792년에는 대사간에까지 올랐다36).
여주이씨로는 드물게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대사간의 고위 관직에 오른 이가환이 천주교에 입문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이가환은 정조 11년(1787) 兩西暗行御史 李崑秀의 書啓37)로 金化縣監으로 좌천되는 것을 시작으로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였다. 이가환 자신의 정치적 부침이 반복되기 이전부터, 그의 부친 이용휴를 중심으로 한 여주이씨 문중에도 悲運이 계속되었다. 이용휴는 그의 나이 30대까지는 出仕의 의지를 가지고38), 1735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용휴는 40대 이후 20여년간 갈등과 상실의 시기로 점철되었다39). 이러한 자신과 문중에 계속되는 別故는 李家煥으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욕구와 불만이 현실의 수용과 애민의식으로 전환되어 새로운 세계인 서양의 학문을 접하였을 때, 보다 용이하게 자신을 몰입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성호 이익으로부터 시작되는 西學에 대한 관심은 성호학파를 비롯한 이익의 족질과 족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익의 종손 이가환도 서양의 천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가환은 어려서부터 이미 宗祖 李瀷이 접해왔던 서학서들을 접함으로써 그 내용을 이해하였다. 실제로 1778년 정조가 승문원 정자로 있는 이가환에게 마테오 리치의 曆法에 대하여 물었을 때,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의 역법을 비교 설명하면서 渾天儀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40). 또한 그는 地球儀를 보지는 못했으나, 페르비스트의 ?坤輿全圖?를 바탕으로 지구의 경위도에 대하여 정조에게 자세히 설명하였고41), 정약용은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여 “지구의 지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경위도에 대해 별도로 圖說을 지어 후배들에게 보여 주었다”42)고 하였다. 이미 그가 천문학 서적을 관심있게 접하였음을 말해 준다.
조선후기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은 대부분 李瀷의 문인 鹿庵 權哲身(1736-1801, 자:旣明, 호:鹿庵, 세례명:암브로시오-Ambrosius)의 門下에서 주로 나왔다. 권철신은 처음에는 이익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이익이 세상을 떠난 1768년 이후에는 德山에 移居해 있던 李秉休의 가르침을 받았다.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鹿庵系43)는 1766년부터 1780년까지는 陽明學에 주로 관심을 가졌으나, 1779년의 走魚寺 講學44) 이후 그들의 관심은 서학으로 전환되고 있었다45). 녹암계의 인물들이 천주교 신자로서 성리학이 지배이념이었던 조선후기 사회에서 비밀리에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권철신의 문인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이들 상호간에 혼인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46). 李檗은 李家煥의 가까운 親知였으며, 이승훈은 이가환의 甥姪이었다. 이승훈의 족제인 이응훈은 이용휴의 사위였고, 이응훈의 아들은 이학규였다. 또한 李基讓의 아들 李寵億은 이가환의 사위였다.
이가환은 이익의 문하에서 受學한 인물 중 가장 어린 나이였으나 학문적 성장은 가장 빠르게 성취되었고, 李明鎭의 증손으로서 이하진의 자손들이 관직 진출에 제약을 받았던 것과 달리 정2품의 顯官에까지 올랐다. 관직에 있으면서 好學君主였던 正祖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식견은 그의 장래를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父親 李用休의 주변에 전개된 갈등과 상실은 아들 이가환에게도 당시의 사회에 대하여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가환이 어린 나이에 학문적 지주였던 종조 이익을 찾으면서 수학했던 성호학파들에게 형성되었던 학풍과 서양의 서적들은 이가환이 학문적 방향을 형성하는데 일찍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이익의 문인으로 이익의 학통을 계승한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녹암계 인물들의 혼인관계 속에서, 녹암계에서 시작된 천주교의 신앙운동은 이가환도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대상이었다.
그러면 이가환이 천주교의 신앙생활을 하는 시기는 언제부터인가?
조선후기에 천주교 관련서적이 맨 처음 알려진 것은 ≪天主實義≫이다. ≪天主實義≫47)는 유몽인의 ≪於于野談≫과 이수광의 ≪芝峰類說≫에서도 이미 언급되어 있었고, 이익도 ?天主實義跋?을 지어 이 책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을 따르던 愼後聃?安鼎福?李獻慶 등이 ≪천주실의≫와 그 밖의 西敎書를 읽고 각기 ≪西學辨≫?≪天學考≫?≪天學問答≫ 등을 엮어 유학적 관점에서 예리하게 논평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천주실의≫에 담겨져 있는 천주교 교리를 이해, 소화하여 마침내 천주교신앙에 도달하게 된 학자들도 있었다. 李檗?權哲身?權日身?丁若鍾?丁若鏞?李承薰 등이 천주교신앙 실천운동을 일으켜, 1784년(정조 8) 조선천주교회를 창설하기까지에도 이 책이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48).
이가환도 서양의 천문학의 영향을 받는 과정에서 ≪天主實義≫와 ≪七克≫49)과 같은 천주교 서적을 읽었고50), 항상 하늘에 主宰者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李家煥은 이 신기한 외래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1784-1785년 사이에 이벽과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이벽과 토론한 이후에는 천주교를 가리켜 “진리요 정도”라고 말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를 권유하면서 교화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천주교 세례를 받지는 않았으니, 자신이 직접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51).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이가환이 천주교에 입문하여 신앙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이미≪天主實義≫와 ≪七克≫를 읽고 이해하고 이벽과 토론한 이후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천주교가 1780년대를 전후한 때부터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던 녹암계의 다른 사람들보다는 약 5년 정도 늦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785년의 明禮坊事件과 같은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시작되면서 천주교의 지도층 신자들은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야만 하였다. 지금까지의 假聖職者團의 활동에 대신하여 외국의 천주교 지도자를 데려오자는 聖職者迎入運動이 그것이었다. 이 운동은 천주교를 보호해줄 수 있는 서양선박을 불러 오자는 大舶(西洋舶舶)請來事件으로 전개되었고, 이 운동에 洪樂敏?權日身?李存昌과 함께 이가환이 적극 참여하였다. 이들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一場決判까지 계획했던 것으로 확인된다52).
