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과 고대 언어.
『고리(高麗), 구려(句麗)』 고리(高麗): 반고환인(盤古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이전부터 내려온 즉, 옛날의 꾸리, 고리(高麗)쩍에 이미 제국왕정의 통치조직이 발달 되었던, 히말리야 산록(山麓) 北쪽에 존재하였던 동이족(東夷 族)의 나라.
『그 나라의 言語는 범어』
一名, 극락지국(極樂之國) = 천축(天竺)이라 하였다.
kuru. cf. kuru-rian= kuliya= korea: Ever Since or Before the era of the heavenly Kingdom.
Phan-Godh-Phan-ina, Phan-uhing, or the heavenly emperor Dhanu-Ra^ja.
the ancient sovereign empire state or in which country`s the ruling institution
was highly established for the sovereign empire state.
and the its country languahe was siddham languahe,
and the origin of the sovereign empire kukurian, kuliya, or the korea was derived,
from the tribe kuru, and located beyond the most northern ranges of the Him-a^laya mountiain. often known as the country of the everlasting paradise.
[Ref. the sanskrit Enl. Dict. p.294. Oxford]
현재 알고 있는 조선이라고 부르기 훨씬 이전에, 고리 라는 의미에 우리의 옛 국호(國號)가 먼저 인 것으로 보는 것이 당연할 것 같다.
그리고 예전에 쓰던 범어에 관하여 조금은 알아두는 것도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가라우, 가사, 가시, 가이, 가꾸마, 거시기, 가비리네, 깅께
기야, 기여, 구부리라, 구나, 노나다, 노나네, 나가라, 나마
나부다, 니나, 나가라, 나나라, 나나바, 도고, 다나, 다누, 두나
단디, 디지다, 디비라, 마나서, 마나, 무러바라, 메 똥, 머시기 머라카노, 바가, 바가라, 바다, 바라, 바라바, 바람, 비얄, 부랄
삐가리다, 시라네, 살키, 샅, 살래, 싸구리, 셔먼, 수태기마네
쎄빌리다, 쎄빌릿네, 시나, 세리비까, 세리뿌라, 아지매
아주마니, 아즈미, 여바라, 아주마이, 알로, 업디랑께, 업디라,
엎히다, 얼릉얼릉, 얼레 붙다, 얼러리, 조디, 카이, 하나, 히즈누바, 호시서.
당연히 외래어는 아니지만. 위의 범어를 한자로 표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의미도 제대로 표기할 수 있을까? 아마도 향언 을 쓰시던 나이 드신 분들을 제외하고는 윗말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조차도 힘이 들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발음을 한자로는 어떻게 표기 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개념만 비스무리(비슷하게)하게 적어놓았는데, 잘못 된 것이 셀 수도 없다.
향언의 개념을 한자로는, 그 의미를 얼 바르게 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언어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또 다른 언어인가? 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언어는 소리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의미는 바뀌지 않는다.
다만 의미는 다르지는 않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사상적 철학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우리만의 언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의도로 변한 것이 아니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고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점이 숨어 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 언어 속의 사고가 최상위에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옛말에는 쌍스러운 말이 전혀 없었다. 스스로 찾아서 이해하여 보시길 바란다.
표준어는 한자로 표기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한자를 표준어라고 하는 것의 개념으로 획일화 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무시한 채로 한자의 의미를, 오로지 지금의 한자사전만을 통하여서만 해석을 한다면, 제대로 된 우리의 것을 볼 수 있을까?
절대 불가하다는 것을 결론할 수 있다.
시간(時間)이 지나간 역사라고 한다면, 문자와 말이 지니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문화이다.
현실과 문화는 역사에 흐름에 따라서 바뀌어 변하는 것이며, 그것이 문화(文化)의 흐름이며, 문명(文明)이라고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한다.
본뜻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의도적으로 바뀐 흔적을 찾아내어도 그 사실을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물론 오래전의 역사와 현실감을 현재의 시간과 현실감으로 보며, 그때의 현실을 말하고자 한다면, 어떤 의미로써 받아들여야 할지 자신 있게 판단을 할 수가 있을까하는, 숙제는 안고 갈 수밖에 없다.
예전의 정신문화는 현재의 상황을 뛰어넘어서, 오히려 본을 받아야만 할 입장에 있는데, 오히려 역사속의 현실은 그와 정반대이니 분명 무슨 연유가 있을 것이다.
어제의 현실이 오늘은 전혀 같지 않은 것이며, 그것이 바로 진실이다.
하물며 수많은 시간이 지난 뒤의 현실을, 현재의 문화감각에 적용하려하는 것은 지나친 오류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시간이 흘러간 문자와 말이 가지고 있는 본뜻을, 그대로를 이해하고 전달할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간과 현실이 수없이 지나가버려서 말과 문자의 변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분명히 할 것은, 우리말의 의미를 먼저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아무리 지나가도, 언어속의 본뜻은 절대로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에 상황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전체의 뜻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곡과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말의, 원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되고, 어순(語順)도 S + O + V 로 규정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특히, 강조, 부정, 의문, 동의하는 부분에서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왜? S + O + V로 규정화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는지 무슨 까닭인가?
그다음은『성조(聲調) 궁, 상, 각, 치, 우, 반치, 반상 (소리의 고저로써 의미를 전하는 방법이 아님) 』까지 있다는 것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사실성은 결여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넘어간다면, 그야말로 본질을 벗어난 허언(虛言)만이 가득할 것이다.
梵語(실담 어)에 관하여서는 영국의 옥스퍼드사전 실담 어 영문판에 기록 되어 있는 것이 주된 내용이지만, 의미를 제대로 실지 못한 부분도 상당히 있다.
예를 들면 우담바라를 물을 원하다. 라고 해석한 부분은 이해를 달리한 부분이다.
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을 원하다. 라고 하여야 본의를 희석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물을 원할 수도 있다고 하여도, 이미 본의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풍부하게 표현하고 또 상황에 따라 길고 짧게 달리 전할 수 있는 언어, 또 감성과 이성이 조화롭게 섞여있는 경이로운 언어, 확실하게 그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잘 다듬어진 우리말이 혹시나 세상언어의 조상님이 아닐까하고 느껴본다.
그런데 누가? 왜? 표준어라는 것을 정하여서, 우리정통의 언어는 우리들의 손으로 찢어지고 발라져서 사라져가도록 하고 있나?
우리 조상이 만든 글이고 쓰던 언어인데도, 배척하고 소외당하여서, 그 의미를 잃어가고 퇴색 되어가고 있다.
『애쓰다.』 라는 말은 요즘 시각으로 본다면 노력하다. 아니면 수고한다는 말로써 대체하여 쓰고 있다.
본의를 알아보면 아기가 서다. 즉, 수태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향언 중에 애미나이(여자), 종 간나(남자), 라는 말이 있나보다.
수태함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그리고 수고한다는 말은 근래에 와서 쓰던 말로써 손이 고생했다 쯤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를 듯하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즉, 창자가 끊어진 것이 아니다.
김민기 씀