이러한 노력의 결과 1794년에는 중국인 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여 求道者들에게 領洗를 내리기도 하고, 의식을 주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는 捕卒을 피해 聖事를 집행해야만 했었다. 주문모 신부의 활동에 은신처가 된 자는 姜完淑이었다. 강완숙은 德山 洪芝榮의 後妻로 들어갔다가, 충청도에 천주교가 들어오자 자진 入敎하였고 온 집안을 傳敎하였으나 남편만은 개종시킬 수 없었다. 辛亥迫害로 충청도가 시끄러워지자 서울로 올라와 주문모 신부를 6년간 보호하면서 천주교의 전도에 전념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주로 서울에서 머물면서 때로는 충청도의 내포를 비롯하여 고산, 남포, 온양 등지를 방문하기도 하였다53).
이러한 주문모 신부의 입국 활동은 성직자영입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고, 그 성과는 그가 입국하기 전에는 信徒數가 약 4천 명이었던 것이 입국하여 활동한 이후 수년만에 1만명이 넘게 늘어났다54). 따라서 천주교의 반대세력은 주문모의 입국 사실을 모르고, 그 죄를 李承薰과 李家煥에게로 돌려 李家煥을 忠州牧使로 좌천시켰다. 당시에 충주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곳의 수령으로서 교화시키도록 맡긴 것이었다55). 이러한 정부의 천주교 확대 방지를 위한 조치는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임명한 경우도 같은 조치였다.
결국 정조에 의해 등용된 진보적 학자들의 등장에 보수정치세력은 천주교 탄압을 빙자하여 辛酉迫害를 일으켰다. 이승훈, 정약종을 죽이고,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유배시키고, 이가환은 ‘凶醜餘孼’이니, ‘自作敎主’니 하여 고문하면서 자백을 강요하였다. 이승훈은 斷食으로 항거한 지 7일만에 결국 순교하였다.
18세기 말 초기의 천주교 신앙운동이 전개될 때, 이가환은 이승훈, 정약용과 함께56) 녹암계의 일원으로 전개한 신앙운동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된 녹암계 인물들과의 접촉과 양박청래운동을 전개하여 중국인 신부의 입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한 일반 신자들과의 접촉은 그다지 확인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가환의 정치적 지위가 드러내놓고 천주교도로서의 활동을 하기에는 장애가 너무 컸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는 정조가 덕산에 살고 있던 從兄 李森煥으로 하여금 천주교도들을 효유하도록 부탁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이가환이 덕산지역에서의 천주교 전파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3) 李森煥의 斥邪論
성호학파의 인물들이 천주교에 대하여 같은 입장을 보인 것은 아니고, 천주교에 대하여 비판과 수용의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신후담과 안정복을 중심으로 한 攻西派와 정약용,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信西派로 구분된다. 이 두 파는 서학의 수용태도나 경전의 해석 방식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57).
이에 대하여 尹東奎(1695-1773, 자:幼章, 호:邵南)는 중간적 입장에 있었는데, 이병휴는 윤동규를 받들면서 두 파를 조정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병휴는 자기의 학통을 星湖로부터 退溪에까지 소급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정통파적 보수성을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의 과학을 높이 평가하고 수학교육에 힘쓰는 등, 진보적 사고를 보이기도 하였다58). 그리고 젊은 후배들의 탐구의욕을 감싸주면서, 후배들을 항상 傳統保持에 묶어 두려는 安鼎福의 愼重論을 비난하였다.
이익과 윤동규의 영향을 받은 이병휴의 학문적 계통은 그의 아들 李森煥에게 계승 발전되었다. 이삼환(1729-1814, 호:木齋)은 안산 첨성리에서 태어나 12세에 從祖인 이익에게 입문하여 각별한 기대를 받으며 지도를 받았다59). 이익이 세상을 뜨자 덕산으로 돌아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 전념하여, 부친 이병휴의 학문을 계승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삼환은 자신의 학문적 계통을 眉? 許穆에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바, 그러한 의도는 그의 號와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少眉山房藏≫ 8책60)의 書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눈썹이 수려했고 손에는 ‘文’이라는 글자가 있었는데, 이것이 미수 허목의 긴 눈썹과 손바닦의 글자와 같았다. 또한 그가 살던 집이 德山의 蛾眉山 아래에 있었으므로 許穆을 흠모하여 ‘少眉’라고 自號를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李捧의 ‘山房’의 뜻을 취하여, 그가 지은 詩文藁를 ≪少眉山房藏≫이라고 하였다61).
결국 이삼환은 ‘李滉(1501-1570, 退溪)→鄭逑(1543-1620, 寒岡)→張顯光(1554-1637, 旅軒)→許穆→李瀷’로 이어지는 星湖學派의 學脈62)에서 ‘李瀷→李秉休→李森煥’으로 계승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삼환이 천주교를 비판하는 ?洋學辨?上?下篇을 지은 것으로 볼 때, 그는 그의 族弟 李家煥이 속해 있는 鹿庵 權哲身 系列이 아닌 順庵 安鼎福 系列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이삼환은 성호학파 중의 척사론자63)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익의 서학관에서 실학적인 측면 즉 천문?역법?산학 등에 대한 이해가 일관되게 긍정적이었던 것과는 다르게,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해는 시기에 따라 약간씩 변화를 보인다. 이익은 1724년 愼後聃을 만난 자리에서 ≪天主實義≫에 언급된 서양의 三魂說(生魂?覺魂?靈魂)이 유교의 心性說과 ‘반드시 다른 것만은 아니다’라고 이해하였으며64), 천주교의 上帝論을 가리켜 유교 경전에 수록된 上帝?鬼神說과 ‘암암리에 부합된다’65)라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바로 원시 유학에서 천주교 교리와 유사한 점을 찾아낸 예수회 선교사들의 補儒論적 경전 해석이 이익에 의해 수용되었음을 의미한다66). 이익의 이러한 서학관은 76세 때인 1757년 안정복에게 답한 서한에서는 ‘구라파의 天主說은 내가 믿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여67) 천주교 교리를 부인하였고, 또한 死後審判說과 天堂地獄說을 부정하여68) 천주교 교리를 異端으로 평가하였다.
이삼환은 종조 이익이 말년에 가지고 있던 西學觀과 같이 천문?역법 등의 실학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면,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삼환의 서학관은 천주교가 한창 신앙운동으로 전개되던 때인 1786년에 쓴 ?洋學辨?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삼환은 ?洋學辨?에서 天과 上帝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남쪽 교외에서 하늘을 섬기는 큰 행사가 있을 때 반드시 상제에 告하는 것은 왕실의 예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성들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69)라고 하였다. 또한 이삼환은 이어서 儀式의 특징을 비교하였다.
임금이 밖에 거둥할 때 士女들이 비좁은 곳에서 감히 숭배하지 안고, 비록 열렬한 정성으로 감히 進獻하지 않더라도, 어찌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겠는가? 진실로 현격한 지위의 차이로 감히 하지 않아도 옳게 여기는 것이다. 하물며 하늘의 높고 원대한 것임에랴. 洋學은 이와 달라서 男女貴賤이 없이 모두가 하늘을 섬겨서 名手가 되고 名香을 불태우며, 經典(聖經)의 말씀을 암송하고 아침 저녁으로 합장하고 예배하니 불교와 같다70).
이삼환은 천주교의 황당한 虛構性에 대해서 “여호와(如德亞)는 村婦가 낳아 기른 자로, 어떻게 된 幻妄의 남자인지 알지 못하고 문득 그를 보고 天主라 한다. 마침내 十字架에 못박혀 죽은 일로 神化하여 救人할 수 있는 大案이 되었다”라는 천주교의 교리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하늘을 섬긴다는 것이 하늘을 속이는 것이고, 幻妄을 가리켜 天主라고 하는 것이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라고 반박하였다71). 한편 이삼환은 천주교가 민중을 오염시키는 현실을 우려하였다. 그는 ?答人雨粟辨?에서 ‘하늘에서 곡식이 내렸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중국에서는 그런 일이 祥瑞로서나 여러번 史書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어서 천주교의 奇蹟을 부정하였다72).
이삼환의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적극적인 척사론으로, 1791년 그가 正祖로부터 ‘闢邪之政’에 협력할 수 있는 인물로 지목되었다73). 그것은 그가 철저하게 천주교의 교리를 부정하고, 그에 대결하는데 온 정신을 쏟았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5. 맺음말
18~19세기 초에 德山地域에 세거했던 驪州李氏는 星湖 李瀷의 族姪과 族孫들로서, 李廣休와 그의 아들 이철환, 李秉休와 그의 아들 李森煥, 李用休와 그의 아들 李家煥 등이었다.
이들은 庚申換局 이후 祖父 李夏鎭이 南人의 입장에서 죽음을 당하였고, 世子問題에 연루되어 李潛이 獄死한 이후 중앙정계 진출과는 거리를 둔 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安山 첨성리에 거주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던 성호 이익이 實學의 大家로 일컬어질 수 있었던 것과, 그의 족질 족손들이 학문적 영향을 받아 그의 학풍을 계승할 수 있었던 배경도 이러한 가문의 운명메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茶山 丁若鏞은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여주이씨의 인물에 대하여 “貞山 李秉休는 易經과 三禮, 萬頃 李孟休는 經濟와 實用, 惠? 李用休는 文字學, 長川 이철환은 博物學, 木齋 李森煥은 禮學, 剡村 李九煥은 經濟實用之學을 계승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들의 학문 중에서 조선후기에 西洋學問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이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수용, 또는 배척하는 면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후기의 근대지향적인 성향으로서 나타난 새로운 학문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철환과 그의 아들 李載威에 의해 작성된 『物譜』는 天地萬物 중에서 사람이 가장 고귀하므로 만물의 品性은 인류의 과학적인 분석에 의하여 일상생활에 이롭게 됨을 강조하였다. 그 내용은 上·下 2篇 8部 49類로 분류되어 2,468항목의 物名을 수록하였다. 한편 천생만물에서는 다른 蟲魚 · 蟲? · 鳥獸의 항목보다 草木에 대한 관심이 높음을 보아, 이들의 초목이 藥材로 쓰여 일상생활에서 의학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그의 아우 이삼환이 의학을 터득하여 사람들에게 적용시킨 사실을 보아 이러한 사실은 더욱 확실하다.
天主敎가 수용되어 확산되는 과정에서 재종간에 있었던 이가환의 천주교에 대한 관심과 이삼환의 이에 대한 斥邪論은 서로 다른 면을 보여준다. 이가환은 西洋 天文學의 영향을 받는 과정에서 『天主實義』와 『七克』과 같은 천주교 서적을 읽었고, 항상 하늘에 主宰者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李檗과 토론을 벌인 이후에는 천주교를 가리켜 ‘眞理요 正道’라고 하였다. 정부가 천주교 탄압을 시작하자 외국의 천주교 선교사를 데려오자는 聖職者迎入運動과, 천주교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서양선박을 불러오자는 大舶(西洋船舶)請來運動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삼환은 「洋學辨」上·下篇을 써서 천주교의 儀式과 황당한 虛構性을 비판하였고, 「答人雨粟辨」에서 천주교의 奇蹟을 부정하였다. 이삼환의 적극적인 척사론은 正祖가 그를 ‘闢邪之政’에 협력할 수 있는 인물로 지목한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덕산지역의 여주이씨들은 18~19세기 초 다양한 사회적 변화속에서 서양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18세기의 새로운 학풍으로 전개되었던 實學이 성호 이익에서 여주이씨의 족질과 족손으로 계승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勢道期에 들어서면서 일반적으로 실학이 쇠퇴하던 것처럼, 이들의 학문적 계승도 한계에 이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삼환의 墓誌銘을 한말 의병운동의 중심이었던 修堂 李南珪가 썼다는 사실은 여주이씨의 학문과 한말 척사운동과의 관련성을 추정케 할 수 있다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관심은 추후 다시 고찰하고자 한다.
영문 요지
Academic Features of Yoeju Lee's Family in the Deogsan area in the late Chosun Dynasty
The member of Yoeju Lee's family, who lived in the Deogsan area from the 18th and the early 19th century for generations, are Lee Kwang-hyu and his son Lee Chul-hwan, Lee Byung-hyu and his son Lee Sam-hwan, and Lee Yong-hyu and his son Lee Ga-hwa, the descendants of of Lee Ik, pen name Sungho.
After 'Kyungsinhwanguk'(political structural reform - most of the south factionwas deported and the west took power), one of Yoeju Lee's ancestor, Lee Ha-jin was punished to death because of his different political disposition, and Lee Jam was also imprisoned to death since for his involvement in the 'Crown Prince Issue'. As a result of the incidents, Yeoju Lee's family concentrated on the search for studies, apart from advancing in the political arena. The reasonwhy Sungho Lee Ik, living in Chumsung-li, was called a great scholar in practical sciences, and descendants could succeed from his academic traditions are derived from the fate of family.
In the course of receiving Western Studies in the late Chosun Dynasty, Lee's family had a strong tendency for Western Studies by accepting or excluding it with lots of interest. As the modern-oriented disposition in the late Chosun Dynasty, this shows a changed academic feature of newly formed studies.
In the book 'Mulbo', written by Lee Chul-hwan and his son Lee Jae-wi, it is said that human being is the most valuable existence among all creatures; thus, the character of creatures is supposed to be beneficial to mankind by human's scientific analysis. Meanwhile, considering that the interest for trees and plants is bigger than for insects and fish, it is assumed the former was used as useful medicine, making a great contribution to the medical development of daily life.
In the process of accepting Catholicism, Lee Ga-hwan's interest toward Catholicism and Lee Sam-hwan's expulsion toward it shows different aspects in their chracter. Lee Ga-hwan was influenced by western astronomy, so he read such books as 'Chunjusilui', and 'Chilguk', and he thought there was a God in the heaven all the time. Also, after Lee Ga-hwan debated with Lee Byuk fervently, Lee Ga-hwan called Catholicism 'truth and the right way'. When the government started to oppress against Catholicism, there were both opinions to call Catholic missionary, and to bring in the western ship that could protect Catholicism.
Meantime, Lee Sam-hwan criticized the service of Catholicism and its nonsensical fiction by writing two consecutive books of 'Yanghakbyun', and denied the miracle of Catholicism in the book of 'Dapinwoosokbyun'. Lee Sam-hwan's active repulsion toward Catholicism is validated King Jungjo's appointing him to be involved in 'Byuksajijung'. The fact that Lee Nam-gyu, pen name Sudang, who was the core member of righteous army activity, wrote Lee Sam-hwan's epitaph could be a helpful clue to understand the academic disposition of Yeoju Lee's family is related to the repulsion movement in the late Daehan Empire.
Key words : Deogsan, Yoeju Lee's family, Lee Ik, pen name Sungho, Mulbo, Catholicism
주제어 : 덕산, 여주이씨, 이익, 물보, 천주교
<주>
1)이중환은 ≪擇里志≫(팔도총론 충청도조)에서 ‘伽倻山 앞뒤에 있는 10개 고을을 內浦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내포는 현재의 예산, 당진, 서산, 홍성 지역이 그 범주에 해당된다.
2)덕산지역은 조선의 건국 초기에는 德山縣과 伊山郡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조선 태종 5년(1405) 伊山의 人物이 凋弊하다는 이유로 伊山郡을 德山縣에 統合하여 縣監을 두었다(≪輿地圖書≫ 德山縣). 그후 헌종 13년(1847) 郡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3월 대흥면과 덕산면을 禮山郡에 병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예산군지≫ 2002). 본고의 뒤에서 언급되는 장천리는 현재의 고덕면 대천리, 상장리 지역에 해당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이 德山縣에 포함되었으므로, 본고에서의 德山은 조선시대 덕산현의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3) 丁若鏞, ?貞軒墓誌銘? 附閒話.
4)여주이씨 문중에서 처음으로 顯官에 오른 李繼孫은 후손들이 宗子의 집에 그의 廟를 세워 大宗法을 마련함으로써, 이계손 이후의 一族의 결속을 볼 수 있다(≪星湖文集≫ 附錄 1-15, ≪星湖僿說≫ 卷2 下-15 立宗條 : ?創八世祖敬憲公廟 立于宗子家 帥宗人歲一祭?.
5)여주이씨 李尙毅의 자손으로 文科 및 司馬試에 합격한 인물은 다음의 표와 같다. 문과에 합격한 수는 19명이고, 사마시에 합격한 수는 25명에 이르렀다(≪驪州李氏歷代人物誌≫, 驪州李氏歷代人物誌編纂委員會,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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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 |
號(諡·封) |
生沒年代 |
司馬 |
文科 |
官歷 |
父諱 |
世居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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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毅 |
而遠 |
少陵 (翼獻公) |
1560-1624 |
乙酉生員壯元 |
丙戌 別試 丙科 |
左贊成 |
友仁 |
貞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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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完 |
養吾 |
斗峰 (貞簡公) |
1575-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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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 庭試 丙科 己酉 重試 丙科 |
判書 |
尙毅 |
貞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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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定 |
靜吾 |
聽蟬 |
1588-1650 |
壬子 進士 |
丙辰 別試 乙科 |
驪州牧使 |
尙毅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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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寅 |
明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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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1672 |
庚戌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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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吏參 |
尙毅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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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宏 |
守吾 |
東溟 |
1584-1642 |
乙巳 生員 |
戊午 增廣 乙科 |
軍資監正 |
尙毅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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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鎭 |
鼎卿 |
太湖 |
1594-1665 |
壬子 進士 |
庚午 別試 丙科 |
吏曹參議 |
志完 |
京 |
|
志安 |
存吾 |
成川 |
1601-1657 |
癸酉 進士 |
辛卯 謁聖 丙科 |
府尹 持平 |
尙毅 |
京 |
|
奎鎭 |
文卿 |
|
1611-1672 |
壬午 進士 |
庚子 增廣 丙科 |
司憲 掌令 |
志宏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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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鎭 |
殷卿 |
|
1630-1705 |
丙戌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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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志安 |
京 |
|
夏鎭 |
夏卿 |
梅山 |
1628-1682 |
甲午 進士 |
丙午 式年 甲科 |
吏曹參判 |
志安 |
京 |
|
泳 |
永之 |
聖峰 |
1634-1687 |
丁酉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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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縣監 |
嵩鎭 |
京 |
|
箕鎭 |
季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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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1- ? |
丁酉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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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宏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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汲 |
明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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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6-1718 |
己酉 生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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蔭通訓縣監 |
翼鎭 |
京 |
|
明鎭 |
明卿 |
揚根 |
1641-1696 |
乙卯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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揚根郡守 |
志安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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瀧 |
子善 |
|
1635-1698 |
戊午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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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奎鎭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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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休 |
伯起 |
省齋 |
1657-1709 |
戊午 進士 |
壬戌 增廣 丙科 丙寅 重試 丙科 |
禮曹參判 |
泳 |
京 |
|
湜 |
汝源 |
|
1633-1685 |
庚子 進士 |
癸亥 增廣 丙科 |
縣監 |
奎鎭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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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休 |
咸卿 |
睡窩 |
1675-1771 |
辛未 進士 |
庚寅 春塘 丙科 |
弼善 |
? |
京 |
|
學休 |
思卿 |
|
1687-1750 |
己亥 生員 |
|
|
? |
京 |
|
萬休 |
伯咸 |
|
1675-1722 |
|
壬辰 庭試 丙科 |
禮曹正郞 |
湜 |
京 |
|
重煥 |
輝祖 |
淸潭 |
1690-1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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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 增廣 丙科 |
兵曹正郞 |
震休 |
京 |
|
東煥 |
國春 |
|
1681-1753 |
戊子 進士 |
己酉 式年 丙科 |
持平 |
百休 |
忠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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億休 |
長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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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 ? |
辛卯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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蔭 參奉 |
? |
安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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載厚 |
元博 |
蔡菴 |
1698-1773 |
癸卯 生員 |
丁未 增廣 甲科 |
通政 僉樞 |
東煥 |
忠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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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煥 |
大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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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1791 |
癸巳 進士 |
庚戌 庭試 丙科 |
承文 正字 |
萬休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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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休 |
醇? |
杜山 |
1713-1751 |
乙卯 進士 |
壬戌 庭試 壯元 |
吏曹 正郞 |
瀷 |
廣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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載顯 |
孟揚 |
星岡 |
1714-17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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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 式年 壯元 |
司憲 持平 |
湛 |
洪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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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煥 |
廷藻 |
錦帶 |
1742-1801 |
辛卯 生進 |
丁酉 登極殿試 乙 |
工曹判書 |
用休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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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休 |
貞甫 |
金華子 |
1696-1724 |
癸卯 司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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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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用休 |
景命 |
惠? |
1708-1782 |
乙卯 生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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僉中樞 |
沈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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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煥 |
星? |
鶴西 |
1713-1772 |
甲子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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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休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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炯煥 |
晦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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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1789 |
甲子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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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休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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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翼 |
聖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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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3-1793 |
己卯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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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煥 |
白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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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煥 |
元陽 |
可山 |
1731-1784 |
甲午 生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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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休 |
廣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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載重 |
聖興 |
石軒 |
1747-1822 |
辛卯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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晶煥 |
德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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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銓 |
誠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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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1795 |
辛卯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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蔭通訓縣監 |
載恒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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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銑 |
光國 |
奇巖 |
1743-1801 |
甲午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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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輔 |
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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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 |
翰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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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1814 |
己酉 生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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載爀 |
德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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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煥 |
佩謙 |
謙齋 |
1773-1809 |
戊午 生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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秉休 |
德山 |
6) ≪肅宗實錄≫ 肅宗 8년 6월 26일(임인).
7) ≪위의 책≫ 肅宗 1년 6월 4일(신유).
8) ≪위의 책≫ 肅宗 6년 2월 25일(을유).
9) ≪위의 책≫ 肅宗 32년 9월 17일(임신).
10) ≪위의 책≫ 肅宗 32년 9월 20일(을해). / ≪燃藜室記述≫제38권, ?林簿와 李潛의 獄事?.
11)이하진은 1678년 都承旨가 되어 進香正使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이하진은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수천 권의 서적을 구입하여 돌아왔는데, 이것이 후일 經世致用學派의 宗師인 아들 李瀷을 비롯하여 후손과 실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12) 지안 이후의 <驪州李氏 家系圖>는 맨 뒤에 수록되어 있다.
13)李孟休(1713-1751, 자:醇?, 호:杜山)는 李瀷의 獨子로서 영조 을묘(1735)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임술(1742)에 문과 장원으로 합격하여 통훈대부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4)조선후기에 驪州李氏로 서울 皇華坊에 거주한 세대는 약 20호 정도로, 驪州李氏를 ‘貞洞李氏(貞李)’라는 별칭이 생기게 되었다. 李家煥은 조선초부터 당시까지 서울의 주인이 바뀌지 않는 (京師)舊第로 乾川洞, 鑄字洞, 崇禮門밖, ?峴洞과 자신이 살고 있는 皇華坊을 들었다(≪近畿實學淵源諸賢集≫ 2, ?貞軒?錄?,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2002).
15)중종 때의 인물이었던 龍仁李氏 李湛(자:仲久, 호:靜存齋)은 德山縣 북쪽의 高山面에 거주하였다. 그는 學行으로 대사간까지 지냈으나, 乙巳史禍로 피해를 입었다(≪輿地圖書≫德山縣 人物條).
16) 龍仁李氏는 李後山(1597-1675, 자:子高, 호:雪坡)의 딸이고, 李後山은 李明鎭의 妻父 李甲俊의 族姪이다.
17)李甲俊이 德山지역에 살았던 증거로 德山縣 別羅山村에 내려진 李甲俊과 그의 딸의 孝行 旌閭가 있다(위의 책, 孝子條).
18)德山縣 長川里는 조선 건국 初까지는 伊山郡에 속해 있었으나, 伊山郡이 德山縣에 병합되면서 德山縣 高山面 長川里로 편제되었다. ≪輿地圖書≫에 나타난 장천리의 규모는 54호에 남자 93명, 여자 143명으로 확인된다.(위의 책).
19)17세기 이후 덕산지역에 거주하던 여주이씨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을 현재 덕산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덕산 장천리와 도남동에 있던 여주이씨의 묘소들이 1987년 7월 강원도 원주군 흥업면 매지리 매산묘원으로 移葬되었다(≪驪州李氏世譜≫).
20)凡器數之法 後出者工 雖聖智有所未盡 而後人因以增修 宜其悠久而愈精也(≪星湖先生文集≫, 권1, ?天地門?曆象?)
21)朴星來는 ≪星湖僿說≫에 수록된 3,057건의 기사 중 서양에 관한 60건의 기사가 전체의 2%에 불과하고, 분류가 산만하여 불편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이익의 제자 안정복이 스승의 허락을 받아 내용을 고치기까지 하며 분량을 반으로 줄여 ≪星湖僿說類選≫으로 재편집하였다. ≪星湖僿說類選≫에서는 전체 1351건으로 정리하여 과학기술의 관련 기사가 31건이었고, 천문학 분야에 관련된 기사 27건 중 21건이 서양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다(?李瀷의 西洋科學 受容?, ≪東園 金興培博士 古稀紀念論文集≫, 1984.)
21)≪物譜≫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이가원의 ?物譜와 實學思想?(≪人文科學≫ 제5집,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1960)이 있다. 한편 ≪物譜≫의 저자 이철환보다 약 50년 후의 인물인 柳僖(1773-1837, 초명:儆, 자:啓仲, 호:西坡?方便子?南嶽)이 지은 ≪物名考≫ 5卷은 鳥獸와 草木 등을 크게 有情類, 無情類, 不動類, 不情류 등으로 나누고 어휘의 아래에 간단한 설명을 부기하여 ≪物譜≫보다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나, ≪物譜≫보다 뒤늦게 지어진 것이다. 그밖에 저자를 알 수 없는 ≪物名考≫와 ≪萬物錄≫이 있다(≪물명고?물보≫. 한국사상연구소, 1972).
22)蕓圃李先生 以豪邁之資 講聖賢之道 上自天人性命之理 下至草木鳥獸之名 無不精硏而貫通 眞曠世之學也(≪近畿實學淵源諸賢集≫ 6, ?少眉山房藏? 附錄,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2002).
23) 子曰 : ‘多識於鳥獸草木之名’ 蓋物名, 亦在所講也. 夫天生萬彙, 人爲最貴, 故品物之性, 盡入於用.(위의 책)
24)苟名物之不明 則不獨致金根?杜之差 貽笑萬代 或錯飴伏神 誤食??者 有焉 所以資生者 反以?生 可不懼歟.(위의 책)
25)夫衣食者 人生之大端 故凡吉凶之禮 奉生送死之際 亦不出冠婚燕饗 襲殮祭奠之間 苟不講於?爵?羞 冠服堂室之際 則禮無所措矣.(위의 책)
26)我先人蕓圃先生 病東人之疎於物名 輒有收錄 然卷袞之間 散見雜出 門類不備 故余竊類聚群分 略成條貫(위의 책)
27)歲乙未 痲疹大行 時運極險 先生乃取馬氏麻科彙編 着心究會得其要領 先試之於家間而效 次試之於隣里而效 於是 遠近雲集 全活甚衆 其後有疾者 輒來問先生 辭曰病是死生所關 吾素不知醫 何以藥爲已而歎曰 救世濟衆 范文正禱醫之事也 若以岐黃小枝 或有一得之幸 則活一死命 亦濟人之一端也 窮檢醫方 參以已意 合藥以試 於是四方塡門多所責效(≪近畿實學淵源諸賢集≫ 6, ?少眉山房藏?附錄,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2002).
28)≪物譜≫에 수록된 한자와 한글의 2,500여 개의 어휘는 당시의 언어와 문자생활을 연구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9) 公則日與村夫野老 談說稗官野史 浮誕之?雜之辭(위의 책, ?祭伯兄例軒公文?).
30)急於救人 窮檢醫書 按方合藥 而不嫌其猥賤 勇於恤窮 手散千金 以與道路之餓者 而不顧?乏 是則誠天下之眞才 實學適用於當世者也 惟其識博而名益彰德盛 而人益附遠近 尊信從遊者衆 公則日與村夫野老 談說稗官野史 浮誕冗雜之辭(≪近畿實學淵源諸賢集≫ 6, ?少眉山房藏? 卷3 祭伯兄例軒公文,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2002).
31) 이원순, ≪조선 서학사 연구≫, 일지사, 1986.
32) 차기진, ?18세기 기호남인의 척사론과 그 성격?, ≪창해박병국정년기념 사학논총≫, 1994.
33) 愼後聃, ≪遯窩西學辨≫紀聞編.
34) 愼後聃, 위의 책.
35) ≪星湖集≫ 卷55, 跋天主實義. / ≪星湖僿說≫ 卷11, 人事門, 七克.
36) ≪正祖實錄≫ 正祖 16년 9월 12일(戊申)
37) ≪正祖實錄≫ 正祖 11년 4월 16일(癸丑)
38) 惠?李公 少讀書成文章 已而弗偶 屛居著書(≪餘窩集≫ 卷13, ?賀惠?李用休侍從臣父陞資序?).
39)이용휴가 40대부터 격은 別故는 다음과 같다. 40세였던 1747년에 母親 漢陽趙氏가 세상을 떠난 이후, 1761년(54세 때)에는 伯兄 李廣休(호:竹坡), 1763년(56세 때) 叔父이자 스승인 星湖 李瀷, 1766년(59세) 李秉休의 首弟子 松穆館 李彦진, 같은 해 12월 夫人 晋州柳氏, 1773년(63세 때) 外孫 落下生 李學逵(李承薰의 族姪), 1771년(69세) 아우 貞山 李秉休가 세상을 떠났다.
40) ≪正祖實錄≫ 正祖 2년 2월 14일(乙巳)
41)≪錦帶殿策≫ 天文策 : 地球臣雖未目睹其器 以今世所傳坤輿全圖推之 大抵或銅或木製焉 至圓之球 分割經緯之圖 而布列各國者也.
42) ≪與猶堂全書≫ 1-15 ?貞軒墓誌銘? : 竝地球?徑諸度 別有圖說 以示後生
43)鹿庵系에 해당하는 인물로는 李基讓(1744-1802, 伏庵), 洪儒漢(1726-1785, ?殷), 金성원(, 李寵億(1764-1822, 李基讓의 子), 李存昌(1759-1801), 洪樂敏(1751-1801), 黃嗣永(1775-1801), 李承薰(1756-1801, 蔓川), 丁若銓(1758-1816), 李潤夏(?-1793, 마태오), 尹有一(1760-1795, 바오로), 李檗(1754-1785, 曠菴, 요한), 丁若鏞(1762-1836, 俟菴,) 權相學 등이다.
44)차기진은 주어사 강학의 시기는 샤를르 달레의 정유년(1777)설(≪한국 천주교회사≫ 상)보다는 정약용의 기해년(1779)설(≪여유당전서≫ 1-15, ?녹암 권철신 묘지명?)이 유력하다고 하였다(≪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132쪽).
45) 車基眞,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128쪽.
46) 녹암계 인물들의 혼인관계를 정리하면 맨 뒤의 자료<신서파의 혼인관계>와 같다.
47)마테오 리치(Ricci,M., 利瑪竇)가 저술한 漢譯西學書로 상?하 2권, 모두 8편으로 나누어 174항목으로 되어 있다. 西士(서양학자)와 中士(중국학자)가 대화를 통하여 토론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가톨릭교리서이며 護敎書이다. 이 책의 내용은 첫째 우주만물에는 창조주와 주재자가 존재하여 끊임없이 만물을 安養하고 있으며, 둘째 인간 영혼은 불멸한 것으로 후세에 각자의 행실에 따라 賞善罰惡의 응징이 있음을 밝혔다. 셋째 불교의 윤회설을 배격하고 오로지 사랑의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고, 중국 古經에 이미 이와 같은 가르침이 밝혀져 있으니 공부하고 귀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48)그(이벽)는 종교 진리의 더 많은 증거와,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에 대한 더 철저한 반박과, 七聖事의해설과, 敎理問答과 福音聖書의 주해와, 그날그날의 성인 행적과 기도서 등을 갖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대강 알 수 있었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49)예수회 신부 판토하(Pantoja,D., 龐迪我)가 지은 카톨릭 修德書인 ‘七克大全’의 약칭으로, 1614년 중국 北京에서 7권으로 간행된 이래, 여러 번 판을 거듭하였다. ≪天學初丁殮≫ 총서에도 수록되었으며, 이를 상?하 2권으로 요약하여 ≪七克眞訓≫이라는 책명으로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의 ≪天主實義≫와 함께 일찍부터 우리 나라에 전래되어 연구되었고, 남인학자들을 천주교에 귀의시키는 데 기여한 책 중의 하나이다(≪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50) ≪與猶堂全書≫ 1-15, ?貞軒墓誌銘?.
51)每瞻天?歎曰 這樣大排布 何謂無主宰者 …… 決意而信之曰 眞理也正道也 苟非實事 書中所說 皆誣天耳 慢天耳 西士必不得涉海傳敎 當遭雷震死矣 遂權化門生 密與李檗等 晨夕往來 頗有熱心 …… 其意欲奉使入燕 受洗於西士也(≪黃嗣永帛書≫ 46.-49行)
52)朱明俊, ?天主敎信徒들의 西洋船舶 請願?, ≪교회사연구≫ 3집, 1981 ; 車基眞, ?朝鮮後期 天主敎 信者들의 聖職者迎入과 洋舶請來에 대한 연구?, ≪교회사연구≫ 13집, 1998.
53) ≪黃嗣永帛書≫ 49~50행.
54)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55)≪正祖實錄≫ 正祖 19년 7월 25일(甲戌). / 이러한 경우로 李家煥에 대한 처분이 부당함을 諫했던 大司憲 李義弼을 端川府로 定配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풍속을 바로잡고, 둘째 당파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正祖實錄≫ 正祖 19년 8월 4일(壬午) : 批曰 投李義弼於有北 豈或爲爾地者 一則矯俗 一則祛黨).
56)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세 사람은 노론과 공서계 인물로부터 사학의 삼흉으로 불려졌다(車基眞,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299쪽.)
57)星湖學派의 分岐에 대해서는 다음의 많은 연구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금장태,?安鼎福의 서학비판론?, ≪한국학≫ 19, 중앙대 한국학연구소, 1978 ; 車基眞, ?蔓川 李承薰의 교회활동과 정치적 입지?,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 車基眞, ?鹿庵 權哲身의 학문과 서학?, ≪청계사학≫ 1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1993 ; 김호덕, ?조선후기 실학파의 천주교 인식-성호학파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28,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93 ; 車基眞,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한편, 李佑成은 退溪 李滉을 추종하는 畿湖南人들을 嶺南學派와 구분하여 近畿學派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信西派와 攻西派의 구분을 星湖左派와 星湖右派로 구분하였다(?한국 儒學史上 退溪學派의 形成과 그 展開?, ≪韓國의 歷史像≫. 創作과 批評社, 1986). 나아가서 강세구는 順庵 安鼎福 系統을 성호학파의 正統으로 보고, 그 학통과 인맥을 연구하였다(≪星湖學統 硏究≫, 혜안, 1999).
58) 李佑成, ?內浦地域의 實學者?, ≪季刊 內浦文化≫創刊號, 內浦文化硏究院(禮山), 1997.
59)先生以英宗己酉六月二十九日卯時 生於安山之瞻星里 幼而多疾 年十二始就學於從祖星湖先生 時群兒之先受學者 皆出其右 先生發憤忘寢 刻意孜孜 不朞年已及於群兒 星湖先生見其作喜曰 此兒有才有心 後必大成 金石可期 其見知於師門 已如此(≪少眉山房藏≫附錄, ?行狀?).
60)이삼환의 저서로는 ≪少眉山房藏≫이외에 ≪少眉山房汲古?≫ 1권, ≪金三品≫ 1권, ≪百家衣≫ 1권 ≪木齋?言≫ 1권, ≪長川里鄕約≫ 1권 등이다. 이들의 저서는 ≪木齋?言≫ 1권과 ≪長川里鄕約≫ 1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近畿實學淵源諸賢集≫ 6권에 수록되어 있다.
61)先生生有秀眉 有文在手 曰文 與眉?許文正公之長眉 握文暗相符也 故別自號小眉 盖以家住蛾眉山下 而心慕眉老先生故也(≪少眉山房藏≫附錄, ?行狀?). ≪少眉山房藏≫은 원래 8책이었다. 그러나 韓致應(1760-1824, 호:?山)의 집으로 가져갔으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후에 주변의 인사들로부터 관련자료를 수집하여 겨우 3책을 만들 수 있었다.
62) 車基眞,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63)斥邪論의 의미는 범위 또는 시기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분류된다. 즉 좁은 의미로는 주로 邪學으로서의 천주교를 배척하는 것을 의미하고, 넓은 의미로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비판하는 이론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8세기에는 주로 좁은 의미의 척사론이 전개되었으며 서양의 曆法이나 天文學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척사를 주장한 주체도 星湖學派를 포함하는 畿湖南人 일부에서만 제기되었다(車基眞,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230쪽).
64)李丈又云 草木有生魂 禽獸有覺魂 人有靈魂 此其論學之大要也 此雖與吾儒心性之說不同 而亦安知其必不然也(≪遯窩西學辨≫, 紀聞編, 甲辰春見李星湖紀聞).
65)至其天主之說 昧者?焉 而今以經傳所載上帝鬼神之說觀之 則其說亦有?相契者(≪遯窩西學辨≫, 紀聞編, 己巳秋見李星湖紀聞).
66) 車基眞,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241쪽.
67) ≪星湖先生文集≫ 권26, 答安百順, 丁丑.
68)近觀西洋書 其說雖精? 而終是異端之學也 吾儒之所以修己養性行善去惡者 是不過爲所當爲 而無一毫福於身後之意? 西學則其所以修信者 專爲天臺之審判 此與吾儒大相不同矣(≪順庵先生文集≫ 권2, 上星湖先生別紙, 丁丑).
69) 南郊以事天有大事 必告上帝者 比自王朝之禮 非人人可得而行也(≪少眉山房藏≫ ?洋學辨?上篇).
70)今夫車駕之出 士女環堵 而不敢拜 雖有芹曝之誠 不敢有進獻 豈其心有不愛而然哉 誠以等威之截 而義所不敢 而況於天之高遠也哉 洋學則異於是 無男婦貴賤 一是皆以事天 爲名手?名香 口誦經言 朝朝暮暮 合掌頂禮 一如釋氏之事佛(≪少眉山房藏≫ ?洋學辨? 上篇).
71)如德亞村婦所生育者 不知何許幻妄男子 而輒目之爲天主 遂以十字架釘死之死 爲神化救人之一大案 …… 而事天是?天也 指幻妄而稱爲天主是誣天也(≪少眉山房藏≫ ?洋學辨? 上篇).
72)瑞泰間所謂雨粟 此亦得見形殼細小 不類穀種 恰似靑箱子雁來紅等草實 且未聞有作? 一嘗者則 其性味不可知 然旣有種以生者 則待稍茁可辨(≪少眉山房藏≫ ?答人雨粟辨?).
73)有天主學者 自中國蔓 及東國汚染頗多 先生憂其奇巧之說 必爲吾道之?賊 乃作洋學辨 以耶蘇之降生 堂獄之苦樂 白?之於荒誕 以斧鉞之加身 子孫之爲戮 恐之以禍殃 …… 正宗大王嘗謂樊巖蔡相國 曰聞李某闢邪心力 余甚嘉之 余欲以湖右一路 專付此人使爲肅淸 蔡相對曰 李某之闢邪 誠有之 草野賤? 有何風力專任一路哉
P. 윤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